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 - 생생한 사진으로 만나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징용 잔혹사
이재갑 글.사진 / 살림 / 2011년 8월
절판


예전에 TV에서 우토로 마을에 대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우토로 마을은 인근의 군 공항 건설을 위해 강제징용된 조선인들 1,300명이 온종일 강제 노동으로 혹사당하던 중에 자연스레 형성되어진 마을이었다.
하지만 패망 후 공항 건설은 중단되고 그 동안의 노동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던 조선인들은 한 푼도 없는 처지인지라 전쟁이 끝나서도 그 곳을 떠날 수 없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조선인의 마을로 자리잡게 도었다. 그러다가 그 마을 전체의 부지가 한 부동산 회사로 넘어가면서 회사가 거기 사는 마을 주민 모두에게 강제퇴거 명령을 내렸고 그로 발생한 우토로 마을 주민들의 애환과 그 도움의 호소를 다루었던 프로그램이었다.
수 년에 걸친 가혹한 강제 노동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그들을 거기다 그렇게 냉혹하게 몰아내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멀쩡히 우리나라 땅에 잘 살다가 어느 순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3~4백 미터 지하의 갱도에서 석탄을 캐거나 때로는 단바의 광산에서 처럼 겨우 30CM의 좁은 갱도에 몸을 집어 넣고 망간을 캐거나 우토로 처럼 공항을 건설하거나 일본 자국민에게는 시키지 않을 그런 고되고 위험한 막노동일을 하면서 강제징용 당한 우리 조선인들이 흘린 눈물과 피가 저 일본 땅에 참으로 가득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 씁쓸하기도 이를데 없었다. 그러다 그 후, 단바 망간 기념관에 대한 소식을 TV에서 또 보게 되었고, 그 때 나는 그 고통의 역사적 현장을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힘으로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서 다시 일본에 간다면 나 역시 저렇게 고통의 현장들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역사가 새겨놓은 상흔들을 겪고 기억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막상 그 생각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기는 어려웠다. 일단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었고 거기에 대해 유용한 정보를 얻기도 내 힘으로선 벅찼기 때문이다.

그래서 뭔가 적절한 도움을 얻을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차에, 이렇게 사진작가 이재갑의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그야말로 후쿠오카로 부터 오키나와까지 일본 전역 곳곳에 아로 새겨진 강제징용당한 우리 조선인들의 상처와 애환의 현장을 다루고 있다. 비록 그 대부분 일본이나 우리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며 그저 무관심과 망각 속에 버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진 속 저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들이 캐냈던 석탄 더미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 처럼 절대 지워지지 않을 뚜렷한 역사적 존재로 남아있는 그 현장을 말이다.

그 대부분의 현장은 "우리의 언어는 아우슈비츠가 어떤 장소라는 것을 표현할 수 있는 범주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조너선 웨버가 말했던 것 처럼 언어화가 불가능한 그저 망연히 전해져오는 그 곳에 깃든 상처와 고통에 오롯이 젖을 수 밖에 없는, 리오타르가 말했던 바와 같이, '트라우마'의 공간들이다. 지은이는 답사를 통해 바로 이러한 트라우마의 공간에게 그동안 잃어버렸던, 그렇게 지워진 목소리들을 다시금 찾아주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사진을 하나의 업으로 삼게 된 것은 다름아닌 '우리 이웃들의 삶이 때로는 우리 삶을 지탱한다'는 말이 내포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싶다는데 있었는데 작업이 치열해질 수록 바로 그 지탱하는 이웃들의 삶이 무엇보다 역사적인 것이며 오히려 한국전쟁과 일본 강점기 처럼 무엇보다 거센 폭력에 노출되고 그로인한 아픔과 상처로 점철된 역사속의 이웃들이 현재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뿌리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잃어버린 우리들의 이웃인 그들의 눈물과 애환이 우리네 삶으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에 그들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주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아는 것과도 같아서 그는 일본 전체에 걸친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의 트라우마적 공간을 이렇게 하나의 책에다 담으려 하는 것이다.

책은 후쿠오카, 나가사키, 오사카, 히로시마, 오키나와 각각 한 챕터씩 할애하여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장의 처음에는 이렇게 답사한 곳의 위치가 나와있는 지도가 있다. 다소 대략적이라는 게 아쉽지만 이 책이 답사기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동안 망각 속에 버려졌던 강제 징용 당한 조선인들의 삶을 다시 환기시키는 데 있음을 생각하면 수긍이 간다.

그렇다고 지은이가 단순히 과거의 아픔을 환기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진 작업이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임을 상기한다면 아마도 당연하겠지만 그는 그 아픔이 어떻게 현재로 연결되고 있는지, 지금 현재의 우리에게 그 아픔이 어떤 의미인지 또한 아울러 담는다. 그러한 측면이 무엇보다 개인의 기억함과 일본 사회의 망각함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즉 지워지고 있는 역사를 복원시키려 노력하는 개인들과 과거의 상흔과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지움으로써 이제는 전혀 다르게 변해버린 일본 현재의 모습 사이의 대비인 것이다. 그렇게 기억하려는 개인과 망각시키려는 사회의 대조를 통해 과거를 이어받는다는 것, 아픔을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로새기려 한다. 무엇보다 이 사진이 그것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사진은 강제 징용 당한 한 조선인의 무덤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들이 노역 끝에 죽어도 묘비를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조선인들의 무덤은 하나의 돌로 표시할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의 폐허를 지우고 과거의 범죄적 흔적을 지운 현재 일본의 변모해버린 모습에 비해서 이 희생자들의 무덤은 저렇게 제대로 된 표식하나 없이 그저 돌 하나가 된 채 그것도 풀 숲 어딘가 보이지 않는 곳에 무심하게 버려져 있는 것이다. 마치 현재의 일본이 그들의 범죄적 과거를 지우기 위해 자꾸만 망각 속으로 떠밀고 있는 듯한 형국과도 같다. 그 곳을 찾아오는 이는 저 할아버지 처럼 그것을 기억하는 개인들 뿐이다. 할아버지는 거기서 신세타령가를 부른다.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어째서 숯 파러 왔느냐"로 시작되는 그 타령은 마치 망자의 혼이 다시금 흘러나와 자신의 목소리로 부르는 것 같다. 말이 아니라 노래, 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죽은 자의 빙의된 목소리라는 점에서 저 돌 하나로 남은 무덤은 그야말로 절대 치유될 수 없는 상처로서의 트라우마의 공간이 된다. 그렇게 빙의라는 점에서, 그 상처를 되새기고 있는 것이 바로 나라는 점에서 그 곳은 나와 연결된, 내가 속한 공간이 된다.

여기서 그 트라우마 공간과 연결된 나를 되새김은 비단 내 국적, 내 민족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아우슈비츠가 비단 유태인들만의 비극이 아니라 인류가 인류에게 가할 수 있는 극한의 폭력이 가져온 비극을 상기시키듯, 여기 하나의 돌 무덤에서 환기되는 것도 다른 나라 백성이라고 해서 마구 가해지는 제국주의적 폭력과 착취가 가져오는 커다란 비극인 것이다. 지금 일본이 지우고 있는 것은 바로 그 폭력과 착취의 증거들인 것이다. 지워진 것은 언제든 다시 반복될 수 있다. 따라서 그 결과로서의 아픔, 새겨진 비극을 기억함은 바로 그 반복의 연쇄를 끊는 일이 된다. 초래될 비극의 도래를 지연시키는 일이 된다. 바로 이 사진에 나오는 벽에 쓰여진 글 처럼 말이다. 우토로 마을을 돕기 위해 사이타마에서 왔다는 이 누군가의 글은 이러한 기억함의 궁극이 종래에는 어디에 도달하게 되는지 잘 보여준다. 지은이가 답사의 마지막 장소인 오키나와에 있는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들이 무덤인 '한의 비'에서 느끼는 것도 그것이다. 문득 거기 묻혀진 조선인들 중 하나가 자신의 할아버지와 같은 고향이었음을 보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격한 감정에 빠진다. 그는 이렇게 그 감정을 고백하며 답사를 맺는다.

"지난 1996년부터 일본 관련 작업을 시작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리고 나름의 이유를 만들며 나를 합리화하고 이겨나갔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날들과 달랐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격한 감정이 치솟고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마치 이 작업의 당위성이 나의 운명인 듯 기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p.338)"

이 치솟는 울분, 아픔, 눈물이 바로 트라우마적 공간과의 만났을 때의 반응이며 그것은 모두 저 아픔을 당한 자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자각에서 나온다. 그렇게 나와 연결되고 내가 속해 있는 바로 그 곳의 존재라는 깨달음 말이다. 우토로 마을을 도우러 온 사이타마에서 온 사람이나 일본의 최남단 오키나와에서 결국 울어버린 지은이나 트라우마적 공간 앞에서 느끼는 것은 똑같다. 이들이 모두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이다. 그들의 고통이 내 고통이며 그들의 버려짐이 바로 나의 버려짐이라는 자각이다.

우리 할아버지도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 중 하나였다. 어쩌면 내가 정말 이 아픔의 현장들을 둘러볼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도 유년 시절 약주에 취하시면 내내 들려주시던 그 고통과 아픔이 절절했던 징용 시절의 기억이 어디선가 남아있기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분명 그 곳에 이르면 지은이와 비슷한 감정을 겪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많은 트라우마의 공간들을 내 몸 여기저기에 새겨놓고 돌아오게 될 것이다. 잊지 않는 것. 그 어디든 폭력에 노출되고 사회의 강압에 쉽게 지워질 수 있는 자들은 모두다 내게 속한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 아마도 그 새겨진 상처들은 그렇게 호소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나니 언제든 빨리 그 곳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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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진 살인사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애초의 호기심은 이것이다.  긴다이치 코스케는 왜 말을 더듬는 것인가? 

 

  그는 흥분하면 자주 말을 더듬는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하도 자주 말을 더듬는 바람에 형사마저 어느새 거기에 전염되게 만들어 버린다. 말을 더듬는 버릇은 머리를 벅벅 긁는 버릇과 함께 긴다이치 코스케를 형성하는 두 가지 커다란 특징중 하나이다. 머리를 벅벅 긁는 버릇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대표적 행위 중 하나이고 말을 더듬는 것은 사람들로 부터 업신여김을 야기하는 대표적 행위 중 하나이다. 모두 천재적 명탐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신체적 행위인 것이다. 더구나 그는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실력파 엘리트다. 마치 그러한 행위들은 그 자신의 현재 신분과 과거의 경력을 모조리 지워버리려는 몸짓으로도 보인다. 왜 요코미조 세이시는 이러한 버릇들을 코스케에게 부여한 것인가? 어쩌면 그 까닭이 간단할 수도 있다. 그 행위들은 사람들에게 경계심을 허무는 작용을 하니까. 명탐정이라는 아우라 때문에 혹시나 거리감을 가지게 될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그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들까지 포함하여 그 모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그러한 버릇들을 주었을 수도 있다고. 하지만 이건 너무 단순해 보인다. 어쩐지 그 행위들은 나에게 롤랑 바르트가 말했던 '푼크툼'으로 보인다. 그저 심상하지만은 않은 뭔가 내밀한 사연을 간직한 듯한 비밀스런 움직임으로 보인다. 분명 거기에 뭔가 있다. 내 머리가 그렇게 반응하고 있다. 자, 이것이 내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왜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말을 더듬게 만들었는가? 

  (그런데 나는 김전일 처럼 명예를 걸만 할 명탐정 할아버지가 없어서 곤란하구나...) 

 

   프로이드에 따르면 말더듬은 무의식이 바라는 것과 이성의 통제 사이에 일어난 긴장의 외상적 증후이다. 즉 그것은 내부의 불일치가 빚어내는 밖으로의 드러남이다. 프로이드의 말대로라면 긴다이치 코스케의 무의식적 수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이 그러한 말더듬을 낳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그가 무의식으로 바라는 것과 이성으로 지향하는 것과의 차이가 그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성으로 지향하는 것은 바로 범죄의 해결이 될 것이다. 그의 명석한 추리는 분명 이성의 영역에서 행해질 것이 틀림 없으니. 그렇다면 그것과 정반대의 것을 무의식이 원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긴다이치 코스케의 무의식은 그러한 범죄의 해결을 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일까? 여기서 또 하나 환기되는 것은 이제는 유명해진, 범죄를 막는데 있어 그가 보여주었던 무기력한 모습이다. 그는 명탐정 역사상 범죄 예방에 있어서는 가장 무기력한 탐정이기도 하다. 어떤 땐 일부러 범죄를 방치하기도 한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될 정도의 이 무기력은 또 어찌 된 연유란 말인가? 아, 우리는 물어야 할 질문이 많다. 그러나 그 질문은 결국 한 가지로 모이게 된다. 그의 말더듬은 무의식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주저함이다. 이성은 곧바로 해결을 원하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는 무의식은 계속 해결을 지연시키려 한다. 때문에 범죄를 막는데 있어서도 무기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하나로 모이는 것이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무의식이 범죄의 해결을 원하지 않는다는 그 근본적 원인 때문이라는 것으로... 

 

 

 

  다시금 '혼진 살인사건'이 돌아왔다. 

 

  이제는 국내에서도 일본 최고의 명탐정으로 손꼽히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전설적 데뷔작으로 웬만큼 유명해졌다. 70년대적 번역투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동서판과는 달리 지금 현재의 어법으로 쓰여진 번역이라 이제 좀 더 소설속의 내용이 확실히 다가올 수 있게 되었다. 안 그래도 '혼진'이라는, 에도 시대의 지방 영주들이 반란 예방 차원으로해 인질이 되기 위해 막부로 가는 도중 들르는 여관이 사건의 주무대이기에 그 일본 전통 가옥 구조에 대한 제대로 된 묘사가 없으면 독자 스스로 사건을 인식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해서 더욱 정확한 번역이 요구되던 차에 이렇게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돌아와 주었으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여기엔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았던 두 개의 단편 또한 부가되어 있다. 하나는 '옥문도'와 '팔묘촌'등 그의 초기 걸작들과 비슷한 시기 발표된 '흑묘장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 발표는 그와 비슷한 시기였으나 개작은 55년에 이루어진  '도르래 우물은 왜 삐걱거리나'이다. 누가 선집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세 작품이 이렇게 묶이게 된 것은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세 편이야 말로 왜 요코미조 세이시가 왜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말더듬는 버릇을 주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할 만한 단서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왜 요코미조 세이시는 말더듬을 주었는가? 이제 이것을 본격적으로 이야기 해 보자. 

  (명탐정 코난 식으로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고 외치고 싶지만 그만한 자신감이 내게는 없다.) 

  거기서 우선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시기다. 긴다이치 시리즈가 무엇보다 2차대전 종전 후에 나왔다는 사실이다. 전쟁의 패배는 많은 변화를 몰고오기 마련이다. 특히나 이제 그들을 지배할 미국에 의해 그들은 급속도로 서양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될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또한 그 누구보다 전통적 가치가 지배하는 나라다. 특히 그렇게 급속도로 재편되는 와중에도 일본 지방의 촌락들은 예전부터 내려오던 전통적 관습들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그렇게 주요 도시들을 제외한 일본 지방의 촌락들은 서구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변화의 바람과 늘 고수해 온 일본 전통 가치관들이 서로 칼날이 부딪히는 전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코미조 세이시는 바로 그 현장을 목도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그의 생각이 정말 어떠했는지는 내가 가진 정보 인지의 한계상 알 수 없으나 요코미조 세이시가 서양의 모던적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껴안았던 동시대의 작가 에도가와 란포와는 달리 일본 전통 사회를 작품의 주요한 배경으로 삼은 것을 보면 아마도 바로 그 변화의 현장을 작품에다 담는 것이 그 자신의 사명으로 여긴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렇게 보면 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가 주로 일본 지방의 촌락인지도 잘 이해가 간다. 

 

  그러니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 있어서의 범죄란 바로 그 변화와 전통의 고수라는 두 개의 거대한 바람이 맞부딪혀서 태어난 산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범죄의 성격은 특히나 '옥문도'에서 잘 드러난다. 에도 시대 범죄자들의 유형지였던 '옥문도'는 그 오래된 역사 만큼이나 전통적인 질서가 강하게 뿌리내린 사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곳 역시 전쟁이 초래한 변화의 바람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결국 그 지배 가문의 대를 이를 장자가 전쟁에서 죽고 만다.  때문에 옥문도의 전통 체제 질서는 큰위기에 봉착한다.  바로 이렇게 '옥문도'는 전쟁이 몰고온 변화의 바람에 의해 위기를 맞게 되는 일본 전통 사회의 모습이라는 요코미조 세이시가 천착하는 전형적 공간이었다. 결국 범죄는 그 위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데 긴다이치 코스케가 그 옥문도로 갔던 까닭도 무엇보다 전우이기도 했던 그 장자가 자기가 죽으면 자신의 여동생이 살해당할 것이라며 그녀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옥문도의 내용을 얘기하는 것은 바로 옥문도가 그러한 상황의 관찰자 역할로 내보내진 긴다이치 코스케가 어째서 말더듬의 버릇을 가지게 되었나 하는 것에 대해 가장 확실한 대답이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요코미조 세이시가 긴다이치 코스케를 그리로 보내는 것은 사실 범죄를 미연에 막고자 해서가 아니다. 최종적으로 코스케가 원래 이루고자 했었던 목적이 모조리 다 실패하고 마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다면 세이시의 본래 목적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혼진 살인사건'에 프롤로그 처럼 붙여진 부분에서도 보여지듯이 - 거기 '혼진'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설로 쓰고 있는 작가가 예전 그 사건이 일어난 혼진으로 걸어가 다시금 돌이켜 보는 것 처럼 - 그 변화가 진행중인 현장을 관찰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세이시가 이렇게 관찰에 더 중점을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서양 모던의 여파에 너무 크게 반응했던 사가구치 안고 같은 작가는 스스로 '무뢰파'가 되어 모든 일본 전통의 윤리적 가치를 부정하기도 했고 란포 역시 적극적으로 서양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상황이었지만 세이시는 아무래도 안고 처럼 극한으로 치닫거나 란포 처럼 서양의 가치관을 주저없이 껴안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러니까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요코미조 세이시는 섣불리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일까? 

 

  바로 그 이유를 추정할 수 있는 단초가 이 '혼진 살인사건'에 모여진 작품집에 들어있다. 여기에 수록된 세 단편이 기술하고 있는 사건엔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간통'이다. 초기 작품들에서 요코미조 세이시가 이렇게 '간통'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여기에 결정적으로 그를 주저하게 만드는 이유가 들어있다고 나는 보여진다. 일본에서 간통죄는 1947년 폐지되었지만 그 때까지는 오로지 여성들만이 간통죄로 처벌되고 있었다. 한 편, 전쟁으로 인해 남자들이 모두 군대에 간 터라 그 공백으로 인해 전후 많은 여성들이 간통으로 인한 처벌의 위험을 안게 되었다. 그렇게 간통죄의 문제가 전후 일본의 중요한 사회 문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47년 간통죄가 폐지된 것은 그러한 상황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시의 세이시가 무엇을 우려했는지 이제 이해가 된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이 간통의 범람과도 같은 성적 문란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단편적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그가 본 것은 일본 사회가 전통적으로 고수하고 있던 가치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 어떠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정확히 그 상황의 목격이 세이시에게 주저를 낳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관찰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할 수 밖에 없었고 가장 무기력한 탐정이라는 오명의 뒤집어쓰면서까지 보다 확실한 증거를 잡기 위해서 범죄의 해결을 지연시켰던 것이다. 이는 스스로 어설픈 상황에서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미 바라보았던 탓에 가지게 된 당연한 숙고의 자세이기도 했다. 바로 그 '숙고의 자세' 때문에 그는 변화 - 어쩌면 그 궁극에 가서는 비극을 가지고 올지도 모르는 잠재적 위협의 존재로서 - '여성'을 경계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혼진 살인사건'의 세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이 왜 작품이 발표된 시간에 따라 서로 다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인지의 의미이며(이 역할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스포일러가 되므로 안타깝지만 생략하기로 하겠다.) 왜 긴다이치 코스케가 그 소녀들을 구하러 옥문도로 갔으면서도 정작 그녀들을 모두 죽음으로 방치해 두는 것인지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로서 간략하게나마 긴다이키 코스케가 왜 말더듬의 버릇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드러났다고 믿는다. 뭐, 나만의 억측에 불과한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시 결론지어 말한다면 긴다이치 코스케가 그러한 말더듬의 버릇을 가지게 된 것은 요코미조 세이시가 당시 변화의 와중에 있는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데 있어 되도록 신중한 숙고의 자세를 취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세이시가 긴다이치가 정말 해주길 원했던 것은 범죄의 해결이 아니라 가급적 그것을 지연시키면서 까지 보다 확실한 선택이 가능할 수 있도록 제대로 된 관찰이었다. 바로 그러한 긴다이치 코스케에 대한 세이시의 바람이 '말더듬'이라는 신체적 행위로 표현되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말더듬 자체가 바로 코스케가 해결에 이르기 까지의 과정을 그대로 닮아 있지 아니한가? 말더듬이야 말로 보다 확실한 언어를 밖으로 드러내기 위한 거기까지 이르기의 과정인 것을.  

  

 

  지금까지 발간된 긴다이치 코스케를 한데 모아 찍어본 사진. 발간된 권수는 정확하나 그러나 잘 보면 중복된 것이 있다. 당시 세글자의 제목을 가진 긴다이치 코스케의 시리즈가 연달아 나왔었는데 실수로 착각하여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고 사 버렸기 때문이다. 

 (혹시 삼수탑을 저처럼 실수로 구입해서 두 권 가지신 분은 없을까요?  그러면 서로 교환해서 윈-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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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의 운명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고의는 아니지만 - 구병모 소설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구병모 작가의 중심은 '몸'이다.

 

 체제 혹은 관계로 인해 가중되는 모든 부하(load)는 신체적 고통으로 곧바로 전이된다. 그 고통으로 야기되는 예민한 감각이 문장의 기본적인 결을 이룬다. 그것이 사회적 약자로서의 자각을 일깨운다. 그리고 그 약자만을 골라 내리누르고 있는 점철된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대항해 선명한 날을 세우도록 만든다. 구병모 작가는 개인적으로 근래에 읽어본 작가들중 가장 정직하고 또한 강하다고 생각된다. 상처 바라보기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꿋꿋하게 응시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 상처를 드러냄에 있어서도 중도에 멈추지 않고 집요할 정도로 모조리 까발려 버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상처를 이처럼 끝까지 파헤치는 것은 강하지 않으면 하기가 어렵다. 강함은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이해하려 하기에 강한 것이다. '고의는 아니지만'은 상처를 이해하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응시하는 시선을 보여준다. 나는 구병모 작가와는 이 '고의는 아니지만'으로 처음 만났지만 이런 까닭으로 지금 내게 있어서는 가장 매력적인 작가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표지에는 단촐하게 소설이라고만 나와 있으나 사실은 소설집인 이 '고의는 아니지만'은 다 마음에 드는데 딱 하나가 아쉽다. 바로 수록된 작품의 순서이다. 소설집은 2009년 부터 현재까지 발표되거나 미발표된 작품들로 묶여져 있는데 어떤 기준으로 순서가 그렇게 정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왕이면 시간순으로 배열되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작품을 읽어보니 작가가 작품마다 그 때의 사회와 분명히 서로 조응하고 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고의는 아니지만'은 비유하자면 일종의 투쟁기이다. 그 시간의 지층마다 상처로 절망으로 작가를 익사시키려 했던 사회에 굴하지 않고 저항과 희망으로 열심히 자맥질해 온 기록이라는 것이다. 언어는 그의 호흡이었고 문학은 그의 무기였다. 더 큰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그는 더 크게 헤엄쳤고 그렇게 이 소설집은 헤엄친 거리만큼 더욱 넓고 깊어진 성찰의 여정과도 같다.

 

 이건 작품을 시간순으로 배열해 보면 바로 드러난다.

 

 2009년에 발표된 '재봉틀 여인'과 '곤충도감'을 개인 차원의 얘기로, 뒤이은 2010년에 발표된 '마치... 같은 이야기'나 '타자의 탄생'은 하나의 대상으로서의 '사회' 자체에 대한 얘기로, 그 후 2011년에 발표된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는 '그런 사회 속에서의 개인으로 살아가는 나'에 대한 얘기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월이 흐를수록 그 시야는 넒어지고 있다. 이건 물론 단순히 바라보는 지점들이 보다 더 멀리 볼 수 있는 쪽으로 옮겨간다는 정도의 의미는 아니다.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사회가 숨기고 있었던 진실에 대한 분명한 자각 끝에 옮겨가는 이동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시야가 넓어지게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깨달음의 결과인 것이며 그 깨달음이란 다름아닌 사회가 은폐한 진실을 다시 찾아옴으로 이루어진다.

 

 소설의 여정은 그 되잧아오는 진실들이 더욱 커지게 되는 것과 같다. 사회로 부터 익사당하지 않고 저항하려는 자아 역시 그 되찾은 진실에 양육되어 무럭무럭 자란다. 몸의 비만은 자아의 비만이다. 그리고 굴하지 않는 의지의 비만이다.

  

 가장 먼저 발표된 '재봉틀 여인'과 '곤충도감'을 일단 들여다보자. 

 

 이 두 이야기는 모두 개인과 개인이 만나는 관계는 어느 한 쪽이 절멸되지 않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재봉틀 여인'에서 사회가 가하는 구조적 폭력을 피하기 위해 보다 무리없이 섞일 수 있도록 자신의 감정선을 잘 꿰메두고 있었던 소년은 결국 원하는대로 그 사회와 하나가 되려는 결정적인 순간 갑작스럽게 결별을 당하고 만다. '곤충도감'의 주인공 남녀는 서로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만 한 쪽이 파열해 버린다. 이렇게 모든 관계는 하나가 되려는 순간 어느 한 쪽이 파국적 결말을 맞아버린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설은 분명 그 원인이 개인에게 있다고 하지 않는다. 바로 사회 자체가 그 파국의 원흉임을 드러낸다.

 

 어떻게? '재봉틀 여인'의 소년을 보자. 그가 그렇게 감정선을 꿰매야 했던 것은 선생님의 폭력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어른들의 사회 그 자체를 대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소설의 첫문장에서 작가는 일부러 '어른들의 관용어' '아이들'이라는 표현을 통해 어른과 아이의 언어적 대조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의 편가름이며 그렇게 소설 속 개인들이 단순히 개인들이 아닌 그 속한 무리의 대표로 보게 만드는 장치이다. 이 장치는 선생님의 폭력을 어른 일반의 폭력으로 치환시킨다. 그 치환을 통해 선생님의 자리는 라캉식으로 말하면 우리 사회 질서를 그 근저에서 구조화시키고 지배하고 있는 아버지의 자리로 이동한다. 선생님의 폭력은 소설 속 교장과 선생님의 관계에서도 드러나듯이 우리가 속한 사회적 소통의 진실한 단면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또한 대상이 아이들이기 때문에 양육이다. 그들은 길러진다. 가르치는 어른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소통하도록! 폭력이다. 폭력은 일방적이다. 거기에 대화의 차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배려와 이해의 차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가하는 자의 일방적 명령과 강요가 있을 뿐이다. 한 쪽은 말하는 입만 있고 듣는 쪽은 오로지 귀만 있는 관계. '재봉틀 여인'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소년은 폭력으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그저 재봉틀로 기울 수 밖에 없다. 소년은 점점 진정한 자신의 신체를 잃어가고 어른의 폭력에 길들어진 변형된 신체가 된다. 그러면 소설에서 과연 재봉틀 여인의 역할은 무엇인가? 소설에서의 개인이 프로이트적 오디이푸스 삼각형에서 한 꼭지점을 맡고 있는 인물들의 상징으로 유형화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 재봉틀 여인은 물론 어머니를 표상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전통적인 가부장제 사회에서 아버지로 부터 폭력을 당한 아들에게 위안은 늘 어머니 몫이었다. 그녀는 어루만져주고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역할을 했다. 거기서 연고로 상처가 봉합되었듯이 재봉틀 여인은 소년의 상처를 재봉틀로 봉합한다. 재봉틀 여인이 바로 어머니의 상징이라는 것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여기서 소설의 진실이 나타난다. 

  

  이 소설은 얼핏 환상 소설의 외형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진실은 한 가정내에서 자녀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사회적 소통의 진실된 단면이기도 한 폭력을 말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일차적 사회화 임무를 맡고 있는 가정의 원형적 모습이 바로 이와 같은 폭력 유전의 핵심적 공간임을 고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여기서의 폭력은 어디까지나 소통, 즉 의사 교류의 유형으로써의 폭력이다. 가정에서 아들은 흔히 아버지의 권위로 상징되곤 하는 사회 질서를 준수할 것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강요당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폭력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있지 않나?'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물론 어머니는 아들을 보호하고 위안을 준다. 하지만 그 위안은 어떤 위안인가? 어떤 치유인가? 그것은 그저 일시적인 유예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위안과 치유가 아버지의 폭력이 재차 반복되는 것을 막아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시키려 한다. 그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 자식으로 해야 할 도리, 혹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참아라는 등의. 그런 식으로 어머니는 아버지 질서의 전복을 꿈구는 아들의 기를 죽여 놓는다. 일방적 폭력의 강요로 존속하는 가정의 생명을 그런 식으로 연장한다.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는 파트너인 것이다. 경찰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나쁜 경찰과 좋은 경찰로 이루어진 파트너 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안과 치유는 어디에도 없다. 다른 대안도 없다. 일방적으로 강요된 방식 속에서 그저 또 하나의 아버지로 되어 버리는 것 말고는.

 

 아들은 자신의 자아를 잃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작가가 이 소설에서 고발하는 하나의 원형으로써의 가정이 가진 진실이다. 아들의 진정한 자아와 아버지의 질서는 양립 불가다. 아버지의 복제가 되는 것 말고는 그에게 다른 선택은 없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감정을 잃어버린다. 더이상 자신의 감정으로 무엇을 느껴볼 수가 없다. 이만큼 자신의 순수 자아를 상실해버렸다는 걸 잘 나타내주는 게 또 어디있을까? '재봉틀 여인'은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양립 불가능한 이유가 애초부터 가정 자체에 뿌리박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가정은 또한 사회의 일차적 사회화 기관이다. 그렇다면 사회 자체가 오로지 그 폭력적 소통 말고는 다른 방법은 모르기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속에서 소년 소녀들은 자신들의 순수한 자아를 희생당한다. 이러한 희생을 막고 그들을 이러한 일방적 폭력으로 부터 해방할 길은 없을까? 그것이 바로 뒤이은 작품 '곤충도감'의 화두이다.

 

 소설의 남자는 사회로부터 비밀리에 레이저로 곤충을 주입받는다. 이 곤충이 바로 소년 소녀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된, 순수 자아를 상실하게 만드는 사회 질서를 의미하고 있음은 달리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의 문제는 분리불가능성이다. 이식된 존재를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하나의 것에 오래도록 길들여지게 되면 과연 그것이 내 천성인지 아니면 단순히 길들여진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아이들도 그렇다. 일방적으로 오래도록 가치관을 주입받으면 어느 것이 진짜 자신의 판단이고 어느 것이 강제로 이식된 가치관인지 가려내기가 어렵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특별히 '아비투스'라 말했다. 사회화에 따라 우리가 받아들이게 된 사회적 관습들이 마치 내 본성처럼 달라붙어 또 하나의 신체처럼 떼어내기 어렵게 된다는 이야기다. 아비투스가 되어버린 신체로 부터 해방되는 길은 오직 하나다. 그것은 사회 관습이 켜켜이 코드화되어버린 신체 자체를 절멸시켜 버리는 것. 그 뿐이다. 폭발, 파열. 과연 이 말 그대로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의 신체는 산탄총을 맞은 수박처럼 파열해 버린다.

 

 그런데 그 상황이 흥미롭다. 하필이면 그가 파열하던 순간이 성관계를 나누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남녀 사이의 일대일 성관계야 말로 개인의 주체성이 가장 명확히 형성되는 순간이라 한다. 즉 한껏 고양된 남자의 주체성이 외부의 것으로 철저히 이식되고 변형된 아비투스적 신체를 깡그리 날려버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파열되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같이 있던 여자는 죽음이 아니라 남자가 해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두 작품에서 작가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은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공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사회의 구조적 폭력이다. 타자와의 대화, 타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들어설 수 없는 공간으로써의 사회. 두 작품은 그 형상을 드러낸 것과 같다. 이제 관측은 좀 더 깊은 곳을 향한다. 그 다음 작품에서 시점이 사회 자체에게로 옮겨가는 것은 작가에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소설집에는 가장 첫머리에 나오나 2010년의 작품인 '마치... 같은 이야기'는 사실은 지금 한국 사회를 그대로 드러내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오로지 실용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비유법이 금지되고 오로지 직설법만 통용되는 소설 속 공간은 MB 시절 표현의 자유 침해의 대표적 사례로 떠들석했던 '쥐벽서' 사건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G20 포스터에 쥐를 그렸다는 이유만으로 형사기소까지 되어버렸던 사건을 그 그림을 그렸던 강사는 단적으로 상상력과 권력과의 싸움으로 정의내린 바 있다. 바로 이 상상력과 권력이 이루는 대항관계가 그렇지 않아도 '마치.. 같은 이야기'의 핵심이다.

 

  상상력은 소통의 차원을, 권력은 일방적 강요의 차원을 의미한다. '재봉틀 여인'에서 드러났듯이 아버지에게 체화된 사회의 권력은 그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만 상대편이 반응하길 원한다. 그것이 권력이며 소통의 거부란 권력의 본질이기도 하다. 이는 주인공 시인이 입구에서 만나게 되는 '마치'라는 비유법적 공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카페와 권력자가 움틀고 있는 직설법적 공간의 상징인 시청과의 대비적 묘사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마치'의 공간은 여러 사물들이 이리저리 뒤섞인 곳인 반면 시청은 반듯하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 구획된 공간이지 않았던가? 이러한 뒤섞임이 소통을 의미하고 반듯한 구획이 권력을 의미한다는 것은 일부러 다시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작가는 '쥐벽서' 사건이 하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2010년 현재의 권력에 의한 소통 부재의 한국을 소설을 통해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바로 뒤이은 '타자의 탄생' 역시 마찬가지다.

 

  이 소설 또한 당시에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가져왔다. 소설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구명에 갇혀 빠져나올 수 없는 남자는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와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고공크레인에서 홀로 농성을 벌였던 김진숙씨를 상징하고 있다. 어떻게 달리 볼 수가 없다. 소설 속 남자가 그랬듯이 김진숙시가 그 고공크레인에 구멍에 빠진 남자처럼 갇혀 있었던 이유도 권력이 소통을 거부했기 때문이었으니까. '마치... 같은 이야기'가 소통 부재를 가져오는 사회의 일방적 권력을 드러낸다면 '타자의 탄생'은 그 권력이 이제 어떤 비극을 낳게 되는지 보여준다. 그게 바로 구멍이다. 김진숙씨나 소설 속 남자 처럼 개인들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가두는 '구멍'이 권력에 의해 사회 곳곳에 마구 생격나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구멍들이 생겨나는 것에는 어떤 이유도 정해진 규칙도 없다는 것이다. 그건 권력의 필요에 따라 홀연히 생겨나서 개인을 가두고 고립시키며 밥벌이를 빼앗아 버린다. 고립과 생존 위기를 한달음에 가져오는 구멍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일방적 선택에 따라 무작위적으로 생겨나므로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질 수 밖에 없다. 누구나 김진숙씨가, 혹은 소설 속 구멍 속에 빠진 남자가 될 수 있는 사회인 것이다. 바로 지금이 말이다. 구멍에 빠진 남자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긴다. '구멍은 어디에나 있다'고.

 

 보다 심층으로 내려가 만나는 사회의 진실은 바로 이것이었다. 권력이 원하면 누구나 구멍에 빠질 수 있는 곳이라는 것. 거기에는 어떤 이유도 어떤 규칙도 없어서 전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그 누구도 언제든 구멍에 빠질 수 있는 잠재적 희생자라는 것. 바로 이것이었다. 마치 동굴 깊숙한 곳에서 회중전등을 비춘 것과도 같이 문학이란 빛 안에서 거대한 벽화처럼 나타난 진실이었다.

 

 그 거대한 벽화는 이제 우리의 실존을 바라보게 한다. 잠재적 희생자가 될 수 밖에 없는 나라는 존재를. 그러므로 뒤이은 소설들, 즉 2011년에 발표된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가 '나' 자체를 화두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 자신이 잠재적 희생자라는 사실은 무엇보다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이 혹은 언젠가 받게 될 위험이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사회로 인한 것이라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그게 바로 2010년에 발표된 '어떤 자장가'이다.

 마치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그 일상의 묘사라든가 심리적 묘사가 세세한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는 정말 카프카적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카프카도 이 작품 속 여인 처럼 글을 쓰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방해가 되었던 존재인 '일상'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한 편지에서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게 바로 '모든 일상적인 일'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카프가 스스로 만족할 수 있었던 글은 쓰는 시간 동안 오로지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칠 수 있었던 글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글은 좀처럼 쓸 수 없었다. 사사건건 일상적인 일들이 글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그런 글들에 대한 카프카의 혐오가 얼마나 컸던지 그는 아예 유언으로 자신이 모든 글들을 불살라버리라 할 정도였다. 그 카프카처럼 '어떤 자장가'에서의 여인도 글쓰기에 방해되는 모든 일상적인 일들을 싫어한다. 작품 속에서 방해가 되는 그러한 일상적인 일들은 특히나 그녀의 아이로 상징된다. 소설에서 여인은 종종 아이를 세탁기에 넣거나 오븐에 넣거나 냉장고에 넣어버리는 일을 반복적으로 상상하곤 하는데 이는 그녀가 얼마나 방해가 되는 일상적인 일들을 제거하고 싶은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힘겨움을 낳게 한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다. 그건 바로 사회다. 국가다. 정부가 저출산을 우려하며 아이 낳을 것을 종용하기만 하고 정작 더욱 중요한 육아에 대한 부담은 전혀 줄여 줄 생각을 안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난한 이들은 생존이 절박한지라 일 때문에 육아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는데 정부는 복지 제도 확충에 대한 소홀함으로 이마저도 부담을 나눠지려 하지 않는다. 하는 것만 보면 정부는 아이를 마치 화초나 농작물로만 생각하는 듯 하다. 그저 물이나 뿌려주고 빛만 비춰주면 대충 자라게 되는 그런 정도로만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잡초처럼?

 

 여인의 고통은 정부의 그러한 무관심 때문이며 그녀의 신음은 아이를 기르는 엄마와 가난한 가정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오로지 일방 소통만 존재하는 정부의 구조적 폭력 때문이다. 개인이 고통과 신음에서 해방되는 길은 그러므로 단 하나다. 그 구조적 폭력을 제대로 응시하고 분쇄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뒤이은 '고의는 아니었지만'과 '조장기'이다.

 

  '고의는 아니었지만'는 제목 그대로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 고의가 아닐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드러난다. 개인이 아니라 계급적으로 구분된 사회 구조 자체가 그 고통의 진짜 원인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나오는 유치원 교사 F가 그리도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은 하필이면 계급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장기'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유치원 교사가 되고 싶은 그녀는 현재 등록금을 낼 수 없어 휴학을 하고 있는 처지이다. 그녀는 매일 하루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내몰리게 된 건 결코 그녀가 게을러서도,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었다. 사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노력파이고 성실하다. 하지만 국가는 폭우 피해를 받은 주인공의 가정을 구제하는 것에 별 관심이 없고 그녀는 타고난 외모 탓에 취업이 어렵다. 이렇게 그녀가 이다지도 절박한 상황에 내 몰린 건 개인의 탓이 아니었다. 진짜 원흉은 어려움을 만난 국민들의 삶에는 별 관심이 없는 국가, 외모로 고용을 결정하는 것처럼 취업에 있어 부조리한 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고치려 들지 않는 정부에 있었다. 두 소설 모두에게 있어서 이런 식으로 개인의 곤경과 고통은 바로 이미 구축된 사회 구조 자체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2010년의 작품들이 '하나'의 대상으로써 사회의 모습만을 표출했다면 2011년의 작품들은 실제 사회가 어떤 식으로 곤경과 고통을 재생산하고 있는지 그 내부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와서 작가가 그 내ㅜ에서 이루어지는 구조적 폭력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것은 이전의 작품 '타자의 탄생'에서 갇혔던 남자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자기가 갇힌 이유를 헤아려보기 위함이다.

  

 즉 구멍은 왜 만들어지는 것인가? 바로 그 이유를 추적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는 사회가 그 구멍을 만들어내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계급적으로 가장 약한 자들을 잡아먹기 위해서라는 걸 보여준다. 거기서 사회는 마치 공양을 받는 괴담속 괴물과 같다. 그 괴물이 강물에 던져지는 처녀들을 잡아먹음으로 존속하듯 사회도 그렇게 가장 약한 자들을 희생양삼아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존재인 사회에게 구멍이란 그러므로 필수적인 존재이다. 개미핥기가 함정을 파고 그 속에 빠진 개미를 먹듯이 사회 역시 약한자들을 잡아먹을 수 있는 구멍이 필요한 것이다. 구멍이 그런 용도로 만들어지는 한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영원히 잠재적 희생자란 신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에서 약한 자들은 언제나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며 우리는 늘 뒤쳐지거나 앞에 있거나 둘 중 하나에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뒤에서 맹렬히 달려오고 있는 매머드에게 짓밟히지 않기 위해 같은 방향으로만 뛰고 있는 원시인들과 같다. 그것도 영원히 종착지가 없는. '고의가 아니지만'에서 유치원 교사 F의 죽음은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유일하게 계급적 무리를 이루지 않아서, 즉 가장 약한 존재가 되는 바람에 결국 죽임을 당한다. '조장기'의 주인공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녀는 스스로 열심히 살고 있으므로 절대 새들에게 쪼아 먹힐리 없다고 자부하지만 결국 그런 노력의 보람도 없이 가장 헐벗은 처지로 몰리게 되고 그렇게 계급적으로 가장 약한 자가 된 그녀는 새들에게 살점을 뜯어먹힐 운명에 처한다. 뒤쳐지면 죽는다. 이것이 오늘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저주받은 운명이다. '고의는 아니지만'과 '조장기'는 이렇게 말한다. 그저 남들보다 좀 더 빨리 뛰는 것으로 하루의 생명을 보장받는 게 유일한 우리의 대안이라고! 외면하고 싶은가? 그럴 수 없다. 그러지 못하도록 작가는 이 모든 소설적 여정에 촘촘히 진실을 박아놓았던 것이다. 외면할 수 없도록 보이는 모든 방향에다가. 그래서 진실은 잔혹한 것이다. 시한부 생명을 선고하는 의사가 그러하듯이.

 

 이 소설은 그 진실을 목격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난 작가가 더없이 정직하고 강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어떤 일말의 대안이라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전혀 주지 않기에 더더욱. 이는 두 작품 모두 죽음의 묘사에서 두드러진다. 작가는 그 죽음을 묘사하는데 있어 미묘하게 해방의 순간으로도 읽힐 수 있도록 했다. 어떻게 읽으면 주인공들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밟히거나 그렇지 않거나 레이스'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 이는 마치 오로지 죽음만이 이 현저한 사회의 구조적 폭력으로부터 유일한 탈출구라고 말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만큼 절망적이라고 말이다. 그걸 정직하게 대면하라고 한다. 피하지도 말고 핑계대지도 말고 살아가는 세상의 진실을 똑바로 보라고 말한다. 때문에 이 소설집을 읽고났을 때 섬뜩함부터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언제 어느 때 사회가 문득 내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할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 고의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군요. 개인적 감정은 없어요.

그냥 이제 당신이 갇힐 차례가 다가온 것일 뿐..."

 

 진실은 이러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하지는 말자. 작가가 한 줌의 절망을 위하여 그 오랜 시간을 자맥질해 온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 아마도 그 진실된 목적은 진정한 시작에 있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보다 제대로 된 대안의 구축은 언제나 사태의 진실을 제대로 응시했을 때라야 가능하다. 진실에 대한 정직한 응시가 보다 올바른 구원을 가져온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응시이며 때문에 보다 제대로 된 구원을 향한 그 진정한 첫발인 것이다. 예로부터 건물을 제대로 세우려면 말뚝부터 제대로 박아야 했다. 깊이 잘 박을수록 건물은 더 오래 버틴다. 그런데 이렇게 하기란 쉽지가 않다. 말뚝을 깊이 박으면 박을수록 육체는 힘들고 그만큼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내해야만 하는 고통이다. 이 소설집의 고통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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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과가 되었다한들 무어 그리 대수란 말인가?
    from 헤르메스님의 서재 2013-08-16 21:07 
    그러니까 이토록 더운 여름날 사람의 몸이란 으례 그렇다. 찜통 안에서 찜져지고 있는 과일처럼 몸도 의식도 갑자기 연체동물로 퇴화해버린듯 흐물흐물해져 버린다. 그야말로 '파과(破果)'와 다를 바 없다. 사실 '파과(破果)'란 우리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다. 노쇠가 필연적인 우리들은 늘 마모와 상실의 감각을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가니까. 시간이 소멸이라는 종국적인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사포와 같이 매일 우리들을 갈아대고 있는 형편이니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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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명의 백인 신부
짐 퍼커스 지음, 고정아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내 생각에 분명 콜럼부스는 지옥에 갔을 것 같다. 

  그가 순전히 개인적 욕망으로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을 발견하는 바람에 원래 거기 살던 인디언들이 대지를 빼앗기고 그 과정에서 가해진 엄청난 박해와 학살을 초래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물론 그가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발견되었겠지만 그러나 어쩌겠는가 정작 발견해 버린 것은 그였고 그래서 인생이란 가혹한 면도 있는 게 아니겠는가. 만일 내가 죽어서 어딘가에서 눈을 떴는데 거기서 콜럼부스와 그랜트 대통령을 보게 된다면 그 곳은 분명 지옥이리라.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주오(부제 : 인디언제국 멸망사)'를 읽고 나서 98년에 나온 짐 퍼거슨의 데뷔작 '천 명의 백인신부'를 읽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다.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것이 비록 역사적으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괴로운 것일지도. 소설의 가상적 사건은 명백히 실제의 비극을 지우고 있으니까(마지막에 설령 그러한 비극이 나오고 있다고 해도 많은 부분 진행되는 그 시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실제의 비극을 지우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역사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사실을 있는 것 처럼 해서 쓰는 소설을 흔히들 '대체 소설'이라고 부른다. 짐 퍼거슨의 이 소설도 아마 그러한 부류에 들어갈 것이다. 제목의 '천명의 백인 신부'란 1874년 그랜트 대통령을 만나러 위싱턴까지 찾아갔던 북부 샤이엔족의 족장 '리틀 울프'가 백인과 인디언의 평화적 화합을 위하여 천 명의 백인 여자들을 북부 샤이엔족과 혼인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함에 따라 정부 주도로 샤이엔족과 결혼하기 위하여 그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갔던 신부들을 말한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이 이건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다. 1874년 그 때 북부샤이엔족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감히 언감생심 미국 대통령에게 요구할 수 있기는 커녕 살던 곳에서 마저 쫓겨나 그야말로 고통과 불행속에서 신음하고 있었으니까. 당시 백인들과의 약속을 믿었던 북부 샤이엔족은 그들의 땅을 차지하려는 백인들의 그냥 이주할 땅이나 한 번 보고 오라는 꼬드김에 넘어가 남부로 이동했다가 끔찍한 굶주림에 직면해야 했다. 거기엔 들소 같은 짐승은 물론 경작할 땅마저 존재하지 않는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1874년의 북부샤이엔족의 '리틀울프(소설의 리틀울프는 실존인물이다.)'는 기아와 질병으로 속절없이 쓰러지는 부족의 여자와 아이들을 위하여 내내 그 지역에 와 있는 미 주재관에게 여기에 온 것은 그저 둘러보기 위해서였으니 다시 북부로 가게 해달라고 평화적으로 요청했으나  모처럼 이토록 손쉽게 북북 샤이엔족을 남부로 쫓아낼 수 있었던 미국 정부는 그 요청을 들어줄리 만무했고 결국 더이상 극심한 기아와 질병으로 인한 부족민들의 죽음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리틀 울프와 그의 형 무딘칼은 자기들의 힘으로 다시 북부로 돌아가기를 감행한 끝에 그만 대부분의 샤이엔족들이 백인들에게 학살당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다음은 디 브라운의 책에도  나오는 당시 상황에 대한 '리틀 울프'의 고백이다. 

  우리는 남쪽으로 가서 많은 고통을 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모르는 병으로 죽어갔다. 그리운 마음은 저절로 탯줄을 묻은 고향 쪽으로 향했다. 남은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가 되었다. 우리가 원한 것은 몸뚱이 하나 누일 조그만 땅 한 뙈기였다. 우리는 천막을 세워 두고 그냥 밤에 도망해 나왔다. 군대가 뒤쫓아왔다. 나는 말을 타고 나가 군인들에게 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북쪽으로 가려는 것 뿐이었다. 우리를 내버려두었더라면 우리는 아무도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무차별 사격이었다. 그 뒤에 우리도 싸우지 않을 수 없었지만 먼저 총부리를 들이대지 않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나의 형 무딘 칼은 반수가 되는 지파를 데리고 로빈슨 요새에 투향했다. ... 그들은 총을 다 내주었는데 백인들은 그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 북부 샤이엔족의 오쿰가치(리틀 울프) -

                                               디 브라운,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주오 (p. 527~ 528) 

 

  소설에도 나오지만 샤이엔족의 말은 우리말과 어순이 같다. 그러니까 그들 역시 우리와 동일한 우랄 알타이어족 인 것이다. 그렇게 몽고 대륙에 거주하다 러시아만과 알래스카가 서로 이어져 있을 당시 그리로 건너가 아메리카에 정착하여 지금의 인디언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고 심정적으로 인디어에게 더 동화가 된다. 그들의 학살 이야기를 읽으면 미국의 모든 백인들이야말로 더없이 사악한 인종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 미대륙 개척사는 그야말로 학살과 약탈의 역사에 다름아니었다. 당시의 모든 식민지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프론티어 정신으로 추앙하고 본질은 그들의 탐욕이었음에도 문명으로 미화한다. 그저 자기가 난 땅을 어머니 처럼 받들고 욕심없이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인디언들을 이교도라고 정죄하고 미개하다고 경멸한다. 이건 폭력을 행하는 자들이 늘 그렇듯이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한 자기 기만적 술책에 불과한 것이다. 속세의 욕망으로 부터 해방시켜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다면서 거기 나는 금 때문에 그들의 땅을 뺏고 미개한 자들이라 폭력밖에는 쓸 줄 모르는 그들이니 문명화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여자와 아이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이는 더 거센 폭력을 자행하는 모순을 어떻게 그들은 설명할 것인가. 한 마디로 미국의 백인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선교와 문명은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자가 도덕적 정당성마저 갖겠다며 달려드는 뻔뻔함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때 그들이 인디언을 추방하고 학살하며 부르짖었던 선교와 문명화의 이데올로기가 현재 미국이 전세계로 확산시키고 있는 그저 무한 탐욕을 아름답게 부를 뿐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과연 얼마나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미 알고 있는 비극의 역사를 '만일'이라는 가정으로 다시금 재현해 놓은 작품을 읽는 일은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를 읽는 만큼이나 몰입이 안되는 일이다. 그럴 경우 나 같은 독자는 그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바 보다는 왜 작가가 하필이면 이런 구성을 취하는 것일까를 더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작품 이면에 깔린 작가의 '계산'을 헤아리는 것이다. 사실 짐 퍼거슨의 이 소설은 그 보다 앞서서 영화로 만들어진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의 춤을'과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비슷하다. 모두 적대시 되었던 그 문화의 입장에서 지금 중심이 되고 있는 문화를 객관화시켜 바라보려 하는 것이다. 그 경우 주인공은 물론 나뉘어진 문명의 경계를 쉽게 넘어갈 수 있을 만큼 타자에게 열린 자여야 한다. 주인공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어졌을 뿐이지 두 작품 모두 그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 케빈 코스트너는 늑대에게 기꺼이 모닥불의 한 자리를 내어주고(인디언에게 '늑대'란 신성시 되는 동물이다. 아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히칸'은 인디언 말로 '늑대'를 뜻하기도 한다. 그만큼 늑대란 바로 인디언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소설의 주인공 '메이 도드'는 성에 있어서 자유롭다.(초창기 기독교의 규율이 엄격하게 지배하던 미국에서 그러한 그녀의 자유분방함은 분명 죄악으로 규정된다. 때문에 그녀는 가족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되는데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녀가 자유분방해서가 아니고 그녀의 계급적 위치에서는 절대 어울리지 말아야 하는 사람과 어울렸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그녀의 자유분방함은 그 자체가 사회가 인위적으로 설정해 놓은 경계들을 뛰어넘는 상징이 된다.) 결국 이렇게 타자의 문화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있는 주인공들은 타자의 문화가 주는 매력을 알게 되고 원래 자신이 속했던 문화가 오히려 더 경멸당해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도 동일하다. 그리고 최후엔 미국 백인들의 무자비한 탄압을 받아 어쩌면 미국 역사에 있어 구원이 되었을 수도 있을 문화가 속절없이 퇴조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쓸쓸함도 비슷하다. 이렇게 우리는 이미 케빈 코스트너를 통하여 '천명의 백인 신부'를 사전 체험한 바 있다. 그런데 케빈 코스트너의 영화가 나왔던 그 때도 한 편에선 '진실한 참회는 없는 가해자의 동정적이며 위선적인 제스추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었다. 그러면 짐 퍼거슨은?  케빈 코스트너는 그래도 원래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가져왔다. 영화의 원작은 실제 그 같은 경험을 했었던 한 군인의 수기였다. 하지만 짐 퍼거슨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건을 가져온다. 왜? 오로지 그 타자의 문화를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뭔가 또 다른 것이 있는가? 

 

  나는 여기서 이 소설이 후일담의 성격을 띤다는 게 흥미롭다. 

  소설엔 어떻게 해서 메이 도드의 이야기가 세상밖으로 나오게 되었는지가 프롤로그처럼 붙어있다. 한 후손이 자신의 조상중에 미쳐서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가 탈출해서 인디언과 결혼까지 한  그 광기로 인해 내내 어린시절 두려움을 가져다 주었던 '메이 도드'에 대해서 어느 날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각종 자료를 조사하고 그 관련 사실들을 추적하다가 결국 샤이엔족 보호구역에서 간직하고 있던 그녀의 일기를 찾게 된다. 이 소설은 바로 그렇게 해서 발견된 그녀의 일기, 즉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게 사라져 버렸던 역사가 발굴된 기록에 의해 부활한다. 주인공 메리 도드를 비롯하여 죽음으로써 영원히 망각 속으로 묻혀졌던 그 때 그녀와 함께 인디언의 신부가 되기 위해 떠났던 모든 여성들 또한 도드의 일기 덕분에 생생한 생명을 되찾아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낸다. 짐 퍼거슨은 그렇게 기록을 통하여 그녀들을 재현해낸다. 이러한 구성은 허구의 사건을 독자들에게 마치 실제 있었던 일로 여기게끔 하기 위한 단순한 문학적 장치일 뿐인 것일까? 그렇다면 짐 퍼거슨이 노렸던 것은 백인 여성이 기꺼이 인디언의 신부가 되기를 원했다는, 그것이 분명 유발할 독자들의 선정적 관심이었을까? 만일 그렇다면 짐 퍼거슨이 어떻게 그런 내용이 독자들의 관심을 유발하리라 계산한 것일까? 우리는 이미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의 춤을'을 경험한 바 있는데. 혹 주체가 '백인 여성'이라는 사실이 그러한 효과를 낼 것이라고 내다 본 것인가? 그것도 연애가 아니라 아예 '신부'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그 외 다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다. 이렇게 본다면 그야말로 짐 퍼거슨은 사실 여성의 목소리로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가부장적 가치관에 여전히 함몰된 자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가 정말 그런 것으로 독자의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 신부가 독자들에게 가져다주는 '종속성'의 느낌 때문일 테니까. 아닌 게 아니라 소설 속의 메리 도드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그토록 자유 분방하고 흑인인 피위에게도 대등하게 대하는 등 사회의 상식을 벗어나고 한없이 그 외부로 열려진 존재이나 어찌된 일인지 정말 그러한 성향의 여자인가 싶을 정도로 남성에게 스스로를 자꾸만 종속시키려는 전형적인 가부장제가 원하는 여성이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모성에의 강한 집착이 그것을 드러낸다. 사실 그녀가 인디언의 신부가 되기로 결심한 것도 그러면 정신병원을 나갈 수 있고 그렇게 인디언과 2년만 살면 자유롭게 이혼이 가능해 그 뒤에 그녀의 두 아이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그녀 자신을 정신병원에 감금하게 만든 열악한 계급의 남편은 이미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현명하게도 짐 퍼거슨은 애초부터 그를 생사불명의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짐 퍼거슨은 소설 전체에 걸쳐서 모성을 강조한다. 메리 도드만이 아니라 그 인디언 부족에 온 모든 여성들마저 그렇다. 거기다 아내로서의 정절도 강조한다. 거기에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근처의 부족에게 납치당해 윤간을 당할 처지가 되자 같이 왔던 백인 여성 세라가 거기에 맞서다 결국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다. 더구나 술에 의한 부작용도 강조된다. 위스키 하나로 인디언 부족 전체가 미치광이 집단으로 돌변한다. 솔직히 과장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묘해 보이는 설정이다. 물론 이것을 술은 서양이 가져다 준 독소를 상징하는 것이며 바로 그렇게 나쁜 것만 가져다주는 서양 문명을 비판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광기를 과장한 면이 없지 않다. 나는 이것이 왠지 예사롭게 보여지지 않는다. 거기다 그 광기로 인해 인디언들이 닥치는 대로 여성들을 윤간한다는 설정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백인 여성들에게 그들 스스로 미개하다고 여긴 것에 대한 공포를 다시금 심어주는데 그런데 이들이 이 공포로 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더욱 더 매달리는 것이 자신의 남편들이고 보면, 이것을 통해 퍼거슨이 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것은 바로 그 여성들이 느끼는 공포가 정말은 남편이 아닌 다른 인디언들에게 그녀들의 정조를 빼앗기는 것에 대한 공포라는 사실이다. 그렇게 이 모든 설정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것들이 어째  카톨릭적 죄악과 닯아 보인다. 이 소설은 당시 미국 백인들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기독교에 대해서는 교조적이라며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런데 어이하여 이렇게 카톨릭적 가치관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일까? 바로 여기에 짐 퍼거슨의 여성에 대한 시각이 드러나는 것 같다. 전통적 여성관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여성들이나 거기에 과도하게 투영되어진 카톨리적 세계관. 이 모든 것이 짐 퍼거슨이 실상은 가부장적 시선으로 여성들을 보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 우리는 짐 퍼거슨이 제아무리 여성을 경계마저 뛰어넘는 포용력을 소유한 한 주체로 그리고 있더라도 사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누가 그녀들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그 종속성의 기표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되는 것이다. 

  타자의 문화에 서서 자신이 서 있던 문화를 본다는 것은 전적인 외부에서 바라봄으로써 사실은 그 문화가 가지고 있는 지배력으로 부터 벗어나고자 함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짐 퍼거슨이 취하는 형상화는 거꾸로 자신의 문화의 핵심적 가치로 더더욱 인도할 뿐이다. 이것은 모순이다.  이 모순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짐 퍼거슨이 이 소설에서 취하는 구성 전략 마저 의심하게 된다. 형상화가 일종의 전술이라면 구성 방식은 일종의 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술이란 어디까지나 전략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음을 감안할 때 수단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전략 자체가 이미 그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란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짐 퍼거슨이 취하는 구성에 있어서의 방법 마저 사실은 소설의 표면에 보이는 것과 반대의 효과를 노린 것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앞서 그는 이 소설을 후일담처럼 만들었다고 했다. 

  그것은 불현듯 찾아낸 하나의 기록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왜 이런 일기라는 '기록'을 차용했던 것일까? 앞서도 말했듯이 단순히 '사실임직'하게 보이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거기엔 우리가 지금 의심하는 바와 같이 보다 더 근본적인 목적이 은폐되어 있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조건'이란 책으로도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흥미로운 말을 했다. 

  묘사를 통해서 어떤 내용이 기억에 수용된다. 그래서 그런 기록은 망각을 막아주는 좋은 보호막인 것 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나의 새로운 생각으로는, 기록된 것만이 잊혀질 수 있다.  왜냐하면 기록된 것만이 다시 삭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땅히 기록될 장소나 시간이 없어서 기록되지 못한 것은 - 다시 말해, 그 내용이 지배의 공간이나 시간에서도, 자기 자신의 특정한 정신의 지형이나 역사속에서도 종합할 수 없기 때문에 자리를 찾을 수 없는 것은 - 달리 말해, 가능한 경험의 소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동시에 잊혀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경험을 형성하는 그 형식들이, 비록 이차적 억압을 가져오는 그것들이 무의식적이라 할지라도 그 형식들에는 쓸모없고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망각이 공격할만한 틈을 주지 않으므로 오로지 어떤 자극 상태로만 남아 있다. 

 

  단적으로 '기록된 것이 오히려 더 망각되기 쉽다.'라는 리오타르의 이 말은 특히나 이런 후일담 같은 소설들에게 더욱 더 경계의 시선을 던지게 한다. 후일담의 본질은 현재로 다시 불러 일으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다시 과거로 보내는데 있기 때문이다. 후일담의 이러한 특성은 '트라우마'와 비교해보면 더더욱 확실해진다. '트라우마' 역시 후일담과 같이 과거로 부터의 전래되어 온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그 전래되어 오는 과정이 다르다. 그것은 일종의 '엄습'이다. 그렇게 후일담은 주체가 스스로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것이지만 트라우마는 전적으로 외부에서 주체가 강요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고 없이 찾아드는 두려움이요 징후 없이 벌어지는 상처이다. 우리는 그것을 예방할 수 없으며 그냥 뒤늦게 아파할 뿐이다. 트라우마란 그런 것이다. 이것이 '엄습'인 이유는 트라우마를 가진 주체가 그것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언어화 할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엄습 - 그렇게 막연한 불안감으로만 존재한다. 리오타르의 말 처럼 경험을 형성하는 그 어떤 형식으로도 구체화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래서 트라우마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늘 엄습하는 막연한 불안감(이것이 바로 '어떤 자극 상태'다.)으로 영원히 기억된다. 그것은 현재에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단단히 결부된 고통으로써... 

 

   하지만 후일담은 다르다. 그것은 기록되고 그렇게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된다. 주체는 그것의 모습을 명확히 알 수 있다. 모든 환부는 온전히 드러나면 곧바로 치유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봉합과 제거의 과정을 거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도 된다. 즉 좌변기의 물 처럼 안심하고 망각속으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넋두리'와 '후일담'도 구별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넋두리가 일종의 트라우마의 고백이라면 후일담은 완전한 망각을 위한 마지막 봉인 같은 것이다. 그것은 스틱스의 강물을 마시게 하려는 카론의 노래와도 같다. 후일담은 과거 청산의 개체적 표현이다. 청산은 언제나 해체와 소멸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지 보존에 있지는 않다. 하지만 오로지 재물을 향한 이기적 욕망으로 인디언을 마구 학살한 역사는 그렇게 절대 지워져서는 안되는 역사다. 따라서 짐 퍼거슨의 방법은 잘못되었다. 그가 취한 후일담식의 소설 구성은 그 저주받을 역사로 인해 환기되는 미국인들의 상처난 양심에 반창고를 붙여주는 역할 밖에는 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미국인들이 정말 그 부끄러운 학살과 약탈의 역사에 대해 반성하고 속죄하려고 한다면 후일담이 아니라 마땅이 하나의 '트라우마'로 형상화해야 할 것이다. 물론 과연 어떻게 언어를 주 표현 매개체로 하는 문학이 언어화가 불가능한 트라우마적을 재현할지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미국 문학이 그 고민을 그만두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바로 그것이 정말 이런 소설이 하고자 했던 반성과 속죄에 더 걸맞는 자세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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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8, 우연히 데이브 거니 시리즈 1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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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s! 

 존 버든의 데뷔작 '658, 우연히'를 읽고 났을 때 처음 떠올랐던 것은 이것이었다. 흔히 외계인과의 접촉을 일컫는,  '제3종과의 근접 조우'. 절대적으로 만나지 못할 이종(異種)과의 만남이기도 한 이 말만큼 이 작품이 이루어낸 성취에 걸맞는 말은 없다고 여겨졌다. 그는 정말 흔치않은 일을 해냈다. 고전 미스터리와 노르딕 느와르(NORDIC NOIR)적 세계를 그야말로 하나로 융합시킨 것이다. 사실 그 둘을 모두 즐겨온 팬으로서 자신있게 말하는 바이지만, 이 둘은 절대 만나지 않는 영원한 평행선 같은 존재였다. 고전 미스터리 장르에서는 노르딕 느와르가 보여주는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이있고도 진지한 시선을 찾기가 사실은 어렵다. 그건 셜록이든 파일로 밴스이든 엘큘 포와로이든 다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이해의 시선이 아니라 범죄로 인해 드러난 부르조아 세계의 결함을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르딕 느와르도 마찬가지다. 해닝 만켈이든 아날두르 인드리라손이든 이들에게 미스터리 해결의 쾌감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이 더욱 천착하는 것은 그 미스터리가 궁극적으로 지우고 싶어하는 사회의 얼룩을 절대 지우지 못할 것으로 만들어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전 미스터리와 노르딕 느와르는 물과 기름처럼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시각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고 작가 자신이 서 있는 입장의 차이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독자들로서는, 그것도 양 쪽 모두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아무래도 이 사실 만큼 아쉬운 것도 없었다. 양적으로도 하나 보다는 둘이 나을 것이지만 질적으로도 이 둘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면 그 독서의 쾌감은 더욱 클 것이 분명하니까 말이다. 그러다 스티그 라르손이 그에 가까운 조화를 보여주었다. 파시즘을 그 근저에서 부터 거부하려는 라르손은 그의 주제의식에 걸맞은 미스터리로 그야말로 성공적으로 노르딕 느와르의 시각과 조화시켰다. 하지만 미처 거기에 환호하기도 전에 라르손은 불과 세 편의 작품만 남기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고 그 '완성된 조화'를 보고싶은 열망 아닌 열망은 미처 꽃피우지도 못한 채 내내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치 루크레티우스의 빗방울 처럼 이 작가 존 버든이 나타났다. '658, 우연히'란 제목 그대로 문득 이마 위로 차디찬 빗방울을 느끼는 것 처럼 우연히 말이다. 

  존 버든의 이 소설은 하나의 접점이다. 리만 기하학과 같다고나 할까... 영원한 평행선일 것 같았던 고전 미스터리와 노르딕 느와르가 그야말로 한 점에서 감격적으로 포옹한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뉴욕 출신의 미국 작가가 그것도 데뷔작으로 이런 성취를 이루어내다니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이건 호들갑일 수도 있다. 좋다. 이왕 이렇게 호들갑을 떨게 된 것 더 떨어볼까. 나는 '658, 우연히'를 이 여름에 읽은 미스터리중 기꺼이 베스트 3의 하나로 꼽겠다.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은 이정도로 하고 이제 존 버든이 성취한 지점의 그 내막 속으로 한 번 들어가볼까 한다.  

 

 

 주인공 거니는 은퇴한 전직 형사다. 그렇다고 그가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한창 일할 나이에 스스로 은퇴한 것이다. 그렇다고 형사로서 그가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실 그는 연쇄살인마를 몇 명이나 검거한 아주 유능하고 유명한 형사였다. 그런 그가 아내를 위해 뉴욕에서 벗어나 시골에서 조용하고 소박한 전원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아내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가 형사일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그만 자신의 아들을 사고로 잃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그 사고를 자기 탓으로 여겼고 은퇴하고 아내가 원하는 대로 전원생활을 하는 것을 일종의 속죄로 여겼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이것도 진짜 이유가 아닌 것 같이 느껴진다. 왜냐면 우리는 거니의 깊은 곳에 드리우고 있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게되기 때문이다. 일에만 열중해서 가족을 무심하게 내버려두었던, 그래서 어린 거니로 하여금 영원히 혐오하고 결별하게 만들었던 그 아버지의 그림자를 말이다. 사실 거니 역시도 아들 대니의 죽음을 떠올릴 때 그것을 깨닫는다. 바로 그 때의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도 혐오해마지 않았던 아버지의 모습과 똑같이 닮았다는 것을... 

 

  그렇게 이 작품의 중심엔 아버지가 있다. 

  사실, 이 리뷰의 시작을 이성복의 시 '그해 가을' 에 나왔던 이 문장으로 하려고 했었다.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개라도 말을 못해' 

  과연 이 문장 만큼 '658, 우연히'의 주제를 제대로 드러내는 말이 또 있을까 모르겠다. 이 말 그대로 여기의 심층엔 '아버지'에 대한 거부가 있다. 아니, 다시 말하면 프로이드가 '토템과 터부'에서 서양 문명의 근원이라고도 했던 '부친 살해'의 욕망이 있다. 소설의 모든 미스터리, 설정들은 사실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단, 거니가 은퇴후 가지게 된 새로운 취미활동이 흥미롭다. 거니는 우연히 미술 수업을 들었다가 특히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자기가 잡은 연쇄살인마의 머그 샷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데 몰입한다.  여기서 버든은 왜 거니에게 '머그 샷'이란 취미를 가지게 한 것일까? 여기엔 내가 보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머그 샷' 자체가 가지는 투명성이다. 머그 샷은 범죄자가 유치장에 갇히기 직전, 그러니까 현실로 부터 격리되기 직전의 마지막에 찍는 사진이다. 그러니까 여기엔 어떤 꾸밈도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투명한 모습을 드러낼 뿐인 것이다. 그렇게 버든은 그 진실한 모습을 그대로 담아낸다는 의미로 머그 샷을 가져온다. 그렇게 거니는 온전히 드러난 연쇄살인마의 얼굴을 본다. 그런데 버든은 왜 하필 그렇게 드러난 얼굴들에 거니를 그토록 집중시키는 것일까? 더하여 그들은 모두 거니가 제 손으로 직접 체포한 자들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버든이 머그 샷을 가져온 두번째 이유가 있다. 특히나 버든은 거니가 자기가 체포한 자들의 머그 샷에 너무도 열중하고 있음을 아내의 불평까지 가미하여 강조까지 하는데 그가 그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거니의 행위와 이 소설에서 거니가 승부하게 되는 연쇄살인마의 살인 행위가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도대체 이 둘의 존재 포획 행위가 하나는 살인이고 하나는 사진인데 어떻게 동일하다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것은 머그 샷이 현실에서 격리되기 직전 마지막 찍는 사진이라는 것에서 똑같이 현실에서의 격리라고 볼 수 있는 죽음과 동일하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연쇄살인마의 살인이라는 행위와 거니의 사진 보기가 궁극적으로는 '회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즉 연쇄살인마는 살인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것이고 거니는 자신이 체포한 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 기억을 환기하는 것이다. '회상 혹은 환기'는 기억의 한 유형이지만 단순한 기억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즉 외부에 있는 것을 그대로 기억하는 것, 그렇게 현실을 토대로 내용을 구성하는 것을 단순한 기억이라고 한다면 '회상 혹은 환기'는 거꾸로 기억하는 주체가 그 기억을 통해 임의적으로 현실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즉, '회상 혹은 환기'의 차원에서는 단순한 기억과 달리 주체가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데 바로 그 때문에 '회상 혹은 환기'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즉 버든이 여기서 '머그 샷'과 그 행위적 유사성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그 행위에 깔린 보다 근본적 의미, 즉 그들의 정체성 자체가 동일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이다. 거니와 연쇄살인마가 결국 똑같은 존재라는 것은 작품 도처에서 나타나는데 일단 거니가 전원생활에 와서 주로 하는 것이 새관찰이었는데 연쇄살인마도 새관찰자로 행세한다는 것 그리고 둘 다 보호해야 할 여성이 하나씩 있다는 것 등등이나(보다 더 주요한 공통점은 스포일러상 말하지 않겠다.) 연쇄살인마가 피해자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주로 그들의 기억을 환기시키는데 맞춰져 있다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그렇게 둘의 정체성은 동일하다. 차라리 도플갱어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데 그 거니의 정체성을 형성한 사람은 앞서도 말했듯 아버지였다. 그가 '머그 샷'을 보면서 내내 환기시키는 기억은 바로 형사로서의 기억이다. 그렇게 형사로서의 정체성이다. 때문에 아내는 그것을 싫어한다. 그 형사로서의 정체성은 아들 대니의 죽음과 더불어 바로 아버지의 아우라라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형사직을 버리고 뉴욕마저 떠난 것은 그 아버지의 그림자로 부터 달아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거니는 계속 머그 샷을 본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의 아우라를 떠나지 못한다. 당연히 아내와의 사이도 좋을리 없다. 전원생활은 엉망직전이고 전처와의 사이에 난 아들도 여전히 나몰라라 하고 있다. 그렇게 그는 그토록 혐오하는 아버지의 자리에 붙들려 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 한 마디로 진퇴양난. 

 연쇄살인마가 그 이름을 쓰는 것 역시 둘이 동일성을 나타낸다. 한 마디로 그것은 그야말로 거니의 현재 상황을 나타내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 이 책은 내게 운명처럼 여겨졌는데(운명을 예민한 감각이 우연히 겹쳐진 현실을 포착해내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바로 얼마전에 내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라는 말을 한 페이퍼의 제목으로 썼기 때문이다. 이런 우연적 겹침이 재미있었고 한편으론 그래서 더욱 이 작품에 몰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이 진퇴양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길 밖에는 없다. 그렇게 아버지를 영원히 죽이는 수 밖에 없다. 거니는 오디이푸스가 되어야 한다. 즉, 이 소설에서 거니의 모든 추적은 바로 프로이드가 말했던 부친 살해의 과정에 다름아닌 것이다. 

  아버지란 무엇인가? 왜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욕망을 가지게 되는 것인가? 비단 지금 이 작품만이 그렇게 부친 살해의 욕망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영화에서는 이미 92년에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자신의 데뷔작 '리틀 오뎃사'를 통해 공개적으로 아버지를 처형했었다(물론 아들은 직전에 아버지의 머리를 겨누었던 총구를 거둬들이지만...).  이 두 작품이 모두 데뷔작이라는 것에서도 어떤 기묘한 운명이 느껴지는데 제임스 그레이의 경우 아버지의 처형은, 뉴욕의 러시아인 거주지를 '리틀 오뎃사'로 부르는 것에 비추어 보자면, 사실 소련의 사회주의를 구석구석 질서지웠던 존재인 스탈린과도 같은 독재자 아버지의 처형이었다.  

 

                                                                       영화 리틀 오뎃사에서 아버지 처형 장면 

 

 말하자면 여기의 독재자 아버지는 라캉이 말했던 상징계의 질서 자체를 의미하는 아버지와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즉 제임스 그레이도 존 버든도 그리고 뒤이어 또 하나의 데뷔작으로 부친 살해를 감행할 존 하트의 '라이어'도 결국 죽이고 싶어하는 것은 이 질서를 떠 받치고 있는  상징적 존재로서의 아버지 자체인 것이다. 이것은 그냥 하는 억측이 아니고 바로 버든이 왜 범인으로 하여금 피해자에게 '1부터 1000까지의 숫자를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단번에 맞추는' 트릭을 썼는지에서 바로 증명되는 것이다. 바로 그 트릭의 기저에 라캉의 말에 따르면 언어를 습득하는 즉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아버지의 상징 질서에 편입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달아날 수 없는 이미 구조화된 함정 자체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버든이 그러한 트릭을 전면에 가져온 것은 바로 이 부친 살해의 욕망이 현재 이들의 삶을 구조화하고 지배하고 있는 아버지라는 기표를 향하고 있는 것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것은 모든 범죄의 장소가 '집'이라는 것에서 더욱 강화된다. 

 

  그런데 왜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것일까? 

  여기에 소설의 첫 희생자이자 거니를 범죄로 인도하는 존재이며 거니와 또 다른 유사한 존재이기도 한 멜러리의 '내면 분리 이론' 에 이어지는 다음과 같은 말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한 몸에 사는 두 사람의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고통은 없다네...' (p.154) 

  생각해보면 멜러리도 알코올 중독의 과거를 간신히 지우고 새로이 인생을 살게된 자였고 다른 피해자들도 멜러리와 같았다.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을 모두 아버지의 질서에게로 편입된 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두 사람의 고통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아버지의 질서를 받아들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거니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대니의 죽음이 아로새긴 상처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 상처가 아로새겨진 결정적 이유는 바로 거니가 아버지처럼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즉 이 모든 이들이 궁극적으로 두 사람의 고통을 한 몸에 새겨지게 된 것은 바로 '아버지'라는 존재 때문인 것이다. 때문에 부친 살해의 욕망은 바로 이러한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며 더 나아가서는 아버지가 새겨놓은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이 그들만의 질서를 이루고자 함이다. 

 

  모든 질서의 재구축은 구질서의 면모를 파헤치는데서 시작한다. 

  그래서 여기엔 그 과정으로서 '고전 미스터리' 기법이 작용하는 것이다. 고전 미스터리의 기법들은 결함을 제거하는, 다른 말로 치유하는 작용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미스터리 기법은 어디까지는 구질서를 치유하는 것이지 새질서를 낳게하는 작용을 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위협이 되는 새질서를 제거하는 작용을 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모순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천만에. 바로 여기서 버든의 뛰어난 점이 나타난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스포일러상 말하지 못하겠고 곁가지 것들중 하나를 말한다면, 거니가 어디까지나 협력자로서 수사에 참여하는 것이지 경찰로 다시 복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유동적인 존재로 머무르고 있으며 경찰은 내내 그에게 비협조적이다. 버든은 집에서 조차 그가 자주 머무르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자주 차에서 잠이 들고 때로는 그 때 경찰로 부터 위협도 받는다. 버든이 거니를 이렇게 고립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바로 범죄자의 유사성 때문이다. 범죄자는 공공연히 경찰과 승부한다. 그는 범죄의 현장에서 은밀하게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알린다. 공개적으로 경찰과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거니와 범죄자는 동일하게 경찰과 적대적인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미스터리는 이전의 미스터리와는 다르게 작동된다. 즉 아버지의 질서를 굳건히 지키는 경찰과 싸우기 위해서 미스터리가 작동되는 것이다. 범죄자는 자신의 존재를 보이기 위해서(그렇게 너희의 질서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거꾸로 미스터리를 제시한다. 일종의 구질서를 해체하기 위한 무기로서 제시하는 것이다.(그리고 결말에서 그 모든 것이 그 질서 자체를 와해시켜버리는 데 있음이 드러난다.) 바로 이 미스터리의 반전된 작동을 위해서 나는 버든이 그토록 거니와 범죄자의 동일성을 강조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동일한 존재라야 무기로 제시한 그것이 상대편의 치유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치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거니와 범죄자의 존재는 어떤 측면에서 엘리아데가 완전함의 이상이라 보았던 '양성(ANDROGYNE)'을 연상시킨다. 엘리아데는 한 인터뷰에서 양성과 자웅동체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자웅동체는 그저 여성과 남성이 공존하는 것이지만 양성은 이 둘이 융합한 것으로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 존재라고. 라캉의 말대로 언어를 습득한 그 시점에 바로 아버지의 상징 질서로 편입된다고 한다면 인간인 이상 그 아버지의 질서를 벗어나기란 어려울 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그것을 예상한 나머지 버든은 그들이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 존재로 여겨질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정했던 것은 아닐까? 

 

  여기까지의 내 얘기가 전혀 이해불가능하다고 한다면 전적으로 내가 범죄자의 진정한 목적과 결말에서의 버든의 연출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작품의 결함이 아니라 스포일러상 내가 빠뜨린 '결함'의 책임이다. 서두에서 말한대로 이 작품은 정말 뛰어나다. 길이와 공개적인 리뷰라는 한계상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한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더 이해되지 않는 리뷰가 될 것 같아 걱정도 앞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그러고보니 내가 지금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에 서 있는 듯 하다. 역시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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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1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의 중심에 '아버지' 라는 글을 읽으면서 정말 이건 노르딕 느와르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진한 부분은 결코 정통 미스테리에서 나오지 않으니까요. 분위기 자체가 다르잖아요. 이 작품은 거기에서 독특하군요. 땡기는걸요~ ^^

페이퍼를 읽다보니, 다른 책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 있어요,
형사(잡는 자)와 범인은 비슷한 사고를 지녔다는, 서로 이해 가능하다는거, 하지만
행위는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는 그런 것이었죠. 어느 책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네요.

즐거운 주말되셔요. 역시 멋진 리뷰세요.

ICE-9 2011-09-20 15:36   좋아요 0 | URL
지금에서야 들어와서 이제야 마녀고양이님의 댓글을 보았네요.
잘 지내시고 계시죠?
저도 '658' 읽으면서 미국 작가인데도 너무 '노르딕 느와르'적이라서 놀랐어요^ ^ 고전 미스터리 퍼즐을 푸는 것도 좋아하시고 노르딕 느와르의 분위기도 좋아하신다면 정말 추천드리고 싶은 작품입니다. 스릴러 작가의 경우 자신이 말하고 싶은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주인공만이 아니라 그 범인에게도 투영을 시킬 것 같아요. 그 생각에 저는 범죄자의 범죄도 작품을 해석하는데 있어 꽤 중요한 단서로 여기고 있는 편이구요. 결국 잡고자 하는 자와 쫓기는 자는 어떤 의미에서 서로의 도플갱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한 편이죠. 니체의 말대로 괴물을 오래 들여다보는 자는 그 스스로도 괴물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칭찬의 말씀도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