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총사 3D - The Three Musket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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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색은 영화에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다. 아무래도 2차원적 활자를 3차원적 영상으로 옮겨야 하는 만큼 고유의 영상문법이 적용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화는 시간을 다루는 예술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집중력은 90분 이상을 넘기지 못한다고 한다. 더구나 상영시간이 길어지면 영화사 수입에도 지장이 있다. 그래서 고전일 경우, 특히나 '삼총사' 처럼 다소 긴 장편일 경우 부득이하게 대체로 거대한 줄기만을 가져오거나 혹은 몇 인상적인 에피소드만 따오거나 그것도 아니면 거의 재창조 수준의 각색이 이루어지기가 일수다. 그렇다고 각색이 원작보다 뒤떨어진다고만은 할 수만은 없다. 여기에는 그런 경제적 효용 못지않게 그 고전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지는 '바로 지금'이라는 동시대적 가치관 또한 작동하기 때문이다. 즉, 각색을 통해 오히려 고전은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동시대와 더불어 생생히 호흡하며 살아 뛰는 작품으로 거듭 날수도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각색이 상업적 이윤을 위한 한낱 소재이냐 아니면 인상적인 새로운 재해석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대부분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영화예술적 자의식이다. 즉 그들이 영화를 무엇으로 생각하냐에 달린 것이다. 

  

 

   삼총사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지금까지 이미 수많은 연극과 영화가 만들어졌고 애니메이션 까지 부지기수에 이른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익숙한 작품을 다시금 만든다는 것은 사실 모험에 가깝다. 다시금 만들려는 사람은 작품의 내용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강고한 적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유명세다. 유명세는 양날의 검이다. 즉 유명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잇점은 있으나 그들에게 깊이 각인된 인상은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인상은 그들에게 두 가지를 가져다 주는데 바로 그것 때문에 새로이 만들어지는 작품은 그 목숨이 위태로워지게 된다. 즉, 인상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가 그 작품을 처음 맛보았을 때 느껴던 환희를 재차 환기시켜줄 것과 그와는 반대로 그 인상을 넘어선 또 새로운 느낌 역시 맛보게해달라고 새로운 작품에게 요구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새로운 작품은 이 둘을 모두 다 만족시켜야 하는데 물론 이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너무 독창적이면 예전의 그 기분 그대로라는 '환기'를 줄 수 없어 원성을 살 것이고 그렇다고 '환기'에만 집중하면 허름한 재탕에 불과하다고 비난을 들을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고전을 다시금 만들려는 작가는 이러한 위험을 무릎써야만 한다. 이러한 위험은 마치 '나는 가수다'에서 탈락으로 인도하는 죽음의 가수라고 불러지는 '김건모', '임재범'의 노래를 경연에서 부르게 되었을 때 그 가수가 직면해야 하는 위험과도 같은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 작가는 우리말로는  '객기' 일본말로는 '곤조'를 부리게 된다. 자신이 믿는 영화의 정의에 따라서 말이다. 관객에게 새로운 삶의 비젼을 준다는 예술가적 '똘끼'로 충만한 작가라면 다른 것 신경쓰지 않고 고전의 재창조에 목숨을 걸 것이다. 그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쉽고 편하게 관객에게 다가가는 것을 영화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고전을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데만 신경을 쓸 것이다. 즉, 우리는 고전을 다시 어떻게 만드는가를 통해 작가의 자의식마저 유추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다면 2011년 다시금 찾아온 '삼총사'를 만든 폴 W.S 앤더슨은 어떨까?  

 

  그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면 그가 아주 개인적인 작가 영화에서 대중적인 상업영화로 진행해 왔다는 것을 알게된다. 물론 개인적인 작가영화라고 내가 평가하는 '이벤트 호라이즌' 마저 상업적인 영화라는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앤더슨 감독의 개인 필모그래피만 기준해서 본다면 그 영화는 그래도 개인적 자의식이 많이 들어간 영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던 그가 대중적인 상업 영화로 넘어왔을때 무엇보다도 그를 그렇게 인도했던 것은 바로 '게임'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상업영화 '레지던트 이블'은 일본의 게임회사 캡콥의 히트 게임 '바이오 하자드'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즉, 앤더슨에게 있어 지금 지속되고 있는 상업 영화를 떠받치고 있는 중추는 감히 '게임'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 '삼총사 3D'도 마찬가지다. 삼총사가 소개되는 도입부분에서 우리는, 특히나 아라미스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어쩔 수 없이 게임인 '어쎄신크리드'를 떠올리게 된다. 액션의 연출이 참으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렇게 된 데에는 이 영화가 '3D'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한 몫할 것 같다. '3D'는 아무래도 관객에게 3D체험을 많이 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니 진지한 연출 보다는 게임과도 같이 현란하면서도 과장된 연출을 할 수 밖에 없다. 즉 여기에는 이 영화가 3D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에서 애초에 원작의 맛을 그대로 느끼게 해 줄 '환기'의 쾌락은 포기해야 한다는 한계가 지워져 있다. '3D' 자체가 원래 관객에게 작품을 보다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만들어줌으로써 보다 쉽게 다가가려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앤더슨은 영화에 대해 후자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며 '삼총사 3D' 역시 거기에 충실하여 원작과 많은 다른 점을 보여준다. 

 

  여기서 원작과 무엇이 달라졌는지 살짝 비교해보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트레빌'의 부재다. 트레빌은 영화에서 다르타냥의 아버지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총사가 있다고 하면서 그 이름은 차마 말하지 못한 그 사람이다.(영화에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 분명 그러할 것이다.) 원작에서 트레빌은 총사대를 이끌면서 다르타냥에게 일종의 중심을 잡아주는 인물이다. 원래 원작은 그 트레빌과 추기경을 대칭구도로 하면서 트레빌에 속한 총사대와 추기경에 속한 친위대의 집단적 대립 구도다. 하지만 트레빌이 사라지면서 총사대 자체도 사라졌다. 즉 양강구도가 영화에서는 일강구도가 되면서 리슐리외 추기경이 왕마저 능가할 정도로 프랑스 전체의 권력을 가지고 있음이 더욱 강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강조로 왜 추기경이 왕을 폐위시키려 하는지 그 동기는 약화되고 말았다. 사실 이미 왕은 추기경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데 말이다. 

 

 

  그렇게 총사대가 사라짐으로 인해 원작에서 총사대에서 만나서 결투에 이르게 되는 다르타냥과 삼총사의 만남 역시 수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다르타냥이 파리에 올라오자마자 그 삼총사와 오해에서 비롯된 만남을 가지게 된다. 재밌는 것은 아라미스와의 만남이다. 원작에서 다르타냥은 아라미스가 감추고 싶었던 한 아녀자의 손수건을 주워 돌려줌으로써 아라미스를 난처하게 만들고 결국 결투를 하게 되는데 영화에서는 '주차 위반 딱지'로 바꼈다. 아마도 종이가 손수건과 비슷한 얇은 것이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초반에서 모든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은 바로 다르타냥이 고향에서 타고온 '버터컵'이라는 말이다. 살찌고 못생긴 말은 시골에서 갓 상경한 다르타냥을 상징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화에서 말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갈등은 그 말과도 같은 시골 청년 다르타냥에 대한 도시 파리인들의 무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말하겠지만 원작에서 뒤마가 다르타냥으로 하여금 갈등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과 차이가 난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원작과 영화는 아주 다른 길을 걷게 되고 말았다. 

  달타냥이 그들과 악연을 맺게 한 것은 바로 로슈포르' 때문이었다. 그를 뒤쫓다 그만 일이 꼬이고 말았던 것이다. 

                                                                                

 로슈포르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이 영화에서 앤더슨에게 가장 실망한 것은 로슈포르의 묘사다. 로슈포르는 악역이긴 하지만 삼총사를 읽어보신 분이라면 느끼겠지만 작품 내내 미지의 인물로 남아있으면서 다르타냥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죄의식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악마적 존재이다. 사실 로슈포르는 다르타냥에게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과 하이드씨' 처럼 또 하나의 분신 즉 하이드 같은 존재인데 이 영화에서는 로슈포르가 원작에서 가졌던 그 풍부했던 의미를 모조리 제거하고 그저 비열하고 무자비함만 강조한 단순한 악역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것이 가장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은 비단 로슈포르 뿐만 아니라 삼총사의 악역 전부에 미친다. 원작의 버킹엄 공작은 비록 적국인 영국인이지만(프랑스와 영국이 견원지간이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꽤 합리적이고 귀족다운 풍모를 보인다. 더구나 악역도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완전 정반대로 만들어버렸다. 올랜도 블룸이 연기한 영화 속 버킹엄은 그지없이 오만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는 모습만 보여줄 뿐이다. 때문에 이러한 버킹엄과 프랑스의 여왕이 사랑에 빠진다고 생각할 수 없고 그래서 원작에서는 버킹엄과 프랑스 여왕이 연정이 싹터 사랑의 증표로 보내준 보석이 영화에서는 단순히 리슐리외 추기경이 여왕을 몰아낼 심산으로 거짓으로 꾸며낸 증거가 되고 만다. 

 

   그렇게 영화는 사실은 인간적이고 선한 인물들을 오히려 역전시키면서도 유독 밀레디만은 예외로 남겨둔다.  

 

   즉 원작에서 사랑 따위는 발톱의 때보다 못한 것으로 생각하며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자를 이용할 뿐인 밀레디가 영화에서는 다르타냥을 구해주거나 아토스에게 여전히 애정이 있음을 내보이는 등 오히려 인간적 색채가 가미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후 여성의 지위가 그 때보다 격상되었다거나 해서 그리 된 것은 아니다. 차라리 페미니즘적 입장에서 보자면 원작의 밀레디가 훨씬 더 급진적이다. 그녀는 남성중심의 프랑스 사회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밀레디는 다르타냥을 비롯 삼총사에게 전혀 이해불가하면서 속수무책인 존재이기에 더 그렇다. 다르타냥마저 밀레디에게 유혹된다. 더구나 그녀는 다르타냥의 사랑인 콩스탕스를 죽인 장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밀레디의 모습은 그리스 신화에 나왔던 대표적인 악녀 '메데이아'를 연상시킨다. 그 메데이아는 크리스타 볼프에 있어서 완전히 재해석된 바 있다. 밀레디 역시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완전히 재해석될 필요가 있는 여지가 많은 인물이다. 앤더슨이 이번 영화에서 그러한 것을 좀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아쉽게 느껴진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모든 인물의 뒤틀린 변형에는 한 가지 일관된 시선이 느껴진다. 그 시선은 물론 감독 자신의 것으로 그것이 향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귀족적인 것'이다. 즉 앞에서도 말했듯 원작과 영화가 뚜렷이 차이를 나타내는 지점은 바로 '귀족적인 것'에 대한 판단이다. 원작의 뒤마는 '귀족적인 가치'를 지지한다. 그는 특히나 귀족이 가지는 '명예를 소중히 하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다르타냥에게 나타난다. 다르타냥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귀족'으로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그의 '귀족적인 것'을 무시했을 때 다르타냥은 언제나 발끈한다. 적국인 영국의 귀족이지만 버킹엄의 중후한 인간미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앤더슨에게 있어서 귀족은 이미 지난 시대의 유물일 뿐이다. 영화속 다르타냥에게 있는 것은 자존심 뿐이다. '귀족적인 것'은 오로지 배신과 술수 그리고 협잡으로만 연결될 뿐이다. 다르타냥의 자존심은 어차피 그러한 귀족들에게 무시당할 필요없다는 일종의 당당한 선언 같다. 때문에 앤더슨은 적이지만 귀족적인 풍모를 여전히 보여주었던 버킹엄은 비열한 모사꾼으로, 다르타냥의 또 하나의 분신이자 언제나 공정히 승부를 겨루었던 로슈포르는 비겁하고 무자비한 악한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바로 거기에서 뒤마와 앤더슨은 절대적인 차이를 보였으며 때문에 삼총사의 이야기는 달라질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삼총사'는 기존의 대강적인 줄거리만을 따왔을 뿐이고 그 밖의 배경이나 사건이나 그리고 인물은 모두 변형을 가했다. '3D'라는 한계상 오로지 관객에게 쉽고 빠르게 다가가는 것만을 목적했기에 원작에서 풍부했던 인간적 모습은 단순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평면적이 되어버렸고 로슈포르나 밀레디의 묘사에 이르러서는 거의 안타까울 정도의 수준마저 보여주었다. 원작을 모른다면 그럭저럭 액션 영화로 즐길 수 있겠으나 원작의 팬이라면 글쎄 선뜻 동의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이 영화가 일종의 프롤로그와도 같기 때문에 생겨난 한계인지도 모른다. 다르타냥의 아버지가 끝내 '트레빌'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이나 스포일러상 말할 수 없으나 가장 마지막 장면은(이것은 분명 '라로셸 포위전'을 다룬 것이리라) 앞으로 이 영화가 속편으로 이어질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원작의 팬으로서, 이 영화에서 느꼈던 아쉬움과 실망감은 다음 뒷 편이 나올때 까지 잠시 유보해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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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 측 증인
고이즈미 기미코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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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셨습니까? 

 길은 찾기 쉬우셨나요?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이 적막한 밤엔 그저 나를 완전히 잊을 정도로 몰입할 수 있는 미스터리 소설 만큼 또 어울리는 것도 없을 것 같아서 하나 소개나 해 드리려고 오십사 청을 드렸습니다. 네, 테이블에 얌전히 놓여있는 바로 그 책입니다. 들어서 한 번 봐 보시죠... 

 

 

 맞습니다. 고이즈미 기미코... 

 이름에서 바로 알 수 있겠죠? 여성 작가라는 걸. 제목 '변호 측 증인' 말인데요, 어쩐지 아가사 크리스티의 '검찰 측 증인'을 살짝 비튼 것도 같지 않나요? 이건 제 생각이지만 어쩌면 고이즈미 기미코는 그것을 통해 같은 여성 작가인 아가사 크리스티가 바로 자신의 롤-모델임을 나타내려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의 주된 트릭 역시도 작가 자신 소설에서 그 작품을 직접 언급하고 있기까지 합니다만, 아가사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니까요. 뭐, 제가 말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까지겠네요. 트릭의 종류를 말하는 것 까지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말이죠. 조심하지 않을 수 없네요. 그런데 그 말을 그대로 따르다보니 제가 이 책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이  '그냥 읽으세요! 읽으시면 압니다!' 꼭 이것밖에는 없겠더라구요. 제가 뭐 나이키 신발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읽으세요!'라고만 말하자니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지네요. 

 네, 그렇죠. 언제나 고민하는 지점이긴 하죠. 리뷰로서 소개와 독자의 읽는 즐거움이 서로를 다치지 않는 가운데 성립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균형은... 여전히 쉬이 해결되지 않고 있기도 하구요. 특히나 이 소설의 경우는 더 그렇군요. 이 소설의 정말 뛰어난 점은 사용한 그 트릭 자체에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 함구를 해버리니 어쩔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미치오 슈스케를 끌어올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네, 얼마 전 우리나라에도 '달과 게'로 소개되었던 작가이기도 하죠. 그가 이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 누구와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전설의 걸작'이라고 말이죠.  맞습니다. 대단한 격찬이죠. 사실 이 작가가 이 소설에 대한 애정이 정말 큰 가 봐요. 해설 부분도 스스로 썼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저 격찬의 말도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읽고 그 트릭을 알게되면 슈스케의 말에 나도 모르게 수긍을 하게 되더라구요. 

  요즘 작품이냐구요? 아뇨, 처음 나온 건 63년이에요. 그런데 곧 절판되고 그렇게 기억에서 잊혀졌다가 뒤늦게 이 작품의 진가를 발견한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전설의 걸작'으로 회자되기 시작했고 결국 2009년, 그 입소문을 타고 다시 복간되기에 이르렀죠. 아시겠지만 작품이 수십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되살아 나는 경우는 두가지 뿐이죠.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이 있어서이든가 아니면 작품 자체가 고전으로 평가받을 만큼 그 가치가 높다던가... 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그런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미스터리로서가 아니라 작가가 장치해 놓은 트릭 때문이죠. 

  도대체 그 트릭이 어때서 그러냐구요? 거기에 대해서 자세히 말 못한다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말하라면 이렇게 말해야겠네요. 아마 분명히 당신도 그 책을 두 번 읽게 되리라고... 그건 내일의 태양이 뜨는 것 만큼이나 틀림없다고. 그리고 두번째 읽게 될 땐 정말 놀라게 되리라고... 왜냐하면 작가가 정말 아무런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될테니까... 속은 건 바로 읽고 있는 당신 자신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될테니까... 이렇게 말이죠. 

  다소 두리뭉실하게 이렇게 말할게요. 놀랍게도 이 책은 말이죠,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요. 특히나 독서의 습관과 관련해서 말이죠. 그러니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읽고 있는가 이런거에요. 그래요, 당신은 무엇을 읽고 있나요? 그건 확실히, 오로지, 절대적으로 객관적인 외부의 텍스트일까요? 우리는 그렇게 다만 그 텍스트에 담긴 작가의 2차원적으로 새겨진 육성을 듣고 있는 것일 뿐일까요? 혹시 당신은 만화를 읽는가요? 만화에는 말풍선이 있습니다. 그 말풍선엔 그림 속 인물의 대사가 담겨지지요. 그런데 우리는 만화를 읽으면서 그려진 인물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들려오는 것도 같지요. 남자의 경우엔 남자 목소리가 여자의 경우엔 여자 목소리가 웃을 땐 웃음소리가 울땐 울음소리가 말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있는 것은 다만 쓰여진 글자들 뿐입니다. 거기엔 감각적 자극을 일으킬만한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듣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비단 그림이 있는 만화만이 아니지요. 우리는 소설을 읽을 때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이건 어째서일까요? 그런데 이 경험은 그리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이른바 눈으로 읽는 '묵독'이라는 걸 하게되면서 부터 생겨난 경험이고 그 묵독이라는 것은 바로 근대 이후에 생겨난 경험이니까요. 그러니까 그것은 근대 이후에 태어난 소설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다고 해야겠군요.묵독이라 함은 자기 의식 내부에 연극 상연을 위한 하나의 무대를 만들어두는 것과 같지요. 그렇게 그것은 전적으로 내 의식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입니다. 물론 그 공연을 진행시키는 것은 외부의 책입니다만 그것은 연출가와 배우에게 주어진 대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죠. 그것을 관객으로 하여금 희노애락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려면 전적으로 연출가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가 필요합니다. 즉 의식 속에서 그것을 우리가 생생히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죠. 네,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측 증인'은 바로 그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서라는 것이 그저 저자에서 독자로 가는 일방적 과정이 아니라 독자와 저자 쌍방이 하나의 합을 이루어 같이 만들어 가는 과정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 주는 것이지요. 소설이 이루어지는 바탕으로써의 세계 자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며 소설이 제대로 된 이야기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규칙 조차 바로 우리 자신이 정하는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단 한 마디로 말해, 이 '변호 측 증인'은 독서라는 것이 무엇보다 '참여'라는 걸 일러줍니다. 모든 인간을 이성을 가진 독립적 주체로 보았던 근대에 이르러 태어난 소설이 새로이 가져다 준 독서 경험인 '묵독' 자체에 본래적으로 존재하였던 시선, 즉 읽는 자 역시 저자만큼이나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여기는, 그렇게 대화의 참여자로 바라보았던 바로 그것을 다시금 느끼게 합니다. 

  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이 소설이 그렇게 소설의 태초부터 있었던 독자에 대한 본래적인 시선을 다시금 일깨우는 존재라면 그야말로 고생대의 삼엽충이나 암모나이트 화석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당신이 제대로 된 고생물학자라면 그러한 아주 귀한 화석을 발견했을 경우 꼼꼼하게 훑으시겠죠. 어쩌면 우리는 모든 텍스트를 바로 그렇게 바라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돋보기로 들이대듯 세밀하게 말이죠. 아시다시피 좋은 공연은 늘 대본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었을 때 가능하지 않던가요? 푸코가 괜히 '지식의 고고학'이란 말을 한 게 아니죠. 그래, 어떤가요? 고이즈미 기미코의 '변호 측 증인'을 통해 당신의 고고학적 태도의 출발을 연마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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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0-2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저 사진 어떻게 찍으신거예요?
아니 어디에서 저렇게 절묘한 손가락 사진을 찾으셨대요? ^^

진짜요,, 두번 읽게되리라는 말씀이시죠. 접수합니다~

ICE-9 2011-10-28 22:20   좋아요 0 | URL
아, 저 사진의 손가락은 'BAD FINGER'라고 비틀즈가 자신의 레이블 '애플'을 설립하고 처음 발탁해서 키운 그룹의 데뷔앨범 커버에요. 그 위에 책을 놓고 찍은 것이죠^ ^ 우리에겐 잘 알려진 'WITHOUT YOU'의 오리지널 원곡이 이들의 작품이죠.

그리고 반드시 두 번 읽게 되실 겁니다. 제가 보증할게요^ ^

노다웃 2011-11-16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왠지 필이 오네요. 이건 부디 제 맘에 쏙 들었음 좋겠어요. 생각보다 마음에 쏙 드는 미스테리 소설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ICE-9 2011-11-16 10:12   좋아요 0 | URL
제가 노다웃 님의 취향을 모르기에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수작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의 진정한 뒤통수는 그 맞는 순간에 오는 게 아니라 어떻게 맞게 되었는가 깨닫는 순간에 오는데요... 진정한 장인의 기교는 드러나지 않는데 있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는 걸 느끼게 되었습니다. 부디 노다웃님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네요^ ^

2011-11-20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펭클에서 요 리뷰 보자마자 알라딘 들어와서 변호측증인 주문했다죠.
전 이렇게까진 해석 못하겠지만, 역시 엄청난 책이었습니다. :)
오랜만에 뒷통수 치는 맛도 좋았고.
그치만 두 번은 읽지 않았네요. 그저 앞으로 돌아가서 이상하게 생각했던 부분들 되짚어보면서 아하, 했던 정도. 내용 잊어버릴 쯤에야 다시 읽어볼 것 같은데, 그게 언제가 되려나요. 너무 강렬해서 잊혀지지가 않네요. 보통 읽고나서 범인이며, 트릭이며, 추리며 다 잊어버리는 편인데.'-'
오랜만에 신간 미스터리 읽어서 좋았어요. 추천 고맙습니다. 또 괜찮은 거 보이면 한번씩 찔러주세요. ㅎ

ICE-9 2011-11-22 23:08   좋아요 0 | URL
앗 교님! 들려주셨군요^ ^
마음에 드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중반에서 내가 지금까지 뭐 읽은거야? 하는 생각에 정말 거기서 바로 앞으로 달려가 눈에 불을 키고 내가 어디서 속았는지 읽었어야 했어요. 흑흑 제 기억력이 짧아서 그런걸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교님 정말 반갑습니다. 또 좋은 작품 찾게되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

2011-11-23 18:07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반갑고 고맙습니다 :)
그나저나 헤르메스님이 기억력이 짧다면, 전 없는거나 마찬가지일듯 ㅋㅋㅋ
 
부호형사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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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하하! 이거 정말 걸작이다. 간만에 아주 날 자지러지게 만드는 책을 만난 것 같다. 생각해보니 김미령 작가의 '완득이' 이후 처음이다.  마치 IQ178의 천재가 작정을 하고 글을 쓰면 얼마나 자유자재로 능수능란하게 문장을 다룰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장면 전환이 드리볼을 하는 '슬램덩크'의 서태웅 만큼 빠르고 미스터리이면서도 독자의 웃음을 위해 과감히 그 규칙을 파괴하는 모습이 강백호의 리바운드 만큼이나 파격적이고 게다가 정말 웃기려고 작정하여 심어놓은 개그 코드들이 윤대협이 쏘는 3점 슛 처럼 언제 어디에서 느닷없이 날아올지 몰라 무방비한 상태에서 자지러지게 만드니 지하철에서 혹시라도 미친놈이란 소리를 듣지 않도록 주위 상황을 살펴가며 접해야 하는 게 '나꼼수'만은 아님을 깨닫게 한다. 왠지 주성치 스타일의 셜록 홈즈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 책이 바로 '부호형사'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파프리카'처럼 SF작가로 혹은 '섬을 삼킨 돌고래'나 '최후의 끽연자' 처럼 풍자작가로 유명했던 쓰쓰이 야스타카가 무슨 생각이 들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혀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내어놓았던 네 개의 미스터리 소설 중 가장 처음 작품이 바로 이 '부호형사'다. 일본드라마를 즐기시는 분들이라면 이 제목이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이다. 후카다 교코 주연의 드라마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서도 케이블로 방영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게는 영화 '이겨라 승리호(일본 제목으론 '얏타맨')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이기도 한 섹시봄버 하면서도 한 편으론 애잔한 도론죠 히메를 완벽하게 구현했던 그 후카다 교코의 주연작이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드라마였기도 했다. 아무튼 바로 그 '부호형사'의 원작이 바로 이 소설이다. 드라마를 보면서도 설마 그 드라마에 원작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아니 행여 원작이 있더라도 그것이 미스터리 소설이었으리라고는 더욱 생각못했다. 설정과 캐릭터가 너무나 만화적이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혹시 '개구리 중사 케로로'를 보셨다면 거기 나오는 나라그룹의 외동딸 '나라'가 그대로 형사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그 나라가 오매불망 짝사랑하는 우주와 어떻게든 데이트를 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쓰듯이 미스터리 사건을 그렇게 어마어마한 돈으로써 해결하는 것이다. 뭐, 간단히 예를 들자면 밀실 트릭을 알기 위해 회사를 통채로 설립한다든지 서로 적대적인 갱들이 도시에서 회합을 가지는데 감시하기 곤란하니까 최고급 호텔을 통채로 하나 빌려서 거기 묵게 만든다든지 뭐 그렇게 사건을 해결한다. 이 어찌 실소를 금하지 않을 수 없는 만화적인 설정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이 소설을 일본의 3대 SF 작가로도 불리는 바로 그 쓰쓰이 야스타카가 썼으리라곤 더더욱 생각 못했다. 그러니 이 '부호형사'는 내 이마에 딱밤 세 대를 놓듯, 쓰리 콤보의 충격과 함께 찾아온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정말 재밌다. 오로지 IQ 178의 지능을 총동원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배꼽을 잡고 웃으며 뒹굴거리게 할 목적으로 쓰여진 것만 같다. 바나나만 보면 개그 본능을 주체하지 못해 그것을 밟고 넘어지기 위해 달려가는 케로로 처럼 야스타카도 실소든 폭소든 어쨌든 웃기기 위하여 감행할 수 있는 것은 뭐든, 그것이 실험이든 파격이든 다 감행한다. 마치 MTV의 현란한 뮤직비디오 처럼 장면을 능수능란하게 전환한다든지 잘 나가다다 갑자기 독자를 향해 말을 툭 건넨다든지 얘기의 맥락과 전혀 상관없이 덩실덩실 춤을 추며 나오는 서장이라든지... 아무튼 야스타카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독자들이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개그 콘서트'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스터리적으로 약한 것도 아니다. '로트레크 저택 살인사건'에서 보여주었던 솜씨 답게 물론 여기서도 기가 막히는 트릭이 한가지는 있다. 그것이 바로 두번째 에피소드 '밀실의 부호형사'다. 아마도 그 트릭을 풀기란 정말 꽤 곤란할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형사가(아참! 여기서 주인공 형사는 드라마처럼 여자가 아니고 남자다. 최고 재벌의 외동아들이자 헌신적으로 애정을 보내는 미모와 지성을 두루 완벽하게 소유한 약혼녀까지 있는 그야말로 전생에 은하계를 구한 남자다.) 그 트릭을 풀기 위해 회사 하나를 세워야 했던 것이 어쩐지 이해가 될 정도로 어렵다. 흥미가 있으면 한 번 도전해 보는 것도 이제 길어지는 무료한 밤을 위해 좋지 않을까 한다. '부호형사' 드라마 팬이라면 물론이고 간만에 한 번 웃어보고 싶은 분들 역시에게도 적극 추천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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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0-28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기걸려 비실거리면서, 머리 멍한 제게 꼭 필요한 책이군요.
음...... 헤르메스님을 저의 지름신으로 명명해드려야 할 듯. ㅠ
제가 엄청 좋아하는 장르 소설 분야를 이렇게 매혹적으로 쓰는 분은 정말 드문데 말이죠. 클났네요~ ^^

ICE-9 2011-10-28 22:24   좋아요 0 | URL
이런, 감기걸리셨군요.
그런 상황이라면 더욱 더 이 책의 가벼움이 도움이 되실 듯 해요...
옆에 삶은 고구마 놓아두고 먹으면서 만화책 읽는 듯한 느낌도 갖게하거든요^ ^ 준비하시는 일은 잘 되고 계신지요? 늘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얼른 쾌차하시길 바랄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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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
알베르토 망구엘 지음, 조명애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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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년, 일본이 한국전쟁이라는 특수로 인해 패전의 폐허에서 다시금 부활을 위한 기회를 잡게 되었던 그 때. 구로자와 아키라는 '라생문'이란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석권한다. 그 작품은 역시나 일본의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라생문'과 '덤불숲'을 합친 것으로 한 부부와 한 도적이 얽힌 아내의 강간과 남편의 살해사건을 다루는데 관련자들의 진술이 제각각이라 그 진실을 도저히 알아낼 수 없다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난다. 거기서 진실이 끝내 드러나지 않는 것은 관련자 모두가 객관적 입장이 아닌 저마다 주관적인 이해관계가 깊이 들어가 있는 바탕에서 그 사건들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데 아키라는 분명 그 영화로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면에 드러난 냉전체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나타내려 하고 있었다. 즉, 냉전체제라는 것 역시도 그렇게 각자의 이해관계가 깊이 침윤된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각자가 원하는 진실을 절대적 진실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베니스와 아카데미가 최고의 상을 그에게 바친 것은 아마도 이러한 그의 성찰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리라.

 

 

  그 영화를 통해 아키라가 묻는 것은 단적으로 이것이다. 과연 우리가 절대적 진실을 알 수 있겠느냐? 오로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부분적 진실밖에는 없지 않을까 라는 것이다. 그것도 각자의 이해관계만을 관철할 뿐인 그런 진실들인... 이와 비슷한 말을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마스 쿤도 했었다. 그는 우리의 상식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과학적 진실마저도 그 시대 주류 세력들이 담합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종교의 압력에 못 이겨 스스로의 진실을 철회했던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사태라는 것이다. 즉, 주류의 이해관계에 봉사할 수 없는 진실은 여전히 혹세무민의 낭설로 격하되거나 배제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뼈저리게 알게 된다. 진실엔 그림자처럼 내가 원하는 것 역시 결부되어 있음을. 즉 진실이란 오로지 내가 원하는 것만을 혹은 보고자 하는 것만을 비춰주는 또 하나의 욕망의 투사물에 지나지 않음을. 물론 우리는 불과 60년 밖에는 되지 않은 냉전체제의 경험으로 인해 이것들을 이미 잘 알고 있다. 하버마스조차 아예 이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고 우리가 정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은 서로의 욕망을 잘 통제하여 가급적 상대방의 욕망과 조화를 시킬 수 있는 게임의 규칙 즉 ‘담론 윤리’를 제대로 확립하는 것에 있다고까지 말하지 않는가?

 

  ‘그러니 진실은 없다. 적어도 너와 나 사이에 있어서는...’ 오로지 이것만이 진실인 것이다. 다만 있는 것은 서로가 ‘주장하는 진실들’뿐이다. ‘진실’이라는 담론 게임에 참여하는 수많은 참가자들의 이러저러한 욕망들이 깊숙이 투사된 그런 진실들 말이다. 따라서 진실을 주장함은 내 욕망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것과 같으며 여전히 프로이드나 라캉식의 정신분석학적 방법들이 담론 분석에 사용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지금 접속하고 있는 매체는 그 어떤 매체든 수많은 욕망들로 들끓는 용광로에 다름 아닌 것이다.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어떻게든 당신과 접속되기를 바라며 꿈틀거리고 있는 욕망의 케이블들의 다발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글 역시도 그러할 것이다. 어떤 주체든 그리고 어떤 객체든 오로지 부분적 진실 밖에는 가지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수많은 파편화된 욕망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얇은 귀가 아니라 일종의 '감정가' 혹은 '정신분석가'가 되는 것이리라. 혹은 탐정. 그렇게 모든 글을 당신의 내부 깊숙이 들려오는 ‘말’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당신의 개입을 바라는, 판단도 평가도 오로지 읽는 당신에게 달려있는, 한낱 텍스트로 대하는 것. 그것이 데리다가 말했던 ‘말’ 중심주의에서 ‘문자’ 중심주의로 옮겨가야 한다거나 ‘텍스트 외부엔 그 어떤 것도 없다.’란 말의 의미이며 욕망의 태피스트리와도 같은 정보화 물결 속에 우리가 견지해야만 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여기 그와 똑같은 것을 요청하는 하나의 작품이 우리 앞에 있다. 그것이 바로 알베르토 망구엘의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

 

  모든 작가들에겐 그 작가 자신을 나타내는 고유의 표지들이 있다. 대부분 그 표지들은 작가 스스로 천착하는 주제들로 나타날 것인데 그렇다면 알베르토 망구엘 - ‘독서의 역사’라든가 ‘밤의 도서관’ 같은 책에 환장한 이들에게는 더없이 즐거움을 선사했을 책의 저자인, 그래서 그들에게는 생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이름이 높았을 아르헨티나 태생의 작가인 그- 에게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것을 바로 ‘밤의 도서관’의 머리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의 의문에서 이 책은 시작되었다.

신학과 환상문학을 제외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엔 특별한 의미도 없고 뚜렷한 목표도 없 다는 걸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낙관적 인 생각에 사로잡혀 이 세상을 의미와 질서로 포장하려는 처절한 목적을 가지고서 두루마 리와 책 과 컴퓨터에서, 그리고 도서관의 선반에서 이런저런 정보 조각들을 끊임없이 모 아댄다. 하지만 이런 노력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완벽하게 알고 있다. (...)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걸까? (...) 이 책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 알베르토 망구엘, 밤의 도서관 p.11 -

 

  이렇게 그가 천착하는 주제는 ‘우리가 하나의 진실을 온전히 그대로 가질 수 있는가?’에 있다. 그는 그 시도가 운명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시도하는 인간의 욕망 자체에 호기심을 갖는다. 왜 그런가? 왜 우리는 레밍이라는 동물처럼 절망의 낭떠러지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진실이라는 무모한 희망을 위해 그 아래로 기꺼이 뛰어내리는 것일까? ‘밤의 도서관’이 그 의문을 ‘도서관’이라는 것을 통하여 풀어내려 했다면,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는 그 의문을 바로 ‘사람’이라는 것을 통해 풀어내려 한 작품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내리는 결론은, 단순히 말하자면, 그러한 뛰어듦이 지속적으로 가능한 이유는 바로 진실을 찾고자 하는 염원 자체에 이미 그 자신이 원하는 개인적 욕망이 내밀하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는 진실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욕망이 실현되길 바라는 것뿐이다. 그러니 ‘진실’이란 오로지 나만의 개인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면모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자각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자구책, 스스로의 정당화. 바로 그것을 위해 사용하는 한낱 허울 좋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의도되었든 아니든 ‘거짓말쟁이’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망구엘은 말한다. 이러한 그의 말은 무엇보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구성 자체에서 보여지고 있다. 

 

   이 책은 모두 다섯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다섯 부분은 모두 화자를 달리한다. 그들 모두는 아르헨티나에서 오래도록 고문을 받다가 풀려나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 망명한 ‘알레한드로 베빌라쿠아’의 죽음에 대해서 각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나 그 순서의 배치가 눈에 뛴다. 처음 부분 ‘변호’는 실제 이 소설의 작가이기도 한 ‘알베르토 망구엘’의 육성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죽은 베빌라쿠아와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육성(헛소동), 편지(푸른요정), 독백(두려움에 대한 참작)등 스타일을 달리해가며 말한다. 여기서 얼른 드는 의문은 왜 처음 부분 ‘변호’에서 작가인 알베르토 망구엘이 직접적으로 참여했느냐는 것일 터이다. 그것은 단순히 작품의 리얼리티를 위해서였을까? 물론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앞부분 ‘변호’의 이야기들과 뒷부분의 이야기들은 명백하게 차이가 나는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변호’에서 알베르토 망구엘이 들려주는 베빌라쿠아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일종의 공식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즉 거기엔 오로지 알려진 사실들만이 있고 그것은 더 이상 가공의 여지가 없는 ‘공식화’된 사실들이라는 점에서 뒷부분들의 이야기와 절대적인 차이가 난다. 아마도 작가 자신이 직접 소설 속 인물이 되어 얘기를 했던 것도 그러한 ‘공식화’된 사실임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싶다. 이것은 ‘책’ 자체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또한 ‘거짓말 예찬’이라는 베빌라쿠아의 유일한 작품인 책에 대한 미스터리(즉 이 책을 과연 누가 썼느냐 하는 것이다.)이기도 한데 그런 의미에서 ‘변호’는 우리가 직접 물리적으로 대하는 책에 기록된 ‘글’ 자체와 같으며 이로써 우리가 더욱 깨닫게 되는 건 이 소설에서 ‘변호’에서 망구엘이 말했던 부분과 그 뒷부분에서 밝혀지는 진실들이 얼마나 큰 차이가 존재하는 지에서 밝혀지는 것처럼 ‘책’ 자체가 담을 수 있는 진실이 얼마 되지 않으며 담겨진 진실 또한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저자가 바라는 욕망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망구엘은 ‘책’ 자체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변호’를 그렇게 만든 것이며 그 자신 직접 참여하면서까지 그 사실을 강조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강조가 궁극적으로 독자에게 바라는 것은 분명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독자가 텍스터 자체에 무조건적으로 신뢰를 보낼 것이 아니라 관찰하고 분석하는 감정가나 정신분석가 또는 탐정이 되라는 것이다. 이것은 뒷부분들의 이야기들이 가진 형식이 점점 더 ‘사적(私的)인 형식’이 된다는 것에서 더욱 드러난다. 즉 대화에서 더욱 사적인 ‘편지’ 그리고 더더욱 사적인 ‘독백’으로 점증해나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나열은 마치 정신분석가 앞에 누워있는 환자를 분석하는 과정도 흡사하지 아니한가? 이렇게 망구엘은 이 책의 내용이나 구성 모든 것을 다하여 독자에게 주지시키려 한다. 그저 망연하게 책(뿐만 아니라 그 어떤 텍스트든지...)을 읽을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거기에 개입하고 그 글에 투여된 작가의 욕망의 그림자를 발견해내려 애를 써라. 진실은 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욕망과 당신의 욕망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게임 자체에 있다고. 그것이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일 수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제대로 버텨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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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방 모중석 스릴러 클럽 29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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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과 거짓말’

  

  이것은 마이크 리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지만 이 말 만큼 할런 코벤의 작품 세계를 정의 내려 주는 말도 또 없을 듯하다. 이번에 새로 나온 신작 ‘아들의 방(Hold Tight)'의 1장엔 바로 그러한 할런 코벤이 주조하는 작품 세계의 핵심이 담겨져 있다. 그 세계에서 영위되는 일상이란 겉으로 보면 참으로 안정된 것 같지만 실상은 소설에도 나오는 것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의 단 한 번의 공격으로도 언제 어느 때 허물어져 버릴지 모를 허약한 일상이며 그래서 더욱 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이 불안은 단순히 그 일상이 외부의 공격에 훤하게 노출되어 있어서 야기되는 것만은 아니다. 비록 노출되어 있더라도 적의 접근을 알 수 있으면 그다지 불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정말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다가오는 자가 나의 적인지 이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라는 말도 있듯이, 내게 다가오는 자의 그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우리가 알 수 없기에 불안한 것이다. 때문에 프로이드는 과연 예수의 말대로 이웃 사랑이라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웃은 칸트적 의미의 ’사물‘이다. 그 사물은 내 주체의 바깥에 존재하면서 그 자체로 내 존재를 한계 짓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대로 내게 포섭될 수 없는 내 인지의 한계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프로이드는 그것을 ’트라우마‘로 여긴다. 즉 그 사물은 내게 일종의 상처인 것이다. 이웃이라는 타인은 그런 존재다. 칸트의 사물이고 프로이드의 트라우마다. 사르트르에게는 내 실존을 위협하는 방해꾼이었다. 코벤 역시 이 대열에 합류한다. 코벤에게 있어서 ’이웃‘ 또한 전적으로 포용할 수만은 없는 어떤 음험한 것으로 남는다.

 

   더구나 코벤에겐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것이 바로 ’거짓말‘이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다 안다고 자부했던 자들이 어느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존재로 돌변함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은 충격으로 다가오지만 사실상 이러한 돌변 또한 그 내부에 불안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건 간단한 이치다. 타인 내부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우리들은 행여나 있을지도 모를 예측 불허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본능적으로 우리의 진심을 위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건 생존을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기도 하다. 우리 역시도 그런 전략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타인의 비밀이 우리의 거짓말을 유도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비밀‘과 ’위장‘은 타인의 속마음을 내 속마음처럼 알 수 없는 우리들로서는 부득불 서로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그건 하물며 자신이 낳고 키워온 아들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즉 코벤에게 있어 이웃이 더욱 음험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그 비밀을 안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비밀을 더욱 알 수 없게 거짓말 전략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코벤은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거짓말 즉 ’위장‘이라는 전략을 자주 쓰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나 대표적인 것이 범죄자 내시가 살해한 시체를 유기하기 위해 취하는 방법이다.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시체를 전혀 다른 존재로 위장하거나 그가 하지 않았던 비행의 흔적을 거짓으로 꾸며놓는 것이다. 이 내시의 위장은 내시라는 존재 자체가 사회적 공간으로 확대되었다고 볼 수 있는 ’클럽 재규어‘(즉 내시가 절대적 외부적 존재로서의 이웃을 개인화한 상징이라면 클럽 재규어는 그것을 사회화한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역시도 똑같이 취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코벤은 작품에다 적극적으로 거짓말 전략을 구사하는 등장인물들을 집어넣음으로서 우리가 가진 이웃을 음험한 존재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더욱 확실시 한다. 그런데 이러한 ’거짓말‘의 전략은 사실 또 어떻게 보면 의심의 증거만이 아니라 희망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행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단순한 ’돌‘이 아니라 그들 역시도 인식을 하고 생각을 하는 나와 동등한 ’주체‘라는 자각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그 타자들의 행위 때문에 나만의 일방적 공격이 아니라 둘이서 함께 하는 게임을 치르고 있다는 생각을 여실히 하게 된다. 비밀만이 아니라 여기에 거짓말이 더해짐으로 인해 이제 우리의 관계는 게임으로 전환된다. 놀랍게도 코벤 역시 정확히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소설 자체에서 드러난다. 게임 이론의 가장 대표적 이론인 수인의 딜레마(prisoner s dilemma)를 만든 학자인 ’내쉬‘와 이 소설의 범죄자이자 가장 거짓말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자인 ’내시‘가 그 이름에서 거의 똑같다는 것에서...
 

 

 

 

 

  그렇게 코벤은 제안한다.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보자고. 그것이 어쩌면 이 불안으로 점철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주요한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일단 게임으로 바라볼 경우 게임의 참가하는 모든 플레이어들은 다 동등하기 때문이다. 여기엔 권력 효과가 미치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2장에서 티아와 마이크 부부는 아들의 컴퓨터에다 해킹 프로그램을 깐다. 아들의 사생활을 몰래 훔쳐보는 것은 양심에 찔리는 일이지만 그들은 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냥 감행한다. 하지만 결국 그 행위가 불행을 불러온다. 이런 전개를 통하여 코벤은 간단히 말해서 아무리 부모라 하더라도 지켜야 할 것은 지켜야 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들은 아들을 보호한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것은 지나친 행위였고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부모’라는 그렇게 ‘지배자’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소설에서 마이크는 아들 애덤에게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니 자신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는 말까지 한다.). 즉 티아와 마이크는 아들을 오로지 그저 수동적이기만 한 ’사물‘로 대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때문에 코벤은 이러한 아들을 나와 동등한 그리고 대등한 참가자로 인식하기 위해서라도 관계를 게임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한 가지 이유를 더 든다. 앞서도 말했듯 티아와 마이크가 궁극적으로 불행을 초래하게 된 것은 지켜야 할 것이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모라는 권위를 내세워 그 남용을 정당화했다. 해서 가져온 것은 가족 전체가 극심한 위험 속으로 빠져 들게 된 것 뿐이었다. 하마터면 자녀들의 목숨마저 잃어버릴 정도로. 이로써 코벤은 지켜져야 할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함을 극적으로 보여주는데 이는 또한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볼 것에 대한 또 하나의 주요한 이유가 된다. 즉 게임에는 각 참가자는 모두 동등하다는 것 말고 또 하나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중요한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게임의 규칙은 무조건 준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의 승패가 진정한 의미에서 이루어지려면 공정해야 하고 그 공정은 오로지 게임의 규칙을 준수하는 것으로만 보장받는다. 게임의 승패가 진정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그 승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니 화목과 합의를 목적으로 했던 게임은 다시금 혼란 속으로 와해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참가자든 게임의 정해진 규칙을 지키는 것은 필수이며 그것은 자신이 승리할 경우 그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바로 이 게임의 규칙을 우리는 ’관용‘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즉 타자도 나와 동등한 존재이며 똑같이 공정한 게임을 위해 규칙을 지킬 것을 전제하는 것, 이것이다. 그는 이 게임의 규칙으로써의 ’관용‘의 중요성을 작품 곳곳에서 보여준다. 특히나 마이크의 이웃인 ’로리안‘이나 내시를 추적하는 ’뮤즈‘의 에피소드가 그렇고 결국은 선을 넘어버렸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고 마는 ’매리언‘의 에피소드는 이를 더욱 강조한다. 즉, 할런 코벤의 이번 소설 ’아들의 방‘은 코벤이 독자에게 건네는 하나의 진지한 제안이다. 비밀과 거짓말로 영원히 타인을 이해할 수 없어 늘 불안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그래도 이 세상을 제대로 헤쳐 나가기 위하여 필요한 제안 말이다. 관계를 게임으로 바라보자는!  앞에서 보듯 그것은 하물며 전적인 애정을 유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가족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원제인 ‘Hold Tight’도 주제(주제에는 오히려 ‘아들의 방’이라는 제목이 더 적합하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 ‘아들의 방’은 절대적으로 타자가 자리 잡은 공간 자체를 상징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기보다는 비밀과 거짓말로 가득한 이 세상을 헤쳐 나가기 위해 코벤이 제안하는 일종의 태도 같은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물론 책을 읽고 나면 이 제목 자체가 어쩐지 비관적 전망 끝에 나온 자포자기식의 체념적 진술로도 느껴짐을 부정할 수 없다. 한 편으로 할런 코벤의 ’아들의 방‘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에 대해 비관적 시선을 던지는 소설이며 그러한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궤도 위의 롤러코스터처럼 삶을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체념이 짙게 깔린 소설이기도 한 게 사실이다. 여기의 ‘Hold Tight’는 사실 가족을 단단히 ‘붙들어라!’는 것이라기보다는 ‘Show Must Go On’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에필로그처럼 붙은 마지막 장면이 이것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Hold Tight’는 꽤나 반어적으로도 읽힌다. 앞서도 들었지만 주인공 티아와 마이크 부부가 아들의 비밀을 캐기 위해 아들의 컴퓨터에 해킹 시스템을 깔아놓는 것이 특히 그렇다. 여기서 보여준 부모의 사랑으로 위장된 집착 역시 ‘Hold Tight’ 으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이러고 보면 참으로 많은 해석들이 가능한 ‘아들의 방’ 이라는 이 소설 자체가 독자들에게 하나의 게임을 권유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이 소설은 여러 등장인물들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다성악적(Polyphonic)’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목소리들 또한 소설의 후반까지 도대체 어떻게 서로 이어질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만큼 각기 별개의 궤도를 따라서 전개되고 있으니 말이다. 즉 코벤은 제목이든 문장이든 구성이든 자신이 이 소설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하여 소설 전체를 하나의 게임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떤가? 한 번 코벤이 제안하는 이 진지한 게임에 한 번 참여해 보는 것은? 특히나 당신이 만일 솔로라면 이 게임을 끝냈을 때 지금 당신의 처지를 그지없이 다행하게 여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소설은 솔로들의 정신 무장을 위한 하나의 경전이 될 수도 있다. 코벤이 이 소설을 통해 강조하는 것의 다른 하나는 분명 이러한 사회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리스크를 부담해야 하는 것인가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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