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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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평등하다. 누구에게도 조건을 따지지 않고 골고루 영위할 수 있게 해 준다. 모두가 저마다 소유한 시간 속에선 주인인 것이다. 세계란 알고보면 개별적인 시간들의 집합이다. 성당에 있는 모자이크 그림처럼 작고 다양한 개체들의 시간이 한데 모여 전체적인 풍경을 이룬다. 그런 풍경을 역사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자주 어떤 이들만이 역사를 주도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일까? 그건 마치 모자이크 그림의 어떤 한 조각만을 딱 떼어내 보고는 그걸 가지고 그림 전체를 해석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한 권의 책 때문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탄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가 쓴 '태고의 시간들'이란 소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 소설은 수 많은 존재들의 시간들로 이뤄져 있다. 거기엔 사람만 있지 않다. 개나 집 같은 사물의 시간도 포함되고 저 천상에 있는 성모와 천사의 시간도 포함되며 이승의 건너편에 위치하는 유령들의 시간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의 시간이 여기에 다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소설의 첫인상을 무척 독특하게 만든다. 소설도 역사와 다르지 않아서 중심과 주변이 엄연히 존재한다. 대부분 소설의 스포트라이트는 주인공과 사람에게 머무른다. 조연이 주연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소설은 모두 평등하다. 다들 자기만의 시간 속에서 주인인 것과 똑같이. 하물며 사람 아닌 온갖 존재들도 그렇다. 소설은 인간 중심주의를 비롯하여 모든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변방에 있는 존재들까지 모두 중심으로 만든다. 하나의 존재가 이끌어가는 선이 아니라 그 모든 존재가 얽히고설켜 자아내는 다양한 결을 최대한 담으려 하고 가급적 작가의 의도를 배제한 채로 투명하게 독자에게 드러내려 한다. 마치 문명이 만든 인간의 편견을 모조리 벗겨내어 모든 존재가 태고적일 때 가졌던 순수한 모습 그대로를 보이려는 것처럼.


 그 흐름 속에서 우리는 태고와 그것을 둘러싼 예슈코틀레와 고시치나에츠 마을과 백강과 흑강을 마주하고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성과 크워스커가 은둔한 숲을 거닐며 그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 수많은 존재들의 시간들을 유영한다. 이 시간들은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1914년부터 2차 세게대전을 지나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던 실제 폴란드 역사 시간과 중첩된다. 우리는 이렇게 겹쳐진 실제 폴란드 역사 시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시간들이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차와 2차 세계대전과 공산주의 정권 모두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들이니까 말이다. 이들은 이분법에 빠져 있다. 나와 타자가 나뉘고, 나가 될 수 없는 타자는 모두 적으로 간주한다. 우린 실제 역사에서 그런 시간들이 인류에게 얼마나 커다란 피해를 가져왔는지 잘 알고 있다. '태고의 시간들'은 그런 과오의 성찰에서 태어났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인다. 무엇보다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태고라는 마을을 작가가 이렇게 위치하도록 한 걸 보면 말이다.


 태고는 두 개의 강, 그리고 이 두 강의 뒤엉킨 욕망이 만들어낸 세 번째 강의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방앗간 기슭에서 흑강과 백강이 합쳐진 이 세 번째 강은 '강'이라 부른다. 강은 고요하고 충만하게 흘러간다.(p. 7)


 태고는 헤겔 식으로 말하자면 종합 명제(synthese) 자리에 위치한다. 그것은 나와 반대된다고 배척하지 않으며 모두를 포용한다. 이처럼 마을엔 숲으로 상징되는 신화적인 공간과 마을로 대변되는 문명적인 공간이 존재한다. 그런데 소설은 포용이 사라진 세계가 가져오는 비극으로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어 남편 미하우가 러시아 군대로 차출되면서 게노베파와 이뤘던 가정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그 즈음 마을에서 가장 밑바닥의 처지에 있다고 할 수 있는 크워스카 역시 임신한 자신을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숲에서 홀로 출산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소설은 문명이 작위적으로 일으킨 분열의 시간을 마을의 존재들이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지 하나하나 차례로 보여준다. 어떤 이는 문명을 버리고 신화(크워스카)나 광기(플로렌틴카)에게 자신을 맡기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며 문명을 더욱 굳건하게 구축한다(보스키 영감, 교구신부). 이토록 다양한 시도들을 작가는 자신의 판단을 하나도 첨부하지 않으면서 그저 스펙트럼처럼 펼쳐 보여주기만 한다.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서.


 그렇다고 등장하는 모든 존재들을 일면적으로 묘사하는 건 아니다. 이 소설에 대해 내가 특히 놀랐던 것이 바로 이 점인데, 모든 존재들을 하나같이 다양한 면모를 가진 것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남편을 그리워 하면서도 자신의 방앗간에 일하러 온 젊은 청년 엘리에게 자꾸만 이끌리는 자신을 괴로워하는 게노베파는 물론이고 크워스카의 딸로 신화적인 공간에서 태어나 그것을 충분히 경험했으나 문명의 유혹에 쉽게 굴복해 버린 루타 또한 그러하며 독일이 폴란드 점령 당시, 그 점령군으로 온 독일인 쿠르트마저 학살자 면모 못지않게 인간적인 면모 또한 있는 것으로 재현한다. 이만큼 다변화 하는 묘사를 보다보면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어떤 대상이든 간에 단 하나의 규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것을 애써 피하려 한다는 게 느껴진다. 이 감은 그리 틀리지 않아서 사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자주 경계를 넘나드는 게 중요하며 긍정할만한 행위라는 걸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게노베파가 한 남편의 아내라는 사회가 그어놓은 울타리를 넘어 엘리를 사랑하는 것이나, 루타와 게노베파의 아들 이지도르가 서로가 위치한 신화와 문명의 경계를 넘어 서로 좋아하는 것이나 상속자 포피엘스키가 당시 사회의 편견을 넘어 폴란드 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유대인 랍비가 선물한 게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나 다 그렇다. 물론 이건 대표적으로 거론한 예에 불과하다. 소설에서 흔히 보게 되는 월담 행위들이 긍정적이라는 것은 전혀 그런 것을 시도하지 않는 이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대비되어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보스키 영감과 그의 아들이자 훗날 게노베파의 딸 미시아의 남편이 되는 파부아 그리고 익사자 유령인 물까마귀가 여기에 속한다. 자기 혼자만의 영역에 강하게 머무르고자 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타인의 영역에 대하여 관심이 별로 없으며 보다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나 더욱 협소한 장소에 머무르게 될 뿐이다. 물까마귀는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다른 죽은 영혼들과 달리 결코 천상으로 오르지 못하며 늘 자신이 익사한 개울에만 거처하는 것이다.


 익사자는 영혼들이 떠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죽음을 맞는 이런 장소가 따로 있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영혼을 쫓아가려 애썼지만, 그들은 익사자 물까마귀와는 다른 법칙을 따르는 존재였다. 익사자가 관심을 끌기 위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그들은 쳐다보지도, 귀 기울이지도 않았다.(p. 204)


 이런 식의 대조를 통해 우리는 월담, 즉 나의 시간을 벗어나 타인의 시간에 관심을 기울이며 기꺼이 거기로 건너가 서로의 시간을 같이 공유하는 것의 중요성을 더욱 깨닫게 된다. 바로 그런 시간들이 많아졌다면 죄없는 플로렌틴카를 쿠르트가 무참히 학살한 것과 같은 비극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참사를 가져온 동기는 모두 물까마귀처럼 타인의 시간에 무관심하며 오직 자신의 시간만이 중요하다는 확신이 가져온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이 단지 타인의 시간을 건너보기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응시가 되기 위해선   그 바탕에 필요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연민'이다.


 연민은 소설에서 미시아의 수호 천사에 대해 얘기할 때 처음 등장한다.


 천사들만이 갖는 특별한 감정, 즉 애정 어린 연민이 미시아의 천사에게도 차오른다. 이것은 천사들에게 허락된 오직 하나뿐인 감정이다.(p. 15)


 연민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에 대해 소설은 정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소설에 나타난 여러가지 정황으로 추정하건데, 나와 너가 다르지 않고 너의 일이 곧 나의 일이라는 강한 연대 의식을 연민으로 상정하는 것 같다. 이런 연대 의식은 우리 모두가 공동 운명에 처해있기 때문에 발현되는데, 그것은 소설이 대표적으로 이반 무크타의 세상 해석을 통해 잘 보여준 바 대로 우리 모두가 우연 속에 태어나 필멸할 운명이며 후세에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크타의 영향을 받아 이지도르가 해석한 세상의 모습 그대로.


 이지도르가 목격한 모든 것의 속성은 일시적이었다. 겉은 알록달록한 껍데기에 싸여 있지만, 모든 것은 몰락과 부패, 파멸 속으로 융합되었다.(p. 178)


 이반 무크타는 이러한 무신론에 기반한 허무주의 때문에 타인을 건너다 보면서도 아무런 연민을 가지지 않는다. 존재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타인마저 단순히 기계적으로 결합 가능하거나 그러지 못할 존재로 볼 뿐이며 그걸 보여주기 위해 이지도르 앞에서 수간까지 감행한다. 이것으로 작가는 연민이 천사처럼 본능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한다. 천사와 달리 인간에게 있어 연민은 결단을 통해 형성되는 의지의 산물인 것이다. 미시아의 행로도, 문명의 늪 속에 푹 빠졌다가 그것의 독기를 느끼고 하나의 거대한 숲으로써 신화적 공간의 분위기가 다분한 브라질로 떠나는 루타의 여정도, 게임을 통해 삶의 의미라는 것이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고 홀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자각하게 되는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과정도 이것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연민은 이 삶의 끝에 허무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잘 알지만 그것으로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지금 주어진 이 시간을 충실히 경작하겠다는 다짐이며 그런 시간을 나 아닌 당신 역시 같이 머리에 힘겹게 지고 있으니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잘해 보자는 위로이며 응원인 것이다. 그토록 플로렌틴카에게서 원망을 많이 받았던 달이 오히려 그녀에게 따스한 위로를 해주려 했던 것처럼.


 이러한 연민이 만들어내는 삶의 모습은 무엇보다 미시아가 전쟁에서 돌아온 아버지 미하우에게서 받았던 커피 그라인더에게서 잘 나타난다. 그라인더는 단적으로 모든 것을 자기 내부에 제 것처럼 받아들이는 존재다.


 다른 사물들이 그러하듯 그라인더는 세상의 모든 혼란을 자신의 내부로 흡수한다. 폭격당한 기차의 풍경, 고여 있는 핏물, 매년 다른 바람이 불어와 창문을 두드리는 버려진 폐가가 그라인더 속에 저장된다. 그라인더는 차갑게 식어버린 인체의 따뜻함과 익숙한 것을 내팽개칠 수밖에 없는 절망을 자신 안으로 빨아들인다. 사람들이 그라인더에 손을 갖다 댈 때마다 각자의 손길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감정과 생각들이 담겨 있다. 어느 사물들처럼 그라인더 또한 특별한 능력으로 이 모든 걸 흡수한다. 일시적인 것들, 덧없이 지나가는 것들을 자기 안에 붙잡아두려는 것이다.(p. 53)


 이는 게임의 천착을 통해 각성하게 된 상속자 포피엘스키가 말년에 보여주는 모습과 많이 유사하다.


 "아버지는 아예 작은 실험실을 마련하셨어요.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지고, 그 일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분이셨으니까요.(...) 아버지는 신발 밑창과 부츠가 마치 인류를 구원하는 물건이라도 되는 듯 여기셨어요.(p. 318)


 아무리 부정적인 것이라도 내치지 않으며 다른 이들 눈에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것이라도 중요하게 여기고 정성을 다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그라인더와 포피엘스키는 허무의 숙명 속에서 나와 남을 구분하여 그 격리와 차별로 삶의 의미를 구현하려는 문명이 오직 전쟁과 학살이라는 파국을 가져온 것과 달리 미하우가 딸 미시아의 행복을 위해 헌신적으로 만든 집이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이들의 터전이 되듯이 세상에 가장 많은 긍정적인 의미를 만들어낸다. 

 이는 다음과 같은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딸이 하는 말에서 확인된다.


 하긴 어쩌면 정상적인 가정마다 그런 사람이  명씩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우리 안에 있는 모든 광기의 단면들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누군가가요그가 일종의 안전 밸브처럼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해주는 걸수도.(p. 320)


  놀랍게도 작가는 이런 존재들로 인해 세상이 구원받고 있다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하랴? 연민을 강조하는 작가의 말에 설득될 밖에. 물론 이건 작가가 명시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통해서 내가 추리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난 작가의 이러한 말이 이 시간 참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지금의 세상은 2차 대전 중의 폴란드와 다를 바 없이 타인에 대한 차별과 적대가 횡행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서 난무하고 타인의 삶을 함부로 깎아내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혐오의 말부터 내뱉는 일들이 주위에서 현저하게 일어난다. 최근엔 한 연예인이 악플에 시달리다 못해 비극적인 선택을 해버린 일도 있었고 말이다. 우리에게 연민이 있었다면 마주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비극이었다. 그러니 더욱 올가 토카르추크가 드러내지 않고 살며시 내미는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는 미시아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그러므로 우리가   있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함께 숨을  있는 껍데기를 찾아내서 안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버텨내는 것이다.(p. 345 ~ 346)


 맞다. 세상은 우리에게 절대 우호적이지 않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를 넘어 내 집 마련과 인간 관계도 포기하는 '5포'란 말이 나오더니 지금은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7포 세대'란 말마저 공공연히 나오는 현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로움과 비관, 불안과 고통은 점철되기만 한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을 버틸 수 있게 만드는 껍데기만큼 필요한 것도 또 없다. 작가는 같은 운명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껍데기가 되어주자고 말한다. 그것도 자신이 먼저 껍데기가 되어주라고 말이다. '태고의 시간들'을 통해서 그것이 우리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걸 깊이 깨닫게 된 나는 작가의 말에 따르고자 한다. 그래서 이제라도 단단한 껍데기가 되어주기 위해 나 역시 그라인더처럼 연민 속에서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기며 한껏 포용하리라 다짐해 본다. 부디 '태고의 시간들'이 많은 이들에게 전해져서 이러한 연민의 시간에 참여하여 배제된 차별과 혐오로 불편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이 적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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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개자리 빌리암 비스팅 시리즈
예른 리르 호르스트 지음, 이동윤 옮김 / 엘릭시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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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새롭고 유능한 스릴러 작가를 알게 되는 건 커다란 기쁨 중 하나입니다. 이제 또 한 명의 작가를 그 리스트에 추가해야겠네요. 바로 예른 리르 호르스트란 작가입니다. 산유국으로 복지국가로 유명한 이웃 스웨덴 사람들마저 자주 취업자리를 알아본다는 노르웨이 출신이에요. 노르웨이하면 노르딕 느와르의 거장 중 하나인 요 네스뵈가 있는 나라이기도 하죠. 그래서 그런가, 읽으면서 요 네스뵈의 작품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마도 주인공이 같은 경찰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 빌리암 비스팅은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만큼 뛰어난 형사이긴 하지만 한없이 외롭거나 위태롭진 않습니다. 둘 다 아내는 없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으로 비스팅에겐 리네란 딸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이루는 것의 힘겨움을 보여주는 해리 홀레와 딸에게 인정받는 아버지라는 자리를 어엿하게 유지하는 비스팅은 달라도 너무 다르죠. 그런 점이 요 네스뵈의 작품들과 차이점을 뚜렷하게 보여주며 작품의 분위기 또한 한결 더 차분하게 만듭니다. 해리 홀레 시리즈가 '고독'을 강조하고 있다면 호르스트의 비스팅은 '협력' 혹은 '연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에 소개된 소설인 '사냥개 자리'에서 형사인 아버지 비스팅과 기자인 딸 리네가 함께 수사를 하고 있으니까요. 지금까지 수많은 스릴러 소설을 읽었습니다만 이렇게 하나의 사건을 가족이 함께 수사하는 건 처음 보았으므로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 작품이었습니다.




 줄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노르웨이 최고의 민완 형사 빌리암 비스팅. 어려운 사건을 여럿 해결한 공로로 TV 출연까지 하면서 유명인사가 되었지만 최근 그에게 최초로 명성을 안겨다 주었던 17년 전에 일어난 '세실리아 린데 실종 사건'의 핵심 증거가 위조되었다는 것이 그 증거로 체포된 진범의 변호사에 의해 제기됩니다. 언론의 무차별적인 공세 속에서 뚜렷한 증거는 없었지만 비스팅은 문책을 받고 정직을 당하게 됩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보다 그 당시 진범의 알리바이를 제대로 파헤치지 못했다는 미진함 때문에 그는 다시 한 번 과거 사건을 수사해 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 즈음, 살인 사건이 하나 일어납니다. 피해자는 50대 남자였는데 리네는 그 사건을 취재하다가 자신만이 발겨한 단서를 찾아내 그것을 쫗다가 그만 범인과 마주쳐 공격을 당합니다. 이렇게 비스팅은 비스팅대로, 리네는 리네대로 서로에게 닥친 사건을 추적해 가는데, 놀랍게도 두 사건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과연 그 사건들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요? 그리고 비스팅은 과연 증거를 조작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여기에 대한 해답은 뜻밖의 반전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여러가지 신선하게 여겨지는 시도로 가득한 이 소설은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게 읽힙니다. 주인공 비스팅은 밖으론 냉철한 판단력과 뛰어난 수사 능력을 지닌 민완 형사로 보이지만 안으론 지금 곁에 있는 여자 친구와 소원해지는 바람에 고독해 하고 살인과 같은 비극 속에 사라져간 이들에게 경찰로서 과연 본분을 다했는지 거듭 반추하는 따스한 인간미가 흐르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건 딸 리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사회적 자아 이면에 고유한 자신만의 내면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독자가 여실히 느낄 수 있도록 캐릭터 정형을 참 잘했습니다. 거기다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도 과연 경찰 출신 작가답게 무리한 설정 하나없이 얽힌 실타래를 차근차근 자연스럽게 풀어나갑니다. 전개가 뒤로 갈수록 뜨거워지는 요 네스뵈와 다르게 예른 리르 호르스트는 독자를 조용히 침전시킵니다. 그 속에서 소설이 묻고자 하는 질문, 과연 정의에 복무하는 경찰의 본분은 무엇이며 그걸 어떻게 지켜나가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지요. 주저리 주저리 말했지만 '사냥개 자리'는 한 마디로 읽어 볼 만한 작품입니다. 독특한 맛을 주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의 스릴러를 찾으셨다면 노르웨이에서 불현듯 찾아온 이 손님을 한 번 맞이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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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11-14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네스뵈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네요 노르웨이 작가가 요 네스뵈만 있는 건 아닐 테지만... 뭉크도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다는 말 본 것 같기도 해요 이 소설에 나오는 빌리암 비스팅은 해리 홀레와는 다른 형사기도 하군요 형사는 거의 가정이 괜찮지 않기도 하죠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닐 텐데, 왜 소설에서는 거의 그렇게 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사라는 일이라는 걸 생각하게 하는군요


희선

ICE-9 2019-11-15 21:27   좋아요 1 | URL
오! 희선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벌써 11월, 그동안 어떻게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네요. 너무나 반가워 이렇게 인삿말부터 올립니다. 요 네스뵈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에게 해리 홀레는 우리 모두가 지고 있는 실존적 고민을 대신해서 풀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설정을 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비스팅은 그런 책임을 주인공 하나에게 지우는 게 아니라 연대하여 짊어지게 한다는 점에서 제겐 참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와일드 시드
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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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흑인 여성 SF 작가인 옥타비아 버틀러의 가장 대표작인 와일드 시드 발간되었다.

 사실 이번이 처음 출간은 아니다지금은 절판되었는데예전에 오멜라스에서 ‘야생종이란 제목으로 발간된 적이 있다아마도 그것이 장편으론 처음으로 소개된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요즘 ‘82년생 김지영이란 영화가 개봉되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더욱 뜨거워졌는데, ‘와일드 시드 말로 페미니즘적인 시각에서 읽어볼만한 소설이라 생각된다제목인 ‘와일드 시드(야생종)’마저도 어떤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지배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존재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아냥우는 자기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할  알지요.”

 “그래자기 능력의 한도 내에서는하지만  여자는 야생종이야제어하기 힘들지 여자를 제어하는  지쳤다.”(p. 355)





 주인공은 여성인 아냥우. 그녀가 바로 야생종이다.

 ‘와일드 시드 1976년에 발표된 ‘패턴마스터’(그녀의  작품이기도 하다.) 시작한 ‘PATTERNIST 시리즈'  네번  작품으로  시리즈답게 역시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한다물론 아냥우도   하나다소설은 작품 내내 그녀와 대척점을 이루는 도로의 눈을 통해 독자들 앞에 아냥우가 얼마나 특별하며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소개한다일단 그녀는 놀라운 치유 능력이 있으며 성별은 물론 동물까지 신체를 자유롭게 변신시킬  있는데다  백년이 흘러도 늙지 않는 불사의 몸이기도 하다 정도라면 거의 ‘DEMI-GOD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하다도로 또한 아냥우만큼이나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데그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며 타인의 신체를 마음대로 강탈할  있다자신의 존재를 가급적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때로는 아버지로때로는 어머니로  때로는 주술사 할머니로 자식들을 낳고 보호하는 것에만 치중하느라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아냥우를 유일하게 알아보는  또한 도로다그렇게 소설은 도로가 아냥우를 찾아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아냥우는 자신을 알아봤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겠다는 도로를 사랑하게 되지만 이내 그가 상종해선 안되는 악과도 같은 존재라는  깨닫고 반목하게 된다그렇게 17세기 말의 아프리카에서부터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난 19세기 중반까지 도로와 아냥우가 이루는 대립과 갈등의 과정을 담아내고 있는 소설이 바로 ‘와일드 시드.


 아냥우와 도로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의 성격과  소설의 시작이 하필이면 노예무역이 시작된 17세기 말이라는 점이며 끝나는 시점 또한 노예 해방 정책 때문에 벌어진 남북전쟁임을 감안한다면  소설이 독자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무엇보다 지배와 종속의 문제라는 것이 드러난다일단 도로만 봐도 그러하다그는 무려 수천년을 살아왔는데 그가 그토록 오래   있었던 것은 죽을 때가 되면 젊고 건강한 타인의 신체를 마음대로  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그는 타자의 의사에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지배할  있는 사람이다이런 면에서 도로는 권력과 지배의 화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하지만 아냥우는 정반대의 사람이다그는 문제가 생기면  쪽에서 먼저 희생하거나 변화하는 존재다아냥우는 절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다 보다는 그늘에 숨어서 타인을 위해 자기 능력을 쓰는 사람이다그녀가 가진 변신의 능력은 이러한 아냥우의 성격이 그대로 집약된 것이나 마찬가지다도로는 타자의 신체를 취해서까지 절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아냥우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자신을 바꿀  있는 존재이니까 말이다소설에서 아냥우는 도로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건 자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아냥우는 그야말로 타인에게 헌신하는 사랑을 대표하는 모성 상징이라  만하다.


 이러한 아냥우의 자질 때문에 독자인 우리 눈에는 도로보다 아냥우가 훨씬  인간답게 보인다.

 이처럼 아냥우가 도로보다  인간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중요하다왜냐하면 노예무역이 처음 시작되던 17세기 말에 서양 문명은 노예무역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을 문명의 혜택을 통해 인간으로 만들어야 하는 ‘비인간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옥타비아 버틀러가  소설에서 도로와 아냥우를 나란히 두고 ‘누가  인간다운가?’하고 묻는 것은 헤겔마저 순순히 인정했던  담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거기다 도로가 지배하는 공동체는 도로가 마음대로 남의 아내를 취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딸을시아버지와 며느리를 오직 우수한 혈통을 만만든다는 이유로 내키는 대로 교배(소설에 나오는 표현을 그대로 쓴다.)시키는 아주 비윤리적이며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도로는 아내로 삼은 아냥우마저 자기 아들과 결혼시키려 한다그러자 아냥우는 이렇게 거세게 항의한다.


 “ 잘못된  잘못된 거야장소에 따라 바뀌는 일도 있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당신 일족이 짐승의 젖을 마셔서 자기 몸을 더럽히려 한다면 그냥 모른 척하겠어수치를 겪는 것은  사람들이니까하지만 지금은 나에게 수치스러운 짓을 하라고그들보다  끔찍한 인간이 되라고 명령하는 거잖아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 있어도로 나라 자체가 저주받을 거야당신 일족의 작물이 말라 죽을 거라고!”(p. 239)


  항의가 17세기 말뿐이 아니라 여전히 여러가지 편리한 이유를 갖다대며 인종적인 편견과 차별을 유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 대한 것이라 생각해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것이다.


 이렇듯 와일드 시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이란 존재를 제멋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차별에 대해 날서린 비판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작품이다그런 차별을 온갖 이유로 정당화하며 오직 거기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사회라면 당당하게 탈주를 감행하는 야생종이 되라고 말이다그건 사회가 흔히 비정상으로 분류하듯이 우리가 두려워해야  존재가 아니다오히려 그런 편견을 조장하고 그것을 통해 권력을 누리려는 자들보다 훨씬  인간다운 존재들이다이런 점에서 ‘와일드 시드 진정으로 인간답기 위해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도로가 끝내 인간이 되지못하고 홀로 괴물로 남게 되는 것도 이런 취지에서 나온게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까지  소설을 인종차별에 근거해서 얘기했지만 이는 실은 여성차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아냥우가 여성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그녀가 도로와의 관계에서 아내가 되어 하는 것들이나 도로의 공동체에서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는 입지가 그걸  보여준다 글의 처음에서  소설을 페미니즘적으로 볼만한 작품이라고  것도 그래서다사실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멋대로 타인을 재단하고 함부로   있다는 생각들이 알고 보면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말이다차별을 만들고 조장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근본엔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다타인의 인정을 다른 이를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이다하지만 도로처럼 그렇게 하면 할수록 정작 인간의 얼굴을 잃어버릴 뿐이다그들은 사람이 되고자 다른 이들의 얼굴에 괴물의 가면을 씌우지만 그들의 얼굴이 괴물이 되어가는  모르고 있다.


 그런 식으론 아무리 애를 써도 도로(徒努)  뿐이다.

 여기서 도로(徒努) 일이 잘못되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뜻한다물론 옥타비아 버틀러가  도로라는 말을 알고 이름으로 썼을 리는 없지만도로에겐  적절한 이름이 아닐까 한다외롭지 않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는데 마지막에 가선 결국 도로(徒努외롭게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런 도로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나의 인간다움을 진정으로 인정받을  있는지 모색해봐야겠다. ‘와일드 시드에서 아냥우가 걸어간 길은 거기에 아주 좋은 모델이 되어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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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문의 비극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5
고사카이 후보쿠 외 지음, 엄인경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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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르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일본은 미스터리 소설 강국으로 인식된다미스터리 소설 쪽으로 유명한 작가도 많고 해마다 많은 미스터리 소설들이 출간될 뿐만 아니라 독자층도 넓어 판매량도 상당하다일본은 매년 ‘ 미스터리가 대단해 같은 미스터리 소설 대상 작품도 발표하는데우리나라 독자들 또한 어떤 작품이  상을 탔는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진다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일본이 어떻게 해서 그만한 미스터리 소설의 강국이 되었는지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문학의 경우순전한 무에서 창조되는 경우란 없다오늘날 우리가 어떤 문학이 부흥하는  보고 있다면 그건 그것이 지닌 역사 속에서 성장한 것의 결과일  분명하다일본 미스터리 소설 또한 그럴 것이다그러고 보면 일본 미스터리 소설은 역사가 아주 깊다일본에서 소위 근대 소설이라는 것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미스터리 추리 소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그들이 서양 문학 세례를 받았을 가장 적극적으로 소화했던 것이 서양의 미스터리 소설이기도 했다 시기 활동한 에도가와 란포는 서양의 미스터리 소설을 거름 삼아 일본 특유의 추리 소설 세계를 창조했다그건 긴다이치 코스케 탐정 시리즈로 유명한 요코미조 세이시도 마찬가지였다이러한  세대들의 적극적 수용과 독창성을 향한 노력이 시간 속에서 천천히 숙성되어 오늘날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 세계를 구현한 것이 분명하다그러니 아무래도 과거의 일본 미스터리 소설은 과연 어땠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없다.



 

 그러나 오래도록  관심을 충족시킬  있는 기회를 만나기란 어려웠다주로 현대의 일본 미스터리 소설들만 소개될 초창기의 작품들은 거의 소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던 차에 작년정말 반가운 시리즈를 하나 만났다바로 고려대학교 일본추리연구회가 의욕적(2018년에 시작되어 벌써 6권까지 나왔으니 ‘의욕적이라  만하다.)으로 발간하고 있는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여기서는 무엇보다 일본 미스터리 소설 초창기의거의 일본 추리 소설의 원형이라 해도 좋을작품들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덕분에 나는 그동안 나의 고전 일본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호기심을 유일하게 채워주었던 ‘일본의 탐정 소설(‘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 일본 미스터리 소설의 역사를 다루는 책이다.)이란 책에서 오직 이름으로만 접했던 작가와 작품들을 실제로 만날  있게 되었다이처럼 해묵은 호기심을 비로소   있게 되었으니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아무래도 좋아하지 않을  없다.

 

 쓰노다 기쿠오의 중편 작품을 표제작으로 하는 어느 가문의 비극 시리즈  다섯 번째 책이다여기엔. ‘법의학자’ 출신답게 주로 자신의 전공인 의학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작품을 썼으며 ‘에도가와 란포 스승으로도 유명한 고사카이 후보쿠 단편  (‘’연애 곡선’, ‘투쟁’) ‘에도가와 란포’, ‘오시타 우다루 함께 ‘일본 탐정 소설의 3 거성으로 불리며 흔히 ‘사회파 추리소설 구분하기 부르는 말로 순수하게 미스터리 해결에만 집중하는 추리소설을 일컫는 본격이란 단어를 처음 썼던  고가 사부로 단편  (‘호박 파이프’, ‘꾀꼬리의 탄식’) 그리고  고가 사부로를 추리 소설 작가로 입문하게 했으며  역시 3 거성  하나인 오시타 우다루 ‘이란 단편 하나와 앞서 말한요코미조 세이시와 더불어 장편 추리소설의 시대를 함께 열었던 쓰노다 기쿠오 ‘어느 가문의 비극 실려 있다.  모두  이름은 익히 들었지만 정작 작품은  어디서도 만나볼  없었던 이들이라 특히  반가웠던 책이다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고카사이 후보쿠의 ‘연애 곡선이다

 제목만으로 내용이 얼른 짐작되지 않는  단편은 정말 제목 그대로 연애 곡선을 소재로 하고 있다이야기는  결혼을 앞둔  남자가 받은  통의 편지로 시작한다 편지는  의학자가  것으로 알고보니 그는 남자가 결혼하려는 여인을 오래도록 사랑한 사람으로 남자 때문에 커다란 실연을 겪어 그것을 기회로 마침내 연애 곡선을 발견하게 되었다면서  과정을 소상하게 밝힌 것이었다 ‘연애 곡선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곡선이 과연 어떻게 미스터리로 형상화되는지 궁금하다면    들여다볼 것을 권한다법의학 출신 작가답게  과정이  설득력있게 재현되어 있으며 추리소설다운 마무리도 일품이다뒤이은 ‘투쟁 얼마 전에 작고한 천재 의학 교수인 모리가 마지막으로 맡았던 기타자와란 남자의 자살 사건을  제자가 친구에게 소개하는 편지로  소설이다지병으로 39세에 요절한 작가가 거의 마지막에 발표한 작품으로 어쩌면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는 단편이다마지막에 밝혀지는 놀라운 진실은 사건의 배후에서 이뤄진  천재 교수의 불꽃 튀는 대결을 보여주는데(제목이 ‘투쟁   때문이다.), 이러한 천재의 대결에서   작가가 에도가와 란포의 스승으로 불리워지는지 알것 같기도 하다뛰어난 지성을 지닌 천재들의 대결은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에서 자주   있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이어서 만나본 고가 사부로  단편은   작가가 일본 추리소설 3 거성  하나인지 짐작하게 했다그가 처음 만든 말이기도  본격 맛을 충분히 지향하면서도 2 세계 대전(꾀꼬리의 탄식) 관동 대지진(호박 파이프같은 거대한 자연 재해가 가져다  사회적 충격의 여파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덕분에 요코미조 세이시가  보여준미스터리와 기존 사회 질서의 몰락을 교묘하게  뒤섞는 것이 어디서 연원한 것인지    있었다호박 파이프 등장한 자경단의 설정이나 범인의 진실된 정체는 경찰로 대표되는 기존의 사회 질서가 이제 더이상 지속될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느끼게 했으며 그건 2 대전 이후 가속화된 화족의 몰락을 중점적으로 그리고 있는 꾀꼬리의 탄식에서도 여전했다흥미로운 설정에 기반하여 호기심을 유발하는 미스터리를 계속 발생시키며 끝까지 결말을 궁금하게 만들어가는 능력도 좋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맥락 속에다 집어넣어 급격하게 변해버린 사회적 상황 앞에서 자신의 무력감과 혼돈을 곱씹는 그당시 일본인들의 자화상을 세밀하게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때로 범죄를 다루는 미스터리 소설은 범죄라는 상황 때문에 순문학보다 인간이나 시대상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낼  있는데 그런  느끼게   작품들이었다때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식의 해결로 인해 조금 흠이 보이 하지만 감히 명성에 걸맞는 작품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시리즈가 처음 시작될 때 나왔던 책들과 나란히 함께 찍어보았다.]

 

 

  미스터리 보다 유일하게 심리 묘사에  많이 치중하여 이색적인 색채로 다가오는 오시타 우다루의 ‘ ‘대지진이 일어나기 1 전인 1922이라는 작중 언급이 없다면 그대로 최근 나온 일본 추리소설로 믿을만한 소재와 전개를 보여주고 있어 한층  흥미롭다요즘 나오는 일본 추리소설에서 자주 다루는 붕괴한 가정과 그로인해 혼란과 불안에 휩싸인 자녀의 심리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또한 고가 사부로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당대 사회의 맥락 속에 넣어 해석할  있다여기서 모든 갈등의 원천이 되는 주인공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리한 교육을 멋대로 강요하는 폭군이자 아내에게 늘상 가정 폭력을 행사하는 존재로 이러한 그는 그대로 전쟁을 획책하며 국민을 강제 동원하던 군국주의 국가 일본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소설은 불현듯 찾아온 아버지의 죽음이 가진 미스터리의 진실과 그것이 남긴 여파를 차분하게 그려나가고 있는데그런 전개 속에서 폐인의 궤적을 거듭하는 아들의 모습과 아버지와 전혀 다른 인생 항로를 걷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군국주의 국가 일본이 가져올 미래와  병폐를 가급적 억제할 대안은 어떤 것인지 슬며시 드러내고 있다  편에다 짧은 분량의 작품이라 과연 들었던 명성대로 오시타 우다루의 역량을 확인할  있을까 조금 걱정했었는데충분히 만끽할  있어서 더욱 만족스러운 소설이었다.

 

 마지막은 표제작이자 가장 ‘본격’ 미스터리의 맛을 보여준 쓰노다 기쿠오 ‘어느 가문의 비극이다만일 당신이 오직 재미를 위해  책을 선택했다면 바로 그걸  작품에서 흠뻑 맛볼  있을 것이다. 1947년에 발표되었지만(원래 제목은 ‘총구를 마주하고 웃는 남자였다.) 소설이 묘사한 시대상을 논외로 한다면 그렇게 오래되었다고 전혀 여겨지지 않으며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이중삼중의 미스터리와 반전이 전해주는 재미를 생각한다면 이런 작품이  이제야 소개되었는지 의아함마저 느끼게 했던 작품이었다재미가 가득한 작품이므로  내가 이런 재미를 느끼게 되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이야기를 소개하지 않을  없을  같다그래서 가급적 간략하게 소개해 본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다카기 고헤이가 자신의 침대에서 얼굴에 총을 맞아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평소 하녀를 포함 여동생친아들까지 포함해 여러 사람에게 아주 잔인하게 굴었던 그이기에 살인 동기를 가진 용의자가  많은 상황이다거기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오후 3시의 알리바이가 모두에게  있다과연 다카기 고헤이는 누구에게 살해된 것인가여기에 가가미 게이스케는   사람을 의심한다그건 바로 고헤이의 친아들 고로가가미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카페에서 그가 소동을 일으키는  목격한 적이 있다이것이 바로 소설의  장면이기도 하다거기서 가가미는 고로가 계속 시간을 상기시키는 것에 의혹을 가진다나중에 살해 시각이 하필이면 고로가 소동을 일으켰던 시간과 동일하여 그에게 완벽한 알리바이가 성립되자 고로에게 향하는 의혹의 시선은 한층  짙어진다그러던 차에 고로와 연인으로 알려진 하녀 유코가 자신이 고헤이를 살해했다고 자백한다그러나 드러난 증거에 비추어 누군가를 비호하기 위해 유코가 일부러 자백했다는  밝혀지고 가가미는 유코가 고로를 위해 거짓 자백한 것으로 판단하고 집요하게 고로를 뒤쫓는다그런데 그만 고로가 살해되는 일이 벌어진다중요한 용의자였던 고로가 갑자기 살해되자 사건은 더욱 미궁에 빠지고 그러던 차에 새롭게 용의자가 나타난다과연 그가 진범일까?

 

 이런 식으로처음부터 진실을 알고 싶게 만드는 설정을  하고 던져주더니 그걸 계속 거듭된 수수께끼로 불려나가 결말을 도저히 궁금하지 않을  없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알리바이 깨드리기와 비밀 장치 살인 그리고 뜻밖의 범인  셜록 홈즈와 엘큘 포와로혹은 란포의 ‘아케치 코코로 긴다이치 코스케 같은 탐정이 활약하는 고전 추리소설의 스타일이 아주  살아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좋아한다면 정말 환호작약하지 않을  없을 것이다적어도 나는 그랬다그러나 이런 재미도 재미지만 소설을 말할  무엇보다 빼놓지 말아야  것이 있다바로 탐정 캐릭터형사인 가가미 바로  존재인데언뜻 조르주 심농의 유명한 형사 ‘매그레 연상시키기도 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가급적 말없는 관찰자로 자처하며 오직 수사에만 묵묵히 전념한다탐정은 보통 수다스러운 편인지만 가가미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그것이 한없이 개성적인 색채를 지녀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이다사실 이처럼 흔치 않은 캐릭터는 양날의 검이다 묘사하면 더없이 매력적으로 여겨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저 허무맹랑하게 생각되기 십상이다바로 그걸 나누는 것이 작가가 자신의 캐릭터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인데쓰노다 기쿠오는 전자다그리 무리하지 않은 설정과 필치로 가가미란 캐릭터를 설득력있게 형상화하는 것을 보노라면 자신의 캐릭터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  없다덕분에 매력이  살아난 가가미 형사가 활약하는 또다른 작품을 만나고 싶어진다 마지막에 실려 있는 작가의 약력을 보니 정말 많은 작품들을 출간했던데부디  하나로 그치지 말고 다른 작품들도 소개되었으면 좋겠다이왕이면 가가미 형사가 활약하는 것으로.

 

 처음엔 오랜 호기심으로 잡아  시리즈였지만 책이 거듭될 수록 예전엔 미처  매력을 몰랐던 작가와 작품들을 새롭게 만나는 재미가  컸던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이번에 만난 ‘어느 가문의 비극 내가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를 다시   크게 확인시켜  책이었다더구나 추리소설이 그리 발달하지 않은 시기에도 그저 재미만 추구하지 않고 작가가 직면한 시대의 어둠과 고통을 담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더욱 뜻깊었다사람에게 새로운 것을 알게되어 인식의 지평이 날로 확대되는 것만큼 좋은 일로 다가오는 것도  없을 것이다적어도 일본 추리소설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하게 그런 좋은 것을 느끼게  주는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가 앞으로도 꾸준히 발간되어 더욱  많은 읽고 아는 재미를 경험하게  주었으면 좋겠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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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변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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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으로 글을 시작해 보고 싶다. 나라는 정체성은 정말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이들을 보면 뇌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 같다. 지인도 잊고, 가족도 잊고, 끝내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리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뇌를 다른 사람에게 이식한다면, 이식된 그 사람 또한 뇌로 인해 뇌가 가진 정체성을 가져버리게 되는 것일까? 모든 장기 이식이 가능해진 이 시대에 뇌 또한 언젠가 이식되지 말란 법은 없기에 이런 호기심을 품어보는 것도 그리 몽상만은 아니리라. 그렇지 않아도 예전 어떤 책에서 심장을 이식 당한 이가 그 심장을 기증한 이의 부모에게 마치 자기 부모를 만나는 것만 같은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는 걸 읽은 적이 있다. 기억과 사유가 불가능한 심장마저 그러하다면 뇌가 이식되었을 경우 정체성의 혼란 혹은 변화는 아무래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갑작스레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최근 이런 소재를 다루고 있는 소설 하나를 만났기 때문이다.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사소한 변화'다.원래는 91년에 발표된 '변신'이라고 한다. 그것을 완전히 새롭게 번역하고 저자와 협의를 거쳐 '사소한 변화'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발간했다고 한다.




 이야기는 주인공 나루세 준이치가 부동산 중개사 사무실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범인에게서 창문으로 도망치는 소녀를 구하려다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나루세는 죽지 않았다. 도겐 박사가 세계 최초로 성인 뇌이식 수술을 성공하여 다른 이의 뇌를 이식한 채, 멀쩡하게 살아난다. 이대로 기적처럼 두번 째로 주어진 새로운 삶을 사랑하는 메구미와 함께 살아가나 했는데 살다보니 차츰 자신에게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나루세는 원래 그림을 좋아하고 메구미의 초상화를 즐겨 그렸었는데, 어느새 그림에게 관심이 없어지고 예전만큼 그림도 잘 그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예전에 아주 즐기며 보았던 영화들조차 이젠 아무런 재미를 느낄 수 없고 눈물을 흘리며 보았던 영화조차 따분하게 생각될 뿐이다. 변한 건, 취향과 능력만이 아니다. 성격까지 변해서 주위 사람과 별 트러블 없이 잘 지내던 그가 곧잘 타인들을 비난하고 폭력까지 휘두르게 된다. 자꾸만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자신에게 혼란을 느끼면서도 죽을 뻔했던 사건의 후유증이라 여기며 넘겼지만 더이상 그럴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메구미에 대한 마음이 변하여 이제 더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옆 방에 살고 있는 대학생이 하도 한심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 분노가 치밀어오른 커다란 살의를 가지게 된 것이다. 칼까지 거머쥐고 들어가서 죽여버릴까 문 앞에서 서성일 정도로.


 제목처럼 더이상 사소한 변화로 치부할 수 없게 된 나루세는 이렇게 된 이유가 뇌 이식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이식된 뇌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도겐 박사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것을 철저히 비밀에 붙이고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한 도겐 박사의 반응에 더욱 의혹을 가지게 된 나루세는 혼자 힘으로 뇌를 기증한 자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아주 충격적인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나루세 준이치는 뇌를 통째로 이식당한 것은 아니다. 그저 회생시킬 수 없는 일부를 이식받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이치는 변화를 느낀다. 점점 더 기증자의 취향과 성격이 되고 기증차럼 행동하고 생각하게 된다. 육체는 온전히 준이치의 것이지만, 그는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뇌는 그냥 뇌일 뿐이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도 10만 분의 1이라는 기적의 확률로 다시 얻게 된 삶이니만큼 그냥 삶의 새로운 출발이라고 받아들이면 안되겠느냐고 말하는 도겐 박사에게 준이치가 이렇게 절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당신은 몰라. 뇌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고 지껄이는 당신은 말이야. 뇌는 특별한 거야. 당신이 상상이나 할 수 있어?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내가 달라. 내일 눈을 뜨면 거기 있는 건 오늘의 내가 아니지. 먼 과거의 추억은 전혀 다른 사람 것이 되고 말지.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아. 오랜 시간을 들여 남겨온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려. 그게 어떤 건지 아나? 가르쳐줄까? 그건... (...) 그건 죽음이야. 살아 있다는 건 그저 숨이나 쉬고 심장이 뛰는 게 아니야. 뇌파가 나온다고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 산다는 건 발자국을 남기는 거지. 뒤에 남은 발자국을 보며 저건 분명 내가 낸 거라고 알 수 있어야 살아 있는 거야. 하지만 지금 나는 예전에 남긴 발자국을 봐도 내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이십 년 이상 살아온 나루세 준이치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고."(p. 270)


 자신은 사라져버릴 것이라며 준이치가 예견한 그대로 준이치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다. 원래 제목 그대로 '변신'하는 것이다. 파리 하나 죽이지 못했던 그가 단지 시끄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개의 목을 자르고 끝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운명은 가혹하게도 10만 분의 1의 확률로 일어난 기적을 그대로 저주로 바꿔버린 것이다. 도대체 누구의 뇌이기에 준이치를 차가운 살인마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과연 준이치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는 가운데 이제 준이치의 살의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인 히무라 메구미에게로 향한다.


 일본에서 100쇄나 찍고 무려 125만 부나 팔린 작품답게 꽤 흥미롭고 재밌는 작품이다. 뇌 이식이라는, 다소 공상과학적인 설정이지만 탄탄한 리얼리티로 독자를 무리없이 그 세계에 안착하도록 하고 있으며 타인의 뇌 이식과 관련된 정체성 혼란의 문제도 나루세 준이치를 둘러싼 일상의 변화와 심리의 세세한 묘사를 통해 독자 피부에 와 닿도록 만들고 있다. 때문에 후반에 가서 이뤄지는 나루세 준이치의 청천벽력 같은 변화도 그리 허황되게 여겨지지 않는다. 뇌 이식과 완전히 달라지는 정체성 때문에 여러모로 조던 필의 영화 '겟 아웃'이 연상되는데, '사소한 변화' 또한 그 영화만큼 흥미로운 텍스트이니 그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면 이 소설 또한 만나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도겐 박사의 이름 때문에 히가시노 게이고가 혹시 이 소설을 오마쥬 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양서류 인간'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SF 작가인 알렉산더 벨라예프의 '도웰교수의 머리'라는 소설이다. 


 우리나라엔 70년대에 아동용 SF로 이렇게 소개된 적이 있다.

그 때의 홍보 문구가 '죽었어야 할 도웰 박사가 머리만 살아 있다니!'였다.


 벨라예프의 데뷔작으로 러시아에서 영화까지 만들어진 바 있다. 거기서 죽은 인간을 되살리기 위해 뇌를 연구하는 학자가 바로 도웰 교수다. 뇌를 통해 죽은 자를 되살린다는 점에서 둘이 하고 있는 일도 유사하므로 '도겐'이란 이름은 이 '도웰'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그런데 비슷한 건 이 하나만은 아니다. 그 소설에서 권총에 맞아 숨져 나중에 머리만 다시 살아있게 되는 카페의 댄서, 빌케는 나루세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과정과 비슷하고 또한 그 빌케는 나중에 다른 어떤 여성의 신체와 접합하여 온전한 육체를 소유하게 되는데 그 원래 신체의 주인은 화가였고 빌케는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음악을 좋아한다는 점도 '사소한 변화'의 설정과 닮아 보인다. 이 정도라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작품을 쓰면서 벨라예프 작품에 영감을 받았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그렇다고 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말길 바란다. 그저 '사소한 변화'를 좀 더 재밌게 즐기기 위한 조미료 같은 거라 생각해주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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