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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 당신에게도 헤밍웨이가 건네는 한 잔의 마티니를... (공감10 댓글2 먼댓글0)
<킬리만자로의 눈>
2012-06-15
킬리만자로의 눈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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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울이 비처럼 내리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비에 젖은 채 보도 위에 납작 엎드린 꽃잎처럼 하염없이 무기력해진다. 넥타이가 그저 올가미 같고 삶이란 게 그렇게 또 교수대에 매어 달린 것처럼 버둥거리기만 하다 끝나버릴 것도 같다. 그런 날엔 생각나는 술이 있다. 바로 '마티니'이다. 헤밍웨이가 그렇게도 좋아했다고 하는 마티니. 그는 종군기자 시절에도 아예 두 개의 수통에다 진과 베르무트를 따로 갖고 다니면서 틈날 때 마다 섞어서 마실 정도로 애호가였다고 한다. 이번에 나온 단편집 '킬리만자로의 눈'을 읽어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남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비애가 마치 아쿠아 블루의 수족관처럼 가득 차 있어서 놀라웠는데 때문에 왜 헤밍웨이가 그토록 마티니를 좋아했는지 알만했다. 독은 독으로 다스린다는 말도 있듯이 독과 다름없이 영혼을 좀먹는 이런 끝 모를 우울엔 그야말로 독한 마티니가 제격이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삶은 빈 의자와도 같다. 누군가 와서 앉아주기를 기다리는 빈 의자...

  홀로라서 외롭고 세상이 가진 크기에 비해 턱없이 작아서 공허한 우리들은 그렇게 빈 의자마냥 누군가 와서 채워주고 다른 무엇으로 거길 메워주길 바란다. 의자가 누군가 앉아주지 않는다면 더 이상 의자로써의 의미가 없다고 흔히 생각되듯이 그렇게 나의 고독도 나의 결여도 오로지 내 부족함과 약함의 증표인 것만 같아서 우리는 겁먹은 짐승마냥 잔뜩 움츠러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제발 누군가 다가와서 이 버둥거리는 발목을 단단히 잡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깥으로, 타인에게로 자꾸만 시선을 던지는 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자신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바라보지는 않고 말이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다르다.

  적어도 '킬리만자로의 눈'이라는 이 단편집에서 보여 지는 헤밍웨이는 확실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누군가 채워주길 바라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고독한 빈 의자로 남고 싶어 하는 쪽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역자의 해설을 보면 이 단편집의 단편들은 시간의 역순으로 배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마치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한 삶의 최후에서 그 최초로 역행하는 하나의 여정처럼 엮어져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여정에서 우리는 그러한 헤밍웨이의 의지를 보게 된다. 헤밍웨이 최고의 단편이라고 평가받는 첫 작품 '킬리만자로 눈'에서 마지막 작품 '인디언 마을'까지 이르는 하나의 여정이 그야말로 지속적인 결별을 통한 자초(自招)하는 고립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관계를 속박으로 여긴다.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관계가 '영혼의 지방(脂肪)(p.24)'이 되어 자유롭게 위해서는 깃털처럼 가벼워야만 하는 영혼에다 자꾸 무게를 주고 둔중하게 만들어 현실이라는 중력에다 길들이기 때문이다. 즉 저절로 '유쾌한 굴복의 삶을 묵인(p.31)'하게 하기에 헤밍웨이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고립되려 한다. '하얀 코끼리 같은 산'에서의 남자처럼 여자에게 낙태를 강요하고 '인디언 마을'의 인디언 아버지처럼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자살해 버린다. '심장이 둘인 큰 강'같은 단편은 아예 홀로 있음으로 인해 완벽한 유토피아가 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도 모자라 모든 단편이 상실과 그에 대한 두려움으로 끝나는 것과는 달리 이 단편만은 영원히 그 좋았던 시간이 이어질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끝나기까지 한다.

 

  결국 헤밍웨이는 관계의 단절로 인해 남게 되는 에너지를 이제 사냥에다 쏟는다. 헤밍웨이는 단편집 내내 사냥을 주된 모티브로 반복해서 보여준다. 예로부터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은 사냥을 하면 육체만이 아니라 그 영혼까지 취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즉 사냥한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 단편집에서 사냥이 그토록 반복되는 이유가 있다. 다시 말해 사냥은 자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의 투영이며 바로 그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 자체의 상징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단편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에서 나오는 말이기도 한 '이 푸에스 나다 이 나다 이 푸에스 나다('또 어, 허무 또 허무 또 어, 허무'라는 뜻. p.132)'처럼 궁극적으로 '나다(허무)'를 향해 갈 수 밖에 없는 삶에 있어서 유일하게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 사냥이 구원인 것은 그 사냥을 못하게 되었을 때 등장인물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보면 드러나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킬리만자로의 눈'에서의 해리, '깨끗하고 불이 환한 곳'에서의 홀로 카페에서 죽치는 노인 그리고 '살인자들'에서의 권투선수 올레 안드레손이 그렇다. 그들은 모두 사냥이든 낚시든 아무튼 포괄적으로 말해 그 어떠한 포획 행위도 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삶은 나날이 권태와 무기력만 쌓여가는 지루한 퇴적물에 다름 아니며 사냥을 하지 못하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문득 죽음이라는 순백의 눈 아래 묻히게 될 때까지 그저 기다리는 것 밖에는 없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 헤밍웨이는 사냥이 하나의 구원적 행위임을 드러내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관계를 가지게 만들고 삶에 매달리게 만드는 모든 두려움들 역시 바로 이 사냥이 없음으로 비롯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즉 사냥을 하지 않을 때 그들이 듣게 되는 소리를 통해서다. 해리는 하이에나의 소리를 듣고 머콤비는 사자의 소리를 들으며 '이제 내 몸을 뉘며'에서의 닉 애덤스는 시간을 의미하는 누에가 잎을 갉아먹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 모든 소리는 그들에게 초조함과 두려움을 준다. 

 

 

 

  도대체 사냥이 무엇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삶에 집착하게 만드는 근본적 두려움까지 없앨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죽음의 태도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죽음은 어차피 한 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로서는 오로지 긍정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라고 본다. 죽음 뒤에 남겨지는 것이 오로지 허무밖에 없다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아무 것도 남겨두고 싶지 않으니까." 남자가 말했다. "뒤에 아무것도 남겨두고 싶지 않아" (p.22)

 

  그러니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 죽음을 대하는 태도다. 여기서 사냥을 다시금 생각해보면 사냥이란 '프랜시스 머콤버의 짧고 행복한 삶'에서 잘 드러나듯 매순간 죽음과 대면하게 만드는 것이며 이 단편의 사자 에피소드에서 보듯 최후까지 그 대상과 투쟁하는 가운데 죽음을 도래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죽음을 회피하거나 그저 굴복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 대해 끝까지 당당하게 맞서게 한다. 그래서 그 무엇도 아닌 오로지 본래의 나로서 죽을 수 있도록 말이다. 즉 사냥은 그 대상과 겨루면서 그 대상과 자신에 대한 순수한 몰입으로 인해 그 무엇도 아닌 온전한 자기 자신인 존재가 되게 한다. 다시 말해 대낮 같이 환한 자신에게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헤밍웨이는 사냥을 구원적 행위로까지 여긴다. 왜냐하면 '킬리만자로의 눈'의 해리에게서 대표되듯이 그들이 결국 무력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는 건 억지로 스스로를 세상에다 결부시켰기 때문이다. 사냥은 바로 이 족쇄를 끊는 다. 즉 세상으로 부터 자신을 다시금 스스로 탈취하는 것이다.때문에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죽음 조차도 그냥 죽음이 아니요 오히려 해방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역시 '킬리만자로의 눈'에서의 해리의 마지막 꿈에서도 잘 드러나지만 머콤버가 물소 사냥을 통해 본래의 자신을 자각하고 그래서 현실을 상징하는 아내 마고의 세계에서 결별하게 되는 그 순간, 마고가 쏜 총에 의해 죽을 때 눈부신 빛과 함께 해방되는 것처럼 묘사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이쯤 이르면 이제 헤밍웨이가 이 단편집 전체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는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필연적으로 한 번은 도래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겸허히 긍정하고 그것이 도래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마치 투우사가 목숨을 걸고 황소와 겨루듯 최선을 다해 살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최선이란 현실의 안락함을 위해 나를 죽이고 굴종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러한 현실의 달콤한 유혹과 타협을 거부하고 본연의 자신답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즉 머콤비 에피소드에서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사냥꾼들에게 맞섰던 사자처럼 자기 존재의 위엄을 끝끝내 고수하는 가운데 있어서의 최선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모든 두려움은 바깥의 것으로 제거하기 위해 해리처럼 거짓말로 스스로를 속이거나(p.25) 머콤버처럼 삶을 제대로 마주 대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p.87)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두려움을 지우려고 바깥이나 타인에게 눈을 돌리면 돌릴수록 더욱 더 두려워질 뿐인 것이다. 그러니 진정으로 두렵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 시선을 돌려 스스로를 먼저 보아야 한다. 사냥이 두려움을 없애주는 것은 바로 그 귀환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또한 헤밍웨이가 소설 속 닉 애덤스 홀로 완벽했던 유토피아로도 잘 보여주지 않았던가? 우리는 우리의 존재 자체로도 완벽하기에 더 이상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필요는 없다고! 그러므로 우리는 바깥의 현혹이 너무도 커서 움츠려만 드는 자신을 느끼게 되는 우울한 날이면 이제 마티니를 벗하듯 이 책을 벗해야 한다. 이것은 차라리 닉 애덤스가 소설에서 놓쳤던 송어의 턱에 있는 미늘(p.197)과도 같은 마티니다. 턱에 있는 미늘이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늘 되새길 수 밖에 없는 존재이듯이 이 소설은 취하면 취할수록 당신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더 또렷이 각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마녀고양이 2012-06-18 10:23   댓글달기 | URL
빈 의자의 존재 의미를,
우리는 흔히 누군가 앉아주기를 기다리는 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빈 의자 자체가 자신이라고, 자신이 빈 의자라는 사실을 긍정함으로써 존재의 완전함을 어느 정도 긍정한게 아닐까 싶어지네요. 제 목표이기도 합니다. 제가 빈의자라는 것을 받아들임으로서 삶을 즐기는게 일차적 목표이고, 누군가 앉았다가 가는 행위는 그에 따른 이차적 이득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집니다.

죽음이란,
어짜피 너머에 있는 것들을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으니 그저 한계로 받아들이는 편이 삶을 살아가는데 좋은게 아닐까, 설령 신이 있다 해도 그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 한계를 그어놓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수 밖에 없는 것들은 그냥 그대로 놓아두는 편이 좋겠다라는 생각을 최근해야 했습니다. 타인의 생각도 마찬가지인거죠, 추측을 해봐야 제 추측이니까요. ^^

그래서 현재에 대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공감합니다.
좋은 페이퍼시네요. 아침부터 상쾌합니다. 아하하.

헤르메스 2012-06-19 23:17   URL
감사합니다.^ ^ 그리고 이렇게 다시 또 서재에서 마고님의 댓글을 보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마고님이 바라시는 목표와 제가 생각하는 목표가 같아서 진심으로 놀랐습니다. 칸트도 순수이성비판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자유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신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도저히 알 수 없는 문제다. 알 수 없는 것은 그저 알 수 없는 상태로 놓아두어야 한다. 다만 그것이 우리가 보다 윤리적이 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요청하면 될 뿐이다.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문제는 다만 요청된 것일 뿐인데(그것도 보다 윤리적이 되기 위해서) 타자들에게 진리라고 강요하는 것이 문제겠죠. 그런 의미에서 헤밍웨이의 긍정적 허무주의가 전 참으로 마음에 들더군요. 그리고 자기 긍정 속에서 타자에 대한 배려와 포용도 나오는게 아닌가 싶어요. 아무튼 정말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이 밤에 상쾌해지네요. 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