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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마크하기 기형(奇形)의 여정... (공감20 댓글0 먼댓글0) 2012-05-31

 

 

 

 

 

 

 

 

 

 

 

 

 

 혹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엑스 파일'이란 유명한 미국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시즌 9까지는 방영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아무튼 그 시즌 2에 기형의 존재들이 나오는 '유령의 집(humbug)'이라는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참으로 인상에 남아서 기억하고 있는 에피소드인데요. 그 마지막 장면에서 한 기형의 인간이 멀더를 가리키며 스컬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을 보세요. 네, 정말 멋지게 잘생겼죠. 그런데 상상해 보세요. 저런 사람들만 잔뜩 있는 미래를 말이죠. 어디가나 저런 얼굴 밖에는 볼 수 없다고 상상해 보시라구요. 그럼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될까요? 완전 지루해지는거죠. 무개성으로 넘쳐하는 세상이니까 말이죠. 이제 아시겠어요? 자연도 그걸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같은 존재들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자연 그 자체가 정상성을 거부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놀랍죠? 이 에피소드는 우리가 불완전하다 혹은 흠결되었다고만 여기는 기형을 오히려 자연 자체가 추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사실 정상과 기형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형을 아무리 불완전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하더라도 기형은 결코 불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의 시각은 교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기형은 그 자체적으로 완전한 것이라고 말이죠. 이는 진화의 연속성을 강조해서 기형을 하나의 과정중의 존재로만 보았던 것에 반발했던 베이트슨의 생각이기도 했습니다.(자연의 농담' P. 41). 그는 진화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며 불연속적인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바로 기형이 그 불연속의 단적인 증거라 여겼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것이죠. 기형도 거기에 대해 예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인 우리의 눈은 그렇지 않죠. 우리는 그것을 부족하고 불완전한 것으로 바라봅니다. 물론 따지고 보면 그건 자연적인 진리도 아니고 내 고유의 가치관 때문도 아닙니다. 혐오란 낯설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낯익음이란 익숙한 경험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에 다름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낯설음이 우리에게 혐오를 가져다주는 것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인데 그 불안함의 근원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을 그것이 위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기형은 그 자체로 온전한 신체로 태어난다는 우리가 보아왔고 믿고 싶어하는 익숙한 진실에 중대한 예외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혐오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한 신체에 대한 판정은 누가 내리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저 우리 사회가 가진 일반적 상식을 대변할 뿐입니다. 그렇게 사실은 나의 외부에서 생성되어진 규범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작 문제는 어느 것이 정상이냐 기형이냐 여기에 대한 정의가 아닙니다. 그건 오로지 획일화된 잣대를 놓았을 때에만 유용한 개념일 뿐이니까요. 때문에 자연이 정상성을 거부한다는 말은 양산화된 멀더를 상상하면 아시겠지만 곧 그런 획일적인 잣대를 거부한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자연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건 다윈의 이론이기도 합니다. 생존을 위해 보다 많은 자연적합성은 오로지 보다 다양한 변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요. 물론 다윈이나 다윈의 추종자들은 변이들이 연속적인 것으로 여겨 불완전한 존재라고 상정했던 것은 잘못이었습니다만 아무튼 기형이란 문제의 표출이 아니라 진화를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엔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생각을 미셀 푸코가 가장 많이 영향을 받았다고 했었던 조르주 캉길렘 했습니다.

 

 

 

 지금은 절판된 것 같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도 출간된(캉길렘은 과작으로도 유명합니다. 생존 당시엔 사르트르와 더불어 프랑스 지성계를 떠받치는 두 축 중의 하나였지만 말이죠) '정상과 병리'가 바로 그와 같은 사유를 보여줍니다. 캉길렘은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 하는 우리 신체의 완전성은, 그렇게 정상성은 생명 고유의 규범이 아니라 오로지 외부로부터 주입된 시각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바로 그 주입된 시각의 형성을 그는 19세기 의료 개념의 정립 과정의 고찰을 통해 보여줍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기형을 불완전하다고 여기는 관념이 바로 이 때 성립되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생명 고유의 규범으로부터 인간은 인간만의 독자적인 규범을 정립했습니다만 그것은 자연 고유의 논리를 무시한 어디까지나 인간 독단의 산물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캉길렘은 생명 고유의 규범으로 돌아가서 우리의 병리 현상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여기서 정상과 기형은 바로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개념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성이 아닌 캉길렘에 있어서는 바로 생명 고유의 규범에 적합한 것이 정상적인 것이며 그래서 병리적인 것도 전혀 다르게 해석됩니다. 즉 우리는 신체에 고통을 주는 것을 병리적 현상이라 여기고 신체를 정상적으로 회복시킨다는 미명 아래 인위적으로 치료를 가합니다만 캉길렘은 그것을 치료로 보지 않는 것이죠. 정확한 의미에선 방해로 봅니다. 그러니까 신체가 그 자신의 고유한 개념에 맞게끔 스스로 자정하려 드는데 그것을 막는 방해꾼으로 보는 것이죠. 그렇게 인간의 시각(여기의 인간은 물론 19세기 근대 의학을 탄생시킨 근대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정립된 인위적 개념으로서의 인간입니다.)으로 보자면 단순한 치료를 위한 병리적 현상일지 몰라도 생명 고유의 규범으로 보자면 특정 상황에 의해 어긋나버린 신체적 일탈을 스스로 정상으로 회복시켜가는 과정이 바로 캉길렘이 바라보는 병리적인 것의 개념입니다. 이것은 그대로 현대의 진화론자들이 기형을 바라보는 시각 그대로죠.

 

 

 캉길렘에 따르면 고열이 난다거나 가렵다거나 아프다거나 하는 모든 신체적 일탈 행위들은 그 자체로 부정적 현상이 아니라 신체 스스로 정상을 회복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나타나는 반응일 뿐입니다. 무조건 제거해야 할 결함이 아니라 지금 어디까지 나아갔는지 혹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를 알려주는 신체 스스로가 발하는 표지인 것이죠. 또한 여기의 정상성도 그저 과거의 상태를 원상복구 시킨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생명 고유의 규범에 있어서 정상성은 완벽한 원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진화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늘 생성이듯이 말입니다. 즉 신체의 일탈이 만들어내는 어긋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거기에 맞춰 회복해 나가는 정상성인 것입니다. 즉 이 정상성은 한계를 제거하는 것에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한계를 포용하는 가운데 다시금 새로이 완성되는 정상성입니다. 비유하자면 산행할 때 간혹 보게 되는 마치 한글의 'ㄱ'자 처럼 옆으로 길게 휘어진 나무들 같은 것이죠. 아마도 그 나무는 다른 나무들 보다 늦게 자라는 바람에 이미 커버린 다른 나무들로 인해서 햇빛을 받지 못하자 스스로 햇빛을 찾아 나서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환경을 거스르지 않고 최대한 조화롭게 스스로를 조율시켜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깡길렘이 바라보는 생명 고유의 규범에 있어서의 정상성인 것이죠. 말하자면 병리적 현상이란 그 조율을 위한 계속적인 튜닝 과정인 셈입니다.

 

 

 이렇게 정상과 병리 그리고 정상과 기형을 고찰하다보면 결국 드러나는 것은 19세기에 성립된 인간중심주의가 보여주는 그야말로 좁은 식견의 지평입니다. 다양성을 그 자체로 포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의 원본만 고집하면서 철저하게 자르고 떼어내고 없애버리고 있으니까요. 여기 그런 속 좁은 인간중심주의를 역사적으로 고찰한 또 하나의 책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크 블럼버그 '자연의 농담'입니다. 

 

 

 

 히틀러가 아리안족의 완벽한 이상을 네델란드에 강제로 주입하기 직전인 1940년 봄, 네델란드의 위트레흐트라는 도시에서 오싹할 정도로 기형인 염소 한 마리가 죽었다. 태어난 지 겨우 1년 만에 사고로 특별한 삶을 마감해야 했던 이 염소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이유는 이 염소가 두 앞다리가 없는 기형으로 태어났지만 똑바로 서서 걷는 기능을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라틴어로 이런 생물들을 루수스나투라(Lusus Natura), 즉 자연의 농담이라 불렀다.(p. 23)

 

 

 제목인 '자연의 농담'은 이렇게 기형의 존재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부제는 이 책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바로 기형과 괴물의 역사적 고찰인 것이죠. 특별이 이 문장을 인용한 이유는 이 문장 자체가 이 책이 하고자 하는 말을 그대로 집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염소가 죽습니다. 그런데 그 염소는 앞의 두 다리가 없는 기형적인 존재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두 다리가 없으니 그 염소를 불쌍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염소는 놀랍게도 직립보행을 시작합니다. 나중에 거기에 대한 블럼버그의 상세한 설명을 들으면 그 염소는 거의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염소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이 염소가 과학자 사이에서 유명한 이유는 똑바로 걷는 걸음걸이 그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염소는 태어나자마자 똑바로 걷는 능력을 발달시켰다. 앞다리가 없어서 척추가 구부러졌고 뼈들이 다시 배치되었으며 다리근육이 두꺼워졌고 힘줄이 그에 맞춰 조정되었다. 발생의 순간마다 해부학적 구조가 행동을 주조했고 다시 행동이 해부학적 구조를 주조했다. 이 과정은 마치 오랜 친구와 대화할 때 호흡이 척척 맞는 것과 같다. 그 결과 사람처럼 염소는 두 발로 걸어도 넘어지지 않게 되었다. 이 동물은 직립보행을 하게끔 태어난 것이다. (p. 112)

 

  

 여기에서 보듯이 기형은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잠재된 가능성입니다. 깡길렘이 병리적인 것을 바라보았을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염소에 대한 블럼버그의 저 표현을 읽다보면 저절로 캉길렘이 병리적인 것을 두고 새로운 정상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율의 과정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블롬버그의 염소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기형이라는 한계가 새로운 가능성을 출현시켰고 그 새로운 가능성으로 인해 기형은 기존의 규범을 전복시켜 버리는 새로운 진화의 신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바로 이러한 기형이 간직한 잠재된 전복의 가능성 때문에 옛날 우리나라에도 날개 달린 아이는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전설이 생겨났던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여기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바이지만, 기형은 오로지 기존의 규범이 가지고 있는 눈으로 보았을 때만 존재하는 현상입니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블럼버그는 일부러 앞서 인용한 문장에서 '히틀러가 아리안족의 완벽한 이상을 네델란드에게 주입하고 있었던' 을  언급합니다. 바로 새로운 가능성을 오로지 기형으로만 간주하는 규범이라는 것이 정말은 어떤 것인지 이것을 통해 드러내기 위해서 입니다. 히틀러, 완벽한 이상, 타자인 네델란드에게 주입 같은 단어들에게서 우리는 분명히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 규범이란 바로 나 이외의 타자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규범임을 말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이 가진 오로지 인간이 바라보는 시각만이 진리라는 인간중심주의 역시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바로 그것이 이 책에 나오는 기형을 오로지 괴물로만 바라보는 괴물 윤리학인 것입니다. 다양성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기에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은 오로지 제거되어야만 하는 기형으로만 바라보는 규범의 대표적인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는 것 자체가 한 생명을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블럼버그는 아리안족의 완벽한 이상의 주입과 염소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암시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농담'은 바로 그 오로지 자신만 존재하는 획일적 규범을 전복시키는 새로운 가능성의 기형과 괴물의 역사입니다. 깡길렘의 '정상과 병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을 발생학적으로 고찰한다는 것이죠. '발생'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듯이 이것은 선천적인 계획의 소산이 아닙니다. 우연한 기회가 빚어낸 변수일 뿐입니다. 즉 애시당초 정립된 규범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렇게 기형은 하나의 '탈주'입니다. 들뢰즈 용어로 말하자면 탈영토화를 가져와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경계선을 형성시키는 존재들인 셈이죠. 그리고 최종적으로 현재 군림하고 있는 괴물 윤리학을 전복시키게 되겠죠. 

 

 칸트의 비판철학에서 들뢰즈는 칸트가 말한 숭고의 개념이 무형 혹은 기형을 직면했을 때 받는 느낌이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왜 그것들을 마주했을 때 숭고의 느낌을 받게 되냐면 그것들은 너무 크거나 혹은 형체가 없거나 아주 왜곡되어 있어서 우리가 가진 지성으로 파악되지 않으며 그래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상상할 수는 있어도 이성이 늘 하듯이 총체적으로 개념화하기는 불가능한 존재들이죠. 그런데 왜 이들은 개념화하기가 불가능할까요? 바로 우리가 내내 길들여진 전체성의 이념에 따라 개념화하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사유에서 조차 외부에서 우리에게 전이된 하나의 규범 때문에 기형의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형은 오히려 그렇게 사유의 그물에 걸리지 않음으로써 사유 너머의 광활한 황무지를 문득 우리에게 가져다 줍니다. 이로써 우리가 하나의 전체로 인지했던 우리의 사유 체계를 변방의 존재로 만들고 아직 많은 여백이 남아있음을 알려주는 것이죠. 그렇게 이성의 한계를 일깨우고 그것을 통해 오히려 이성의 영역 자체를 넓혀 새로운 경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한 편 메를로 퐁티는 기형의 문제를 지금까지 우리가 해 온 객체의 관점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 되는 주체의 관점에서 풀어갔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을 통해서 신체를 가지고 있는 우리 자체가 타인과 결부된 주체일 수 밖에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상호 주체성입니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그는 기형의 신체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이렇게 기형의 신체가 되었음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혼자 뿐이라면 내 신체가 기형의 신체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나면서부터 기형이라면 늘 그 몸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므로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않겠죠. 모든 신체적 경험이 늘 자연스럽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기형된 신체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타인의 시선 밖에는 없습니다. 즉 기형의 신체를 가져보면 우리가 타인의 시선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 시선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즉 타자의 시선에 의해서 우리는 객관화되고 그렇게 내 속에 또 다른 나를 느끼는 타자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제 내가 타자를 바라보는 것도 달라지겠지요.  내가 보는 시선에 의해 그 역시 객관화되고 나의 시선을 의식하여 타자화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그 타자와 우리 모두는 똑같은 참여자로서 세계 속에 공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들뢰즈에게 있어 기형이 보다 많이 비어버린 사유의 여백을 가져왔다면 메를로 퐁티에게 있어서는 결정적으로 타인의 존재가 내 한계가 아니라 나와 함께 세계를 공동으로 열어가는 존재로 이해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기형의 문제는 포용이나 배척이냐에 앞서 차라리 먼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드는 하나의 표출인 셈입니다. 진화론적으로, 병리학적으로, 발생학적으로 그리고 사유와 타자의 관계에 있어 기형은 모두 우리가 그것을 기형으로 보고 있다는 시각과 거기에 기반된 의식 자체가 다양성을 포용할 줄 모르는 협소하고 자신 밖에 모르는 독단으로 가득찬 것임을 고발합니다. 그래서 그 개념화 할 수 없는 이름없는 것이 되어 우리의 사유에 틈을 내고 거기로 타자를 집어 넣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나 자신 그들과 함께 공존하는 참여자일 뿐이며 기형 역시도 우리와 같이 존재하는 많은 구성원 중의 하나일 뿐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니까 기형은 이런 의미가 있었습니다. 다양성의 증표요 공존에의 부름이었습니다.

 

 새삼 기형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은 문득 엑스 파일의 한 에피소드가 원인이 되었습니다만 막상 찾고 보니 기형엔 이런 저런 의미들이 참으로 많이 깃들어 있어서 놀랐습니다. 문득 다시금 엑스 파일이 그리워지네요. 언제 한 번 기회가 되면 모든 에피소드를 찬찬히 보아야 겠습니다. 또 어떤 기막힌 이야기의 보고가 잠들어 있을지 못내 기대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