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所懷)


 니헤이 츠토무를 좋아한다.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작품이자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블레임'이 해적판으로 국내에 나왔을 때부터 좋아했으니 나름 꽤 오랜 팬이라 할 만하다. 그래서 막상 '시도니아의 기사'를 봤을 때는 좀 이질감도 느꼈었다. 특유의 거친 펜선이 아닌, 이토록 깔끔한 펜선이라니(하기사 이 변화는 이미 '바이오메가'에서부터 나타났지만.). 거기다 대사는 왜 이렇게나 많이 나오는 거야. 어라, 이번엔 내 머리가 에피소드를 따라갈 수도 있잖아. '블레임' '아라바' 그리고 '바이오메가'에 비하자면, '시도니아의 기사'가 좀 대중화된 것 같아 약간 서글프기도 했다. 독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따라오든 말든 그냥 자기가 내키는 대로 질주하던 니헤이 츠토무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대중의 눈치를 보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그는 71년 생이다.)


 그래도 아직 예전의 근성이 다 죽지는 않았는지 이야기가 그렇게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고, 더러 핵심적인 장면을 일부러 생략하거나 뭔가 제대로 로맨스로 발전하거나 활약할 것 같은 인물이 허무하게 죽기도 하여, 역시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이구나 인정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요리보고 조리봐도 다 비슷한 인물들의 얼굴이란!!!(여기서 느낌표 세 개를 찍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니헤이 츠토무의 브랜드임을 알려주는 표식이니까. 인물들 구별이 힘들다는 것이 '블레임'도 그랬고, '바이오메가'도 그랬듯이 무엇보다 니헤이 츠토무의 악몽 세계를 이루는 근간이 아니었던가. 주인공은 상대를 죽이지만, 그것이 정말 적인지 아니면 자신인지 알 수 없다. 그 모호성과 불가해성이야 말로 니헤이 츠토무가 독자에게 주려하는 핵심이다. '넌 지금 뭔가 하고 있지만, 정작 그게 어떤 것인지는 하나도 몰라.')


남들에게는 작품의 약점으로 보일 수도 있는 이런 부분이 내겐 오히려 니헤이 츠토무의 낙관으로만 보이니, 나는 정말 츠토무의 '빠돌이'인가 보다. 어쨌든 '시도니아의 기사'에 대한 내 개인적인 소회는 이쯤에서 그치는 게 좋겠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리뷰랍시고 쓰는 글이니까 말이다.


 2. 츠토무의 세계란 알고보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사실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을 리뷰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건 이제 막 구구단을 깨친 아이가 미적분을 푸는 것과 같다. 자신이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리뷰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의 굉장한 그림과 동선이 확실한 액션 묘사에 아이돌 그룹의 소녀팬처럼 '꺅! 꺅!'하고 탄성을 지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시도니아의 기사'는 좀 더 대중친화적이 되어 그나마 리뷰하기가 쉬워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뷰 쓰기는 만만치 않은 도전이다. 왜냐하면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들이 가지는 본질적인 경향은 여기서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은 서사를 파악하기가 힘든데, '시도니아의 기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그런 것은 니헤이 츠토무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기도 하다. 왜냐하면,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은 이해가 아닌 경험을 위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는 머리를 쓰려하지 말고 츠토무가 재현한 세계에 가슴을 열고 풍덩 뛰어드는 게 그의 작품을 즐기는 제대로 된 방법이다.


 솔직히 나는 니헤이 츠토무가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독자를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로 만들려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높이와 넓이를 가늠할 수 없는, 그저 압도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건물들로 꽉 채워진 세계는 그야말로 한없이 작아진 엘리스가 마주한 구멍속 세계와 아무래도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어떤 아이러니를 보여 준다. 하나의 세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그 세계를 파악해야 한다. 세계의 구성과 질서를 파악해야 출구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엘리스의 세계에선 이렇게 해선 안된다. 파악하고 이해하려 들면 들수록 탈출은 커녕 오히려 그 세계에 더욱 갇히게 된다. 그저 그 세계가 무엇을 보여주든 받아들이고, 그것과 하나로 나부껴야 문득 홀연히 출구가 나타난다. 그것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변화하여 달라진 시각으로 보게 되어 그렇다. 예전의 눈이었다면 결코 찾지 못했을 문이, 달라진 눈으로 보자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엘리스의 세계다. 세계를 내 눈높이에 맞추려 하기 보다는 그 세계에 내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출구를 찾게 만든다. 그래서 이해가 아닌 경험이 주가 되는 것이다. 이해는 외계에 실재하는 것을 내가 해석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타자를 먼저 변화시키려 한다. 하지만 경험은 그냥 나에게 압도적으로 닥쳐오는 것으로써, 태생적으로 번역 불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타자에게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고, 그렇게 타자에 맞춰 날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3. 시도니아와 가우나 그리고 츠무기, 타니카제와 오치아이 - 나인가, 타자인가?


 물론 엘리스와 똑같이 경험을 중시하는 니헤이 츠토무의 작품에도 이런 태도가 저변에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시도니아의 기사'도 변함 없다. 아니, '시도니아의 기사'는 그런 면이 더욱 부각되었다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전작에선 그저 모호하게 나타났던 타자가 '시도니아 기사'에서는 뚜렷한 실체가 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가우나'란 우주에서 온 정체불명의 생명체다. 지구는 이미 가우나에게 멸망 당한 상태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이 시도니아를 타고 다시금 인류를 번식시킬 별을 찾아 우주를 유랑하고 있다. 그래서 시도니아를 파종선이라 부른다. 인류의 씨앗을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는 배라는 뜻이다. 물론 가우나는 여전히 시도니아를 공격한다. 가우나가 어디서 어떻게 지구로 오게 되었는지 인류는 모른다(가우나의 진짜 목적은 후반에 밝혀진다.). 당연히 왜 공격하는 지도 알 수 없다. 그저 공격해 오니까 맞서고, 인류가 다시금 부활하는데 있어 가장 커다란 위협이 되기에 무찌르려는 것 뿐이다. 이런 시도니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블레임'과 '바이오메가'에서 홀로 수많은 적들과 맞서 싸우던 주인공들을 떠올리게 한다. 더구나 시도니아는 광활한 우주에 이렇게 홀로 떠다니기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어쩌면 정말로 츠토무는 시도니아를 홀로 분투하는 개인이 우주선화(宇宙船) 된 것으로 설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유사성은 시도니아 역시 엘리스의 분신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가우나에 대한 시도니아의 초반 대응이 눈에 띈다. 시도니아는 가우나에 잘 모르기 때문에 가우나를 앞질러 전략을 수립하지 못한다. 가우나는 늘 인류가 예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공격해오기 때문에 출현한 그 순간을 그저 막아내기에만 급급하다. 이는 '블레임'과 '바이오메가'의 주인공이 했던 것과 같다. 자신을 압도하는 타자가 있고, 그 타자에 대해 내가 먼저 뭔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오로지 그가 무엇이며, 무엇을 하려는 지에 대해 전력으로 눈과 귀를 기울일 뿐인 것이다. 여기에 맞춰 보자면, 시도니아의 디자인도 꽤나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시도니아는 이렇게 생겼는데,



 선체 위쪽을 둘러싸고 있는 소혹성 같은 것은 어떻게 보면 쪼그라든 인간의 뇌로도 보인다. 이것이 타자 앞에서의 나라는 주체의 왜소성, 즉 자기 중심적 파악과 이해의 한계를 나타내는 디자인이라면 너무 멀리 나간 해석인 것일까? 하지만 나중에 나타나는 가우나 최상위 군집인 대형 슈가후젠의 모습과 비교하면 그렇게 터무니 없는 해석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슈가후젠은 이렇게 생겼다.



 얼른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나? 응? 해파리라고? 으음, 그렇게도 보이네. 그런데 또 어떻게 보면 인간의 뇌로도 보이지 않는가? 아래에 달려 있는 촉수들은 뇌의 척수들이고 말이다. 얼마든지 억측이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내겐 대형 슈가후젠이 사람의 두뇌 형태를 띤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이것은 시도니아의 쪼그라든 뇌와 너무나 대비되는 모습이다. 거기다 크기의 차이도 어마무시하고 말이다.


 두뇌를 갖지 못한 주체와 두뇌를 가진 타자.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가우나의 대응 방식이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가우나의 공격 방식은 특이하다. 한 번 패배를 당하면 다음엔 자신을 패배시킨 대상을 모방하여 공격해 온다. 가우나는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패배로 인해 이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얼른 자신을 압도한 타자를 받아들인다. 모방은 자신의 타자를 흡수를 통해 이뤄지는데, 그러면서도 호시지로 시즈카에게서 볼 수 있듯이 타자를 말살하지 않고 보존해 둔다. 이러한 가우나의 흡수와 모방 관계는 어떻게 보면 공존으로도 보인다. 무엇보다 가우나와 인간의 융합 개체인 츠무기의 존재가 그렇게 보도록 만든다. 더구나 츠무기는 타나카제와 사랑에 빠진다. 그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이런 츠무기는, 만일 가우나가 타자를 오로지 포식하기만 했다면, 결코 나올 수 없었으리라. 그러므로 츠토무가 이렇게 뇌의 모습을 서로 다르게 표현한 것도 보다 온전한 형태를 지닌 뇌의 쪽이 보다 강한 주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가우나는 강한 존재다. 가우나와 대적하는 인간형 병기 모리토는 가우나 촉수에 한 번만 맞아도 파괴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가우나를 압도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츠무기와 같은 융합 개체다. 물론 타니카제도 강하다. 그러고 보면, 츠무기와 타니카제 모두 타자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타니카제는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다. 츠무기마저 사랑할 수 있는 남자다. 그가 정말 강한 것은 어쩌면 바로 거기에 있는 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다. 타자 중심의 주체야말로 진정 강한 주체라는 것을 말이다.


 이것은 오치아이와 연관지어 생각하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오치아이도 타자를 지향한다. 그는 인류가 구원받으려면 지금 인류의 모습을 벗어나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가우나와의 융합 개체를 연구한다. 하지만 오치아이의 타자 지향은 그냥 듣기 좋은 허울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의 타자 지향은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오치아이는 츠무기, 타니카제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타자란 어디까지나 자신을 위해 일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는 혈선충으로 타인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부활을 위해 누군가의 신체를 강탈하기도 한다. 그에겐 오직 자신밖에 없고 나중에 거대해져 버린 신체는 그가 가진 자기 중심주의의 크기가 실체화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오치아이이기에, 대형 슈가후젠과의 최종 결전 바로 전에 다시금 맞붙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도니아가 슈가후젠을 물리친다는 것은 이제 진정 타자와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전쟁이 아닌, 인류의 부활을 앞두고 앞으로의 인류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최종 대안을 찾았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시도니아가 거쳤던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배운 것이 그 대안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 대안을 실현시키는데 있어서 오치아이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이다. 극단에 위치한 사상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인류 구원을 향한 최종 단계에 오르기 전에 반드시 관통할 필요가 있었다.


 4. 츠토무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 - 학습


 나는 앞서 시도니아가 마지막에서 찾는 대안이 거기까지 이르는 여정에서 배운 것이라는 말을 했다. 왜 이 말을 반복하느냐 하면 츠토무가 압도적인 타자를 통해 이해 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태도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시도니아의 기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바로 '학습' 이라고. 그리고 이것이 바로 츠토무가 세계를 대하는 태도이며,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라고.


 츠토무에겐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작품에서 함장은 가우나가 공격할 때, 왜 자신들을 공격해서는 안 되는지 학습시켜 주자는 말을 하고, 츠무기는 여러 장면에서 자기가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배우는 것이 나온다. 오치아이가 100년 전, 융합 개체를 만들어 일으켰던 최초의 파국적 사태는 융합 개체가 아무런 학습이 안 되어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츠무기에 이은 두 번째 융합 개체 카나타도 마찬가지다. 학습이 전혀 되어 있지 않자, 막무가내로 행동하려 한다. 100년 전, 융합 개체나 카나타는 오로지 자신만 존재하는 유아적인 자아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는 또한 오치아이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카나타는 가우나와 융합하려는 오츠아이를 두고 친구가 태어난다는 말을 한다.


 배우기 위해선 먼저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배우려는 대상을 마음의 중심에 받아들이고 최대한 그에게로 눈과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학습은 타자 중심적인 행위다. 츠토무는 그것이 우리가 세계를 대하는 합당한 태도이며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 엘리스 적인 세계를 연출한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시도니아의 기사'가 츠토무의 작품 이력에서 이채로운 것은 이전 작품까지 은밀히 전개되어온 학습이라는 테마가 여기서 비로소 전면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시도니아의 기사'가 학원물 비슷하게 되었다고 말했고, 왜 많은 작중 여성들이(중성인 이자나를 비롯하여) 타니카제에게 들러붙는 지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그것이 모두 학습이라는 테마를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타니카제를 비롯한 등장 인물들은 배워나가는 것이다. 인간을 배우고, 관계를 배우며, 세계를 배운다. 그런 식으로 타자와 나를 그리고 공존을 배운다. 타니카제를 둘러싸고 아예 존재 방식이 서로 다른 다양한 인물들(중성인 이자나, 가우나와의 융합 개체 츠무기, 로봇 테루루등)까지 얽히는 설정도 이와 관계 있다. 타자는 하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바로 그것의 반영인 것이다.


 5. 츠토무의 지향점인 융합


 그러고 보면, 첫 작품 '블레임'부터 츠토무는 내내 융합을 지향해 왔다. 마치 일본의 데이빗 크로넨버그처럼 신체와 기계를 융합시켰다. 그는 작품을 거듭할수록 경계를 지워왔다. 사실 어디까지나 배운다는 태도로 세계를 대하는 사람에겐 기존의 고정된 경계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배울 때마다 그 경계는 늘 새롭게 형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에게 융합의 지향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츠무기는 지금까지 일관해온 세계에 대한 그의 태도가 인격화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츠무기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한다. 츠토무의 학습과 융합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내가 '시도니아의 기사'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을 정리해 보았다. 그저 착각과 오해의 산물일 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결론 지어 본다. '시도니아의 기사'에서 츠토무는 지금까지 자신이 해왔던 것의 정점을 찍었다고. 자신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으며, 어떤 태도를 추구했는지 보다 인지가 쉬운 형태로 만들어 제대로 경험케 만든 것이다.


  이제 츠토무는 다음엔 어디로 발을 내밀게 될까? 그것이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여,  '블레임'이 넷플릭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 참에, 절판된 '블레임'도 애장판으로 재간되기를 희망해 본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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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무더운 여름입니다. 원래 손에 땀이 많이 나는 체질이라 그렇지 않아도 여름엔 책 읽기가 힘든데, 이제는 살인적인 무더위마저 가세해 책 읽기가 여간 어렵지 않네요. 덕분에 한동안 손놓고 있었던 영화를 보게 되는군요. 주말엔 소장한 DVD로 호금전의 '소오강호'를 봤습니다.

  최가박당으로 유명한 허관걸이 '소오강호'의 주인공 영호충 역을 맡았었죠.

   

 

  영화는 1990년에 나왔습니다. 당시 무협영화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호금전이 오래만에 일선에 복귀해 홍콩 뉴웨이브의 기수 서극과 함께 만든 영화입니다. 김용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만든 것으로, 영화로 만든 것은 78년의 왕우가 주연한 영화에 이어 두 번째라는 군요.

 

 

 호금전과 서극의 만남은 당시의 영화 팬들을 몹시도 흥분하게 만드는 사건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신구세대의 거장들이 힘을 합하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겠죠. 하지만 삼국지에서 주유가 제갈 공명을 두고 '어찌 하늘이 이 주유를 천하에 태어나게 놓고도 또 제갈 공명을 태어나게 한 것인가?'라고 한탄했듯이 역시나 자신의 세계가 확고하고 뛰어난 두 사람이 힘을 합치기는 어려운 일인지 호금전은 연출 방향을 두고 서극과 불화를 일으키다 결국 중도하차하고 맙니다. 당시의 호금전은 '협녀'에서 해왔던 대로 경극과도 같은 동선과 군무와 같은 무예의 합을 그리는 식으로 아날로그 방식에 충실할 것을 주장했지만 서극은 '접변'이나 '천녀유혼'에서 그랬듯이 미국에서 세례를 받은 특수효과를 더욱 많이 쓰려고 하였기에 일어난 불화였죠.


 그래서 영화를 보시면 알겠지만 연출이 앞과 뒤가 다릅니다. 그건 전반부의 좌냉선과 영호충 일행이 풍랑당의 배에서 벌이는 무예 장면과 후반에 대내동창과 악불군이 벌이는 무예 장면만 비교해 봐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서극은 이 영화의 감독으로 '호금전'의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원래 호금전이 이 영화에 참여한 것은 평소 호금전을 존경한 서극의 적극적인 권유 때문이었죠. 결국 중도 하차하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존경의 의미에서, 그리고 또한 그가 감독으로서 영화에서 이루어 놓은 부분이 적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것 같습니다.


 이런 화면 구도는 그야말로 호금전의 것이죠.

 

 영화는 무상함에 대한 것입니다.

 힘과 권력에 대한 무상함, 정파와 사파를 나누는 것의 무상함 같은 것들을 말이죠. 제목의 '소오강호'는 영화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 대내동창의 앞잡이 좌냉선의 추적을 피해 영호충 일행이 우연히 숨어든 배에서 만나게 되는 일월신교의 신도 노귀('강시선생'으로 유명한 임정영이 연기했습니다. 지금은 유명을 달리하셨죠.)와 풍랑당 당주 노곡('천녀유혼'의 은둔 고수를 연기했던 '우마'가 분했습니다. 이 분도 폐암으로 타계하셨군요.)이, 한 사람은 정파(풍랑당)로 또 한 사람은 사파(일월신교)로 서로 다른 쪽에 서 있었지만 그래도 30년간의 우정은 변치 않았고 그러면서도 그 우정을 숨겨야 했던 스스로의 처지에 대해 도대체 이러한 이념 따위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의 취지로 지은 노래를 이르는 것입니다. 이들의 관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소오강호'는 실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중국과 홍콩에 대한 것입니다. 영화가 추구하는 무상함은 중국과 홍콩이 취하고 있는 다름과 반목의 무상함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사실 영화의 주제는 바로 그 노래 가사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특히나 풍랑당의 교주 노곡이 그 후임자에게 하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풍랑이 없으면 강호를 이룰 수 없고  

  은원이 없으면 영웅호걸이 나오지 않는 법이네...

  그저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잊지말게..."

 

 생각해보면 정파와 사파로 이리저리 사람을 나누는 것은 모두, 나중에 풍청양이 이야기하듯이 권력에 대한 탐욕 때문이고 결국 그 권력욕의 본질엔, 후반에 장학우가 분했던 구양전이 그러하듯이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 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언제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등이 그러한 힘과 권력에 대한 집착을 낳게 하는 것이죠. 영화에서 가장 커다란 악역인 대내동창도 사실은 규화보전이 강탈 당했다는 사실이 들통나 정적들이 모함으로 자신의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그리 맹렬한 추격에 나선 것이었구요. 


 본질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풍랑당 당주 노곡은 그러한 두려움을 기꺼이 껴안아야 한다는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두려움이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임을 잊지말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 노귀와 노곡의 이야기가 정파와 사파로 나누는, 그렇게 사람을 이런 저런 외부의 것으로 나누는 짓의 헛됨을 보여준다면 영호충이 추격을 당하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풍청양의 이야기는 힘과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독고구검'이라는 강호 제일의 무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 사는데 영호충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합니다.

 

  "강한 무공을 가지더라도 소인배들이 가족을 가지고 위협하면 무력해질 수 밖에 없는 일이네. 인간의 감정 앞에선 무공은 힘을 발하지 못하는 법이지. 그래서 나는 강호를 떠났네. 가족도 떠났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러한 풍청양의 고백은 영화 초반 규화보전을 훔쳤다고 의심받는 임진남의 집을 대내동창이 좌냉선을 앞세워 습격했을 때, 임진남 앞에서 아내의 두 눈과 혀를 잘라버리는 데도 무력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모습을 이미 관객들이 보았기 때문에 더욱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그러니 힘을 쫓지 말고, 이름만큼 허망한 것도 없으니 명예도 쫓지 말며,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을 쫓으라고 말하는 것이 꽤나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절기 '독고구검'을 영호충에게 전수해 줍니다. 영호충이 자신에게 전수한 검법이 무엇인지 묻자, 풍청양은 그건 '독고구검'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 패배에서 나온 검법이라네."

 

  강호에서 가장 강한 무공인 '독고구검'은 풍청양이 숱한 패배에서 얻었던 교훈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검법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앞서 노곡이 말했던 '풍랑이 없으면 강호를 이룰 수 없고, 은원이 없으면 영웅 호걸이 나오지 않는다.'란 말과 그대로 이어집니다. 이기고 지는,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우리가 무엇을 얻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죠. '소오강호' 노래의 가사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오직 하늘만이 알 뿐이니.'

 

 즉 진정한 승자와 패자는 오로지 하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순간의 승자와 패자로 모든 것을 이겼다, 졌다로 구분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승패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거대한 삶이라는 시간 앞에서 새벽 첫 햇살에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이슬과도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정파와 사파로 이리저리 사람을 나누는 것도,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힘과 권력을 쫓는 일도 말이죠. 결국 영호충의 스승, 악불군은 제자까지 죽여가면서 '규화보전'이라는 힘과 권력을 얻으려다 모든 것을 잃고 자신의 딸에게마저 버림을 받고 말죠. 그가 마지막에 찢어 하늘에 날려보내는 피에 물든 '소오강호' 악보는 피눈물을 흘리며 비로소 깨우치게 된 무상함의 은유인지도 모릅니다.

 

 소오강호는 김용의 원작에 그리 충실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이야기는 재미있고 무예의 연출도 멋집니다. 하지만 더욱 좋은 것은 이런 식의 삶에 대한 통찰입니다. 이러한 통찰들이 관객들의 주목을 끌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언뜻 스쳐가듯 묘사되어서 '이런 식으로 한번 생각해 보는 건 어때?' 하는 식으로 그리 강요하듯 제시되지 않는 까닭에 더욱 마음에 듭니다.

 

 


 











제가 소장한 것은 검색되지 않는군요. 할 수 없이 블루레이를 링크합니다 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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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전설의 확인이었다.

 59년에 나온 이 영화는 97년에 나온 타이타닉에 의해 기록이 깨어질 때까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아카데미 영화제 12개 부문에 수상 후보로 오른(그 중에서 11개 부문을 수상했다.) 유일한 영화로 영화제 역사에 기록되어 있었다.(그리고 이 기록은 2003년,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에 의해 다시 한 번 깨어졌다.) 아직 못 읽었는데도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마치 아주 많이 읽은 것처럼 생각되는 책이 있듯이, 영화에도 그런 게 있다. 내게는 ‘벤허’가 그랬다. 일 때문에 나이 드신 분들과 이런저런 술자리를 가질 때가 많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꼭 ‘벤허’를 보았냐고 물었다. ‘아직…’이라고 대답하면, ‘허, 그 명작을 아직 못 봤다고, 당장 보게나. 내 인생의 영화야.’ 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거기다 TV에서 하는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볼라치면, 참 자주 보이던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 그렇게 귀에 익고, 눈에 익었기에 ‘벤허’는 내게 보지 않아도 본 것처럼 느껴지던 영화였다. 어떤 분은 ‘이제 봐도, 진정한 벤허의 매력은 못 느끼지. 벤허는 반드시 커다란 화면으로 봐야, 영화가 가진 스펙터클을 제대로 느낄 수 있거든.’이란 말도 하셔서, 내 인생에 벤허의 진정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영영 오지 않겠구나 여겼는데, 웬걸 그런 기회가 불현듯 찾아왔다. ‘벤허’가 극장에서 재개봉된 것이다.


 

 알고보니 재개봉이 처음도 아니었다. 62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봉된 뒤로 72년, 88년, 97년, 2007년 등 10년을 주기로 꾸준하게 재개봉되어 왔었다. 이번의 재개봉도 그 주기에 속해 있었다. 이렇게나 꾸준하게 재개봉된 것만 봐도 많은 어르신들이 당신 인생의 영화로 꼽는 것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내겐 모처럼 찾아온 소중한 기회. 당장 극장으로 달려가 누리기로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정말 좋은 영화는 시대를 초월해 늘 똑같은 평가를 가지도록 한다는 것을. 단언컨대, 좋은 영화였다. 상영 시간이 길다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원래 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들은 다 길었으니까. 그런데도 이야기에 푹 잠겨서 보았다. 

 

 전차 경주 장면은 지금봐도 정말 압권이었다. 너무나 실감나고 박진감이 넘쳤기에, 그 때는 정말 CG 기술도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이렇게 찍을 수 있었는지 그 촬영 과정이 몹시도 궁금할 정도였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장면에만 들어간 제작비가 100만 달러라고 했다. 그리고 동원된 엑스트라만 해도 만 오천 명. 물론 경기장도 이탈리아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 실제로 세워진 것이었다. 전차도 모두 18 개가 제작되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중 반만 실제 경주 장면에 사용되었다. 영화를 보면, 단 번에 찍은 것 같은데, 무려 5주에 걸쳐 찍었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고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5주 동안 찍은 것이, 마치 하루에 컷 없이 찍은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할 수 있는지. 왜 이 영화가 아카데미 편집상을 탔는지 납득하는 순간이었다.

 


 제작비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영화의 총 제작비는 천 오백 구십만 달러라고 한다. 제작 연도가 50년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천문학적인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실로 엄청난 규모의 영화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것을 다 제외하고 출연한 인원만 보더라도, 대사가 있는 인물만 350명이고 엑스트라는 5만명에 이르니까 말이다. 이 엄청난 제작비 때문에 몇몇 영화 비평가들은 ‘벤허’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수익은 7배 가까이 났다. ‘벤허’는 무려 7천 4백 7십만 달러를 벌여들여 당시 파산 직전이었던 MGM을 기사회생시켰다. 이만한 규모의 영화를 감독이 통제하기란 쉽지 않다.(물론 헐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서는 영화 제작의 전반적인 통제가 감독 보다는 프로듀서에 더 많이 이뤄진다고 하지만, 이 만한 규모에다 장시간 상영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흥행면에서나 비평적인 면에서나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는 것은 분명 감독의 역량이다.) 그걸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해낸 것이다.

 

 윌리엄 와일러는 1902년에 태어났다. 스위스 알자스 출신이나, 그 때는 독일 영토였다. 그리고 와일러는 유태인이었다. 그는 1923년에 미국 헐리우드로 건너갔지만, 2차 대전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 지는 이걸로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그는 공군으로 전쟁에 참여했고 그 전쟁의 경험과 귀환한 뒤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영화사에 길이남을 최고 걸작, ‘우리 생애 최고의 해’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얼마나 대단한 지를 알려면 폴 오스터의 ‘선셋 파크’를 읽어보면 된다.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946)


 그는 성공한 삶보다 실패와 전락한 삶을 그릴 때 훨씬 더 뛰어났는데, 그것은 그 역시 인생의 부침(浮沈)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그가 헐리우드에서 초기 경력을 쌓을 때, 그는 “쓸모 없는 와일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영화 ‘벤허’에서 과거의 화려한 삶에서 추락한 벤허의 좌절과 고통이 실감났던 것도, 그런 인생의 그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는 대립 보다는 평화를, 갈등 보다는 화해를 강조했던 감독이었다. 유태인으로서, 독일의 만행까지 목격한 그로서는 더욱 반전(反戰)이 신념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우리 생애 최고의 해’는 말할 것도 없고, 이런 경향은 오드리 햅번의 매력을 미국에 최초로 알린 ‘로마의 휴일’에서도, ‘우정어린 설복’과 ‘벤허’ 바로 전에 만들어진 ‘빅 컨츄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한 마디로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우정어린 설복 (1956)


빅 컨츄리 (1958)

 

 물론 ‘벤허’는 남북 전쟁 당시 장교로 복무한 루 윌리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바로 전작 ‘빅 컨츄리’와도 설정이 유사하다. ‘빅 컨츄리’는 농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을 둘러싸고 두 가문이 갈등을 일으키는 영화였다. ‘벤허’도 메살라와 벤허의 갈등 구도다. 이런 ‘벤허’의 설정은 사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몬테 크리스토 백작’과 상당히 닮아있다. '벤허'의 이야기를 단순히 말하자면,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가 자기보다 못한 친구가 그것을 질투하여 음모에 빠뜨리는 바람에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러다가 마치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아주 우연한 인연으로 기사 회생하여 다시 친구에게 복수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야말로 ‘몬테 크리스토 백작’이다. 하지만 루 윌리스의 개인적인 체험에서 발현된 용서가 ‘벤허’를 ‘몬테 크리스토 백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만든다.

 

 ‘벤허’를 쓴 루 윌리스는 원래 무신론자였다. 그는 남북 전쟁을 몸소 경험했고 전쟁의 참화를 통해 신은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현재 미국이 떠받들고 있는 예수가 실은 날조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려 했다. 그는 자기가 모을 수 있는 한 최대치로 예수의 자료를 모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실제 예수가 복음을 전파했다는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이스라엘까지 몇 차례나 실제로 답사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는 예수가 실존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국 신은 있다고 믿게 되었고, 그런 회심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 ‘벤허’였던 것이다. 즉 소설 ‘벤허’에서 ‘벤허’는 루 윌리스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통해 얻게 된 믿음을 바탕으로 이 지옥과 같은 세상에도 구원은 도래할 수 있으며, 그것은 바로 상대방을 용서하고 사랑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고 소설로 보여주었다. 윌리엄 와일러도 이것을 강조한다. ‘우정어린 설복’은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반전을 부르짓는 영화이며, ‘빅 컨츄리’는 현재 미국의 기원이라는 서부 개척 시대로 돌아가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영화다(.이 영화에서 윌리엄 와일러와 맺은 인연으로 찰턴 헤스턴은 ‘벤허’의 주연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윌리엄 와일러는 자신의 영화를 통해 내내 반전 그리고 용서와 화해를 말해왔다. 왜 그는 이렇게 줄기차게 이런 말을 해온 것일까? 그것은 이 영화들이 만들어졌던 시대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바로 냉전시대였다는 것이다.

 

 때는 소련과 미국이 가열차게 서로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던 시기였다. 곳곳에서 분쟁이, 핵무기 실험이 이어졌다. 언제 또 다시 3차 대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공포가 알게 모르게 만연해 있었다. 그래서 유태인으로서, 전쟁이 가져올 수 있는 비극의 밑바닥을 체험한 윌리엄 와일러는 서로에게 증오만 부추기는 냉전 시대가 하루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화를 통해 내내 반전과 용서 그리고 화해를 부르짖어 왔던 것이다.

 물론 ‘벤허’도 마찬가지다.(그것이 너무도 잘 드러나 있었기에, 카톨릭을 신봉하는 바티칸마저 헐리우드 영화로써는 유일하게 진정한 종교 영화라고 인정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신념, 용서와 화해를 통한 평화에 대한 절박한 간구가 영화에 투영되어 있었기에,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인생 영화로 꼽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이제서야 본 내게도 이 영화는, 그것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그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다시금 세상은 냉전의 그 때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니스에서 어린이를 비롯하여 수 십명의 사망자를 낸 트럭 테러나 남중국해를 둘러싼 중국과 미국의 갈등에서 잘 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비록 10년 주기로 우리들 앞에 찾아오는 ‘벤허’이지만 지금 우리 앞에 도착한 것이 그저 우연으로만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벤허’가 강조했던 용서와 화해가 정말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와일러가 영화에 담았던 진심이 많은 이들에게 전파되어, 사람의 삶이 무분별한 증오로 위협받지 않으며 조금은 더 평화의 시대로 다가가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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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오후 8시 33분. 방어진 앞바다에서 진도 5.0의 지진이 발생했다고 한다.

 근처 사는 이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진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느낄 정도로

 건물이 흔들렸다고. 이럴수가!



 고향이 울산이고, 아직도 부모님이 거기서 사시고 계시는 지라,

 이런 뉴스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아무래도 근처에, 수명이 다한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있으니까.

 오늘 지진은 바로 그 고리 원전 앞바다에서 발생했다.



 작년에도 경주에서 진도 2.5의 지진이 있었고 울산에서 발생한 지진만 해도 무려 4차례가 된다고 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원전 철거는 할 생각도 않고, 2기를 더 짓는다니!

 원전 마피아들의 탐욕 때문에 부산, 울산, 경주, 포항쪽 사람들은 다 죽어도 좋다는 건가?


 고리 원전에 후쿠시마 같은 사고가 일어났을 때, 받는 피해는 이 정도다.

 

 원전이 가동 되지 않아도 정부가 말하는 식의 블랙 아웃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의 원전은 오로지 원전 마피아의 탐욕 때문에 짓고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세금으로 자신의 배를 불리는 사악한 세력들!

 다음 대선 때는 부디 이것이 최대 이슈가 되어 우리나라도 독일처럼 모든 원전이 철거 되었으면 좋겠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비극이 우리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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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16-07-05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좁은 땅에 그것도 경상도쪽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원전 폐쇄가 답이고 다른 대체 에너지를 찾아야하는데 원전마피아와 부패정권과의 짝짜궁 무섭습니다.

ICE-9 2016-07-05 21:58   좋아요 0 | URL
오늘 일 때문에 그런 짝짜궁이 더욱 치가 떨리네요.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중대사가 몇몇 개인들의 탐욕으로 좌지우지 되는 지금의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qualia 2016-07-06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지진, 정말 무섭더라고요. 여긴 청주인데요. 집이 좌우로 막 흔들리더라고요. 이거 무너지는 건 아닌가? 순간적으로 공포감에 휩싸였었죠. 처음엔 지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단순한 장마철 지반 꺼짐 현상일 수도 있겠다며 공포심을 달랬는데요. 나중에 뉴스 보고 진짜 지진인 줄 알았답니다. 청주조차 이 정도였는데, 진앙지 가까운 울산/부산 지역 분들은 정말 엄청나게 놀라셨을 것 같아요. 더군다나 원전이 그쪽에 몰려 있으니... 우리나라, 말로만 말고 정말 대지진 대비 구체적으로 진짜로 해야겠어요. 집이 좌우로 흔들리고 의자에 앉은 저도 좌우로 흔들리고 우두둑 소리까지 나니까 정말 무섭더라고요~

건조기후 2016-07-06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빨간 영향권 안에 제가 사는 동네도 있네요. 어제 제 방 양쪽 벽에 가득한 책장들이 막 삐걱대면서 앞으로 넘어질 것처럼 흔들리는데 정말 공포였어요. 책장 높이를 낮추거나 책장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하고 있습니다 ㅜ

울산쪽에 활성단층이 있어서 지진이 그렇게 잦다는데 도대체 아무런 조사나 평가도 하지 않은 건지 알면서도 무시하고 지은 건지 정말 분노가 치밉니다. 잘살고 못살고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인데 이 썩을 놈의 나라는 어쩜 이렇게 일관되게 사람 목숨보다 돈이 중요한지. 아 그들 일부에게는 잘살고 못살고의 문제일 뿐일 수도 있겠네요. 한숨만 계속 납니다...
 

  6월의 마지막 날. 잠깐 비가 내렸다. 하늘이 낮고 흐리다. 벨벳 언더드라운드의 'After Hours'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룹의 유일한 홍일점 드러머인 먼로 터커의 음성으로. 역시 이런 날엔 이 음악이 잘 어울린다. 동영상을 링크하려 했는데, 곡의 분위기를 음반만큼 전달하지 못 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이 노래엔 이런 후렴이 있다. '당신이 그 문을 닫으면, 난 다시는 하루를 볼 수 없을 거예요'. 이 사회엔 지금 이런 호소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문 닫는 일들이 많다. 닫힌 문 안쪽에 홀로 남게되는 이들에게 제발 나만 혼자라는 두려움, 잊혀진다는 두려움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름이다. 문은 확실히 열어두는 게 좋다.


 장르 소설을 즐겨 읽는다. 리뷰로도 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쓰는 속도는 읽는 속도를 못 따라간다. 읽은 책과 리뷰로 쓰는 책은 압도적으로 차이날 수밖에 없다. 더하여, 내 기억력엔 한계가 있고, 마치 후발 주자들이 계속 골인 지점으로 뛰어들듯 몰려오는 책들에게 다시 또 기억의 일정 부분을 할애하다 보니 리뷰로 복기하지 않은 책들은 어느 샌가 가물가물 해져 버린다. 나이가 들면 기억이란 데이터베이스도 꼬이게 된다. '미스터 홈즈'란 영화를 보라. 기억력 하면 최고라 자부하는 셜록조차, 나이가 드니 자랑하는 기억의 궁전이 마구 엉클어지지 않았던가.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드'의 대사 중에 이런 게 있더라. 한 할아버지가 한 할머니와 함께 첫사랑의 추억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뜻하지 않게 1박을 같은 방에서 하게 되었을 때 나온 말이다. 할머니가 방 중앙에 보이지 않는 금을 긋고 넘어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경고한다. 할아버지는 알겠다면서 자리에 눕는다. 그러고는 한숨을 섞어 이렇게 말한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난 지금 당장이라도 그 선을 넘어가 널 안고 싶은데, 나이가 드니 그 짓도 도저히 못 하겠다. 이거 너무 졸려서...'


 교훈은 뭐든 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미루지 말고 체력이 받쳐줄 때, 열심히 읽자. 여력이 남는다면 쓰기도 하자. 그렇게 미처 리뷰로 쓰지 못한 책들을 이 자리에서 살짝 언급해 본다.


 먼저, 켄 브루언의 '밤의 파수꾼'이다.

 올해 가장 최고의 책 을 선택 하라면, 나는 아직 반도 안 지났지만 이 책을 꼽고 싶다.

 원래 제목은 'THE GUARD'. 아일랜드 경찰을 뜻하는 말이다. 켄 브루언은 우리나라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작가다. 51년, 아일랜드 출생으로 93년에 데뷔한 그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명한 시리즈가 두 개나 있는 데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이 책을 제외하고 '런던 대로' 하나 뿐이다. 그나마 그것도 콜린 파렐 주연의 영화로 만든다기에 그 바람을 타고 나온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켄 브루언의 작품을 영영 만나지 못했으리라. 그래도 어쨌든 그렇게라도 나와 그동안 켄 브루언의 소설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이들에게 병아리 눈물만큼이나마 해갈을 시켜주었다. 하지만 그조차 영화가 망하고 소설 역시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한 탓에 켄 브루언의 차기작 도래는 요원해지고 말았다. 그게 2011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5년이 지나 불쑥 켄 브루언의 다른 책이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제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자꾸 샐린저의 '호밀 밭의 파수꾼', 하퍼 리의 '파수꾼'이 연상된다.) 언급을 자제하고 싶은데, 여하튼 '밤의 파수꾼'은 켄 브루언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잭 테일러 시리즈'의 시작을 여는 책이다. 잭 테일러 라니, 주인공 이름을 막 지은 티가 난다. 이것만 봐도, 켄 브루언은 이 작품을 쓸 당시만 해도 여기에 대해 별 기대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작가가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저 자기 마음 흐르는 대로 써 내려간 소설이다. 이런 사실은 직접 읽어보기만 해도 확연히 다가온다. 소설은 하드보일드에 속한다. 그러나 탐정이 나오고, 의뢰를 받아 수사를 하는 것말고는 우리가 기대하는 하드보일드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느슨한 서사, 서스펜스 제로. 게다가 탐정은 신념과 활력 보다는 끊임없는 자기 회의와 의기 소침에 빠져들어 '도대체 수사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하는 독자의 푸념을 절로 일으킨다. 때문에 소설은 재미를 더 치중하는 이들에겐 확실히 허들이 높다. '왜 내가 이걸 읽고 있지?' 하는 생각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분위기, 실존적 고뇌 이런 것을 원한다면, 소설은 당신의 마음을 기꺼이 열게 만들 것이다. 여기엔 부조리한 고통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이해하지도, 치유를 주지도 못하는, 왜소하고 무기력한 존재의 내면이 투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독특한 문체와 캐릭터로 재현된다. 때로는 진한 블루스의 감성으로, 때로는 프리 재즈적인 감성으로 켄 브루언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바로 여기에 당신과 꼭 닮은 사람이 있다고. 때로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나 혼자 만은 아니다'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안과 버틸 힘을 얻는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영혼의 이웃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잭 테일러는 당신의 이웃이다.


 다음은, 마에카와 유타카의 '크리피'



  '절규'를 끝으로 공포 영화를 다시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모처럼 다시 만드는 공포 영화의 원작이라고 하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현재 일본 호세이 대학 국제문화부 교수로 재직 중인 마에카와  유타카. 켄 브루언과 똑같이 51년 생이다. 물론 일본인. '크리피'는 7회 일본 미스터리문학대상 신인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평범해 보이기만 하는 이웃집 가장이 실은 겉보기와 전혀 다른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아이디어에 기반하고 있는데, 기요시가 공포 영화로 만들었다고 해서 공포물인 줄 알았지만 공포물은 아니었고 스릴러에 가까웠다. 읽은 느낌을 간단히 말하자면, 실망스러웠다. 그런 소설이 있다. 반전의 효과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이전의 설정과 이야기가 붕괴되는. '크리피'가 그러하다. 결정적으로 이 소설은 핍진성이 부족해 보인다. 범인도, 피해자도 행동에 개연성이 부족하다. 이야기를 작가 뜻대로 끌고 가기 위해 인물과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장르 소설일 경우 독자에게 "과연 이렇게 될까?" 하는 의문을 자꾸 가지게 하는 것은 실패작이라 생각한다. '크리피'는 그렇게 만든다. 혹시 나만 그렇게 보이나? 정녕 내가 프로불편러라서 그런 것은 아니리라 믿는다.

 기요시 감독은 소설과 다른 형식을 취했다. 주인공의 입장이 바뀐 것인데, 소설에서 주인공은 구경꾼 역할이었다. 소설이 묘사하는 비극에 그는 간접적으로만 연루되었다. 하지만 기요시는 직접 당사자가 되도록 했다. 소설을 읽어본 결과, 나는 기요시의 입장이 낫다고 생각한다. 결정적으로 소설 초반에 묘사된 주인공의 불륜과 뒤이어 겪게 되는 사건의 의미가 전혀 맞물리지 않아, 도대체 왜 불륜이란 설정을 주인공에게 부여했을까 의아했다. 그런데 기요시의 설정대로라면 불륜이 의미를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크리피'는 기요시가 자신의 공포 영화를 통해 꾸준히 천착해 왔던 것, '괴물이 나타났다. 우리가 변해야 한다'라는 노선을 여전히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영화 '크리피'의 예습으로 읽어 본 것이다.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면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가노 도모코, 일곱 가지 이야기.



 가노 도모코의 데뷔작이라고 하던가. 과연, 신인다운 풋풋함이 넘쳤던 작품이었다. 가노 도모코의 소설은 우리나라에 일본추리작가협회 수상작인 '유리 기린'을 비롯하여 여러 권 소개된 것 같은데, 정작 읽어 본 것은 '손 안의 작은 새'밖에 없다. 그 역시, 차가운 미스터리 소설과 어울리지 않는, 따스한 감성으로 풍부한 소설이었다. 그래서 가노 도모코의 이름은 내게 마쉬멜로 같은 미스터리를 쓰는 작가로 각인'되어 있는데, '일곱 가지 이야기'도 그랬다. 액자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일곱 가지 이야기'란 그림책이 중심인데, 그것을 읽고 이야기에 반한, 이제 갓 스물이 된 여성이 작가에게 보내는 팬레터와 그에 대한 작가의 답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여성이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난 기묘한 일을 편지에 적어 작가에게 보내면, 작가가 답장에서 자신의 추리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이 때, 여성은 일상의 미스터리를 꼭 '일곱 가지 이야기'의 그림책에 나오는 한 이야기와 결부시키므로, 그 내용이 소개되기도 하여 액자 소설 같아 보인다는 말을 참 시시콜콜 잘도 하고 있구나.

 어쨌든, 편하게 읽었다. 사소한 미스터리에 일상을 가볍게 터치하듯 진행되는 소설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너무 부담이 없어서 오히려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는 말을 이렇게 사족처럼 붙여두는 나는 음흉한 사람이려나. 어쨌든 신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 읽으면 일상 미스터리로써 괜찮은 축에 속한다. 신인만이 받을 수 있는 아유카와 데쓰야 상을 받았다. 92년에.

 네, 92년 입니다. 90년대 초에 소설이 나왔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세요. 그래서 소설엔 휴대폰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고 백과사전을 꺼내 봅니다. 하하^^


 마지막으로,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



 드디어, '종의 기원'이구나. 그래, 읽었다. 그것도 나오자마자. 양장본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것을 증명하겠지? 아마도. 하지만 리뷰로 쓰지 않았다. 실망했거든. 안 좋은 점을 줄줄 쓰는 게 싫어서. 어쩌면 그래서 이 페이퍼를 쓰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팬심으로 하는 불만 토로의 장 비슷하게. 맞다. 이게 진짜 이유다.

 나는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과 '28'도 읽었다. '종의 기원'에서 작가가 악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해 보려했다고 해서 혹시 전작과 비교해 보면 처음 읽었을 때에 든 실망감을 긍정으로 바꿀 소지도 있지 않을까 하여 시간을 들여 재독까지 했다. 그러나 역시 반전은 없었다.여전히 '종의 기원'은 읽은 것 중에 가장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종의 기원'의 유진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그려내고 싶었던 악의 원점일 것이다. 그녀는 인간 본성에 깃들어 있는 악이라는 '어두운 숲'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했는데, 그것의 온전한 초상이 잘 잡히지 않아 '7년의 밤'의 오영제로, 또 '28'의 박동해로 다양하게 변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드디어 '종의 기원'에서 악인의 진정한 기원이자 실체로서의 유진을 드러냈다는 것인데, 내게는 성과가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일단 인간 포식자로 설정된 유진조차 그 악행에 있어서는 '28'의 동해보다 떨어져 보인다. 아마도 정유정 작품 중 최고의 악인은 유진이 아니라 바로 이 동해라고 생각한다. 설령 포식자라는 살벌한 닉네임이 없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28'을 읽을 땐 동해의 악행 때문에 짜증이 났었다. 얼른 심판 받기를 속으로 바랐다. 나의 이런 반응은 작가가 악의 묘사에 성공했다는 것의 증거다. 하지만 유진은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짜증은 커녕 유진의 모든 행동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소설 초반 자신의 살인을 모조리 잊었다. 팔에 엄마가 물어서 남긴 분명한 상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간밤에 일어난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망각은 자신의 악행을 대면할 수 없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것일까? 아니면 주인공의 실체를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단순한 소설 장치로만 기능하는 것일까? 유진은 자신의 악행이 들통날 위기의 상황마다 능수능란하게 대처하지도 못했고, 스스로에게마저 악행을 변명했으며, 자신의 본성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회의 그리고 가책에 빠지기도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모로부터 포식자로 분류되어 집중 관리를 받아온 존재로서는 참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렇게나 미리 알고 관리를 해왔는데도 엄마와 이모는 정작 유진의 악행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어설프게 대처하는지, 그것도 이해가 안 되었다. 엄마는 유진의 첫 살인을 목격한 날에 유진을 다짜고짜 죽이려들고(이것은 과거에 유진 때문에 남편과 형이 죽었을 때의 반응과 얼마나 다른가. 그 때도 엄마는 유진의 고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죽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인간으로 만들려 한다. 너무 어려서 그랬나? 그렇게 오랜 세월 관리 했는데도 결국 살인자가 되었기에 절망해 버린 것인가? 그럼, 형의 대리자인 해진은? 입양한 아들이니까 관계없다고 생각했나? 엄마는 벌써부터 유진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은데, 그래서 동생에게 상담도 한 것 같은데 왜 해진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뒀을까? 솔직히 해진은 이 소설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캐릭터다. 초반, 유진에게 살인이 들킬지 모른다는 서스펜스를 주는 것 말고는.), 이모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유진을 감시하던 언니가 갑자기 사라졌는데도 유진을 경계하지 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주요 캐릭터들이 내게는 어긋나 보였다. 이렇게 행동할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그래서 마리오네트 같다고 여겨졌다. 작가가 원하는 자리로 무조건 가야 하는 존재들. 그렇게 보였다. 이야기가 확고하게 설정된 대로 흘러가도록 복무하는 것말고는 아무 역할이 없는 존재들. 그래서 이야기도 재미없었다.

 사실 '종의 기원'은 너무 늦게 나왔다. 우리는 악의 초상에 대해서라면 너무나 많은 작품을 가지고 있다. 일단 정본으로써, 짐 톰슨의 '내 안의 살인마'가 있고, 프레데터를 자식으로 둔 엄마의 내면을 헤아리고 싶으면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케빈에 대하여'를 읽어도 된다.


 

거기서의 악은 유진과 많이 다르다. 그들은 태연히 악을 저지른다. 망각도 회의도, 번민도, 죄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냉정하게 계산하고 최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움직인다. 자신에게 위해가 될 것 같은 존재는 그 어떤 연민의 개입도 없이 제거한다. 그것에서 우리는 악의 순수한 초상을 본다. 케빈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내 이성을 모조리 초월한 그 존재 앞에서 우리가 짓는 것은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 뿐이다.


 나는 '종의 기원'이 가진 근본적인 출발점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종의 기원'은 작가 말대로 내 안에, 내가 몰랐던 어두운 숲을 내가 발견해 나가는 과정으로 그렸다. 그는 그런 악이 인간 본성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독자 역시 유진을 별개의 존재로 여기지 않도록 원해서 그렇게 구성했으리라. 하지만 이런 접근이 유진과 유진의 살인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깊은 어둠이 아니라, 우연의 상황이 초래한 개인의 특별한 비극으로 더 보도록 만든다. 유진이 그렇게 선명한 악도 아니고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할만큼 악랄하게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동해는 그렇게 보였다. 유진은 포식자라기 보다는 겁먹은 아이처럼 보였다. 다만 충동을 조절하지 못해서, 또는 너무 두려워서 살인을 저지르는. 차라리 포식자 설정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조금은 유진을 납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작가는 자신의 말처럼 쓰면서 정말 한계에 봉착했던 것 같다. 엄마의 일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알게되는 설정은 얼마나 쉽고도 그래서 조악한 장치인가? 모든 사실을 알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죽는 이모와 해진은 또 어떤가? 그들의 무력함은 그대로 작가의 어쩔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 같다. 쉬운 도전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설익은 결과물을 내기 보다는 좀 더 숙성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아쉬움이 더 커진다. '28'에서도 느꼈던 것인데, 현재 작가는 '7년의 밤'에서 보여주었던 깔끔한 서사의 정돈을 전혀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28'은 이야기가 흘러 넘쳐 작가 자신조차 제대로 정돈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었고, '종의 기원'은 이야기에서 작가가 어디에 자신의 포지션을 정해야 할 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으로, 일반화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좀 더 서사의 통제력을 키우고 자신의 관점을 확실히 잡는다면, 다시금 '7년의 밤'처럼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 원, 그냥 가볍게 그리고 적당한 길이로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나 많이 써버리고 말았다. 진이 빠진다. 나조차도 이야기를 통제하지 못해서 이런 꼴인데 감히 누구를 충고한단 말인가? 짧게 자조하고 길게 반성한다. 어쨌든 이것으로 채 리뷰로 옮기지 못한 책들에 대해 끄적이는 것을 마친다. 그래도 아직 좀 남았다. 그것은 다음에 또 정리하기로 하고(원래 종의 기원 때문에 쓴 것이라 과연 쓰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20000 GUN GUN(이런 표현은 차라리 안 하는 게 좋을 지도. 웬 병맛?)...



But if you close the door,
 I'd never have to see the day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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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6-06-30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종의 기원 그냥 그랬는데, 헤르메스님의 글을 읽으니 제 머리속도 정리가 되는것 같아요.
`케빈에 대하여`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ICE-9 2016-06-30 21:16   좋아요 0 | URL
앗, 보슬비님, 말씀 감사드려요. `케빈에 대하여`는 정말 괜찮더군요. 저는 틸다 스윈튼이 엄마로 분한 영화도 봤는데, 그것도 잘 만들어졌어요. 유진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 그러니까 괴물을 낳아버린 엄마의 처절한 현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눠져야 하는 책임으로 인한 고통 같은 것은 오히려 이 소설을 통해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16-07-01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03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