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하우스프라우>를 읽고 서평을 작성해 주실 분을 모집합니다.




대담한 성(묘사와 섬세한 심리 묘사가 교차하는 소설!

낯선 나라 스위스에 갇힌 현대판 안나 카레니나





여성의 삶과 내면을 다룬 강렬한 소설 『하우스프라우』 출간


미국의 작가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데뷔 소설 『하우스프라우』가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시인으로만 활동했던 작가의 첫 번째 소설이며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작품이기도 하다. 제목인 <하우스프라우Hausfrau>는 독일어로 가정주부, 기혼 여성을 뜻한다. 주인공은 스위스인과 결혼해 그곳에서 사는 미국인 안나이다. 우울과 외로움 속에서 안나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를 만나기 시작한다. 작가는 파국으로 빠져드는 한 여성의 삶과 내면을 탁월하게 묘사했다.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현대판 안나 카레니나>로 독자와 평론가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 상당히 높은 수위의 성행위 장면 역시 눈에 띄는 특징이지만, 문학성과 화제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출간 즉시 10여 개 언어로 번역 계약이 이루어졌고, 독일 ․ 프랑스 ․ 이탈리아 등 전 세계 15개국에서 출간되었다. 데뷔 소설로서 흔한 일은 아니다. 단순히 불륜이 소재라서, 또는 노골적이고 선정적이어서가 아니라 대담한 성(性) 묘사에 섬세한 심리 묘사가 어우러졌기에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절묘한 사건들의 배치, 영어와 독일어 단어들을 이용한 세련된 언어유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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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집 인원: 5명

* 모집 기간: 7월 19일~7월 24일(6일 간)

* 당첨자 발표 및 도서 발송: 7월 25일 (화)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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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를 받으신 후, 8월 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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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겉으로는 완벽하게 보이지만 실은 내부에 점점 차오르는 소외와 공허에 대한 느낌 때문에 자신의 삶에 뭔가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많이 읽었는데, 이 질 알렉산더 에스바움의 '하우스프라우'도 그런 이야기 같네요. 제목에 일부러 독일어를 쓴 것은 아무래도 주인공 여성이 삶의 새로운 변화를 위해 시도한 게 독일어를 배우는 것이라 이를 나타내기 위해서겠죠.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지은 바에 자신을 맞춰 살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건 곧 세상의 언어에 자신만의 언어를 빼앗기는 것이기도 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삶을 찾아가는 시도를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으로 한 것 같네요. 과연 그녀는 자유와 해방의 언어를 되찾을 수 있을지, 그 여정을 함께 해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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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적인 무더위다.

 더위에 약한 나는 지친 몸을 겨우 이끌고 집에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현관문에 다다른 내 기분은 아주 힘겹게 42.195KM를 완주한 마라토너와 다르지 않았다.

 땡볕 아래 한창 녹고 있는 아이스크림이나 진배없는 몸과 마음이 그저 바라는 것은 내일이라는 시간이 가급적 늦게 찾아오는 것 뿐인.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일이 줄어든 것도 아니요, 더위가 한풀 꺾인 것도 아니건만, 요즘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운 것이다.

 왜냐하면 집에서 바로 이것,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두둥!! 오랜 기다림을 보상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전권이 한꺼번에, 그것도 아주 근사한 외관으로 강림해 주었다.

 사진은 정면으로 본 모습이다.

 발간되기를 너무나 기다렸던 아이템이라, 이것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절로 보름달을 본 늑대처럼 크고도 긴 하울링이 나왔다.

 하여, 배경의 사진을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으로 선택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당시에 '핑크 플로이드' 그룹 멤버로 유명한 로저 워터스의 '더 월' 라이브 공연 현장 사진으로

 솔직히 지금 내 기쁨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의 기쁨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건 전혀 과장이 아니다.


박스 옆면의 모습이다.

박스에 마치 번진 핏자국 같은 무늬가 있는 것이 보인다. 나중에 보겠지만 책 표지에도 이와 동일한 것이 있는데,

아마도 책에 있는 무언가(피? 아니면 꿈의 노래?- 이 정체는 직접 읽어서 확인해 보실 것!)가 바깥가지 넘쳐 흐른다는 컨셉인 것 같다.


여기는 반대쪽 옆면. 가격이 표시되어 있다.

 무려 66,000원!! 출혈이 컸다만(ㅠ ㅠ),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을 볼 수 있다면 이 정도 쯤이야...


누구는 게임기 켠 김에 왕까지 간다고 하는데,

나는 찍는 김에 위까지 찍는다. 요모조모 다 뜯어보고 싶은 분이 계실지도 모르기에...

박스 위에도 어김없이 흘러 넘친 자국이 있다.



 이제 웬만큼 외관을 감상했으니, 드디어 실물을 받아든 소감을 술회해보려 한다.

 너무나 고대했던 것이라 자못 격정적이 되어도 이해해 주시기를...


  아아... 이 걸작선이 나오기를 기다렸던가!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것은 2008년이었다. 그러니까 한 십여 년 전의 일이다. 그 때 즐겨 구독하던 '판타스틱'이란 장르 문학 전문 잡지가 있었는데, 2008년 1월호의 '분야별 단신'에서 이렇게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이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네모 칸 안의 글이 바로 그것이다.

 제목엔 단편집이라고 되어 있으나 '샌드킹'이나 '스킨 트레이드' 같은 중편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선 그렇다고 할 수 없다.



 다른 책일 수도 있지 않겠나 하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글에 분명히 'DREAMSONGS'라고 하고 있으니 이 책이 맞다. 이번에 나온 걸작선 표지를 보면 제목 아래 분명히 '꿈의 노래(DREAMSONGS)'라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여하튼 이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때부터 나는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을 정말 우리말로 읽게 되기를 학수고대 했다는 것이고 무려 십년만에 드디어 그 꿈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려운 출판사정에도 불구하고 비록 십년이라는 세월이 걸리긴 했지만 선뜻 걸작선을 발간해 준 '은행나무'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게다가 앞서 보인 것처럼 아주 멋진 양장본 박스 세트로 만들어 소장 가치를 높여주기까지 했으니 더욱 그런 마음이다.


보이는가? 사진은 박스의 뒷면을 찍은 것이다.

 저기, 분명히 ':A RRetrospective' 아래 조금 작은 글씨로 'Dreamsongs'라고 각인된 게 보인다.

그러고 보니 'A RRetrospective', 이거 누구 아이디어인지 모르지만 꽤 재치있어 보인다.

 조지 R. R. 마틴의 그 R. R.에 빗대 만든 것이니까 말이다.

'A RRetrospective'와 'Dreamsongs' 모두 2007년에 나온 원서의 제목이다.

 원서는 두 권으로 나왔는데, 우리나라는 이렇게 네 권이다.


이는 영어를 한글로 옮기면 원래 분량이 상당히 늘어나므로 어쩔 수 없는 일로 보인다.

 책의 표지 역시도 원서와 다르다. 원서는 판타지 표지처럼 디자인 되었다.


둘을 비교해 보면, 확실히 우리나라 판본이 소장 가치가 더 크다.


표지가 전면에 드러나도록 찍어 보았다.

나란히 놓고 보니 색깔도 그렇고 훨씬 더 좋아 보인다.

 (왠지 영어 문법 교과서 원서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면 기분 탓이다.)


책의 뒷 모습.


  사실 이번에 나온 걸작선은 그 의미가 아주 뜻깊다. 우리나라에선 처음으로 발간되는 조지 R. R. 마틴의 선집이기 때문이다. 무려 70년대부터 활동했고 그 때 이미 SF와 호러 양면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R. R. 마틴의 작품들은 장편, 단편을 불문하고 참 만나기 어려웠다. 조지 R. R. 마틴은 최연소 휴고상 수상과 평생 한 번도 타기 어렵다는 휴고상을 한 해에 두 번이나 수상하는 전무후무한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그만큼 뛰어난 작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나무에서 '왕좌의 게임'이 나오기 전까지 그의 작품은 단행본은 커녕, 이런저런 엔솔로지에서나 겨우 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것도 아주 소수의 작품만.


 다시 말해, '왕좌의 게임'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었던 마틴의 작품은 이것이 전부였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어려운 '토탈 호러 1'의 '샌드킹'과

  '토탈 호러 2'라는 SF 단편집에 있던  '나이트플라이어'.

 그리고 도솔 출판사에서 나온 '마니아를 위한 세계 SF 걸작선'에 실려 있던 '두 번째 종류의 고독'.

 더하여 시공사에서 나온, SF 평론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조지 R. R. 마틴의 가장 친한 지인이기도 한 가드너 도즈와가 편집한 '갈릴레오의 아이들'에 들어 있었던 '십자가와 용의 길'.

 마지막으로 앞서 말한 잡지 판타스틱에서 연재한 '샌드킹(2회 연재)'과 '스킨 트레이드(3회 연재)'.

 이외엔 없었던 것이다.


판타스틱, 2007년 6월호와 7월호에 연속 게재되었던 '샌드킹'.

연재분 1회는 이렇게 양면을 가득 채운 일러스트로 시작되었다

내게 처음으로 마틴이란 이름을 뇌리에 강하게 각인시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내게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세계가 다 동일한 반응이었으니까.

 79년에 발표되자마자 그 해의 SF 상의 양대 산맥인 휴고상과 네불러 상을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로커스상까지 받았고

작가로서의 그의 입지를 확 끌어 올린데다 많은 평론가들이 지금도 여전히 최고의 SF 작품증 하나로 평가하는 상황이니.

딴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몰입감 가득한 이야기와 강렬한 시각적 묘사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갈등 또한 더없이 치열하여 오래전부터 헐리우드의 러브콜을 받아왔으면서도

 미드 'OUTER LIMITS'에서 시즌 1 에피소드로 만들어진 것 말고는 아직 성사된 게 없다.

지금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진행중이라고 하는데, '샌드킹'만큼이나 뛰어나고 인상적이며 코스믹 호러가 무엇인지

 제대로 맛보게 하는 '나이트플라이어'가 먼저 영화로 만들어지긴 했으나 더없이 실망스러웠던 결과만 낳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각본이든 제작이든 준비를 단단히 하고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아, 참. '샌드킹'은 친구가 피라냐를 어항에서 기르는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아 썼다고 한다. )


이번엔 판타스틱, 2007년 12월호에서 2008년 2월호까지 3회에 걸쳐 연재된 '스킨 트레이드'의 1회 시작 모습.

'샌드킹'과 마찬가지로 역시 양면 일러스트로 시작하였다.

 '스킨 트레이드'는 원래 스티븐 킹, 댄 시먼스와 함께 '다크 비전 트릴로지'를 위해 발표한 작품으로써

 공포 문학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브램 스토커상 최종 후보에 선정되었으며, 월드 판타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스킨 트레이드'도 현재 HBO에서 드라마로 만든다고 한다.


  그러니 나처럼 일찌기 그의 팬이 되어버린 자들은 얼마나 그의 다른 작품을 읽고 싶다는 갈증에 허덕였겠는가? 

 이토록 오랜 시간 쌓인 갈망을 헤아린다면, 앞서 이 걸작선이 있어 집에 오는 발걸음이 가벼워진다는 내 말이 결코 허언도 과언도 아니라는 것을 능히 납득하리라고 본다.

 나는 정말 조지 R. R. 마틴이 '왕좌의 게임'을 쓴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대박을 치고 HBO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져 또 엄청난 흥행까지 하게 된 것 또한 무척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콤보로 인기를 끌고 사람들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면 요즘처럼 출판계의 빙하기에 '조지 R. R. 마틴 걸작선'이 발간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기에...

 

 문득 '다크 타워'의 서문에 스티븐 킹이 이런 이야기를 썼던 게 생각난다. 아시다시피, '다크 타워'는 스티븐 킹이 무려 30년 동안 연재한 작품이다. 너무나 오래 연재된 탓에 사람들은 과연 '결말이 어떻게 날까?, 결말이 나기는 하는 걸까?' 하고 궁금해했다고 한다. 당연히 독자들에게서 스티븐 킹에게 많은 편지가 왔는데, 그 중 두 가지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스티븐 킹은 말했다. 하나는 시한부 생명을 살아가던 할머니. 그녀는 정말 살 날이 얼마남지 않아 아무래도 이대로는 '다크타워'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 같으니 자신을 가엾게 여겨 부디 결말을 자신에게만 미리 알려주지 않겠냐고 스티븐 킹에게 편지로 사정했다. 결말을 모르고서는 도저히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고. 다른 하나는 사형수였다. 그 역시 형이 집행되기 전에 결말을 알게 되길 바랐다.


 마틴의 작품에 대한 내 마음도 이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아직 우리나라 활자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의 작품들을 보게 되기를 얼마나 바라왔던가. 그의 잡지 데뷔작인 '영웅'을 읽게 되길 원했고 그에게 처음으로 휴고상을 안겨 준 '리아에게 바치는 노래'를 만나게 되길 바랐으며, 그의 판타지 장르 데뷔작인 '라렌 도르의 외로운 노래'와 그가 가장 힘겨웠던 시절에 절치부심하며 써내려 갔던 '터프의 맛'을 한 번이라도 읽게 되길 소망했다. 이왕이면 그가 창안한 세계의 뼈대가 되는 '와일드 카드 셔플'까지 더하여...

 마틴을 알면 알수록 읽고 싶은 작품의 리스트는 자꾸만 늘어나는데, 줄어들 길은 요원하여 반쯤은 포기하고 살아가던 참인데, 이렇게 한꺼번에 다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스티븐 킹에게 결말이 적힌 편지를 받은 할머니의 기쁨이 이와 다를까? 그래서 나는 이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오랜 마틴의 열혈 신도로써, 신약성경과도 같은 그의 걸작선이 나온 마당에 보다 많은 이들을 마틴의 품 안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의 절친 가드너 도즈와는 조지 R. R. 마틴의 매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조지 R. R. 마틴의 책을 펼치는 독자들이 얻는 것은 수많은 현대 작가와 비평가들이 그토록 선호하는 메마른 미니멀리즘이라든지 포스트모던 문학 특유의 쿨하고 아이러니컬한 유희 감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것들 대신 독자들이 발견하는 것은 강렬한 갈등에 뿌리를 박은 뚜렷한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 그것도 이야기꾼으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작가에 의해 면밀하게 창조된 이야기다. 첫 페이지부터 당신의 마음을 움켜잡고 놓아주지를 않는 매력적인 이야기인 것이다.(1권, p. 14~15)


 정확히 내가 마틴의 신도가 된 이유와 같아서 일부러 인용해 보았다. 마틴의 매력은 바로 이것이다. 흠뻑 빠지게 만드는 매력적인 이야기. 도즈와는 역시 절친답게 마틴의 매력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요즘 가장 각광받는 '왕좌의 게임'이 가진 매력도 바로 이것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사람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에 취해 사는 존재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들은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 등 각종 매체를 통하여 이야기를 소비하고 감상한다. 하루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를 관통해 가지만 정작 우리의 마음을 확 잡아끄는 이야기는 별로 만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가 우울하고 피로에 쉽게 노출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아주 재밌고 좋은 이야기를 듣거나 읽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뭔가 힘을 잔뜩 받은 듯 일상을 활기차게 보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분명 좋은 이야기엔 그런 힘이 있다. 답답한 일상의 숨통을 트여주고 힘든 일상을 지렛대처럼 손쉽게 빠져나오게 만드는 힘이. 알고 보면 오늘의 고난을 참고 견디게 만드는 내일의 꿈과 미래의 희망이란 것도 이야기다. 자기 스스로 만드는 이야기. 인간의 의식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우리의 두뇌 자체가 빼어난 이야기꾼이라 말한다. 외부의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기 보다는 먼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고 거기에 맞추어 바깥 사실을 받아들인다고 말이다. 사람 자체가 이야기의 존재이기에 인간은 밥심 외에 이야기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지도 모른다. 잡설이 길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의 탐닉이 그렇게 무용한 것은 아니며 좋은 이야기는 좋은 음식만큼이나 살아가는데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동의하여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면, 조지 R. R. 마틴의 소설들을 탐독하라는 것이다.

 마틴은 그야말로 이야기의,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에 의한 존재니까 말이다.

 '이 더위에 무슨 책이냐?' 하실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조지 R. R. 마틴의 열혈 신도로써 이렇게 답하겠다.

 '여름의 무더위 따위야 그저 마틴의 서늘한 세계에 더 거세게 빠지게 만들 '거드는 왼 손'에 불과할 뿐!'이라고...


지금까지 언급한 책들을 한 자리에 모아 본다. 이야기만이 가득한 영토에서 그들은 함성으로 선언한다.

 '이야기여, 번성하고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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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7-19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붐칫~붐붐칫~~ 잔치 분위기에 걸맞게 배경 구성지게 바꿔주시고 책도 번쩍번쩍ㅋㅋ 박스세트면 정말 이 정도 화려함은 나와줘야지 싶어요^0^! 외관으로 보자면 66000원 투자가 그리 비싸 보이지 않는 급~

ICE-9 2017-07-19 21:33   좋아요 0 | URL
앗! AgalmA님^^ 열성 팬으로써 애정에 걸맞는 정성을 보이기 위해 나름 애쓴 것을 눈치채 주셨군요^^
이 책 나왔을 때 정말로 붐칫, 붐붐칫 어깨춤을 췄답니다. 후후...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마틴의 작품이 다 실린데다 말씀하신대로 외관까지 근사해서 어깨춤이 더 격렬해지더군요.
그러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거금이 홀라당 사라져버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올해는 이 정도로 끝내야지 싶었는데, 아작이 또 맹공하네요.
아니! 그토록 발간되길 오매불망 기다렸던 할란 엘리슨 걸작선이 나온다지 뭡니까!
아악~!! 그 소식 듣고 한 5초간 공중 부양 했어요. 이제 다시 총알 장전 해야겠습니다^^

AgalmA 2017-07-20 07:18   좋아요 0 | URL
저도 할란 엘리슨 걸작선 소식 듣고 읽고는 싶은데 살 수는 없는 쪽으로 결정을....쿨럭)

ICE-9 2017-07-20 12:30   좋아요 0 | URL
아앗! 이런! 엘리슨의 팬으로써 정말 안타깝지 않을 수 없네요.ㅠ ㅠ
 



 일본의 만화가 오쿠 히로야가 2000년부터 무려 14년에 걸쳐 연재한 ‘간츠’는 현재 일본 SF 만화의 대표작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간츠’를 나는 우리나라에 단행본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읽어왔으니 나름 오래된 팬이라 할 만한데 그건 무엇보다 화려한 작화에 압도당한 게 컸다. 당시는 만화를 CG로 그리는 것이 아직 자리잡지 않았을 때였는데 오쿠 히로야는 아주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어 놀라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작가 자신이 워낙 영화 팬이라 그런지 만화의 페이지마다 영화적인 연출로 가득했던 것도 인상 깊었다. 이야기는 죽은 자들이 낯선 장소로 호출되고 거기에 있는 구체의 지시에 따라 특정 장소로 강제 전송 되어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성인’이라 부르는 존재와 싸운다(고 쓰고 ‘서바이벌 게임’이라 읽는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독특하고, 또 어떻게 보면 뻔하게 보이는 설정의 단순한 구성이지만 슈트와 메카 그리고 병기의 묘사가 굉장히 뛰어나고 성인과의 전투가 정지 화면의 나열임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인데다 박력이 넘쳐 뒷 이야기를 기다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런 장면들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간츠’의 커다란 인기 덕분에 몇 번이나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로 만들어져 그 소망은 쉽게 성취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차라리 소망하지 말 것을 하는 생각만 낳게할 뿐이었으니….




 원작의 아성을 뛰어넘는 것은 하나도 없었을 뿐더러 그러기는 커녕 처참하게 실패한 것들만 즐비했기 때문이다. 워낙에 화려한 비주얼을 보여주는 작품인만큼 그 때문에 오히려 영상화가 어려운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간츠:오'가 영화를 만들어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기대 보다는 우려가 더 컸던 것 같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나는 이 작품이 13년간 연재한 것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전투 이야기를 보여주는 ‘오사카 전투’라는 것. 개인적으로 나는 이 전투가 ‘간츠’의 사실상의 클라이막스라 생각한다. 무력으로 압도하는 적에 대한 공포, 그것을 무릅쓰고 벌어지는 처절하면서도 절박한 전투 그리고 깔끔한 마무리까지 모든 것이 잘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에피소드를, 이게 바로 두 번째 이유인데, 순수한 CG 애니메이션으로 담다니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순수 CG 애니메이션에 대해 만족해 본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본에서 만든,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라면 더더욱.


 최근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믿음이 하나 있다. 일본에서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것들은 다 ‘꽝’이라는 믿음이다. 허황된 믿음이 아니다. 근거가 되는 팩트의 리스트가 즐비하다는 점에서 이제 신념으로 지녀도 좋을 정도다. CG 애니메이션은 더하다. ‘파이널 판타지’부터 시작해서 ‘캡틴 하록’까지.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의 피리 소리에 홀린 쥐가 된 기분을 들게 했다. 그리운 추억에 이끌려 뒤따라 갔다가 그 그리움마저 탈곡기에 탈탈 털리는 멘붕을 맛보았으니.

 이런 까닭에 처음엔‘간츠:오'에 대하여 회피 전략을 썼다. 그런데 먼저 개봉한 일본에서 반응이 너무 좋은 게 아닌가? 역대 최고의 애니메이션이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그럼 이제 ‘간츠’의 장면들이 제대로 영상화된 것을 볼 수 있는 거야?’ 하는 마음으로 귀가 쫑긋, 눈이 번뜩, 가슴이 벌렁벌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얼른 개봉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간츠 : 오'가 개봉되었다. 결론은 대만족. ‘간츠’의 가장 완벽한 영상화라 할 만하다.

 슈트를 입은 플레이어의 생동감은 얼굴 표정이나 몸짓 할 것 없이 뛰어나고 아주 자연스럽다. 


주인공 카토. 정말 실감나는 표정이다.


 특히 오사카 팀의 시마키가 다리 위에서 검을 휘두를 때의 재현은 정말 놀라웠다. 어찌나 유려하고 자연스러운지. 어쩐지 영화 ‘바람의 검심’에 나오는 켄신이 생각났다. 초반에 나오는 몇몇 엑스트라 중엔 진짜 인간처럼 보이는 이들까지 몇몇 있었다. 이처럼 CG로 사람을 리얼하게 묘사할 때 받게 되는 어색함이 이 애니메이션에선 꽤 덜한 편이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폴라 익스프레스’부터 봐왔다면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액션이 좋았던 것도 분명 한없이 자연스럽게 보였던 CG 인물 덕분이었을 것이다. 인물 묘사가 CG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약점이 되는 부분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을 이만큼 잘 묘사했다고 한다면 다른 것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간츠’의 만화를 즐겨 본 이들이라면 두 가지에 특히 더 관심이 가지 않을까 싶다.(어쩌면 나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는 병기나 메카에 대한 묘사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성인과 싸우는 것에 대한 묘사이다. 전자에 관해서라면 꽤 훌륭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간츠 : 오’를 통해 간츠의 무기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을 정도로 병기의 묘사가 잘 되어있다. 원작에선 원래 카토의 무기였던 ‘Y건’의 포획이나 ‘Z’건의 중력파 묘사 모두 무척 실감이 날 정도로 재현이 잘 되었다. 덕분에  ‘Z’건의 중력파를 몇 번이나 맞고도 계속 일어서던 ‘텐구’의 무시무시한 멧집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잘 다가왔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압권이라 할만한 장면 중의 하나는 소의 모습을 한 상체와 거미의 모습을 한 하체를 가진 규유키(오쿠 히로야는 단행본 말미에 오사카 미션에 나오는 모든 성인들이 실은 일본의 유명한 요괴 설화집인 ‘백귀야행’을 모티브로 한 것이며 여기 나오는 성인들이 어떤 요괴를 모델로 한 것인지 밝혀놓고 있다.)와 간츠 대원이 사용하는 거대 로봇의 전투라 할 것인데, 규우키가 강에서 솟아 오르는 장면이나 거대 로봇이 빌딩 사이에서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나 굉장한 박력을 보여준다. 분명 ‘퍼시픽 림’이 없었다면 이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 컸을 것 같다.




 아! 하나 더 있다. 오다 하치로가 입고 있었던‘하드 슈트’의 묘사도 좋았다. 만화에서의 박력이 애니메이션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게 또 있었으니 바로 최종 보스가 되는 누라리횽과의 대결이다.

 누라리횽은 원래 ‘백귀야행’에서 오사카 상인의 모습을 하고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가 주인 행세를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요괴라고 한다.


누라리횽


‘간츠’의 누라리횽은 처음엔 그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실은 아주 무시무시한 변신 능력을 자랑한다. 죽여도, 죽여도 자꾸만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되살아날 뿐 아니라 갈수록 더 강력해져 싸우는 사람이나 보는 이나 ‘이제 제발 죽어줘’ 하고 절로 애원하게 만드는 존재다. 그 변신이라는 것이 참으로 괴상하고 더러는 꽤나 망측한데 실은 이 영화를 볼 때 가장 궁금했던 부분도 이것이었다. ‘과연 이 애니메이션이 누라리횽의 변신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놀라웠다. 딱 하나만 빼고(이건 사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서 빼도 무방한 존재다.) 제대로 다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누라리횽의 변신 모습 중에는 여성 나체로만 이루어진 거대 여성도 있는데 이것은 아무리 잘 옮겨도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여지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마저 실감나게 연출하고 있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절대 여성 나체를 무한정 볼 수 있었기에 감탄한 것은 아니다.) 특히나 카토의 절규와 함께 펼쳐지는 전투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 그 비통함이랄까 격노랄까 하는 것이 온전히 전해져 CG 애니메이션에서 모처럼 등장인물의 감정에 공감토록 만들었다.


'누라리횽'의 최종 진화형. 후덜덜한 카리스마로 마지막의 긴장감을 책임진다.


 ‘간츠’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간츠’의 장면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간츠 : 오’에게 정말 만족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클라이막스를 앞두고 있었던 야마자키 안조와 카토의 대화가 조금은 길어지는 바람에 그동안 잘 쌓아왔던 긴장감이 좀 풀어진다는 것과 초반 커다란 얼굴만 굴러다니는 성인과의 총격 장면이 이 애니메이션에서 유일하게  CG 전투처럼 보였다는(현실감이 떨어졌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것을 빼면 시쳇말로 꽤나 잘 빠진 작품이었다. 


 사실 나는 ‘간츠’에 대해 조금은 양가적 감정이었다. 좋아하지만 특히 성인과 관련하여 무작정 좋아하기가 좀 저어되었다. 성인이 내게는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이주자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즉 ‘간츠’에서 주인공들을 괴롭히고 학살 당하는 성인들은 현재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이주자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작품의 높은 인기는 그런 것을 정치적 올바름 따위는 집어던져 버리고 아주 노골적으로 해소시켜 주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자꾸만 반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일본이 보여준 타인에 대한 배척과 폐쇄성 때문에 성인과는 무조건적인 대결 뿐이며 주인공들의 결속과 구원 또한 오로지 성인의 제거를 통해 이뤄진다는 게 작품의 이야기와 액션을 즐기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선 불편했다. 그런데 그런 불편함을 이 애니메이션이 조금은 가시게 해 줘서 반가웠다. 바로 원작과 좀 다르게 묘사된 카토와 안조의 결말 부분이다. 카토와 안조의 설정도, 전개도 원작 그대로이지만 작품의 마지막에 결행되는 카토의 선택이 이주자와 관련해 조금은 희망적인 관측을 낳게 만든다. 그 선택이 나와 전혀 다른 것, 그것을 포용하여 하나의 진정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카토는 자신을 온통 지배하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타인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괴물이나 다를 바 없는 성인과 싸우는데, 그런 태도 때문에 더욱 카토의 선택이 ‘이주자에게로 열림’을 지향하고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간츠:오’가 더욱 마음에 든다.


야마자키 안조(카토와 안조의 관계가 이 영화의 테마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현재도 일본에선 만화가 활발하게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바람의 검심’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실망의 도미노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정말 못 만들어서 그렇기도 하고 영화 특유의 분위기는 무시하고 오로지 원작 그대로 무리하게 실사화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는 특히나 CG의 경우 너무 기술적인 측면에만 경도된 나머지 관객이 공감할만한 드라마를 형성하는 데 소홀이 한 탓이다. 그런 면에서  ‘간츠:오’는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작품이 될 수 있는지, 그 좋은 예를 보여주는 것 같다. 놀라운  CG 기술을 선보이지만 그것을 독보적으로 만들지 않고 진행 중인 드라마와 유기적으로 잘 연결하여 표현이라는 외형과 이야기라는 내면 서로가 균형을 잘 이루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다가가려면 기술도, 이야기도 어느 하나 허투루 해선 안된다는 걸   ‘간츠:오’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작품이기에 아무래도 속편도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마지막 결전인 카타스트로피 편이 궁금한데, 지구가 침공 당하고 미국이 사라지며 간츠 대원 전체가 인류 전체의 운명을 걸고 싸우는 장대한 스케일인지라 진정 블록버스터 급이라 할만한 그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재현될지 몹시 기대된다.   ‘간츠:오’만큼이나 성공적이어서 이전의 실패작들을 기꺼이 흑 역사로 치부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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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점과 한계가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을 이만큼 재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기에 여기서는 그저 칭찬만 하기로 한다. 부디 성공해서 카타스트로피 판도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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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5-21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시리즈가 계속 나왔으면 합니다ㅠb

ICE-9 2017-05-21 14:09   좋아요 1 | URL
앗! 고양이라디오님도 똑같은 마음이라니, 무척 반갑습니다.^^ 그 전 영상화된 작품들에 너무 실망이 컸기에 앞으로 나올 작품들에 대한 기대가 한껏 커지는 것 같습니다. 끝까지 만족할만한 작품들이 나와주길 고대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5-21 16:50   좋아요 0 | URL
전 반대로 <간츠: O>를 먼저 접하고 간츠 실사판 영화를 찾아보았습니다. 실망감이 몇 배로 크더군요ㅠㅋ 앞으로도 에니메이션 간츠 시리즈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ICE-9 2017-05-22 01:57   좋아요 1 | URL
아, 이런, ‘간츠:오‘를 먼저 접하고 실사판을 보셨다면 실망감이 더욱 컸었겠네요. 끝까지 보는 것조차 어렵지 않았을까 감히 추정해 봅니다. 얼른 후속작이 나와서 고양이라디오님에게 남아 있는 실사판의 기억을 남김없이 날려버리게 되길 기원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5-22 18:19   좋아요 0 | URL
정확하시네요ㅎ... 보통 영화를 보면 끝까지 보는 편이라... 힘들었습니다ㅠㅋ

ICE-9 2017-05-25 20:46   좋아요 1 | URL
동병상련이죠^^ 일본은 이제 실사판은 좀 안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은혼‘도 그리 기대되지 않아요ㅠ ㅠ
 

<대한민국 언론의 현재 스코어>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기사만 올라오면 득달같이 따라붙는 비난 댓글과 '꽃보다 청와대' 등 문 대통령과 그 참모에 대한 '맹목적'이라고 의심될만한 무수한 찬사의 멘션에 직면해야 하는 언론인들, 불편하고 부당하십니까? 맥없이 노무현을 떠나보내야 했던 상당수 민초들의 상처도 헤아려주셔야지요. 정석대로 본령대로 비판하는 일부 합리적인 기사마저 모두 쓰레기일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언론을 개털 취급하는 집단적 민의에는 곱씹어볼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시민들의 이 '비이성'은 지난 9년 민주주의 암흑기를 역사의 박물관에 가두지 않으면 또 망령처럼 엄습할 수 있다는 절박감의 표시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동전의 앞면이 그러하고요. 뒷면에는 언론보도에 대한 깊은 불신이 있습니다. 언론이 나쁜 권력에 대해 제대로 된 견제를 수행하지 못했다는 실망감이 요체입니다. '언론의 자유가 과연 우리의 자유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하는, 지난 9년 아니 노무현 정부까지 합한 십수년 동안 언론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시민들은 여태 듣지 못했습니다. 

사전투표함 지키는 시민들 그러니까 지난 대선 개표부정을 강하게 의심하는 시민들을 이해 못하는 점도 그 맥락에 있습니다. 일말의 선거 사기라도 막아 보고자 수일밤을 풍찬노숙한 시민들, 그들을 '더플랜' 김어준의 음모론에 속아넘어간 우매한 자들로 규정할 수는 있어도 금번 선관위에 대한 신물나는 감시자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 했습니다. 선관위의 그간의 선거사무가 시민들의 집단적 감시 '테러'를 당해도 쌀 만큼 한심했던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고압적 태세, 허술한 사무를 감안하면 앞으로도 우범자 취급을 받아 마땅합니다. 

앞으로도 그들을 '우중'이라 생각할 것입니까? 그런데 계몽하려 하지 마십시오. 조국 민정수석에게 "앞으로 검찰 수사지휘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 등신이 기자의 이름으로 최고 권부를 출입하는 이상, 그리고 이에 대한 내부 자성이 없는 이상, 언론은 당분간 냉소의 대상으로 묶이는 것은 온당해 보입니다. 그냥 시민들과 함께 가되, 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똑똑한 벗으로서 자기 몫을 자각하십시오. 이젠 과거와 같이 여론주도층으로 대접 못 받습니다. 한 짓이 있으니 아니 한 일이 없으니.

'대통령되기 전' 문재인이 마이너일 때나 대세론의 주인공이 될 때나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는 태도는 불과 며칠전 당신들의 컨센서스였습니다. 왜 그런지 저는 알지요. 문재인을 비판하는 게 가장 쉽고 안전하니까요. 그리고 지금은 문바라기로 탈변하고 있는데 참 가증스럽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나약한, 가장 속물인 언론인들, 언제 사람이 될 겁니까. 하긴 기자와 정자가 사람이 될 확률이 3억분의 1로 같다고 하더만요.


https://www.facebook.com/funronga/posts/1450039118386164?pnref=story



제 생각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만 같은 글이라 퍼오지 않을 수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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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우가 잠든 숲'은 보텐슈타인과 피아 형사 콤비가 주연인 타우누스 시리즈의 8번째 작품이다. 시리즈를 다 읽은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 무리일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모함을 빌어 감히 말하자면, 내가 보기에 '여우가 잠든 숲'은 지금까지 이어져 온 타우누스 시리즈의 결정판 같다. 겉으로 보기엔 더없이 친밀해 보이지만 속 모습은 전혀 반대인 공동체, 집단적인 방관과 무책임 속에 은폐되어 버린 과거의 비극,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아 유지되어 온 사회, 그 사회의 진정한 구원은 과거의 비극에 깃든 진실이 올바로 밝혀지고 무고한 자가 희생양의 족쇄에서 풀려날 때 찾아온다는 것 등등. 타우누스 시리즈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그래서 타우누스 시리즈의 중핵으로 일컬을만한 것들이 '여우가 잠든 숲'에선 모조리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하여 혹시 당신이 보텐슈타인 형사의 팬이라면 이 소설은 더욱 흥미로울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2권 말미에 실린 넬레 노이하우스의 고백에 따르면, 이 소설엔 무엇보다 올리버 보텐슈타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한껏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 오랜 세월 존재했었던 - 하여, 트라우마라고 불러도 무방한 - 상처가 여기서 드디어 드러난다. 그가 왜 승진 따위 가볍게 무시하고 오로지 사건의 진실만 쫓는 형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토록 자신의 조그만 잘못에도 쉽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타우누스 시리즈의 대표작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에서 피아가 독선적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일부러라도 사건에 자신의 감정을 투여하는 것을 거부하며 엄격하게 자신을 절제하는지, 바로 그 내막이 이 소설에서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보텐슈타인이 지닌 무려 42년 동안 지속된 고통의 결을 헤아리고 동시에 치유를 주고자 하는 이야기다.



 소설엔 프롤로그가 있다. 42년 전, 그러니까 1972년에 일어난 일이다. 한 여인이 한 남자를 만나려 그의 오두막을 찾는다. 여자는 자신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그 남자를 죽일 생각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한다. 그 뒤, 소설 속 시간은 2014년의 현재로 돌아온다. 한 청년이 시즌이 지나 인적이 뜸해진 캠핑장을 찾는다. 그는 마약 중독자다. 그러나 그 곳을 찾아온 것이 마약을 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실은 정반대의 목적으로 찾아왔다. 마약을 완전히 끊기 위해. 그에겐 연인이 있다. 그녀는 사내 아이를 임신했다. 곧 태어날 아들에게 청년은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곳에 온 것이다. 격리된 이 곳에서 갱생의 기회를 잡기 위해. 그리고 사고. 남자가 찾아 온 캠핑장에서 폭발과 함께 화재가 발생한 것이다. 캠핑카 하나가 전소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된 불에 탄 시체. 피아의 전남편이자 법의학자인 헤닝은 그 시신이 남자이며 화재로 죽은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임을 밝혀낸다. 결혼과 일 모두에서 실패하고 이 곳에서 여행을 떠난 동생 대신 캠핑장을 관리하고 하면서 재기를 노리고 있던 전직 기자 펠리치타스는 폭발 즈음해서 급하게 떠난 자동차 소리를 들었다고 증언한다. 딸 소피아의 양육으로 곤란을 겪는 보텐슈타인은 도저히 맡길 데가 없어서 딸을 데리고 범죄 현장으로 간다. 이런 보텐슈타인의 모습은 제대로 된 아버지가 되기 위해 캠핑장을 찾은 청년과 묘한 대구를 이룬다. 프롤로그까지 포함하면 넬레 노이하우스는 아버지와 관련하여 세 명의 남자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버지가 되지 못한 자,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자 그리고 아버지가 된 자. 모두 뜻하지 않게 가정을 이루는 일에 실패했다. 펠라치타스 또한 마찬가지다. 피아 역시 범죄 현장에서 하필이면 전남편과 같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어쩌면 넬레 노이하우스가 살며시 보여주는 증상일까? 우리가 생각하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안정으로 충만한 가정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연 그러한 것 같다. 불에 탄 캠핑카 소유주를 시작으로 수사를 확대해 보니 그 어느 가정도 우리가 기대하는 범주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신뢰 대신 적대가, 안정 대신 불구가 되어버린 가정들이 공동 묘지의 묘비처럼 즐비하다. 그리고 마치 그런 속사정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어지는 살인 또 살인. 죽음에 임박한 요양원의 할머니가 급사하고 보텐슈타인에게 뭔가 전하려 했던 신부도 목을 매단 채 죽어 있는 모습으로 발견된다. 살인이 거듭될 때마다 보텐슈타인은 상처를 입는다. 모두 아주 어릴 때부터 알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엄격하게 자기 절제를 하는 보텐슈타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참혹한 죽음 앞에선 속수 무책이다. 피아가 걱정할만큼 보텐슈타인은 사건 수사에 개인 감정을 드리운다. 그러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무려 42년 전에 일어난, 그것도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기에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 되어버린 바로 그 아이의 실종 사건에 관련 되어 있음을 알고는 아예 자신의 개인적인 사건으로 공공연히 선언해 버린다.


 당신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난 이 사건과 그냥 어떤 식으로건 관련돼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 이 뼈의 주인공은 한때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소. 42년 전에 실종됐는데, 그 때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본 게 나였소! 그래서 나는 이 일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단 말이오. 내 말 알아듣겠소? (1권. p. 316 ~ 317)


그 날 사라진 소년의 이름은 아르투어. 실종된 것은 소년만이 아니었다. 보텐슈타인이 새끼 때부터 젖을 먹여가며 키운 여우 막시마저 같이 사라졌다. 당시 보텐슈타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던 두 존재가 동시에 홀연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 일로 보텐슈타인은 달라졌다. 러시아에서 이주한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 누구도 친하려 하지 않았던 아르투어와 기꺼이 친구가 되고 가련히 여겨 새끼 여우를 아낌없이 보살폈던, 그토록 약한 자에게 공감하며 정이 넘쳤던 보텐슈타인은 사라지고 감정을 억제하고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 하는 보텐슈타인이 되어 버렸다. 사건이 모두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던 이들과 관계가 있어 그는 어린 시절의 자신에게로 소환된다. 그렇게 넬레 노이하우스는 보텐슈타인으로 하여금 여지껏 피하려고만 했었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보게 만든다. 그것도 하필이면 이런 시점에서.


 그는 정의를 믿고, 규칙과 가치를 믿었기에 경찰이 되었다. 선과 악도 믿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사라지면서 예전에 그를 가득 채우고 독려하던 사냥 욕구도 사라졌다. 사람들에게 속고 바보 취급 당하는 것에 신물이 났다.(1권. p. 37)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가 더이상 통용되지 않는 세상에 신물이 났다. 사라지거나 죽은 피해자에겐 아무 관심이 없는 세상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경찰직을 떠날 생각을 한다. 바로 그런 시점에 넬레는 보텐슈타인을 원점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그로 하여금 보게 하기 위하여. 그것이 전부 사회의 책임인지, 과연 보텐슈타인 자신의 책임은 없는 것인지. 그래서 이 보텐슈타인에게 이 소설의 여정은 더욱  뼈아픈 것이기도 하다. 넬레 노이하우스가 이렇게 보텐슈타인을 은연 중에 심문대 위에 세우는 것은 아르투어와 관련된 그의 태도가 현재 독일 한 편에서 진행중인 외지인에 대한 태도와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 유사함이란 것은 바로 반응이다. 아르투어가 사라졌을 때였다. 같은 마을에 사는 가족의 아이가 실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사람들은 아이 찾는 것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무관심했고 방관했다, 그러는데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오직 하나, 아르투어의 가족이 외지인이라는 것 뿐이었다. 당시 아르투어 실종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 사건은 내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어요. 아르투어의 부모는 아주 선한 사람들이었어요. 다른 사람을 욕하지도 않았고 남들처럼 계속 우리를 찾아와 꼬치꼬치 묻지도 않았어요.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에겐 눈엣가시였던 것 같아요. 이전엔 내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적대감이었죠.(1권, p. 370)


 비단 아르투어의 가족만이 아니었다.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는 루퍼츠하인(실제 지명이기도 하다.)에서 유일한 의사인 레나테 바제도프 또한 외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을 사람들의 냉대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저 아래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내 환자들이에요. 그중에는 30년전부터 이 병원을 찾은 사람도 많죠. 그래서 그 사람들의 이름과 질병, 혈연관계에 대해 잘 알아요. 그럼에도 그 사람들을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적도 많아요. 나는 여기 토박이들의 눈엔 여전히 이방인이에요. 어릴 때부터 여기 살았는데도요.(2권, p.59)


 바로 이것이 소설 초반, 마치 루퍼츠하인 자체가 저주 받은 것처럼 모든 가정이 붕괴된 것의 이유였다.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에서 일어난 비극 앞에서 침묵했고 방관했다. 자기 일로 여기지 않았고 회피와 무시로 일관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이 작태를 외지인이란 이유 하나로 정당화 시켰다. 외지인을 희생양 삼아 비극이 벌여 놓은 공동체의 상처는 쉽게 봉합되고 그들이 바라는 정상 생활 또한 수월하게 되찾았지만 사실 그건 한없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것이 결국 빌미가 되어 모든 가정들이 서서히 붕괴되어 갔던 것이다. 그 비극과 정면으로 맞서고 치유하려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은 도미노처럼 이어졌고 무수한 희생자만 낳고 말았다. 소설 초반에 등장한 마약중독자가 되어버린 청년도 알고보면 그 희생자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런 마을의 모습은 그렇게 친했고 소중했던 친구와 여우를 한꺼번에 잃어버렸는데도 적극적으로 거기에 뛰어들어 뭔가 하기 보다는 42년 동안이나 소극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보텐슈타인에게 너무한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그저 자신의 상처 달래기에 바빴던 보텐슈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가해자들 중 하나였다. 넬레가 굳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어도 독자는 읽으면서 작가가 보텐슈타인에게 이런 추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진작에 아르투어와 막시를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면 훨씬 더 빨리 그들을 찾아냈을 것이라고. 바로 그 마음을 우리는 앞서 언급한 바제도프 의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엿볼 수 있다. 그녀는 피아에게 자진해서 사건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건네준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피아가 묻자, 이렇게 답한다.


 난 용기를 보여야 할 때 외면한 적이 너무 많았어요. 하지만 이제 그 결과가 두려워졌어요. 내가 잘 아는 세 사람이 살해되었고, 앞날이 창창한 아가씨는 사경을 헤매고 있어요. 이젠 더 이상 여기서 일어난 일들이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일처럼 두고만 볼 수 없어요. (2권, p. 59)


 나는 바로 이것이 넬레 노이하우스가  '여우가 잠든 숲'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픈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비극도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는 것. 설령 외지인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여우 막시처럼 사회에서 가장 연약한 자에게 일어난 일일지라도. 그러니 그것의 진실을 알고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지 말것. 그렇지 않으면 방관한 자들의 자녀인 엘리아스와 파올리네가 그랬던 것처럼 끝내 더 큰 비극이 되어 되돌아 온다는 것 말이다. 그러고 보면 42년 전, 아르투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지금까지 내내 반편으로 살아온 레오 켈러는 그대로 사건 이후 지금까지의 보텐슈타인의 삶이 정말은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보텐슈타인 역시도 레오 켈러처럼 바보처럼 살았다는 것을. 소설 마지막에 보텐슈타인이 내놓은 집을 레오 켈러가 살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싶다. 레오 켈러가 이제 진짜 안정을 구가할 수 있는 집을 가지게 되었듯이 보텐슈타인도 카롤리네와 소피아와 더불어 제대로 된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의미까지 더하여.


 '여우가 잠든 숲'은 최근 시리아 난민과 IS의 테러로 외지인에 대한 반감과 적대가 한층 깊어지고 있는 현재 독일에게 보내는 하나의 제안이기도 하다. 무조건적 배척 보다는 관용과 대화의 태도를 권유하는. 소설에서 모든 게 자기 일이라 생각하고 적극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것도 그러한 배척과 적대가 실은 눈 앞에 놓인 문제에 대해 책임지지 않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최근엔 기세가 좀 꺾였지만 독일의 대표적인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 당이 자국에서 제 2당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무분별한 반감과 적대를 등에 업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비단 독일의 일만은 아니다. 최근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백인 우월주의에다 이민과 이슬람 그리고 페미니즘과 동성혼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우정단 국민전선이 내놓은 대선 후보 마린 르 펜이 1위의 에마뉘엘 마크롱과 아주 근소한 차이로 결선 투표 진출에 성공했다.



 이들은 주로 노동자와 서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선출된 미국 대선과 참으로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사실 유럽에서의 이러한 극우의 득세는 거듭된 테러로 실제 자신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세력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진보 세력들에 대한 반감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다.(기이한 것은 성소수자들이 그들을 반대하는 극우 세력을 더 많이 지지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무슬림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보다 훨씬 더 극렬하게 배척하는 이슬람 사회에 대한 반감이 그들을 적대하는 극우 정당들의 지지로 이끈다는 것이다.) 여기엔 지금까지 프랑스가 자랑했던 톨레랑스와 정치적 올바름의 견지가 과연 좋은 것인가에 대한 깊은 회의가 서려 있다. 도널드 트럼프도 자신을 자꾸 연기하게 만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반감으로 선출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 논리에 대해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이렇게 경고한 바 있다.


 나는 정의의 가장 기본적 임무의 하나는 최대한 공적 정동의 공간을 넓히고 정체성의 축소에 항거하고 또한 불행의 공간이란 결국 우리가 전체 인류 차원에서 직면해야 할 공간이지 결코 정체성에 국한되는 발언에 가두어서는 안 되는 공간임을 기억하고 또한 알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불행에서 오직 정체성만을 중요한 것으로 입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행에서 오직 희생자의 정체성만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비극적 사건 자체에 대한 위험한 인식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유는 필연적으로 정의를 복수로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 복수는 정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항상 잔혹함이 반복되는 서막임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미 오래전, 위대한 그리스 비극은 정의의 논리와 복수의 논리를 대립시켰습니다. 정의의 보편성은 가족, 지방, 국가, 정체성의 복수와 대립됩니다.

 -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중에서 -




 소설에 외지인과 인간이 아닌 여우 막지를 데려 온 넬레의 마음은 이런 바디우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어쩌면 보텐슈타인이 앞으로 구현할 정의가 바로 바디우가 말한 정의일 지도 모른다. 과연 어떨지? 현재 미국과 유럽의 모습은 우리나라와도 결코 멀리 있지 않기에 그 정의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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