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현대 일러스트 미술의 선구자 무하의 삶과 예술
장우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라하를 여행할 때 한 번은 찾아가게 되는 성 비투스 성당. 거기엔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아 절로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하나 있다. 슬라브 민족에게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했다고 여겨지는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우스의 형제의 일대기를 재현한 것인데 무엇보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보이는 화려한 색채 때문에 작가의 이름을 뇌리에 단단히 새겨두게 된다. 그 작가의 이름은 알폰소 무하. 오랫동안 미술을 바라보던 시각에 있어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던 고전주의에서 벗어나 현대 감각에 걸맞게 새로운 시야로 미술을 해석하고 표현했다고 하여 '아르누보'란 이름으로 알려진 사조의 대표 화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뭐, 단순히 말하자면 아르누보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화가인 셈인데 그러나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그만한 위치에 서 있는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에 대해 한 권의 분량을 전적으로 할애하는 책은 만나보지 못한 것 같다. 알폰스 무하의 매력에 빠진 사람으로썬 참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제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게 되었다. 알폰스 무하에 대해서만 얘기해주는 책을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미술이론가 강우진이 쓴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이란 책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단편적인 지식으론 잘 알 수 없었던 알폰스 무하의 생애과 그 예술 여정을 체계적이면서 쉽게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가 어떤 인생 역정을 거쳐서 일러스트로 대변되는 그의 독특한 미술 세계를 정립했으며 또 말년엔 슬라브 민족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는지 그걸 명확하게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인생 항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1860년 7월 24일, 체코 모라비아의 작은 마을 이반지체에서 태어난 무하는 처음엔 성직자로 키우고 싶은 부모님의 뜻을 따라 어릴 때 성가대로 일하기도 했으나 곧 변성기가 찾아오고 더이상 음악으로 신에게 봉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그는 우연히 보게 된 지방 화가 음라우프의 '예수의 탄생'이란 그림 때문에 미술에 헌신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빈에서 무대 미술을 전담할 화가를 구한다는 소식에 그것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난다. 떠날 때만 해도 무려 30년 동안이나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건 알지 못했다. 무하는 빈에서 미술에 있어서 한창 불고 있던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만끽했으며 빈에서 뮌헨으로 그리고 파리로 옮겨가면서 그것을 주로 밑바닥 민중의 생생한 생활상들을 스케치 하는 것을 통해 점점 자기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하하면 얼른 떠오르는 '일러스트'는 예술적 소신이 낳은 선택은 아니었다. 원초적인 이유는 궁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이었다. 자신을 후원한 백작의 지원도 끊기고 생계 유지를 위한 수단도 어디서든 마련할 수 없어 생존이 정말 절박해졌을 때 겨우 들어온 일거리가 아이들을 위한 신문이 삽화를 그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작업실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작업실을 찾은 많은 파리의 아티스트들과 교류(여기엔 고갱도 있었다.)하다가 결정적으로 당시 파리의 가장 유명한 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주연하는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를 맡게 됨으로써 그의 예술적 세계가 만개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잘 아는 무하의 예술들은 이러한 여정들을 거쳐 태어났던 것이다. 미술에 대한 전통적인 고전주의적 시각에선 무하가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일러스트는 하찮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과 결별은 선언하는 아르누보의 입장에서 무하의 작품들은 고인 물과도 같은 예술에 신선한 물을 공급하는 마중물과도 같았다. 그렇게 그는 아르누보의 대표 화가가 되어갔지만 그러면서도 어릴 때부터 갖고 있었던 종교적 신념은 퇴색되지 않았다. 그는 1차 대전으로 향해가는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점점 불안해지는 체코의 상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체코 민중들에게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써 성좌를 그려주려 한다. 종교적 신념과 체코의 민족주의를 화합하는 것을 통해. 그것이 바로 무하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슬라브 서사시'이다. 성 비투스 성당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도 바로 그 '슬라브 서사시'의 일환이다.


 [책에 나오는 무하가 만든 성 비투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냥 그림으로 봤을 땐 무하가 왜 저 때 하필이면 저런 그림을 그렸으며 과연 어떤 마음이 변화의 거센 노도 속에서 그 스타일을 통해 관통하도록 만들었을까 알지 못했다. 그냥 참 예쁜 그림이구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 이제 이 책을 통해 무하의 생애와 예술에 투영된 신념들을 헤아리고 나니 가벼워 보이는 그림 속에도 실은 아주 진중한 터치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흔히들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알폰스 무하의 그림만큼 그 말이 잘 들어맞는 것도 없을 듯하다. 분명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무하 그림은 전혀 다르게 다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나처럼 알폰스 무하에 대해 잘 알고 싶었다면 어쩌면 유일한 선택일 이 책을 추천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하여 무하의 그림들이 컬러로 많이 삽입되어 있어 눈까지 즐겁게 함으로 더욱 그렇다.


[이런 무하의 그림 도판이 책엔 많이 삽입되어 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1-03-03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폰스 무하 그림이 그때는 아주 새로운 거였군요 지금이라면 많은 사람이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도 좋아하는 사람 많았겠지요 아르누보 대표 작가니... 화가라고 해서 다 처음부터 그림을 그린 건 아니군요 그런 사람이 알폰스 무하만은 아니겠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고 재능도 있었네요 그림을 그린 사람 마음이 어땠는지 알고 그림을 보면 다르게 보이기도 하겠습니다


희선
 
소년과 개
하세 세이슈 지음, 손예리 옮김 / 창심소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다시 봐도 작가의 이름이 하세 세이슈였다. 놀랐다.

 '하세 세이슈하면 비정하기가 이를 데 없는 하드보일드 소설인 '불야성' 시리즈를 쓴 사람이 아니던가? 그가 이런 달달한 소설을 썼다고?' 처음 '소년과 개'라는 소설의 표지를 보았을 때 든 생각이었다. 그 때는 그래보였다. 아무튼 개가 주연이고 그 개와의 관계를 통해 따스한 위로를 전하는 이야기라고 들었으니까. 하긴 개를 가지고 '불야성'처럼 비정하고 냉혹한 작품을 썼다간 애견인들에게 무슨 비난을 들을지도 모르는 법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법, 불야성 시리즈를 완결한 지도 어언 10년이 지났으니 그동안 달라졌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래, 그렇다면 듬뿍 맛 봐주지! 하세 세이슈가 쓴 달달한 소설의 맛을!'하는 기분으로 책을 펼쳤다.




 놀랍게도 쓰나미와 원전 사고로 대변되는 후쿠시마 사태를 작품의 배경으로 깔고 있었다. 주연이 되는 개, 다몬은 그 사태 때 주인을 잃은 개였다(이 사실은 소설 후반에 가서야 밝혀지기에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작품에서 그리 중요한 미스터리가 되는 건 아니므로 그냥 여기서 밝혀두도록 한다.) 그 개가 일본을 이리저리 떠몰면서 이런저린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데 소설은 그걸 인물 하나 당 각 장 하나를 할애하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우리는 '남자의 개'를 시작으로 모두 여섯 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우리는 자주 잊지만 개의 조상은 원래 늑대로 그 늑대가 그러하듯이 원래는 무리를 이루고 사는 동물이다. 소설은 바로 그런 개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야기 곳곳에서 개 다몬이 옛 주인을 떠나는 이유가 어떤 일로 인해 더이상 무리의 일원이 될 수 없어서라는 게 자주 나오는 것이다. 작가가 하필이면 이런 '무리를 이루는 것'을 반복해서 내세우는 것에도 물론 이유가 존재한다. 소설이 계속해서 전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가족'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우연히 다몬과 만나 그를 거둬들이게 되는 남자부터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와 그를 홀로 돌보는 누나라는 가족이 등장한다. 남자는 장남이라 거기에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있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 상 그걸 짊어지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누나를 위해 할 수 없이 절도단의 도피를 위해 자신의 특기이기도 한 차량의 운전을 해 주기로 한다. 그 다음, '도둑과 개'에선 '남자와 개'에서 절도단의 리더로 나온 미겔이 주인공이다. 그는 외국인인데, 소설에서 정확하게 말하고 있지 않으나 아무래도 남미에서 온 것 같다. 그 역시 누나가 있다. 어릴 때 모종의 사건으로 부모를 잃었고 누나가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미겔은 그런 누나를 위해 절도를 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가게를 차려주려 하고 있다. 그는 다몬에게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는데 그건 어릴 때 자신을 도와주고 병으로 죽어버린 개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런 다몬과 함께 하면서 미겔은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무리, 즉 가족을 다시 찾은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다음 편도 그러하다. 모두 가족이 나오고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무너져 있거나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게 밝혀진다. 다몬을 그런 가족 안으로 들어가 그 일원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역시 달달한 이야기 같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하세 세이슈가 달달한 소설을 썼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커다란 착각으로 밝혀졌다. 역시 '불야성'의 작가답게 이야기 도처에 범죄와 죽음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한 편도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설에서 미겔은 자신과 함께 한 이는 모두 죽었다면서 자신이 마치 사신과 같다는 얘기를 한다. 알고보면 다몬이 그런 존재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달달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일단 건조한 듯 보이지만 가급적 차가운 느낌을 배제한 문장이 그렇고 개와 가족을 향한 등장인물들의 마음이 그렇다. 하드보일드에 자주 등장하는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 자신만의 비극적인 사연과 현재의 고통 때문에 그저 누군가를 포용하거나 자신의 따스한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외롭고 피로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범죄가 일어나고 죽음이 발생해도 마냥 어둡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마음들이 채 꽃 피우지 못하고 져서 애틋하고 그들이 남겨놓은 잔향들이 아련할 뿐이다. 어쨌든 '화차'로 유명한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이 작품을 나오키 상 수상작으로 정하면서 감동적인 수작이라고 했는데, 감동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가족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는 좋은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1-02-21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가 먼 길을 가는 듯하네요 자신이 갈 곳으로 잘 갔을지... 개를 만난 사람은 자기 식구를 생각하고, 개를 만나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네요 어딘가에 머물러 살아도 괜찮을 텐데 개는 그러지 않고 자기 길을 가다니... 개도 자기 마음이 있겠지요 개와 만나는 사람 끝이 안 좋다니, 그건 아쉽기도 하네요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희선
 
저수지 13
존 맥그리거 지음, 김현우 옮김 / 미디어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으로 존 맥그리거의 소설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느낌을 감히 추정해 본다. 한 마디로 낯설 것이다. 대화는 있지만 그걸 나타내는 인용 부호도 없고 단락도 별로 없이 문장만 줄줄 이어질 뿐이니까. 흡사 호세 사마라구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그렇다고 특별한 주인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가 묘사하는 시선은 다양하게 옮겨다니고 이 인물, 저 인물이 교직하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예고 없이 무던히 끼어든다. '개들조차도'에 이어 무려 8년만에 나온 존 맥그리거의 신작인 '저수지 13'에서 당신이 보게 될 것은 개인이 아닌 거대한 세상이다. 



 첫 눈엔 스릴러 같을 것이다. 갑자기 사라진 13세 소녀가 나오고 경찰과 마을 주민들의 장기간에 걸친 대대적인 수색에도 불구하고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아마도 이 다음엔 거기에 얽힌 미스터리를 푸는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겠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전작 '개들조차도'를 읽은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수지 13'은 다르다. 홀연히 기대를 벗어난다. 작가의 눈은 소녀의 사건을 훌쩍 벗어나 배회하는 유령처럼 마을 여기저기를 떠돌며 이 인물, 저 인물의 일화를 마구 끌어들인다. 두서도 없고 개연성도 없다. 우린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풍경과 인물을 마주해야만 한다. '여기서 형이 왜 나와?'란 질문은 애시당초 불필요하다.


 소설은 크레타의 미궁이고 당신은 테세우스다. 하지만 당신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할 아리아드네의 실은 없다.


 8년 사이에 뭔가가 일어났다.

 '저수지 13'은 전작 '개들조차도'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둘 다, 어떤 인물의 부재를 시작점에 놓는 것은 같다. 하나는 죽음이고 하나는 실종이라는 점에선 다르지만. 그러나 전개 방식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개들조차도'에서는 사회에서 마치 버려진 개처럼 살아 생전 아무 관심도 받지 못했던 이의 죽음이 시발점이 되어 그를 아는 자들을 통해 그가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렸는지 추적한다. 고고학자가 자기 앞에 던져진 유물에 집중하듯 사회가 쉽게 지워버린 한 개인의 삶에 천착한다. 그래서 발굴이란 표현이 '개들조차도'엔 어울린다. 하지만 '저수지 13'은 독자들이 한 소녀의 실종에 관심을 가질 것을 알지만 연연해 하지 않는다. 작가는 마치 민들레 홀씨를 입으로 훅 벌어버리듯 그걸 사건이 일어난 마을 전체로 광범위하게 산포시킬 뿐이다. '개들조차도'에선 우리 역시 살면서 관심을 갖지 않았거나 더 나아가서 기피해버렸을지도 모를 인물의 삶을 발굴해 그것을 보고 듣고 헤아리게 만들어 그 삶 역시 우리가 부둥켜 안아야 하는 것임을 체득하게 한다면 '저수지 13'은 문득 일어난 커다란 비극의 여파 속에서 그걸 껴안고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파노라마로 펼쳐 목도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처음 받는 느낌은 어떤 냉혹함이다. 

 우연히 마을로 여행 온 한 소녀가 사라졌고 영영 발견되지 않는다. 처음엔 마을 사람 모두가 아파하고 제 일인 것처럼 찾아 나섰지만 시간이 흐르면 더이상 그만한 무게를 갖지 못한다. 그녀는 새해가 되기 바로 전날 실종되었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의 축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벌어진다. 계절이 그렇게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듯이. 사람들의 일상은 계속되고 모두들 소녀가 아닌 자기만의 관심과 근삼에 빠져 살아간다. 때때로 아직 소녀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생각은 나지만 아침 햇살 아래 놓인 풀잎의 이슬처럼 잠깐 머물다 사라질 뿐이다. 내 삶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소설은 그렇게 실종된 소녀를 벗어나 마을의 자연과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섬세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소설은 모두 13장으로 이뤄져 있다. 각 장은 1년의 시간을 다룬다. 그렇게 소설은 소녀의 실종 후, 모두 13년의 세월을 다루는 것이다. 제목의 13은 소설이 담고 있는 세월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은 첫 장을 제외하곤 모두 같은 문장으로 각 장을 시작한다.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자정이 지나고 해가 바뀌었을 때'


 균일한 시간이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확하게 반복된다. 여기서 무엇이 떠오르는가? 고인물과도 같은 시간. 제목의 저수지는 그렇게 커다란 비극이 있어도 쉽사리 변화를 줄 수 없는 우리네 삶을 비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브뤼겔의 그림이 문득 떠오른다. 이카루스가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가 밀랍으로 만든 날개가 녹아서 바다로 추락하는 걸 그린. 유명한 그리스 신화 속 사건을 다루지만 그러나 브뤼겔은 그 사건을 사소하게 취급한다. 거대한 화폭에서 이카루스의 추락이 가지는 비중은 미미하다. 브뤼겔은 이카루스보다 거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언덕에서 밭을 갈고 있는 농부를 더 크게 그린다. 그는 고개를 이카루스가 추락하는 쪽으로 돌리고 있지 않다. 눈 앞에 놓인 밭 가는 일에만 집중한다. 자신의 삶에만.



 지속성의 의무를 엄중하고 부과하고 있는 삶은 그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무지와 방관은 필수적이라는 걸 그림은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적당히 관심을 끊고 잊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삶은 그렇게 굴러간다. 누구나 각 자의 삶이 있으므로. 그것도 단 하나밖에 없는.


 너무나 아픈 이별을 겪어서 이제 살아갈 의욕을 모조리 잃고 그저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데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꼬르륵 하며 허기의 신호를 들었을 때 느껴지는 허탈한 서늘함을 우리 역시 느껴보지 않았던가. 내일은 이부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삶이란 저수지의 무정함.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정함의 힘을 빌어 우리는 살고 미래를 열어간다.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비극이 자아낸 공백 속에서. 그렇다고 그 비극 때문에 우리가 더 현명해지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저수지에 아무리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도 그 경계를 조금도 허물지 못하고 마냥 잠겨 버리듯이. 삶은 그냥 어제의 고만고만한 그대로 늘 똑같은 고민을 부여 잡으면서 똑같은 수준으로 해결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아리아드네의 실이 없는 불운한 테세우스인 것이다. 


 13.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가질 때 모인 사도들의 숫자. 구원의 종결.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제자의 손에 죽었다. 설교는 사라졌다. 뱃사람에게 정확한 방향을 알려주던 별자리는 까만 밤에 가려져 버렸다. '저수지 13'에서 존 맥그리거가 그리는 냉혹한 세계를 유랑하다보면 그가 어느 시점에선 이런 삶을 견딜만한 혜안을 던져주겠거니 기대하게 된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바랐던 것처럼. 그러나 소설에서 내내 사라져 있던 소녀처럼 그런 건 주어지지 않는다. 맥그리거는 문학이 감히 그런 존재는 아니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나마 문학이 줄 수 있는 건, 살면서 쉽사리 체험하지 못하는 걸 대리 충족해 주는 것 뿐이라고.


 그렇게 다시 그의 첫 소설,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으로 돌아간다. 알베르 카뮈가 살면서 하나의 육체밖에 소유하지 못하는 인간을 두고 유배에 처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던 것처럼 맥그리거도 개체성이 가지는 한계에 유념한다. 그 한계는 숙명으로 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도 나를 벗어나 '너'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이 광막한 세상에서 겨우 '나'만의 삶을 경험하다 갈 뿐이다. 맥그리거는 '저수지 13'과 비슷하게 하나의 비극적 사건에서 출발했던 첫 작품부터 '유폐된 나'를 벗어나는데 몰두했다. 개체성의 한계를 넘어 고루 확산되어 다양하게 얽히는 것을 추구했다. '저수지 13'은 그 걸음의 정점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까지 소상하게 담고 있으니. 그렇게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나를 벗어나 우리가 이루고 있는 공동체의 다양한 일원이 될 수 있다. 사실 문학만큼 깊이 타자가 되어볼 수 있는 매체는 없다. 맥그리거는 문학으로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딱 거기까지라고 여긴다. 평소에는 잘 할 수 없는 다채로운 타자들의 삶에 아주 흠뻑 젖게하는 것. 하나의 눈이 아닌 수많은 눈으로 나와 세상을 보는 것. 어쩌면 그 교차와 얽힘 속에서 우리는 저수지에서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삶을 직조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디어창비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벨파스트의 망령들
스튜어트 네빌 지음, 이훈 옮김 / 네버모어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묵직하고 우직하다. 아일랜드 작가 스튜어트 네빌의 데뷔작, '벨파스트의 망령들'을 읽은 첫 느낌이다. 2009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데 읽어보니 그럴만 한 것 같다. '벨파스트의 망령들'은 1998년 4월 10일에 영국과 아일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 사이에 이뤄진 벨파스트 협정 이후를 다룬다. 그 협정은 수 십년 간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북아일랜드에서의 갈등을 일단 종식시키긴 했지만 작가가 이 소설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따르자면 그저 단순한 봉합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동안 대의와 미래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아무 이유 없이 삶을 희생당한 이들을 모르쇠했기 때문이다. 목숨을 어이없이 빼앗기고 피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존재하는데, 가해자들은 아무런 죄책도 지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자신들의 범죄를 발판 삼아 더 큰 권력과 재력을 가져버렸다. 스튜어트 네빌은 이러한 상황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협정이라는 장막 아래에서 손쉽게 지워져 버린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소설을 통해서라도 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소설의 주인공이자 사라져버린 목소리들의 복수자인 제리 피건을 작가의 대변자로 삼고서.




 제리 피건은 북아일랜드 민족주의 진영의 테러리스트였다. 19세 때 아이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죽이는 첫 살인을 한 그는 북아일랜드에서 영국 왕립주의자들과 치열한 갈등을 겪는 동안 내내 그런 일을 해왔다. 조직이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하면 찾아가서 가차없이 죽였다. 협정 이후, 더이상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된 피건은 괴롭다. 그건 살인을 못 해서가 아니다. 열두 명의 유령이 자신을 따라다니면 조금의 안식조차 허락하지 않는 탓이다. 제목이 '벨파스트의 망령들'인 것은 그래서다. 그는 유령들에게 잠깐이라도 잠을 잘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유령들은 자신의 복수를 해주지 않으면 결단코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결국 피건은 그들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한다. 열두 명의 유령들 죽음에 책임 있는 자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모조리 '렉스 탈리오니스'의 법에 따라 처단하는 것이다. 예전의 동료 모두를.


  "대답을 안 했잖나, 제리.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다니까. 말해 봐." (...)

  "해야만 했으니까요."

  "해야만 했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유일한 방법이었어요."

  "뭐에 대한 유일한 방법?"

  "그들이 날 내버려두게 할 방법." (p. 382)

 

  오래만에 아주 눅진한 느와르를 만끽할 수 있는 '벨파스트의 망령들'은 이런 장르의 소설을 좋아한다면 얼마든지 추천해 줄 수 있는 작품이다. 주연, 조연을 막론하고 모두의 캐릭터가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몰입감에다 무분별한 폭력으로 점철되었던 북아일랜드 분쟁이 남겼던 상흔이 협정이 이뤄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와 따로 놀지 않고 유기적으로 잘 엮어 자연스럽게 보여줄 뿐 아니라 그 많은 아픔과 비극에 대한 제대로 된 성찰 없이 미래로만 나아간다는 게 얼마나 부질 없는 젓인지 피건의 행보를 통해 물씬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재미와 깊이 모두 잘 챙긴 명작. 마리 맥케나와 엘렌 모녀 곁에서 피건이 묵묵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그들을 지켜주는 모습에선 라이언 고슬링이 주인공을 맡았던 영화 '드라이브'가 떠오르기도 해서 '벨파스트의 망령들 역시 영화로 만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모두가 언젠가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게 피건의 신념이자 이 책의 메세지인데, 요즘처럼 검사와 판사들이 한통속이 되어 벌을 받지 않아야 되는 사람에겐 큰 벌을 주고 정작 벌을 줘야 할 이들에겐 한없이 관대한 꼴을 보고 있노라니 더욱 마음에 들어오게 된다. 여하튼 데뷔작이 이런 수준이라니 스튜어트 네빌이라는 작가 자체가 몹시 궁금해진다. 작가는 '벨파스트의 망령들'을 시작으로 벨파스트 누아르 시리즈란 이름아래 여섯 작품까지 발표한 상태인데 후속작들도 아울러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퀴어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잭 케루악과 더불어 미국 비트 세대의 대표적인 작가 윌리엄 S 버로스. 마약 중독자로서의 자기 고백이 물씬 담긴 소설 '퀴어'는 좀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품이다. 일단 이 소설은 '정키'의 후속작이다. 1953년에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정키'는 버로스의 데뷔작이자 작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높여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속편 '퀴어'는 묘하게도 한참 나중에 발표되었다. 그것도 무려 32년이 지난 1985년에. 버로스가 그제서야 '퀴어'를 썼던 건 아니었다. 원래는 '정키' 바로 뒤에 집필했으나 스스로 도저히 세상에 발표할 수가 없어 원고를 서랍에 고이 묵혀두고만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었던 이유가 있다. 펭귄클래식 코리아 판 '퀴어' 앞부분에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버로스의 육성이 담겨 있는데. 거기서 그는 원고를 쓰긴 했지만 다시 읽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고 하고 있다. 과거 자신의 고통과 절망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자면 이러하다.


 '퀴어'의 원고를 흝자, 읽지 못하겠다는 생각만 든다. 나의 과거은 운이 좋은 사람만이 탈출할 수 있는 독이 든 강이었다. 기록된 사건들이 이미 수년 전의 것이라도, 보자마자 위협을 느끼게 되는 독이 든 강. '퀴어'에 대해 쓰기는 커녕 읽기조차 힘들다는 사실을 뼈져리게 느낀다.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 진저리가 난다. (...) 이 책은 전혀 언급되지 않은, 사실은 애써 피한, 한 사건이 동기가 되어 만들어졌다. 1951년 9월, 내 아내 조앤을 총으로 쏘아 죽게 만든 사고다.(p. 20)



예전에 나온 '퀴어'의 리커버 판. 마치 프랑스 국기를 연상시키는 심플한 디자인으로 마음에 든다.



 소설의 주인공은 리. 말할 것도 없이 작가의 분신이다. 그는 '정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러나 두 작품에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는 거기에 대해 작가가 직접 한 말을 인용하고자 한다.


 내 첫 소설 '정키'에서 주인공 리는 조화롭고 자족적인 인물,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잘 알고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퀴어'에서 리는 분열되고, 절박하게 만남을 바라고, 자신과 자신의 목적에 전혀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인물이다.(p. 14)


 왜 이렇게 달라져 버렸는가? 한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마약이다. '정키'의 주인공은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퀴어'의 주인공은 마약을 끊었다. 바로 이 차이가 리에게 중대한 변화를 몰고 온 동력이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마약의 유용성 따위를 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 '퀴어'는 읽는 것마저 커다란 아픔을 느낄 정도로 작가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자신의 잘못으로 아내가 죽은 사고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사는 순간 모두가 온통 후회와 자책 밖에 없도록 만드는 비극을 겪고나면 삶을 보는 눈도 제법 달라지곤 한다. 작가는 그 비극을 관통하며 마약에 기댔던 삶의 시간들이 아무리 좋은 것들을 주었더라도 모두 거짓 환락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뼈져리게 느낀다. '정키'에서 눈 앞에 보여진 길은 착시의 산물이었고 자신이 세상과 조화롭게 영유하고 있다는 것 또한 오산의 결과일 뿐이었다. '퀴어'는 그런 환상이 모조리 사라진 뒤에 잔류한 것을 아주 진솔하게 기록한 소설이다. 썰물이 남겨놓고간 해변의 검은 해조류 사체와 같은 것을.


 '퀴어'에서 리는 청년 앨러틴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걸 다 주어서라도. 그러나 필요할 때만 리에게 곁을 내어줄 뿐, 앨리틴은 리에게 내내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다. 그는 현재 거주하고 있는 멕시코 시티의 온갖 곳을 그를 찾아 다니지만 어렵게 찾아낸다 해도 앨러틴은 쌀쌀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자신에게 무관심한 앨러틴의 관심을 받기 위해 리는 이런 말 저런 말 마구 쏟아내지만 종국엔 앨러틴은 이미 가 버리고 계속 혼자 떠들고 있다는 자각 뿐이다. 나중엔 어떻게든 앨러틴을 꼬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는 약, '야헤'를 찾아 에콰도르로 간다. 그러나 거기서도 야헤는 찾지 못하고 세상의 환대는 커녕 박대만 받을 뿐이다.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그는 소설 내내 내리막길이고 외롭다.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아서 구차하다. 눈 앞에 놓인 길은 도통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미로 뿐이고 그런 길을 걸어갈만한 의지조차 한 조각도 그에겐 남아있지 않다. 진실과 황당한 소문을 자신의 머리로 더이상 구별할 수 없게 된 리는 눈 앞에 보이는 앨러틴이라는 현실적인 존재와 스스로 비루하다고 여겨질 때마다 소환하는 과거의 기억에 기대어 버텨 보지만 마약을 복용하는 것과 똑같이 모든 건 다만 덧없이 흘러갈 뿐이고 남는 건 여전히 한없이 외롭고 왜소한 자신에 대한 쓰디 쓴 자각 뿐이다. 버로스는 이걸 투명하게 담는다. 물론 리와 전혀 다르지 않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나 보다. '퀴어'를 읽지 않고선 버로스를 참되게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고.


겉표지를 넘기면 바로 나오는 윌리엄 S 버로스의 초상.



 밝음의 저편엔 어둠이 있다. 둘은 이 세상에 '정키'와 '퀴어'처럼 같이 공존한다. 그러므로 세상이든, 삶이든 제대로 헤아리려면 이 둘 모두를 다 횡단해야 한다. 인생의 밝음만을 추구하는 이에게 버로스의 '퀴어'는 선뜻 발을 디밀기 어려운 세계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버로스의 작품들은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고 하겠다. 우리네 삶이 주머니 속에 숨겨 놓은 비애를 후미진 골목길에 봄이 와도 녹지 않고 남아 있는 길바닥의 눈처럼 눅진하게 그려내는 이 소설은 분명 독특한 경험이 되어줄 것으로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