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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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매만큼 무서운 것도 또 없는 것 같다. 다른 병들은 비록 육신이 고달퍼도 자신의 영혼만은 그대로다. 내가 누구인지,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과의 기억,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추억 등은 고스란히 남아 오히려 병으로 인한 통증과 절망을 이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치매는 그 모든 것을 잃는다. 육신은 멀쩡해도 그 멀쩡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영혼은 없는 것이다. 거울을 봐도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날 아끼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도, 지금 나를 보는 그들의 아픔도 알 수 없다. 육신이 아픈 자들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고 그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면서 회자정리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치매는 삶을 정리하기는 커녕 죽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 죽는다. 치매 걸린 이에게 허락된 것은 느닷없는 종결 뿐이다. 적어도 그의 입장에선 그렇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떻게 치매가 가장 무섭고 끔찍한 병이 아닐 수 있을까?



 당신에게 조금은 뜬금 없을 지도 모를 치매의 이야기를 한 것은 최근 이와 관련한 책을 하나 읽었기 때문이다. 소설이다. 바로 '오베라는 남자'로 우리에게도 제법 유명해진 프레드릭 배크만이 지은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이라는 책이다. 노인 전문 작가답게(지금까지 그의 소설이 네 권 나왔는데 주인공이 모두 노인이다. 그러니 이렇게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이번 소설의 주인공도 할아버지인데, 이 할아버지가 그만 치매 환자인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니다. 차츰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이라는 소설 제목은 사실 주인공 할아버지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 전에 할아버지는 귀여운 손자에게 인생에 관한 소중한 교훈을 들려주려 한다. 그것을 할아버지가 된 자로서의 의무요, 손자를 향한 자신의 마지막 사랑이라 여긴다. 자신의 삶과 손자를 기억할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절박함까지 여기엔 가미되어 있기에 예쁜 삽화도 많고 문장은 담백하며 내용은 우리에게도 아주 이로운 교훈들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그 모든 대화들이 애처롭게 다가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삶은 유한하고 인간은 시간 앞에서 속절없이 노쇠해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겨우 160페이지의 적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읽는 시간은 한 3배 정도 더 걸리는 듯한 느낌인데, 그것은 이야기의 어떤 한 순간, 문득 느껴버린 삶의 둔중한 울림에 다소 마음이 먹먹하여 한동안 서성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엔 그런 말들이 있다. 일단 멈춤 표지판을 본 자동차처럼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브레이크를 밟게 되는 말들이... 


 '여기는 내 머릿속이란다, 노아노아.

 그런데 하룻밤 새 또 전보다 작아졌구나' (p. 43)

 '그렇지, 노아노아야, 그렇지. 위대한 사상은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없는 법이란다.' (p. 63)

 '네 발이 땅에 닿을 때쯤 이 할애비는 우주에 있을 게다, 사랑하는 노아노아야.'

 '우리 작별하는 법을 배우러 여기 온 거예요, 할아버지?'(p. 73 ~ 74)

 '나는 계속 한 페이지가 없어진 책을 읽고 있는데 그게 항상 제일 중요한 부분이야.'(p. 85)

 '주머니에서 뭔가를 계속 찾는 기분. 처음에는 사소한 걸 잃어버리다 나중에는 큰 걸 잃어버리지. 열쇠로 시작해서 사람들로 끝나는 거야'(p. 103 ~104) 등등...


 어조가 격렬하지 않아서, 그 담담한 어조가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기에 더 슬프게 다가오는 말들. 그리고 슬픔의 끝에서 나의 삶은, 나와 사람들은 어떤가를 되새겨 보게 하는 말들. 그 말들로 인해 나는 목초지에 방목된 말처럼 고개를 늘어뜨리고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일렁이는 말들의 물결 속에서.


 나와 아주 가까운 분이 지금 치매에 걸려 있다. 벌써 한 4, 5년 정도 되는 것 같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그 분이 많이 생각났다. 치매는 당하는 사람보다 지켜보는 사람을 더 많이 힘들게 만드는 병이다. 그토록 눈부셨던 영혼이 하루가 다르게 그 빛을 잃어가는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격렬한 슬픔이, 때로는 한없는 무력감이, 때로는 가없는 자책이 또 때로는 그렇게 속절없이 빛을 잃어만 가는 것에 대한 원망이 동반되는 과정이다. 소설을 읽으며 많은 날들이 생각났다. 그 날 중에 밝게 채색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소설 속 할아버지가 부러웠다. 이 할아버지처럼 완전히 모든 것을 잃기 전에 당신의 영혼과 인생에 대해서 내게 보다 많은 말을 들려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또 자책했다. 그렇게 되시기 전에 내가 먼저 당신에게 말을 걸어 더 많이 알았어야 했는데 하고.


 어쩌면 나는 거짓말을 했을 것이다. 내가 이 소설을 오래 읽은 것은 말 때문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실은 그동안 너무 무신경했던 나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계속 곱씹어져 읽는 걸음을 주저 앉게 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소설의 제목이 정녕 진실이라 여긴다. 우리네 삶은 정말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것을 잊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그 모습 그대로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지금 커다란 후회가 되는 일을 해 버리고 말았다. 언제나 너무 늦게서야 깨닫는다. 그렇게 되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그 사랑에 걸맞는 관심을 표현하고 대화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너무 뒤늦은 후회는 그 시간만큼 깊고도 짙은 아픔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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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1 - 5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5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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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도록 기다렸던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지의 제5부가 드디어 나왔다. 제목은 '카이사르'.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공화국 로마의 역사가 막을 내리고 제정 로마가 시작되는, 그렇게 법의 지배에서 사람의 지배로 나아가는, 로마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클라이막스인 시기가 바야흐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야기는 카이사르가 브리타니아 2차 원정 때, 그의 부하 트레바티우스가 폼페이우스가 쓴 편지 두 통을 카이사르에게 가져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브리타니아 2차 원정은 카이사르에게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예기치 않게 찾아온 천재지변 때문이었다. 운명의 장난 같은 것. 여태껏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의 총애를 각별하게 받아온 카이사르였는데, 이제 포르투나가 숱이 적은 카이사르 머리 위에 올려두고 있었던 애정의 손길을 거두기라도 한 것일까? 트레바티우스가 가져온 편지엔 카이사르가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불운한 소식이 담겨 있었다. 바로 자신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가 사망했다는 것. 율리아. 그녀는 현재 원로원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이자 그들이 가진 능력으로 볼 때 언제든 로마의 일인자 자리를 놓고 격렬한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하나로 묶어두는 유일한 존재였다. 비록 그들의 반대편에 있는 카토가 로마제국이 결혼상담소냐고 툴툴거리긴 했지만 말이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자신이 총애하는 브루투스와 율리아의 약혼까지 억지로 깨고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에게 준 것이었다. 브루투스가 아주 오랫동안 율리아를 흠모했으며 그 사랑이 거의 맹목에 가깝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도착한 그의 정부이자 이 소설의 메데이아라고 할 수 있는 세르빌리아의 편지에서 브루투스가 율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딸 클라우디아와 결혼했음을 알게 된다. 오직 그녀가 폼페이우스가 자기 아들 혼인 상대자로 점찍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브루투스는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빼앗긴 복수를 한 것이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비로소 브루투스에게 율리아가 어떤 의미였는지 절실하게 깨닫는다. 브루투스가 율리아가 죽자 마침내 결혼한 것은 율리아가 살아 있을 동안 내내 그녀와 이어질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는 뜻인 것이다. 그만큼 그의 사랑은 좋게 말하면 지고지순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맹목적이었다. 그리고 카이사르에 대한 원망을 억누를 수 있는 바윗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율리아는 없다. 연대의 매듭은 산산히 깨어졌다.


 콜린 매컬로가 그 편지로 5부를 시작하는 것은 당연하다.

 5부란 갈리아 지방이 로마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나며 이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로마 최고 권력을 놓고 아주 격렬한 내전을 펼치게 되는 이야기니까 말이다. 이제 로마라는 이름 아래 하나된 모든 것들이 균열과 파열을 일으키고, 뜻을 함께 했던 동지마저 칼 끝을 겨누고 등 뒤를 찌르게 된다. 이처럼 모든 연대가 낱낱이 부서져 버리니, 연대 종말의 상징과도 같은 율리아의 죽음을 담은 편지로 시작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까? 일종의 신호탄인 셈이다. 그 편지를 든 트레바티우스가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이 카이사르의 직속 부관 라비에누스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카이사르가 가장 신뢰하여 자신의 배후까지 맡겼던 자였지만, 폼페이우스와 치른 내전에서는 카이사르를 버리고 폼페이우스에게 투항하여 그의 장수로서 카이사르를 가장 힘들게 만들었던 존재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콜린 매컬로는 5부가 유대의 파괴로 점철될 것임을 꼼꼼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과거의 것에 기댈 수 없고, 이제 자신의 힘으로 닥쳐온 난관을 타개하며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 로마는 이제 그런 시기에 완벽하게 접어들었다. 카이사르가 주인공이 되는, 법이 지배하던 시대에서서 사람이 지배하는 시대로의 변화는 바로 그런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여전히 시대의 변화를 알지 못한 채, 과거의 것에 기대려는 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귀족들의 원로원이 그러하다. 온갖 비리에, 매관매직에 로마의 자랑인 선거마저 돈과 폭력에 오염되어 공정성을 잃은 지 이미 오래인 상황이 되었으나 원로원은 자신의 기득권에만 집착하여 자꾸만 침몰해가는 로마를 바로잡을 줄 모른다. 누가 봐도 깊이 가라앉고 있는데, 귀족들은 자기만 괜찮으면 로마가 다 괜찮은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들에겐 그들이 곧 로마인 것이다. 폼페이우스도 그랬다. 그 역시 자신을 로마라 여겼다. 그는 로마의 모든 권력을 혼자 쥘 수 있는 독재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로마를 개혁하고자 하는 마음 같은 게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이 뛰어난 자로 태어난 자신에게 걸맞는 자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로원에게 로마가 과거의 기득권과 동의어라면, 폼페이우스에게 로마는 자신의 가치를 빛내 줄 훈장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도 타인을 위해서 로마를 생각하거나 자신을 로마로 여기지 않는다. 평민을 위해 싸우겠다며 귀족의 지위를 버린 푸블리오 클로디우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여전히 키케로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직 복수를 위해 그는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 


 클로디우스의 가장 큰 약점은 복수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존엄을 모욕하거나 손상시키면 그를 복수 대상 명단에 올린 뒤 자신이 당한 그대로 되갚아줄 완벽한 기회를 기다렸다.(p. 231)


평민을 선동하여 그가 평민의 유일한 편인 것처럼 여기게 하고 그것을 통해 해방 노예들을 각 선거구에 은밀히 보내어 자신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호민관 10명을 만들려 한다. 콜린 매컬로는 로마의 연대가 무엇 때문에 깨어지는가를 이렇게 샅샅이 보여준다. 바로 이기심이라는 것을.


 타인을 위해서 로마를 생각하며 자신을 로마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은 카이사르가 유일하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초월한 로마를 위해 사는 것을 자신의 존엄이라 여겼다. 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갈리아의 베르킹게토릭스에게 카이사르는 이렇게 반대하는 말을 한다.


"사람들에겐 왕이 필요하오. 눈 한 번 깜빡하면 새로 바뀌는 사람들이 아니라. 민주주의에서는 어느 한 집단이 이득을 보고 그다음엔 또다른 집단이 이득을 볼 뿐, 전체가 이득을 보는 상황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소. 결국엔 왕정만이 유일한 해답이오.(...) 당신은 이미 왕이오, 카이사르! (...) 당신은 우연히 투표권자들에게 선택을 받은 알렌산드로스 대왕이요."


 "나는 여전히 전체의 일부일 뿐이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었을 때 마케도니아도 죽었소. 그의 나라는 그와 함께 사라졌소. 그는 스스로 왕이라 생각했기에 그리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제국의 중심을 다른 곳으로 옮겼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나라가 위대했던 것은 오로지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문이었소.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했고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갔소. 그는 왕이었으니까, 베르킹게토릭스! 그는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착각했소. (...) 반면 나는 내 나라의 종복이오. 로마는 로마가 낳은 그 누구보다도 훨씬 위대하오. 내가 죽더라도 로마는 계속 다른 위대한 인물들을 낳을 것이오.(...) 민주주의에서는 바보와 현자가 늘 공존하지만, 전반적으로 왕가의 계보보다는 낫소. 위대한 왕이 하나 나오려면 보잘 것 없는 왕을 열 명은 거쳐야 하니까."(p 196 ~ 197)


 존엄은 로마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존엄을 중시하는 것은 로마인의 자부심이었다. 그러나 존엄에 대한 해석은 모두가 달랐다. 폼페이우스도, 그의 부추김에 의해 클로디우스를 암살하게 되는 밀로도,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충족되려는 직전에 생명이 꺼져버린 클로디우스도 존엄은 오직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거기에 고귀함은 없었다. 오직 권력과 동의어인 존엄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재산이나 권력을 가진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그랬다. 권력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어떠한 비열하고 비천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광장은 정치적인 이유로 폭력이 횡행하는 장소로 변했고 선거는 돈과 협박으로 검게 물들었다. 정의와 고귀한 명예를 지키려는 이들은 조롱당했고 음모의 희생자가 되어 추방이라는 차디찬 냉대를 받아야 했다. 로마가 세계 만방에 자랑했던 민주주의는 완전히 무너졌다. 다만 뼈다귀만 있을 뿐이었다. 카이사르를 공공연히 반대하는 카토를 비롯한 보니파는 다만 그 뼈다귀에 묻어 있는 얼마 안되는 살점을 뜯어먹고 있을 뿐이었다. 개도 안 쳐다볼 그 희박한 살점이 언제까지나 있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변화는 필연이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베르킹게토릭소에게 말한 것처럼. 카이사르는 자기 어깨에 놓인 시대의 의무를 느꼈다. 포르투나의 은총은 그 때문에 그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라 여겼다. 클로디우스가 죽고, 폼페이우스마저 보니파와 손잡은 지금 개혁 진영엔 이제 카이사르만이 남게 되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율리아의 죽음과 더불어 맞이한 어머니의 죽음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카이사르에게 남은 것은 오직 로마의 올바른 재건 밖에 없다는 것을. 5부의 이야기는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과 카이사르와의 전면전이다. 갈리아 지방의 변화를 두고 카이사르와 베르킹게토릭소와 벌였던 논쟁 그대로. 결전의 시기는 그렇게 무르익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너무나 몰입해서 읽었다. 이야기가 지금 우리 상황과 결코 멀리 있지 않아서 더욱 그랬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과거의 모습과 기득권을 고수하는 세력과 싸운다. 문자 그대로 적폐 세력이다. 지금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유시민의 말대로 지금 상황은 그저 대통령 하나만 바뀐 것에 불과하다. 적폐세력은 어디든 아직도 건재하다. 개혁을 위해 외롭게 분투해야 하는 것은 지금의 정부나 카이사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사정을 염두에 두고 읽다보니 소설의 모든 이야기가 살갑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액튼 경의 말처럼 권력의 추구는 늘 사리사욕의 유혹을 받는다. 거기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올곧게 지켜내는 것은 정말 힘들다. 폼페이우스도 결국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 자신의 출신 신분이 로마 정통 귀족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를 끝내 사리사욕으로 몰아간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가진 단 하나를 정말 부러워한다. 그가 로마를 건국한 핏줄의 정통 계승자인 파트리키라는 것. 마리우스가 그토록 출중한 능력에 막강한 권력을 가졌지만 로마인 누구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은 마리우스가 파트리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로마인들은 술라가 파트리키였기 때문에 너무나 두려워했다. 폼페이우스도 파트리키였다면 선택이 달랐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카이사르가 그렇게 태어난 것 역시 포르투나의 은총 때문이라 해야 하리라. 어쨌든 운명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이렇게 보자면 그 때 로마인으로 태어난 것도 은총이었을 것이다. 갈리아와 로마의 관계는 식민지와 제국의 관계라 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일본 제국주의 시대 때의 우리나라가 떠올랐다. 그래서 실은 베르킹게토릭소에게 더 공감했다. 콜린 매컬로도 그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3부가 왜 '포르투나의 선택'인지 궁금했는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태어날지는 자신이 결정할 수 없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피투적 존재라 불렀듯이 우리는 우연히 떨어지는 빗방울에 불과하다. 빗방울 스스로 어떤 대지에 떨어질지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은 우연으로 결정된다. 삶에는 이렇게 필연적으로 우연의 몫이 있다. 콜린 매컬로가 말하는 포르투나의 결정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우연을 절대로 여기고 그 우연의 은총을 받지 못한 자신을 내내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마리우스가 술라를,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를 질투한 것처럼.  그것이 하나의 컴플렉스가 되고 강박이 되어 우연이 준 상처를 억지로 지우려다 해서는 안 될 과오마저 저지르기도 한다. 반면, 그런 우연의 흉터를 가볍게 넘겨버리는 자들도 있다. 그것이 한계가 아니라 출발점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다. 콜린 매컬로의 '카이사르'는 그렇게 상반된 자들이 벌이는 일종의 전면전이기도 하다. 우연의 한계에 너무 구애받은 나머지 삶의 진정한 기회를 놓치는 자와 그것을 초월하여 진정한 변화를 이뤄내는 이들 사이의 전면전. 카이사르도 원래는 혈통 외에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자였다. 그런 그가 결국 로마의 패자가 된 것은 오직 우연의 잔영인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고 보다 큰 대의를 위해 자신을 주저없이 기투 했던 것에 있었다. 우리나라 적폐 세력들이 주머니에 든 것을 놓치지 않으려 더욱 몽니를 부리는 지금, 무엇보다 요청되는 태도이지 않을까 싶어 앞으로의 이야기가 한층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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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일기 카프카 전집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유선 외 옮김 / 솔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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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3년 7월 3일, 체코 프라하. 유대계 상인 부모 밑에서 프란츠 카프카는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에겐 모두 두 명의 남동생과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으나, 남동생 두 명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여동생 셋도 독일 나치가 체코를 지배했을 때,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사망했다. 그의 유고에 대한 권리가 가족이 아닌 막역한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넘어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프란츠 카프카는 죽기 직전 친구에게 유언으로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모든 글을 불태워달라고 했지만, 우리에겐 너무나 다행히도 브로트가 그것을 지키지 않아 프란츠 카프카의 글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일기를 처음 썼던 것은 1909년 초여름이었다. 이것 역시 막스 브로트와 관계가 있다. 그 여름,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 형제와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리바를 여행했는데 바로 그 여행 때문에 일기를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전해인 1908년. 카프카는 이탈리아계 보험회사 '아시쿠라치오니 제네랄리'의 프라하 지점에 취직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 바로 그 취직으로 인해 카프카는 일기를 쓰게 된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모리스 블랑쇼의 책을 읽고서였는데, 블랑쇼에 따르면 카프카는 늘 문학에 순수하게 헌신하고 싶어했는데 그것에 가장 많이 방해 되었던 것이 바로 직장인의 삶이었다. 즉, 그는 자신의 시간을 문학인으로 사는 시간과 일상인으로 사는 시간을 철저하게 격리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문학인의 시간에 일상인의 시간이 끼어드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그것을 아주 끔찍한 방해로 여겼다. 하지만 그 시간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직장에는 언제나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시간의 양이란 게 있었고 그 시간만큼은 자신이 아무리 해도 어쩔 수 없이 할애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문학에 대한 갈망은 커져갔다. 왜 사람의 마음이 그렇지 않은가? 못하게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렇게 문학에 온전히 전념하고 싶다는 갈망은 커져갔고 그러지 못하는 실제 삶과의 격차는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아마 일기는 그런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보고자 계속되었을 것이다. 일상과 그나마 공존하기 위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율이 일기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카프카의 일기'는 카프카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열쇠이기도 하다. 작품을 쓰면서 가지게 되었던 모든 곤경과 절망 그리고 상념과 번민이 모조리 투명하게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소송'이 대표적인데,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면 여성이 기묘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처음 여성은 선망을 낳지만 이내 절망을 주는 존재로 변하는, 그렇게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일기'를 읽으면 카프카가 왜 그런 묘사를 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카프카에겐 오래도록 결혼을 고민하게 만들었던 여인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바로 '펠리체 바우어'다. 카프카는 그녀를 1912년 여름에 막스 브로트의 소개로 처음 만났다. 그녀는 막스 브로트의 친척이었다. 카프카는 그녀와 여러 번 약혼과 파혼을 거듭했다. 카프카가 펠리체 바우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 마음은 언제나 그녀와 함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직장에서의 경험이 결혼 또한 망설이게 만들었다. 직장이라는 일상의 시간이 문학에 대한 헌신의 시간을 많이 빼앗아 가는 걸 경험한 카프카는 직장 이상으로 희생과 봉사를 하게 될 가정 생활은 문학에 전념하는 시간을 더 많이 희생시킬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일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3. 나는 많은 시간을 혼자서 지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해낸 말들은 고독의 성과물에 다름 아니다.
 4. 나는 문학과 관계없는 것들을 싫어한다. 대화는 나를 지루하게 만든다. 누군가를 방문하는 일이나 내 친척들의 기쁨과 슬픔은 내 마음속까지 지루하게 만든다. 대화는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중요한 그 무엇과 진지함, 진실을 앗아간다.
(...)
7. 혼자라면 아마도 한 번쯤 내 직장을 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혼하면 그것은 영영 불가능해질 것이다.(p. 468)

 그가 그토록 고민하고 두려워한 것은 오직 하나, 문학에 오롯이 전념할 수 있는 고독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이었다. 왜 '소송'의 처음이 아침에 자신의 하숙방을 느닷없이 방문한 검은 옷의 사람들로 시작하는지 비로소 이해할 것 같다. 작품을 위한 작가의 고독을 중시하는 모리스 블랑쇼가 왜 그토록 카프카에 관심을 기울이고, 카프카의 일기를 그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로 생각하는지도 이제야 알 것 같다. 솔 출판사가 카프카 전집을 기획하고 발간한 지 2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나온 '카프카의 일기'는 그가 일기를 처음 썼던 1909년부터 죽은 해인 1923년까지 그가 썼던 모든 일기가 담겨져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일기에 미처 싣지 못한 글의 모음이라 할 만한 서류 묶음과 여행 일기마저 들어 있다. '카프카의 일기'는 내가 정말 나오기를 기다렸던 책이기도 하다. 블랑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을 쓸 때 카프카는 과연 어떤 상태였는가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2월의 며칠을 942페이지에 이르는 그의 삶과 함께 보냈다. 그를 가장 가까이서 만나는 것 같았고 그만큼 그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다 읽고 난 뒤 저절로 세 마디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라도 나와줘서 다행이다.'

 당신도 카프카를 정말 좋아하고 그를 이해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다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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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코다 이발소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로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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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발소에 대한 기억이 그리 좋지 않다. 어릴 때 동네 이발소에서 머리카락을 깎았다. 그런데 엄마가 억지로 끌고 가지 않으면 절대 가지 않았다. 이발소 아저씨가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 잠시 움직이는 것도 가만히 못 보는 그 사람은 내가 꼼지락거릴 때마다 역정을 내었다. 고약한 성미가 가위 질에도 들어가 마구 잘라내는 것 같아서 귓가에 들리는 탁탁 하는 소리가 자못 무서웠다. 조명도 그리 밝지 않은 데다 별로 깨끗하지도 않았던 이발소는 그 무렵 퇴락해가고 있던 동네 목욕탕과 더불어 내가 범접하지 말아야 할 공포의 2대 공간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 기억 때문에 제목에서부터 이발소가 떡 하니 나와 있던 '무코다 이발소'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읽게 되었던 것은 작가가 '오쿠다 히데오'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작가의 '남쪽으로 튀어'를 정말 좋아하고 그 작품을 통해 인연을 맺은 이후, 최근 '나오미와 가나코'까지 그의 작품을 자주 만나왔는데 아직 이렇다 할 실망을 별로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이번에도 믿고 읽어 본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소설은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딛고서 예리하게 사회 문제를 들춰내는 한 편, 그것에 보편적 공감마저 이끌어내고 있어 마음에 든다. '무코다 이발소'는 제목 그대로 이발소를 중심으로 그려가는 한 마을에 대한 이야기다. 마을의 이름은 도마자와. 도미자와는 겨울만 되면 눈이 지천으로 높이 쌓이는 훗카이도에 있다. 예전엔 광산이 있어 제법 흥했지만 오래 전에 광산이 모두 문들 닫은 지금은 마을의 활력이 많이 사라져, 좋지 않은 재정 여건 속에서 젊은이들은 대부분 근처 삿포로나 다른 대도시로 떠나고 노후를 보내는 늙은이들만 남아 고인 시간 속에서 조용히 쇠락해 가고 있는 중이다. 마을에 남은 청년들과 면의 관리들은 그래도 마을을 부흥시키려 이런 저런 노력을 해 보는 형편이지만 한 번 꺼져버린 심지는 쉽사리 타오르지 않는다.



 이런 마을의 모습이 전면에 드러나 있는 지라 읽다보면 소설 속 이야기가 결코 우리와 그렇게 먼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도마자와는 지금 우리나라 시골 마을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으니까 말이다. 가끔 우연히 TV를 통해 그런 마을에 사는 사람들 모습을 볼 때가 있는데, 그 때 도대체 저 곳의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일상을 보낼까 궁금했었다. 그 속마음을 이번 '무코다 이발소'를 통해 조금 이해하게 된 것도 같다. 물론 마을이 처한 보편적인 상황도. 어쨌든 무코다 이발소는 그런 마을에서 무려 60년 넘게 존속하면서 마을의 소통 공간 역할을 해오고 있다. 한 마디로 터줏대감이라 할 만하다. 그런 이발소를 꾸려가는 사람은 무코다 야스히코다. 그는 원래 도시에 직장을 얻어 마을을 떠났던 사람인데,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이발소 일을 못하게 되자 그대로 낙향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발소 일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자진해서 가업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가 낙향했던 것은 직장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즉 그의 낙향은 한 마디로 도피였다. 할 수만 있었다면 그는 낙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의 유년 시절은 도마자와의 쇠퇴기와 그대로 겹쳐서 그에게 도마자와는 늘 종말을 향해가는 마을의 이미지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발소에 대한 애정도 그닥 없어서 그렇지 않아도 수입도 별로 없고 장래도 그리 없는 이발소를 그는 늘 정리하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뒷목을 잡는 일이 생겼다. 대도시에 직장을 가져 마을을 떠났던 아들이 마을을 다시 발전시키겠다는 꿈을 가지고 이발소 가업을 이어 받겠다며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당연히 그는 그런 아들이 못마땅하다. 아들은 자신과 다르게 넓은 세계로 나아가 잘 적응하며 살게 되길 바라건만 아들은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 '무코다 이발소'는 바로 이 야스히코를 중심으로 하여 모두 6개의 단편이 모여 있는 일종의 연작 소설이다.


 책 내용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마을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만 있었던 야스히코가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마을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오쿠다 히데오 최고의 매력으로 생각하는 '넘치는 현실감'은 이 소설에도 여전하여서 일본 시골 마을의 문제점을 생생히 엿볼 수 있었는데, 특히 두 번째 단편 '축제가 끝난 후'가 인상 깊었다. 친지나 친구들을 보면, 치매와 같은 환자가 발생하면 가족들이 정말 힘들어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이 단편은 바로 그런 상황을 매우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단편은 우리보다 훨씬 빨리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 사회가 곧 직면하게 될 문제를 생생하고 깊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층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최근 유력한 대권 주자인 문재인이 치매는 개인이나 가족이 감당할 수 있는 병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서울에 편중된 국공립 치매 전문 기관을 지방에도 늘리고 그 수도 대폭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는데, 이렇게 국가적인 정책으로 대응하는 것이 왜 필요한지 바로 이 단편을 읽어보면 이해할 수 있다. 오쿠다 히데오도 아마 그런 식의 대응을 일본에게 바라는 마음에서 썼을 것이다. 이 소설은 어둡기 보다는 밝고, 부정적이기 보다는 긍정적인데 그렇다고 해서 오쿠다 히데오가 현재 일본이 가진 문제점을 꼬집는데 주저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세 번째 단편 '중국에서 온 신부'는 아직도 짙게 남아 있는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정직하게 드러내며 그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도록 권유한다.


 이렇게 여섯 단편을 읽고 있으면 오쿠다 히데오가 왜 이런 소설을 썼는지 조금 짐작하게 된다.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이 꼭 '시골 마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 생각에 오쿠다 히데오에게 도마자와는 일본 전체인 것 같다. 화려한 영광을 뒤로 하고 쇠락해가고 있는 도마자와의 모습은 그대로 현재 일본과 겹치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로 많은 젊은이들이 이제는 생존을 위해 해외로 나가려고 하는 것 역시 별 것 없는 마을을 떠나는 도마자와의 젊은이들과 닮아있고 말이다. 근본적으로 '무코다 이발소'는 현재의 일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을 위한 소설이 아닐까 싶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일본 국민들이 일본에 대해 가지는 우려와 불안이 날로 증가해서인지 일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책, 드라마, TV 프로그램들이 잔뜩 늘어났다고 한다. 하나같이 일본의 좋은 점과 그들의 가능성을 자랑하며 내일이 매우 밝다는 것을 강조한다. 화려한 영광은 아직 없어지지 않았고, 그것을 나타내는 심지는 언제든 불 붙일 수 있다고 말이다. '무코다 이발소'도 거기에 약간 발을 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약간'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무코다 이발소'는 그래도 냉정한 현실 인식과 문제점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걸 밝히기 위함이다. 이런 경향의 대부분의 책과 프로그램은 그런 것 없이 그저 장점과 가능성만 과장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예리한 현실 비판이 매력적이었던 오쿠다 히데오마저 이런 소설을 썼다면, 현재 일본인들이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어둡고 불안한지 간접적으로 증명되는 것 같다. 소설가는 자신이 처한 현실이 너무나 어두우면, 그 위안이랄까 응원이랄까 아무튼 그런 동기로 자신의 작품이 까만 어둠 속에서 반딧불처럼 작은 희망이 빛이라도 되어 사람들이 혼돈과 공포가 자신을 지배하도록 놔두지 않고 그래도 옳고 바른 것을 위해 노력하도록 만들기를 바랄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무코다 이발소'는 희망을 일구어내려는 소설이다. 영화 '판도라'가 잘 보여줬듯이, 지금의 일본이 결코 먼 얘기가 아닌 우리로서는 아무래도 이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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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니 2017-01-31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어릴적 동네 이발소 주인아저씨가 무서워 아무말 못했더랬죠.
귀가에서 들리는 가위질 소리.
공포였습니다.
그땐 왜 그리 무서웠는지......

잘 읽었습니다.^^

ICE-9 2017-01-31 21:14   좋아요 0 | URL
아하, 쭈니님도 그러셨군요. 저도 이발소의 시간이 정말 공포 체험이었어요^^
 
[세트]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세트 - 전2권
말런 제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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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을 3불(不)의 시대라고 한다. 불확실, 불안정, 불안전의 시대라는 것이다. 그 실례 하나를 본 적도 있다. 바로 친구의 아버지에게서다. 정년 퇴직을 한 그는, 고정된 수입이 있으면 노후 생활이 한결 안정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알토란 같은 퇴직금으로 편의점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소박했던 꿈은 오래 가지 않아 악몽으로 변하고 말았다. 근처에 대형마트가 갑자기 들어서 버린 것이다. 이것은 친구의 아버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우려했던 대로 가게 매출을 마구 갉아먹더니 결국 존립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조금이라도 손해를 줄여보려고 편의점 가맹점 계약까지 해지하려 했으나 그조차 힘들었다. 물어야 할 위약금이 엄청났던 것이다.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한숨과 근심만 늘어났다. ‘그동안 자신 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신 아버지가 이제는 좀 편하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친구의 얼굴도 같이 웃음을 잃었고 어느새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피하게 되었다. 이렇게 불확실한 미래가 불안정한 현재를 낳았고 삶마저 불안전한 상태로 내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만나 듣게 되는 이야기의 대부분이 이런 모습이었다. 지위 불문, 학력 불문, 성별을 불문하고 불행한 사연들이 만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어딘가에서 ‘판도라의 상자’가 다시 열린 것만 같았다. 나보다 손에 가진 것도 많고, 등으로 기댈 곳 또한 훨씬 넓은 이들조차 넋두리와 함께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내뱉는 것을 보노라면, 절로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가 멀다 않고 들려오는 이런저런 사건과 사고 소식에다 날마다 치솟는 전세, 달마다 압박이 들어오는 대출 이자는 말할 것도 없고, 해마다 줄어드는 정년의 기한도 모자라서 다가가면 갈수록 캄캄하기만 하는 노후까지도 내 불안과 걱정을 키우려 팔을 걷어 붙이며 거들고 나서는 판이다.


 이런 이유로 내게 말런 제임스의 소설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는 그냥 소설 속 이야기로 생각되지 않았다. 마냥 강 건너 불구경 할 수 있는 남의 이야기로도 여겨지지 않았다. 비록 소설의 무대가 76년부터 91년까지의 자메이카이고 그 중심엔 76년 12월 3일에 일어났던 밥 말리의 암살 미수 사건이 있다고는 해도 그 근본에 짙게 서려 있는 공포와 절망은 지금 여기서 내가 보고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본질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명의 화자가 번갈아 가며 자신의 육성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된 소설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는 단적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골목길을 돌다가, 혹은 대낮의 잔디밭에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다가도 문득 날아온 총알에 나 아니면 사랑하는 가족이 어이없이 죽어버릴 수 있는 무법 천지의 '킹스턴'이란 게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고,


 게토에서 목숨이란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1권, p. 33)

 

 매일 자신을 거세게 억죄어 오는 파멸과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앞으로 이런 상황이 변하리라는 희망이 전혀 없는 가운데 저마다 다른 선택을 해 버린 자들의 고백록이었다.

 

 에이트레인즈와 코펜하겐시티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켜보는 것밖에 없어. 라디오에서 나오는 달콤한 목소리는 범죄와 폭력이 온 나라를 집어삼키고 있다면서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지는 일단 기다리고 봐야 한다고 속삭이지만, 여기 에이트레인즈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일단 보고 기다리는 것뿐이야.(1권, p. 27)

 

 선택 그리고 그 여파. 바로 이것이 이야기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밥 말리는 중심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런 목소리들이 비로소 선명하게 표출되는 계기이자 드러난 목소리들이 하나의 이야기라는 형태로 정돈 되도록 만드는 매듭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소설 속에서 개최한 콘서트가 자메이카를 양분하여 대립하고 있었던 두 세력인 인민국가당과 노동당을 서로 손잡게 만든 것처럼 말이다. 그는 두 번에 걸쳐 그것을 시도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처음엔 미국의 CIA와 조시 웨일스가 공조한 암살 시도로 무산되었고 다음엔 겨우 이뤄지긴 했으나 끝내 무참한 살육전 속에 소거되고 말았다. 밥 말리는 자메이카 밖에서는 세계의 중심이었을지 몰라도, 자메이카 안에서는 그저 가난한 아이에게 온 부유하고 행복한 정경이 그려진 크리스마스 카드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에 아무런 힘을 미치지 못하는 피상적인 위안과 힘이었으며, 빠져들면 들수록 더욱 가혹한 배신이 뒤따르는 위험한 동경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밥 말리가 자메이카에서 한 것은 비록 그 동기에 일말의 진실은 있었다 해도 서투른 봉합에 불과했다. 자메이카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거나 바꾸지는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모든 일들이 단 일년 만에 희망찬 것에서 희망 없는 것으로 바뀌어버리는지는 누가 알겠나?(2권 P. 191)


 그의 삶이 진짜 자메이카 삶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롤링 스톤>지의 기자로 밥 말리의 콘서트 취재를 위해 들어왔다가 뜻하지 않게 암살 미수 사건의 목격자가 되어버린 미국인 알렉스 피어스의 말마따나 자메이카 사람들에게 밥 말리의 삶은 그저 신화에 지나지 않았다.


  게토가 주는 교훈은 오히려 폴 매카트니가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에 대해 했던 이야기와 가깝다. 어둠밖에는 없단 말이다. 서퍼라라는 서파라는 모조리 집 없는 카우보이고, 거리라는 거리는 모두 어딘가의 노래 속에 피로 쓰여 있을 총격전을 품고 있다. 킹스턴 서부에서 하루를 보내면 이 지역 최고의 권력자가 자기 자신을 조시 웨일스라고 부른다는 것이 완벽하게 이해된다.(...) 무법상태라는 사실만 가지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마치 레게 가수가 오래된 노래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듯, 이들은 신화를 잡아채서 자신들만의 것으로 만들어낸다. (1권. p. 167)


 신화는 안전하다. 그것은 현실이 메울 수 없는 간격 저 너머에 절대적으로 격리되어 그 어떤 현실의 오물로도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저 예쁘기만한 크리스마스 카드인 것이다. 그는 같은 시기 게토에서 늘 불안과 공포에 푹 절여져 절망 가운데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받으며 살아가는 자메이카 사람들과 공동 운명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중심이 될 수 없었다. 변화가 저마다 같은 현실을 감내하고 있는 똑같은 처지의 이웃이라는 것을 서로 확인하는 것으로 비로소 일어나는 흐름이라면 그 흐름을 일으키고 더 크게 확장시키는 중심은 신화가 아닌 현실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차지여야 하니까 말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소설은 밥 말리를 가장 중요한 소재로 다루면서도 그리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허락 하면서도 정작 밥 말리의 육성만은 일부러 배제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밥 말리는 오로지 이야기 속 인물로만 존재한다. 신화와 똑같이. 또한 그래서 작가는 자메이카의 가장 불길한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을 오로지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로만 채워야 한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 시기 자메이카는 오로지 밥 말리의 노래로만 세계에 알려졌고, 정말로 거기서 살고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그 노래에 가려져 세계로 전혀 전해지지 못했던 것이다.(그 대표적인 예가 아마도 UB40가 커버하기도 했던 'Kingston Town' 이 아닐까 한다. 이 노래는 킹스턴에 대한 낭만적 향수로 한껏 덧칠 되어 있는데, 노래만 들으면 누구라도 킹스턴을 막연히 그런 곳이라 생각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소설이 펼쳐 보이는 킹스턴의 진실은 정반대였다. 이 노래가 비록 밥 말리의 노래는 아니나 자메이카의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라는 점에서 노래가 외부에 내부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없다는 것의 증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그리스 신화가 그러하듯이, 신화 속 목소리들은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밥 말리의 노래는 신화 속 목소리였다. 비록 그 노래가 자메이카의 어두운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해도 정치가 아니라 미학의 범주 내에 있었고 그랬기에 듣는 이들은 피상적인 공감만으로도 자메이카에 대한 자신의 윤리적 책임을 정당화하는 게 가능했다. 

 허나 가수가 하지 않은 말은, 나 역시 겁나서 못 하는 얘기라오. 이 모든 게 나한테 다시 돌아오리라는 얘기 말이오. 내게. 이 코펜하겐시티 최고의 배드맨에게. 허나 배드맨은 그저 배드맨일 뿐이니까. 악만 가지고 음모를 당해낼 수 없는 거지. 악만 가지고 사악함을 당해낼 수도 없고. 정치는 이제 새로운 게임이 되었고, 그 게임을 하려면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필요할 테지.(1권, p. 246)


 노래는 노래였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것이 밥 말리의 노래가, 스티비 원더가 그의 죽음을 추모한 노래를 만들 정도로, 전 세계에 널리 퍼졌지만 정작 자메이카 내의 죽음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던 이유였다. 소설은 76년부터 91년까지 시기 별로 나누어 그 때의 목소리들을 담고 있고, 그 시기의 제목을 밥 말리의 노래 제목으로 하고 있는데 어쩌면 작가는 이러한 형식으로 노래와 목소리들이 처한 자메이카 현실 사이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드러내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진정한 목적은, 밥 말리의 커다란 목소리에 가려져 버린 밤-밤이나 니나 버지스 등 진짜 현실 속의 작은 목소리들을, 알렉스 피어스가 했던 것처럼(소설의 제목은 그가 신문에 연재하는 논픽션의 제목이기도 하다.) 온전히 복원(다중 화자를 가져오고, 그 화자가 가진 의식의 흐름을 가감없이 재현한다는 점에서)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자메이카 바깥 사람들은 전혀 알 수도, 느껴 볼 수도 없었던 당시 자메이카의 진짜 현실을 독자들로 하여금 생생히 체험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나는 정말로 충격 속에서 이 소설을 읽었다. 밥 말리의 노래를 익히 들어보긴 했으나 설마 그 때의 자메이카가 이 정도로 살육과 공포로 넘쳐나는 곳이었을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충격은 밤-밤의 부모가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2권 후반에 이르러 조시 웨일스가 뉴욕 브롱크스의 한 크랙 하우스에서 임산부(그녀의 이름은 모니파다. 임산부의 이름과 그녀의 과거 삶은 알렉스 피어스의 논픽션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비로소 알려지게 되는데, 그 때 우리는 임산부라는 보통 명사와 모니파라는 고유 명사가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 임산부로 표기되었을 때의 그녀의 죽음은 당시 크랙 하우스에서 죽은 많은 불행한 죽음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지만, 이름과 과거를 얻고 난 뒤에 다가오는 죽음은 나처럼 세상에 존재했던 한 고유하고 독립적인 개인의 삶의 철저한 파괴로 보다 묵직한 무게를 지니는 것이다. 이것은 세월호에서 희생 당한 이들을 신문 지상으로 볼 때와 분향소에서 영정 사진으로 접할 때, 그 죽음의 무게를 전혀 다르게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육중함, 밥 말리의 노래가 휘발시켜 버렸던 자메이카의 현실과 그 속에서 살고 있던 한 개인이 가진 삶의 무거움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바라는 걸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무차별로 살육할 때까지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읽는 동안 충격과 전율이 소설이 주고자 하는 것의 핵심은 아니라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투명하게 드러난 화자들의 내면을 보면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조시 웨일스처럼 아무리 괴물이라 하더라도 원래 괴물로 태어나는 이는 없으며 어디까지나 나와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삶이 가져다준 타격에 이리 휘말리고 저리 내몰리다 보니 가지게 된 상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1966년. 어떤 인간도 1966년에 들어갈 때 모습 그대로 나올 수는 없는 거요. 발라클라바의 몰락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심지어는 그 일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목숨까지도 가져갔소. 나는 그 일을 지지했소이다. 조용히도 아니고 소리를 높여서 말이오.(…) 1966년. 모든 일은 안식일에 일어났소. 조시 웨일스는 그 때 기술을 배우던 밀러 씨네 자물쇠 공장에서 자기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었소. 예전에는 한 번도 무슨 정당을 지지한 적이 없던 사람들의 골목을 지나 집으로 오고 있었지. 지난 금요일에 정치인이 거기 사람들한테 찾아와 입 닥치고 총을 쏘라고 했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거요. 사람들이 조시 웨일스에게 총을 다섯 발 쐈소. 다섯번째 총알을 맞았을 때 조시 웨일스는 더러운 물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졌소.(…) 3주 후, 그 병원에서는 다른 사람이 걸어 나왔소.(1권, p. 176)


 그것은 파파-로도, 밤-밤도, 데무스도 그리고 위퍼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현재는 저마다 겪게 된 불안과 공포 그리고 안아버린 절망 가운데 그들이 스스로 한 선택이 낳은 산물이었다.

 선택, 읽으면서 나는 이 단어가 소설의 핵심을 관통하는 단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이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을 맞이했던 것이다. 비록 가혹한 현실이 그들을 선택의 순간까지 내몰기는 했어도 선택만은 그들이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내린 결단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화자들을 일종의 범주로 묶어 구분하는 것까지 가능했다. 그 범주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도피, 복수 그리고 욕망이다. 다시 말해, 어둡고 힘든 현실 앞에서 어떤 이들은 달아나기에 바빴고(도피),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이 입은 불행의 대가로 남들도 똑같이 불행할 것을 요구했으며(복수) 또 다른 이들은 그 현실을 오히려 자기 이익 추구의 발판으로만 삼았다(욕망). 여기에 따라 화자들을 나눠보자면, 니나 버지스알렉스 피어스가 '도피'에 속하고 밤-밤, 데무스, 파파-로조시 웨일스가 '복수'에 속하며 마지막으로 배리 디플로리오, 루이 존슨, 닥터 러버위버가 '욕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이렇게 나누기는 했으나 사실 이들의 선택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닮아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선택이란 알고 보면 그저 불안하기만 하고 압도적인 무게로 자신을 내리누르고만 있는 현실 안에서 죽음에 가까울 정도로 점점 작아져만 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그들 모두 자신의 삶에서 불현듯 괴물을 맞이했고 바로 그 괴물 앞에서 자신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그 방법을 선택한 것이라고나 할까. 그러므로 소설 속 이야기들이 내게는 문학적 허구나 남의 이야기로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괴물이라면, 자메이카만큼은 아닐지라도 불확실하며 불안정하고 불안한 우리 현실 속에서도 늘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선택과 그 결과를 보여주는 화자들의 고백은 내게 타산지석의 목록으로 다가왔다. 타산지석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 모두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선택했으나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설 전체는 밥 말리의 콘서트가 그랬듯이 한 마디로 실패의 기록이라 할 만하다. 대표적으로 니나 버지스가 그러하다. 그저 달아나기로 결정한 니나 버지스는 킴 클라크에서 도카스 파머로 거듭 이름을 바꾸고, 사는 곳마저 자메이카에서 그녀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미국의 마이애미와 뉴욕으로 계속 달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존재감은 갈수록 엷어질 뿐이다. 이것은 그녀가 홀로 자립하지 못하고 늘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로 한층 더 부각된다. 나는 특히 이 니나 버지스에 주목했는데, 왜냐하면 그녀의 선택이 바로 내 선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랬다. 정면으로 관통하기 보다는 그저 이 소나기가 빨리 그쳐 버리기를 바라는 것이 불안과 공포에 대처하는 오래된 내 방법이었다. 니나 버지스가 간절히 피난처를 찾았듯, 나도 우회로가 발견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니나 버지스가 잘 보여준 것처럼 그런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더 왜소해지고 불안해지며 자꾸만 존재의 변방으로 한없이 밀려날 뿐이었다. 같은 범주에 있었던 알렉스 피어스 또한 결국엔 유비에게 붙잡혀 다리에 총을 맞았듯이.

 그렇다고 파파-로나 조시 웨일스의 선택 또한 나의 대안은 될 수 없었다. 비록 그들은 자신에게 닥쳐온 불안과 공포에 정면으로 맞섰으나 택한 방법이 잘못 되었다. 그들은 괴물과 싸우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었다. 원래는 인간이 되고자 잠시 괴물이 될 생각이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 타자를 희생시킨 그들은 모조리 그 자신도 누군가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희생시켜야만 하는 타자가 되는 운명에 처해 버렸다. 복수를 위한 모든 행동은 끝내는 자신의 파멸로 되돌아올 부메랑일 뿐이었다.

 일 년은 한 세기와도 같을 수 있는 시간 아니겠소. 괴물과 싸우는 남자는 누구나 괴물이 되니까.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만한 모든 걸 죽여버린 살인마가 바로 나라고 생각하는 여자가 킹스턴에만 최소 한 사람 있으니 말이오. 사람들은 내가 미쳐버린 게, 학교 다니는 아이를 실수로 죽여버린 일에 자기만 신경을 쓰기 때문이라고 하오. 허나 내가 정말로 미쳐가는 까닭은, 그 일이 신경쓰여야 마땅한데도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걸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더이다.(1권, p. 283)


 욕망 쪽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과는 피차일반이었다. 그들 역시 니나 버지스만큼이나 변방으로 내몰렸고, 조시 웨일스처럼 파멸했으니까 말이다. 이제 내가 왜 이 소설을 타산지석의 목록으로 불렀는지 알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수 많은 고백록들은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들려주고 있었다. 단 하나. 아서 조지 제닝스 경의 것만 빼고.


 이 소설엔 소설 전체를 마치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 픽스'처럼 희망과 절망으로 양분하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소설에서 오직 유령으로 존재하는 아서 조지 제닝스 경과 역시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피터 나세르가 그것이다. 아서 조지 제닝스가 희망의 존재라면, 피터 나세르는 절망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아서 조지 제닝스 경은 이미 시작에서부터 피터 나세르에게 죽임을 당한 상태다(이것은 소설에서 직접 언급되는 부분은 아니지만, 나중에 그를 죽인 사람이 미스터 P로 불려지는 것을 봐서 어느 정도 추정되는 사실이다.). 그는 실존 인물로 실제 역사에서 자메이카를 전혀 다르게 만들 수 있었던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피터 나세르에게 살해당해 버렸고 그 결과 소설처럼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자메이카가 도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작가는 반전을 마련한다. 아서 조지 제닝스가 그대로 사멸하지 않고 유령이 되어 시대를 거듭하여 부활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는 비참한 자메이카의 현실에 대한 침묵의 관찰자가 된다. 비록 그의 목소리가 현실의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지라도 정작 소설 속 역사는 그에게서 첫 시작이 열리고 각 시대 또한 그에 의하여 매듭을 짓게 된다. 그는 유령이지만, 소설 속 그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으며 모든 사태의 진실 또한 파악하고 있다.


 작가는 왜 이런 설정을 가져온 것일까? 나는 정말 궁금했다. 소설에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아무런 직접적인 충고나 권유를 발견하지 못한 나는 만일 이 소설에 그래도 대안 같은 것이 있다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자 두 가지 점이 눈에 띄었다. 소설에서 아서 조지 제닝스처럼 유령으로 부활하는 자들이 대부분 무고한 희생자들이며 그들은 오로지 타자를 위한 삶을 살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 특히 오렌지 스트리트 방화 때 불을 끄다가 조지 웨일스에게 살해 당한 뒤 유령으로 다시 부활한 소방관의 존재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아서 조지 제닝스 경이나 소방관 모두 타자를 향한 삶을 살다가 죽음을 맞았다. 그것도 순전히 무고한 희생이었기 때문에 더욱 타자를 향한 삶이라는 측면이 강조 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은 부활하여 비록 유령의 몸이었지만 영속했다. 자메이카의 역사가 어떻게 흐르는지 모조리 들여다 보는 관찰자가 되었고, 소방관은 죄인의 바로 곁에서 그들의 죄를 소리쳐 고발하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개인의 고백이라는 파편만이 존재하는 소설에 역사라는 일정한 틀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오직 유령뿐이었다. 그들이 목소리를 모으고 진실을 기록하여 역사를 만들었다. 자신을 지키는 것에만 급급했던 개인들은 시간을 늘 현재 속에 고이게 만들었지만 유령은 말없이 역사를 빚어 다음의 문을 열고 밀어내 미래로 흐르도록 하였다. 문득 철학자 임마누엘 레비나스의 말이 생각났다. '타자가 바로 미래'라고, 그는 말했다. 유령이 현실 속 인간들에게 절대적 타자라는 것과 바로 그 유령들이 유일하게 역사를 만들어 미래로 내보내고 있다는 점에서 내게 이 소설은 그야말로 레비나스의 말을 온전히 구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바로 이 타자를 지향하는 삶이 대안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한데, 이런 생각을 더욱 굳히게 만드는 존재가 있었다. 그 자가 바로 아서 조지 제닝스 경과 정반대의 존재인 피터 나세르였다. 1985년 8월 14일. 아서 조지 제닝스 경의 눈에 들어온 피터 나세르의 다음과 같은 모습을 보니 도저히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러는 내내 나를 죽인 남자는 여전히 죽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는 썩는다. 나는 그자의 비서가 작은 파란 뱀 같은 정맥들이 우글거리는 그자의 허연 두피를 매만지며, 그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검은 염색약으로 씻어내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자의 새 아내는 그걸 만지려 들지 않는다.(...) 인민국가당은 그자의 정당을 권력의 게임장 밖으로 밀어냈지만, 그는 매일 아침 꼭 출근이라도 하듯 옷을 입는다. 그토록 이상한 10년이다. 70년대와는 전혀 달라 보이고 그자는 더이상 자신의 언어를 쓰는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태로 길을 잃었다.(2권, p. 543) 


 피터 나세르는 소설에서 가장 괴물 같은 자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조지 웨일스나 닥터 러브와 같은 괴물들을 양산할 수 있는 자다. 그야말로 극한의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에겐 부활이 없다. 그의 육체는 오직 썩어들어갈 뿐이다. 미래도 없다. 그는 미래가 와 버렸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물 웅덩이처럼 고인 시간과 고립된 육체 속에 유폐되어 아내조차 혐오하는 존재가 되어갈 뿐이다. 이는 모든 시간에 존재하고, 모든 존재를 넘나드는 아서 조지 제닝스 경과 얼마나 다른가. 이 영속과 부패 그리고 확산과 유폐라는 뚜렷한 대조군 앞에서 내가 선택할 샬레(Schale)는 명확해지지 않을 수 없다.


 목소리들이 재현한 소설 속 현실을 관통하면서 찾아낸 내 나름의 대안을 이렇게 밝혀보았다. 이 순간, 기억의 노트에 또렷한 필체로 적어두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피하려 들지 말고 정면으로 맞설 것. 또 다른 하나는, 대응에 있어 자기만의 입장과 판단을 넘어 타자의 상황과 생각을 지향할 것. 이것을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에 대한 내 글의 간략한 브리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문득 상상해 본다. 내가 지금 소설을 통해 70년대의 자메이카를 들여다 본 것처럼, 먼 미래의 누군가가 오늘의 시대를 바라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분명 내가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그역시 충격을 받지 않을까 싶다. 지금의 세계란 IS의 민간인 무차별 테러가 대표하듯이 그 때의 자메이카만큼이나 폭력과 살육이 난무하고 자신과 같지 않은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척이 팽배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성 보다는 감정이, 타자에 대한 신중한 접근과 판단 보다는 무분별한 규정과 적대가 판을 친다. 이는 타인에 대한 조금의 이해와 배려가 없다는 점에서 킹스턴에서 에이트레인즈와 코펜하겐시티를 오갔던 총탄과 다를 바 없다. 아마도 이 역시 갈수록 깊어지는 시대적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일 것이나 소설이 잘 보여주었듯이 결국엔 자신의 불안만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잔혹하고 비참한 현실이 시대를 거듭해 반복되는 것은 이제라도 우리의 생각과 태도를 달리해야 할 절실한 요청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정녕 60년대 히피들이 자신을 향한 총구에 꽃을 꽂았던 것처럼 저격이 아니라 포용의 손을 내미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나를 격리로만 몰고가는 불안과 공포라는 괴물을 오히려 타자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 이겨내는 길은 없는 것일까? 이 고민이 당신의 것이기도 하다면 그 숙고의 시작을 이 소설로 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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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6-12-22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두권짜리라서 좀 부담스러웠는데, 님의 이 리뷰보고 읽고 싶어졌어요, 불끈~!
밥 말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관심 가져 볼만 하겠는데요~^^

ICE-9 2016-12-23 01:35   좋아요 0 | URL
앗, 양철나무꾼님 말씀 고맙습니다. 리뷰 보고 읽고 싶어졌다는 말씀만큼 절 기쁘게 하는 말은 또 없거든요.
밥 말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흥미롭게 읽을 것 같은데, 정작 그 밥 말리는 소설 속에 잘 나오지 않아서 어떨지 모르겠네요^^; 다만 밥 말리가 활동할 당시 자메이카의 상황은 어땠는지 너무나 잘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많이 잔인하고 또 험한 말이 많이 나와서 비위가 약하신 분들이나 여성 분들에겐 안 좋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피오나 2016-12-23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두권짜리라 망설였는데...비위가 약하거나 여성들에겐 비추라고 하시니 그냥 패스해야겠어요ㅋㅋ

ICE-9 2016-12-23 16:04   좋아요 0 | URL
소설에 학살 장면이 있고 성적인 것에 대한 비속어와 욕설이 많이 나와서 한 말인데, 이것이 싫으시면 패스하시는 게 좋으실 것 같아요^^ 소설은 좋았는데, 욕설이 정말 많이 나와서, 물론 리얼한 재현을 위해서였겠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좀 불편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