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들의 꿈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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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솔직히 말해 이 책은 내게 전혀 예기치 않게 받아버린 선물과도 같았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는 오늘날 중남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거의 보르헤스와 맞먹을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과문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로 우리나라에 나온 그의 작품은 딱 둘 뿐이다. 하나는 '모렐의 발명', 다른 하나는 '러시아 인형'. 전자는 장편이고 후자는 단편집이다. 카사레스는 생전에 9 개의 장편을 썼는데, 소개 된 것은 초기작인 '모렐의 발명' 딱 하나인 것이다. '러시아 인형'은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단편집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그의 첫 모습과 마지막 모습밖에 없다. 중간 과정이 싹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카사레스의 네 번째 장편인 '영웅들의 꿈'이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중간 과정, 한창 자라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열렬히 보고 싶었던 내겐 선물이라 할밖에.


 '영웅들의 꿈'은 '모렐의 발명'과 색깔이 많이 다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를만한 요소가 그리 드러나지 않는다. 현실 속 아르헨티나의 공간을 가져왔고 이야기 역시 리얼리즘적인 색채가 강하다. 물론 이것은 '모렐의 발명'이 가상 현실을 다루고 있고, '영웅들의 꿈'이 실제 현실을 다루고 있다는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영웅들의 꿈'이 '모렐의 발명'과 아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는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실이 반복되고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미스터리적 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진리는 외부가 아니라 전적으로 내부의 문제라는 것과 사랑이 이 모든 당황스럽고 혼란과 불안 속에 내던져진 우리네 삶의 유일한 구원이라는 게 그러하다.



 주인공은 가우나란 남자다. 어느 날 그는 경마에서 큰 돈을 벌었는데 그 돈을 친구들과 함께 모조리 써버리기로 작정한다. 그러다 우연히 가면을 쓴 여자와 만났다. 그는 단 번에 매혹되었는데, 술에 몹시 취한 상태에서 어쩌다 헤어져 버린다. 그는 여인을 잊지 못하고 내내 그녀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 연극을 하고 있는 '클라라'를 만난다.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잠시 가면을 쓴 여인을 잊지만, 그녀가 자기 말고 다른 남자와 데이트 한 사실을 알게 되자 멀어질 결심을 한다. 그러나 가우나는 배신을 당해 헤어지는 건 자존심이 상해 클라라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별하는 것으로 보게끔 그녀를 피하는 것으로 거리를 둔다. 대면 보다는 회피를 선택한 그는 비겁하다. 우리는 여기서 이 소설이 두 개의 대비되는 세계가 있는 것을 본다. 하나는 비겁자의 세계고 다른 하나는 영웅의 세계다. 그렇다. 제목의 '영웅들의 꿈'은 자신에게 아무리 상처가 되고 두려움과 역경을 가져다 주어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자들을 나타낸다. 소설에서 영웅이란 마주 보는 자, 당당하게 겨루는 자다.


 이런 영웅에 가장 걸맞는 존재는 클라라다. 우리는 소설 마지막에서 가우나가 꿈처럼 겪었던 가면을 쓴 여인을 만났던 사건의 진실과 그것이 내내 반복되는 이유를 알게 된다. 클라나는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가우나처럼 피하려 하지 않는다. 마법사인 아버지가 남겼던 예언을 믿고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건다. 이렇게 소설 '영웅들의 꿈'은 믿음과 영웅에 대한 소설이다. 그것을 비겁자에서 영웅으로 나아가는 가우나의 여정을 통해 보여준다.


 그의 옆에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귀가 덮일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썼으며, 손으로 도자기 그릇을 들고서 돈을 받았다. 그 아이를 보자 가우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불쌍한 그리스도! 손에 침 뱉는 그릇을 들고 있다니! 이것은 배꼽 잡고 웃어도 될 일이야!' 하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달빛>을 들으면서 그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인류 전체와 우애를 돈독히 하겠다는 긍정적인 충동을 가슴으로 느꼈고, 선을 위해 행동하겠다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을 느꼈으며,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하겠다는 우울한 욕망도 느꼈었다. 목이 매어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마법사가 죽지 않았다면 자기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p. 293 ~ 294)


 믿음이 나오는 것은 비겁자가 되느냐, 영웅이 되느냐가 바로 세상에 대한 나의 해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 해석이란 세상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을 나타낸다. 즉 '믿음'이다. 이런 믿음의 테마는 클라라 아버지인 마법사의 예언을 통해 제시된다. 비겁과 영웅의 대비와 마찬가지로 '영웅들의 꿈'엔 또 하나의 뚜렷하게 대비되는 두 세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믿음이 없는 자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있는 자의 세계다. 소설 초반에 가우나가 속했던 '발레르가 박사'의 세계가 전자의 것이고 클라라 아버지 세계는 후자의 것이다. 때문에 소설 후반에서 클라라를 두고 발레르가와 가우나가 결투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우나가 클라라처럼 영웅이 되기 위해선 발레르가의 세계를 찢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니까 말이다.


 믿음이란 결국 자신에게 달린 것이므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를 보는 시선이 곧 세상을 보는 시선인 것이다. 그 시선을 통하여 발레르가 박사와 마법사의 세계는 또 다른 의미를 얻는다. 전자는 속물의 세계요, 후자는 영웅의 세계라는 것을. 모든 걸 하나로 연결지어 생각해 보면 발레르가의 세계는 이런 의미가 된다. 믿음이 없어 오로지 세상의 기준에 눈을 맞추어 자신의 부족과 불행만을 보고 보다 고귀한 가치를 위하여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 피하려 한다면 비겁자요, 속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마법사의 세계는 여기에 정확히 반대의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영웅은 어떻게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바로 카사레스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는 궁극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영웅은 자신의 결단을 통해 형성한다고.


 '모렐의 발명'이 그랬듯이, 우리는 어떤 존재를 찾기만 하면 삶이 달라지리라 생각하지만 그런 건 대개 가상 현실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우나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가면을 쓴 여인이 실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던 것처럼, 진정한 우리의 구원은 사실 저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해골에 고인 물을 감로수라 여기며 마셨던 것에서 깨달은 '일체유심조'와 통하는 이야기라 말하겠지만, 그래도 어쩌랴! 진리는 물과 같아서 담는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은 달라질지언정,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을.


 이런 구도의 소설로 읽으면 왜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가 보르헤스에 버금가는 중남미 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는지 잘 이해될 듯 하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나 좋은 문장이 많아서 그렇게 여길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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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바다
이언 맥과이어 지음, 정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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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과 야만은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요?

 새삼스레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언 맥과이어의 소설, '얼어붙은 바다'를 읽고 난 뒤에 말이죠. 먼저 소설에 대한 감상을 간단하게 말해 본다면, 이 소설 정말 압도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야기에 심취하게 하더니 끝까지 몰입도를 유지시켰습니다. 19세기, 석유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포경 산업이 점점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시기의 이야기가 이다지도 저를 빠지게 만들 줄 몰랐네요. 고래잡이 배가 배경이라 얼른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정말로 그 시기 고래 잡이의 아주 생생한 현장을 보여줍니다. 작품을 위해 정말 많이 자료 조사를 했다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작가의 고향을 보니 어느 정도 납득할 것 같더군요. 고향이 다름아닌 '헐(hull)'이었거든요. 근대 때부터 영국 포경 기지의 중심으로 포경에 있어선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기도 하니까요. 고향과 고향 사람의 이야기인지라, 항구나 배의 묘사도, 선원에 대한 묘사도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합니다. 이런 생생한 리얼리티가 몰입도 높은 이야기와 만나니 끝가지 소설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울 수밖에요.



 그럼, 이야기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볼까요?

 소설은 두 인물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는 잔인한 성격이자 소아성애자인 작살꾼 드렉스, 또 하나는 인도에서 군의관으로 있었으나 세포이 항쟁 이후 알 수 없는 이유(여기에 대해선 소설 초반에 밝혀집니다만)로 지금은 영국에 와 왔는 섬너. 처음에는 전혀 접점이 없었던 두 사람은 곧 한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볼런티어 호'라는 포경선이죠. 선주 벡스터의 유혹에 섬너는 '볼런티어 호'에 오르는 것이 세포이 항쟁 당시 큰 상처를 받은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시간으로 생각하지만 곧 이 여행의 목적이 단순히 포경에 있지 않다는 게 드러납니다. 사실 '볼런티어 호'에는 선주 벡스터와 선장 브라운리 그리고 소수의 선원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 목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볼런티어 호'의 고의 침몰. 날로 사양 산업이 되고 있는 포경업에서 더이상 이익을 얻을 게 없으니 배를 일부러 침몰시켜 막대한 보험금을 편취할 계획이었죠. 그러나 이 계획이 아니더라도 섬너가 얼마나 위험한 항해에 참여했는지는 곧 드러납니다. 그가 다소 낭만적으로 생각했던 포경이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죠. 북쪽 바다는 그야말로 조금만 발을 잘못 디딛어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과 똑같은 곳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야만과 위험으로 가득한 곳. 이성과 그것의 산물인 문명은 그야말로 바다의 거친 파도에 깨끗하게 실려가 버린 곳이었죠. 대화 보다는 폭력이, 사랑 보다는 증오와 죽음이 더 횡행하는 그 곳에서 섬너는 유일하게 문명의 대표자로 남습니다.


 바로 그것을 가늠하는 시험대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게 되죠.

 소년 사환 하나가 목이 졸려 살해된 채 발견된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남색가로 밝혀진 한 선원이 곧 범인으로 잡히는데, 섬너만이 유일하게 객관적이며 물리적인 증거로 그가 범인이 아니라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밝혀내지요. 바로 그 범인이,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섬너와 완전히 반대되는 인물로 무조건 감정이 시키는대로만 하는 완벽한 야만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렇게 작품은 이 소설의 진짜 테마가 다름아닌 문명과 야만의 관계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문명과 야만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차이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이죠.


 이 질문에 대하여 섬너가 우연히 배에서 기르게 되는 곰이 주요한 상징으로 쓰입니다.

 그 곰은 우리에 갇혀 섬너가 주는 먹이를 먹고 사는데, 처음엔 약하고 온순했던 이 곰이 항해가 계속 될수록 자신의 야성을 드러냅니다. 그러다 '볼런티어 호'가 계획대로 침몰되고 섬너를 비롯하여 배의 선원 모두가 더이상 문명의 보호를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곰은 야생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이런 과정을 보면 이 곰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번 항해를 통해 섬너가 꾹꾹 누르고 싶었던 자기 내면 속 야성이라는 것을 요. 다시 말해 곰은 섬너가 가진 야만의 상징이었던 겁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재밌기에 가급적 읽었을 때의 재미를 빼앗지 않기 위해서 핵심적인 사항들을 많이 숨기느라 잘 말하지 못했습니다만 '얼어붙은 바다'는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가 더 많이 폭발하는 작품입니다. 그만큼 섬너가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는 문명과 야만의 경계 역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지요. 그러는 가운데 독자는 저절로 문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힘겹게 유지되고 있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떠올려보게 됩니다.


 아직 올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앞으로 읽게 될 소설들이 참 많이 있을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얼어붙은 바다'는 올해 가장 인상 깊은 작품으로 만날 것이라고. 마치 선혈이 낭자한 생고기를 입에 넣는 것 같은 날 것의 이야기를 만나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요. 이언 맥과이어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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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지막 대륙
미지 레이먼드 지음, 이선혜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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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시간이 유한하고 내일을 과거처럼 알지 못하며 남의 마음이 내 맘 같지 않은 이상 상실은 필연적이다. 누구나 그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잘 안다고 해서 상실로 인한 고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알고보면 사람이 살면서 하는 모든 일의 근본에는 이토록 고통을 가져오는 상실을 어떻게든 줄이려는 마음이 있다. 누구는 그 아픔이 너무 두려워 혼자 되기를 고집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 상실이 가져다 주는 고통에서 달아나려 애쓴다. 그러나 상실은 능력이 뛰어난 술래다. 아무리 잘 숨고 멀리 달아나도 언제든 반드시 찾아내거나 따라잡는다. 이토록 삶에 상실이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면 우리가 더 많이 생각해야 할 것은 상실이라는 사건 자체보다 그 이후여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상실로 인한 고통 속에 주저 앉거나 자멸하지 않고 잘 감내할 것인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상실 이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미지 레이먼드의 '나의 마지막 대륙'이라는 책이다.


 미지 레이먼드, 잘 모르는 작가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오직 소설의 배경이 남극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가 충만한 곳보다 부재하는 쪽을 선호하다. 내가 가장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은 사막이나 높은 산 또는 북극 혹은 남극이다. 남극은 내 오랜 로망 중 하나다. 살면서 언제고 한 번 꼭 가서 머무르고 싶었다. 요즘은 남극 관광도 한다고 들었기에 예전처럼 불가능한 꿈은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남극이 배경이라기에 그 때를 위해서라도 읽어 본 것이다. 정작 읽고 나선 남극 관광에 대한 내 생각을 접어야 했지만.



 이 소설은 '뎁 가드너'라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녀는 남극의 펭귄을 연구한다. 원래는 사진 전공이었지만 상실로 인한 고통을 겪다가 펭귄에게 매료되어 전문적으로 연구까지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펭귄은 그녀에게 삶이 준 두 번째의 기회였다. 해마다 그녀는 남극으로 떠난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개인이 책임지기엔 너무나 큰 비용이다. 그래서 그녀는 '코머런트 호'라는, 남극 크루즈 여행선에서 일한다. 그녀가 소속된 비영리 연구 단체인 '남극 펭귄 프로젝트'는 코머런트 호와 연구자들이 그 배에서 관광객들을 일하며 무상으로 남극까지 올 수 있도록 제휴했던 것이다. 뎁은 남극에서 온전한 자유를 느끼며 할 수 없이 미국에 있어야 할 때면 언제나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남극, 그 곳은 뎁에게 상실로 인한 아픔이 치유되는 곳이다. 뎁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소설은 뎁처럼 남극에서 치유와 새로운 희망을 찾는 이들을 계속해서 등장시킨다. 리처드와 케이트 부부 그리고 켈러 같은 사람을.


 켈러는 뎁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뎁의 연인이니까 말이다. 켈러도 커다란 상실을 겪었다. 원래 잘 나가는 변호사였던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이를 잃었다. 그로 인해 삶의 모든 의욕과 희망까지 무너져 버린 그는 남극에서 뎁처럼 삶의 두 번째 기회를 찾았다. 그렇게 켈러와 뎁은 닮았다. 둘은 서로에게 급속히 빠져들지만 상실의 고통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켈러는 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 뎁 또한 켈러를 정말 사랑하면서도 그와 정착하는 것에 일말의 불안을 느낀다. 삶은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 이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극 또한 그렇다. 치유의 땅인 그 곳은 죽음의 땅이기도 하다. 이것은 소설 초반 데니스라는 남자의 죽음에서 나타난다. 그 또한 이별의 고통을 잊기 위해 남극을 찾았는데, 그만 죽어버린 것이다. 사고인지 자살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 죽음은 사실 하나의 복선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난파 며칠 전'이란 형태로 전개되는데(이 소설은 한 챕터가 바뀔 때마다 시간이 과거와 현재를 마구 넘나들기에 그 시간을 항상 유념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이처럼 여기엔 아주 커다란 비극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난 남극 관광에 대한 계획을 사실상 포기했다. 아무튼 바로 그 어마어마한 비극을 위한 복선이 데니스의 죽음인 것이다. 이렇게 남극은 희망의 땅이자 절망의 땅이다. 남극을 연구하기 위한 비용을 남극을 파괴시킬 뿐인 관광 사업을 통해서만 조달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남극은 뎁의 말처럼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과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는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다. 남극이 온전한 치유를 줄 수 없는 건 세상 여느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결국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하다. 나 바깥의 것에 기대어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그 어떤 바깥의 것도 치유를 줄 수 없다.


 '뜻밖의 수확'이란 말이 있다. 내겐 이 소설이 정말 그렇다. 별 기대없이 읽었는데 진짜 좋았다. 인용하고 싶은 문장이나 대목들이 많은데, 그걸 다 쓰면 너무나 길어질 것 같아서 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번잡한 일상 속에서 왠지 너무 붕붕 떠다니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면 이 소설을 한 번 벗해보는 것도 좋겠다. 읽다보면 어느새 침잠하게 되고 내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이야기 자체도 새롭고 흥미롭다. 저자가 실제 펭귄 연구를 했던 체험을 토대로 썼기 때문에 소설의 모든 상황에서 현실감이 넘쳐난다. 남극에 대해 관심이 많다면 이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어쨌든, 당신이 내 지인이라면 일부러라도 연락해서 무조건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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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변의 피크닉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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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영화 좀 본다고 말하기 위해선 마치 통과 의례처럼 필수적으로 알아야만 했던 러시아 감독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화로 시를 쓴다고 평가받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였습니다. 이걸 잘 보여주는 사례 하나가 있는데, 바로 처음으로 극장에서 개봉된 그의 영화 '희생'입니다. 유럽 사람들조차 영화가 너무 어려워서 흥행 실패한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선 영화광들이 너도 나도 앞다투어 보는 바람에 흥행을 하여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한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 감독에게 빠진 영화 키드 중 하나였죠. 대학 다닐 때 철학 논문을 그의 영화를 주제로 할 정도로 말이죠. 언제나 구원이라는 주제에 집착했던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딱 두 편의 SF 영화가 있는데, 하나는 스티븐 소더버그가 리메이크 한 바도 있는, 스타니스와프의 원작으로 하여 '솔라리스'고, 나머지 하나는 이번에 소개할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인 '노변의 피크닉'을 원작으로 하여 만든 '잠입자(STALKER)'입니다. 저는 이 두 작품을 주로 칸트의 '초월적 이성'과 관련하여 풀어나갔는데, '솔라리스'는 원작 소설까지 번역되어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어 좋았던 반면, '노변의 피크닉'은 번역되지 않아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지금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어쨌든 그렇게 글을 쓸 정도로 정말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그 때 산 비디오를 아직도 이렇게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말이죠. 그러니 이번에 나온 이 소설 또한 여간 반갑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작 소설의 작가들 역시 '잠입자'의 시나리오에 참여했지만 원래 타르코프스키 감독 자체가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감독은 아닌지라 소설은 어떤 영화와 또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오래된 궁금증을 풀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말이 나온 김에, 소장하고 있는 '잠입자' 비디오와 이번에 나온 '노변의 피크닉'을 함께 찍어 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지금에서야 소개되었지만 해외에선 이미 77년에 번역 소개되어 지금은 가장 대표적인 러시아 SF 중 하나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이 소설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도 많구요. 가장 최근까지도 그러합니다. 이를테면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들 수 있겠네요. 거기서 메인 빌런인 벌처가 했던, '어벤저스'의 뉴욕 침공 때 외계인이 남긴 유류물을 수거해 그 기술을 몰래 사고 파는 행위들 있잖아요? 그것이 바로 '노변의 피크닉'에 나오거든요. 이 소설의 주인공 '레드릭 슈하트'란 남자가 그와 비슷한  일을 합니다. 생존을 위해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목숨을 걸고 금지 구역에 몰래 들어가서 외계인이 남긴 물건을 가져오죠. 영화만이 아닙니다. 음악도 있습니다. 2013년에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락 그룹 'GUAPO'가 발표한 음반이 바로 그것입니다.



 '노변의 피크닉'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앨범 제목만 봐도 이 음반이 '노변의 피크닉'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는 걸 아실 듯 합니다. 앨범 제목인 'HISTORY OF THE VISITATION'은 '노변의 피크닉'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필먼 박사가 쓴 책의 이름이니까요. 네, 이 앨범은 '노변의 피크닉'을 바탕으로 하는 컨셉(음반의 모든 곡을 하나의 주제로 통일한 걸 가리키는 말입니다.)앨범인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거기엔 'S.T.A.L.K.E.R'나 '메트로 2033'과 같은 게임도 포함되지요.


 외계인과의 접촉을 다루는 소설이지만 정작 외계인은 나오지 않습니다. 등장하는 것은 외계인이 잠시 머물다 간 지역에 그들이 남긴 물건 뿐입니다. 이것이 이 소설이 가진 가장 독특한 점입니다. 영화 'E.T'나, '클로즈 인카우터'처럼 조우 그 자체를 다루지는 않고 그 '여파(aftermath)'를 더 많이 다룬다는 것 말이죠. 소설은 필먼 박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기까지 합니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 가장 중요한 발견은 방문이라는 사실 자체입니다. 방문자의 정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왜 그렇게 잠깐 머물렀는지, 그 후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류가 우주의 외로운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분명히 알게 됐다는 게 중요하지요." (p. 18 ~ 19)


 이런 시도는 SF 소설 역사상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감히 바로 이런 점이 이 소설을 무엇보다 특별하고 꼭 시간을 들여 읽을만한 존재로 만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여타의 소설과는 달리 이 소설은, 특히나 윤리적인 관점에서, 전혀 다른 질문을 독자에게 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일단 윤리라는 것을 어디까지나 타자에 대한 나의 태도에 관계된 문제라고 한정시키도록 하죠. 그런데 그 때까지 외계인이 등장하여 직접 대면하는 것을 다뤘던 소설들은 공통적으로 외계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질문('그들이 누구고, 이런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지?' 등등)을 해댔지만 정작 그 '외계인'이라는 타자를 바라보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도,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 그렇게 나타났던 외계인들 조차 엄밀한 의미에서 타자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 인간이 가진 이성이라는 범주 내에서 이해가능한 존재들이었죠. 영화 'E.T'를 생각해보면 잘 아실 겁니다. 아니면 '별에서 온 그대'도 좋구요.


 그런 존재들에게 우리가 '이건 정말 이상하다. 진짜 외계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구나!'하는 점은 별로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사고도, 행동도, 모두 우리가 헤아리거나 예상하는 범위 내에 있으니까요. 이건 이상하죠.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환경과 사고 방식의 산물이니까요. 원래는 개미가 물고기를 만나는 것 같아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과 소통이 가능하고 그들의 내면을 헤아리며 행동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면 그건 이미 외계인이 아니지 않을까요? 그저 외계인이라는 가면을 쓴 인간에 불과한 게 아닐까요?


 달리 말하면, '외계인'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인간에게는 절대적으로 타자인 그런 존재마저도 우리는 이처럼  '인간주의적인 시선' 속에 가둬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나랑 닮았거나 별 차이가 없는 존재이었기에 굳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질문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죠.


 그러나 절대적 타자는 필연적으로 나 자신에게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런 존재들은 지금까지의 내 합리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어서 끝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지식이나 하고 있는 생각들이 옳은 것인가 하고 의심과 회의를 움트게 하니까요. 그런 식으로 절대적 타자는 나의 완결성에 흠집과 균열을 내고 겸허의 자각과 변화의 용납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노변의 피크닉'은 정말 대단하고 중요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외계인이 나왔던 다른 SF 소설은 줄 수 없던 것, 그 의심과 회의를 통한 겸허와 변화를, 가져다 주니까요.


 영어 판 '노변의 피크닉' 표지입니다. 영화 '잠입자'에 나오는 장면을 표지로 썼네요.


 바로 이것이, 요즘 같은 때에는 더욱, 우리가 이 소설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나의 완전무결함을 애써 믿거나 남에게 강요하고 있는 시대이니까요. 미국의 트럼프와 일본의 아베, 시리아의 IS 그리고 브렉시트를 단행한 영국이 대표적입니다. 다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믿음으로 타자를 용납하지 않고 있지요. 그들이 타자에게 허용하는 것은 딱 두 가지 뿐입니다. 자기처럼 바뀌거나 아니면 제거되거나. 네, 이러한 모습은 2차 대전의 독일 나치와 그리 다르지 않지요.


 아마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이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소련 체제가 역시 한 몫 했을 겁니다.

 그 때의 소련이란, 독일 나치와 어깨를 견줄 만큼 엄혹한 전체주의 사회였으니까요. 특히나 형제가 열심히 이 소설을 집필하던 무렵의 60년대는 소련이 바깥으로 자신의 힘을 엄청나게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체코슬라바키아는 소련 침공으로 '프라하의 봄'을 잃어버렸고 헝가리 역시 같은 꼴을 당해야했습니다. 소련은 자신의 체제 지속을 위해서라면 타자의 자유와 행복 따위는 깡그리 없애버릴 수 있는 나라였던 겁니다. 이런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자기 중심주의로 똘똘 뭉친 소련을 보면서 그들은 더욱 과연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이념이나 신념이 옳은 것인지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 없습니다. 이런 점은 소설 속의 한 박사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주 원대하고 고귀한 정의를 말해 보지요. 이성이란 주변 세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그 세계의 힘을 이용하는 능력이다.(p. 227)


 여기서 방점은 분명 주변 세계를 해지지 않는다는 데 찍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당시 많은 이들에게 고통과 절망을 주었던 소련이 하고 있는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일일 테니까요. '노변의 피크닉'은 그런 그들의 생각이 낳은 최상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시작을 여는 필먼 박사의 짧은 인터뷰를 제외하면 모두 네 개의 파트로 이뤄져 있으며 세 번째 부분을 빼면, 모두 가장 탁월한 '스토커(stalker)'인 레드릭 슈하트의 입장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남자가 사실 소설의 진짜 주인공으로 소설은 그의 9년이란 시간을 다루고 있지요. 그 9년의 시간 속에서 레드릭은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가지는 등 자신의 삶에 지속 가능한  점차 안정적인 형태를 부여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크게 구역의 여파에 자신의 삶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이 이 소설에선 정말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 진정한 주체성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 레드릭이 소설 속에 등장할 때는 구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그룹의 리더로 그는 정말 독립적이며 강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가 강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장면이죠.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런 주체성은 점차 훼손됩니다. 그토록 강했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약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이 도처에서 목격되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구역의 영향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자신의 딸 때문에 그것을 고쳐줄 수 있는 금빛 구체를 찾아 다시 구역으로 들어간 최후의 여정에서 드디어 금빛 구체 앞에  다다르자 그는 자신이 짐승이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나는 짐승이다. 나는 말을 모르고, 나에게 말을 가르치지 않았고, 나는 생각할 줄 모르고, 그 더러운 놈들이 나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p. 330 ~ 1)


 레드릭의 고백 그대로 그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어란 과연 무엇입니까?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에 따르면 언어란 한 개인을 사회화 시키는 가장 원초적은 도구로써, 우리는 언어를 매개로 자신의 진정한 주체성을 희생시키고 사회에 포섭됩니다. 그러므로 그 언어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잃어버렸다는 것은 진정한 주체성을 장악하고 있는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에서 벗어 났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주체성의 해방인 것이죠. 그것은 레드릭이 짐승이라 고백한 다음 하게 되는 다음과 같은 선언에서 두드러집니다.


 나는 내 영혼을 그 누구에게도 팔아넘긴 적 없으니까! 그건 내 것, 한 인간의 것이다!(p. 331)


 타자는, 그것도 헤아릴 수 없는 정체불명의 타자는 주체를 불안과 혼돈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 우리는 배워왔습니다. 이방인을 잔뜩 경계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하지만 이 소설은 '과연 그럴까?'하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실은 절대적 타자야말로 사회에 압도되어 자신조차 방기하고 있었던 진정한 주체성을 자각하는 매개체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므로 타자는 배척의 존재가 아니라 설령 그것이 끝없는 불안과 혼돈을 준다고 해도 끝까지 대면하고 대화해야 한다는 것도 더해서.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외계인의 짧은 방문과 그들이 남기고 간 정체 불명의 물건들에 대한 너무나 멋진 비유를 제목으로 쓴 '노변의 피크닉(ROADSIDE PICNIC)'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질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넌 지금 네가 생각하는 너를 진짜 너라고 생각해? 그런 너야말로 오히려 편협하고 협소한 자아가 아닐까?"라고 묻는 것이죠. 그들이 이 소설을 썼던 때와 오늘의 시대적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한 번쯤 스스로에게 꼭 물어야 할 질문인데다 소설 또한 명불허전을 느낄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에 꼭 한 번 만나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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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
J. 라이언 스트라돌 지음, 이경아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요리에 관한 소설을 읽는 일은 참 즐겁습니다. 그건 허기가 없을 때 읽어도 그렇습니다. 아, 이게 아닐까요? 오히려 허기가 질 때, 요리 이야기를 읽는 건 더 고통스러울까요? 마치 한없이 출출한 야밤에 '심야식당'이나 '고독한 미식가'를 볼 때처럼? 뭐, 그래도... 어떤 때는 맛있게 요리된 음식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을 때가 있잖아요? 그와 똑같이 먹음직스럽게 진행되는 요리 이야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소설을 하나 만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이란 책입니다.


 무엇보다 제목이 제 시선을 확 사로잡았습니다.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이라니!  보기만 해도 맛있는 요리들이 무진장 나올 것 같은 제목이 아닌가요? 거기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미국 중서부의 요리들이 가득 나온다고 하니, 어떤 사람들은 미국 요리만큼 대단찮은 것도 없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도전 정신이 아직 강하고 그런 제게 미국 중서부 요리는 미지의 대지와 같은 지라 탐험해보고 싶은 욕망이 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그저 중서부 요리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도 괜찮겠다 생각했는데, 웬 걸! 아주 재밌는 소설이었어요. 작가는 역시나 중서부인 미네소타에서 태어나고 자란 'J. 라이언 스트라돌'이란 남자인데 놀랍게도 이 소설이 데뷔작이네요. 제가 '놀랍게도'를 쓴 것은, 데뷔작이라는 게 얼른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밌고 참신한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에바 토르발'이라는 여성이에요. 이 여자에 대한 소개는 이것 하나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미국의 '대장금'. 그 대장금처럼 음식을 한 입만 먹어봐도 그 어떤 미세한 재료까지 다 알아 맞추는(이런 장면을 읽을 때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한 것인데' 하는 대장금의 BGM이 절로 깔렸다는.) 뛰어난 미각의 소유자인데다 그것을 바탕으로 단 한 번의 만찬을 위해 지불해야 되는 돈이 무려 5천 달러인데도 사람들이 그것도 줄을 서서 몇 년의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고 몰려드는 훌륭한 요리사가 되니까요. 성장 과정도 비슷해요. '대장금'처럼,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를 모두 잃었고(엄마는 에바가 아기일 때 어떤 남자와 바람이 나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떠났고, 그 뒤 얼마 안 있어 아빠는 갑자기 사망합니다.) 어린 시절엔 동급생에게 말못할 괴롭힘을 당했으며 아주 가난한 환경에서 홀로 남은 양아빠를 병수발해야 했으니까요. 다시 말해, 그 대장금처럼 편안하게 요리사가 될 환경은 아니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에바가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요리사가 될 수 있었나가 이 소설을 감상하는 하나의 핵심 포인트 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이 소설은 에바 토르발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에바 토르발의 입장에서 전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에바 토르발이 주인공처럼 나오는 것은 오직 딱 하나, 두 번째 장인, '초콜렛 아바네로'밖에 없어요. 그건 에바의 어린 시절 이야기로 자신을 무던히 괴롭히는 동급생을 자신이 벽장에서 몰래 키우고 있던 고추를 이용하여 거하게 복수한다는 내용이죠. 여기서만 에바 토르발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다른 장에서는 모두 다른 사람들이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각 장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을 통해 그들의 시선으로 간접적으로 에바를 봐야만 하죠. 이 구성이 제겐 참신했습니다. 요리사가 주인공인 소설의 경우 대부분은 '대장금'처럼 그를 무대의 정중앙에 세워두고 어떻게 그가 시련을 딛고 성공하게 되었나만 보여주니까요.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러지 않고 주변 인물의 내면을 끌고 들어와 그들은 왜 에바가 이룬 것을 놓쳐버렸나를 더많이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거꾸로 에바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보여줬던 것이죠. 결국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들'은 정말로 많은 중서부 요리들이 나오긴 하지만 요리 보다 삶, 그것도 실패자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는 소설이었던 겁니다. 하기사 삶과 요리가 다르지 않긴 하죠. 삶은 요리를 만드는 과정과 많이 닮아 있으니까요. 소설에도 그런 말이 나와요. 마지막 부분의 연회 장면에서 요나스가 손님들에게 에바의 요리에 대해 '여러분은 지금 에바의 인생을 맛보셨습니다'라고 하거든요. 이처럼 요리를 매개로 성공 보다는 실패가 더 많이 존재하는 우리네 삶을 풀어간 이야기가 바로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삶의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한 번 찬찬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뭐, 이런 걸 따지지 않아도 이야기 자체만으로 충분히 재미있기 때문에 요리를 주제로 한 진짜 근사한 소설을 만나고 싶으셨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소설을 손에 들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혹시 이자크 디네센의 '바베트의 만찬'이란 소설을 읽어보셨나요? 제가 참 좋아하는 소설인데, 파리에서 가장 뛰어난 요리사가 파리 코뮌 때 프랑스 정부에 맞섰다는 이유로 노르웨이로 숨어 들어와 과거를 숨기고 한 집의 하녀가 되어 살아가다 자신의 복권이 당첨되자 그 당첨금을 모조리 단 한 번의 만찬을 위해 써버린다는 내용으로 이 만찬 장면이 '위대한 중서부의 부엌'에서 에바가 달마다 여는 만찬과 흡사하기에 이 소설을 읽으면 얼른 생각나는 작품입니다. '바베트의 만찬'에서 디넨센은 그 요리사, 바베트를 통해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보상 보다 자신이 원하는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 자체를 즐기는 존재라는 것을 아주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에바도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력 자체를 즐기는 것엔 주어진 환경도 포함됩니다. 주어진 환경이 아무리 척박하다 해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그 한계 내에서 자신의 꿈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것이 바로 디넨센의 바베트와 에바가 걸어가는 길이죠. 이렇게 보자면 상세하게 말하지 않아도 이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이 왜 실패했는지, 특히 에바를 버린 진짜 엄마 신시아와 비교하여(소설의 마지막은 이 신시아가 주인공입니다.), 감을 잡으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기회를 날려버립니다. 그게 정말 자신에게 소중한 기회였다는 것을 언제나 아주 뒤늦게 깨닫게 되죠. 그런데 정작 그 순간, 놓친 기회만 아쉬워하지, 왜 그렇게 되었나에 대해선 잘 생각해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놓쳐버린 보상을 중심으로만 생각하지,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낳았던 삶의 태도에 대해선 제대로 시간을 들여 복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 소설은 그런 복기의 시간을 가져다 줍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실패자의 얼굴에 과거의 언젠가 우리 얼굴이 언뜻 겹치기 때문이죠. 저는 소설의 주제와 관련하여 왜 이 소설이 하필이면 요리를 소재로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요리야말로 재료로 주어진 것이 최선의 가치를 가지도록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란 걸 말이죠. 주어진 것보다 요리사의 능동적인 작업이 가치의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아마도 인생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해요.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을 탓하지 말고 그것으로 최상의 맛을 낼 수 있는 자신만의 레시피를 지금부터 만들어보라고!


 이 소설을 읽고 난 뒤에 당신이 만들게 될 레시피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문득 궁금해지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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