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승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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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2-09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보 ~~~~~~~~~~~~~~

ICE-9 2016-12-10 05:01   좋아요 0 | URL
오늘 여기저기 치킨 많이 시켜 드시더군요. 경축! 전 국민 닭 잡는 날입니다^^
 
카이사르의 여자들 1 - 4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4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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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어떤 책은 행운의 여신이 함께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적절한 타이밍에 우리 앞에 나타나는 일이 있다. 이번에 나온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 제 4부, '카이사르의 여자들'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4부와 5부는 로마 역사상 가장 커다란 족적을 남긴 카이사르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에 적절한 타이밍 운운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 때 로마의 상황이 바로 지금 우리나라의 상황과 참으로 유사하기 때문이다.카이사르가 황제에 오르기까지의 로마는 그야말로 보수와 반동의 흐름이 날로 격심해지던 때였다. 만민이 평등하고 고귀한 명예를 추구하던 공화국의 이념은 어느새 사라지고 '파트리키'로 불리는 귀족들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서 오로지 자신만의 사익만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었기에 '반동'이었고, 그러면서 밑으로 부터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을 묵살하기에 바빴으므로 '보수'였다. '원로원'은 원래 의회 민주주의의 기치를 높이 세우는 곳이었으나 이제는 권력의 헤게모니를 독점한 그들의 위치를 정당화하고 확장시키는 게 하는 일의 전부인, '그들만의 기구'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한 원로원의 변모는 누구도 '파트리키'를 견제할 수 없음을 뜻했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선거에서 표를 얻고, 자리를 얻는 게 가능했다. 재판도 돈만 있으면 배심원을 매수해 판결을 쉽게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꿨다. 재판까지 갈 것도 없었다. 돈과 권력 그리고 인맥만 있다면 설령 폭력을 쓴다해도 괜찮았다. 고용 승계 문제로 마찰을 빚던 탱크 로리 기사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 야구방망이로 마구 구타한 뒤 맷값이라며 돈을 던져준 최철원 전 M&M 대표나 자신의 아들이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때린 점원들을 조폭을 동원 청계산으로 끌고가 쇠파이프로 때린 한화 김승연 회장이라면 환영할만한 세상이 이미 로마에선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파벌이 권력을 쪼개 나눠가졌고 파벌에 속하는 이의 그 어떤 비행과 불합리한 인사도 파벌의 비호 아래서 없는 일로 유야뮤야 되거나 합리적인 조치로 되어 버렸다. 단언컨대, 로마는 침몰 중인 배였다. 민주주의의 붕괴 속에 그 침몰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이런 로마의 모습에서 어떻게 현재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막강한 비선 실세와 그에 의한 수렴 청정만 없었을 뿐, 그 때의 로마는 지금 우리나라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밑으로 부터 계속 변혁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바로 그것을 가장 잘 이용하는 사람이 '카이사르의 여자들'에서도 등장하는, 나중엔 카이사르와 함께 행동하게 되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였다. 그러나 이건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질 사실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카이사르가 로마 정치의 중앙 무대에서 활약하던 당시의 로마는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지금의 우리가 그렇듯이 누구나 로마의 앞날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런 모두에게 로마는 분명 갈림길에 서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미 공화국의 이념과 민주주의는 붕괴되고, 갈수록 소수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되고 있는 로마를 이대로 내버려 두고 그것의 과실만 탐닉할 것인가? 아니면 그런 로마를 전복하고 공화국의 이념과 민주주의를 부활시키기 위해 새로운 로마를 만들 것인가? 카이사르 시대의 로마 지식인들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키케로, 소 카토, 클로디우스 할 것 없이 모두 이런 갈림길 앞에 서 있었고, 결국 자신의 신념이든, 탐욕이든 길을 선택하고 걸어나갔다. '카이사르의 여자들'은 바로 그런 여정을 담는다. 그래서 비슷한 시대의 어둠과 시대적 고민을 가진 우리들에게 더욱 살갑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그런데 왜 제목은 '카이사르의 여자들'인 것일까?

 여기서 콜린 매컬로의 재치가 느껴진다. 이것은 분명 '간통의 황제', 부하들에게 '대머리 오입쟁이'로 불렸던 카이사르의 화려한 간통 전력을 살짝 비꼬고 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로마 역사상 가장 화려한 여성 편력을 자랑한다. 그는 이런 쪽에 전혀 개의치 않는 도덕관을 가지고 있어 미혼과 기혼을 불문하고 많은 여성들과 잠자리를 가졌다. 하지만 왕성한 성욕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야심이 아주 커다란 자였으나, 그 야심을 이뤄줄만한 재력도, 인맥도, 힘도 없었다. 그랬기에 권력자의 아내와의 간통은 자신의 야심을 채울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발판이었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쉽게 카이사르에게 넘어갈 수 있었을까 하고 왠지 궁금하게 여기실 분들을 위해 밝혀두자면, 여성들은 주로 육체가 아니라(그가 비록 잘생기긴 했어도 계속 빠지는 머리가 그의 육체적 매력을 감소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 때문에 반했다고 한다. 그 정부들중 카이사르를 가장 헌신적으로 사랑한 여인이 바로, 이 소설에서 가장 처음에 나오기도 하는, 세르빌리아다.


 세르빌리아는, 혹시 모르실 분들을 위해 소개하자면, 훗날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의 어머니다. 브루투스가 카이사를 암살할 당시, 브루투스는  로마 정치인들 중 가장 도덕적인 인물이라 평가받고 있었다. 또한 카이사르가 자신의 오른팔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가장 신임하던 자였다. 그런 브루투스였기에, 그가 암살에 가담한 것은 희생당한 카이사르 뿐만 아니라 로마인 전체에게도 참으로 커다란 충격이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암살하는 자들에게 완강히 저항하다가, 자신을 찌른 사람이 브루투스란 걸 알고 난 뒤엔 저항을 멈추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한다. "브루투스. 아들아, 너마저!'란 유명한 말을 남기고서 말이다.


 칼을 치켜 든 브루투스에게 카이사르가 그 말을 하고 있다.


 카이사르가 죽기 전에 남긴 이 최후의 말 때문에 오랫동안 역사학자들은 카이사르와 브루투스가 사실은 부자 지간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카이사르가 간통으로 유명하기도 했고 살아 생전에 카이사르가 브루투스를 워낙 각별하게 아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감안하고 읽으면 이 소설 첫 부분이 꽤나 중요하게 다가올 것이다.


 여기서 콜린 매컬로의 독특한 접근이 부각된다.

 왜냐하면 콜린 매컬로가 가장 많은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 카이사르와 브루투스의 관계를 시작부터 부자 관계가 아니라고 딱 못을 박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브루투스는 소년의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세르빌리아는 자신의 아들을 카이사르의 딸과 약혼시키려 카이사르의 집으로 찾아가면서 아직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세르빌리아와 카이사르의, 저 역사적으로 유명한 간통은 그 뒤에 비로소 시작된다. 콜린 매컬로는 아마 이것으로 골육 상잔이라는 막장 요소를 피하고 브루투스의 카이사르 암살을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신념 차이에 의한 것으로 정리해 두려는 것 같다.


 '같다'라고 막연하게 말하는 것은 이것을 확신하지 못하게 만드는 또 다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또 하나의 콜린 매컬로의 독특한 접근이기도 한데, 그것이 바로 세르빌리아의 셋째 딸, '데르티아'다. 콜랜 매컬로는 '데르티아'를 카이사르와 세르빌리아 사이의 자식으로 만든다. 그런데 이 '데르티아'가 어떤 존재가 되는가를 알고나면 이런 설정이 정말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와의 운명적 대결, 흔히 말하는 내전에 승리한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에게 가담하여 자신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일부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세르빌리아에게 3분의 1 가격으로 낙찰해 주는데, 그 때 로마인 사이에 '카이사르가 그렇게 한 것은 세르빌리아가 자신의 딸 데르티아를 카이사르에게 정부로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란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았기 때문이다. 만일 콜린 매컬로의 설정 대로라면 이 상황은 그야말로 막장이 될 수밖에 없는데, 콜린 매컬로가 '부녀지간'이라는 설정을 가지고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득력있게 넘어갈 것인지 자못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이렇게 시작된 '카이사르의 여자들' 1부의 이야기는 카이사르가 최고 신관이 되어 로마의 정치 무대 중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에서 끝난다. 그러는 한 편, 앞으로 더욱 선명하게 될 갈등 관계들이 얽혀든다세르빌리아는 자신의 야망을 대신 채워 줄 아들 브루투스에게 늘 재산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동생 카이피오의 상속자가 브루투스인 것을 알고 동생을 살해하여 그것을 마련한다. 그러나 카이피오는 소 카토가 너무나 사랑하는 형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서로 원수인 세르빌리아와 카토는, 아직 카토가 카이피오 죽음의 진실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 갈등 관계가 더욱 첨예화될 예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카토는 카이사르를 싫어한다. 원리 원칙을 철저히 고수하고 그것을 어기는 자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여 비난하며 처벌을 집행하는 카토의 눈에 원리 원칙에 충실하기 보다는 이길 수 있다면 선동이나 금력 등 모든 자원을 이용하는 카이사르가 곱게 보일 리 없다. 더구나 세르빌리아가 카이사르와 부정한 관계고, 카이사르가 자신의 아내도 건드렸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 눈은 더욱 매서워졌다. 실제 역사에서도 카토와 카이사르의 관계는 내내 적대적이었는데, 콜린 매컬로는 상상력을 통해 이 둘의 갈등을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이런 카토는 자신을 잘 따른다는 것을 미끼로 하여 브루투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 세르빌리아가 브루투스를 통해 이루려는 야망의 모습을 알고 있기에 카토는 브루투스를 그것과 전혀 다른 인물로 만들어 어릴 때부터 지녔던 세르빌리아에 대한 원한을 풀려는 것이다. 한편 선동 정치의 달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는 '누구든 거두는 자에게 재난을 가져오는 자'라는 세간의 명칭답게 자신의 복수 리스트를 하나 하나 결행해 나간다. 그러다 그는 같은 편인 것처럼 다가가 사람들을 동요시켜 내부에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즉 정치 선동의 재능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을 통해 그는 자신의 최대 원수인 키케로에게 일격을 가할 준비를 차근 차근 해 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1권은 더욱 본격적으로 진행될 인물들 사이의 갈등 관계들을 세공해 나가기 시작하는, 일종의 밑밥이라 말 만하다. 이런 내용들이 여전히 매력적인 콜린 매컬로의 문장들로 펼쳐진다. 대사는 맛깔나고(개인적으로는 특히나 선정적인 묘사가 압권이었다.) 장면들이 좀 더 드라마틱해져서 이번 작품은 더욱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카이사르의 이야기엔 모든 정치 체제에 운명적으로 따르게 되는 보수와 혁신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변화시키려는 자, 그 변화를 없애려는 자 그리고 양쪽을 오가면서 타협하는 자들이 저마다 생생하게 되살아나 자신의 선택을 보여주고 옹호를 구할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는 인물로 구현된 각 담론들을 두루 살펴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한 번쯤 관심이 있었다면 그 관심을 이번 작품을 통해 풀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카이사르와 당시 로마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분들에겐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만큼 로마에 대해 생생한 묘사와 재미 그리고 독특하면서도 깊이 있는 해석을 보여주는 책은 달리 또 없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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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소녀 - 개정판
델핀 드 비강 지음, 이세진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일상에 지칠  때마다 우리는 종종 여행을 꿈꾼다. 그럴 때 길은 우리들에게 자유와 해방 그 자체로 보인다. 하지만 길이 그렇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에게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집이 없다면 길은 전혀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고 만다. 내 앞에 놓여 있는 길 전부가 불안을 야기하고 공포를 빚어내는 공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상 위에 맘 편히 깃들 수 있는 집 하나를 마련하기 위해 지금도 사력을 다하는지 모른다.


 프랑스의 여성 작가 델핀 드 비강이 2007년에 발표하여 그 해 프랑스의 서점 대상과 르노드 상을 동시에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있는 공쿠르 상 후보까지도 올랐던 ‘길 위의 소녀’는 바로 그런 집을 잃어버린 두 소녀에 대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녀들의 이름은 노(no)와 루(lou). 노는 집없이 길거리를 헤매는 노숙자다. 하지만 루는 비록 가족간의 유대가 헐겁긴 하지만 그래도 집이라는 울타리 속에 있다. 그러나 잘 따져 보면, 둘 모두 사실상 집이 없는 존재다. 


'길 위의 소녀'는 영화(Zabou Breitman 감독)로 만들어져 2010년에 개봉되었다.

영화 포스터에서 키 큰 소녀가 노이고, 작은 쪽이 루이다.


 집은 문학에서 소속과 안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다. 바로 이런 집을 노와 루, 모두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녀들의 내면엔 모두 어디에도 속할 수 없고, 안주할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를테면 루는 이렇게 생각한다.


 살아오는 내내, 나는 어디에 있든지 언제나 바깥에 있었다. 난 항상 이미지나 대화의 바깥으로 동떨어지고 어긋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말이나 소리를 나 혼자만 듣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이 잘만 듣는 말을 나만 액자 바깥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리창 저편에서 못 듣는 것 같았다.(p. 17)


 그런 고로, 노와 루 모두는 실상 ‘길 위의 소녀’였다. 그리고 그녀들과 똑같이 길 위에 서게 된 또 하나의 존재가 있다. 바로 '뤼카'란 소년이다. 루는 천재 소녀로 2년 월반을 했다. 반면 뤼카는 좀처럼 학교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해 2년 유급을 했다. 성적은 바닥이고 걸핏하면 선생님께 반항하여 교실에서 쫓겨나기 일쑤다. 하지만 루는 오히려 그런 뤼카의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사랑에 빠진다. 루가 노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과 똑같이 뤼카도 자신만큼이나 바깥에 있는,  그렇게 길 위의 존재란 걸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정말 그랬다. 뤼카에게도 노와 루와 똑같이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는 집은 없었다. 그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는 브라질로 떠나 버렸고, 엄마는 새 애인과 같이 지내느라 집에 오지 않았다. 뤼카도 노와 루처럼 엄마가 부재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공통점 하나가 눈에 띈다. 노와 루 그리고 뤼카 모두에게 엄마가 없다는 것. 집처럼 강한 소속감과 안정을 뜻하는 상징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엄마다. 모성은 자식과 혈연으로 연결되고 자식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으로 품 안의 자식에게 영원한 소속과 안정을 느끼게 한다. 이는 우리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었기에 경험으로도 잘 알고 있는 바다. 그러나 소설에선 이런 엄마가 부재(不在)한다. 존재하는 것은 그와 정확히 반대되는 엄마 뿐이다. 사실 노와 루가 길 위에 서게 된 것은 전적으로 자의가 아니었다. 그 보다는 자신과 무관한 가혹한 운명으로 인해 내몰린 결과였다. 전적인 타의의 소산. 그렇게 길 위로 내몬 장본인이 바로 엄마였다.


 는 엄마가 여러 사내에게 강간 당하는 바람에 태어났다. 그런 노는 엄마에게 있어 자신이 당한 끔찍한 비극을 상기시키는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이름처럼 ‘NO’하고 거부당할 숙명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기워져 있었던 것이다. 노의 엄마는 과거의 아픔에 정면으로 맞서기 보다 그저 덮고 회피하려고 들었다. 당연하게도 그 비극의 구현체라고 할 만한 노 또한 기피했다. 


 그런데 이런 엄마의 모습이 의 엄마에게도 똑같이 반복된다. 루의 엄마 역시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오랫동안 간절히 원했고 간신히 가지게 된 아이, 그러니까 루의 동생 타이스가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그만 하늘나라로 떠나버린 것이다. 그 죽음으로 인해 루의 엄마는 모든 삶의 의욕을 잃었고 식물처럼 지냈다. 엄마는 루도 멀리했다. 루가 잃어버린 자식 타이스를 떠올리도록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픔을 관통하여 새로운 삶의 의지로 극복하기(아마도 그것은 루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했을 것이다.) 보다는 외면하기만 했다. 그 바람에 루는 엄마에게서 밀려났고, 실제로 4년 동안이나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야 했다. 그리고 여전히 집에서 아무런 온기를 느낄 수 없는 루는 집을 그저 기계적으로 가족을 연기하는 생기 없는 연극 공간으로 여길 뿐이다. 이렇게 노와 루가 노숙의 운명에 거하게 된 것은 엄마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뤼카도 마찬가지였다.


 델핀 드 비강은 이런 엄마의 모습을 소설에서 공통적으로 그린다.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된다. 이를 통해 비강이 들려주고 싶은 것이 '단순히 엄마가 잘못했다, 엄마가 변해야 구원이 있다'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이는 소설이 좀 더 근원적인 부분에 대해 말하려 하기 위함이다. 바로 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노와 루 그리고 뤼카 모두 원래 집이 없었던 게 아니라는 점이 이목을 끈다. 그들이 길 위에 서게 되었던 것은 오로지 집이 더이상 집이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것은 자신의 탓이 아니었고, 그 어떤 전조나 예고 또한 없었다. 그들 모두는 문자 그대로 느닷없이 노숙의 운명으로 내던져졌다. 아마도 이런 사실, 즉 우리는 언제든 운명의 돌연한 변화로 정주(定住)를 잃고 유랑의 삶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소설이 모성을 그렇게 묘사한 것이 아닐까 한다. 집보다 더 영원한 소속과 안정의 상징인 모성이 그런 모습을 보이면, 집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믿음은 더욱 동요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 동요로 생긴 균열을 통해서 비강은 우리에게 '진정한 집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집이 그토록 쉽게 우리가 바라는 집의 의미를 잃을 수 있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래도 집을 추구해야 한다면 이제 그 집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바로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샘솟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강은 여기에 대해서도 마치 소설에서 마랭 선생이 루의 조사에 도움이 되도록 노숙자의 자료 같은 것을 건네주듯 장면들을 할애하여 우리로 하여금 성찰을 좀 더 제대로 다듬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두 개로, 소설 후반부에서 집중적으로 묘사된다.


 하나는 노가 루의 집에서 살게되는 장면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노가 결국은 루의 집에서 나와 뤼카의 집에서 살게 되는 장면이다. 집은, 밤마다 편히 잠들 곳을 찾기 위해 이거리 저거리를 헤매어야만 하는 노가 가장 원하는 것이었다. 사실 노에게 집은 집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집이 있다면, 그 집에서 늘 자신을 따스하게 맞아줄 가족이 있다면 노는 타인에게 자신이 그저 더럽고 불결한 노숙자가 아니라 진짜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이상 카페에 혼자 들어갔다가 점원에게 내쫓길까 봐, 루를 기다렸다가 함께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그 존중과 당당함이야말로 노가 정말 원했던 것이었고, 노는 집이 그런 걸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을 루의 집에서 처음 확인했다. 루의 가족들이 노를 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는 루의 집에서 참된 안정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노숙자일 때보다 더 작게 말했고, 행동거지를 조심했다. 노에게 루의 집은 거리보다 더 자유롭지 못한 공간이었다. 결국 그녀는 홀로 느끼는 숨막힘 때문에 루의 집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노가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했던 부모라는 존재의 권위와 그것이 부여하는 질서 때문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모두가 대등한, 권위도 없고 질서도 부재한 공간이라면 노에게 진정한 집이 될 수 있을까? 마치 그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비강은 실제 그런 공간에 노를 거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뤼카의 집이다. 뤼카의 집엔 부모가 없다. 거기서는 뭘하든 자유다. 노와 루는 뤼카의 집에서 자유의 대기를 마음껏 활공한다.



 하지만 그조차 노에게 진정한 집이 되어주지 않는다. 자유 분방과 무책임은 결국 갈등을 부르고 짧은 시간 동안 유토피아 같았던 뤼카의 집은 붕괴된다. 노는 계속해서 실패한다. 그녀를 도와주려는 루의 노력도 마찬가지다. 둘은 끝내 헤어지기까지 한다.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노와 함께 할 것이라던 루의 결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왜 이러는 것일까? 비강은 왜 노와 루에게 이처럼 계속된 좌절과 불안을 가져다 주는 것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나는 이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몇 번이나 책을 반복해서 뒤적이고 오래도록 곱씹어 생각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되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당한 아픔과 처한 불안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애쓰는데, 실은 근본적인 태도에 있어서는 그들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로 그 구원을 외부에서 얻으려고만 하지 자신이 변화하여 자기 쪽에서 먼저 구원을 주는 존재가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루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노와 함께 있으려 하는 것은 그녀가 루 자신과 너무 닮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루는 노에게 엄마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한 자신을 투사한다. 노에게서 루는 세상과 잘 섞일 수 없고, 어디서든 관심과 사랑을 얻지 못하는 바로 자신의 모습을 본것이다. 따라서 루의 노에 대한 애정은 나르시즘(narcissism적이라 할 만하다. 뤼카에 대한 애정도 근본적인 면에 있어서는 마찬가지다. 노가 자신이 거할 수 있는 집을 찾듯이, 루는 자신이 믿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 모두 한결같이 외부의 것을 통해 자신을 구원하려 한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그녀들의 부모가 잘 보여준 바 있다. 노의 엄마도, 루의 엄마도 노와 루만큼이나 스스로 변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바깥 세계가 먼저 변하여 자신에게 구원이 빛이 비쳐오길 원했다. 그래서 정작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 바로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밀어내기만 했다. 뤼카 엄마도 뤼카와 새 남자 친구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뤼카를 집에 홀로 내버려 둔다. 노의 엄마가, 루의 엄마가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스스로 변하려는 노력을 조금이나마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노와 루가 겪었던 삶의 고통도 많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알고보면 노가 실패했던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 역시 자신이 먼저 변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노가 루의 가족을 온전히 믿고 그들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다면 그녀가 루의 집을 떠나게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타인을 믿기 보다, 세상 앞에서 몹시 왜소한 자신의 존재만 부각해서 되새겼다. 루의 집에서 너무나 조심스러워진 그녀의 말투와 행동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게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고 불결한 존재인지라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어렵다는 사실만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모처럼 다가온 사랑의 손길마저 제 쪽에서 먼저 걷어찬 결과만 만들고 만 것이다. 노의 엄마와 루의 엄마가 자신의 비극과 아픔에만 골몰한 나머지 그만 자신과 닮은 꼴의 비극만 양산해 버린 것과 똑같이.


 이로써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평안히 거할 수 있는 진정한 집은 바깥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먼저 타인에 대한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내가 바라는 집은 도래하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으로 충만한 집에 머무르길 원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있는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쪽에서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줘야 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이 그토록 찾는 구원은 저 바깥에서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중국 작가 노신의 말마따나, 원래 어딘가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먼저 걸어 나갔기에 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비강은 루의 삶에서 노를 홀연히 사라지게 했을 것이다. 루가 다른 누구에 기대서가 아니라 스스로 온전한 주체가 되어 혼자 힘으로 세상 앞에 우뚝 설 수 있도록 말이다.



 루는 IQ 160의 천재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는 자신의 존재감은 160g도 안된다. 그녀는 계속 자신을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여긴다.


 난 말이다. 성장할 수 없다. 모습을 바꿀 수도 없다. 난 너무 작다. 아주 작은 모습 그대로다. 어쩌면 모두들 모르는 척하는 이 비밀을 내가 알고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작은지에 대한 비밀을 내가 알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p. 111)


 그런 면에서 루는 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렇게 왜소한 자신 앞에 세계는 너무나 거대하다. 감히 앞으로 나서는 것조차 두렵다. 루는 지식에 대한 끝없는 갈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거대한 세계에 맞서는 자신만의 방법이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온갖 정보를 모으며 분류하고 체계화 한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불가해하여 두렵기만한 세계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렇게 하면 좀 더 당당해지고 편해질 줄 알았다. 세상과 좀 더 잘 섞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알면 알수록 더 모르게 되고 더 소심하게 된다. 키스조차 혀를 먼저 어느 방향으로 돌려야 할지 알지 못해 그녀는 사랑 앞에서 뒷걸음질친다. 루는 자신이 이렇게 되길 원했다.


 난 말이다. 오히려 내가 다른 곳에 있으면 좋겠다. 쭉 뻗은 직선을 따라서 세상들이 서로 소통하고 서로 겹치는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 윤곽선들이 서로 투과되는 곳, 삶이 아무 단절 없이 쭉 이어지는 곳, 만사가 불현듯 이유없이 멈춰버리지 않는 곳, 중요한 순간들이 닥칠 때에는 사용설명서도 딸려서 나오는 곳으로.(p. 86 ~ 87)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집요하게 추구한 지식들은 그것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소통은 자주 단절되었고, 윤곽선들은 투과되지 못했다. 바깥의 지식을 집적하기만 했을뿐, 그것이 자신의 변화로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이 아니라, 있는 그 자리에서 변화를 만들어내야 했다. 키스를 할 때 혀를 먼저 어느 방향으로 돌려야 하는지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면 된다. 이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문장처럼.


 그 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품었던 허다한 질문들 중에서, 키스 할 때 혀를 돌리는 방법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p. 300)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신이 먼저 타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는 것. 그것이야 말로 루, '자신에게 빠져 있는 것'(p. 87)이었다. 그리고 그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바로 자신을 허무는 작업이었다. 노를 처음 만날 때도 그랬고, 뤼카를 처음 만날 때도 그랬다. 언제나 루가 아니라 노와 뤼카가 먼저 루에게 다가왔었다. 그래서 결말에 가서 사랑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사랑은 지식으로 습득될 수 없다. 그것은 수영과 똑같이 자신의 전부를 오롯이 내던지고, 그 과정을 몸소 겪어봐야 비로소 알 수 있다. 그렇게 사랑은 오랜 과정에 걸쳐 경험과 성찰 속에서 천천히 여물어 가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사랑은 그러면서 자신을 덜어내고 허물며 희생하는 행위를 동반한다. 사랑은 온전히 타인 중심이 될 때 완성된다. 사랑이 여정이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먼저 내려놓는다는 의미에서 이야말로 사랑의 비유로 합당할지 모른다. 길은 어딘가로 다가가기 위한 여정이고, 무엇보다 내가 먼저 움직여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러고 보면, 사실 길과 집의 구분은 별 쓸모가 있을 것 같지 않다. 어디든 사랑이 있으면 길은 집이 될 수 있고, 또 사랑이 없으면 어떤 집이든 길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이 키스를 통해 루와 뤼카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수많은 집을 전전해 왔으나 어디든 자신의 진정한 집을 찾을 수 없었다.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진정한 집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자신들의 사랑으로. 그런데 그 사랑의 확인은 길 위에서 이뤄진다. 이런 연출로 우리는 보다 분명히 확인하게 된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집이냐, 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지금 자리잡은 것이 사랑이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읽으면서 노와 루의 이야기에 많이 공감했다. 내 처지도 툭 까놓고 곰곰이 따져 보면 그녀들과 별로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에 나오는 루의 엄마 말대로, '인생은 원래 부당하고, 여기에 덧붙일 말은 하나도 없다'(p. 117)고 단정하며 살았다. 그래서 그 엄마와 똑같이 이런 삶을 가져다 준 뭔가를 원망하고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은 너무나 많고,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p. 93)이라며 무기력하게 많은 날들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문제는 내가 오로지 내 바깥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루처럼 진정 뭔가 빠져 있는 것은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더 불안했고, 더 두려웠으며 또한 더 무기력했다는 것을. 지금부터라도 결여 되었던 그것을 채워나가려 한다. 누구에게서 온기를 얻으려 하기 보다 내가 먼저 그의 온기가 되어주는, 차마 입 밖에 내뱉기 부끄럽지만 그래도, 사랑이라는 것을.


- 인용한 사진들은 모두 영화 속 장면이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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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틈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지넷 윈터슨 지음, 허진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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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유가족 인터뷰들 중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한 아버지의 것이었다. 그는 세월호가 침몰할 때, 살아있는 아들과 통화할 수 있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말하는 아들에게 그가 한 말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시키는 대로 잘 따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참사 뒤, 계속 마라톤에 참석했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을 벌주기 위해서였다. "그 때, 빨리 피하라고 말만 했어도 아들은 살 수 있었을텐데. 제가 그랬어요. 시키는 대로 따르라고. 그렇게 말한 절 용서할 수가 없어요." 마라톤 현장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울면서 뒷 말을 반복했다.



 이 아버지가 생각났던 것은, 우리들에겐 이미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라는 소설로 잘 알려진 지넷 윈터슨의 '시간의 틈'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와 그의 남편 레너드 울프가 1917년 설립한 영국 호가스 출판사에서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기념하여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바로 세계의 유명한 작가들에게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각색하여 쓰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호가스 셰익스피어 프로젝트'로, 이 계획에 따라 벌써 집필이 결정된 작가만 해도 그 면면이 꽤나 화려한데, '영국 남자의 문제'로 맨 부커상을 탄 하워드 제이컵슨, '시녀 이야기'로 SF계의 전설이 된 '매거릿 애트우드', '진주 귀걸이 소녀'의 트레이시 슈발리에, '우연한 여행자'의 앤 타일러, 그 뿐 아니라 스릴러 팬이라면 더욱 눈이 커질, 요 네스뵈와 길리언 플린까지 여기에 포진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요 네스뵈와 길리언 플린의 셰익스피어가 가장 기대되는데, 지넷 윈터슨의 '시간의 틈'은 바로 그 프로젝트'의 시작을 여는 작품이다.



 셰익스피어 말년의 로맨스 '겨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 소설엔 세 명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리오 그리고 지노다. 지넷 윈터스는 소설 마지막에서 셰익스피어에게 있어 결말은 세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한다. 바로 '복수. 비극. 용서(p. 395)'다. 공교롭게도, '시간의 틈'에 나오는 세 아버지가 다 여기에 해당된다. 복수는 리오, 비극은 지노 그리고 용서는 셉인 것이다.


 그런데 이 모두가 실은 다 과거에 대한 반작용이다.


 일단 리오는 아주 어릴 때, 어머니에게서 버림 받은 과거가 있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맞이한 세계의 붕괴였고, 너무나 갑작스러운 것이었기에 어른이 된 지금도 그 사태를 납득하지 못한다. 그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이별, 상실을 두려워한다. 어릴 때, 지노와 연인이 됨으로써 그의 세계는 안정을 찾은 듯 보였으나 자전거 경주를 하다 뜻하지 않게 지노가 절벽 아래로 추락하자 그의 세계는 다시 불안 속에 빠져 든다. 때문에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정, 사랑 같은 추상적 가치를 믿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에 예고 없는 불행으로부터 확실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돈과 지위만 쫓는다. 내 영역이 어디이고, 잘 지켜지고 있나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래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과거의 상처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힌다. 그런 그가 꿈꾸는 것은 단 하나다. 리처드 도너의 영화 '슈퍼맨'의 마지막 장면. 거기서 슈퍼맨은 이미 죽어버린 로이스 레인을 살리기 위해 빛의 속도를 초월하여 지구를 거꾸로 돈다. 현재의 상실을 없던 것으로 하기 위하여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슈퍼맨은 다시 찾은 과거에서 로이스 레인을 살린다. 리오도 그것을 원한다. 상실의 시간으로 돌아가 상실을 소거할 수 있게 되기를. 인터뷰의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 얼른 달아나라고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리오는 계속 그 상처를 짊어지고 가야 한다.


 어떤 여자가 말하고 있었다. "항상 겨울이 떠나지 않고 폭풍이 몰아치는 황량한 산꼭대기에서 벌거벗은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천 번을 무릎 꿇고 만 년을 살아도 신들의 눈길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p. 342)


 그에게 남은 것은 다시 또 그것을 겪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뿐이다. 그러나 비극은 예고가 없다.


 과거란 던지면 폭발하는 수류탄이다.(p. 365)


 그래서 그는 버림받기 전에 버린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했던가? 그는 있지도 않은 지노와 아내 미미의 불륜을 의심하고 고집하여,  지노를 죽이려들고 이제 막 태어난 딸 퍼디타마저 버린다.


 지노 역시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는 추락을 경험했다. 어릴 때 리오 때문에 절벽에서 추락한 것이다. 죽을 뻔한 일이었는데도, 그것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그 역시 리오와 똑같이 그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지노는 리오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두려움에 대응했다. 리오는 자신의 성채를 보다 더 크고 단단하게 구축하는 것으로 두려움에 대응했지만, 지노는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포기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는 자신의 영역을 없앴다.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누구든 품었고 자신의 말과 이익을 고집하기 보다는 타인의 말을 더 많이 듣고 타인을 배려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을 씻어주진 못했다. 그의 납득이 낳은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절벽에서의 추락이 있었던 과거를 납득할 수 없었다. 거기서 그가 절실하게 경험한 것은 인간 이란 존재의 너무도 연약한 삶이었다. 잠자리 날개만큼이나 바스라지기 쉬운 삶. 지노는 무엇을 해도 그 삶에서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왜 구태여 나의 성채를 쌓을 것인가? 어차피 추락은 필연적인데. 지노는 원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는 미미가 말해준 프랑스의 시인 네르발이 꾸었던 꿈의 추락 천사가 자신이라고 여긴다. 그 천사는 날개를 접은 바람에 집 사이에 추락한다. 그가 다시 날기 위해 날개를 펼치면 자신을 둘러싼 건물들이 무너질 것이다. 


 "천사가 날개를 펴고 벗어나려고 하면 건물이 무너젔을 거야. 하지만 날개를 펴지 않으면 천사가 죽겠지."

  (...)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 미미가 말했다. "주변 모든 것을 파괴해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p. 104)


 지노는 죽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무위(無爲)는 그의 신념이다.


 리오가 멕베스에 가깝다면, 지노는 햄릿에 가깝다. 자유롭기 위해 주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린 리오, 주변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기로 결심한 지노. 하지만 이런 삶을 지노 역시 납득할 수 없다. 이런 삶이라도, 이런 삶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그는 알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만든 건 항상 자리를 비우는 신이 아니라 추락자, 루시퍼 같은 인물이라는 거지. 일종의 흑천사야. 우리는 죄를 짓거나 지위를 잃는 게 아니야. 우리 잘못이 아니었지. 우리는 이렇게 태어났어. 우리가 무얼 하든 그건 결국 추락이야. 걷는 것조차 일종의 잘 통제된 추락이지. 하지만 실패와는 달라. 우리가 이걸 안다면-영지, 그러니까 안다는 거야- 고통을 견디는 게 더 쉬울 거야."

  "사랑의 고통 말이야?"

  "그것 말고 뭐가 있어? 사랑, 사랑의 결핍, 사랑의 상실. 나는 지위와 권력이-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그렇고-별개의 동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우리가 서 있는 곳, 혹은 추락이 시작되는 곳은 바로 사랑이야.(p. 108)


 그 바람을 담아 그는 열의를 다해 게임을 만든다. 게임의 제목은 '시간의 틈'. 게임에서 사람들은 세상의 존재 이유를 밝혀주는 존재를 찾아 다닌다. 그 존재는 아기다. 예수가 태어난다는 예언을 들은 헤롯왕은 나라의 모든 아기들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어쩌면 예수란 그렇게 헤롯왕에게 자식을 잃었던 부모들이 자신이 당한 비극의 이유를 찾던 끝에 태어난 존재일 지도 모른다. 비극을 당한 자는, 자신이 당한 비극의 이유를 알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그 이유를 아는 것, 그것의 납득이 그에겐 구원이나 다름없다. 인터뷰에 나온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그의 계속된 마라톤은 자학 외에도 그 이유에 대한 갈구의 몸부림일 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로, 난 '시간의 틈'을 읽으면서 그 아버지를 떠올렸던 것 같다.


 리오와 지노, 그들 모두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리오는 욕망으로, 지노는 자학에 가까운 포기로 과거를 잠시 봉인해두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라고 다를 것인가? 리오와 지노의 모습은 과거의 상처를 지닌 자라면 누구나 닮을 수 있는 모습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그렇다면 과거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아버지 셉의 등장을 본다.


 셉은 소설에서 가장 먼저 나온다. 리오와 지노는 백인이지만, 그는 흑인이다. 그리고 병든 아내를 목졸라 죽였다. 지넷 윈터슨은 셉과 리오를 앞과 뒤로 나란히 배열한다. 둘 다 아버지고 돈독하게 지내는 아들 하나가 있다. 닮은 점 때문에 지넷이 마치 둘을 비교해 보여주는 것 같다. 셉과 리오, 둘 다 아내를 죽였다. 셉은 육신의 아내를 죽였고, 리오는 영혼의 아내를 죽였다. 미미는 리오의 만행으로 인해 결국 조각 같은 존재가 된다. 살아 숨쉬는 것은 다만 육체 뿐, 영혼은 마치 식물 인간과도 같이 어디로든 움직일 수 없다.


 폭포수처럼 사라지는 현재. 너무나 천천히 또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시간의 맹렬한 흐름. 얼마나 오래되었을까?

 그녀는 가만히 서 있지 않으려고 걷는다. 시간 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는 듯이. 과거를 원래 속한 곳에 두고 떠날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은 항상 거기, 그녀의 바로 앞에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과거는 그녀 바로 앞에 놓여 있고 매일 그녀는 그것을 향해 걸어가 부딪친다. 과거는 반대쪽에서 들어오려는 미래를 막는 문 같다.(p. 323)


 미미는 과거의 비극과 현재의 불행 사이에 단단히 끼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그렇게 셉과 리오, 둘 다 아내를 죽였으나 동기는 달랐다. 리오는 자신을 위해 죽였으나, 셉은 아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죽였다. 하지만 그조차 행여 진실은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 죽인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 그는 '슬픔이 여기에 없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뜻이라는 걸 깨닫는다(p. 36)'. 셉도 과거에 붙들려 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 죽음을 살아 낼 수 있다면 난 그렇게 할 거야."(p. 37)

 죽음을 산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으로,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은 그의 죽음도 사는 것이 된다. 그 혹은 그녀가 목숨을 바쳤던 대상을 통해 그와 더불어 삶을 영위할 테니 말이다. 부재(不在)는 무(無)가 아니다. 다만 우리의 편협한 시야가 그렇게 보게 할 뿐. 그런 아내 때문일까? 셉의 대응은 다르다. 그는 과거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상실을 사라짐이 아니라 다만 장소를 옮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에게 부재는 내재(內在) 혹은 타재(他在)다. 내재(內在)는 셉이 어머니의 자리에 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셉은 어머니가 되어(셉은 퍼디타의 양육을 위해 아내의 보험금으로 가게를 마련한다. 가게는 리오가 남긴 돈과 아내의 보험금을 정확히 절반씩 사용하여 마련했는데, 여기서 셉이 리오와의 관계에 있어, 어머니의 위치에서 퍼디타를 양육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더우기 셉은 피아노 연주자로 음악에 종사하는데, 그것인 퍼디타의 어머니인 미미의 직업과 동일하다. 이렇게 셉은 미미를 이어 받는다.), 자신의 아이가 아닌 퍼디타를 자신의 아이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아낌없이 사랑하고 양육하려 한다. 아내에게 못다한 사랑을 퍼디타에게 베푸는 것이다. 사랑이 장소를 옮긴다. 이렇게 부재(不在)는 타재(他在)가 된다. 


 리오와 셉의 대비는  셉이 가지는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셉은 리오처럼 과거를 되돌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지노처럼 '시간의 틈'을 구태여 찾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과거의 매몰도 현실 도피도 그에겐 없다. 있는 것은 다만 타인에 대한 무한 책임 뿐이다. 그래서일까? 지넷 윈스턴은 리오와 지노가 그토록 찾았던 것이 셉에겐 이미 와 있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문득 드러낸다. 셉이 아기 퍼디타를 안고 가다 어느 순간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나는 아기를 안고 길을 걷다가 어떤 시간과 다른 시간이 같은 시간이 되는 시간의 틈에 빠졌다. 내 몸이 곧게 펴지고 보폭이 넓어졌다. 나는 청년이었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했는데 갑자기 우리는 부모가 되었다.(p. 34 ~ 35)


 리오와 지노가 염원한 구원이, 자신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아이를 책임지기로 한 순간 셉에게 문득 도래하는 것이다. 


 "난 퍼디타가 내 아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리오가 말했다. "지노의 아이라고 생각했지요."

 "난 내 애가 아니라는 걸 알았지요." 셉이 말했다. "하지만 이 아이를 사랑했습니다."(p. 366)


 이로써, 우리는 알 수 있다. 마지막 아버지 셉이 바로 지넷 윈터슨이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에게 제안하는 구원의 여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소설에서 셉이 차지하는 비중은 작다. 셉이 표상하는 여정의 대부분은 미래 세대인 퍼디타에게서 구현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퍼디타가 있기 위해서는 셉이 있어야 했다. 아버지의 아집이 일으킨 비극은, 아버지의 환대로 치유되어야 했다.


 셉이 등장하는 순서는 원작 '겨울 이야기'와 다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아버지는 파멸의 원흉이자 리오의 원본인 '레온테스'다. 원작에서 세계는 붕괴로 시작한다. 그러나 지넷의 소설은 다르다. 셉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한 남자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분명 그와 연관 있어 보이는 퍼디타를 베이비박스에서 구하는 장면으로 여는 것이다. 소설의 세계는 재건으로 시작한다. 이 점을 고려하면 '물의 별'이라는 이 장의 제목이 의미심장해 보인다. 지넷 윈터슨은 혹시 이 장을 성경의 '창세기'처럼 쓴 것이 아닐까? 백인이 아니라 흑인인 신이 파멸과 죽음의 잔여라 할 수 있는 어린 생명을 구하는 이야기. 그것도 인종도 다르고, 자신과 아무런 관계마저 없는 자를.


 만일 셉의 첫 등장이 이 소설의 창세기라고 한다면, 이러한 셉의 모습은 창세기의 신과 얼마나 다른가? 창세기의 신은 순종을 원한다. 순종은 자신과 동일할 것에 대한 요구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타자가 되겠다는 표시이고, 그것이 드러난 순간, 신은 자신의 영역에서 배척한다. 조금의 배려도 없는 축출이라는 점에서 이런 신의 모습은 리오와 판박이다. 그러나 셉은 자신과 동일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신과 전혀 다른 타자라 할지라도 기꺼이 환대한다. 인종도 다르지만, 행하는 것도 다르다. 리오와 셉의 대비는 어쩌면 성경의 신과 지넷 윈터슨이 꿈꾸는 신의 대비이기도 하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된다.

 '혹시 이 소설 저변에 흐르는 이야기는 나와 다른 타자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 아닐까?'


 그 생각으로 이끌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야기 중심에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왜, 이 소설엔 각자 다른 경로를 걷는 아버지들이 등장할까? 그 의문 끝에 나는 프랑스의 한 철학자를 떠올렸다. 바로 레비나스다. 그는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존재들이 서로 고유의 가치를 가지고 대등하게 공존하지 않고 어느 하나로 융합되어 동일자가 되는 것을 무엇보다 경계했는데, 그것은 물론 유태인으로 그가 경험한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초래한 전체주의 때문이었다. 그는 '나'라는 자아조차 하나가 되어서는 안되고, 나이면서 동시에 타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나와 하나이면서도 동시에 결코 나와 같을 수 없는 영원한 타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레비나스는 가능하다고 했고, 그 증거로 아버지란 존재를 들었다.


 어떻게 나는 너 안에 흡수되지 않고, 나를 잃지 않으면서, 너라는 타자 안에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자아는, 나의 현재 속에 있는 자아가 아니면서, 다시 말해,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돌아온 자아가 아니면서, 너 안에서 나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자아는 자신에게 타자가 될 수 있는가? 아버지가 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아버지란 존재는 전적으로 타인이지만 동시에 나이기도 한 '낯선 이'인 것이다.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p. 112)


 레비나스가 아버지란 존재를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하는 이유는 자식과의 관계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아이는 자신의 분신이지만 소유할 수 없다. 소유란 동일화를 뜻한다. 아들은 자신에게서 난 존재이지만 자식은 아버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자식에게서 나이면서 내가 아닌, 타자로서 '낯선 나'를 본다. 레비나스는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구원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타자로서의 낯선 나인 자식이 내가 미처 실현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실현시키고,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처럼 '걸어보지 못한 길'을 걸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식은 지금 고정된 나라는 존재의 영역을 넘어선다. 자식에 의해 아버지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미래가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출산도, 자식도 모두 소중한 경험이요, 존재라고 생각했다. 진정한 미래가 그를 통해 도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미래란 단순히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다. 레비나스에게 미래란 타자다. 우리는 미래를 알 수가 없다. 미래는 우리의 모든 능력을 아득히 넘어선 무엇이다. 우리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바깥에 위치하는 존재가 '미래'다. 그래서 타자는 미래이고, 그 미래가 도래한다는 것은 현재에 고정된 나를 넘어서는 초월을 뜻한다. 아버지란 그 초월을 누려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바로 자식이란 미래를 통해서.


 지넷 윈터슨이 레비나스를 읽었는 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미래 세대가 과거로 붕괴된 세계를 재건한다는 생각은 레비나스와 이처럼 많이 닮아있다. 어쩌면 이것은 지넷 윈터슨이 찾아낸, 지노에게 있어 '시간의 틈'과도 같은 자기 존재의 의미일 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넷 윈터슨 또한 '입양아'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퍼디타'였다. 태어나자마자 버림 받았고 한 독실한 기독교인 가정에 입양되었다. 하지만 오순절교를 광신했던 양부모에 의해 지넷의 미래는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철저히 설계 되었다. 그녀는 그들이 원하는 것 이외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꿈꿀 수도 없었다. 지넷은 그들에게 소유되었고, 오렌지만이 과일이며 똑같이 신에게 순종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가치라고 강요받으며 자라났다. 그런 경험을 쓴 책이 바로 지넷의 첫 소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였다.


 그런 그녀에게 진정한 미래가 열린 것은 사랑 때문이었다. 교회에서 우연히 만난 한 소녀와의 사랑이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퍼디타'가 셉의 사랑을 통해 과거로 인해 모든 붕괴된 세계를 재건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이런 그녀였기에, 지넷에게 셰익스피어의 '겨울 이야기'는 각별했다. 자신과 똑같은 입양아가 나오고, 그 입양아를 통해 세계는 구원 받는다. 지넷은 '겨울 이야기'를 읽으면서 비로소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 스스로 고백 했듯, 30년이 넘도록 내내 '겨울 이야기'를 개인적인 이야기로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개작을 쓴 것은 30년이 넘도록 나에게는 이 희곡이 개인적인 글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없다면 내가 살아갈 수 없는, 글로 쓴 세상의 일부였다는 뜻이다.(p. 394)


 정녕 그 오랜 세월 동안 지넷에게 '겨울 이야기'는 지노의 '시간의 틈'이었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통해, 비극적 운명에 처해진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었다. 때문에 '시간의 틈'은 자신이 꼭 써야만 하는 이야기였고, 결국 그 모든 여정을 끝낸 지넷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비로소 자신의 과거와 그 모든 순간에 존재했던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고.


 어쩌면 그 때 나는 기억할 것이다, 역사는 스스로 반복되고 우리는 항상 추락하지만, 내 안에는 역사가 담겨 있고 내가 잠시 과거에 다녀와도 아무 흔적도 남지 않지만, 나는 알 가치가 있는 어떤 것을 알았었음을. 거칠고 존재할 것 같지 않고, 판에 박힌 모든 것을 거스르는 어떤 것을 알았었음을. 뒤집힌 배에 남아 있는 공기처럼.(p. 401)


 이렇게 지넷도 셉의 자리에 섰다. 과거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미미가 그랬던 것처럼, 과거로 꽉 막혔던 문이 열리고 미래가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넷이 독자인 우리도 자기처럼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녀 개인의 경험과 깨달음일 뿐, 일반화시킬 것은 아니라고 한다. 물론 그녀가 소설에서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가 소설의 코다를 통해 넌지시 암시받은 것일 뿐. 암시는 소설의 마지막이 다소 이상하게 끝난 것에서 다가왔다. 지넷이 소설로 그냥 끝내지 않고 자신의 고백으로 갑자기 전환시켰던 것이다. 단순히 소설로 끝났다면, 셉과 퍼디타의 여정이 그녀가 제안한 일반적인 대안이라 여겼을 테지만, 예기치 않게 지넷이 아주 개인적인 고백으로 개입하여 그렇게 보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지넷의 고백마저 셉과 퍼디타의 연장선상에 있었기에, 그 모든 것이 지넷이 찾은 개인적인 구원의 여정으로 보도록 이끌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내내 다양성의 포용과 나를 벗어나 타자로 끊임없이 지향할 것을 말해왔다. 바로 그 마음이 여기에도 투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녀의 대안이 정답처럼 복사될 지도 모르기에.


 그러나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소박한 제시 정도는 하고 있다. 그것은 유일하게 '겨울 이야기'의 이름 그대로 나오는 오톨리커스의 입을 통해 나타난다. 셉의 아들 클로를 집까지 태워주다, 오톨리커스는 오디이푸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오이디푸스도 입양아였다.


 오이디푸스는 노인이 자기 아버지인 줄 몰랐어. 입양아거든. 오이디푸스는 장차 부모를 죽이게 된다는 저주에 걸려 있었지.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부모님을 좋아했거든.(p. 208)


 그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말하면서 우회로가 좀 더 일찍 만들어졌다면 서구 문화 전체가 달라졌을 것이라 말한다. 우회로가 있었다면 오이디푸스와 그의 진짜 아버지가 서로 먼저 비켜나라고 갈등을 일으키기 전에 피해 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우회로가 바로 지넷의 소박한 제시다. 우회로가 없었기에, 오이디푸스는 지넷, 퍼디타와 같은 입양아였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붕괴 시켰고 자신마저 나락에 빠뜨렸다. 여기서 오이디푸스는 '내 때는 아직 우회로가 발명되지 않았잖아? 어쩔 수 없었다고!' 항변할 지 모른다. 하지만 오톨리커스에 따르면 우회로는 존재의 문제가 아니다. 생각의 문제고, 시야의 문제다.


 우회로는 절대로 그렇게 심오하거나 시적이지 않아. 안 그래? 내 말은, 근엄한 표정으로 저는 인생의 우회로에 다다랐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고. 아니지, 다들 갈림길이라고 한다니까.(p. 211)


 갈림길 밖에 못 보는 마음과 눈이 문제인 것이다. 살면서 우리는 자주 마치 갈림길에 선 것처럼, 양 극단에 치우친다. 이것 아니면 저것, 성공 아니면 실패, 남성 아니면 여성, 백인 아니면 흑인, 이성애자 아니면 동성애자 등등. 그리고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길은 아예 없거나 내 삶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리오가 그랬듯이, 모든 비극은 바로 거기서 파생되는 것이다. 갈림길밖에 없다는 생각, 혹은 그것밖에 보지 못하는 시야에게서.


  살인을 부른 여성 혐오도, 영국에게 브렉시트라는 자충수를 가져온 인종 혐오도 알고 보면 갈림길만 있다는 생각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러나 셉과 퍼디타 그리고 지넷 자신이 보여주듯이, 우회로는 어디든 존재한다. 이것과 저것 사이엔 수많은 길이 스펙트럼처럼 펼쳐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존재한다는 생각, 그것을 볼 수 있는 눈만 있으면 된다. 우회로는 바로 그럴 때 홀연히 등장한다. 고정된 상황과 굳어진 나에게서 벗어날 때 우회로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벗어남은 그대로 나와 나를 둘러싼 현실에 틈을 내는 것과 같다. 지노는 오해하고 있었다. 틈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었다. 퍼디타에 대한 책임을 떠 맡기로 작정했을 때, 셉이 문득 시간의 틈 사이로 들어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디든 우회로가 있다는 생각을 해라. 그것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나는 지넷의 소박한 제시라고 생각한다. 틈은 종결을 거부한다. 틈은 끝에서 오히려 시작을 열어젖힌다. 더 넓고, 다양한 세계가 그 틈으로 계속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넷이 소설의 마지막을 그렇게 처리한 것은 더없이 합당해 보인다. 제목이 '시간의 틈'이고 소설이 이런 말을 하는 이상, 이 소설에 코다는 어울리지 않으니까. 이런 세계엔 과거가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틈이 창출하는 세계에선 어디든 무한의 미래 뿐이다. 겨울의 이야기는 더이상 자리할 수 없다. 뒤집힌 배에는 언제나 에어 포켓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끝으로, 노래 하나를 첨부 한다. 바로 제니스 조플린의 '섬머 타임'이다.

 소설에서 이 노래는 꽤 의미심장하게 쓰인다. 아이에게 더이상 과거의 불행은 없고 밝은 미래만 있을 것이니 울지말라는 뜻의 이 노래는 리오로 인해 붕괴된 세계가 셉과 퍼디타에 의해 완전히 재건될  때, 마치 그것을 선언하듯 퍼디타의 목소리로 셉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집 안 가득 울려퍼진다. 아마도 이 장면을 영화로 만들면 노래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카메라가 천장에서 방안의 사람들을 담으며 천천히 이동하는 것으로 찍지 않을까 싶다. 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는데, 굳이 제니스 조플린의 것을 고른 것은 가장 좋아하는 버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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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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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화, 그는 '차이의 사유자'다. 그의 인생엔, 그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에서 허삼관이 그토록 아끼던 첫째 아들 '일락'이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되는 것과 같은, 돌연한 변화의 순간들로 가득하다. 1989년 텐안문 사건이 하루 아침에 아예 일어나지 않았던 일처럼 되는 것을 보았고, 문화대혁명 시절엔 한 통의 편지로 혁명의 영웅이 되어 전국적인 추앙까지 받던 열 두살 초등학생 황솨이가 불과 2년 뒤에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이제는 거꾸로 인민의 적이 되어 몰락하는 것도 목격했다. 자신의 아버지 조차 원래는 중국공산당의 적인 지주 가족이었으나 할아버지가 가산을 모조리 탕진하는 바람에 정말 운좋게 타도 대상에서 벗어난 '격세의 수혜자'였다. 하지만 불운한 아버지도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친구 아버지가 그랬다. 그는 위화에게 늘 웃어주던 친절하고 자상한 사람이었지만 조반파에 의해 갑자기 타도 대상으로 지목되고 온갖 괴롭힘을 당한 끝에 그만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 있었다. 그래서 위화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그런 시대에는 한 개인의 운명을 결코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정치 상황의 파도에 따라 흔들렸고 자기 앞길에 행운이 기다리고 있는지 불행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p. 124)


 그의 삶에 그렇게나 많던 돌연()은 그의 말대로 한 개인을 그저 도구로만 생각하는 전체 때문이었다. 그는 그것을 영수(領袖)'로 표현한다. 영수는 모두가 박수칠 때, 그 박수를 받으며 위에서 홀로 치하 하듯이 손을 흔드는 사람이다. 위화에게 일상생활이란 '평범하고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삼라만상을 담고'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할만큼 풍부하고 넉넉(p. 18)'한 것이지만 영수는 그 일상을 오로지 자신의 어록과 사상만 존재하는 하나로 만든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삼라만상은 고유의 목소리와 존재 가치를 잃었고 결국 자신의 운명마저 좌우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위화는 처음으로 서점에서 문학 책을 살 수 있었을 때, 서점에서 책을 살 수 있는 유표가 50 장밖에 되지 않아서 책을 살 수 없었던 51 번째의 사람에 대해 말한다. 그 사람은 겨우 한 끗 차이로 오랜 시간 기다린 것에 대한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마을에서 내내 가장 재수 없는 사람의 상징이 되어 평생 놀림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식으로 한 개인의 가치란 것이 영수에 의해 어이 없을만큼 쉽게 지워졌던 것이다.


 그래서 위화는 차이에 집중한다. 차이로 단일한 흐름에 균열을 만들고 하나의 목소리에 이질의 목소리를 집어넣어 분산시킨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바로 그의 독서였고 글쓰기였다. 그 시대엔 오로지 '마오쩌둥 선집'이라는 한 권의 책과 그 사상에 복무하는 '대자보'라는 하나의 글쓰기 유형만이 허용되었다. 하지만 위화는 시대를 거스른 독서와 글쓰기로 '차이의 사유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간다. 개인의 격렬한 감정을 담은 문학을, 설령 그것이 앞과 뒤가 잘려나간 것이고 누군가 알 수 없는 글씨로 필사한 것이라 해도 걸신 들린 듯이 읽었고 글쓰기 또한 전체에 대한 봉사 보다는 개인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내는 것을 지향했다.


 누구나 일생을 통틀어 표현하고 싶은 무수한 욕망과 감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실제 현실과 개인의 이성과 지혜가 이를 억누르고 만다. 하지만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억압된 욕망과 감정을 충분히 표출할 수 있다. 나는 글쓰기가 사람의 심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고 인생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또는 글쓰기가 사람들에게 두 갈래 인생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도 있다. 하나는 현실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허구의 길이다. 이 두 가지 길은 건강과 질병의 관계와 같아서 하나가 강대해지면 다른 하나가 필연적으로 쇠약해진다. 내 현실에서의 삶의 길이 갈수록 평범해지는 것은 허구에서의 내 삶의 길이 갈수록 풍부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p. 147)



 그러므로 그가 문학을 하게 된 것도 필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영수의 시대도 지나갔다. 어느새 문화대혁명도 이미 30년 전의 과거가 된 것이다. 그렇게 벌어진 시대의 간극만큼 같은 언어도 이제 다른 뜻을 가지거나 달리 쓰이게 되었다. 위화는 그런 언어를 10개 선정하여 그것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담고자 한다. 그 단어가 바로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 그리고 홀유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그렇게 태어난 책이다. 시대는 물론 많이 달라졌다. 함부로 이름조차 부르기 힘들었던 마오쩌둥이 희화화되어 광고 간판에 등장하고 그 때는 밤새 자지않고 기다려야 겨우 살 수 있었던 책이 현재는 지천에 널려 쉽게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폐지 값으로도 팔린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그런 외양 뿐이었다. 본질은 변한 것이 없었다. 영수는 지금도 존재했다. 바로 돈이었다. 자본 아래서, 한 개인의 가치는 그 때만큼 쉽게 지워졌다. 그 때나 지금이나 지방 권력이 휘두르는 문화대혁명식 폭력이 2006년을 기준으로 빈민으로 부를 수 있는 연 수입이 600위안 이하의 3천만 명(800위안으로 기준하면 1억 명)의 삶을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가차없이 파괴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사 줄 바나나 한 개 값이 없어서 부부가 우는 아이를 앞에 두고 자살하고, 한 초등학생 소녀는 이렇게 몸에 열이나고 아픈데도 너무나 가난하여 약 하나 사주지 못하는 부모에게 절망하여 자신이 가장 아끼는 스카프로 목을 매어 자살한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그 때는 한 개인을 벼랑으로 내모는 폭력이 보였다면, 지금은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더구나 현재의 중국은 그 때와 똑같이 이런 암흑의 현실을 묵살하고 있었다. 그 때는 모두가 평등해서 계급이란 것이 없었는데도 계급 투쟁을 강조하여 사람들의 희생을 강요했는데, 지금은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적 차별을 위장된 평등으로 은폐하면서, 풀뿌리(위화에 따르면 이 말은 비주류, 비정통 약자층의 대명사라고 한다)의 개인들이 당하는 모든 고통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 위화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의 진정한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빈곤과 기아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빈곤과 기아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p. 215)


 오직 하나의 존재, 하나의 목소리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일상의 삼라만상을 복원하듯, 한 개인을 온전한 모습 그대로 건져내기 위한 것이 위화의 문학이었다. 그것이 차이의 사유가 지닌 임무였다. 그런데 이제 그 차이의 의미에 대해 달리 생각해야했다. 그 때는 오로지 전체에 의해 너무 쉽게 좌지우지 되는 개인의 운명을 구제하기 위하여 차이에 집중했지만 이제는 그 차이가 너무도 많아졌고, 현격했기 때문이다.


 30여 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차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의 차이는 공허한 사상의 차이가 아니라 실질적인 사회적 차이다. 빈부의 차이와 도농의 차이, 각 지역의 차이, 발전의 차이, 수입의 차이, 분배의 차이 등 무수한 차이가 존재한다. 사회의 거대한 차이는 필연적으로 과격한 집단행동과 개체행동을 유발한다.(p. 204)


 그 때는 자유가 되었던 차이가 이제는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마저 자신이 처한 사회적 위치에 따라 바라는 소망이 달랐다. 부자 부모를 둔 아이는 진짜 보잉기를 원했으나, 시골의 가난한 소녀는 다만 새 운동화 하나만이라도 가졌으면 했다.


 우리는 현실과 역사의 거대한 차이 속에서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커다란 꿈의 차이 속에서 살고 있다.(p. 216)


 그러니 이제 위화가 추구하는 차이는 예전 그대로일 수 없었다. 분리가 아닌 연대를, 차별이 아닌 존중과 대화를 이끌어 내는 차이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초심으로 돌아간다. 태어날 때부터 만났던 혁명의 진실을 다시 헤아려 보는 것이다. 글의 순서에서 이런 의도가 감지된다. 앞서 인용한 아이의 꿈은 '차이'의 마지막에 나온다. 바로 뒤이은 글의 제목은 '혁명'이다. 알고보면 혁명은 가장 커다란 차이를 만드는 행위다. 모든 혁명은 전 시대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만들어내려 한다. 그 차이는 초기의 위화가 꿈꾸었던 차이와 그리 다르지 않다. 다름을 통한 고유한 개별성의 추구. 하지만 다시 회고한 결과, 그 때의 혁명이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토록 차이를 강조한 혁명이 그로 인해 오히려 쉽게 한 개인을 절망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을.


 혁명이란 무엇인가? 내 과거 기억 속의 해답은 온갖 주장들로 뒤죽박죽이었다. 혁명은 우리의 삶을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채웠다. 한 사람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어떤 사람은 순식간에 하늘을 날았고 어떤 사람은 눈깜짝할 사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회적 유대도 혁명을 따라 수시로 이어졌다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오늘까지 혁명의 전우였던 사람이 내일은 계급의 적이 될 수 있었다.(p. 252)


 이것을 통해 위화는 차이를 통한 인정이 아니라 인정을 통한 차이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타자의 존중을 바탕으로 한 개별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뒤에 나오는 '풀뿌리', '산채' 그리고 '홀유'는 이제 새로이 정립된 차이에 대한 시야로 담은 현재 중국의 모습이다. 여기서 '산채'와 '홀유'는 쉽게 말하면 가짜와 사기 보다는 덜한 거짓말을 뜻한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중국의 풀뿌리 계층은 경제권력을 재분배 받았지만 오히려 '혈두'가 그랬듯이 자신과 같은 풀뿌리 계층 사람들을 더 많이 착취 했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산채 귀족처럼 행세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참된 삶인양 '홀유'까지 했다. 특히나 사회적으로 '산채'는 중국 강자 집단에 대한 약자집단의 혁명행위처럼 되어 가짜와 진짜의 경계를 없애버렸고, '홀유'는 거짓의 정당화로 중국 사회의 윤리와 도덕성 결핍 그리고 가치관의 혼란을 가속화시켰다. 그 결과,인간 관계의 파편화는 점점 심해지고 갈등과 적대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위화의 문학은 이제 그것들을 관통해나가야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문학을 다시 정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에게 문학이란 단일한 전체에서 쉽게 떨어져 나갈 수 있는 개인을 위한 것이 되었다. 누구도 돌아다보지 않는 자들, 쉽게 잊혀져 버린 자들, 지워져 버린 자들. 목소리와 자기 존재마저 잃어버린 자들. 위화의 문학은 바로 그들 곁에 자신의 자리를 찾은 것이다. 가장 약한 자에 대한 존중과 대화를 통해, 사회가 망각하고 고의로 삭제하는 차이를 복원하는 것. 그것이 위화의 문학이 나아갈 길이었다. 나는 그것을 무엇보다 어린 시절 그가 즐겨 찾았던 영안실에서 우연히 들었던 울음소리에 대한 추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이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울음소리를 다 들었다.(…) 나는 울음소리 속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친밀함과 간절함이 담겨 있다고 느꼈다.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친밀함과 간절함이었다. 한동안 나는 이런 울음소리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노래라고 생각했다.(p. 107)


 그 울음소리는 지금 막 죽은 누군가를 위해 가족이 낸 울음 소리였고, 그렇게 세상은 들을 수 없는, 오직 위화만이 들을 수 있는 울음소리였다. 그는 그 소리를 세상에서 가장 감동적인 노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문학은 바로 그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의 소설 중 최근에 나온 '제7일'이 이런 이유로 유령의 목소리로 채워졌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런 울음의 의미를 온전히 들려주는 것. 듣는 자가 설령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언어,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이라 하여도 그 소리에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문학이 가진 신비한 힘이며 위화는 자신의 문학이 바로 그런 힘을 갖게 되길 바란다.


 만일 문학에 정말로 신비한 힘이 존재한다면 나는 아마도 이런 것이 그 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독자로 하여금 다른 시대,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언어, 다른 문화에 속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느낌을 읽을 수 있게 하는 힘 말이다.(p. 108)


 나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이렇게 읽었다. 내게 이 책은 개인의 가치가 보잘 것 없는 시대를 연이어 살았던 작가가 헌신해야 할 문학의 방향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다가왔다. 글의 마지막에 울음소리를 언급한 것은 이것이 위화 문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겐 세월호 참사를 비롯하여 많은 아픔들이 있었다. 그로 인한 울음소리를 모으면 분명 하늘을 몇 겹이나 덮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울음을 막고 호소하는 목소리마저 지워버리려 애썼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그들의 아픔을 정당화시키고 온갖 거짓으로 그들의 진심을 왜곡하여 사회적 비난마저 감수하도록 만들었다. '산채'와 '홀유'는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이다. 문학에게 사회적 책임이 있다는 말을 흔히 한다. 그 책임이란 것이 단순히 자신이 말한 내용에 책임을 진다거나 사회에 대해 뭔가 발언한다는 정도의 의미는 아닐 것이다. 아마도 진짜 의미는 사회가 쉽게 무시하고, 돌보지 않는 자들과 그들의 아픔을 시야에 담아,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위화의 이 책은 내게 문학의 진정한 사회적 책임이 뭘까 내내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리의 문학은 지금 어디로 향해야 할까 거듭 곱씹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위화의 방향이 맞는 것 같다. 쉽게 묻히고 왜곡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하고 아픈 자들의 울음소리를 온전히 듣게 하는 것이 문학이 중시해야 할 태도가 아닐까 싶다. 아니, 그렇게 해줬으면 좋겠다. 아직은 쉽사리 들을 수 없는 많은 울음소리가 위화의 이 책을 통해서라도 더 많이 흐를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정녕 그들의 울음소리가 빛보다 더 멀리 전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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