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니스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0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사랑은 냉혹하여라.

 천상에서 가없이 노니게 할 때는 언제고

 차디찬 등을 보이며 사라진 지금은

 끝도 없는 추락을 선사할 뿐이니...

 문득 사랑을 잃고 절망한 이들이

 왜 자주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지 알듯도 하다.

 지금 자신의 기분이 그와 같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겠지...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이제는 세계적인 코지 미스터리가 된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의 열 번째 소설이 나왔습니다. '아도니스의 죽음'이 그것이죠. 재작년인 2016년 11월에 이 시리즈의 첫 권을 만났을 때만 해도 세계적으로 아무리 유명한 시리즈라도 쉽게 단종되는 우리나라 출판 환경 속에서 과연 얼마나 많이 나올 수 있을까 싶었는데, 10권까지 나온 데다 책 날개를 보면 앞으로 네 권이 또 나온다고 하니 이대로라면 시리즈의 모든 작품이 나오는 것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네요. 뭐,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가 32권에 이르긴 합니다만.


 네? 맨 앞에 냉혹한 사랑 어쩌고 저쩌고는 왜 써놓았냐구요? 아, 그건 '아도니스의 죽음'을 읽어 보니 이 소설이 사랑이라는 것, 특히나 사랑이 사라졌을 때 남게 되는 것들에 대해 잘 말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흥얼거리게 되었습니다. 네, '아도니스의 사랑'은 해미시 맥베스가 그동안 보여준 것처럼 살인 미스터리가 등장합니다만 그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놀랍게도 사랑의 상실에 대한 것입니다. 시리즈를 계속 읽어보신 분들은 이 말만 듣고 '그럼, 해미시와 프리실라가 헤어지는 것이냐?'하고 물으실 지도 모르겠어요. '아도니스의 죽음'에서 해미시와 프리실라는 사실상 약혼한 사이니까요. 해미시의 오랜 짝사랑이 결국 이뤄진 것이죠. 그러나 제가 말한 상실은 이별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랑으로 인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 사랑이 사라지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만개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쓴 말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사랑의 콩깍지가 눈에서 떨어진 상태 말이죠. 지금 생각하니 사랑의 상실이라 말하지 말고 '사랑의 사라짐'이라 했어야 할 것 같네요. '아도니스의 죽음'은 그렇게 세상을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였던 사랑이 문득 사라지고 난 뒤에 찾아오는, 추운 겨울 날 이불 밖을 벗어났을 때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 서늘한 한기에 대한 소설입니다.



 시작부터 그것을 강조하지요. 해미시는 자기 집에서 일어나자마자 프리실라가 가져온 새 전기 스토브가 자신이 좋아하는 낡은 난로 스토브를 대체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난로 스토브를 정말 좋아하지만 싸움을 피하고 싶어서 프리실라가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둡니다. 하지만 속은 타들어 갑니다. 그렇지 않아도 프리실라가 약혼한 이후, 해미시를 시골 경찰이 아니라 도시 경찰의 간부로 성공시키겠다고 이래저래 자신의 삶에 잔뜩 간섭과 통제를 해오던 참이었거든요. 스코틀랜드 특유의 독립심과 로흐두 마을의 한가한 경찰로 있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는 소박함 때문에 자신의 현실을 결코 바꾸고 싶지 않은 그는 그제서야 사랑으로 보지 못했던 것을 응시하게 됩니다. 존중과 포용이 사랑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관리와 통제라는 것을 말이죠. 처음 사랑의 온도가 한창 가열되었을 때 존재 그 자체로 만족하던 그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 하고 그는 혼란스러워 합니다. 그런 그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아무 사건도 안 일어나서 영국 제도에서 가장 따분한 지역인 드림 마을에 그리스 신화 속 아도니스처럼 아주 잘생긴 피터 하인드란 남자가 찾아옵니다. 겨울만 되면 세상과 단절된 느낌만 가득해지는 그 마을에서 한동안 살겠다고 말이죠. 프리실라가 가져온 새 전기 스토브처럼 드림 마을에 사는 여인들 삶으로 끼어든 것이죠.


 그 전기 스토브가 해미시에게 사랑의 알몸을 보게 했듯, 피터 하인드란 남자도 드림 마을에 사는 여인들에게 똑같은 것을 합니다. 남자의 미모에 반한 나머지 마을 여자들은 앞다투어 그를 사랑하고 오로지 가지고 놀기 위해 거짓 사랑 놀음만 일삼는 그를 통해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의 진실을 체득하는 것이죠. 물론 그것은 공짜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참혹한 대가가 뒤따릅니다. 그건 여인만이 아니라 피터 하인드 본인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드림 마을을 평지풍파로 몰아넣은 피터 하인드가 어느날 별안간 사라진 것입니다. 작가 M.C 비턴은 피터 하인드란 아도니스를 정말로 사랑을 상징하는 존재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찾아왔던 것과 똑같이 사라진 것도 이처럼 갑작스럽게 만든 걸 보면 말이죠. 중개인에게 나타나 집까지 내놓고 간 것을 보면 마음이 변해 떠난 것 같지만 그래도 해미시는 피터 하인드로 인해 드림 마을 전체가 악의로 넘쳐났던 것을 생각해 볼 때 뭔가 사건이 생긴 것 같다고 여기고 휴가까지 바쳐가며 개인적으로 피터 하인드의 발자취를 추적합니다. 마치 어느새 사라져버린 자신이 생각했던 사랑을 뒤쫓는 것처럼 말이죠.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피터 하인드를 뒤쫓은 해미시의 개인적인 추적은 바로 불현듯 없어져 버린, 자신이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을 되찾고 싶은 열망의 표현이라고. 그러나 그 열망은 프리실라가 해미시와 도시에서 같이 살기 위해 사려고 했던 집의 가족을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산산이 부서집니다. 해미시가 곳곳에서 목격하는 것은 사랑의 완성이라 일컫는 결혼이 실은 사랑을 이루는 부드러운 살결을 다 썩어 문드러지게 하곤 오직 증오의 뼈대만을 남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소설의 마지막에서 해미시가 그런 선택을 하는 것도 당연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도니스의 죽음'은 사랑의 실패를, 사랑이 썰물처럼 쓸려버리고 난 뒤 해변에 남은 더러운 잔해들을 바라보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그렇다고 우울하거나 재미없는 것은 아니에요.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은 어디까지나 해미시 맥베스가 가지고 있는 코지 미스터리의 재미와 매력을 한결같이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말이니까요. 그러니까 여기서 제가 하고 있는 말은  M.C 비턴이 열 번째 이야기를 왜 이렇게 썼나 하는 궁금증에 대해 나름 답변을 해 본 것이라는 거죠. 사실 해미시와 프리실라의 로맨스는 해미시 시리즈를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 준 중요한 동력원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 그것이 결실을 맺기에 이르러 과연 사랑이라는 게 뭔가란 질문을 이 소설에서 제대로 풀어보려 한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허영으로 그치지 않고, 해미시가 바랐던 것처럼 존중과 포용으로 나아가는 길을. 자기 중심의 마음과 자기 주장의 말로 가득한 사랑이 아니라 타인 중심의 마음과 타인의 말을 먼저 들어주는 것으로 충만한 사랑으로 향해가는 길을.


 물론 그 해답은 이 소설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건 다음의 이야기에서 밝혀지겠지요. 아, 얼른 읽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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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패리시 부인 미드나잇 스릴러
리브 콘스탄틴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리브 콘스탄틴의 '마지막 패리시 부인'을 읽었습니다.

 리브 콘스탄틴은 원래 필명으로 실은 린 콘스탄틴과 발레리 콘스탄틴 자매가 함께 썼다고 하네요. 얼른 사촌이 함께 썼던 '엘러리 퀸'이 생각납니다. 이야기가 워낙 재밌고 구성도 탄탄하기에 기성 작가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데뷔작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인 할머니가 들려준 옛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썼다고 하네요. 하지만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이와 비슷한 몇 작품이 머리에 떠오르게 됩니다. 한 번 열거해 볼까요? 아이라 레빈의 '죽기 전의 키스', 아가사 크리스티의 '끝없는 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많은 리플리씨' 등. 그 중 가장 많은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아이라 레빈의 것입니다. 레빈이 23세 때 썼던 이 작품은 '버드 콜리스'란 남자가 주인공 입니다. 가진 게 쥐뿔도 없는데 야심은 너무 큰 이 남자는 소시오패스이기도 해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는 대학 때 우연히 만나 도로시란 여자가 구리 재벌로 유명한 사업가 킹쉽의 딸인 것을 알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혼인을 통해 신분 상승을 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쪽으로 머리 회전이 빠른 그는 계획대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제 결혼한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만 도로시가 임신을 하고 맙니다. 혼전 임신은 엄격한 청교도인 킹쉽이 결코 용서하지 않아서 도로시와 결혼해도 원하는 돈을 전혀 얻지 못하리라 생각한 콜리스는 도로시를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합니다. 그리고 바로 둘째 언니 엘렌을 유혹할 계획을 세우죠. 이처럼 콜리스에겐 모든 인간적인 감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만 신경쓰는 야수일 뿐입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남자는 자신을 포식자로 여기니 야수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나 싶습니다.


 '마지막 패리시 부인'의 주연 중 하나인 '앰버'도 이와 같습니다. 주연 중 하나라고 말한 것은, 모두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이 각 부마다 화자를 달리하여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 소설의 주연은 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1부의 화자, '앰버'이고 다른 화자는 2부의 화자, '대프니'입니다. 3부는 1인칭 주관적인 시점으로 전개되던 1부, 2부와 다르게 3인칭 객관적인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3부는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최종장이라 그렇게 설정한 것 같네요. 아무튼 앰버와 대프니는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입니다. 앰버는 가진 것이 오로지 몸밖에 없는 존재인 반면, 대프니는 아름다운 미모에  엄청난 재산, 거기다 잘생기고 능력 좋은 남편을 비롯 귀여운 두 딸까지,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존재이죠. 앰버에게 있어 대프니는 거의 아무리 손을 뻗쳐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하지만 앰버는 그 별에 닿고자 합니다. 거기 있어야 할 사람은 대프니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여기니까요. 앰버는 그 자리로 가기 위해 일단 대프니부터 공략하기로 합니다. 콜리스가 도로시부터 공략했던 것처럼 말이죠.



 대프니는 예전에 '낭포성 섬유증'이란 병으로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습니다. 그 때 겪은 상실감이 하도 커서 지금도 여동생의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지금의 남편 잭슨과 결혼하게 된 것 결정적인 계기도 여동생과의 이별 때문이었죠. 앰버는 바로 그런 대프니의 상실감을 공략해 들어갑니다. 자기에게도 대프니와 똑같이 낭포성 섬유증이란 병으로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것을 시작으로 앰버는 대프니의 마음을 차례 차례 얻어갑니다. 사전에 대프니의 취향이나 가치관등 많은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종종 방해되는 인물도 나타나지만 그 때마다 술수와 거짓말로 능수능란하게 넘겨 버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잭슨과 단 둘이 있게 될 기회를 얻습니다. 1부는 그런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줍니다. 앰버라는 캐릭터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더욱 읽는 이의 기분을 쫄깃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더욱 쫄깃하게 만드는 전개가 펼쳐집니다. 바로 2부, '대프니' 입니다. 대프니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이 이야기에서 많은 반전들이 펼쳐지기 때문이죠.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는 게 유감이네요. 그래서 갑작스럽지만 이렇게만 말하겠습니다. 끝까지 계속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고. 거기다 결말 또한 시원, 상쾌하다고. 그 통쾌함 때문에 저는 이 글의 제목을 하마터면 '악인이여, 지옥행 특급 열차를 타라!'라고 적을 뻔 했습니다.


 '마지막 패리시 부인'은 결핍과 질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비단 앰버에게만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으로 보이는 대프니와 그녀의 남편 잭슨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결핍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만족에는 절대 평가가 없기 때문이죠. 오로지 상대 평가 입니다. 자신의 만족은 어디까지나 타인과 비교해 우월해야만 이뤄지니까요. 아무리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있더라도 자기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 만족감이 덜하거나 사라지는 게 사람입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결정되기에 인간은 늘 결핍을 느낍니다. 세상엔 자기보다 잘나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즐비하기 마련이니까요. '엄친아'란 말이 존재하듯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있듯 질투도 늘 그림자처럼 달고 살게 됩니다.

 결핍과 질투는 사이좋은 연인처럼 꼭 붙어 다니는 한 쌍과도 같습니다. 사실 결핍이 없으면 질투할 것도 없겠죠. 때로 이것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의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다잡아,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매진하게 만드니까요. 그러나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없습니다. 결핍과 질투 또한 양날의 검이죠.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죠. 현재의 자신을 늘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높은 곳에 오르고 가진 것이 많아져도 만족할 줄 모르게 됩니다. '지존무상'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말이죠. 아니, 그런 자리에 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한 바 있지요.


 "우리는 나폴레옹을 부러워한다. 그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다는 점에서 부러움을 산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알렉산더 대왕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은 '실존 인물'이 아니었던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다."


이처럼 결핍과 질투엔 끝이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씻기지 않는 갈증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죠.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도 막상 갖고 보면 얼마안가 그 뿌듯함이 쉽게 사라져 버리는 것을 살면서 몇 번이나 경험했으니까요. 갈증의 끝에 허망함이 있다는 거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결핍과 질투의 끝없은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런 의문을 당신도 가지고 있다면 이 소설을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설 속 인물 하나가 그것을 넌지시 알려주니까요.


 각설하고, 이 자매 작가 꽤나 재밌는 구석이 있습니다.

소설의 전개를 예측할 수 있는 단서를 이곳저곳에 미리 던져 놓았어요. 마치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헨젤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숲길에 조금씩 빵조각을 흘린 것처럼 말이죠. 일단 제목의 '패리시 부인'에서 '패리시'가 그러합니다. 제목의 패리시는 철자가 'PARRISH'이지만 이와 같은 발음이 나는 'PERISH'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이 참 재밌습니다. '몹시 괴롭히다', '멸망하다'란 뜻이거든요. 분명 이 'PERISH'란 단어 때문에 '패리시'란 이름을 썼을 것 같아요. 소설을 읽어보면 '패리시'가 단순한 이름만이 아닌, 중의적인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으니까요. 주연의 이름 또한 재밌습니다. '앰버'는 얼른  'AMBITIOUS'의 야심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선 아이가 유괴 되었을 때 전국적으로 경보를 내는데, 그것을 바로 '앰버 경고'라고 하죠. 그런 의미에서 '경고'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앰버'란 이름은 그 존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대프니'란 이름 또한 흥미롭습니다. 저는 '마지막 패리시 부인'이 영향 받았을 작품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영화로도 만든 바 있는 '레베카'란 소설 말입니다. 그 소설의 작가가 바로 '대프니 듀 모리에'였죠. 아마도 소설 속 '대프니'란 이름은 바로 그 작가 이름을 따온 것 같습니다. 소설 '레베카'에서 레베카는 주인공이 생각했던 존재가 전혀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거든요. 그처럼 '대프니 패리시'도 앰버가 생각하던 인물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말이죠.


 이런 것을 보노라면 이 자매가 소설의 디테일을 무척 공들여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소설의 재미를 더욱 돋궈주는군요. 앞에서 열거한 '죽기 전의 키스', '끝없는 밤' 그리고 '재능 많은 리플리씨'를 좋아하신다면 이 소설도 만나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어쩌면 자신의 결핍과 질투를 달리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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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9 2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0 1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0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쉬왕의 딸
카렌 디온느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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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상상, 한 번 해 봅니다. 지옥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지옥을 정상적인 세계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지옥에서 갑자기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된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될까요? 과거를 모조리 잊고 새로운 삶을 마냥 껴안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새롭게 가지게 된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자신이라 여기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특정한 정체성을 가집니다. 대표적으로 성별이 그러하죠. 국적이나 지역,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살아가면서 형성하는 정체성도 있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이런저런 지위를 갖거나 경험을 하게 마련이고 거기에 따라 만들어지는 특별한 가치관과 신념도 갖게 됩니다. 이것도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지요. 태어날 때 가지게 된 정체성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지게 된 것이지만 살면서 만드는 정체성은 자신의 의지로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체성이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까요? 타고난 정체성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형성한 정체성일까요? 혹시 살면서 이런 의문 가져본 적 없으신가요? 그러셨다면 지금 말하고자 하는 이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실 겁니다.

 미국 작가 카렌 디온느의 소설, '마쉬왕의 딸'은 흥미롭게도 이런 질문을 전면으로 다루고 있으니까요.




 먼저 제목인 '마쉬왕의 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마쉬왕의 딸'은 서양의 유명한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입니다. 줄거리는 대강 이러합니다. 이집트 공주가 하루는 백조로 변하는 깃털 옷을 입고 늪지대에 놀러왔다가 그만 늪을 다스리는 마쉬왕에게 납치됩니다. 그 후, 공주가 늪 아래로 끌려간 자리에 꽃봉오리 하나가 자라납니다. 그 꽃봉오리 아래엔 여자 아기가 잠들어 있습니다. 이 아기가 바로 '마쉬왕의 딸'인 것이죠. 이 아이가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그것을 본 황새는 근처 바이킹 왕비가 자식이 없어 슬퍼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거기에 갖다 줍니다. 아이는 바이킹 왕 부부에서 자라납니다. 그런데 이 아이 평범하지 않습니다. 태양이 비치는 낮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사람인데, 밤만되면 개구리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닙니다. 고운 사람의 모습일 때는 성격이 그야말로 악하며 난폭하기 그지 없고 개구리일 때는 한없이 온순하고 착한 것입니다. 마치 외면과 내면이 작정하고 서로 반대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스러운 외모는 전혀 사랑할 수 없는 성격을 가졌고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외모는 사랑을 주기에 아깝지 않은 성격을 가졌습니다. 밤낮으로 변하는 정체성의 경계 위에서 이 아이는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그 과정과 대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동화 '마쉬왕의 딸'의 주된 줄거리입니다. '마쉬왕의 딸'은 한 마디로 혼종된 정체성의 소유자입니다.


 

삽화는 마쉬왕에게 끌려가는 이집트 공주를 그린 것입니다.


 카렌 디온느의 소설 주인공 헬레나 역시 그야말로 '마쉬왕의 딸'입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십대 때 아버지에게 늪지대로 유괴되었고 자신은 그 유괴범 아버지와 피해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니까요. 그녀는 12살이 되어 거기서 빠져나올 때까지 그런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늪지대의 오두막을 세상의 전부라 여겼습니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했고 그에게 인정받으려 애썼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말이 그에겐 진리였고 그가 가르쳐 주는 것은 뭐든지 의심하지 않고 쏙쏙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사냥하는 법과 야생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만큼 헬레나에게 있어 그 세계는 지극히 정상이었습니다. 물론 바깥 사람들에겐 오로지 비정상이었겠지만 말이죠. 그러다 동화 속 '신부'와 같은 자가 나타나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어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정상으로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비정상이라 말하는 세계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타고난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이 입혀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마치 스위치를 켜고 끄듯 내재된 정체성을 쉽게 바꾸지 못합니다. 문득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던 늪지대의 삶이 그립고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현재 헬레나는 결혼하여 두 딸까지 있는 가정을 이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쉬 지워지진 않습니다. 때로 그리움이 사무치면 2 주일 정도 야생으로 홀로 가서 지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헬레나는 타고난 정체성을 버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새로 입게된 정체성에 완전히 동화하지도 못한 채 다소 어정쩡한 상태로 있습니다. 그녀는 한 마디로 경계선 상의 존재입니다. 동화 속 '마쉬왕'의 딸과 같습니다. 밤낮으로 변하는 외면과 그 외면과 상반되는 내면 속에서 커다란 갈등을 겪는 동화 속 '마쉬왕의 딸' 그대로 헬레나 역시 어디에도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으니까요. 혼종된 정체성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더이상 그런 상태를 용납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태가 닥쳐옵니다. 자신이 탈출할 때 체포된 아버지가 간수를 죽이고 감옥에서 탈출한 것입니다. 헬레나는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확신합니다. 아버지가 다가온다는 것은 과거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서서히 조여오는 과거 앞에서 헬레나는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정체성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스스로 형성한 정체성을 선택할 것인가? '마쉬왕의 딸'은 이런 심리적인 갈등이 생생하게 재현된 드라마입니다. 그 생생함의 정도를 아버지와 같이 살던 과거와 홀로 삶을 꾸리고 있는 현재로 이야기를 서로 교차하며 전개시키는 것으로 한껏 높이고 있죠. 상이한 정체성 사이의 갈등이란 테마로 읽으면 정말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작품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시의적절한 면이 있습니다.

 지금의 세계란 얼른 미국의 트럼프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타고난 정체성을 한없이 강조하는 시대이니까요. 타고난 정체성에 관대했던 유럽 연합조차 시리아 난민 사태를 맞아 다시금 타고난 정체성에 집착하며 영국 민중은 아예 '브렉시트'를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혈통과 국적 그리고 성별의 원본을 중시하고 그것을 가지고 차별의 근거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자꾸만 뚜렷해지는 시대에 이 소설이 던지는 '타고난 '원본'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라는 화두는 놀랍습니다. 그렇게 반문하면서도 '타고난 정체성'에서 쉽게 자유롭게 될 수 없다는 점 또한 충실히 재현하고 있어 작가가 작품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더욱 설득력있게 들려왔구요. 오늘의 시대 흐름과 관련하여 그저 스릴러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작품입니다.


 특히나 페미니즘과 관련해선 더욱 그렇습니다. 헬레나의 과거 세계는 그야말로 아버지가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사물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삶의 방식 전부를 오로지 아버지 혼자 결정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일은 사실 신이 한다고 여겨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그 아버지란 지금 가부장제를 떠받치고 있는 기독교처럼 남성중심문화의 상징으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 그것이 여성 자신의 주체성을 자각하는 것으로 실현된다는 것에서 이 소설을 페미니즘으로 읽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여기서 그려지는 여성의 모습이 남성중심문화가 마녀로 치부하여 배제하려 했던 모습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네요.


 생각해 보면, 동화 '마쉬왕의 딸'은 무엇보다 같은 작가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와 대비되는 작품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타고난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쉬왕의 딸'은 살면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실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하고 있지요. 같은 작가가 쓴 이 두 동화는 그래서 모순의 관계에 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1843년, 그러니까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이 전체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한창 민족주의를 형성해 가던 무렵에 나왔습니다. 시대의 흐름은 타고난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었고 '미운 오리 새끼'는 그것을 투명하게 반영한 것이지요. '마쉬왕의 딸은 그보다 15년 후인 1858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아마도 '마쉬왕의 딸'이 '미운 오리 새끼'와 완전 다른 얘기가 된 것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바로 1848년에 파리에서 일어난 2월 혁명 입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잘 분석했듯이 계급 투쟁이었습니다. 민족주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국가 내부의 문제가 그로 인해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2월 혁명을 통해 사람들은 한 나라 안에도 계급이란 분열의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타고난 정체성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따라 그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마쉬왕의 딸'은 그것을 투명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 육체가 상이한 정체성으로 분열되어 있고 각 자의 모습이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후자의 외면과 내면의 상반은 2월 혁명 이후 지식인들이 주목하게 된 '이데올로기'를 형상화 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이데올로기는 보이는 외면과 그 안에 깃든 내면이 실은 아주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것이었죠.


 

 이 소설은 그러한 '마쉬왕의 딸'이 가진 의미에 집중하고 그것을 스릴러로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텍스트 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작가의 역량이 심상치 않음을 느낍니다. 그런 역량이 다음 작품에서 어떻게 또 발현될 지 기대 되네요. 차기작을 얼른 만나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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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2-07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느끼는 거지만 헤르메스님의 리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너무 잘 쓰셔서 내가 직접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보다 이 분 글을 보는 쪽이 훨씬 남는 게 많겠다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는 거예요......

양철나무꾼 2017-12-08 18:0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늘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말로 어찌표현해야 좋을지 몰랐거든요.
이런 글을 쓰는 분도, 이런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도 완전 멋지십니다~^^

ICE-9 2017-12-09 19:51   좋아요 0 | URL
아니, 이렇게나 과분한 칭찬의 댓글을 받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syo님, 양철나무꾼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제 주말을 정말 행복하게 만들어주셨어요^^
 
중력의 임무
할 클레멘트 지음, 안정희 옮김 / 아작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의 SF 작가  클레멘트 1952 4월부터 7월까지 '어스타운딩 사이언스 픽션' 연재한 '중력의 임무' 제게 오래도록 전설의 작품이었습니다일단 어디서 역사상 가장 좋은 SF 베스트 10 꼽을  항상 들어가는 작품이었고 그토록 공인된 걸작이라서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에 번역 소개   있지만 SF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상황  많은 관심을 받진 못하고  절판되어 이후 참으로 만나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뭐든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굉장히 유명한 작품은 실체와 만나고 싶은 갈망이 무럭무럭 생기는 법입니다저도 그랬습니다아주 오랫동안 얼마나  책을 읽게 되길 바랐는지 모릅니다그래서 다시 나온  책이 정말 반가웠습니다오랜 기다림이 결실을 맺어 전설을 확인할 기회가 드디어 제게 주어진 것이죠.




  '중력의 임무' 흔히 하드 SF 대표작으로 불립니다. SF  독특한 문학입니다. '과학'이라는 요소와 '이야기'라는 요소가 결합된 것이니까요무조건  둘이 함께 있어야 사이언스 픽션 SF 됩니다여기서 어떤 SF 과학이라는 요소를  중요하게 대하고  어떤 SF 이야기를  중요하게 대할  있습니다 , '과학'  작품의 초점을 맞추는 SF '하드 SF'라고 하고 반대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소프트 SF'라고 합니다쉽게 정리하자면 그렇습니다그러니까 '중력의 임무' '하드 SF'라는 것은 과학에  중심을 두었다는 뜻이겠죠과연  소설은 그러합니다그렇다고 이야기가 재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어쨌든 작품의 중심점을 보다 과학적인 것에 두고 있습니다.

 

  소설의 중심은 '메스클린'이라는 행성입니다태양계 너머  우주 어디엔가 있는 별입니다 행성은 참으로 독특합니다중력이 어마어마하게 크기 때문입니다극지방의 중력은 무려 지구의 거의 700 입니다 중력 때문에  별은 좁고  타원형으로 납작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54년에 나온 초판본은 이렇게 기묘한 형태의 행성 모습을 표지로 삼았습니다.

 토성처럼 고리가 있고 납작한 타원형의 별이 메스클린인 것이죠.


 이런 기묘한 모습 때문에 행여나 우주에서 만나면 시선을 떼기가 어려울  같습니다보통 사람의 몸무게가 중력의 크기입니다우리가 지구 중력의 6분의 1 달로 가면 우리 몸무게 또한 6분의 1 줄어들지요반대로 지구 보다 중력이 6배인 별로 가면 몸무게가 6배나 늘어나구요그렇게나 몸무게가 늘어나면 엄청난 비만의 몸을 가진 것처럼 아무래도 행동하는  어려울 것입니다그런데 중력이 6배도 아니고  백배나  곳이라면 어떨까요과연 생물이 살아갈  있을까요?

 

  클레멘트는 아무런 문학적 상상력 없이 오로지 천문학적 지식과 수학적인 계산만으로 '메스클린행성을 설계하고 있습니다그리고 분명하게 보여줍니다그러한 중력이 생명과 삶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말이죠.



 그림에 나와 있듯 메스클린의 중력은 위도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예로 자전축이 기울어진 이 행성에서 궤도가 지나가는 곳의 중력은 지구의 212배라고 나와 있네요.

 아래 3이라고 쓰인 곳이 바로 적도 입니다. 인류는 거기서만 있을 수 있습니다.

 


 '메스클린'에도 생물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인간과 언어 소통이 가능한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말이죠그런데 어마어마한 중력 때문에 그들은 인간과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집니다몸은 납작하고 다지류이며 중력으로부터 장기들을 보호하기 위해 두꺼운 껍질을 둘러싼 존재로 말이죠우리가 갯벌에서 흔히   있는 갑각류인 것입니다그것도 가재만큼 아주 작은.



이것이 바로 그 생물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플라이어'라고 부르는 인류는 중력이 지구의 3 밖에 안되는 적도에만 간신히 있을  있어서 행성 전체를 탐사할 수는 없습니다어쩔  없이 메스클린에 살고 있는 생명체의 도움을 빌려야 하는데그렇게 해서 '발리넌'이라고 부르는 생명체와 거래를 하게 됩니다발리넌은 '브리호'라는 배의 선장으로  배로 인류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정보를 모아 가져다 주는 대신 그들이 필요한 물품을 인류에게서 조달받는 거래인 것이죠.



 앞에 뗏목 같은 게 보이시나요? 그것이 바로 발리넌이 지휘하는 배 '브리 호' 입니다.

 배 위에는 발리넌의 지휘에 따라 열심히 일하고 있는 메스클린의 종족들이 보이네요.


 바로  브리호의 여정 '중력의 임무이야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여정을 통해 어마어마한 중력을 가진 행성의 모습을 독자에게 생생하게 경험시키죠전설의 확인인 지라 경외하는 마음으로 읽은 것도 있지만 그게 아니었어도 정말 재밌게 읽었을 겁니다무엇보다 한치의 빈틈도 없이 정교하게 설계된 행성의 묘사를 보는 것만 해도 놀라웠으니까요도대체 이런 상상  천체를 어떻게 이토록 생생하게   있을까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그런데 그럴만한 까닭이 있더군요   편에 있는 저자  클레멘트의 후기로   있었습니다그는 여기서 소설에 나와 있는 행성 묘사가 단순히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정확한 이론에 기반한 정교한 계산의 결과라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그는 정말로 있을  있는 모든 자연 조건의 변수를  생각했고 그것을 실제 자연 법칙에 따라 가능한 모습을 계산했더군요그러니 오히려 행성 묘사가 실감나지 않는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과정까지 합하여과연  책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SF 공상을 좋아하는 아이만 읽는 것이라는 편견이 있습니다하지만 '중력의 임무' SF 그런 것이 아니라 실은 아주 흥미로운 과학적 가설의 실험장이기도 하다는 것을 훌륭하게 증명했습니다그래서 더욱 SF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 권해드리고 싶네요또한 과학을 아직도 어려워하는 분들에게도 그러고 싶습니다소설과 저자의 후기를 읽으면 분명 없던 과학에 대한 흥미도 용솟음   같으니까요정말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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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스
앤디 위어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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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데뷔작 '마션'으로 단번에 가장 유명한 SF 작가 중 하나가 된 앤디 위어의 신작이 나왔습니다.

 제목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 이름인 '아르테미스'. 제목 그대로 이번엔 화성이 아니라 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마션'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마션'의 마크 와트니처럼 아무도 없는 황량한 달에서 로빈슨크루소처럼 살아남는 이야기라는 말은 아니에요. 이야기 속의 달은 이미 인류에게 개발 될대로 개발되어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살고 있기 때문이죠. 구체적인 연대가 소설에 나오지는 않습니다만, 대략 70년 후 쯤으로 추정됩니다(2080년 쯤. 앤디 위어는 한 인터뷰에서 인류가 2060년에 달에 도시를 만들기 시작할 것이라 예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인공이 마크처럼 힘들다고 하냐고요? 그건 이 달이 아무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철저하게 가진 돈에 따라서 생활 수준이 확연하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의 삶이 더 극단적으로 되어버린 곳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곳이 바로 '아르테미스'의 십대에다 아랍계(국적은 '사우디 아라비아'. 아버지는 용접공인데 지금 한창 메카를 향해 제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자전축까지 고려해 정확하게 기도할 방향을 잡아주는 기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여주인공 재즈가 살아가는 곳입니다.


표지 디자인은 아무래도 전에 나온 '마션'과 통일성을 주려고 한 것 같습니다.


 '아르테미스'란 달에 만들어진 최초이자 유일한 도시의 이름입니다. 다섯 개의 반구로 된 돔으로 형성된 도시인데 그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가지요. 그 도시는 가지고 있는 돈에 따라 엄격하게 위계적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여기에 대해서 앤디 위어는 달 이주와 거주가 국가 주도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요즘 한창 떠오르는 민간 우주산업처럼 상업적인 이익을 바라는 기업 주도로 이뤄질 것이기 때문에 그 결과로 달에 만들어진 도시 사회는 자본 중심으로 가게 될 거라 말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재즈는 가장 밑바닥 계층으로 흙수저 중에서도 발로 밟아 짓이기까지 한 흙수저라 할 수 있습니다. 흙수저들이 그나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사다리라고 할 만한  길드조차 들어가지 못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부자들이 원하는 밀수나 중개해 가면서 근근히 먹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이러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 오늘만 바라보고 살고 있으니 '마션'의 마크와 별 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생존률이 희박한 무인도는 저 바다 건너편에만 있지 않습니다. 내일 살아남을 길이 막막한 곳이라면 어디나 무인도입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세상이라면 그런 무인도를 가급적 줄여줘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세상도, 이야기 속의 아르테미스도 그런 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어떻게 하면 더 많이 가질까 하는 것에만 골몰할 뿐.


'아르테미스'의 모습입니다.


 어쨌든 재즈는 늘 자신에게 밀수를 의뢰하는 최우수 고객이자 '아르테미스'의 최상위 부유층 트론이 한 가지 제안을 받습니다. 자신이 알루미늄 사업에 진출하려 하는데 기존 기업이 도시에 산소를 공급하는 대가로 전기를 공짜로 무한정 쓰고 있어 경쟁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산소 공급을 중단시키기 위해 알루미늄을 채취하는 기계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는데 그 일을 재즈가 해줬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불법적인 일을 하다 걸리면 지구로 바로 추방되기 때문에 하지 않으려 했지만 평생의 목표인 4만 슬러그(달에서 통용되는 화폐 단위입니다. 이 돈으로 어느 정도의 무게를 지구에서 달로 가져올 수 있는 지를 나타낸다고 합니다.)를 훨씬 뛰어넘는 백만 슬러그를 준다고 하니 돈 없어서 쩔쩔매는 재즈는 결국 수락하고 맙니다.


 이렇게 '마션'이 서바이벌에 치중하고 있다면, '아르테미스'는 케이퍼 장르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케이퍼 장르가 대부분 그렇듯이, 사건이 결코 훔치고 망가뜨리는 것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죠. 보통은 주인공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거대한 음모와 연결되기 마련입니다. 물론 '아르테미스'도 그러합니다. 제의 받은 것을 완전하게 완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약속한 돈을 받기 위해 의뢰한 트론을 찾아갔는데, 거기서 그만 재즈는 트론이 무참하게 살해된 것을 본 것입니다. 재즈는 그렇게 받아야 할 돈을 날린데다 수확기를 부순 것이 자신이라는 걸 눈치챈 경찰에게서 추적까지 받게 됩니다. 10년간 고군분투 하면서 간신히 지탱하면서 쌓아올라왔던 자신의 삶이 하루 아침에 깡그리 붕괴될 지도 모를 위기에 봉착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알고 보니 트론은 암살된 것이었고 그것도 재즈가 했던 일 때문에 죽은 것이었습니다.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그 살의는 재즈를 향합니다. 지구 중력의 6분의 1 밖에 안되어 누구나 지구보다 가볍게 살 수 있는 그 곳에서 오히려 지구보다 60배 무거운 중력의 삶을 혼자서 버텨가야 하는 재즈는 과연 이 위기를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요? 마크가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듯이.


 재밌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앤디 위어의 소설적인 재미는 이야기보다 행성이 가진 아주 현실적인 자연 조건과 실제하는 온갖 물리법칙과 과학적인 지식이나 기술들이 하나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융합되는지 지켜보는 데 있는 것이 더 크죠. SF의 매력이란 바로 그런 것이죠. 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면에서 이 작품, '아르테미스'는 그런 재미를 충분히 느끼게 해주었다고 말하고 싶네요. 물론 '마션'만큼은 아니었습니다만. 뭐, 이야기 자체가 '마션'과 완전히 다른 방향이라 그런 건 감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나마 하드SF 적인 면모를 놓치지 않기 위하여 저는 작가가 재즈에게 도시를 벗어나 화성처럼 황량한 달의 벌판에서 활약할 기회를 주는 케이퍼 장르를 취한 게 아닐까 생각되네요. 아무래도 하드SF의 특성인 아주 현실적인 자연 조건과 물리 법칙을 리얼하게 구현하고 그것을 이야기 속에 무리없이 섞어 놓으려면 케이퍼 장르처럼 무언가를 노리고 덤벼드는 것만큼 좋은 것도 또 없으니까요. '미션 임파서블'이나 '오션스 일레븐'처럼 말이죠. 이 작품을 읽다가 문득 생각했는데, 앤디 위어는 아무래도 주어진 조건 속에서 그 조건의 제약을 최대한 받으면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듯 합니다. '마션'도, '아르테미스'도 결국은 그런 이야기이니까요. 그래서 지금 앤디 위어의 이야기가 널리 환영받으며 읽히는지도 모르겠네요. 무인도로 가득한 대양처럼 세계 어디든 '헬조선'인 요즘이니까요. 밑바닥도 모자라 지하까지 내려가는 척박한 환경 속의 삶이지만 그래도 삶이 야박하지 않아서 뚫고 나올 구멍 하나 정도는 슬쩍 감춰놓았으니 포기하지마라는 응원일까요? 뭔가 그런 것을 느꼈습니다. 이토록 무인도가 많은 세상, 자신의 작품이라도 뗏목이 되어서 그걸 줄여주고 싶다는. 네, 너무 수사적인 거 인정합니다. 요즘 제 상황이 어느 정도는 무인도의 피로를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제 말과 아무 상관없이 '아르테미스'는 앤디 위어의 전작을 좋아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즐기고 싶다면 손에 들어도 좋을 작품입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문득 '그래비티'의 스릴러 버전 스타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하찮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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