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레플리카 S & M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7
모리 히로시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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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이카와와 모에 시리즈의 일곱번 째 작품, '여름의 레플리카'는 여섯번 째 작품, '환혹의 죽음과 용도'와 한 쌍이다. '환혹의 죽음과 용도'를 처음 읽었을 때 기겁했었다. 1장에서 갑자기 3장으로 건너 뛴 것이다. '어,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누락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보지 않고 건너 뛰어 버린 앞에 있는 차례를 살펴 보았다. 그러고는 더 놀랐다. 차례엔 1, 3, 5, 7장 이렇게 홀수장만 있었던 것이다. '이거 뭐야? 이것도 트릭인가?'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싶어 서둘러 검색해 보았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트릭은 아니었다. 작가의 원래 의도였다. 같은 시간대에 서로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사건을 담으려 했던 것이었다. 즉 두 권이 한 쌍이었다. 그래서 그 절반이 되는 '환혹의 죽음과 용도'가 정확히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일부러 홀수장으로 채워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짝수장으로만 채워진 또 한 권은?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사이카와와 모에 시리즈의 일곱번째 작품, '여름의 레플리카'다.



 제목에서 이미 '환혹'과 더불어 한 쌍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레플리카'는 복제라는 뜻이니까. 제목은 '환혹'의 그 여름이 다시 한 번 반복된다는 뜻인 것이다. 사실 여름은 사이카와 모에가 사건을 가장 많이 겪는 계절이기도 하다. 작가도 그것을 의식했던 듯, 이 작품 말미에 사이카와에게 이런 말을 읊게 한다.


 "올여름도 참 힘들었어. 정말 매년 매년..."

 "예, 정신없는 여름이었네요." (p. 459)


 모에의 말대로 올여름은 정말 정신없는 여름이었을 것이다. '환혹'과 '레플리카' 별개로 벌어진 두 개의 사건을 모두 추리해야 했으니. 그러나 여기서 사이카와와 모에의 등장 분량은 다른 작품에 비해 적다. 대부분은 '환혹'에서 모에의 여고 동창이자 절친으로 오랜만에 모에와 만났다가 더 오랜만에 고향으로 내려 간다며 모에와 헤어진 뒤, 소설이 끝날 때까지 내내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던 도모에가 맡는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팔묘촌'과 비슷한 형식이라 생각하면 얼추 맞을 것 같다.


 어쨌든, 그렇게 도모에는 2년 만에 친가를 방문한다. 도모에의 아버지는 현의원으로 지방의 유력 정치인이다. 친아버지는 아니고 새아버지다. 어릴 때 엄마와 재혼했고 언니 사나에와 함께 도모에는 그의 딸이 되었다. 위로 전처가 낳은 모토키라는 오빠가 하나 있다. 그는 앞을 보진 못하지만 아주 아름다운 미소년으로 한 때 유명했던 시인이었다. 한 때라는 것은 지금은 시를 쓰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바깥 활동 자체가 아예 없다. 3년 전 여름에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에 그는 자기 방에서 갇혀있다시피 한 삶을 살고 있다. 도모에가 친가로 가는 걸 꺼려 하는 이유도 오빠 때문이다. 그런데 모처럼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다. 있는 것은 가정부와 방에 칩거한 오빠 뿐. 결국 혼자 집에서 밤을 보낸 도모에는 아침을 먹으려 내려갔다가 혼비백산할만한 일을 겪는다. 어떤 남자가 총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엄마의 수집품으로 거실 벽에 걸려 있던 가면을 쓰고서. 그는 말한다. 도모에의 가족들도 모두 납치되었으며 몸값을 받을 때까지 너도 협조해줘야겠다고.


 이 때까지만 해도 단순히 돈을 노린 납치 사건인 줄 알았는데 사건이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어 버린다. 집 금고에 있던 현금 5백만을 들고 가족들이 억류된 산장으로 갔는데, 원래 부모님과 언니를 납치했던 범인 둘이 모두 시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도모에와 같이 갔던 범인은 그것을 보자마자 쓰고 있던 가면을 내팽개치고 그대로 돈을 들고 혼자 도주해 버린다. 그렇게 가족들은 모두 무사하게 되었지만 도대체 누가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른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왜냐하면 산장에 있던 범인들이 도모에 집에 있는 범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그 때가 9시 10분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사망 추정 시각이 9시 30분 전후인 것이다. 그러므로 11시가 되어야 산장에 도착했던 도모에 집에 있던 범인은 절대 범인이 될 수 없었다. 그러면 서로 쏜 것일까? 시체에 난 탄흔이 각각 달랐으므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시체를 차 안으로 옮겼다는 게 확인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산장에 제 3의 범인이 있었던 것일까? 그것과 별도로 또 다른 일이 도모에의 집에서 벌어져 있었다. 오빠 모토키가 사라진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오빠가 스스로 3층에서 걸어 내려와 집을 나갈 수는 없으니 분명 누군가와 같이 갔거나 납치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제 3의 범인이 납치한 것일까? 아니면 모토키가 제 3의 범인인 것일까? 어느 것도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은 채, 사건의 진상도 진범도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기만 한다.


 작가 모리 히로시 스스로 이 작품을 이색적이라고 밝혔듯이, '여름의 레플리카'는 여러 면에서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다르게 보인다. 일단 트릭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사건이 계속 벌어져 이지적인 추리에 비중을 더 많이 할애할 수밖에 없었던 전작들과 달리 수수께끼 풀이의 대상인 사건은 하나로 축소된 반면 (情)적인 부분은 그것과 반비례하여 꽤 늘어났다는 점이다. 사이카와의 명쾌한 해결을 기대했던 이들에겐 이 점이 좀 아쉬운 점으로 다가올 수 있을듯 하다. 사이카와는 진정한 해결의 순간마저 모에에게 양보하고 있으니까.


 각설하고, 이 작품 역시 '환혹'과 마찬가지로 '본다는 것'을 꾸준히 천착하고 있다. 가면과 실명인 모토시가 나온 것은 그 때문이다. 특히나 가면의 의미는 '환혹'의 마술과 같다. 마술이 사람들이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시야를 일그러지게 만드는 환혹의 도구이듯, 가면 역시 그러한 것이다. 가면은 눈의 한계를 드러낸다. 보면서도 볼 수 없게 만든다. 사람의 내면이 그러하고, 기억이 그러하며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진실조차 그러하다. 내가 그렇게 가면을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진실을 보고 있다고 확신하거나 고집하게 되면 비극은 계속 레플리카 될 뿐이다. 모에의 고모 무쓰코가 한 다음과 같은 말은 그대로 이 소설이 하고자 하는 말의 집약이라 볼 수 있다.


 "잘 들어. 세상을 좀 더 넓게 봐야 해. 주변을 더 살펴봐야 해. 시간이라든가, 사회라든가, 상식이라든가. 요컨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네 시야가 참 좁다는 거야." (p. 357)


 이와 비슷한 말을 모에는 사이카와에게서도 이렇게 또 듣는다.


 "현상을 객관적으로 봤다는 이야기일 뿐이야. 그러니 그게 올바르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 난 그걸 확인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비로소 보이는 이치가 있는 법이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p. 399)


 이 주제를 인격적으로 구현한 것이 모토키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모든 것을 보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것도 외양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소설은 모에가 모토키를 처음 만난 장면에서 그것을 나타낸다. 그는 모에의 얼굴을 손으로 만지며 즉흥적으로 시를 하나 짓는다. 그 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언어로 담아낸다. 모에는 그에게 묻는다. "본다고 말씀하셨죠. 왜 본다는 단어를 쓰셨죠?" 

 그러자 모토키는 이렇게 대답한다.

 "보이니까요." (p. 25)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 정말 보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걸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결코 주관적 환영은 아니라고 말이다. 현상학은 우리가 아무리 객관적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해도 신체가 있는 이상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취지의 철학이었다. 현상학자들 중에서 특히 본다는 것에 천착했던 메를로 퐁티는 보이는 것은 사실 보이지 않는 것들로 인해 거꾸로 보여지는 것이라 했다. 예를 들어 램블란트의 '야경꾼' 그림의 손이 아래의 그림자 때문에 우리가 손으로 볼 수 있듯이,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주변에 있어야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말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볼 때, 그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얽힘 혹은 그 매듭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봄은 그 전체를 헤아리는 것, 혹은 그 전체에 나를 온전히 맡길 때 가능해진다. 모토키가 모에의 얼굴을 손으로 온전히 더듬어 파악하는 것 그대로. 이렇게 보자면 이 소설이 '환혹'과 짝을 이루면서 왜 하필이면 감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이유도 분명해진다. 이성은 사고 하는 대상과 거리두기를 통해 작동하지만, 감정은 거리두기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불현듯 쓰나미처럼 덮쳐와 나를 그 속에 함몰시켜 버린다.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대로 나를 완전히 내맡기는 것과 같다. 이러한 타자로의 전적인 내던짐. 그것이 감정이 하는 역할이고, 메를로 퐁티가 말했던 진정한 시야의 열림이기도 하다. 모리 히로시가 과연 이런 것까지 상정하고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접점은 꽤나 흥미로워 보이는 게 사실이다.


 아무튼, 이 소설은 꼭 '환혹'과 같이 읽어야 하며 그것도 '환혹' 다음에 읽어야 한다. 이 순서로 읽으면 분명 범인을 파악하기가 꽤나 힘들 것이다. 난 모리 히로시가 그것도 염두에 두고 썼을 것이라 본다. 순전히 억측일 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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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반윙클의 신부
이와이 슌지 지음, 박재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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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립반윙클의 신부'는 영화 감독으로 더 유명한 이와이 슌지의 소설이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들은 참 많이 봤는데, 소설은 처음이다. 결국 이 소설도 슌지의 손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소설의 언어들이 어떻게 영상으로 옮겨졌을 지 궁금하다. 일단 이야기는 22살의 한 여성이 주인공이다. 이름은 나니가와 미나미. 그녀를 단적으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선택해 본 적이 없는 사람. 그녀는 항상 남에게 조언을 구하고, 거기에 떠밀리듯 삶을 살아온 존재다. 그래서 끝내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이 기본 줄거리.




 시작부터 그랬다. 처음은 미나미가 22살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와 연애하는 것이지만, 그 연애 역시 자신이 정말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22살까지 남자 경험이 없다는 사실에 너무 초조해진 나머지 그만 SNS로 섣불리 데이트 약속을 하고 그러다 첫만남에 바로 연애까지 이어져버린 경우였다. 그녀는 사실 남자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사랑이 아니라 그저 남자가 연출하는 분위기에 편승한 것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또 다른 자아를 나타내는 SNS의 다른 계정, 클램본은 이런 말을 남긴다.


 맞선 사이트에서 남자 친구를 발견했다.

 어쩐지 너무나도 쉽게 손에 넣었다.

 인터넷 쇼핑을 하듯이 간단히 한 번의 클릭으로.

 정말 이런 식으로 남자를 만나도 되는 걸까?

 그 남자도 나를 손쉽게 손에 넣은 여자라고 생각할까? (p. 15)


 그녀의 삶은 내내 이렇다. 편승과 남들에게 조언 구하기의 무한 루프(loop)다. 파견제 교사인 그녀가 고작 교실에서 마이크로, 그것도 학생들이 요청해서 딱 한 번 수업했다는 사실로 학교에서 짤릴 때도 그랬고 결혼을 결정하는 것도 그랬다. 자신의 부모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이혼했다는 사실을 남자 친구에게 숨길 때도 그랬으며 결혼식장에 미나미가 초대할 손님이 많이 부족하자 신랑을 속이고 하객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도 그랬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다고 의심되는 상황이 되었을 때도 그랬고, 남편이 자신의 여자와 바람을 피고 있다면서 낯선 남자가 찾아왔는데 그 사실을 숨기는 것에만 급급해 결국 이혼까지 하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녀는 정말 단 한 번도 자신이 주체가 되어 닥쳐 온 상황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남에게 조언을 구하고,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의 등 뒤로 피하려고만 했었다.


 어쩌면 그녀의 연약함은 바로 우리의 연약함인 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삶의 발을 거는 어려움 앞에서 정면 승부 보다는 나 아닌 뭔가에 무임 승차 하여 넘어가기를 더 많이 바라는 편이니까. 그런 우리기에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그럴수록 더 커다란 어려움만 닥친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미나미 역시 그렇다. 등 뒤로 피하면 피할수록 그녀에게 닥쳐오는 것은 더 춥고 어두운 혹한의 칼바람 뿐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왜 제목에서 미나미를 '립반윙클의 신부'라 불렀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물론 립반윙클은 마지막에 미나미가 만나는 여배우 마시로의 SNS 닉네임이지만, 실제로 둘이 같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한 침대에 나란히 잠이 들기도 하지만, '립반윙클'이 정말 뜻하는 것은 거기에 있지 않다. 원래 '립반윙클'은 워싱턴 어빙이 쓴 단편에 나오는 인물이다. 아내의 잔소리를 피해 사냥을 떠났다가 우연히 만난 유령들의 술을 훔쳐 먹고는 20년을 자버린 사내. 그가 바로 립반윙클이다. 그는 잠으로 시간을 잃어버린 자다. 잠은 그대로 주체가 활동을 정지한 시간, 즉 주체가 주체로 있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그 잠 속에서 립반윙클의 시간은 죽은 시간이 된다. 그저 고여서 썩고 결국은 부스러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시간. 계속 흐르긴 하나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 바로 한결같이 남에게 선택을 맡겼던 미나미의 시간과 똑같다. 그래서 미나미는 '립반윙클의 신부'인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모습은 그녀를 둘러싼 두 명의 대표적인 인물들 때문에 더욱 두드러진다. 하나는 '아무로'(닉네임으로 '기동전사 건담'의 주인공의 이름인, 그 '아무로' 맞다.) 다른 하나는 마시로다. 미나미와는 반대로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한 주체로서 영위하려는 존재들이다. 아무로는 돈만 내면 어떤 일이든지 다 처리해 준다. 그 어떤 의뢰든지 피하지 않고 맡아서 해낸다는 점에서 아무로는 미나미와 너무나 대조된다. 마시로도 그러하다. 그녀는 미나미보다 훨씬 더 어둡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런 삶일지라도 남에게 의탁하지 않으며 최후의 한 순간까지 자신의 온전한 의지로 살아내려 애쓴다. 사실 미나미는 이런 존재들의 생생한 존재감 때문에 변하는 것이다.


 사실 마시로는 소설 앞부분에 미나미가 우연히 만난 대학 동창 니타도리와 연장선 상에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미나미에게 스스로 AV에 출연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는데,(스포일러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마시로는 현역 AV 배우다.) 그 때 미나미는 고백하면서 우는 그녀가 자신에게 위로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녀는 빨간 도깨비와 파란 도깨비 동화를 떠올린다. 사람과 친해지고 싶었던 빨간 도깨비들은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릴 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사람들은 오지 않고 계속 침울해져만 가는 빨간 도깨비를 위해 스스로 나쁜 짓을 하여 상대적으로 빨간 도깨비의 좋은 점을 사람들에게 알려 결국 사람들과 친해지게 만드는 이는 파란 도깨비다. 한 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마냥 수동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뤄지길 기다리는 빨간 도깨비가 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의지 않고 스스로 적극적으로 쟁취하려는 파란 도깨비가 있다. 소설에는 그렇게 빨간 도깨비와 같은 존재와 파란 도깨비 같은 존재가 등장한다. 미나미와 그녀에게 인터넷 과외를 받는 유일한 학생인 카논이 빨간 도깨비고, 아무로와 마시로 그리고 니타도리는 파란 도깨비다. 젊은 직원과 바람이 나서 이혼해 버린 미나미의 엄마도 파란 도깨비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인생의 모습을 선택하고 거기에 따르는 책임을 기꺼이 떠맡는다는 의미에서.


 이런 면에서 보자면 카논은 빨간 도깨비인 미나미의 자아를 인격화한 인물이기도 하다. 카논은 어디에도 깃들지 못하는 존재다. 오직 화상으로 만나는 미나미만이 그녀를 자신의 바깥 세계와 이어주는 유일한 접점이다. 그런 카논은 미나미가 시키는 것을 묵묵히 하며, 모르는 것은 늘 미나미에게 질문한다.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모르는 것을 스스로 찾아 볼 생각을 않는다는 점에서 카논은 미나미의 판박이다. 더구나 그녀는 소설 끝까지 작은 화상 안에서만 존재한다. 마치 미나미 의식의 크기와도 같이. 사실은 미나미가 그 화상을 통해 자신의 자아와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미나미가 진정한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살아보기로 결단한 순간, 카논 역시 도쿄로 가보고 싶어한다는 것은 더욱 카논을 미나미의 자아로 보도록 만든다.


 과연 어떤 도깨비가 되는 것이 더 좋은 일일까?

 그것은 소설을 읽으면 자연히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혹시 파란 도깨비가 더 좋아서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 여기 마시로가 소설에서 직접 밝힌 팁을 공개하려 한다. 읽다보면 왠지 울컥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개인적으로.


 "나 따위를 위해서. 그 점원이 부지런히 봉투에 물건을 담아 준다고. 이런 쓰레기 같은 나를 위해서.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꽉 조여 오면서 괴로워져서 울고 싶어져. 나에게는 행복의 한계가 있어. 더 이상은 무리다 싶은 한계가 그 누구보다 더 빨리 찾아와. 그 한계가 개미보다 작아. 이 세상은 사실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 모든 사람들이 잘 대해 주거든. 택배 아저씨는 내가 부탁한 곳까지 무거운 짐을 날라 주지. 비 오는 날에는 모르는 사람이 우산을 준 적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쉽게 행복해지면 나는 부서져 버려. 그래서 차라리 돈을 내고 사는 게 편해. 돈은 분명히 그런 걸 위해 존재할 거야. 사람들의 진심이나 친절함 등이 너무 또렷이 보이면 사람들은 너무 고맙고 또 고마워서 다들 부서지고 말 걸? 그래서 모두 돈으로 대신하며 그런 걸 보지 않은 척하는 거야. (p. 266)


 이게 어째서 팁이야? 하고 묻는다면 너무 무책임한 것 같지만 그래도 직접 읽어보면 알게 되리라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특히 엄마의 바람으로 너무나 쉽게 붕괴되어버리는 미나미의 가족과 그녀가 하객 아르바이트로 일원이 된 한 신랑의 가짜 가족이 보여주는 차이를 생각한다면 더욱 잘 느껴지지 않을까 한다.


 대가로 지불하는 돈은 정말로 타인의 기대에 아낌없이 부응하려는 그들의 친절과 노력이 그러지 못하는 내게 너무나 부끄러움으로 다가와 그런 나를 방어하기 위해 '그저 그들은 돈을 위해 저러는 것 뿐이야'로 쉽게 무마해 보려는 저의의 표현일 지도 모른다. 정녕 내가 부서질 지라도 그들의 친절과 노력에 순수하게 감사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물론 대가도 제대로 지불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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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6-10-15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빨간 도깨비와 파란 도깨비 이야기 봤어요 빨간 도깨비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만 사람들은 빨간 도깨비를 무서워해요 파란 도깨비는 친구가 사람과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빨간 도깨비한테 자신이 사람을 괴롭히는 척할 때 자신을 멀리 쫓아내는 척하라고 하죠 그 일이 있은 뒤 빨간 도깨비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요 하지만 파란 도깨비는 멀리 떠나요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과 친구 하나와 친하게 지내기, 빨간 도깨비는 둘에서 하나만 할 수 있다는 걸 몰랐을지도 몰라요 그걸 알았다면 파란 도깨비가 꾸민 계획을 따르지 않았을지도... 파란 도깨비는 친구가 행복하다면 괜찮다 생각한 거기도 합니다 이걸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만든 대로 살고, 누군가는 자기 뜻대로 산다고 볼 수도 있다니... 그냥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만 보고 싶기도 하네요

사람은 겉만 보고 빨간 도깨비가 무서울 거야, 했어요 그런 게 진짜 나오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겉만 보고 다른 사람이 어떻다 생각하지 않아야 하죠 그런 것도 생각할 수 있는데... 이와이 슌지가 그것을 봤을 때 한 생각이 이 책에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어떤 일을 했을 때 다음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고 하죠 그게 좋은 일일 때는 하고 싶어도 안 좋은 일일 때는 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좋은 쪽으로 흐르게 하면 안 될지... 어떻게든 그 방법을 찾아서... 둘 다인 것 같기도 해요 어딘가에 묻어가고 싶기도 하고,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한... 이건 더 안 좋은 걸까요 묻어가도 괜찮은 것과 그러지 않아야 할 것을 잘 구별한다면 좀 낫겠죠


희선
 
춤추는 조커 명탐정 오토노 준의 사건 수첩
기타야마 다케쿠니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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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락성 살인사건'으로 24회 메피스토 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작가, 기타야마 다케쿠니.

 '춤추는 조커'는 '클락성 살인사건', '인어공주'에 이어 국내에 세 번째로 소개되는 그의 작품이다. 일단 부제에 주목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춤추는 조커'의 부제는 우리나라엔 안 쓰고, 일본에만 썼는지 표지에는 없고 저작권을 표시하는 부분에 영어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THE ADVENTURE OF THE WEAKEST DETECTIVE'


 하하! 세상에서 가장 약한 탐정이라니! 과연 어떤 탐정일까 궁금해 뒷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출판사는 이렇게 눈길을 끄는 부제를 왜 채택하지 않은 것일까? 아마도 독자들이 이런 부제를 보면, '뭐야, 세상에서 가장 약한 탐정의 이야기라고? 그렇다면 굳이 읽어 볼 필요는 없겠군.' 하고 무시해 버릴까 봐 걱정된 것일까? 그런 것이 일반적 감성이라면, 이런 점에 오히려 강한 흥미를 느끼는 나는 좀 별난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 부제가 꽤 중요하다고 본다. 소설의 주인공 명탐정 오토노 준의 대체불가능한 개성을 간단명료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부제가 '셜록 홈즈의 모험'이라는 홈즈의 실제 소설 제목을 패러디하고 있으므로 셜록과 비교해 본다면 오토노 준, 그는 명석한 추리를 제외하고는 셜록과 정반대인 사람이다. 대놓고 왓슨을 '원숭이 머리'라 타박하며 아무리 의뢰인이 눈물로 호소해도 자신의 지적 흥미를 자극할만큼 난해한 수수께끼가 아니면 무시하는, 그야말로 오만과 독선의 결정체라 할 만한 셜록과 달리 오토노 준은 오히려 자신의 지적 능력이 수수께끼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 두려워 하고 성격도 무지 소심해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다.


  "이, 이 사건은... 제가 반드시...

   해, 해결..... 하..... 할지도 모르겠어요...."(p. 26)


 사건을 해결해도 자신이 가진 능력 상 당연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셜록과 다르게 그저 운이 좋아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준은 유명세가 싫어서 해결의 공적마저 공식적으론 경찰에게 다 돌려 버린다.(이와 비슷한 남자를 최근에 보았는데, M.C 비턴의 해매시 멕베스다. 그도 언제나 자신이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하지만, 그것이 상부에 알려져 자신이 좋아하는 작은 시골 마을의 경찰서를 떠나게 될까 봐 재수 없는 중앙 경찰 상사에게 공적을 돌려 버린다. 유명세가 광범위한 욕망이 된 현재인지라, 그것을 거부하고 소박한 자신만의 세계에 안주하는 이들이 반갑다.) 그래서 존재감도 셜록과 극과 극이다. 방에 들어서기만 해도 좌중의 이목을 단번에 사로잡는, 그렇게 존재감 하나만은 '엄지 척!' 하게 되는 셜록과 달리 준은 사람들이 왔는지 안 왔는지 조차 잘 알지 못할 정도로 존재감이 참으로 한없이 엷다. 소설에서 화자이자 왓슨의 역할을 맡고 있는 '나'와 단 둘이 서 있으면 대부분 오토노가 아니라 '나'를 탐정으로 여긴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추리를 설명할 때조차 그는 '나'의 등 뒤에서 말하는 남자인 것이다. '아니, 이런 사람이 어떻게 탐정을 해?' 하는 의문이 자연히 들 것이다. 당연히 탐정 일을 하게 된 것도 자의가 아니었다. 준의 탐정으로서의 출중한 능력을 알아 본 '나'가 준이 한사코 싫다고 하는 데도 억지로 탐정 일을 하게 만든 것이다. 이 정도라면, 과히 'THE ADVENTURE OF THE WEAKEST DETECTIVE'라고 불러도 그리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런 준이 '나'에 떠밀려 범죄를 해결하는 이야기가 모두 다섯 편 담겨 있다. 맞다. '춤추는 조커'는 단편집이다. '클락성 살인 사건'을 읽어 본 독자라면 키타야마 다케쿠니의 트릭이 물리와 과학적 사실에 철저히 천착한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여기에 실린 다섯 편의 트릭도 마찬가지다. 범죄는 하나같이 초현실적이고 불가능의 범죄를 보여주는 것 같지만, 어느 것 하나 현실의 물리적 법칙에 어긋나거나, 뛰어넘는 것은 없다. 자신의 지혜로 오토노 준과 정정당당하게 결자웅(決雌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탐정이란 존재의 독특함과 공명정대한 승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춤추는 조커'는 한 번 즐겨볼만한 작품이다. 이야기 자체도 무겁지 않고, 살인은 있지만 잔인한 묘사는 별로 없으므로 더욱 부담없이 말이다.


 누군가는 오토노 준이 셜록과 정반대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거, 셜록을 염두에 두고 그것과 정반대의 캐릭터를 창조하려 한 거구만!'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클락성 살인 사건'을 읽어보면 작가가 꾸준히 이런 캐릭터를 만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클라성 살인사건'의 경우엔 주인공 미키와 함께 다니는 소녀, '나미'가 있다. 그녀는 미키 보다 훨씬 뛰어난 추리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존재감이 거의 '0'에 가깝다. 캐릭터가 오토노 준처럼 의기소침 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녀는 실제로 실체가 없다.(이것이 혹시 그 작품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지만, 어차피 독자는 내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나미가 어쩌면 유령이 아닐까 할 정도로 뭔가 이상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라 본다. 그래서 나미가 유령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은 소설 중반에 가서야 밝혀지지만, 지금 이야기의 전개상 필요해서 언급해 버린 것임을 양해해 주시길.) 그래서 미키와 나미의 관계는 마치 육체와 의식(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인 '게슈탈트'와 같은)의 관계로도 보인다. 


두 번째 소개된 '인어공주'도 그러하다. 나는 아직 이 소설을 읽지 못했다. 그래서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원래 '인어 공주' 자체가 존재감이 없는 존재의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인 것을 감안하면, 분명 이 소설에도 이런 캐릭터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다케쿠니는 자신의 작품마다 항상 존재감이 없는 캐릭터를 누벼왔다. 오토노 준은 그 흐름에 있는, 또 한 번의 변주인 것이다.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다케쿠니, 그는 왜 반복해서 이런 존재감이 없는 존재들을 삽입하는가? 이들의 존재는 너무나 투명해서, 마치 이들의 원조인 나미가 그랬듯이, 오로지 '생각'만 있는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SF 소설에 나오는 머리만 남아 있는 도웰 박사처럼. 그런데 다케쿠니는 이들을 둘러싼 세계는 매우 물리적으로 견고하게 구축한다. '클락성의 살인사건'의 주요 무대인 '클락성'은 창 하나 없는 건물이다. '춤추는 조커' 역시 공간의 밀실, 시간의 밀실로 이뤄져 있다. 거기다 트릭마저 그 세계의 물리적 질서를 철저히 따른다. 한 마디로 한치의 빈틈도 허락하지 않는 꽉 막힌 세계요 굳건한 세계다. 그 안에서 오토노 준과 선조들은 그저 의식만 남아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것이다. 정말 너무나 명확한 이분법적 구조가 아닐 수 없다. 단순화 시킨다면, 의식과 세계의 이분법적 구조.


 이것이 바로,  '다케쿠니 월드'를 이루는 근본 뼈대이자,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키워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저 내 생각일 뿐이지만.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의식만 남은, 유령과 같은 존재들이 범죄를 해결한다는 것이다. 세계가 너무나 꽉 막혀 있는 지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마치 그 세계에 갇혀 질식해 버린 희생자들의 호소로 보인다. 너무나 규칙적이며 견고한 세계인 지라, 그 질서에서 벗어나는 범죄가 아니고서는 그 세계가 가진 문제점이 드러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범죄는 '제발 이 감옥과 같은 세상에서 나가게 해 달라!'는 무언의 기도인 셈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클락성의 살인사건'은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수도 있고 구원을 가져올 수도 있는 무언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인데, 그것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한밤중의 열쇠'다. 마찬가지로 '춤추는 조커'의 어떤 단편들은 탈출을 위해 범죄를 저지른다.


 빠져나갈 열쇠. 이것이 바로 다케쿠니가 진정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들은 바로 그 희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염원에, 범죄로 표현된 희생자들의 간구에, 의식만 남은 탐정들이 응답한다. 그들은 상식과 과학이 절대적인 질서로 장악하고 있는 현실 세계에선 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천사라고도 할 수 있다. 천사 역시 상식과 과학 앞에선 공상의 존재, 거기에 물든 시선으론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또한 그들은 어디까지나 신의 의식을 전하는 입으로만 강림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다케쿠니의 탐정들과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천사들은 성경에서 보통 누군가의 끝없는 간구에 응답하여 내려온다. 그 정도로 헌신적인 간구는 절대적인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만한 믿음은 종종 현실 세계에서 말도 안 되게 불가능한 것을 탐하는, 그래서 어리석고 허황하다고 치부하는 것들이다. 이런 면에서, 천사의 강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의 확인인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희망이, 구원에 대한 믿음이 세상이 말하는 것만큼 불가능하거나, 어리석을 정도로 허황하지 않다는 것의 선명한 목격 말이다.


 그러므로 다케쿠니가 정말 천사를 의식하고 자신의 탐정들을 구현했다고 한다면, 여기엔 세상에 대한 절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리라는 믿음을 결코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함께 녹아들어가 있는 셈이다. 문장으로 표현하면 아마도 이렇지 않을까 싶다. '열쇠는 어딘가 반드시 있다. 나는 그것을 내 작품으로 찾아가겠다. 그것을 찾게 되는 날, 나의 탐정도 온전한 존재가 되리라.' 너무 멋을 부려 살짝 부끄럽기도 한데, 그래도 바로 이것이 다케쿠니가 탐정을 빚어내며 투영하는 마음일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이 혹한과 비참의 세계가 좀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와 다르지 않기에. 2008년에 나온 '춤추는 조커'는 내게 그가 데뷔 이래로 여전히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좀 더 선명하게 확인시켰다. 희망에 판돈을 걸고 있는 그가 다음엔 또 어떤 간구의 궤적을 그리게 될 지 궁금하다. 일단은 아직 못 본 '인어공주'와 금방 뒤따라 나온 오토노 준의 두 번째 책부터 얼른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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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3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9-23 2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악당 밀리언셀러 클럽 147
야쿠마루 가쿠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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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죄엔 반드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범죄를 처벌하는 형법은 편파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해자의 인권만 너무 보호하려 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사실 범죄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요즘엔 가해자 보다 피해자 보호에 더 중점을 두는 '피해자학'이라는 것이 각광받고 있으니까요. 사실 피해자가 특히나 살인의 경우는 가해자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오래도록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피해자학'은 그동안 형사정책이 추구해오던 범죄 예방과 범죄인 갱생 문제 보다는 피해자의 보호, 상처 치유, 삶의 복귀 문제 같은 것에 더 중점을 둡니다. '천사의 나이프'로 에도가와 란포 상을 받으면서 데뷔한 야쿠마루 가쿠는 이를테면 미스터리에서 이런 '피해자학'을 추구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범죄로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이고, 그들이 범죄가 가져온 상실로 인해 얼마나 길고도 커다란 고통을 갖고 있으며, 세상에 증오밖에 가지지 않은 그들이 또 어떻게 다시 세상과 화해하게 되는가를 소설에서 더 많이 그리고 있으니까요. '천사의 나이프'도 그랬고, 이번에 나온 '악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줄거리부터 간단하게 설명해 보죠.

 

 주인공의 이름은 사에키 슈이치. 현재 탐정입니다. 탐정이라고 해봤자, 명탐정도 아니고, 집단 강간을 행하던 범죄자를 현장에서 체포하는 와중에 그만 권총을 용의자 입안에 넣는 과잉 행동을 하는 바람에 폭력 경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경찰에서 쫓겨나 할 일도 없고 살 길도 없어, 역시 법정에서 변호사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바람에 경찰을 그만둔 고구레의 권유로 일하게 된 탐정사무소의 조사원에 불과하지만 말이죠. 그 탐정사무소도 조사원이 슈이치 하나밖에 없는 아주 영세한 규모입니다. 소장은 물론 고구레이구요. 그 밖에 온갖 사무적인 일을 도맡아 하는 육중한 몸매의 아줌마 소메야가 있습니다.


 슈이치가 그렇게 과잉 진압을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16세에 경험한 아주 커다란 상처 때문입니다. 16세 생일 날, 슈이치의 소중한 누나 유카리가 강간 살해 당했습니다. 범인들은 모두 세 명으로 다 십 대였습니다. 주범인 에노키에는 징역 10년을, 공범 데라다와 다도코로는 징역 3년에서 5년 사이의 부정기형을 받았습니다. 지금 슈이치는 서른 살. 이미 14년 전의 일이니 범인들은 모두 사회로 복귀했습니다. 이 사실이 슈이치를 미치게 합니다.


  그놈들의 현재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놈들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주체할 수 없는 격정이 솟구친다. 절대로 용서 못 한다. 설령 형무소에 들어가 죗값을 치르고 나왔을지라도, 우리들 앞에서 어리석은 행동을 저질렀다며 눈물을 흘릴지라도, 사회적으로 선량하게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p.  32)

 범죄 피해자가 가장 괴로운 순간은 가해자가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알았을 때다. 가해자가 자신이 저질렀던 범죄를 눈곱만치도 반성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다.(p. 75)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이 비단 슈이치만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범죄로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가족들은 하나같이 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슈이치가 누나를 살해한 범인들이 사회로 복귀하여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듯이, 피해자 가족들도 똑같이 궁금해하며 가해자의 현재를 조사해 달라며 의뢰해 옵니다. '악당'의 진짜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폭행하고 죽도록 방치한 사카가미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과연 그는 부모인 자신들의 용서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조사해 달라고 호소야 부부가 슈이치에게 의뢰해 온 것입니다. 소장 고구레는 이것이 가난한 사무실을 먹여살릴만한 좋은 먹거리가 된다고 생각하고 아예 범죄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가해자의 근황을 조사해 알려주는 일을 전문적으로 한다고 광고해 버립니다. 그리하여 호소야 부부와 같은 제2의, 제3의 의뢰인들이 사무실을 찾아오고, 슈이치는 계속 가해자의 오늘을 조사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의뢰자와 같은 처지인 슈이치는 조사를 하면서도 객관적으로 되기가 어렵습니다. 자꾸만 누나 유카리를, 그리고 누나의 죽음으로 자신과 가족이 받은 길고도 질긴 고통을 상기하게 됩니다. 결국 슈이치도 가해자를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렇게 소설은 의뢰를 받은 가해자의 조사와 자신이 직접 누나를 살해한 이들을  조사하는 이야기가 병행으로 전개됩니다. 이런 구성은 슈이치가 조사하는 사건이 남의 이야기이자 슈이치 자신의 이야기이도 하다는 것을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합니다. 


 난 날마다 썩어 가는 쓰바사를 바라보면서 보냈어. 시체 냄새로 가득한 집 안에서 딱딱한 생쌀을 십으며, 생쌀이 다 떨어진 뒤에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잡지를 뜯어 먹으면서 악착같이 버텼어. 그래서 질긴 목숨을 이을 수 있었지만... 동생의 울음소리와 말라비틀터져 가는 동생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기억에서 지워지질 않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애인이랑 함께 있을 때도, 동생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나를 괴롭힌다고. (p. 73)


 두 번째 이야기 '복수'에 나오는 의뢰인 쓰요시의 절규 입니다. 그에게는 세살 때, 엄마가 남자와 사귀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동생과 자신만 집에 남겨두고 문을 잠근 채로 나갔다가 2개월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아서 극심한 기아를 겪은 끝에 동생은 결국 죽고 혼자만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 과거가 있습니다.


 사실 이 사건은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을 픽션화한 것입니다. 그 사건은 일본 열도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아무도 모른다'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기도 했었죠. 사건의 피해자 쓰요시는 16년 동안 단 한 번도 그 때의 고통과 동생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헤어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식을 낳아 아버지가 되고 싶지만, 자신이 부모의 애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지라, 자기 자식도 그렇게 만들까봐 불안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을 그렇게 만든 엄마를 용서할 수 없게 되고,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가장 바라는 건 그 여자한테 복수하는 거예요. 동생을 죽이고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그 여자가 행복하게 지내다니 절대로 용서 못 해요. 자기가 저지른 죄를 잊고서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그 여자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요. 그 여자가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지거나, 어디 길거리에서 비명횡사라도 한다면 이 응어리가 조금은 풀릴지도 모르죠. 하지만...(p. 74)


 그런데 이런 마음은 슈이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역시 유카리 누나를 그렇게 무참하게 죽인 자들이 사회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살아간다는 사실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쓰요시와 똑같이 복수를 꿈꿉니다. 이렇게 슈이치가 각 에피소드마다 하게 되는 조사는 슈이치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유품'의 에피소드에 나오는 가해자 가족의 마음처럼 자신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어머니는 널 보고 싶어 했어. 마지막으로 번듯한 인간이 됐는지 확인하고 싶으셨다고. 하지만 만약에 네가 아직도 죄를 저지르고 다른 사람한테 상처를 주는 인간이라면, 그렇게 확신했다면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널 죽이려고 했겠지. 바보 같기는. 암세포가 온 몸에 퍼져 앙상해진 그 손으로는 널 죽일 수가 없는데. 하지만 15년이나 떨어져 살았어도 가족이니까. 피를 나눈 자식이니까. 임종의 순간까지 제 자식이 저질렀던 죄에 책임을 느꼈던 거라고."(p.110)


 이런 식으로 슈이치는 자신과 비슷하지만 다른 양상을 갖고 있는 사건들을 점점 더 접하고, 관계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경마장의 말처럼 증오와 복수 밖에 보지 못했던 자신의 시야를 차츰 넓혀 나갑니다. 소설이 담고 있는, 일곱 개의 서로 다른 에피소드들은 사실 슈이치가 변화해 가는, 그렇게 성장해 가는 과정입니다. 결국 슈이치는 결코 풀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증오의 속박에서 헤어나와 누군가를 다시 진심으로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작가 야쿠마루 가쿠가 원하는 것이 비단 슈이치의 성장만은 아닙니다. 실은 독자도 이 이야기에 깊숙이 참여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언론을 통해 수많은 범죄를 접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분명 초래되었을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선 정작 언론들도 깊이 있게 잘 다루지 않고 그래서  잘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갈수록 범죄나 많은 인명이 희생된 사건, 재난 등에 대해서 점점 더 무감각해지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웬만큼 많이 죽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도 힘든 세상입니다. 희생자는 단순히 수치 상의 존재로 전락하고, 그의 삶이나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 같은 것들은 고려조차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쉽게 남의 일이라 여기고 그만큼 서둘러 망각하고 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자유주의 시대의 모토란 '영원한 현재'입니다. 과거는 얼른 잊고 미래만 보고 나아가자는 것이 이 시대의 지상명령인 것이죠. 과거를 자꾸만 상기시키는 것은 촌스럽거나 옹졸한 짓이 되었고, 아무리 커다란 과거의 상처라 해도 돈이면 그저 다 완치된다는 식의 천박한 생각마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지금 사회의 일반적 경향이기에, 작가는 독자의 공감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슈이치를 매개로 하여 독자를 피해자의 삶에 깊이 끌어들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타인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나 절망에 대한 공감과 그것이 결코 나와 별개가 아니라는 생각이 결국은 타인만이 아니라 언제라도 그렇게 될 수 있는 나 자신도 구하는 길이기에 말이죠.


 스탠리 밀그램이란 유명한 미국의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복종 실험'으로 유명합니다. 그 실험을 토대로, 이제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가 된 '권위에 대한 복종'이란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밀그램의 실험은, 설령 도둑질, 살인, 폭행 등을 너무나 혐오하여 그런 짓을 절대 나쁜 짓으로 보는 내적 확신마저 갖게 된 사람이라 해도 권위자의 명령을 받으면 비교적 쉽게 얼마든지 그런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밀그램의 실험에 의하면 악당은 악당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회의 모습이 아주 평범한 남녀를 악당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폭력이 일반화되면 쉽게 폭력을 자행하는 악당이 되고, 사기와 도둑질을 범해도 제재나 비난이 따르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면 언제든 태연히 그런 짓을 저지르는 악당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보면 아주 잘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겐 범죄지만 그들에겐 비일비재하고 사소한 흠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그토록 태연하게 장관이 되겠다며 청문회 자리에 나올 수 있는 것이죠.



 이 소설의 제목은 '악당' 입니다. 소설은 이 악당의 뜻을 사카가미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악당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아. 그래서 용서라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걸 구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아. 악당은 자신이 빼앗은 만큼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도 잘 알아. 그래도 기어코 나쁜 짓을 저지르고 마는 인간, 그게 바로 악당이라는 거다.(p. 243)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나쁜 짓을 저지르는 악당이 된다고 하는 사카가미의 말은 밀그램의 결론과 유사합니다. 내가 변하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사카가미도 다시 악당이 안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맹목'의 사와무라처럼 한 번 악당이었지만 다시금 선하게 살 수 있다는 인상을 진작에 받을 수 있었다면 슈이치의 삶도 훨씬 더 빨리 편해졌을 지 모릅니다. 소설엔 이런 순간이 가득합니다. 슈이치의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순간들이. 슈이치가 변한 것도 그런 순간들 때문이었죠.


 사회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인식. 그것이 때로는 우리가, 특히나 윤리적인 측면에 있어, 어떤 행동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하게 될 그 모습은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실은 나 하나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나타난 모습이 모자이크 그림처럼 모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머랭과 같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동 하나가 사회 전체의 인상을 만들고 그것이 다시 내가 선택할 윤리적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것을 덜어줄 책임을 느끼고 실천하는 일은 결국 내게로 다시 돌아와 내가 아픔과 절망을 느낄 때 누군가 공감해주며 그 짐을 덜어주려 하는 것을 겪게 할 것입니다. 아주 순진한 낙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밀그램의 결론을 굳게 믿어보고 싶군요. 그것이 야쿠마루 가쿠가 '악당'을 통해 언젠가 도래하도록 만들고 싶은 세상의 모습이기도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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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의 감옥
우라가 가즈히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우라다 가즈히로. 처음 만나보는 일본의 미스터리 작가다. 놀랍게도 데뷔를 20살에 했다. 그것도 메피스토 상을 받아서. 역대 최연소란다. 물론 이런 사실이 작품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저렇게 어린 나이에 화려한 수상 경력까지 등에 업고서 등장했다면 아무래도 작품에 관심이 가게 된다. 더구나 그의 작품으론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장본인이 바로 '수면의 감옥'이다. 200페이지가 안되는 분량의 장편이다. 제목만으로는 내용이 얼른 짐작되지 않으실 분들이 계실 것 같다. 그 분들을 위하여 먼저 줄거리를 잠깐 소개해 본다면, 일단 소설엔 프롤로그가 있다. 거기서 이제 막 연인이 된 나와 아야코는 아야코 집에 있는 지하실로 가는 계단을 내려가다 누군가에게 떠밀려 계단에서 함께 굴러 떨어진다. 나는 다행히 별 상처를 입지 않았으나 아야코는 불행히도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서 다시는 깨어나지 못했다. 나, 우라가(주인공의 이름이 작가 이름과 같다.)는 '투명한 유리 너머에서 신생아처럼 조용히 숨을 쉬는' 아야코를 극진히 돌보지만 결국 그녀는 다른 병원으로 이송되고 그렇게 우라가와 아야코는 미처 사랑의 달콤한 맛을 알기도 전에 씁쓸함만 그득 안고서 이별 아닌 이별을 한다.

 

 그리고 5년 후. 우라가는 바라던 대로 미스터리 작가가 되어 있다. 작가가 된 과정이나 되고 난 후의 모습이 실제 우라가 가스히로와 비슷하다. 그의 영화와 음악 취향, 그리고 CD와 LP를 수집하는 취미 모두 고스란히 작중 인물인 우라가에게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현실성을 좀 더 가진다. 작가가 실제 출연하고 있는 것과 같으니까. 어쨌든, 그에겐 두 명의 친구가 있다. 하나는 요시노, 다른 하나는 기타자와. 이 둘은 우라가와 아야코에게 사고가 일어난 날, 그 집에 같이 있었다. 전날 과하게 마신 술로 우라가와 아야코에게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들은 '자고 있었다'고 경찰에게 진술했다. 즉 그들도 누가 우라가와 아야코를 계단에서 떠밀었는지 모른다. 요시노와 기타자와는 우라가와 달리 아직 사회에 뿌리를 확실히 내리지 못했다. 둘다 프리터로 일하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그런데 그들 모두에게 아야코의 오빠로 부터 연락이 온다. '아야코의 물건을 정리하려 하는데, 아야코의 유일한 친구들인 너희가 와서 도와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우라가와 요시노 그리고 기타자와는 유달리 여동생에게 헌신했던 오빠에게  아야코가 그런 사고를 당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고 해서 아야코의 집으로 간다. 오빠는 그들을 지하실로 데려간다. 사건이 있던 날, 아야코가 우라가에게 보여주려 했던 바로 그 곳이다. 놀랍게도 그 곳은 핵폭발도 피할 수 있게 만들어진 방공호였다. 우라가 일행이 방공호로 들어가자, 오빠는 재빨리 빠져나와 그들을 방공호에 가둬 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아야코를 만든 진범이 너희 가운데 있으니, 자백해라. 아니면 누구라도 알려달라. 그러면 풀어준다. 아니면 절대 거기서 나올 수 없다.'


 동시에 별개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여기서의 중심은 사에코라는 여성이다. 최근 그녀는 남자친구 히로시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것도 히로시가 자신의 친구와 눈이 맞는 바람에. 단번에 김건모의 노래 '잘못된 만남' 속 주인공이 되어버린 그녀는 히로시가 끝끝내 자신을 거부하자 복수를 하려든다. 요즘 인터넷을 통해 만난 사라코가 그러도록 부추겼다. 그녀는 자신이 고등학교 때 신이치란 친구의 집에 초대되어 갔다가 다섯 남자에게 윤간을 당했던 일을 고백하면서 사에코에게 교환 살인을 제안한다. 자신이 히로시를 죽여줄테니까 대신 사에코는 신이치를 죽여달라는 것이다. 사에코는 신이치에게 분노하는 마음도 있어 결국 수락한다. 그리고 갑자기 걸려온 친구의 전화로 히로시가 누군가에게 떠밀려 다리 하나가 부러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사라코가 움직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에코는 자신도 신이치를 죽일 준비를 한다.


 이 둘은 얼른 전혀 다른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결국엔 하나로 모인다. 과연 아야코를 그렇게 만든 범인은 누구일까? 사라코와 사에코의 교환 살인은 성공할까? 이런 궁금증으로 페이지를 넘기던 독자는 마지막에서 놀랄만한 반전을 경험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앞으로 가서 읽게 될 것이다.


 우라다 가즈히로의 '수면의 감옥'은 너무 더워서, 뇌수마저 바닥을 길 것만 같은 이런 때에 읽으면 좋을 작품이다. 일단 길이가 짧고, 두 개의 이야기가 병행하는 데다 반전도 여럿 장착되어 있지만 정작 이야기의 마당이 되는 구성 자체가 간단하여 집중력을 그다지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트릭에 익숙한 분들이라면 어쩌면 빨리 알아차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몰입을 방해하지는 않으니, 이게 또 우라가 가즈히로의 저력이랄 수 있겠다.  그러고 보니 우라가 가즈히로의 저력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장르의 재활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딱 한 작품, 그것도 겨우 23세에 쓴 작품을 가지고 저력의 정체 운운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엄청 무리한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처 감행해 본다.)


 서툰 비유를 들자면 '냉장고를 부탁해'의 미스터리 버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냉장고를 부탁해'는 타인의 냉장고에 이미 보관되어 있는 재료들을 가지고 자기 뜻대로 조리하여 하나의 음식을 만드는 것이 포인트다. 우라가도 똑같다. 장르 팬들에겐 이미 익숙한 장르의 재료들을 싹싹 가져와서는 자기 식대로 조합하여 색다른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냉장고를 부탁해'와 마찬가지로 역시나 작품의 질과 재미를 결정하는 것은 조리사의 솜씨에 달려있다. 그렇다면 우라가는 꽤 솜씨 좋은 조리사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재료들을 재활용 하기에 이야기 자체는 그리 신선하다고 할 수 없다. '수면의 감옥'도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설정인데'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주는 뒷맛이 워낙 깔끔해 신선도를 높인다. 한 입 크게 베어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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