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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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카 고타로도 아베 정부에 대해 어지간히 화가 났나 봅니다. 이런 소설을 쓴 걸 보면.

 어떤 소설이냐구요? 이번에 나온, 2015년 작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란 소설입니다. 놀랍게도 자경단인 히어로 물이에요. 표지에 점잖게 앉아 있는 인물이 바로 정의의 히어로입니다. 눈만 내 놓은 스키마스크를 쓰고 검은 라이더 복장을 입은 채 목검과 수수께끼의 작고 둥근 물체를 던지며 싸우죠(그 물체의 정체에 대해서는 함구하겠습니다. 이건 읽으면서 확인해야 하는 것이라서^^) 그것도 북한의 '5호 감시제'나 다를 바 없는 감시와 숙청이 마구 자행될 정도로 한 순간에 비민주주의 국가가 되어버린 일본을 상대로 말이죠.



 소설 속 일본에 대해 보다 자세히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갑자기 테러를 막는다며 '평화 경찰'이라는 게 창설됩니다. 이 아이디어를 낸 것은 야쿠시지 경시장(일본 경찰 계급 중 서열 4위). 그가 '평화경찰'을 만든 장본인이죠. 이름을 '야쿠자'에서 살짝 빌려왔는데 거기서 이 평화경찰이 정말은 어떤 조직인지 힌트를 주고 있네요. 이들은 실제 테러를 일으킨 사람들을 잡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테러를 일으킬 만한 인물들을 잡아들이는 게 목적입니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나왔던 범죄 예방 시스템과 비슷한 역할이죠. 그러나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선 틀림없이 이뤄지는 예언이라는 근거라도 있었지, 이들의 예방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아무나 닥치는 대로 잡아들일 뿐입니다. 일단 잡아들이고 나서 온갖 비인도적인 고문을 통해 죄를 자백하게 하고 또 다른 이들을 고발하게 만든 다음 광장으로 데려가 시민들이 다 지켜보는 자리에서 길로틴으로 참수시키죠. 그리고 참수된 이의 입에서 나온 사람을 또 잡아들이고. 그런 과정의 무한 반복입니다. 이쯤 되면 '허걱!' 하지 않을 수 없겠죠?


 뭔가 데자뷔가 느껴지신다구요? 어디선가 한 번 본 것 같다구요? 네, 맞습니다. 안타깝게도 여기엔 많은 역사의 실제 사례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중세의 마녀사냥이 그랬고, 스탈린 체제에서의 소련이 그랬으며, 50년대 미국의 메카시즘이 그랬죠. 물론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 시절 서북 청년단에 의해 자행된 '빨갱이 사냥'이나 무려 30만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된 '보도 연맹'사건이 그것이죠. 이 압도적이며 남다른 희생자 규모를 보면 이승만과 그의 위세를 등에 입은 친일파들이 얼마나 악질적인 놈들인지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승만을 국부로 받들자고 하는 사람들은 스탈린을 국부로 받들자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괴물을 국부로 만들자굽쇼? 국격을 '똥격'으로 내팽개치고 싶은 겁니까?


 앗, 바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이런 미친 놈들이 설치던 나라에 살아서 저도 모르게 그만 이사카 고타로에게 빙의해 버렸네요. 얼른 퇴마의 주문을 외우고 제 정신을 회복한 다음 본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이런 일본을 그리고 있으니, 그러면서 히어로를 통해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이라는 걸 드러내고 있으니, 분명 이사카 고타로가 아베 정부를 향한 분노에 차서 이런 소설을 썼구나 생각하는 거죠. 왜냐하면 소설 속 일본은 현재 아베 정부가 지향하고 있는 것의 핵심을 조금 극단적으로 드러낸 것일 따름이니까요. 경찰 이름이 하필이면 '평화 경찰'이라는 것에서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 이름을 다른 무엇도 아닌, 아베가 정권을 잡고 나서 일본을 전쟁 가능 국가로 만들기 위해 내내 수정하려 했던 '평화 헌법'에서 차용한 걸 보면.


 이 소설이 2015년에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 해 아베는 일련의 법안들을 패키지로 통과시켰습니다. 무려 과반수의 국민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흔히 '안보 법안'이라 부르는 그 것은 한 마디로 자위대가 외국에서 수시로 PKO(평화유지활동)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법입니다. 이처럼 그들의 PKO가, 일본은 평화유지활동이라고 하지만 실은 평화가 아니라 자신의 전쟁 야욕을 위한 활동이듯, 소설 속 '평화경찰'도 사회의 평화를 유지한다고 주창하지만 모두의 평화가 아니라 그들의 평화만 지킬 뿐이죠. 네, 맞습니다. 소설 속 '평화경찰'은 실은 아베가 상시화 하려는 PKO 입니다. 그 '평화경찰'이 소설에서 완전 싸이코패스에다 가학적 성향으로 가득한 악당으로 설정되었으니 이보더 더 PKO에 대한 비판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게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으니 그렇지 않아도 반골 기질이 강한 '이사카 고타로'로서는 시쳇말로 빡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아마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목검을 들고 내려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보다 심하게 내려친 곳은 그것을 자행하는 이들이 아니라 그런 짓을 뻔히 보고도 가만히 있는 국민들의 정수리가 아닐까 해요. 무지와 무관심 그리고 알고는 있지만 아직은 내게 피해가 없다는 이유로 이토록 비민주적인 작태를 내버려 두는 사람들. 바로 그런 청맹과니와 같은 시야와 무심함이 결국엔 소설 속 같은 비극적인 파국을 낳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보자면, 이 소설은 작가에게 문학이라기 보다는 죽비와 같은 것이겠네요. 자신의 삶과 직결된 정치적인 문제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수동적인 독자들의 정신을 세차게 일깨워 보다 관심을 갖고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만들기 위한.


 저도 참 달게 받았고 덕분에 잠시 졸음에 빠지듯 놓아버렸던 관심과 참여의 결기를 다시 벼리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목인 '화성에서 살 생각인가?'도 이제 달리 보이네요. 소설에서 이 제목은 저항하려는 이들에게 시대의 순리에 따르라는 말로 사용되는데, 지금은 전혀 반대의 의미로 보입니다. 이렇게 말이죠.

 '시대가 이렇게 망가지고 있는데, 네 일 아니라고 내버려 둘 거야? 넌 화성에서 살 수 있는 모양이지? 그게 아니라면 살기 좋은 시대를 만들기 위해 당장 너부터 뛰어들어."


 저도 화성에서 살 수 없으니 당연히 이사카 고타로가 내어주는 목검을 받아야 할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어떤 것이 과연 더 현명하게 대처하는 태도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라도 한 번 읽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자꾸 이런 말을 하는 바람에 혹시 소설이 지루할 것 같은 인상을 받으셨다면 결코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야기는 492페이지를 한달음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재밌습니다. 히어로 물에서 기대하는 활극도 넘치구요. 깊이와 재미가 모두 잘 우러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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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9-04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켄 로치가 은퇴 선언했다가 영국의 보수 정권이 득세하자 다시 영화 만드는 것처럼^^

ICE-9 2017-09-06 14:44   좋아요 1 | URL
그런 시기에 켄 로치가 더 좋은 영화를 만든 것을 보면 나쁜 정치 환경이 예술가들에겐 때로 순기능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이사카 고타로도 그렇게 되려나요^^
 
기다렸던 복수의 밤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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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쿠마루 가쿠의 소설들을 읽으면 '참 한결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늘 두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하나는 과거요, 다른 하나는 복수다. 이것이 다른 미스터리 작가와 구별되는 야쿠마루 가쿠만의 독특성이기도 하다. 그는 언제나 과거에 발목이 잡힌 이들을 그린다. 그 과거란 누군가의 범죄로 인해 혈육을 잃었거나 자신의 삶이 망가진, 한 마디로 상실과 상처로 얼룩진 것이다. 야쿠마루 가쿠의 인물들은 늘 거기에 잡혀 있다. 과거의 덫에 걸려 현재도, 미래도 제대로 누릴 수 없다. '끔찍한 범죄 피해자들의 삶이란 그렇다. 범죄를 당했을 때 이미 자신의 모든 시간 또한 거기에 봉인되어 버린 것이다.' 마치 이것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생생하게 전하려는 것 같다.


 그래서 복수 또한 중요해진다.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정의를 세우리라 기대하는 법질서가 특히나 범죄 피해자들에겐 아무런 의지도, 위안도 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범죄가 가져온 비극의 상처는 다른 것으로 풀 수 없고 오직 가해자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결자해지(結者解之)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야쿠마루 가쿠의 소설들은 늘 이 언저리를 맴돈다. 그래서 그의 소설들을 단적으로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은 다른 범죄 소설과 달리 철저하게 피해자를 중심에 둔다고. 최근 형사 정책학에선 형사 정책을 마련하는 근간에 피해자의 삶을 중점적으로 보호하는 '피해자학'이라는 게 주목받고 있는데, 야쿠마루 가쿠는 그 '피해자학'을 소설로 쓰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독자에게 범죄로 인해 커다란 상처를 받은 인물을 주시하라고 한다.

 누군가의 악의로 삶의 모든 빛을 빼앗기고 그 먹먹한 어둠 속에서 내내 신음하고 절규하고 있는 한 영혼을 보라고 말이다. 사실 우리는 피해자의 삶을 자주 간과한다. 범인이 체포되면 그것으로 범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끊을 때가 많다. 정작 우리가 더 많이 헤아리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 범죄로 인해 피해를 본 이들의 삶인 데도 말이다. 그러므로 야쿠마루 가쿠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원래 당연히 기울여야 했을 방향으로 우리의 관심을 인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번에 나온 2016년작, '기다렸던 복수의 밤'은 그 전해에 나온 '돌이킬 수 없는'과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작품이다.

 여러 면에서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과거에 발목이 잡힌 이가 나오고 그 인물이 복수의 운명에 처해 있다는 게 똑같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은 타인의 복수를 대리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고, '기다렸던 복수의 밤'은 제목처럼 복수를 스스로 집행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이것은 인물에게 다른 갈등을 가져 온다. '돌이킬 수 없는'는 과거를 끊고자 하는데 그럴수록 더 질기게 달라붙는 과거 때문에 괴로워하고, '기다렸던 복수의 밤'은 거꾸로 무수하게 이제는 과거와 단절하라는 요구와 유혹이 자신에게 쏟아지지만 정작 자신이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괴로워한다.

 전자는 타인의 비극을 추체험하면서 그 앞에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은 없는가를 묻지만 후자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비극이 낳은 무저갱 속에 갇혀버린 자에 대해서 그를 구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책임의 형태가 좀 더 명확해지고 개인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주제가 이어지기에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는 말을 한 것이다.


 소설은 30년 전에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으로 삶이 모조리 망가져 버린 가타기리 타츠오를 대상으로 하여 다섯 명의 화자가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 다섯 명이란 첫 번째는 30년 전 사건이 일어난 볶음국수 집의 주인이자 가타기리의 유일한 친구인 기쿠치 마사히로 이고 두 번째는 가타기리를 도와주려 하는 변호사 나카무라 히사시이며 세 번째는 30년 전 사건으로 영영 헤어져 버린, 지금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만이 남아 있는 가타기리의 딸 마츠다 히카리이고 네 번째는 30년 전 사건에서 기쿠치 아내에게 시비를 걸다가 결국 가타기리에게 칼을 맞아 버린 가와지리와 현재 함께 살고 있는 여성인  모리구치 아야코이며 마지막은 가타기리 타츠오와 묘한 인연을 맺어버린 아라키 세이지이다.


 이 다섯 명의 고백을 통해 얼굴 한 쪽엔 표범 문신이 있고 왼손은 의수이며 그런 몸으로 30년 내내 편의점 강도를 비롯하여 갖은 범죄로 교도소를 들락날락 거린 탓에 어디를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가타기리 타츠오의 생애란 게 정말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가 밝혀지는 것이다. 또한 그 것을 통하여 소설은 우리가 커다란 비극 때문에 오늘 살아야 할 이유를 잊어버린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넌지시 일러준다. 다음과 같은 말로써...


 "아라키 씨 덕분에 그 친구분이 변할 수 있었던 걸까요?"

 "글쎄요. 다만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한 누구나 변할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p. 287)


 그러고 보니 나도 군대 훈련소 있을 때, 너무나 힘들었는데 나약해지려 할 때마다 그런 나를 보고 실망할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각오를 새로이 하던 기억이 난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는 한, 우리는 버티고 이겨나갈 수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좌절할 때는 정녕 우리에게 아무도 없을 때다. 소설은 누군가에게 그런 한 사람이 되어 줄 것을 청한다. 복수를 기다리는 밤을 보내는 그가 그 밤에서 뛰처나와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한 대낮의 환한 햇살을 껴안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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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의 테이프 스토리콜렉터 57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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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미쓰다 신조로군요. 페이지에 손을 대는 것조차 저어될 정도로 무섭습니다. 미쓰다 신조의 '괴담의 테이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보니, 저는 확실히 공포 장르를 영화로 보거나 귀로 듣는 것 보다 는 책으로 읽을 때 더 무서움을 느끼네요. 아무래도 책은 다른 것들과 달리 한 가지 감각을 별도로 더 요구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바로 촉각 말이죠. 읽기 위해선 만져야 합니다. 손으로 책을 만지고 또 계속 페이지를 넘겨야 합니다.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뭔가 음험한 것이 도사린 그것을 말이죠. 영화는 멀리 떨어져 가만히 보기만 하면 됩니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죠. 머리로는 딴 생각을 하면서 듣는 시늉만 할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영화를 보고,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경우 모두 얼마든지 나와 상관없는 구경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책은 다릅니다. 책은 혼자 진행되지 않습니다. 나의 적극적인 행위를, 달리 말해 참여를 요구합니다. 저의 실제적인 개입이 있어야만 이야기가 흐릅니다. 무서운 것을 저 스스로 초래하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한다는 것, 내가 거기로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 그 일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 바로 그것 때문에 책이 다른 매체보다 더 공포감을 낳는 것 같습니다. 사실 몰입도 다른 것들 보다 훨씬 크구요. 물론 기억도 책으로 만난 공포는 오래 남지요. 이런 것들 때문에 여전히 많은 공포 소설이 나오고 또 그것을 자주 즐겨 읽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만화도 비슷하네요. 문득 이토 준지의 만화들을 얼마나 힘들게 페이지를 넘겼던가 하는 게 떠오릅니다. 그림 때문에 손을 대기도 싫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 궁금하여 그것을 보려고 애써 손을 대어 끝까지 읽어버리는 저는 아무래도 이 장르에 매혹되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미쓰다 신조의 공포 소설을 나오자마자 만났습니다. 이 작가의 공포 소설엔 뭐라고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확실히 마음을 잡아 이끄는 매력이 있어서 작품이 나올 때마다 손에 잡게 됩니다. 지금까지 각종 매체로 허다하게 공포물을 접해 온 저입니다. 소재에 있어서도, 내용에 있어서도 '와, 이거 정말 새로운 걸!' 하는 것은 그다지 없는 편입니다. 최근엔 영화 '제인 도'를 보면서 그런 걸 느낀 적은 있습니다만. 물론 미쓰다 신조의 소설도 그렇게 새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나오면 기대하게 됩니다. 읽어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그건 이야기 자체 보다는 신조 특유의 분위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 분위기란 단적으로 정의하자면, '경계의 허뭄' 입니다. 여기서 경계란 허구의 이야기와 지금 제가 있는 실제 현실 사이에 놓은 경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조의 이야기는 자주 그것을 허뭅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근대 초기의 소설들이 취했던 장치를 씁니다. 영국이나 유럽에서 나온 근대 초기 소설들을 보면, 수기의 형식을 빌린 것이 많습니다. 그 중 가장 많이 수기의 형식을 차용하는 게 바로 공포 소설입니다. 예를 들자면 러브 크래프트의 소설이나 에드가 알란 포의 '어셔 가의 몰락'을 떠올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런 소설들의 수기는 대부분 누구의 목격담, 증언으로 이뤄집니다. 그렇게 지금 재현되고 있는 이야기가 공상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란 것을 독자에게 납득하도록 만들죠. 다시 말해 수기의 형식은, 특히나 이렇게 인간의 이성으로 얼른 헤아리기 어려운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초래하는 공포를 다룰 때 이 때문에 가지게 되는  독자가 한낱 망상으로 치부해 버릴 위험을 '있음직한' 사실로 만들어 피해가는 것이죠. 그리고 그 '있음직함' 때문에 소설이 원래 노리던 공포를 더욱 극대화시킬 수도 있고 말이죠. 여기서 우리가 정녕 어떨 때 공포를 느끼는가 하는 게 밝혀지는 것 같습니다. 그건 바로 소설 속 이야기가 바로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낄 때라는 게 말이죠.


 '경계의 허뭄'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영화의 스크린처럼 저편의 이야기와 이편의 내 삶의 절대적으로 나뉘지 않고 그 공포의 침입을 막아주는 스크린이 찢어진 것처럼 내 삶으로 침범하여 흘러든다는 것입니다. 나도 그 이야기 속 당사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하듯이 말이죠. 상기해 보시면, 무서운 이야기가 정말 무서워지는 것은 바로 그 때입니다. '아, 저 일이 내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겠구나!' 깨달을 때 말이죠. 미쓰다 신조도 그런 수기 형식을 빌려 왔습니다. 작가가 직접 등장해 아주 일신 상의 일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며 마치 실제 있었던 일인양(어쩌면 정말 있었던 일 일수도 있습니다.) 독자에게 여기도록 한다는 것이죠. 여기에 주안점을 두고 읽다보면, 미쓰다 신조가 독자들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음직한' 느낌을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보일 것입니다.


 저는 특히 두 단편, '괴담의 테이프'와 '우연히 모인 네 사람'에 주목하고 싶은데요, '괴담의 테이프'는 마지막 장면 연출이 정말 압권입니다. 마치 자신의 자살을 생중계 하기라도 하듯 자살하려는 사람이 자살할 때까지의 상황을 자신의 육성으로 녹음한 테이프가 이 이야기의 주된 소재인데, 원래 그것을 오래도록 모으고 그 중 특별히 세 편을 골라 책을 쓰기로 했던 저자가 그 세 편을 미쓰다 신조에게 보내오고는 실종되고 마는데, 나중에 실종된 그 작가가 미쓰다 신조에게 이제는 자신이 직접 고백하는 자가 되어 자살을 녹음한 테이프를 보내옵니다. 이 부분에서 작가의 연출이 저는 정말 좋더군요. '괴이'의 공포는 정체 불명에서 나오는데, 그 정체불명을 온전히 남겨두어 현실감과 무서움이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연출이었습니다. 분명 공포의 효과에 조예가 많은 작가라 그런 연출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은 독자에게 더 큰 한 방을 주기 위해 다른 방향을 취할 것이거든요. 독자의 눈 앞에 괴이의 전모를 밝히는 것 같은.


 이런 '적절한 물러남'(저는 작가의 그런 연출을 이렇게 부르고 싶네요.)은 '우연히 모인 네 사람'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역시 결말 부분인데요. 솔직히 이 에피소드는 살만 좀 제대로 붙이면 얼마든지 장편으로 만들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아이디어도 좋고, 무대도 적절하며, 미스터리도 꽤 넣을 수 있거든요. 저 역시 읽으며 '아, 좀 더 긴 이야기로 읽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미쓰다 신조는 이 좋은 이야기를 그냥 단편으로 마무리 지어버립니다. 후반 부분을 풀어가면 충분히 무서운 쪽으로 더 매력적인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데 그러지 않습니다. 물러나는 것이죠. 그래서 역시 현실감과 그 현실감에서 오는 공포를 얻습니다. 저는 미쓰다 신조의 이런 부분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픽션을 현실처럼 만드는 능력 말이죠. 실제 이야기처럼 느끼게 하여 '괴이'의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능력. 정말로 그 방면에 있어서 미쓰다 신조의 능력은 최상 입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무서운 것이죠. '괴이'가 책 속의 이야기로만 머무는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내 삶 속에 나타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에.


 별 것도 아닌 이야기를 잡다하게 길게도 썼네요.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미쓰다 신조의 공포 소설이 갖는 매력을 꼭 한 번 말하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지, 그건 모르겠지만.

 '괴담의 테이프'는 어떤 조우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미쓰다 신조는 미스터리 작가인 동시에 공포 소설 작가입니다. 두 방면을 그는 다 걸어가고 있지요. 이번 '괴담의 테이프'에선 그 둘이 조우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를 들어 두 번째 단편, '빈 집을 지키는 밤'은 존 카펜터 감독의 영화 '할로윈'으로 대표되는 슬래셔 무비의 신조식 호러 변형판 같고, 그 다음의 '우연히 모인 네 사람'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같은 클로즈드 서클의 호러적 변형 같습니다. 이렇게 미스터리에서 익숙한 소재들이 호러의 세계로 재탄생 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번 단편집은 지금까지 말한 점들이 넘치는 책입니다. 권태로운 일상의 균열을 일으킬 공포를 만나고 싶다면 '괴담의 테이프'를 한 번 돌려보시라 권해 드리고 싶네요.


 '괴담의 테이프'는 개인적으로 더 무서웠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테이프들엔 모두 괴이한 존재가 나타나는데, 그 출현의 신호가 하필이면 빗소리 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소설을 읽을 때는 정말 주구창창 비가 내렸습니다. 이야기와 현실이 이런 식으로 일치하니 좀 오싹 하더군요. 역시 무서운 것은 이야기만으로 안 됩니다. 그것이 현실 속으로 마구 침범해 들어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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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8-26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보면서 사진 속 책 맨 앞에 그림은 자세히 못 봤습니다 마지막에 빗소리가 나고 무언가 나타난다고 한 걸 보고 위로 올리다 책 맨 앞 그림을 보니 오싹했습니다 노란 우비 쓴 사람?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노조키메》에서는 책을 읽다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이 들면 그만 보라고도 하죠 책을 볼 때는 그런 말 그렇게 무섭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른 다음에 갑자기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수기형식이 무섭게 만드는군요 다른 사람 소설은 거의 본 적이 없어서 잘 몰랐습니다 미쓰다 신조 소설만 조금 봤어요 공포소설... 미쓰다 신조 소설을 보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서운 것만 봐야 할지, 다른 것도 생각해야 할지... 책을 보면 거기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할 때가 많아서... 별로 좋은 버릇은 아닌 듯합니다 알 수 없는 건 그것대로 두어도 괜찮다고 하지만...


희선

ICE-9 2017-08-26 02:48   좋아요 0 | URL
희선님, 잘 지내시고 계시죠?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 일단 이렇게 안부부터 묻게 되네요^^
표지의 노란 우비 사람은 여자로 다섯번째 단편에 나오는 ‘괴이‘인데, 늘 비가 내릴 때마다 나타나 희생자에게 점점 더 다가오는 존재입니다. 저는 미쓰다 신조의 미스터리를 읽을 때는 이것저것 다른 거 많이 생각하는데, 공포 소설은 정말 다른 거 생각 못하겠더라구요.^^ 이야기 자체에 마냥 압도되어서... 그런데 영상으로 보면 아무리 무서운 것이더라도 어느 정도 객관적 관람이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책은 잘 안 되네요. 특히 이렇게 미국식 호러가 아니라 일본식 호러는... 왜 그럴까? 거기에 대해 조금 생각 중입니다. 여하튼, 저도 이렇게 이런 소설은 아무 생각없이 읽는답니다^^;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네T-T
수십 억 뇌물이 고작 5년?
일부러 5년 준 건가?
2심에서 집행유예 할 수 있도록?
여론 잠잠해지길 기다리겠다는 거네.
라면 10개와 현금 2만원 절도가
징역 3년 6개월 인데?
국정을 농단하고, 수조에 달하는 피해를 국민에게 안겨도 돈 있으면 그것 밖에 안 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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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세계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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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험이 성공하면 어떻게 될까?"

 "세상에서 '가족'이라는 개념이 사라질지도 몰라. 그런 예감이 들어."

 남편은 들뜬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훨씬 합리적이야. 그렇잖아, 우리도 왜 '가족'이 되었는지 잘 설명할 수 없다고. 단체 미팅에서 만나 조건이 맞고 성격도 맞는다는 이유만으로 결혼해 남매처럼 살고 있으니까."

취기가 올랐는지 남편은 혀 꼬인 소리로 말했다.

 "'가족'이라 명명한 존재가 남과 어떻게 다른지, 이제 아무도 설명하지 못해. 우리는 이미 그걸 잃어버린 거야." (p. 177)


 때로 상상해 본 적이 있을까? 사랑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지? '편의점 인간'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무라탸 사야카의 새로운 작품, '소멸세계'는 바로 그런 세상을 그린다. 제목 그대로 남녀 사이의 사랑이 소멸된 세계를 말이다. 여기엔 더이상 개인의 쾌락을 위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몸을 섞는 사랑은 그렇다. 부부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소설 속 세계에서 부부 관계란 오직 자녀의 양육이라는 하나의 목적만으로 성립되고 지속된다. 부부는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동료나 협력 관계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이 아니라 오직 필요에 의해 이뤄지는 결혼인 것이다. 진짜 사랑은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다른 데서 찾는다. 아니, 남편과 아내에서 사랑을 찾아서는 아니된다. 왜냐하면 이 곳의 부부란 같은 목적을 위해 서로 협조하는 친남매 같은 가족이기 때문이다.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남매끼리 사랑을 나누는 근친상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성교까지 하는 것은 변태 행위의 극치다. 지금 우리 시대의 상식인 부부 간 성교를 통해 자녀를 낳는다는 것이 이 세계에선 변태 중의 변태 행위인 것이다. 인공수정이 보편화 되어 육체간 성교를 통해 아이를 낳는 것까지 지극히 예외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랑은 몸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섹스 해 본 적 있어요?"

 느닷없는 질문에 그는 놀란 듯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교미를 말하는 거죠? 애인은 있었지만, 그런 고풍스러운 행위는 해본 적이 없어요." (p. 119)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꼭 실제로 존재할 필요도 없다. 이 시대 사랑의 대상 대부분은 환영의 존재들이다. 드라마 속 인물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 같은 것들이 사랑의 대상이고 모두들 진정한 사랑으로 인정해 준다. 오타쿠들 중엔 미연시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들은 진짜 여자친구로 삼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연애하는 이들도 있다고 하던데, 그들은 이런 세계에 살면 좋을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소설의 주인공 여성 아마네도 그러하다. 그도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사랑한다. 첫 경험이라고 할만한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타인의 눈엔 자위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어차피 이 세계엔 자위와 사랑이 그렇게 구별 되지도 않으니 별 상관은 없다. 이렇게 '소멸 세계'가 그리는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과 비정상이 완전히 뒤바뀐 곳이다. 여기선 정상이 그 곳에선 비정상이며 그 곳에서 비정상이 여기선 정상이다. '소멸 세계'는 그를 통하여 도대체 정상과 비정상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것은 아마네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엄마, 원시시대에는 다부다처제가 정상이었대. 섹스는 의식이고, 의식을 올리는 날이면 젊은이들이 모여서 집단 난교로 아이를 가졌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봤어. 하지만 지금을 사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면 다들 정신이 나갔다고 하겠지? 엄마가 하는 행동이 바로 그거야. 시대가 바뀌었어. 정상의 기준도 바뀌었고, 고릿적 기준을 아직도 못 버리지 못하는 건 광기야.(p. 158)




 아마네는 태생부터 예외의 존재였다. 부부 간의 성교로 태어난 아이였으니까. 그는 그렇게 태어난 것을 남에게 숨겨왔다. 그렇게 태어나게 만든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 이유에 대해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널 낳은 건... 사랑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았어. 태어났을 때부터 이 세상은 미쳐 돌아갔어. 나만은 정상이고 싶었지.(p. 158)


 그녀는 아마네에게 기억하라고 한다. 자신이 그렇게 해서 아마네의 몸에 '올바른 세계'를 심어 놓았다는 것을. 그것이 광기인 세상에서 아마네를 바로 잡아줄 것이라 단언한다. 그 때문일까? 아마네는 세상과 잘 섞이지 못한다. 아니, 세계의 보편적인 모습과 닮지 못한다. 고풍스럽거나 악취미가 되어버린 육체의 성교에 집착하며, 남의 아이와 자신의 아이의 구별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세상에서 자신만의 아이에 집착한다. 세계는 변화하고 있는데, 그녀는 낡고 사라진 것에 집착한다. 마음은 그런 세계의 정상이 되고 싶은데, 되지 않는다. 그래서 괴로워한다. 세상과 점점 더 어긋나는 자신을. 그런 아마네에게 엄마는 말한다.

 "넌 원래 주변 영향을 잘 받았어. 지금도 세뇌된 것뿐이야. 엄마랑 같이 가자. 여기 보다는 원래 있던 세상이 훨씬 나아."

 아마네는 이렇게 항변한다.

 "엄마는 세뇌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어? 세뇌되지 않은 뇌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해? 그럴 바에야 이 세상에 가장 적합한 광기로 미치는 게 훨씬 낫지?(p. 271)

 그녀는 엄마를 원망한다. 자기 육체의 근본에 정상이라는 것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자신은 계속 비정상으로 살고 싶은데도 결국 정상에게 따라 잡혀 정상으로 살게 된다고. 그녀는 이렇게 절규한다.

 어떤 세상에 있어도 완벽하게 정상으로 존재하는 나를 보면 미쳐버릴 것 같아. 세상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광기가 뭔 줄 알아? 바로 정상이라는 거야. 안 그래?(p. 272)

 어떻게 보자면, 이 소설 '소멸 세계'는 히스테리의 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의 억압에 짓눌리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써의 히스테리. 그것은 세상이 강요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닌, 독립적이며 고유한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온전히 지키고자 하는 투쟁인 것이다. 이는 아마네가 소설 속 다른 인물들과 다르게 사랑의 대상으로 끝까지 이 세상에 실재하는 것이 아닌, 저편의 환영만을 고집하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이 역시 세상이 원하는 정상이란 것에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의지의 단호한 표현인 것이다. 앞서 '소멸세계'는 정상과 비정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는 말을 했다. 아마네의 투쟁을 통해 소설이 들려주는 대답은 정상과 비정상의 구별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 또한 역사적으로 보면 특정 시기, 특정 장소에서 출현하여 지속되어온,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신화'에 불과하다. 토마스 쿤 식으로 말하자면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주눅들거나 자신을 부정적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이 고유한 주체성 속에서 어떤 길로 갈 것을 결단했다면 당당하게 걸어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네가 소설의 결말에서 이 세상에선 비정상적 행위의 가장 극단이라고 할 만한 행위를 태연히 저지르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렇게 그녀는 끝까지 비정상의 영역에 남는다. 히스테리를 히스테리 그대로 온전히 남겨둔다. 바로 거기에서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이 태어나고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마네의 모습은 그녀가 속한 실험 도시에서 누구의 아이도 아닌, 모두가 엄마가 되는 아이들의 모습과 얼마나 정반대인가? 그들은 모두를 엄마라 부르며 끝없는 보살핌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자신의 삶에 주체가 되지는 못한다. 아마네의 남편도, 한 때 애인이었던 남자도 다 마찬가지다. 처음엔 아마네처럼 비정상을 향한 탈주를 감행했으나 결국 정상에게 따라잡혀 고유한 주체성을 잃어버렸다. 이로써 이 소설이 말하는 '소멸세계'는 정말은 무엇이 소멸된 세계인지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고유한 주체성이 사라진 세계라는 것을. 모두가 공장에서 똑같은 틀로 찍어낸 기성품이나 다를 바 없는 세계가 바로 '소멸세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왜 그런 세계를 그리는데 사랑을 주요 모티브로 삼았는가도 이제 알 수 있게 된다. 사랑이야말로 상대의 고유한 주체성을 존중하는 가장 대표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게 말이다. 사랑은 무엇보다 개인과 개인 간에 일어나는 일이고 그런 면에서 두 고유한 주체성의 대면이라 할 만하다. 또한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기에, 역시 고유한 주체성이 발현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람은 사랑을 하는 한, 자신으로 있을 수 있다. 그 사랑의 감정은 오직 자신만이 향유하는 것이기에. 사랑은 자신을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과 늘 연결시켜 주는 '탯줄'이다. '소멸세계'가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두 가지 주요한 테마, 즉 사랑과 주체성은 이렇게 연결된다.

 '소멸세계'는 오늘의 세상과 완전히 정반대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하여 상식으로 굳어진 것을 다시금 헤아려 보게 만드는, 이를테면 '사고 실험' 같은 소설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덕분에 오랜만에 정상과 비정상 그리고 주체성과 사랑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그런 사유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이 세계의 문을 두드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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