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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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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는 독일의 스포츠 저널리스트로 잔뼈가 굵은 토마스 키스트너의 르포르탸쥬다.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영화나 미니시리즈의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공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에서 사익 추구에만 혈안이 된 이들의 검은 커넥션을 흔히 '마피아'라고 하는데 제목 그대로 공익 단체라 세금까지 면제받고 있는 '피파'를 철저히 사익 추구의 도구로 이용해온 이들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들려주는 책이다.


 국제축구연맹 '피파'의 역사는 꽤나 길다. 처음 결성된 것이 1904년으로 벌써 백년이 넘은 조직이다. 사실 이 때만 해도 힘이 미미한 조직이었다. 종주국인 잉글랜드조차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한창 진행되던 제국주의에 발맞춰 축구의 인기가 유럽을 넘어 남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파급되자 피파도 힘을 키워갔다. 오늘날 피파의 힘은 제국주의가 바탕된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피파의 힘이 강성해진 것은 3대 회장을 역임했던 쥘 미레 때였다. 그의 헌신과 노력으로 소수 나라들 간의 리그에 불과했던 월드컵은 무려 85개국 출전이라는 오늘날과 같은 월드컵의 모습이 될 수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축구에 대한 순수한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토마스 키스트너에 따르면 지금의 피파란 온갖 사적인 착복과 뇌물이 오고가는 추악한 부패의 온상이다.


 어쩌다 이렇게 변질되어 버렸을까? 토마스 키스트너는 그 최초의 계기로 1974년에 회장으로 취임한 아발란제를 꼽는다. 피파와 관련해 아발란제의 취임은 의미가 크다. 아바란제의 취임으로 피파의 성격이 협회에서 기업으로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날과 같은 피파의 모습은 아발란제가 만든 것이다. 아발란제는 오로지 주관하는 월드컵에서만 나오는 수익으로 근근히 운영되던 피파를 일신하여 적극적으로 수익을 창출해 나갔다. 덕분에 겨우 직원 12명에 불과하던 피파는 무려 120명의 직원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조직이 되었다. 현재 피파의 매출은 작년만 해도 1조 4천 백억원. 실로 어마어마한 조직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가는 지 알길이 없다. 피파는 월드컵이 열리는 해를 기준으로 4년마다 예산을 집행하고 결산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감사를 받은 적은 아발란제 이후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토마스 키스트너에 따르면 피파는 회계와 감사를 한 민간 기업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고 있는데 그 기업은 회장의 통제 하에 있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회장의 전횡을 감시할 만한 것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이고 피파가 벌어들이는 그 많은 돈들은 모두 눈 먼 돈일 뿐이다. 엑셀 경이란 사람은 예전에 이런 현명한 말을 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라고. '피파 마피아'는 전임 회장 아발란제와 현재의 회장인 블라터로 이어지는 악취로 들끓는 부패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는 책이다.


 스포츠는 공정이 생명이지만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비열한 권력게임이다. 절대 권력을 얻을 수 있는 데다 그 많은 돈을 제 주머니에 마음껏 채워 넣을 수 있는 자리인만큼 회장 선거때마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부패의 악취는 결코 숨길 수 없다. 누군가는 맡고 조직을 변화시켜야겠다고 마음먹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아발란제와 블라터의 악행에 맞서 피파를 지키려 해왔다. 하지만 그 때마다 아발란제와 블라터는 평소에 챙겨 놓은 비자금을 살포해 이들의 도전을 막았다. 거기에는 2002년의 한국 월드컵도 자유롭지 못하다. 토마스 키스트너는 의심한다. 그 때 한국이 전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4강까지 가게 된 것엔 당시 블라터를 지지하지 않았던 정몽준과 모종의 거래를 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특히 한국과 이탈리아의 16강 전에서 비론 모레노 심판이 페널티 박스 안에서 이탈리아 선수 토티가 일대일 상황에서 송종국의 태클에 걸려 넘어진 것을 두고 헐리우드 액션으로 판정하여 퇴장시킨 것은 많은 논란을 가져온 판정 중 하나인데 모레노가 그렇게 했던 것이 바로 블라터가 정몽준의 지지를 받아내기 위해 한 일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정몽준은 대통령이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이 월드컵에서 높은 성적을 올려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둘의 이해관계는 그렇게 맞아 떨어졌다. 그래서일까 뒤이은 스페인과의 8강에서도 한국을 승리로 이끈 명백한 오심이 반복되었다. 정황은 있었다. 월드컵 후에 모레노 씀씀이가 커진 것이다. 월드컵 전만 하더라도 빚이 많아 생활에 쪼들렸던 모레노였는데 갑자기 어디서 큰 돈이라도 들어왔는지 돈을 펑펑 물쓰듯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이탈리아 팀의 주장이자 수비수로 뛰었던 크리스티안 파누치는 "모레노 심판은 오직 한국이 8강에 진출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기적과도 같았던 한국의 4강 진출. 과연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 그대로 순수한 꿈의 성취였을까 아니면 모종의 뒷거래가 가져온 결과였을 뿐일까? 하지만 책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악행도 마다않는 블라터의 행보를 보노라면 그저 순수한 꿈의 성취라고 믿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피파의 현재는 경기에서 맛보는 순수한 감동마저도 오염시키고 있다. 토마스 키스트너는 서문에서 한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차원에서 규제 없는 권력이 얼마나 끝없이 부패할 수 있는지의 사례로 보아줄 것을 당부한다. 마침 우리에게도 해수부 마피아, 원전 마피아 같은 관피아들이 쏙쏙 드러나고 있는 상황. 비록 축구에 관심이 없더라도 경종을 울리는 의미로다가 한 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재미까지 있어 읽는 부담도 적으니.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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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오후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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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한 결혼정보회사가 대한민국 젊은 남녀들이 과연 얼마나 연애를 하는지 조사했다고 한다. 열 명 중 두 명 꼴로 연애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주말 번화가에 나가보면 나 빼고 다 연애하고 있는 것같아도 실상은 이러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삼포세대'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지금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는 연애,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하려 한다. 경제적 상황도, 놓인 미래도 끝도 없이 불안하기만 하니 리스크를 줄이는 것은 당연지사다. 바야흐로 싱글이 대세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그렇게 된다는 게 비극적이긴 하지만 앞으로 전통적인 가족 개념은 많이 달라지리라 생각된다. 


 이웃 나라인 일본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독신의 오후'를 쓴 저명한 일본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에 따르면 앞으로 일본 남성 3명 중 1명은 죽을 때까지 싱글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한다. 특히 남성의 경우엔 이러한 연애와 결혼 포기 풍조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잃어버린 10년'으로 경제적 고난이 젊은 세대에게 더 빨리 닥쳐온 탓이 아닐까 싶다. '초식남'이 그 증거다. 이 말은 칼럼니스트인 후카사와 마키가 당시 유행하고 있는 일본 젊은 남성의 라이프 스타일을 두고 지칭한 신조어였는데 그건 여성스런 취향을 가진 젊은 독신 남자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보다 넓게는 일찌감치 연애를 포기하고 싱글로 살아가려는 남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찌나 '초식남'의 인기가 강했던지 아베 히로시가 주연한 드라마 '결혼못하는남자'까지 만들어질 정도였는데 그만큼 일본 젊은 남자들 사이에선 '싱글'이 보편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독신의 오후'는 남자들 사이에서 싱글이 선택이 아니라 운명처럼 여겨졌을 때 나온 책이었다. 아베 히로시의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듯이 이 책이 일본에서만 무려 75만부가 팔린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우에노 지즈코는 싱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특별히 '싱글력'이라고 칭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과연 남자들에게도 싱글력이 있을까 하고 묻는다. 여성에게 있다는 것은 당연히 전제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의 보편적 특성을 두고 한 것이라기 보다는 개인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같다. 우에노 자신이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싱글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녀는 1948년 생이다. 책은 2009년에 나왔다. 대략 싱글로 살아온 연륜의 크기가 얼마인지 짐작된다. 그런 그녀이기에 싱글의 삶에 대해 이렇게 쉽고도 설득력있게 쓸 수 있었을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 책은 부정적 답변에서 비롯되었다. 남성들은 싱글력이 아예 없거나 약하다는 것이다. 그걸 그녀는 늙으면 누구나 한 번은 닥치게 마련인 간병의 문제와 사별의 문제를 통해서 보여준다. 섹스 문제도 있다. 이제와 이야기지만 이 책은 보편적인 남성 싱글의 삶을 다루기 보다는 중년 이후 싱글의 삶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목이 '오후'인 것은 그 때문이다.


 모두 남자들은 한계를 보여줬다. 이유가 있었다. 일본 남성의 경우, 특히 기성 세대는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환경 안에서 자라오고 거기에 익숙해져서 아내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삶을 특히나 힘들어했다. 단적인 예로 일본에서 노년 부부의 배우자 간병의 경우 여성보다 남성이 간병받는 이를 살해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사별의 경우에도 남성들이 홀로 있는 것을 더욱 어려워했다. 전통적인 일본 남성 가치관에 따라 집안의 일은 모두 아내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바깥 일만 했기 때문에 살림을 꾸려가는 것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거기다 퇴직은 곧 모든 사회적 연결망의 단절이 되고 직업 말고는 다른 취미를 가져본 적도 없는 그들은 삶의 의미를 달리 쉽게 찾는 것도 어려워서 이제 홀로 보내야 할 시간들이 모두 우울과 불안으로 닥쳐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에 길들였던 습관은 그대로 남아서 자식들에겐 늘 권위 있는 가장으로 행세하려고만 드니 가족으로부터 고립마저 초래해 싱글의 삶은 더욱 힘들어진다.


 이런 문제점으로 인해 우에노 지즈코는 책을 쓰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노년으로 가면 갈수록 쇠약해질 수밖에 없는 일본 남성의 싱글력을 길러주려는 책이다. 그 구체적인 노하우를 많은 싱글들의 실제 삶과 평생 싱글로서 살아온 자신의 경험까지 더해 가르쳐 주려는 책인 것이다. 싱글로 맞이할 수 있는 삶의 모습 전반을 다루면서도 내용은 소화하기에 전혀 부담이 없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거기다 어조가 솔직하기까지 하다. 


 예컨대, 배우자를 간병하는 남성의 경우 해소하기 어려운 성욕 문제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아내야 행복할지 어떨지 몰라도 남편이 참 안됐어요. 남자 50대면 한창 나이인데 성욕을 체념하고 살아야 하다니 말이에요"

 어렵쇼, 그 사람은 섹스는 부부끼리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라면 그토록 아내를 아끼는 멋진 남성의 애인이 되어 "당신 덕분에 나는 아내 간병에 전념할 수 있어, 고마워."라는 말을 듣고 싶건만. 싱글은 이럴 때 진정으로 자유롭다. 이런 생각이나 하는 나는 대체 남성 편만 들고 여성에게는 적이 될 심보일까?(p. 53)


 75만부 중의 한 만 부 정도는 이 말 때문이지 않을까? 이 봐, 정색할 것은 없다고. 물론 농담이니까. 깊이가 없는 것도 아니고 의외로 촌철살인 식으로 이런 저런 생각 지점들을 꽤 짚어주는 편인데도 어조가 이런 식이라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진중함을 이런 가벼움으로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내가 익히고 싶은 것인데 높은 내공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 언감생심이다. 과연, 우에노 지즈코는 일본에서 젠더 분야의 선구적 이론가이자 일본 최고의 지성이라고 한다.  


 '독신의 오후'를 읽다보면 느끼게 되는 한 가지는 만일 정말로 노년 남성의 홀로 삶이 그토록 힘들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로 어떤 안간힘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예전 삶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안간힘 말이다. 이 안간힘은 생각 이상으로 힘이 세다. 노년이 되면 될수록 고집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보게되지 않는가. 이는 노년의 가장 큰 문제는 육체의 쇠약과 사회적 연결망의 단절로 자존감이 극도로 위축되는 것인데 노년에겐 이제까지 늘 지녀온 자기 생각이나 습관을 포기하는 일도 자존감의 상실로 받아들여 지는 탓이다. 이렇게 자존감과 연결된 것이기에 안감힘을 써서 버티는 것이고 그 때문에 고래 심줄보다 더 질겨서 잘라내기가 힘든 것이다.


 하지만 우에노 지즈코는 변하지 않으면 도래하는 것은 비극 밖에 없다고 말한다. 달리 생각해보면 노년이 자존감을 지키려 그토록 매달리는 통칭 '보수(지녀온 자기 것을 내내 고수한다는 점에서)'는 알고보면 매뉴얼과 같다. 대부분 자기가 계획하고 판단한 삶의 모습이 아니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외부로 부터 주입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명절이 되면 당신들은 늘 다시 태어나면 절대 결혼 안한다고 하시면서 독신인 자녀에게는 왜 빨리 결혼 안하냐고 다그치는 부모나 친지들도 실은 매뉴얼 대로의 삶을 자식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말은 쉽게 생각하자는 것이다. 삶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입되 매뉴얼을 좀 더 자유로운 쪽으로 업데이트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되면 낯선 삶의 환경을 받아들이는 일도, 오래도록 싱글로 산다고 해서 자신을 '패배한 개'처럼 여기지 않는 것도 한결 수월해질 테니까.


 사카이 준코의 베스트 셀러 '노처녀의 절규'에는 남편도 없고 자신감도 없는 30대 이상 여성을 '패배한 개'로 정의하며 자기 비하를 보여준 끝에 "그래요, 나 노처녀예요. 그게 뭐 어때서요?"하고 반문하는 퍼포먼스가 나온다. 싱글 남성 세계에서도 모태 싱글 40년차입니다만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뭐요?"라는 상식이 통하게 되면 남성들도 훨씬 편해질 텐데 말이다(p. 82)


 이런 주눅들지 않는 당당함. 기꺼이 삶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맞이하려는 태도. 결국 '독신의 오후'가 권하는 부드러운 홍차란 이런 원기를 북돋아주고자 함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영원의 철학 - 모든 위대한 가르침의 핵심
올더스 헉슬리 지음, 조옥경 옮김, 오강남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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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대전이 서서히 끝나가던 1945년.
 '멋진 신세계'에서 현대 문명이 가열차게 추구하고 있는 물질주의가 가져오는 건 결국 인간 소외와 공허 밖에는 없다고 말했던 올더스 헉슬리는 한 권의 책을 발표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의 철학'이죠. 이 책이 일으킨 파장이 엄청났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흔히 '뉴에이지'라고 알고 있는 것들도 다 이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죠.

 원제는 'The Perennial Philosophy'. 책의 첫머리부터 올더스 헉슬리는 라이프니츠가 한 말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용어는 중세 때부터 있었습니다. 최초로 그 말을 쓴 것은 'Agostino Steuco'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인으로 주로 구약을 연구하던 학자였는데 당시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주도하고 있던 신플라톤주의를 그는 '영원의 철학'이라고 불렀다는 군요. 피치노는 당대 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신앙을 약화시키고 있다고까지 생각했죠. 그래서 그는 플라톤에게로 기울었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을 이길 수 있는 건 오직 그리스도 사상 밖에는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경건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그 플라톤 철학을 자신이 신봉하는 그리스도 신학과 합치고자 했죠. Steuco는 '경건의 철학'이라는 말을 살짝 바꾸어 '영원의 철학'으로 부른 것입니다. 네, 실은 조금 경멸의 의미였죠. 그건 신학이 아니라 철학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영원의 철학'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실재주의를 경유해 무엇보다 영혼의 불멸성을 강조했습니다. 그 불멸하는 인간의 영혼을 중심으로 우주를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플라톤처럼 가상인 우리의 현실과 이데아인 참 세계로 나누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을 통해 결합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인간 영혼의 목표는 초월적 존재이자 '이데아'인 신과의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보았죠. 이것은 후일 우리가 'perennialism'이라고 부르는 것이 됩니다. 영속주의 혹은 항존주의라고도 부르는 것이죠. 다년생 식물을 뜻하는 'perennia'의 뜻처럼 영원히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을 그렇게 부릅니다. 종교적 입장을 투영하자면 그 가치는 물론 신이 되겠죠. 피치노가 말했던 '신과의 합일'이 종교로서의 'perennialism'이 지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피치노처럼 기독교만이 유일의 통로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죠. 'perennialism'의 근본 목적은 신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이론과 방법들을 하나도 허투르 보지 않고 다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거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골라내 진정한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통로(흔히 '비전의 핵심'이라 이르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perennialism'입니다. 이 'perennialism'은 하나의 여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최초의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입니다.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물질문명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당연히 물질문명은 참된 정신에 의해 인도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더구나 바깥은 참된 정신으로 인도되지 않은 물질문명이 어떠한 비극을 초래하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에게 절박감은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36년에 나온 '가자에서 눈이 멀어'는 헉슬리의 그러한 심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죠.  그는 위안으로서든, 구원으로서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기독교는 그에게 그걸 가져다 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러했던가? 그 이유를 그는 이 책의 336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형이상학에 관해 집필하는 대부분의 유럽 및 미국의 저자들은 유대인, 그리스인, 지중해 연안 지역과 서구 유럽 사람들만이 이 주제에 관해 생각해본 것처럼 쓰고 있다. 완전히 자의적이면서 고의적인 무지가 20세기에 와서야 이렇게 드러난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는 영원한 세계 평화의 위협이 되고 있다.(p. 336)

 '멋진 신세계'와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서 이미 파시즘에 대한 공포와 환멸을 드러내고 있는 그입니다.
 그런 그에게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는 서양의 신학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치는 자신들의 전쟁을 '제2의 십자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이 필요했습니다. 하나가 아닌 다양한 길이. 모든 경계를 초월하고 동시에 아우르는 길이. 그 보편을 향한 대화. 그리하여 그는 '영원의 철학'을 썼습니다. 그냥 책이 아니라 쓴다는 것이 동시에 자기 구원의 노력이기도 한 책을. '영원의 철학'은 그런 책입니다.

 모두 27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건 올더스 헉슬리가 찾아낸 모든 종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가 27가지라는 뜻도 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 요소 하나를 각기 한 장씩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내용은 정말 광범위합니다. 불교, 도교, 유교를 비롯하여 동,서양의 종교들이 거의 다 인용되고 있으니까요. 정말 읽다보면 어떻게 이걸 다 혼자의 힘으로 찾아내고 더구나 체계적으로 정리까지 했는지, 거기 투영된 신학적 제국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집념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과연, 듣던대로 대단하구나!' 느낄 수 밖에 없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종교학자로 명망있는 오강남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단적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나는 그가 쓴 수많은 책 중에 단연 이 '영원의 철학'이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 단언하고 싶다.'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여파도 컸었지만 여기 들어간 그의 노고만으로도 그렇다고 인정해주고 싶어요. 내용도 그리 쉬운 편은 아니고 번역이 다소 불친절하여 읽는 속도가 좀 더딜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고 곱씹으면 이해못할 부분은 없습니다. 또한 의외로 올더스 헉슬리 스스로 자신이 개진하고자 하는 '영원의 철학'을 꽤나 체계적으로 다져놓고 있기도 합니다. 개념정리, 구분과 계층화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죠. 제가 그랬듯이 따로 노트를 준비하여 정리해가며 읽는 것도 이 책을 소화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년에 올더스 헉슬리는 신비주의로 더욱 기울었습니다. 죽을 때는 아내가 두 번이나 LSD를 놓아 되도록 그가 바라는 상태에서 세상과 작별하도록 하기도 했었죠. 이처럼 그 역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작가 켄 키지만큼이나 환각제가 깨달음을 위한 새로운 통로가 되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인식의 문'이란 책을 썼는데 짐 모리슨은 거기에 감명을 받아 나중에 자신이 조직한 락밴드의 이름을 'DOORS'라 짓기도 했습니다. 소설만큼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종교나 신비주의에 관한 책들도 영향을 많이 미쳤는데 거기에 관한 책들은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그랬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그것도 그 시기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의 철학'을. 덕분에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헉슬리 후기 모습에 대한 궁금증을 제대로 풀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다른 많은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가 풍부해진 듯 합니다. 특히 종교에 대해서라면 그것에 대한 시각을 근본부터 다시 되짚어 보게된 것 같습니다. 종교를 보다 폭넓은 시야로 이해하고 싶다면 분명 좋은 동반자가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종석의 문장 - 한국어 글쓰기 강좌 1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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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궐선거 결과를 보고 하도 열받아 '이 개 같은 나라에서'라고 제목을 썼다가 지웠다. 고종석이 그의 책 '문장'에서 자고로 글은 기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퍼뜩 생각났던 것이다. 읽지말 것을 그랬나? 이처럼 은근히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그래, 읽었다. 원래 글쓰기마저 이런저런 코치를 받아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는데 리뷰를 보니 하도 좋다는 말이 많길래 글 솜씨도 없고 귀도 한없이 얇은 나는 덥썩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고종석은 '왜 글을 쓰는가?'부터 시작한다. 아, 그 전에 고종석은 이름 뒤에 '씨'를 붙이는 게 좋다고 했는데 난 그냥 생략하련다. 마음이 무간지옥에 빠진 것처럼 착잡하니 그 한 자 쓰는 것도 귀찮아진다. 이러면 또 글의 기품이 없어지는데 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와인 마시는 것도 아니고 소주병 까고 있는데 기품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쓰다가 자판 위로 그대로 쓰러져 잠들 지도 모른다. 그러면 알 수 없는 자음과 모음의 수열들이 길게 펼쳐질 것이다. 흐음, 글의 앞은 기품이 흐르는데 뒤는 의미 불명의 긴 뱀꼬리라. 이거, 딱 '용두사미'가 아닌가? 그럴 바에야 한결같은 수준을 유지하는 게 차라리 더 기품을 지니는 길일 것이다. 하여, 자기 검열 따위 던져버리고 내키는 대로 쓰겠다. 당신은 지금 취중 작문의 현장을 보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더라? 아, 맞다. '왜 글을 쓰는가?'였지. 사실은 써 놓은 글을 다시 읽어봤다. 고종석은 조지 오웰이 말한 네 가지의 글쓰는 동기를 가지고 그것을 설명한다. 내 경우로 말하자면 순전한 이기심에서 정치 목적인 동기로 옮겨가는 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온라인에 지속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물만두님 추모 1회 리뷰대회 때였으니까 벌써 몇 년 된 것 같다. 정확히 얼마 되었는 지는 모르겠다. 술기운 덕분인지 기억이 안난다. 처음엔 그저 내가 좋아서 글을 썼었다. 방문자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내가 좋은 쪽으로만 썼다.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그러다 차츰 방문자 수가 많아지면서 그래봐야 병아리 눈꼽만큼이지만 누군가 읽고 있구나 자각했던 것 같고 내 생각을 전달시키기 위한 쪽으로 글을 썼던 것 같다. 좋아서 쓸 때는 잘 쓰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을 쓰자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오래 고여 있었던 그 마음이 결정적으로 이 책을 손에 잡게 한 것 같다. 내가 비록 문외한이긴 해도 예전부터 고종석이 글을 그것도 참 잘 쓴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책은 이론과 실기의 이중나선처럼 되어 있다. 하나를 설명한 뒤 하나의 실전으로 들어간다. 나는 실전이 재밌었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분명 나는 뒤에 '개인적으로' 썼을 것이다. 그런데 책의 실전 부분을 보니 '개인적으로'라는 말은 쓰지 말라고 하더라. '나는'을 이미 썼는데 왜 '개인적으로'를 또 쓰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나'가 개인적으로 말하지 집단적으로 말하던가?'라고. 읽는 순간 화끈했다. 자주 그런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아서 앞으로는 그러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처럼 시시콜콜하게 지적해 주어 난 실전을 흥미롭게 읽었다. 의외로 고쳐야 할 습관이 많아서 지금까지 내 글을 읽은 얼굴 모르는 모두에게 아주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좋은 글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의성어도 많이 배우고 색깔을 표현하는 말들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되도록 중언부언 하지 않고 접속사는 꼭 필요한 경우 아니면 생략해서 문장과 문장 사이가 긴장을 낳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어에서 유래된 '의','적' 표현도 가급적 삼가고 말이죠.


 이런. 하나하나 열거하다 보니 책을 글 쓸때마다 사전처럼 옆에 놓아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실전의 시시콜콜은 유용하다는 의미다. 소주가 바닥났다. 새벽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자조가 든다. 랭보처럼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 글쓰기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람 하는 생각도 든다. 위안도 희망도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오웰의 네 가지 동기는 하나만 빼고 다 헛소리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 개인의 순수한 글쓰기에 있어서만큼은. 그 하나는 순전한 이기심이다.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인가? 그래도 어쨌든 글은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쓰는 것 같다. 지금만큼은 이 지옥을 버티려고, 끝까지 버티려고 쓰는 것 같다. 다른 무언가로 뛰어들어서 이 짊어진 현실의 중력을 피하기 위해서 쓰는 것 같다. 정말로. 발 앞에 쓰러진 소주병처럼. 깨지지 않고 계속 뒹굴거리기 위해. 맞는 비유인건가? 여하튼 지금 내 생각은 그렇다. 사이먼과 가펑클은 험한 세상의 다리가 노래이길 바라고 나는 글이기를 바란다. 힘들면 힘들수록 많이 쓰길 바란다. 스티븐 킹이 말하길 글은 엉덩이로 쓴다고 했다. 이 참에 그 쪽 근육도 키워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리뷰란 결국 한 문장을 위한 쓸데없는 군더더기의 집합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좋다, 안 좋다를 말하는 그 한 문장. 이제와 깨닫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수고를 줄여주고 싶다.


 딱 한 문장으로 말하겠다. 이 책은 좋다. 이것만 읽기를...


다행히 자판 위로 안 쓰러졌다. 신의 가호일까? 이 나라에도 좀 주세요, 제발...



  



 
 
 
불평등의 킬링필드 - “나”와 “우리”와 “세계”를 관통하는 불평등의 모든 것
예란 테르보른 지음, 이경남 옮김 / 문예춘추사 / 2014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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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문장이 인상적이다. 불평등은 사람을 죽인다. 비유가 아니라 '팩트'다. 미국의 흑인들만 보아도 그렇다. 2008년에 인종과 교육이 결부된 불평등은 그 약자의 위치에 있는 흑인의 수명을 평균 12년 줄였다고 한다.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되고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사회주의일 때 비해서 사망률이 남자는 49%, 여자는 24% 증가했다고 한다. 물론 사회적 약자들의 수치다. 문자 그대로 불평등은 사람을 죽였다.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 계수가 증가할수록 사망률도 늘어났다. 이런 면에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있는 예란 테르보른의 책 제목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그 책 제목처럼 정말로 이 세계는 '불평등의 킬링필드'이니까 말이다.



 이제 불평등을 막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자기 목숨을 지키는 일인 것이다. 혹시 당신은 살만하다고 해서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1990년대에 영국의 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은 생명을 위협하는 불평등이 가난하고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지체 높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고 발표했다. 불평등의 생명에 대한 위협은 계층의 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일례로 2005년에 아이즈너와 애번즈는 상대적 박탈감이 건강을 악화시키고 사망률을 높인다는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았다. 근거로 오스카 상을 받은 배우들이 후보에 올랐다가 고배를 마신 배우들보다 평균 3년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을 들었다. 노벨상 수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수상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 보다 평균 수명이 더 길었다. 사실 이런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엄친아의 존재로 인해 고통받는 어린 학생들처럼 우리 역시도 상대적 박탈감이 가져다 주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한 지는 경험으로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런데 불평등의 폐해는 신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마음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스트레스가 아니라 타인을 믿지 못하는 불신에 대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불평등이 심화될 수록 타인에 대한 불신 역시 커진다고 한다. 국민들의 행복 지수가 가장 높다는 것으로 알려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국민들은 3분의 2가 타인을 믿을만하다고 여기지만 브라질 국민들은 겨우 3%만 그렇다고 생각한다. 불신의 정도가 불평등에 비례하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도 타인에 대한 불신이 매우 심해졌다. 이것이 또한 최근 더욱 극심화된 불평등의 효과인지도 모르겠다. 벤지만 디즈데일리는 '국민은 하나가 아니다. 사실은 부자와 빈자라는 두 개의 국민이 있다.'라고 말했다는데 과연 불평등이 그런 역할까지 한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 분열마저 가속화되는 것이다. 결국 불평등은 사회로 하여금 화합을 위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만들어 사회에 위기를 초래한다. 그런데 그 사회적 비용의 대부분은 소수의 재력과 권력 엘리트를 제외한 사회 성원 대다수가 부담한다. 이래저래 불평등이 심화될 수록 '돈 없고 빽 없는' 이들은 물고 뜯기게 되는 것이다. 몸도 상하고 마음도 크게 상처입지만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는다. 불평등이 심해지면 약자들도 더욱 무시되기 때문이다. 미국이 그렇다. 의원들은 결집도 못하고 로비력도 제로에 가까운 약자들을 자신들이 일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가볍게 무시한다. 그들은 그저 표가 필요할 때만 의미있는 존재들이다. 분열로 인한 사회적 비용 부담이 증가하게 되면 약자들은 더욱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거기에 쓸 자원을 사회가 마련하기 어려운 탓이다.


 불평등을 줄여야 할 당위는 이렇게 날로 커지고 있다. 그런데 불평등은 하나의 모습이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불평등엔 모두 세 가지 모습이 있다고 한다. '생명력 불평등', '실존 불평등', '자원 불평등' 이렇게다. 생명력 불평등은 '사회 구조에 속한 인간 유기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의 불평등'을 의미하고 '실존 불평등'은 자율성, 존엄성, 자유의 정도, 존중받을 권리, 자아를 개발할 권리 등 인격과 관련해 개인이 받을 수 있는 배당의 불평등을 의미한다. 마지막 '자원의 불평등'은 '행위자로서 인간이 활동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공평하게 제공받지 못하는 불평등'이다. 이것은 하나의 '퍼스펙티브'로 한 국가나 사회의 평등화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기도 하지만 지향해야 할 지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불평등의 세 가지 모습은 상호 의존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다고 한다. 이런 차원에서 결국 평등 문제는,


 발전하고 번성할 수 있는 인간이 능력에 대해 다차원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인위적으로 방해하는 장치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p. 211)


 그러한 폭력 혹은 인위적 방해 장치를 저자는 불평등 매커니즘이라 하여 주로 네 가지 행위 범주로 구분하는데 그건 '거리두기','배제', '위계화' 그리고 '착취'다. 이렇게 특정 행위 중심으로 범주적 세분화를 하는 것은 차이와 차별 구별 문제와 같이 불평등을 논의하는데 있어 불평등과 그렇지 않은 것들 사이에 개념 혼동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오히려 불평등한 상황마저 그렇지 않은 것으로 흔히 치부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그는 역사적으로 불평등이 지나온 궤적과 지금 세계의 불평등한 실상을 드러내고 이 불평등을 완화시킬 가능한 대안적 세력과 방법을 탐구한다. 거기서 그는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더이상 산업노동자가 변화의 주축이 될 수 없는 현실임을 분명히 하고 계급적으로 동질한 이들의 연대가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이질적인 사회적 연대'에 의해 평등의 미래가 좌우될 것이라 내다본다. 거기엔 제3세계의 도시 빈민과 변변한 자기 땅 한 뙈기 없는 농민들이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서비스업 분야 종사자들과 전문적인 중산층도 포함된다. 게다가 여성이나 소수민족 그리고 동성연애자들까지 저자는 중요한 평등화의 동력으로 생각한다. 아울러 그는 말한다. 예전에는 지배엘리트들도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평등화를 추진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불평등한 자들이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국가 전체가 퇴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다시 또 이렇게 단언한다. 이제 그렇게 평등을 공급할 수 있었던 세력들은 공급량이 부족해졌다고. 즉 더이상 위로부터의 평등화 노력은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 남은 길은 단 하나 밖에 없다. 저 이질적인 평등화의 동력들이 연대해 아래로부터 평등화를 가져오는 것. 평등은 이제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미래는 앞으로 불평등의 결전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위해 평등의 동력도 반평등의 저항 동력도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이합집산이 되지 않고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뭔가 구심점이 필요하다. 투쟁을 선도하고 일사불란하게 조직할 수 있는 세력 같은 것이.


 저자는 그 세력을 중산층으로 본다. 이제 자본주의의 핵심 영역에서 산업근로자의 세력이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당분간 평등의 기회는 노동운동의 힘과 리더십의 능력이 아니라 중산층의 방향 정립에 따라 좌우될 것이다.(p. 224)


 또한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새로운 21세기 '중산층' 시대가 바로 평등주의자들이 활약할 무대가 되어야 한다. 중산층의 모호한 계급 개념이나 제각각인 규모를 평가하는 문제는 지금으로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근로자, 농부, 전문가 같은 지배적인 사회적 정체성을 갖지 않은, 가난하지도 부자도 아닌 계층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지금 지구를 소유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다.(p. 226)


 예란 테르보른이 이렇게 중산층에 기대를 거는 것은 모호하고 어찌보면 텅 비어있는 것도 같은 정체성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잘 연대할 수 있으리라 보기 때문인 듯 하다. 무색의 물이 하나로 잘 섞이듯이 말이다. 중산층에 대한 낙관론일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지극히 현실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차라리 그 모호한 정체성을 디딤돌 삼아 세력을 만들어나가자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작금은 중산층 붕괴의 시대. 세계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중산층이 여지없이 내려앉고 있다. 과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중산층에게 그 역할을 맡길 것인지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쩌면 이 위기 때문에 더욱 중산층이 자기 보호를 위해서라도 단단히 연대하리라 기대하는 것일까? 저자는 아직 여기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사실 우리나라를 보면 불안한 예감이 든다. 중산층에게 닥친 위기가 오히려 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 집값을 보전하기 위해 불평등을 조장하는 당에게 표를 주는 것으로. 또한 임대아파트와 같이 있는 아파트 주민들이 임대아파트 아이들이 자신의 단지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학교로 가는 통학로 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문을 달아 막아버리듯 빈자들을 격리시키려 들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점점 게토화 되어가는 형편이니. 그러므로 더욱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등화의 염원을 가지고 이성적 판단과 실천적 노력을 할 수 있는 중산층을 키워낼 것인가가 아닐까 싶다. 지금으로 봐선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꽤나 어려운 문제다.


 '불평등의 킬링필드'는 이런 이야기다. 불평등의 전모를 밝혀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최근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었다. 이 책이 초유의 관심을 받았던 것은 불평등한 현실을 상세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제 불평등은 외면할 수 없는 화두가 되었다. 더구나 수명까지 줄어든다고 하지 않는가? 진지하게 살피고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그를 위한 출발의 책으로 삼을 수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