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후퇴 - 불신과 공포, 분노와 적개심에 사로잡힌 시대의 길찾기
지그문트 바우만.슬라보예 지젝.아르준 아파두라이 외 지음, 박지영 외 옮김 / 살림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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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는 후퇴하고 있다. 누군가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과거의 것들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세계화를 찬양한 지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이주민을 막으려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그기 바쁘다. 자신의 이익을 조금 손해 보더라도 인류 전체의 공영을 위해 힘을 쓰던 국가들은 이제 빠르게 그런 움직임을 걷어들이고 자신의 주머니가 얼마나 채워져 있는지만 신경쓰고 있다. 양극화가 도래했고 빈익빈 부익부가 흑사병처럼 거세게 퍼져나가고 있으며 인종주의가 부활하고 외국인 혐오가 증가하며 가부장주의가 활개를 친다. 시대적으로 한 물 간 것들이라 여겼던 것들이 무덤에서 부활하여 어느새 우리 옆가지 찾아와 버린 것이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트럼프 당선은 이러한 거대한 후퇴를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가 되었다. 브렉시트는 유럽 연합으로 대표되는 세계화에 대한 거부였고 트럼프 당선은 포퓰리즘의 복권이었다. 그 두 사건을 많은 이들이 충격 속에 받아들였고 도대체 이 시대가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하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궁금해 했다.


 이런 우리의 의문과 불안을 알고 전 세계의 유명한 지식인들이 나섰다. '거대한 후퇴'는 세계적 석학들의 지금 시대에 대한 진단이자 이러한 난국을 파국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대안의 제시로 가득한 책이다. 



 제목의 '거대한 후퇴'는 칼 폴라니의 유명한 책인 '거대한 전환'에서 따온 것이다. '후퇴'란 말은 사회 발전과 진보로부터 멀어지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쓴 것이다. 올리버 나흐트바이란 학자는 이를 두고 '퇴행하는 현대화'라 부르기도 했다. 칼 폴라니는 놀랍게도 오늘 날의 이 후퇴를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상품이 되는 시장경제사회가 되면 분명히 거기에 대해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라 내다봤었다. 모든 것이 시장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에 반대하여 국가가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바라게 되고 그리하여 국가 주도의 복지 국가로 변해가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즉, 어떤 하나가 지배적인 상황이 되면 필연적으로 대항 운동이 일어나는데, 알고 보면 그 대항운동이란 사실 반동 운동으로 방어적으로 과거로 회귀 하려는 태도인 것이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국가 주도의 복지 국가도 당연히 반동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신자유주의다. 복지국가의 전반적인 축소와 사회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모든 국가적 개입에 대한 공격을 기조로 하는.


 이런 신자유주의가 우리 시대를 지배한 것도 오래되었다. 자연히 이제 거기에 대한 대항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2011년에 일어난 월가 점령이 대표적이다. 지난 겨울 우리나라의 촛불 집회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탄생도 세계적으로 보자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에 기대어 오로지 제 배만 채울 줄 알았던 체제의 기득권 세력들은 모두 새로운 시대의 썰물 속에 깨끗이 쓸려가야 할 적폐세력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흐름이 무덤에 있어야 할 존재들을 좀비처럼 불러내게 된 것은 이전과 다르게 변화가 담아야 할 규모는 전 세계적으로 커졌는데, 아직 그 규모에 걸맞는 이념과 규범 체제를 마련하지 못한 데 있다. 다시 말해 지금은 전 세계적 규모의 일종의 아나키 상태라 할 만하다. 시대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대로 알려주는 좌표가 아직 미비하다 보니 기억 속에 늘 미화되기 마련인 과거의 것들이 과장, 왜곡 되어 정말 좋은 것으로 착각하고 사람들이 앞다투어 귀의하고 있는 형편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브렉시트요, 트럼프 당선이었다.


 그렇다고 힐러리 클린턴이 대안이었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더 끔찍한 선택일 수 있었다. 이 책에 실린 유명한 페미니스트 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이러한 사실을 통렬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무엇보다 페미니즘이나 인종 차별 반대주의 그리고 성소수자 운동 처럼 현재 신사회운동의 주류가 월가와 실리콘 밸리 그리고 헐리우드와 연합하는 것을 비판한다. 이런 식으로 인지 자본주의 즉 금융 세력과 손을 잡는 바람에 이러한 운동들이 오히려 사회 보장을 후퇴시키고 제조업과 중산층의 삶을 파괴해 온 정책들이 마련되고 집행되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그런 움직임을 진보 신자유주의라 부르고 클린턴과 오바마 정부로 구현되었다고 본다. 클린터과 오바마는 금융 세력과 손잡고 노동자의 생활 여건을 지속적으로 악화시켰다. 노조를 약하게 만들었고 실질 임금을 하락시켰으며 일자리를 불안하게 만들고 맞벌이 가정이 증가하도록 이끌었다. 서브 프라임 사태에도 불구하고 금융 세력들이 조금도 상처입지 아니하고 계속 주머니를 든든히 채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클린턴과 오바마의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흔히 진보라 불리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착취를 교묘하고 은밀하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빼앗아 간 몫도, 노동자와 빈민의 삶이 무너진 정도도 그들이 더 컸다.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바로 그런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자신의 몫을 마구 앗아가기만 하고 조금도 돌려주려 하지 않는 금융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였다. 힐러리 클린턴은 그 세력을 대표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트럼프로 돌아섰던 것이다.


 페미니즘과 월 가는 힐러리 클린턴을 중심으로 완벽하게 담합한 유유상종 무리였다.(p. 87)


그들이 여성, 소수자 그리고 동성애자 운동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 것도 여기에 있었다. 노동자, 빈민들이 느끼는 삶은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그런 운동들이 점점 부상하자 마치 사회가 꽤나 달라진 것처럼 포장되고 정작 자신들이 사회로부터 받아야 할 관심조차 받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사회가 그 운동들에 주목하는 것은 자신이 받아야 할 관심을 가로채 버린 것과 같았다. 지금 미국 민중들이 보여주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적의는 이런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의 중장년 여성들이 힐러리 클린턴 보다 트럼프를 더 많이 지지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현재도, 노후도 갈수록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여성 지위 향상 보다 경제적 지위 향상이 더 먼저였던 것이다.


 이 책에 있는 모든 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대안은 바로 이것이다. 진정한 좌익의 부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맑스의 계급 해방을 따르던 거대한 좌익은 무너졌다. 아무도 이제 계급 해방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석학들은 이제 거기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이념 아래에서 개별 운동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전체 운동의 맥락을 헤아리며 정말 필요한 목표를 향해 연대할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는 망설임 없이 맑스의 논문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세계를 너무 빠르게 바꾸려고 했다. 이제 세계를 자기비판으로 재해석하고 우리의 책임을 검토할 때가 되었다.(지젝, p. 360)


 그러고 보니 샌더스 선거 유세 때 흑인 여성들이 샌더스의 연단을 점거해 샌더스를 몰아내고 오로지 자신들의 목소리만 쏟아내던 광경이 생각난다. 샌더스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인 많은 이들이 그들을 비난했으나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흑인이고 여성인 점을 내세워 사람들이 '정치적 올바름'이 없다고 공격했다. 이런 식의 분리, 차이가 곧 적대가 되는 흐름을 막는 것이다. 시대의 거대한 후퇴는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우리나라 국민에게 그랬듯이 사람들에게 보다 본질적인 가치, 정의와 평등 그리고 공정에 관심을 갖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를 지키고 확대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움직임을 이끌어 낼 것이다. 너무 낙관적인 전망인가? 그런데 지젝 역시 그런 전망을 갖는다. 그는 마오쩌뚱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며 글을 끝맺는다.


 하늘 아래 거대한 무질서가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다.(p.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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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7-08-01 0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라고 할까 그런 건 앞으로 가다가 뒤로 다시 돌아가기도 한다더군요 지금이 뒤로 가는 땐가 싶은 생각이 조금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 해도 예전 것이 정말 좋은지 더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 안 좋았기에 바뀌기도 했는데... 옛날 일이기에 좋게 여기는 것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릴 때는 좋았는데, 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감상에 빠지지 않아야 할 텐데...


희선

헤르메스 2017-08-10 19:37   좋아요 1 | URL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라는 말씀에 저 역시 동의해요. 아마 기성 세대들이 박정희 시대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것도 그와 연장선상에 있을 거예요. 프로이트는 이런 것을 두고 퇴행이라고 부르더군요.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이 클수록 어린 시절 처럼 자신이 아무 걱정 없이 보호받을 수 있었던 과거가 대비되어 더욱 좋은 것으로 부각되고 현실의 고난을 무시하거나 거기서 달아나기 위해 미화된 과거에 스스로 취한다고 말이죠. 퇴행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고 과거든, 현재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시하는 게 보다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천 명의 눈 속에는 천 개의 세상이 있다 - 세상을 보는 각도가 조금 다른 그들
가오밍 지음, 이현아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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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손을 내밀어 악수하지만 

가슴속에는 모두 다른 마음

 각자 걸어가고 있는거야

 아무런 말없이 어디로 가는가

함께 있지만 외로운 사람들


- N.EX.T '도시인' 중에서

 범죄 소설을 즐겨 읽는다. 단순히 재미만을 위한 독서는 아니라고, 딴엔 인간 이해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라고 은근히 정당화 시키고 있다. 살면서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중엔 내가 가진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런 줄 알았는데 실은 저런 인간인 게 밝혀지는 반전을 선사한 이들도 다수였다. 사람은 양파껍질과도 같이 이 정도면 제법 다 파악했겠거니 싶다가도 또 전혀 새로운 유형이 나타나 내 입을 떡 벌리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러니 알고 싶었다. 할 수 있는 한 보다 많은 유형의 인간을 만나고 싶었다. 범죄 소설은 거기에 제법 유용했다.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없는 갖가지 형태의 인간들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소시오패스, 싸이코패스 까지도. 거기다 범죄를 매개로 한 것이라,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 내부의 음험한 성격이나 욕망이 적나라하게 발현되기 마련이라서 더욱 안성맞춤이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또 있었다. 그는 중국인이다. 이름은 가오밍. 평범한 직장인이다. 그저 사람에 관심이 많아서, 저마다 얼마나 다른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지 보고 싶어서 그는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나와는 다르게, 픽션이 아니라 실제의 사람들을. 그것도 평범한 이들이 아니라 마음에 커다란 병이 있거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을. 누가 원한 것도 아닌데, 자신만의 순수한 호기심으로 그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시간 여유가 생기는 대로 족족 중국 전역의 정신병원과 공안부 및 유관기관들을 찾아가 그들을 인터뷰했다. 이번에 나온 '천 명의 눈 속에는 천 개의 세상이 산다'는 바로 그 기록이다. 한 아마추어가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위해 집념과 끈기로 이루어낸 산물이다.



 여기에는 그렇게 만난 36명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그것을 모두 6장에 나눠 담았다. 사람들이 정말 다양하다. 우리가 흔히 다중인격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고 남들이 귀신에게 씌었다고 할 정도로 다른 사람을 똑같이 모방하는 여자도 있으며 매리 셀리의 소설에 나오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죽은 자를 되살리겠다며 시체를 반복적으로 훔치는 남자도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는 이런 경우 흔히 그들이 어떤 망상이나 우연히 갖게 된 충동 때문에 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고 나름 꽤나 논리 정연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행위도 그들의 입장에선 해야 할 이유가 충분한 합리적인 행위였다. 저자는 자신의 판단은 가급적 접어둔 채로 그들의 육성 고백을 최대한 담아낸다. 그것도 자신에 대해서 차분하게 충분히 설명하기 때문에 읽으면서 이들이 예외가 아니라 그저 나와는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받아들이는 태도가 좀 다른 보통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니 같은 것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얼마나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점차 납득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육체에 갇혀 있다. 나는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세계를 이렇게 보고 있지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보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내가 그들의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내가 보는 그대로 그들도 보고 있겠거니 추정할 뿐이다. 그 추정을 살면서 배운 온갖 지식을 근거로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진실로 과연 그럴까? 혹시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가 자신이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인공 지능이 만든 가상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처럼 별안간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이 실은 타인들에게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언젠가 이런 생각을 했다. 나만 그럴까? 많은 이들이 한 번은 나처럼 남도 나와 같은 세상을 보고 있는지 궁금증을 가지지 않았을까? 타인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어 불안도 느껴보지 않았을까? 헤겔에 따르면 우리에겐 본래적으로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고 한다. 인정 욕구가 하나의 본성처럼 자리잡은 것은 어쩌면 내 인식이 철저하게 내 육체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과 불안함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정이란 이름으로 타인에게로 끊임없이 가 닿으려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보고 있는 세상을 남도 같이 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이 책도 저자의 그런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타인은 어떻게 세계를 보고 있을까? 과연 그들도 나처럼 보고 있을까?' 이 질문에 보다 확실한 대답을 얻고자 그는 평범한 시야에서 가장 벗어나 있는 이들의 시선까지 알려 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은 외로움이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어떻게 하든 결국 '나' 혼자구나 하는 생각. 마주 보는 세상이 이렇게 보이는 것도, 이런 상념을 일으키는 것도 오직 나 혼자 뿐이라는 생각. 분명 천 명의 눈 속엔 천 개의 세상이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그것이 천 개의 외로움으로 보인다.


 우리는 저마다 끝까지 외로운 존재들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타인에 대해 조금은 관대해질 수 있지 않을까? 동병상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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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시대는 끝났다 - 우리 시대 페미니스트 4인의 도발적 젠더 논쟁
해나 로진 외 지음, 노지양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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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한 권의 책이 논쟁의 중심에 섰다. 미국의 페미니스트이자 저널리스트인 해나 로진이 쓴 '남자의 종말'이란 책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번역되었는데, 그 책에서 해나 로진은 지금 사회가 가부장제에서 가모장제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남자의 시대가 곧 종언할 것이라 내다 보았다. 아무 근거 없이 하는 말이 아니라 여러가지 통계들을 인용하여 구체적으로 증명했기에 첨예한 논쟁이 뒤따랐다. 이것을 캐나다의 유명한 토론 프로그램인 멍크 디베이트가 놓칠 리 없다. 즉각 해나 로진의 책을 가지고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스트들을 초빙하여 토론을 벌였다. 때는 2013년 11월 15일. 장소는 토론토.


 3,000개의 유료 객석이 전부 매진된 가운데 그 많은 방청객들을 앞에 두고 네 명의 논객이 남성의 시대가 끝날 것이라 내다보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서로 편을 갈라 젠더를 주제로 한 멍크 디베이트가 진행되었다. 내다 보는 쪽엔 '남성의 종말'을 쓴 장본인인 해나 로진과 모린 다우드(클린턴 섹스 스캔들과 관련해 쓴 칼럼으로 퓰리처 상을 탔고, '남자가 꼭 필요한가?'란 책을 쓴 바 있다.)가 편을 먹었고, 반대하는 쪽엔 커밀 팔리아(예술 종합 교육 대학 교수에다 사회평론가,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기도 하다. 전투적인 페미니스트들을 스탈린주의자라고 부르는 그녀는 현대 주류 페미니즘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페미니스트 중 한 사람으로 자신을 '안티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라 칭한다. 이미 그녀의 첫 저서, '섹슈얼 페르소나'로 페미니즘 진영에서 뜨거운 찬반 양론을 일으킨 바가 있기도 하다.)와 케이틀린 모란(패널 중 유일하게 영국의 페미니스트로 그 곳에선 '괴짜 페미니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의 '진짜 여자가 되는 법(이 책 개인적으로 추천!)'은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바 있는데 여성성을 말하는 데 있어 꽤 대담하고 별명처럼 페미니즘에 대해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그녀 스스로는 자신을 맑시스트라 부른다.)이 편을 먹었다.



 '멍크 디베이트'의 책들을 꾸준히 출판하고 있는 모던 아카이브에서 나왔다. '사피엔스의 미래'와 '감시 국가'에 이은 세 번째 책이다. 구성은 먼저 왜 이런 토론을 벌이게 되었는지 이유를 소개하고 그 뒤에 실제 토론한 내용들이 나오며 그 후엔 패널들이 토론 전 인터뷰한 것과 현재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페미니즘 비평가 중의 한 사람이자 남성 차별도 여성 차별만큼 중시해야 한다는 에쿼티 페미니스트(케이틀란 모란이 바로 이 입장이기도 하다.)인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와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진화하는 결혼(이 책도 개인적으로 추천!)'의 저자 스테파니 쿤츠가 토론에 대해 논평한 것을 마지막에 싣는 것으로 되어 있다.


 토론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다소 부질없는 일로 보인다. 토론은 직접 들을 때라야 비로소 그 의미의 파악도, 평가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용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분위기만이라도 짐작할 수 있도록 무모하지만 소개라는 것을 시도해 본다면,


 일단 토론의 포문은 토론의 대상이 '남자의 종말'이기 때문에 그것을 쓴 해나 로진이 먼저 연다. 그녀는 미국과 캐나다의 실상을 통하여 현재 역사적으로 정의해온 전형적인 남성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로 첫째, 남성들이 노동시장에서 실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둘째, 교육에 있어서도 한 개 대륙을 제외하고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대학 졸업장을 받는 이들의 60% 이상이 여성일 정도로 남성이 실패하고 있으며 셋째로, 남성이 주요 소득자인 전통적인 가정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고(이것은 특히 노동자 계층에서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었던 폭력성과 공격성을 잃고 있다는 것을 든다.


 서민층 남성들은 직업을 잃고 자신의 역할을 잃고 가족을 잃고 있어요. 여성들이 혼자 다 알아서 하고 있습니다. 과거 마초들의 본거지였던 곳, 전통적 가치가 중시되던 이 나라의 일부에서 이렇게 가모장제가 만들어지고 있어요. 제가 여성들에게 묻습니다. "왜 아이들 아버지하고 살지 않으세요?" 그러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해요. "집에 입 하나를 더 늘리고 싶지 않아서요."(p. 36)


 한 마디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남성성이 급격하게 퇴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그녀는 이제 남자들도 체모에 엄청 집착하고 있으며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든다.


 이에 반론을 펼치는 커밀 팔리아는 이러한 남성성의 퇴조를 심각하게 우려한다. 그는 이것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며 제조업이 쇠퇴하고 금융과 서비스업이 중심이 된 지식 사회가 되면서 육체 노동을 경시한 결과로 해석한다. 


 지식인 사회가 남성성과 남성다움을 일상적으로 모욕하면 앞으로 여성들은 성숙한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지도 않고 헌신과 희생을 존중하지도 않는 남자들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포용할 만한, 또는 반체제적인 레즈비언이 거부할 만한, 강한 남성성이 없다면 여성들은 여성으로서 중심이 잡히고 깊이가 있는 감각을 깨닫기 어려울 것입니다.(p. 41)


  그녀는 페미니즘의 적절한 임무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광범위한 차별과 불평등을 초래하는 경직된 사회 관습을 공격하고 재건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남성을 편견에 가두고, 하찮게 취급하며, 악의 근원이라고 비난하지 않고도 진보적인 개혁 운동을 펼치는 것은 과거에도 가능했고 지금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미국 페미니스트 저널리스트의 책과 글에서 가장 거슬리는 부분은 좌파의 위치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연중에 부르조아의 가치와 문화의 특권을 감싼다는 점입니다.(내가 정희진의 글에서 느꼈던 불편함을 콕 꼬집고 있어 이 부분을 읽으면서 놀라웠다.) 중산류층 엘리트들의 사무 능력이나 경영 능력만을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자 인류의 궁극적인 혁명으로 다루고 있습니다.(p. 43)


 특히 커밀 필리아는 현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라 그런지 현재 교육 체제를 많이 공격한다. 이런 교육 체제가 육체 노동 경시 경향을 더욱 확대시키고 있다면서 독일처럼 다양한 직업 훈련을 실습할 수 있는 쪽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음 토론자로 나선 모린 다우드는 남자다움의 기준이 이미 변해버렸으며 이제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 남자나 여자나 양성적인 특성이 존중되는 중성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데 여자와 달리 남자는 그 앞에서 여전히 머뭇거리고만 있어요. 왜냐하면 남자다움이라는 기준이 변하고 있는데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면서도 집에서 살림하고 애 보는 남자는 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죠.(p. 50)


 그러면서 이미 생물학적으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밝힌다. 진화 생물학자들은 앞으로 10만 년에서 천만 년 사이에 지구에서 남자들이 사라질 것이라 예측한 바 있는데 그 이유가 남성 염색체인 Y 염색체가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한 마디로 과거에 연연해하지 말고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정규 교육은 하나도 받지 않고 오직 집에서 홈 스쿨링을 한 덕분에 생각에 있어서 더욱 자유분방한 케이틀린 모란은 자신의 페미니즘을 이렇게 설명하면서,


 첫째, 꽥꽥거린다. 둘째, 칵테일을 연료로 한다. 셋째, 맑시스트다.(책에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이 실은 일본식 표현이므로 원래 표현에 맞게 '맑스'로 고친다.)(p. 56)


 자신은 친여성도, 친남성도 아님을 밝힌 다음, 남성과 여성 모두 공존, 공영(共榮)해야 할 존재라고 하면서 이 문제를 남자나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바라볼 것을 역설한다.


 고통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에서 평등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실패했다고 느낄 때 자신에게 선물하는 근사한 사치품이 아닙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고급 캐시미어 수면 양말이 아닙니다. 평등이란 인류에게는 공기나 물과 같은 필수 요소입니다.(...) 페미니즘이 남녀는 평등하다는 간결하고도 진실한 명제라면, 우리는 미래에 그 명제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남성들이 여성을 도와 평등을 쟁취할 수 있게 해줄 수도 있고, 여성들이 남성이 평등을 쟁취할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겠지요. 우리 앞에 닥친 문제를 '남자 문제' 혹은 '여자 문제'로 분리하는 것을 그만두고 모든 문제를 본질적으로, 다시 말해 '인류 공통의 문제'로 보기 시작해야 합니다.(p. 58)


 이제 겨우 책의 3분의 1만 소개했는데도 글이 이렇게나 길어졌다. 어쨌든 이것으로 대략 책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해나 로진은 서민 계층에서 더욱 두드러지는 가모장 가정의 증가를 '남자의 종말'에 대한 중요한 징후 중 하나로 해석했는데 거기에 대해 커밀 필리아는 엘리트 계층과 하위 노동자 계층 사이의 불평등한 임금 구조와 사회 양극화에서 기인한 것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문제는 남자들만의 문제로 볼 수 없고 그러한 것을 낳는 경제 구조를 바꾸는 사회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해 해나 로진도 동의하며 육체 노동이 주가 되는 분야의 임금도 지식 노동만큼이나 제대로 평가 되길 바란다는 말을 남긴다. 커밀 필리아는 더 나아가 교육 제도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이뤄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남성성이 결코 스스로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여성의 의료 시스템에 대한 논의도 있었는데, 나는 미국이 아직도 무급 출산 휴가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놀랍게도 전 세계적으로 무급 출산을 유지하는 나라가 세 나라인데 그 중 하나라고 한다. 그리고 스웨덴 역시 1년 동안 유급 출산 휴가를 여성에게 주긴 하지만, 특정한 행동만 하도록 압박하고 있어 문제라고 한다. 해나 로진에 따르면 스웨덴이 미국보다 여성들의 일터 환경이 더 불평등하다고 말한다.(헉! 스웨덴이 그럴수가! 조금 충격인 걸.) 마일리 사이러스에 대한 찬반 논쟁(아, 물론 여기서 토론의 대상이 된 마일리 사이러스는 정확히 2013년 8월 이후의 것이다(책에는 안 나와 있기에 굳이 밝힘.))을 통한 여성성에 대한 논의도 흥미로웠다.


 이 책을 읽고 느낀 것 혹은 나는 어느 편에 서는가 하는 것을 밝힐 시점인데, 나는 그것을 전문가 논평에 나온 스테파니 쿤츠의 말로 대신하려 한다. 


 남자는 퇴물이 아니다. 남자가 퇴물이라고 하는 것은 남성과 여성이 다른 욕구와 능력과 가치를 지니고 있고, 여성의 부상이 남성에게 위협이 된다는 주장일 뿐이다. 케이틀린 모란이 지적한 대로 우리는 지금 이 길을 함께 걷고 있다. 여성이 평등한 사회를 살아갈 때 여성의 파트너와 그 아들들, 형제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 된다.(p. 191)


 같은 전문가 논평을 한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는 이 토론을 논평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자기 분야에서 성공했으며 재기발랄하기 이를 데 없는 네 명의 여성들이, 음울하고 매사 발끈하며 '강간 문화(강간이 만연하고 사회에서 용인되는 환경)'에만 집착하는 현대 페미니즘 프레임에서 벗어나 젠더 정치를 논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시길 바란다. 이번 멍크 디베이트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고 남자와 여자 모두 한발 더 나아갔다.(p. 185)


 크리스티나 호프 소머스가 언급한 '강간 문화'는 우리나라 페미니즘에도 해당되는 것 같다. 현대 페미니즘 프레임이란 말마따나 때로는 그 사안이 모든 페미니즘의 생산적 논의를 다 잡아먹고 있다고도 보여진다. 젠더 정치를 보다 폭 넓은 시야로 봐라봤으면 하는 마음에서 권하고 싶은 책이다. 다들 하나같이 말빨도 좋고 내용도 쉬워서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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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7-24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산 문제는 남성의 비협조 문제만이 아닌 정부측의 국가적 압제가 많다고 생각해서 남성의 인식이 향상되어 개선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은 임금 격차부터 줄여 나가야 겠지요. 그게 출산과 육아 이후의 여성들에게도 도움이 될 테고요.

헤르메스 2017-07-25 03:52   좋아요 1 | URL
저도 전체적으로 동의합니다. 국가가 먼저 유급 출산 휴가를 장려하여 업무 환경을 적극 바꿔나가야죠. 어떤 책에서 봤는지 얼른 기억 나지 않는데, 사람은 많이 보고 낯익은 것에 대해선 관대해져 훨씬 쉽게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때문에 동성애의 경우에도 커밍 아웃을 보다 많이 하여 사람들의 시선에 많이 노출되는 게 낫다고 하더군요. 출산 휴가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쪽으로 국가의 선도적인 제도 마련이 많이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착각일 뿐이다 - 과학자의 언어로 말하는 영성과 자아
샘 해리스 지음, 유자화 옮김 / 시공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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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도킨스와 크리스토퍼 히친스 못지 않게 유명한 무신론자 과학자가 또 한 명 있으니 그가 바로 샘 해리스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에 나온 샘 해리스의 책을 '종교의 종말' 빼고는 다 읽었는데 '나는 착각일 뿐이다'는 2014년에 나온 것으로 2012년에 나온 '자유 의지는 없다'에 바로 뒤이은 저작이다. 샘 해리스의 책을 꾸준히 읽는 것은 두 가지 지적 자극 때문이다. 하나는 익숙한 것을 아주 낯설게 바라보게 하여 그 본질을 응시하게 만든다는 것과 끊임없는 회의와 의심으로 다소 모호한 상태로 내버려 두고 있었던, 그렇지만 다 안다고 여겼던 개념들을 명확하게 다듬게 한다는 것이다. '자유 의지는 없다'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만하다. 전작에서 '자유 의지'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박했던 그가 이번엔 '자아'가 착각의 소산이라고 말한다. 그 주장과 근거가 담긴 책이 바로 '나는 착각일 뿐이다'이다. 원제는 'WAKING UP'. 한국어 제목 보다는 원제가 이 책이 말하는 것에 더 적합하다. 정말로 이 책은 '깨어남'이라는 원제 그대로 '영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성은 얼른 정의하기가 참 어려운 단어다. 보통은 자기 존재의 참된 의미를 깨닫는 내적인 도정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샘 해리스의 영성도 이와 멀리 있지 않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다름아닌 신에 대한 믿음이나 종교 없이도 그런 영성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으로 '나는 착각일 뿐이다'는 바로 그런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지금 이 순간에 당신이 당신인 것 같다는 유일한 증거는 당신이 당신인 것 같다는(오로지 당신에게만 명백한) 사실뿐이다.(p. 79)


 책은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영성'으로 그는 영성이 무엇보다 종교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종교가 없더라고 영적 경험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 경험을 종교 체험으로 간주하고 종교를 벗어난 것은 영적 체험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은 그동안 자신의 모든 경험을 종교적 교리의 렌즈로 바라보는 데 너무 길들여져 있는 탓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그러한 영적 체험을 오히려 자신들이 믿는 신앙의 절대 근거 비슷하게 여기기까지 하는데 실제 영적 경험에는 그들의 전통적 믿음을 지지하는 근거가 전혀 없으므로 그것은 커다란 오류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느낌은 착각(p. 21)이라고. 뇌의 미로 깊은 곳에서 미노타우르스처럼 살아가는 자기나 자아라는 것은 없다고 말이다. 여기에 맞추어 자신이 말하는 영성이 무엇인지 정의한다. 그것은 바로 '나'라는 환영을 반복해서 잘라내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것은 굳이 신이나 종교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살기 위해 자유 의지가 필요하지 않은 것과도 같다. 과학으로 도덕이 가능하듯. 역시 영성도 가능하다. 왜냐하면 영성의 모범은 무엇보다 불교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과학자의 것과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불교의 영성 방법은 과학자의 것과 근본적으로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경험주의다. 불교의 가르침도, 과학자의 연구도 모두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경험을 매우 중시한다. 바로 이것이 왜 '나'가 착각이며 환영에 지나지 않는가에 중대한 근거가 된다. 이것은 2장, '의식'에 가서 본격적으로 설명된다. 의식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잘 보여줬듯이, 자아의 등뼈라고 해도 좋다. 우리가 '나'를 느끼는 것은 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식이라는 것은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주역에서 말하는 대로 외부에 있던 영혼의 침입일까?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물질의 변화일까? 샘 해리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의식의 탄생은 조직화의 결과임이 틀림없다. 원자를 특정한 방식으로 배열하는 것이 바로 그 원자의 집합이 존재하는 경험을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분명 우리가 성찰해보아야 할 가장 심오한 미스터리이다.(p. 75)


 그가 이토록 경험을 중시하는 것은 실체가 지금도 여전히 수수께끼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의식의 존재를 알려주는 것은 아직도 우리의 경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의문이 생긴다. 지금까지 의식에 대해 뇌를 통해 밝혀진 것은 뭐란 말인가? UCLA에서 신경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딴 인지 신경과학자인 그는 답한다. 그것은 의식 자체를 찾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의식의 내용을 찾은 것 뿐으로 현재까지 뇌를 통한 의식의 연구는 의식 자체와 의식 내용 간의 구분을 짓지 못한 채로 이루어졌다고 말이다.(p. 85) 그리고 두뇌가 결코 '나'라는 의식의 실재가 될 수 없음을 로저 스페리가 발견한 '분할뇌'를 통해 낱낱이 밝힌다. 분할뇌 사례는 두 가지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하나는 뇌의 좌우반구가 고도의 기능적 특수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예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 이렇게 두뇌 자체가 정보의 인식과 행위 의도 그리고 의식 경험 모두에 있어서 분리가 가능하니, 서로 다르게 활동하는 두뇌의 부분들을 두고 하나의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나 자신을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이 모든 별개의 의식을 포함하여 하나의 '나'라는 의식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직 알 수 없고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의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의 근거란 경험밖에 없게 된다.(그러므로 제목이 말하는 착각의 대상은 '나'라는 게 정말 있다고 생각하는, 그 실재에 대한 착각이다. 있는 건 다만 '경험'뿐이다. 이 경험주의는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적 정체성'과도 어느 정도 이어지는 것 같다.)


 3장 '자아'는 바로 이러한 나를 나로 여기게 만드는 경험에 대해 집중 탐구한다. 의식이 경험이라면 나를 나로 만드는 경험은 무엇인가? 그것은 둘이다. 하나는 신체적 연속성의 경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신의 연속성의 경험. 그런데 전자는 후자에 부수적이다. 정신적 연속성을 경험하기 때문에 신체적인 연속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이 '경험으로써의 자아'가 왜 우리의 전부인지에 대해 논증한다. 이것을 긍정하게 되면 왜 샘 해리스가 신이나 종교 없이도 영성이 얼마든지 가능한지 또 어떻게 과학적으로도 가능한지 이해하게 된다. 쉽게 말해서 자아가 단지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면 경험의 양태를 스스로 바꾸면 되는 것이다. 부정적 정서를 긍정적 정서로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얼른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은가? 바로 원효 대사가 말한 '일체유심조'다. 샘 해리스의 영성은 원효 대사의 것과 많이 닮았다. 그가 왜 불교적 영성 방법을 모범으로 삼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이런 식으로 4장, '명상'에서는 영성의 구체적 방법들이 자신의 실제 경험과 결부되어 설명된다. 알고 보니 샘 해리스는 이런 쪽의 경험이 아주 많았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세계에 안 가 본 데가 없으며 많은 스승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런 오랜 구도의 노력이 뒷받침 되어 있기에 그의 말은 단호하며 주장 역시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 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마지막 장으로 '구루, 죽음, 약물'이다. 왜 그런고 하면, 여기서는 임사 체험을 다루고 있는데 그 방면에 있어 최근 아주 유명해진 책인 이븐 알렉산더의 '나는 천국을 보았다'에 대해 아주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미국에서 발간되었을 때, '뉴욕타임즈' 베스트 셀러 1위를 무려 52주나 했다. 그만큼 미국에 끼친 영향이 컸다. 우리나라에도 발간되었는데, 아주 많은 이들이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이 그만한 파급력을 가졌던 것은 무엇보다 저자가 뇌를 전문으로 하는 신경외과 의사였기 때문이다. 그를 수술한 전문의마저 그의 두뇌가 완전히 정지했다고 증언했기에 저자의 임사 체험은 더욱 실제로 받아들여졌고 인기도 덩달아 높아졌다. 하지만 샘 해리스는 이 책에서 왜 그 책이 실은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가 제공한 증거는 잘못되었고 과학과 무관하다고 말이다. 나도 이 책을 읽었고 거기에 관련된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에 혹시 진짜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놀라며 읽었던 터라 샘 해리스의 반박이 인상깊지 않을 수 없었다. 근거가 설득력이 있어 더욱 그랬다. 그가 이븐 알렉산더에 대해 논박하는 것은 그 역시 임사 체험 못지 않은 초자연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초자연적인 것을 덮어놓고 믿지는 않았다. 진실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 오류 가능성이 다분한 것으로 남겨두었을 뿐이다.


 여기서 이 책의 진짜 목적은 어느 정도 드러난다. 샘 해리스가 이븐 알렉산더에 반대하며 취하는 태도가 실은 영성을 통해 체화시키고자 하는 태도인 것이다. 깨달음은 내 의지를 신이나 종교에 의탁하거나 초자연적인 현상들에 기대어 얻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약물과 같은 외부적인 힘을 매개로 이루는 것도 안 되는 것이다. 오직 비판과 회의가 생생하게 활동하는 이성을 통해 나아가야 하는 길인 것이다. 지금 내게 찾아온 경험이 무엇인가 끊임없이 해석하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지극히 이성적인 활동. 그것이 바로 샘 해리스가 자아의 망집을 허물고 그 무엇에도 기대지 않은 채로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닿고자 하는 영성의 도정이다. 이것은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과 유사하다.


 과학자로서 나는 근본주의 종교에 적대적이다. 그것이 과학적 탐구심을 적극적으로 꺾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마음을 바꾸지 말고,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과학을 전복시키고 지성을 부패시킨다.(p. 430)


 샘 해리스도 같은 것을 두려워 한다. 이성의 합리적 의심과 비판을 막는 모든 것들을, 그저 모든 것이 다 결론이 난 것처럼 달리 보고 생각하는 움직임들을 꼭꼭 자기 아래 가두는 모든 것들을. 부패된 지성이 뿜어대는 악취에 선량한 이성들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자유 의지'나 '자아'처럼 현재 마치 종착역처럼 되어버린 개념들을 허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영성을 단 한 단어로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바로 자유라고.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이런 자유 말이다. 나는 샘 해리스가 이 책에서 하고자 했던 말 전부가 바로 여기에 집약되어 있다고 본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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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의 감각, 초연결지능 - 네트워크 시대의 권력, 부 , 생존
조슈아 쿠퍼 라모 지음, 정주연 옮김 / 미래의창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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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시대가 달라지면 감각도 다르게 된다고 보았다. 니체가 주로 활동했던 때는 흔히 말하는 근대였다. 근대는 확실히 이전의 중세와 달랐다. 존 버거는 르네상스 이후로 우리의 오감 중 특히 시각이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근대는 한 마디로 시각 패권주의의 시대였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에 있다. 한편 시간이라는 게 생겨나 모든 일상이 정확한 시간에 따라 나뉘어졌다. 그리고 증기 기관의 발달로 속도도 생겨났다. 기관차와 자동차의 속도는 말과 자기 다리에만 익숙해져 있던 이들에게 이전에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빠르기였다. 이 미친 빠르기와 초 단위로 관리되는 일상이 니체에겐 거의 광기에 가까운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니체는 이런 시대를 견디려면 현재의 오감만으로는 부족하고 또 하나의 새로운 감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바로 그 감각을 니체는 '제 6의 감각'이라 불렀다. 니체에 따르면 여섯 번째 감각은 역사의 리듬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인류의 삶에는 언제나 일정한 속도와 경향이 있어서 자기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마라톤 선수처럼 코스 전체에 대한 감각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고 보았다. 종으로 역사와 횡으로 시대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감각인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증명하듯이 그런 감각을 가진 자들이 대체로 성공을 일궈냈다. 그런데 니체의 말대로 시대가 바뀌면 새로운 감각이 요청되는 것은 이처럼 시대의 변화에 따라 경험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현재는 또 근대와 다르다. 흔히들 지금을 네트워크의 시대라 말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연결된다. 잠깐 페이스북만 이용해도 무수한 사람과 정보에 접속할 수 있는 게 바로 우리다. 근대의 사람이 보고 다룰 수 있었던 정보의 양과 지금 우리가 보고 다룰 수 있는 정보의 양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일례로 근대와 더불어 시작된 언론은 당시엔 정보를 생산하고 여론을 주도하는 데 있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별다른 힘을 못 쓴다. 미국 대선에서도, 우리나라 대선에서도 언론의 영향은 미미했다. 이제 정보는 누군가에게 독점되지 않는다. 생산도, 유통도 모두가 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이렇게 시대가 또 달라졌으니 또 하나의 감각이 요청될 수밖에 없다. 여섯 번째의 감각을 넘어선 '일곱 번째의 감각'이다. 그것이 바로 미국 '타임'지 디지털 부문 편집장 출신인 조슈아 쿠퍼 라모의 생각이다. 바로 그 생각을 한 권의 책으로 밀도 있게 풀어낸 것이 바로 '제 7의 감각, 초연결지능'이다.




 제7의 감각은 간단히 말해 어떤 사물이 연결에 의해 바뀌는 방식을 알아내는 능력이다. 왜 이 능력이 필요한가? 그것은 모든 것을 연결하는 행위가 세상에 진정으로 새로운 역할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힘이 초고밀도로 집중되고 복잡하고 즉각적인 혼란의 위험이 발생한다. 폴 비릴리오는 배를 발명하면 난파도 동시에 발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와 똑같이 네트워크와 네트워크의 연결은 긍정적 결과 못지않게 부정적 결과 또한 야기할 것이다. 광범위한 SNS의 연결이 IS 테러집단에 악용되고 우리의 일상 생활을 방해하며 사생활 침해를 가져오는 것처럼 말이다.


 네트워크는 기존의 갈등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도 않지만 그 갈등에서 우리를 구해주지도 않는다. 네트워크는 오래된 증오에 새로운 충성심을 채운다. 그리고 과거의 원한을 더 사무치게 만들고 분노를 느낄 때 세상을 공격하기 더 쉽게 만든다. 인류가 비행기와 탱크 같은 '차가운 무기'의 세상에서 디지털 광신호와 생물학적 감염이 퍼져나가는 '뜨거운 무기'의 세상으로 이동했다고 단언하면 명쾌하겠지만, 사실 더 흥미진진하고 위험한 것은 차가운 시스템과 뜨거운 시스템의 생소한 결합이다. 우리의 미래에는 GPS와 TNT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비유도폭탄이 훨씬 더 정확하게 제 역할을 할 것이다. DNA 같은 구성물로 이루어진 병원균들이 네트워크가 알아낸 감염이 가장 용이한 장소에 배달될 것이다.(p. 113)


 '제 7의 감각'은 초연결사회가 가진 바로 이러한 동전의 양면을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부제가 '초연결지능'인 것은 바로 그런 연유다. '십계'로 유명한 폴란드의 영화 감독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는 동유럽의 개방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유와 더불어 이전에 없었던 죄악도 들어왔다. 그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혼돈을 주었다. 내 영화는 바로 그 혼돈에 대한 것이다.' 네트워크 시대도 이와 같다. 개인의 역량이 확장된만큼 위험 역시 커진 것이다. 저자가 '제 7의 감각'을 생존 본능으로 보는 것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사실 네트워크란 것 자체도 생존과 안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터넷'이란 개념이 최초로 세상에 출현한 것은 1959년으로 냉전시대 때였다. 그것을 발표한 사람은 바로 하워드 휴즈 항공사 출신의 전기 엔지니어인 폴 배런. 그 때는 아직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의 기억이 생생하여 특히나 미국의 경우 누구나 언제든 버튼 하나로 지구 모두가 끝장날 수 있다는 공포를 등에 짊어지고 다녔다. 최근에 나온 영화 '히든 피겨스'를 보면 바로 그런 시대의 분위기를 잘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미국 외교와 국방부의 주된 관심사는 적인 소련을 정복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위험을 잘 피할 수 있느냐에 있었다. 스프투닉 위성과 잇다른 로켓 발사 성공으로 언제든 자기 머리 위로 수소 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그런 위험 회피 원망에 더욱 불을 지폈다. 거기다 더욱 실제적인 문제가 있었다. 당시 미국엔 수많은 폭탄과 미사일 그리고 100만의 병력이 있었지만 실상 미사일 공격을 한 번 받으면 그걸로 응전이 영영 불가능해져 버리는 현실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미국 전역에 걸쳐 있는 미군 기지 간 연락망이 오직 구리선을 이용하는 전화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구리선은 미사일 공격에 쉽게 끊어졌고 통신이 원활하지 않아 미국은 즉각 대응이 어려웠다. 이 난점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폴 배런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폴 배런은 미군 통신이 가진 이런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 점에서 수십만 개의 점으로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이동하는 연결망 시스템을 착안한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것이 바로 '인터넷'이었다. 폴 배런은 말한다.


 '어떻게 연결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그것이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였다.' (p. 164)


 하지만 이런 생각은 미군 수뇌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터넷은 수직적 명령 체계가 아닌 대등한 참여로 이뤄지는 수평적 체계였고 이것은 당시 상명하달식의 통제와 복종에 익숙해진 군 수뇌부에 아주 낯선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반응은 폴 배런과 같이 일하고 있던 동료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군 수뇌부와 동료 전문가들 모두 '제 7의 감각'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처럼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곧 사장되고 말았다. 이런 결과를 낳은 그들의 낯설음을 결코 책망할 수 없는 것은 네트워크 시대가 그들의 그러한 반응이 당연했을 정도로 아주 혁신적은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카오스 이론'을 창설한 것으로 유명한 존 홀랜드는 그것을 '복합에서 복잡의 변화'라 부른다. 복합과 복잡은 다르다. 복합은 상호작용을 하는 다양한 부분으로 구성되더라도 예측에 따라 설계할 수 있으며 반복적으로 제작하여 사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복잡은 정확한 설계대로 제작할 수 없고 구성 요소를 통제하는 것도 어렵다. 바로 이런 설계와 통제 면에서 복합과 복잡은 차이가 많이 나는데 네트워크는 이러한 '복잡계'에 속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 네트워크란 새로운 상호작용이 마구 일어나는 저수지와 같아서 늘 새로운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과도적 상태에 있다. 존 홀랜드는 이를 두고 '창발'이라 칭한다. 상향식 상호작용이 전에 존재한 적이 없는 형태의 질서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완전히 달라져 버린 세계 안에서는 아무래도 새로운 감각을 갈고 닦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전과 다르게 네트워크 시대는 마이크로 소프트나 애플 또는 아마존이나 페이스북 그리고 유투브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선점 효과가 강력하게 작용한다. 제조업 중심의 2차 산업에서는 아무리 후발 주자라 하더라도 선발 주자가 올라간 사다리를 그들 역시 올라갈 수 있었는데(우리나라가 대표적이다.) 네트워크 시대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제 2의 아마존, 페이스북, 유투브가 잘 생겨나지 않는 이유다. 이것을 두고 저자는 '게이트 키핑'이라 부른다. 권력은 이제 얼마나 많은 연결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소를 얼마나 빨리 찾아낼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제 7의 감각'은 그러한 새로운 토폴로지, 즉 지형을 만드는 게이트를 찾아내고 만드는 능력이기도 하다. 


 책은 모두 415페이지로 다소 두툼한 편이다.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왜 지금 제 7의 감각이 요구되는 것인가?'에 대해 설명하고 2부에서는 '제 7의 감각'이 무엇인지 말하며 마지막 3부에서는 그 감각의 응용 같은 것으로 제 7의 감각의 저변 확대로 만들어 갈 사회의 변화를 그린다. '제 7의 감각' 뿐 아니라 갈수록 피부에 와 닿는 '네트워크'라든가 '정보화 시대'를 대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한 번쯤 호기심이 있었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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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5-20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 님 책 소개가 넘 좋아서 이 책 정말 읽고 싶어지는데요.
다음에 도서관 갈 때 『제7의 감각, 초연결지능』 함 대출해봐야겠네요.

헤르메스 2017-05-21 14:03   좋아요 0 | URL
웃! qualia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저도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