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 세상을 마주하는 시간
김진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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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분'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김진혁 피디는 알고 있다. 그가 EBS에 있을 때 만들었던 '지식채널e'는 내가 사랑한 프로그램이었다. 특히 그가 만든 '미야자와 겐지'편은 그 때까지 그저 '은하철도 999'의 원작 동화 작가로만 알고 있었던 겐지를 전혀 다르게 보도록 만들었고 인간적인 매력마저 한없이 느끼도록 하였다.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유투브를 뒤져 지난 방송분까지 다 찾아 보게 되었다. 그 정도로 내게 '지식채널e'는 각별했다. 몰랐던 것을 알게 하고 아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했다. 앎의 범위가 넓어졌고 아는 것은 깊이가 더해졌다. 그러니 김진혁 pd가 광우병을 소재로 한 '17년 후'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사측에 의해 보복성 인사를 당했을 때는 나도 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다시 돌아와 '다큐프라임'을 연출할 때도 사측은 그에게 똑같이 어이없는 일을 저질렀다. 그 때 그는 '반민특위'에 관한 것을 만들고 있었는데 70%넘게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이유 없이 제작을 중단 시켜버린 것이다. 그는 결국 11년간 일했던 EBS를 떠나게 된다. 권력의 눈치를 너무 보는 방송국에서 더이상 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런 그의 선택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지만 그의 손으로 빚어낸 프로그램을 다시 못보는 것은 안타까움이었다. 믿을만한 언론인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사실 요즘엔 그런 언론인이 서울에서 반딧불을 보는 것만큼이나 희소하다. 언론을 권력의 시녀도 모자라서 그 시녀의 시종이라고 일컫는 게 요즘의 현실이다. 편파와 왜곡은 일상이고 진실보다는 선동에 더 주력한다. 지금의 정부가 들어서고나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TV를 없애는 것이었다. 불공정하고 거짓된 말에 너무도 멀미와 피로를 느꼈던 것이다. 때문에 이렇게 김진혁 PD가 다시 돌아와 또 다른 형식으로 말을 걸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것이 바로 '5분'이었다. 나는 그것을 책이 나오고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난 이 책을 순전히 '김진혁'이라는 이름 때문에 읽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독립 언론 '뉴스타파'.

 '5분'은 거기서 만들어진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어봤는데 소재와 담론이 더욱 거침없어진 듯 하다. 책은 모두 '생각, 하다'와 '경계, 짓다'라는 두 개의 파트로 나누어 각각 9개의 꼭지를 담고 있는데 형식은 먼저 '5분'의 방송 내용을 수록하고 뒤에 그것에 관해 좀 더 상세히 설명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소재를 꼭 한국의 현실과도 연결한다는 것으로 항상 꼭지의 마지막은 그것과 상관있는 한국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아주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그 대상이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내가 처한 현실이기에 사유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이끈다. 더구나 여기에 실린 내용들은 오늘의 사회를 마주하노라면 꼭 한 번은 부딪혔을 문제들인지라 더욱 그렇다.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의무급식 중단으로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섰던 복지, 교학사의 친일적 역사 교과서 발간으로 더욱 관심을 불러일으킨 식민 사관의 극복, 젊은 시나리오 작가인 최고은씨의 아사로 불거진 열악한 영화판 종사자들의 문제, '안녕하십니까'의 대자보로 일깨운 이 모든 불의와 그로인한 아픔 앞에서 그저 나만 안녕하면 다냐는 문제 제기에다 정당한 파업권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해고당한 노동자에게 47억을 배상하라는 거의 살인이나 다름없는 판결로 수많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자살을 가져왔던 상황 앞에서 같은 노동자로서 느끼는 참담함 그리고 최근 어제 6030원으로 결정난 최저임금까지. 볼 때마다 한 번은 궁금했고 더러는 고민했던 주제들을 다루고 있으니 절로 사유로 참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 우리가 보아야 할 곳으로 데리고 가는 이 책 '5분'은 이 방송이 일종의 정신적 지주로 여기고 있는 미국의 언론인 에드워드 머로가 했던 방송 제목 그대로 'SEE IT NOW'라 할 수 있다.


이 책엔 '안녕들하십니까'란 대자보 전문이 실려 있는데 말미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정치와 경제에 무관심한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단 한 번이라도 그것들에 스스로 고민하고 목소리 내길 종용받지도, 허락받지도 않았기에 그렇게 살아도 별 탈 없으리라 믿어온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수조차 없게 됐습니다. 앞서 말한 그 세상이 내가 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묻고 싶습니다. 안녕하시냐고요. 별 탈 없이 살고 계시냐고.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 혹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자기 합리화 뒤로 물러나 계신 건 아닌지 여쭐 뿐입니다. 만일 안녕하지 못하다면 소리쳐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이 무슨 내용이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묻고 싶습니다. 모두 안녕들 하십니까.(P.93)


 당신의 대답은 무엇일까? 나는 결코 안녕하지 못하다. 나는 작년 세월호 이후로 눈물이 많아졌고 분노도 많아졌다. 사회를 바라볼수록 쌓이는 갈증을 해갈할 단비는 그 어디에서도 내리지 않고 오히려 상심으로 더욱 깊게 갈라지도록 하는 삽질만 가득하니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는 말처럼 그저 이곳을 떠나야 하는 생각뿐이다. 보도를 보니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자가 한 해만 7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젊은 세대의 70%는 한국을 떠나고 싶다고 답했다고도 한다. 이유는 사람의 가치를 전혀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란다. 나와 닮은 자들이 많다. 그만큼 여기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5분'을 읽어보면 희망을 가지지 않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나 최저임금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영화판 종사자들의 이야기는 사람의 가치를 하찮게 본다는 젊은 세대의 성토가 사실이며 언젠가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갖게 한다.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려면 언론이라도 공정해야 할텐데 공영방송이라는 KBS 사장이 선출되는 과정을 보노라면 그리고 권력자를 비판하는 인터넷 댓글마저 명예훼손으로 걸고 넘어지겠다고 나서는 지금의 방통위를 보노라면 공정에 대한 기대는 어림도 없는 전망이라는 것을 확신케 한다. 더구나 지금은 마치 대처의 이중국민 정책을 그대로 가져온 것처럼 온갖 라벨링으로 연대해야 할 사람들을 사분오열시키고 국민마저 부화뇌동하고 있으니 더욱 어디서 희망의 끈을 찾을까 요원하기만 하다.


 이런 심정은 김진혁 PD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본다. 무엇보다 그는 직접 경험까지 한 터이니까. 하지만 이 책은 울분의 토로가 아니다. 절망의 목록이 아니다. 이 책은 그럴수록 냉정한 눈으로 사태를 보려하며 정확히 문제를 짚으려 한다. 나는 그것을 특히 가난한 이들은 왜 보수적이 되는가'에서 느꼈는데 사실 누구나 알듯이 '국개론'이 유행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국개론'은 이 책에 나오는 '국가개조론'의 준말이 아니다. 가난한 이들이 정작 자신을 위하는 사람은 뽑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될 사람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서 지지하는, 그러니까 그들의 '계급배반투표'를 비아냥하는 말이 바로 '국개론'인 것이다. 실제로 2013년 대선 당시 저소득층의 60.5%가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는데이를 두고 유행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책엔 좀 다른 시각이 있었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정치사회 지도'를 쓴 손낙구의 분석이 그랬다. 그는 2002년부터 2008년까지 있었던 네 번의 선거를 분석했고 거기서 계급배반투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조사 결과 사람들은 이제껏 계급에 충실한 투표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계급배반투표가 아니라 투표할 이유를 주지못하는 정치 또는 정당 체제에 있다"(P. 201)


 이걸 보고 내가 퍼뜩 한 생각은 과연 내가 무엇을 아느냐였다.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섣불리 단정부터 내린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모든 문제를 바라보지는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너무 감정에만 치우쳐 냉정히 살펴보지 않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식채널e'가 그랬듯이 '5분'도 은연중 내게 설령 아는 것이라 해도 좀 더 깊이 내려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바닥까지 모조리 훑어본 뒤에 절망해도 늦지 않다면서...



 이로써 '5분'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내게 증명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꼭 생각해야 할 문제들을 짚어주는 데다 어떤  땐 그저 선입견이나 감정으로 대했던 문제들마저 냉정하고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하니까. 그렇게 보다 바른 판단으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이 되려는 책이 바로 '5분'이다. 이는 서문에 인용된 해직 언론인의 마음 그대로다.


 행복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적이 아니라 순간순간 행복한 때가 있어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행복한 순간들이 삶을 지탱해주는 거지,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은 아니다.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 있음에도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건 아닌 듯 싶다. 행복은 그런 분들과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p. 7)


 이 말에 따라 김진혁pd는 이 '5분'을 어떤 의미로 만들었는 지를 밝힌다.


 어떤 대단한 목적이 아니라 그저,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문득 발걸음을 멈추는 5분을 마련해주고 싶었고, 동시에 나 자신에게도 그런 시간을 마련해주고 싶었다.P.8


 5분은 하루의 입장에서 보자면 별 것 아니다. 하지만 언론 기자의 말대로 우리의 행복이 완벽한 하루에서 오지는 않는다. 때로  하루의 아주 작은 순간도 하루 전체를 행복하게 물들일 수 있다. 사람의 추억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순간이다. 그 순간이 삶 전체를 '그래도 살만했어.'라고 여기는 만족감을 낳게 만들기도 한다. 그건 불과 5분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행복이란 상황에서 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건 순간의 축적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내가 옳은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위해 용기를 내었던 순간, 아무런 계산 없이 타인을 돕고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었던 순간, 그렇게 세상에 굴하지 않고 내 인간다움을 증명했던 순간. 바로 그것들이 모여 행복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은 아닐런지.

 행복은 그런 순간들이 모인 모자이크일 것이다.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더 커지는.


 이 책은 보아야 할 지점들을 가리키고 좀 더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사유하도록 인도하여 그런 순간들을 더 많이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행위란 앎이 수반되어야 나올 수 있다. 오로지 실용을 위해 취득한 설익은 앎은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허다한 지식인들처럼 굴종을 낳지만 그런 타산없이 진실을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다른 앎은 옳은 것을 선택할 베짱을 줄 것이다. '5분'은 그런 베짱을 키우는데 좋은 조력자가 될 듯 하다.

 '5분'은 스스로 그런 베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즉 이 시대에 전혀 안녕하지 못한 자들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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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란 무엇인가 - 하버드대 최고의 심리학 명강의
브라이언 리틀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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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하버드대 성격심리학 교수인 브라이언 리틀의 '성격이란 무엇인가'는 성격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에 도전한다. 이 책은 모두 10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각각은 우리도 살면서 성격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한 번쯤 가졌봤을 질문으로 시작한다. 10개의 장은 모두 배턴을 주고받는 릴레이 경기처럼 앞 부분의 결론을 뒤에서 좀 더 확장해서 살펴보는 식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처음의 첫인상부터 마지막의 자아성찰까지 여러가지 재밌는 심리 실험과 지금까지 쌓인 연구 결과를 토대로 성격에 대한 보편적 궁금증뿐 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실까지 유쾌하고(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브라이언 리틀은 스스로 내향적이라고 하는데 책에 무던히 박혀있는 유머와 위트를 보노라면 정말 내향적일까 의심마저 들 정도다.) 친절하게 알려준다. 한 마디로 성격에 대해 이것저것 알고 싶었다면 추천할만한 안내서라고 하겠다.



 책의 매력은 처음 첫인상을 이야기할 때부터 드러난다. 우리는 늘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첫인상으로 상대의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고 자신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늘 상대의 첫인상을 헤아리고 이러저러한 사람이라 규정 짓는다. 하지만 리틀은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첫인상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그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행동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는가에 대한 연구에서 많은 자료로 증명된 사실 하나는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을 설명할 때 성격에서 원인을 찾는 반면 자신의 행동은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점이다.(p. 17)


 읽고 무릎을 쳤다. 우리는 정말 이렇다. 사소한 행동이라 할 지라도 우리가 할 때는 모두 이유가 있음을 알리고 싶어하고 타인의 경우엔 성격 탓으로 돌리며 말도 안 되는 이유 달지말라고 나무란다. 내가 성격대로 행동하지 않음을 알면서 남들은 성격대로 행동한다고 믿는 것은 모순이다. 리틀은 그러한 우리의 첫인상을 성격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내 개인 구성 개념에 근거한 가정이라고 정의한다. 개인구성개념이란 성격심리학의 용어로 사람에 대한 부분적인 사례 관찰로 한 개인을 구성하는 우리의 행위를 가리킨다. 우리는 개인 구성 개념으로 타인을 바라보는데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첫인상이 드러내는 진실은 타인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개인 구성 개념이다. 남을 판단할 때, 당신은 '이런 사람이구나'가 아니라 '나는 당신을 이렇게 파악하고 있구나'를 먼저 떠올려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 구성 개념은 사람마다 다르다. 타인을 좁은 스펙트럼으로 구성하는 사람도 있고 넓은 스펙트럼으로 구성하는 사람도 있다. 리틀은 이왕이면 보다 확장된 개인 구성 개념으로 타인을 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개인 구성 개념이 제한적일수록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예측하고 대처하기가 어려워 불안은 커지고 자유는 줄어.(p. 23)'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타인에 대한 적대감도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타인이 미운 이유가 사실은 바로 내게 있기 때문이다. 리틀은 적대감을 이렇게 정의한다.


 적대감은 스스로도 이미 부당하다고 판단한 구성 개념을 억지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다.(p. 23)


 리틀의 책은 이런 식으로 사고의 전환을 꾀한다. 우리가 판단하는 성격이라는 것이 우리의 수동적 관찰이 아니라 능동적 해석의 결과라는 것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타인과 세계에 능동적인 해석자로서 참여한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는 게 리틀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향유할 수 있는 자유의 폭을 늘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격을 좀 더 자유를 증진하는 쪽으로 파악하려 한다. 예컨대, 2장에서는 과연 우리 대부분이 믿고 있는 대로 성격은 고정적인 것인가(이는 심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윌리엄 제임스의 견해라고 한다.)를 묻는데, 거기에 대해 우리가 흔히 하는 생각과 달리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내향성 또는 외향성이라는, 윌리엄 제임스의 표현처럼 석고처럼 굳어진 특성으로 나눠 정해진 틀에 집어넣는 것을 결사반대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신의 성격을 그날의 상황에 맞추고, 우리 관심사를 발전시키는 쪽으로 사회적 자아를 맞춰가는 능력이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은 50퍼센트만 옳다(사실 우리 성격의 절반 정도는 유전적 영향을 많이 받고 나이가 들면서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게 연구로 밝혀졌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본질적으로 절반만 굳어 있다.(p. 73)'


 이는 단순히 그의 신념이 아니고, 연구로 밝혀진 것이기도 하지만 성격의 본질 때문이기도 하다. 성격은 원래 하나가 아니라 내적 현실과 외적 현실이 공존(p. 79)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현실이 만나는 지점에서 성격은 만들어지고 도전받고 재구성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든지 상황에 따라 내가 생각하는 내 성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격 심리학에서는 일상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의 동기가 모두 세 가지 차원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기질(이를 생물 발생적 근원이라고 한다.)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화에 따른 결과(이를 사회 발생적 근원이라고 하는데 이는 다양한 상황에서 그것이 적절한 행동이라는 인식이 그 사람의 생애를 통틀어 굳어진 것이라 말할 수 있다.)이며 마지막은 내가 추구하는 목표(이를 특수 발생적 근원이라 부른다)이다. 즉 누구나 삶에는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때로는 전혀 나답지 않은 행동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리틀은 이 세 번째의 것을 특별히 자유 특성이라 부르는데, 그만큼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이기 때문이다. 행동의 동기가 되는 성격을 이렇게 다양한 차원의 조합으로 이뤄지고 자유의 영역 또한 꽤나 큰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을 쉽게 고정되거나 수동적인 존재로 여긴다. 오래 전 MBTI가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그 때는 정말 너나 할 것 없이 별점을 보듯 MBTI를 했던 것 같다. 그건 성격의 레이블링(labeling)과도 같아서 우리는 네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유형을 브랜드라도 되는 것처럼 걸고 다녔다. 그것으로 우리는 타인을 쉽게 규정했다. 설령 그가 유형에 맞지 않는 행동을 과도하게 하더라도 그에 대한 내 개념이 오류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너 왜 이래? 너답지 않아?'하고 도리어 나무랐다. 그러니 '나다운 게 도대체 뭔데?'하며 거센 반박을 받아도 쌌다.


 '성격이란 무엇인가'는 내게 무엇보다 우리가 얼마나 타인에게 나 자신만의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지를 깨닫게 해 주는 책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나에 대해서도 얼마나 고정된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는 지도.


 비록 유전적으로 성격이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우리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상황에 따라 이런 저런 성격을 넘나들며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능동적인 존재였다. 그러니 나를 한정된 시야로 바라볼 필요는 없었고 타인에 대해서도 고정 관념을 가질 이유는 없었다. 나 자신이 내 상황을 헤아리듯, 타인의 상황을 헤아리는 것이 먼저였다. 이는 특히 리더에게 필요한 자질인데 특히나 스스로 창조적이라고 여길수록 더욱 요구되는 태도였다.


 연구에 따르면 아무리 '스티브 잡스'처럼 창조적인 인물이라 하더라도 독불장군 같은 성격이라면 이룰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성공적인 업적을 이룬 창조적인 리더를 연구한 결과 그들이 결실을 맺었던 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특성 때문임이 드러났던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세계에서 가장 대담하고 혁신적인 성취는 단 한 사람의 창조적 영웅의 머리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건 신화일 뿐이다. 이와 관련해 건축가 '대조군'의 특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앞에 나온 이들의 성격 특성을 기억해 보라. 이들은 책임감 있고, 성실하고, 신뢰할 수 있고, 믿음직 하고, 생각이 명확하고, 관대하고, 이해심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사교적이며 착실하고, 세밀한 작업도 불편해하지 않았다. 창조적 목표가 결실을 맺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특성이다.(p. 221)


 다시 말해, 아무리 창조성이 뛰어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인성이 뒷받침 될 때 좋은 성과도 얻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성이란 무엇보다 타인의 처지를 잘 이해하고 그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데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은데도 성과를 낼 경우, 그건 그가 잘 나서라기 보다는 주변 타인들이 그의 그릇된 인성을 참고 잘 도와준 결과였다. 그들의 희생이 뒷받침 되어 나타난 성과였던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 자기 주장이 강한 창조적인 사람과 일을 할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더 불안하고 심리적 적응도 낮다고 한다.


 이렇게 보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도 나를 좀 더 내려놓고 타인을 환대하는 게 필요했다. 미국의 회사들이 왜 창조적인 인재보다 협력 잘 되는 인재를 더 선호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브라이언 리틀의 '성격이란 무엇인가'는 이런 식으로 내 생각의 눈금과 타인에 대한 시선을 다시 조정하게끔 만드는 책이었다. 타인을 의식하는 정도가 삶에 미치는 영향이라든지, 성격과 장소의 관계라든지, 내 삶을 스스로 얼만큼 조절해야 하는지 등등 성격과 삶의 관계 전반에 대해 다루고 있어서 유용한 정보들이 꽤 많았다. 평소 성격에 대해 많이 알고 싶었다면 딱 적당한 안내서가 되어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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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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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이방인이다.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 2세로 태어나 죽 그렇게 살아왔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 그는 외국인이었다.

 외국인. 그는 경계 위에 사는 자다. 아니, 그 자신이 바로 경계다. 그는 서 있는 그 곳에서 자신을 타자로 만드는 국가와 대립하고 있다. 개인과 국가의 정체성이 맞부딪힌다. 국가는 평평한 대지다. 고정되고 동일한 정체성이라는 롤러로 밀어버린 포장도로와 마찬가지다. 거기서 외국인은 언덕 혹은 구멍으로 존재한다. 내리누를 수도, 메울 수도 없는 빈틈이 되어 균질된 국가에 불균질을 가져온다. 그렇게 하여 국가가 하나의 인위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힌다. 외국인이 국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이란 존재로 인해 국가가 재정립 되기에 그렇다. 외국인의 정체성을 기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힘은 거꾸로 흐른다. 국가는 외국인에 대한 반정립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세공해 나간다. 외국인에겐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뽑도록 강제하면서 거꾸로 국가 자신은 뿌리를 더 깊이 내리려 한다. 자기 정체성의 부유함을 위해 외국인을 흡혈하는 것이다.



 그런 국가에게 외국인은 더이상 고유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국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하여 그 반대 명제로써 차용해야 할 특수한 맥락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외국인이 가진 존재 본연의 모습이 어떤 지에 대해선 국가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누가 되었던 외국인은 국가에게 그저 백지다. 그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다시 쓰기가 가능한, 인위적으로 산출되는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외국인은 문학이다.


 그것은 외국인이라는 존재 규정이 주로 증언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일본은 통신사의 증언으로, 미국은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증언으로 우리에게 도래했다. 그와 똑같이 중국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허다한 선교사들의 증언으로 유럽에 소개 되었다. 돌연한 외국인과의 첫 만남은 먼저 텍스트의 매개, 즉 문학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외국인은 문학으로 존재한다. 문학이 허구의 생산물이라고 한다면 외국인도 그러하다. 본질은 상관 없다.


 그런 외국인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시를 썼다. 열 다섯의 나이였다. 자신의 조국이라 생각했던 곳을 방문한 뒤다. 고향의 실체를 움켜쥐고 싶어서 떠난 여정이었다. 거기는 일본에 의해 정체성이 강제적으로 규정되고 늘 뭔가 모자란 존재감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충만한 존재감을 주리라 기대되던 곳이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증언자'가 되려 했다. 존재 본연의 모습을 헤아리려는 노력 없이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적인 시각에서 단편의 인상만을 말할 뿐인 '목격자'들의 증언에 대항해 그들이 외국인으로 규정하는 타자 본연의 모습은 어떠한 지를 증언하려 했던 것이다. 문학에 문학으로 대항한 셈이다. 그의 시는 그렇게 나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란 존재자에게 은폐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장소였다. 그것이 그의 시였다.


 시란 고유한 존재의 증명, 국가에 의해 탈취된 존재의 회복이었다. 그러한 시 앞에서 외국인을 만들고 그 경계가 있어야만 존속할 수 있는 국가는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게공선'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일본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작가였던 고바야시 다키지가 1933년 2월 20일, 특별고등경찰에게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숨졌을 때 중국의 루쉰은 적국 일본의 사람이었던 그를 서슴없이 '동지'라 불렀다.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 안내'란 책에서 루쉰이 이렇게 말했다고 증언했다.


 고바야시 다키기자 1933년 2월에 살해되었을 때, 루쉰은 일본어로 이렇게 말했다.

 "동지 고바야시 다키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

 일본과 지나의 대중은 원래부터 형제이다. 자산 계급은 대중을 속여 그 피로 경계를 그었으며, 또한 지금도 긋고 있다.

 그러나 무산 계급과 그 선구자들은 피로 그것을 씻어내고 있다.

 동지 고바야시의 죽음은 그 실증의 하나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잊지 않는다. 우리는 견고히 동지 고바야시의 혈로를 따라 전진하여 손을 맞잡을 것이다. 루쉰"    (p. 100)


 루쉰에게 다키지는 일본인이 아니었다. 국적은 아무 의미 없었다. 있는 것은 다만 같은 신념으로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지 뿐이었다. 루쉰에게도, 다키지에게도 시가 있었다. 그도 결국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통해 자신이 싸워야 할 현장은 나라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보편의 개념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편으로 여겼던 것은 특정 체제와 국가가 중심이 된, 사실은 특수한 것이었다. 그것이 고통을 가져온다면 많은 이들을 억압하고 권력 아래 가둬둔다면 이제 우리는 다른 특수를 찾아야 하고 그 특수가 보편을 획득하도록 해야 한다.


 현대 세계를 글로벌 자본주의가 석권하고 있는 와중에 인간 해방을 위한 대안이 없다면 이러한 자본주의의 보편성에 저항하는 쪽의 세계적 보편성을 찾아야만 한다. 이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세계문학에 요구해야 할 보편성이다. (p. 166)


 사실 특수와 보편이 생각만큼 분명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외국인이란 존재가 자의적이듯, 보편과 특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 선이 분명하게 보였던 것은 누군가 명확히 금긋기를 하고 있던 탓이다. 그 금긋기가 국가를 만들었고 사람들은 이념이 아니라 국적 때문에 서로 타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 선이 가없이 자의적임이 밝혀진 이상, 서로를 나와 다른 얼굴로 여길 필요는 없어졌다.


 재일 조선인인인 나,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싸우는 이들, 팔레스타인 사람.... 우리는 서로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다. 쉽게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격려하고 있는 것이 근대 식민주의자들이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경계선인 이상, 식민지주의와의 부단한 투쟁 과정에서, 또한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서로 만나고, 새로운 차원의 우리를 향해 자기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보편성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p. 167)


 시는 국가를 분쇄한다. 그들이 나누는 인위적인 경계, 그리하여 디아스포라를 자유가 아니라 결핍으로 만드는 모든 획책을 허문다.

 시는 모두를 외국인으로 만든다. 국가가 포섭할 수 없는 불균질의 영토로, 그 자신이 저항의 거점이 되도록 호명한다.


 요즘들어 갑자기 애국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애국이란 말이 사용되는 것은 대부분 국가가 국민에게 뭔가 요구할 때이다. 최근엔 애국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임금 피크제를 수용하라고 한다. 가뜩이나 경기가 어렵고 물가는 올라서 쓸 돈이 적은데 이제 노동자더러 보장되지 않는 정년과 갈수록 적어지는 임금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 애국은 늘 약하고 가진 것이 적은 사람에게만 강요되는 것일까? 왜 재벌에겐 애국으로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것일까? 애국이라는 게 이토록 일방적이라면 도대체 애국의 대상이 되는 국가는 무엇일까?


 미국 프리스턴 대학의 정치학 교수 마우리치오 비롤리는 패트리어티즘과 내셔널리즘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패트리어티즘은 몇 세기에 걸쳐 하나의 집단 공동의 자유를 지탱하는 정치제도와 생활양식에 대한 사랑, 요컨대 공화정 전체에 대한 사랑을 강화하거나 환기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내셔널리즘이라는 단어는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한 국민의 문화적, 언어적, 민족적 통일성과 동질성을 옹호하거나 강화할 목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공화주의 패트리어티즘의 적이 폭정이나 독재정치, 억압과 부패였던 것에 반해 내셔널리즘의 적은 타문화에 의한 자문화 오염, 이종 잡교, 인종적 불순,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지적 불통일이다.(p. 257)


 그들의 애국은 패트리어티즘이 아니라 내셔널리즘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된 것일 뿐이었다. 진정한 의미인 애국, 즉 패트리어티즘엔 보다시피 국가란 없다. 다수의 자유를 억압하고 소수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말하자면 마르크스가 말했던 부르조아의 집행위원회(최근 대법원의 한명숙 판결은 지금의 국가가 이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으로써의 국가는 없는 것이다. 시는 바로 그러한 패트리어티즘으로 이끄는 손짓이다.


 시는 국가만이 전유하고 있던 문학적 쓰기에 수많은 가필로 그 언어와 용법을 해체하고 새로운 언어와 문법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저자가 어머니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다. 그의 어머니는 문맹이다. 처음에 그는 그런 어머니를 부끄러워 했다. 하지만 시로 인해 현상이 아니라 상황을 볼 수 있게 된 그는 어머니의 문맹이 일본 식민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결과였음을 받아들인다. '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커다란 역사나 사회구조의 반영'(p.182)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당시 어머니는 무려 네 개의 벽에 가로막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젠더(가부장제), 경제(빈곤), 민족(식민지 지배), 정치였다. 장벽이 무려 네 개나 되었으니 그녀는 정말로 갇힌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굴하지 않는다. 설령 글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산다고 하더라도, 두 아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 조국에서 수형자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승복하지 않고 탈주와 저항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일본에는 '다노모시코'라는 재일 조선인만의 풀뿌리 네트워크가 일본 국가의 권력을 교란시키며 한국에서는 비전향범의 어머니라는 신분이 국가 권력과 맞서게 한다. 국가화의 산물인 언어는 몰랐지만 오히려 비언어가 줄 수 있는 더 큰 자유로 권력이 만든 모든 장벽을 초월한 어머니는 그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어머니와 같은 존재(교육받지 못한 민중)의 목소리를 해석하고 언설화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으로써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께름칙함에 시달리게 된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어머니는 이러한 뼈아픈 반성을 촉구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교육받고 지식을 몸에 익힌 다음, 그 필터를 통해 해석하는 특권을 행사하는 상대에게, 특권을 지니고 있기에 갖게 된 권력을 자각하게 만들었달까. 나아가 그 특권을 지닌 인간이 있는 그대로를 겸허하게 응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힘을 가진 어머니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p. 194)


 아마도 그 겸허한 응시가 '시의 힘'이 최종적으로 가져오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그 힘은 우리 모두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파리아'로 만드려 한다. 파리아는 원래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여기서는 어떤 사회, 제도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를 가리킨다. 모두가 파리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평등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시의 힘은 그것을 갈구하며 그가 쓴 책, '시의 힘'은 그 갈구를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서경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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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과 반전의 순간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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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을 오래도록 많이 들었다. 자연히 신뢰하는 평론가가 있게 마련인데 강헌은 그 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있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강헌의 첫 책이다. 놀랐다. 얼마나 오래도록 활동했으며 유명세도 제법 있는 편인데 이제야 첫 책이라니!(가장 첫 페이지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호는 의박이며 자는 산만이어서 나이 50이 넘도록 책 한 권 내지 못한다. 책 표지에 들어가는 프로필을 쓰게 되어 만감이 교차한다.) 또 하나 딱따구리가 뇌리를 쪼았던 순간은 강헌이 팟캐스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무려 2013년부터! 헉! 나는 그 사실을 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진작 팟캐스트와 친하게 지내볼 것을!'하는 후회를 더운 여름 밤의 맥주처럼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 책이 있어서.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2013년부터 시작된 팟캐스트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 한다. 물론 녹취록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고 한 권의 책이라는 완결된 형태로 만들기 위해 내용을 대폭 보완했다고 한다. 나처럼 뒤늦게 팟캐스트(나는 끝까지 팟캐스트가 방송법 적용을 받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 '방송'이란 용어를 쓰지 않으련다.)의 존재를 알게 된 이를 위해 커다란 선물이 아닐 수 없다.(굳이 '커다란이란 형용사를 쓴 것은 이 책을 통해 정말로 많은 것들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20세기 이후 인간의 일상에 음악이 개입하지 않는 순간은 없었다.'고 믿는 강헌은 비록 음악이 인간이 의식과 무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기긴 하였지만 '음악만큼 신비화의 추앙을 받은 예술도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또한 시행착오의 존재인 인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역사적 생산물 중의 하나일 뿐이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 생성되는 예술적 욕망의 결과물일 뿐이다.' 여기서 나는 어떤 문장을 특별히 볼드체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음악을 투시하는 데 있어 이 책이 취하는 방법론의 가장 기본이 되는 소실점이기 때문이다. 강헌은 음악을 사회적 생산물로 바라본다. 아무리 뛰어난 음악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전적으로 천재의 영감이나 내재된 가치의 탁월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정한 사회적 환경의 반향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마치 마르크스의 '생산양식'과도 같이 음악도 일정한 형식의 음악을 탄생시킨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조건들이 중요하기에 그는 역사를 훑는다. 표지에 나오는 'MUSIC IN HISTORY, HISTORY IN MUSIC'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 기나긴 음악사 속에서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특별히 네 개의 역사적 순간을 담는다. 제목 그대로 과거를 전복하고 음악의 진화를 가져온 대표적인 순간이다. 하나씩 간단히 열거해 본다면 이러하다. 먼저 메이저리티의 전유물이기만 했던 음악을 마이너리티의 손으로 쥐게 만든, 진정한 의미의 전복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재즈와 로큰롤의 탄생, 그리고 우리나라의 60년대, 독재의 시퍼런 칼날 아래서 숨죽인 민중들에게 자유와 저항의 바람을 불어넣었던 통기타 혁명과 그룹 사운드, 여기에다 지금은 가장 대표적인 클래식으로 추앙받으나 당대에는 왕정 중심의 클래식에 반발해 자신의 음악에서 공화주의적 정신을 고취한, 한 마디로 안티클래식이었던 모차르트와 베토벤(특히 이 부분에서 살리에르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반전이다. 강헌은 지금 우리의 살리에르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오해에 불과한 지를 여기서 조목조목 밝히고 있는데 거기에 맞춰 모차르트와 베토벤 또한 재평가 된다.)에다 마지막으로 군부시절만큼이나 자유와 희망이 억압되었던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절, 어떻게 일본의 엔카가 한국의 트로트가 되어 대중음악사를 비로소 열어젖히게 되었는지 그 '반전'의 순간을 윤심덕의 '사의 찬미'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중심으로 담는다.


 그런데도 페이지는 357이나 되고 글자 폰트도 겨우 9(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무튼 보통의 책 폰트보다는 작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겨우 네 개의 장면을 담는다지만 그와 관련해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지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이 책은 시쳇말로 '정보의 바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재즈부터 트로트까지 다양한 음악 형식에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태어나게 만든 미국과 유럽 그리고 우리나라의 6, 70년대와 일제 시대 사회상에 대한 것까지 페이지마자 정보들이 좁쌀처럼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책도 음식과 같아서 알찬 정보들을 많이 섭취하다 보면 책 한 권을 다 읽었을 때 포만감을 느끼는 데 이 책이 정말 그렇다. 어쩌면 너무 많이 먹어서 한동안 책을 내려놓고 숨을 골라야 할 지도 모를 지경이다. 무엇보다 재즈와 로큰롤의 입문자라면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이 책엔 빛나는 순간들이 많은데, '역시 강헌이구나!' 느끼게 되는 순간들로 '점원들'이나 '체이싱 아미' 같은 영화로 유명한 감독 케빈 스미스가 톰 크루즈를 인터뷰할 때 호들갑을 떨면서 톰 크루즈 영화엔 톰 크루즈가 빛나는 '톰 크루즈 순간'이 있다고 드립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따와 나도 '강헌 순간'이라 부르련다. 그런 '강헌 순간'에서 가장 눈부신 장면은 역시 김민기의 '아침 이슬'의 곡 전개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아침이슬>에 대한 설명은 138페이지에서 143페이지까지 6페이지에 걸쳐 전개되는데 그 중 절반이 '아침이슬'의 음악적 구조에 대한 설명에 할애되어 있다. 분량만 봐도 얼마나 곡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길어서 인용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인데 간단히 정리해 본다면 원래 대중음악은 형식적으로 A-B-A로 구성된다고 한다. 여기서 A와 B는 테마로 아름다운 선율로 청자를 이상향과도 같은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A테마가 있고 그것에 이어 열창을 통해 더욱 드라마틱하게 발전시키는 B테마가 있다는 것이다. 강헌은 이렇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내 생각에 B테마는 A테마가 그리는 세상에 들어가지 못하는 지금 내 삶의 불안, 고통 같은 것이 반영된 게 아닐까 한다. 결코 열리지 않을 유리창으로 이상향을 바라본다면 내 삶의 누추함이 더 강조될 터이니까 말이다. 강헌은 가요가 대중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마지막에 가서 다시 A테마로 돌아와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A-B-A인 것이다. 거기엔 현실에서는 가 닿을 수 없는 세계를 노래로나마 닿고 싶어하는 대중의 마음이 투영된 한 편, 현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변화시켜 A세상을 추구하겠다는 대중의 의지가 녹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아침이슬'은 이 구조를 배반한다. '나 이제 가노라~' 후의 부분은 A테마로 돌아가지 않고 전혀 다른 C테마로 청자를 데려가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당시의 기준으로 봤을 때 이 노래의 상업적 가치는 끝난 것이라 강헌은 말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이 노래는 7080 세대의 가장 대표적인 노래이나 당시엔 3천장 밖에는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음악을 사회적 환경의 반향으로 보는 강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가 많은 이들에게 불려줬던 사회적 맥락을 읽어낸다. 바로 그것이 '대학생'이 주축이 되었던 청년 문화가 가진 한계의 반영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과 끝없이 타협해야 하는 선민 집단의 일원이면서도 기존의 기득권 세력의 비민주적인 전횡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길을 새롭게 모색해야 했던 이 혁명적 낭만주의의 자식들에게, 이 대책없는 C테마로의 도약은 바로 낭만주의 그 자체였다. 혁명은 낭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다시 A테마로 돌아와서 대중성을 쟁취하고 권력을 쟁취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장 낭만적인 초원의 지평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것이 1970년대 청년문화의 혁명적 낭만주의 감수성과 그 구조가 딱 들어맞았다.(P. 142)


 그렇다고 이게 딱히 그 세대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당시 혁명은 낭만화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혁명이 정말 무엇이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치열한 고민이 없었다. 그저 자신들을 억압하고 폐를 조이는 군부독재라는 장막만 걷혀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다 누리는 표현의 자유를 조금도 누리지 못한 채, 바보로 살아야 하는 시대를 끝장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낭만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그 시대의 한계가 그대로 정체되어 또 다시 지금 이 시대를 과거로 회귀하게 만드는데 주역을 담당하도록 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노래 하나에 대한 치밀한 분석으로 이렇게까지 담아내는 것은 내게 무엇보다도 '강헌의 순간'이었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이런 이야기로 가득찬 책이다. '아침 이슬'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인용한 것도 이 책이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보이기 위함이었다. 살리에르에 대한 부분도 그렇고, 엔카와 트로트의 역사나 음악에 대한 구조적 분석도 그렇고, 인용하고 싶은 부분이 참 많은데 리뷰가 너무 길어질까봐 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한대수와 신중현(신중현은 박정희에게 가장 많은 탄압을 받은 뮤지션이다. 이유는 너무도 약소했다. 박정희가 일제시대 총독부가 행했던 선동 가요를 본받아 정권 선전을 위해 자신이 직접 노래를 만들어 음반을 제작하려고 신중현에게 의뢰했는데 신중현이 가타부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중현은 그 뒤 '대마초 사범 연예인 1호'가 되어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탄압을 받는데 한 마디로 '괘씸죄'였다. 원래 우리나라는 그 때까지 대마초 흡연이 금지되지 않았다. 박정희의 '복수혈전'으로 비로소 범죄가 된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시절에 이루어졌던 노래 검열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세상에나 김세환의 '길가에 앉아서'가 금지곡이었고 그 이유가 '근로 의욕 저하~'라니. 과연 창조 경제의 전통은 거기서 시작되었나 보다. 검열의 이유들이 참 창조적이다. 하지만 그것도 화수분은 아니었던지 '아침이슬'은 금지된 이유조차 없이 금지되었다. 한 마디로 묻지마 금지곡.


 정말 많은 말을 들을 수 있는데 이처럼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음악과 사회의 연관성을 이만큼 뛰어나게 보여주는 책이 달리 없는 것 같지만 설령 그것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음악에 대한 이야기, 문화에 대한 이야기 만으로도 제 값어치를 충분히 하는 책이다. 한 마디로 강추할 수 밖에 없는 책. 나는 지금 강헌의 팟캐스트 들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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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컴맹 2015-08-22 15:31   댓글달기 | URL
디테일한 서평 참 잘읽었습니다

헤르메스 2015-08-24 12:24   URL
21세기 컴맹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yamoo 2015-08-23 21:26   댓글달기 | URL
오! 이 글만으로도 책의 가치를 알겠습니다. 얼른 구매하도록 하지요~
음악 평론에 관한 책은 좋은 책을 만나기 힘든데, 감사합니다!ㅎ

헤르메스 2015-08-24 12:25   URL
정말 음악 평론 책은 만족할만한 것을 찾기 힘든데 이 책은 정말 만족스럽더군요^^ 야무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도 정말 감사합니다^^

소이진 2015-08-30 15:24   댓글달기 | URL
저도 음악 참 좋아하는데요 ㅎㅎ 이 책 한 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정말 재밌어 보이는데요! 살리에르 부분 읽어보고 싶네요.
후 ㅠㅠ 헤르메스님 저 지금 페이퍼 쓰다가 다 날아가서 기분도 날리고,
에잇 오랜만에 컴백하려고 했는데 그냥 안해야 겠어요!!! ㅠㅠㅠ 엉엉
ㅋㅋㅋㅋ 헤르메스님도 잘 지내시죠?

헤르메스 2015-08-31 22:34   URL
와우! 소이진님 정말 반가워요^^ 이렇게 소이진님과 댓글 놀이 할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네요. 하하
살리에르 부분이 관심있다면 더욱 추천합니다. 그간 받은 오해를 생각하니 살리에르가 참 불쌍하더군요.
저도 글 쓰다 많이 날려봐서 그 기분 정말 잘 아는데 그런 땐 그저 쓰는 것 그만두고 딴 일 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더군요. 그리고 컴백 꼭 해 주세요~ 부디!!
 
로버트 라이시의 1대 99를 넘어 - 부의 불평등을 바로잡는 11가지 액션플랜
로버트 라이시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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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라이시의 '1대 99를 넘어'의 원서 제목은 'BEYOND OUTRAGE'이다.

 우리말로 하면 '격노를 넘어'쯤 될 것이다. 분노보다 더 강도가 센 격노다. 그는 왜 이런 제목을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이 책을 읽어보면 안다. 아니 대번에 느낀다고 해야 하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절대 1%에 속할 리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분명 이 책을 읽고 정말 격노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왜?

 당신이 1%의 거짓말에 속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도 의문을 가졌으리라. 열심히 일하는데 왜 삶이 조금도 나아지지 못하는 걸까?

 연례 행사처럼 보도되는 연봉 서열을 보면서 어쩌면 내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지도 몰라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보도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당신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은 당신의 현재가 오로지 당신 탓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괜한 음모론 아니냐고? 지금의 언론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군. 푸코의 통치성에 관한 강의를 읽어보자.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근대 이후로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의 계급의식과 집단 행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세밀하게 통치 기술을 조련해 왔는지.


 일례로 보험이 있다.

 보험이 순수하게 언제가 당할지 모르는 리스크로부터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보험이 나왔던 진짜 목적은 원래 사회가 맡았어야 할 리스크의 책임을 오로지 개인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야 노동 계급이 똘똘 뭉치지 않을 테니까. 모든 리스크, 현재 삶의 상태를 순전히 개인 책임으로 돌려버리면 지배 계급은 그만큼 더 수월해진다. 노동자들은 실은 구조적 모순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인데도 어리석게도 자기 탓으로만 생각해 더 지배 계급이 하라는 대로 할 뿐, 뭉쳐서 뭔가 변화를 이루어내려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계급 의식은 저지 되고 그만큼 집단 행동도 와해 된다. 제도 변화의 핵심은 주로 그런 쪽으로 섬세하게 튜닝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파업이 마냥 나쁜 것으로만 여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파업이 노동자들에게 해가 되는 경우는 없다. 설령 귀족 노조의 파업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사실 귀족노조란 노동자들이 분열하길 바라는 프레임에 불과하다.) 어떤 파업이든 종국엔 노동자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층은 더욱 파업이 양성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제는 재판을 통해 노조에 천문학적인 배상 판결을 때린다. 실직한 노동자들에게까지 어마어마한 액수의 배상금을 내도록 한다. 쌍용자동차의 해고자들과 그 가족들이 연속적으로 자살한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다. 그러니 사법살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얼마전 또 하나의 사법 살인이 있었다. 대법원이 외주로 돌린 KTX의 여승무원을 한국철도공사의 직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판결하는 바람에 복직이 좌절되었을 뿐만아니라 1심과 2심의 승소로 받게 된 과거 4년간의 임금과 소송비용(1인당 8640만원)을 다시 토해내게 되어 절망한 나머지 다섯 살과 세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던 여승무원이 그만 투신 자살한 것이다. 엄마가 가장 필요했을 나이의 자식을 두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그녀에게 정말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가족을 위해 뛰어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토해내야 하는 배상액으로 인해 가족 모두가 커다란 고통을 겪을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를 투신 자살로 내몬 것은 바로 대법원이다. 그녀의 유언은 '빚만 남기고 떠나서 미안해.'였다.


 이게 비단 그녀만의 비극일까? 아니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얼마든지 닥쳐올 수 있는 일이다.  그녀들이 이런 비극에 처해졌던 것은 노동의 유연화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의 유연화는 앞으로도 더욱 거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얼마전에도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정규직 과보호로 비정규직을 양산한다며 정규직 과보호를 개선해야 한다고 떠들어대지 않았던가. 이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언제든 쉽게 쳐낼 수 있고 가급적 노동자 복지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의 소망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실업자가 있어서 아주 적은 임금으로도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부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언젠가 앨런 그리스펀이 말했던 대로다. 그는 말했다. '미국의 노동자에게 너무 많은 임금을 주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되니 노동자들에겐 그저 삶이 약간 아슬아슬할 정도의 임금만 줘야 한다.'고.


 굳이 그런 임금 정책을 펼 것도 없이 실은 지금도 계속 노동자들은 원래 자신이 가져야 할 몫을 자본가들에게 빼앗기고 있다. 무엇보다 그건 당신의 노동생산성과 실제로 받는 임금의 격차에서 나타난다. IMF가 터지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은 노동생산성이 오르면 오른만큼 실제 임금으로 돌려 받았다. 그랬기에 영화 '국제시장' 같은 이야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당신의 노동생산성과 실질 임금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 일한 만큼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부분을 자본가들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앞에서 말한 그 '왜?'에 대한 답을 해야겠다.


 당신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삶이 전혀 나아지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은 당신이 일하는만큼 전혀 돌려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선진국들은 그 격차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심하므로 우리 역시 앞으로도 점점 더 빼앗길 것이 뻔하다. 그렇지 않으려면 1%가 아닌 99%를 위해 일하는 정권을 창출해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의 주머니는 빈약하게 될 것이고 내수가 결코 살아나지 않을 것이니(정말 지금의 불경기가 세월호와 메르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갈수록 더 가볍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이 아무리 자기 계발서를 읽고 용을 써도 바라는 미래는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그냥 그 돈으로 몸 보신이나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의료민영화를 대비해야 하니.


 희망? 그런 게 과연 있을까?

 있다면 오로지 하나 당신의 행동 밖에는 없다. 그렇기에 로버트 라이시도 격노만 하지 말고 행동하라는 뜻에서 'BEYOND'를 쓴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다른 게 아니다. 착취의 노골화다. 더 뻔뻔하고 더 무제한으로 노동자들의 몫을 빼앗아 오는 것이다. 그래도 이러다 노동자들이 화내지는 않을까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푸코가 정확히 내다봤듯이 기업가 마인드를 전 노동자에게 파급하여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모든 삶을 기업가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즉 노동자에게 경영자 코스프레를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결코 해당될 리 없는 종부세를 가지고 반대했던 어리석은 이들이나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을 걱정해 그들을 위한 정당에 투표하듯이. 그런 존재로 만들어 일체의 저항을 무력화 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목표인 것이다. 순응주의자들의 양산. 지금 보니 아주 잘 되고 있군 그래.


 그러니 행동의 전망은 요원하다. 신자유주의는 체계적으로 노동자들의 분노와 의지를 기화시켜왔다. 물론 월스트리트의 점령하라 운동도 있었고 지금도 유럽에선 저항이 일어나고 있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힘들다. 그러니까 미국의 루즈벨트가 했었던 그런 개혁 말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에 따르면 그 시기야 말로 미국의 전성기라고 한다. 사실 지금도 옛 세대들은 그 때를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가들에겐 아니었다. 가장 엄혹의 세월이었다. 흔한 말로 잃어버린 10년이었다. 루즈벨트가 부자들에겐 높은 세금을 매겼기 때문이다. 루즈벨트 전만 해도 대부분의 백만장자들이 요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루즈벨트 시대엔 그런 부자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 돈은 모두 케인즈 이론에 따라 노동자들과 그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쪽으로 흘러 갔다. 그리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를 이루었다. 지금의 미국은 힘들다. 행복지수가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아주 낮다. 그런데 최상위 1%의 부자들은 행복하다. 세금이 50년간 계속해서 51%에서 26%의 비율로 낮아졌기 때문이다.(p. 49) 미국의 역사는 이것을 증명한다. 부유층의 세금이 많아질수록 다수가 행복해진다. 그들의 세금이 적어질수록 다수가 불행해진다는 것을. 그건 우리나라의 부자 감세도 마찬가지다.


 하나 더, 대공황 이야기를 해 보자. 대공황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과잉된 탓일까? 그렇다면 왜 수요가 갑자기 줄어들었을까? 그 이유는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소비자인 노동자들의 수입이 대폭 줄었기 때문이란 걸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었을 때, 수 년간 노동자들의 임금은 제자리였다. 노동시간은 여전했고 노동생산성은 올랐으나 그들은 증가한 만큼 돌려 받지 못했다. 그 대부분의 이익은 기업과 부유층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임금이 더이상 늘지 않았지만 여전히 현재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 했고(대부분 그런 생활의 관성이 있는 고로 어찌할 수 없다.) 덕분에 부채의 늪에 깊숙이 빠졌다. 대공황은 그러다 터진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이 계속해서 가계 부채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경고를 보내는 것도 이런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도 대공황과 판박이였다. 그러니 우리만 예외라고 섣불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자면 이런 상황은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말에 의하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부채의 지속적인 증가로 지탱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는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빚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야말로 은행이 가장 혐오하는 고객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정부가 계속해서 금리를 낮추는 것이다. 그들이 언제나 말하는 국제경제의 불안 때문이 아니다. 부채를 늘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편이 그들에게 훨씬 이익이 되니까.


 우리들은 그저 세금을 내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 세금으로 그들은 배를 불린다. MB 시절의 4대강, 사자방. 그렇게 우리의 세금은 그들의 이익으로 전환된다. 이번에도 최경환 부총리는 15조의 추가경정예산을 요구했다. 경기를 진작시키겠다는 게 이유다. 똑같은 이유로 지금까지 최경환이 가져다 쓴 예산은 3년 동안 모두 90조. 그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다 어디에 썼는지 경기는 3년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살림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내수가 죽어 자영업자의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그 돈은 서민이 아니라 기업들에게로 대부분 흘러갔을 것이다.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낙수효과를 운운하면서. 어떤 은행 광고처럼 기업이 살아나면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 말하지만 실제론 망상에 불과했다. 기업이 얻은 이익은 전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현대자동차처럼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저 쌓아만 두었다. 사실 그들이 시설 투자와 고용을 늘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봤자 아무런 이익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시설을 확장하고 고용을 늘려 아무리 생산을 많이 해봐야 사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낙수 효과가 내수를 진작시키지 않는다.

 진실은 거꾸로다. 내수를 먼저 진작시켜야 낙수효과도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임금은 늘 제자리다. 수요가 줄어드니 물가는 계속 오른다. 어떤 당의 대표는 애국하는 마음으로 이번 휴가는 외국으로 가지 말고 우리나라에서 즐기자고 했다는데 과연 외국으로 휴가를 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알아는 보았는 지 모르겠다. 아니면 그에게 국민이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만 해당되거나.


 어쨌거나 최저임금은 겨우 6,030원.(가장 행복한 나라로 늘 꼽히는 노르웨이의 최저 임금은 2만원. 최저 임금은 다수의 행복과 비례한다. 극소수의 행복과는 반비례하더라도.) 앞은 깜깜하다. 그래도 아직도 많은 이들이 나만은 예외일 것이란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분노해야 할 때 침묵하고 행동해야 할 때 무임승차만 바랄 것이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우리나라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예외이길 꿈꾸었던 사람들 모두에게 무자비한 현실로 밀어닥칠 것이다. 셜리 잭슨의 '제비뽑기'처럼 뽑은 그 순간엔 아무리 저항해도 이미 늦었다.


 * 로버트 라이시의 책을 읽고 화가 너무 난 나머지 새벽의 멜랑꼴리한 기분도 돕고 해서 책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동안 생각하던 것들을 마구 써버리고 말았는데(그래도 책의 기본 논지와는 통하기는 하는데...) 어쩌면 나중에 이 글을 지워버릴 지도 모르겠다. 이런 글은 써봤자 기분만 꿀꿀해진다. 보면 꿀꿀해지는 글을 일부러 놔 둘 필요는 없겠지. 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나중에 이 책의 리뷰를 다시 쓸 지도 모르겠다는 말만 해 놓기로 하자. 가급적 적은 분들이 이 글을 보기를...(뭐, 어차피 내 서재는 메르스 때의 평택처럼 인적이 뜸한 곳이니 괜한 바람 같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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