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닉맨 - 인간을 공학하다
임창환 지음 / Mid(엠아이디)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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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얼마 전 이런 기사가 있었다.

 미국 팜스프링스에서 아마존 기업 후원으로 마스 2017 콘퍼런스가 열렸다. 거기에 우리나라 한국미래기술이 직접 개발한 로봇인 '메소드-2'를 가지고 참가했는데 아마존 CEO인 베조스가 직접 탑승해 보고 아주 만족한 뒤 '에일리언 영화에 나오는 시그니 위버가 된 것 같았다'라는 소감을 트위터에 올렸다는 것이었다. 길이 4미터에 2족 보행이 가능하며 사람이 탑승하여 팔과 다리를 조종할 수 있는 '메소드-2'는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영화 '에일리언2'에 나와서 관객들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심어준 '파워로더'와 유사해 보였다. 어릴 때 극장에서 '에일리언 2'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메소드-2'의 모습에서 막연히 먼 미래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미 현실로 성큼 와 버렸음을 느꼈을 것이다.


 '메소드-2' 의 모습


영화 '에일리언 2'에 나왔던 '파워로더'


'꿈은 이뤄진다'더니, 예전엔 정말 공상 속 존재로만 생각했던 것이 어느새 현실로 착착 이뤄져가고 있다. 현재 한양대 생체공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임창환의 '바이오닉맨'은 바로 그런 실상을 물씬 느끼게 만드는 책이다. '바이오닉맨'이란 한 마디로 기계와 인체의 융합이라 할 만하다. 의족이나 의수처럼 신체적 결함을 기계로 보완하거나 인체가 가지는 능력의 한계를 기계를 통해 증강하는 것 모두를 통칭하여 '바이오닉맨'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 일을 주로 하는 것이 바로 '생체공학'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바이오닉맨'은 쉽게 말해 현재 생체공학이 다양한 분야에서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상세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책은 모두 네 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거칠게 나누어 처음 1장과 2장은 인체의 운동 기관과 감각 기관을 보완 혹은 대체하는 생체공학의 역사와 현실을 다룬다고 한다면, 3장과 4장은 수명이나 뇌의 능력 혹은 불사등 인간이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조건적인 한계를 생체공학이 어떻게 점진적으로 확장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현재 생체 공학 기술이 어디까지 왔는지에 대해선 간간이 나오는 짧은 신문 기사로 밖에는 접해보지 못하여 그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하기가 참 어려웠는데 이 책은 오늘날 생체 공학이 활동하는 거의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어 그것을 가능케 하고 있어 특히 반가웠다. 비록 '에일리언 2'의 파워로더는 현실화 되었지만 현재 생체공학 기술로 옛날 TV 드라마에 나왔던 '6백만불 사나이'나 요즘 상종가를 치고 있는 마블 슈퍼 히어로 '아이언 맨' 혹은 영화 '스파이더 맨 2'에서 숙적으로 나왔던 '닥터 옥토퍼스'의 기계 촉수 같은 것은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무거운 다리의 무게 때문이다. 그 다리를 들어올리고 또 드라마나 영화처럼 빠르고 강하게 만들기 위해선 모터의 동력이 필요한데 그 정도 동력을 낼 수 있는 모터를 다리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만드는 게 현재 기술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인체의 어떤 부분을 기계로 대체하여 능력을 증강시키기 보다는 앞서 말한 '메소드-2'처럼 기계를 마치 사람에게 옷처럼 입혀 능력을 키우는 로봇이 활발히 개발 중이다. 그것을 전문 용어로는 '외골격 로봇'이라고 한다. 처음 이 외골격 로봇은 군사 분야에서 활발히 개발되었지만 최근엔 하지 마비 장애인이나 뇌졸중 환자 재활을 위해서도 이 외골격 로봇이 적극 응용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하지 마비 장애인이나 뇌졸증 환자들은 자기 다리를 가지고 있다. 그럼,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선 바이오닉 기술이 어떻게 응용되고 있을까? 그렇게 1장의 2부, '바이오닉 다리'와 3부 '바이오닉 팔'은 바이오닉 기술이 적용된 의족과 의수를 다루는데, 다리 보다 팔을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바이오닉 다리는 무릎이나 발목처럼 비교적 적은 수의 관절만 적절히 조절해도 '잘 걷기'라는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지만(p. 56) 29개의 뼈와 29개의 관절, 34개의 근육, 123개의 인대로 구성된 손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동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바이오닉 팔은 1960년대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하필 이 시기에 그랬던 것은 다름 아닌 독일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 때문이었다. 바로 인류 의학 역사상 최악의 재앙 중 하나라는 '탈리도마이드 사건'이다. 1950년대 후반, 독일에서 만든 이 약은 임산부의 입덧을 방지한다고 해서 많은 임산부들이 복용했는데 그 임산부들이 약의 부작용으로 그만 사지가 없거나 극단적으로 짧은 아이들을 출산하고 만 것이다. 이 수가 전 세계 46개국에 무려 1만명에 달했다. '바이오닉 팔'은 바로 이 같은 아이들을 돕자는 취지에서 개발되었다. 이렇게 실제 의료용으로 개발되는 바이오닉 기술들은 큰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애인과 환자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시작된 경우가 많았다.


 이런 기업들은 벌어들인 많은 돈을 인간을 보다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데 아낌없이 재투자한다. 이런 점이 바로 반도체나 휴대전화를 개발하는 일반 전자회사와 생체공학 의료 기기 회사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p. 67)


 이야기가 곁가지로 나가는 것 같지만 이 책에서 가장 놀랐던 부분이었다는 걸 밝혀두고 싶다. 나는 지금까지 과학이 아주 차갑고 비인간적이라는 시선이 강했다. 무엇보다 현재 과학 기술이 보여주는 모습이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재 생체 공학이 다름아닌 이런 아프고 약한 자들에 대한 '측은지심'에서 시작되었다니, 내가 그동안 과학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게 무지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확실히 그 어떤 분야든 뭐라 단정을 짓기 전에 먼저 거기에 대해 제대로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이것만으로도 내겐 '바이오닉 맨'을 읽은 가치는 충분한 것 같다. 한편, 바이오닉 팔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역시 감각과 촉각이다. 인간의 손처럼 뜨겁거나 차가운 감각 혹은 거칠거나 부드러운 촉각을 바이오닉 팔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정말 어렵다고 한다. 사람의 피부라는 것이 제곱 1cm 안에 자리 잡은 감각 신경이 무려 수 천개에 이를만큼 아주 정교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현재 기술로 이만큼 정밀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다. 거기에 또 한 가지 난제가 더 남아 있다. 우리의 뇌가 어떤 식으로 감각을 다양하게 인식하는 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만 밝혀지면 바이오닉 기술은 혁신적으로 발전할 것이라 기대되는데 이처럼 생체 공학 분야에 있어 하나의 기술은 그것만으로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다른 기술과 연동되었다. 어쩌면 우리 인체가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대체하고 보완할 바이오닉 기술로써는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팔이나 다리, 혹은 심장이나 장기 등 인체의 조직을 기계로 대체하는 것을 흔히 '사이보그'라 일컫는다. 2장은 바로 이런 사이보그에 대한 것으로 심장이나 눈 그리고 귀의 이식에 있어 생체 공학 기술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소상히 밝혀주고 있다. 재밌는 사실은 '600만불 사나이'만큼이나 유명한 '소머즈' 역시 실제로는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아시다시피 소머즈는 한 쪽 귀만 '바이오닉 귀'로 대체되어 보통 인간의 수 백배나 되는 청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현실에선 이렇게 한쪽 귀만 바꿔서는 그렇게 듣는 것이 불가능하단다. 인간이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귀가 소리가 나는 방향과 거리를 알 수 있도록 '음원 국지화'를 해야 하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두 귀를 다 사용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재밌는 사실이 있었다. 바로 인간이 듣는 방식에 관한 것인데, 알고 보니 여기엔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보통의 경우처럼 음파 진동이 없어도 두개골의 진동을 통해 듣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다. 바로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가 그러한데, 그 때 우리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성대의 떨림이 두개골로 직접 전달되어 듣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바로 이 때문에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 평소 자기 목소리가 아니라고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두개골이 저음을 잘 전달하기에 골전도를 통해 들으면 자신의 목소리가 실제보다 좀 더 낮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 책엔 생체 공학적인 이야기만이 아니라 의족과 의수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친 16세기의 외과 의사 앙브루아즈 파레를 비롯 사람의 몸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 또한 담겨 있다. 그래서 딱히 생체 공학에 관심이 없는 이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이와 관련하여 혹시 수험생이라면 '지능 증폭'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 것이 좋겠다.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경가소성'이고 다른 하나는 '서파 수면'이다. '신경 가소성'이란 뇌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뇌의 기능이 달라지는 것을 말한다. 2006년, 영국에서 런던 택시 운전기사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실제 증명된 것으로 거미줄처럼 얽힌 런던 도로망과 지명을 모두 외워야만 하는 런던 택시 운전사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장기 기억과 공간 지각을 관장하는 해마 영역의 회백질이 훨씬 더 두꺼웠다고 한다. 이는 생활 습관의 개선이나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얼마든지 뇌를 후천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으로 즉 뇌는 쓰면 쓸수록 향상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 탓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라고나 할까? 두 번째, '서파 수면'은 독일 튀빙겐 대의 얀 보른 교수가 발표한 것으로, 사람이 깊은 잠에 빠지면 느린 뇌파가 발생하는 서파 수면에 이르게 되는데 그 때 깨어 있을 동안의 기억들이 장기 기억으로 보존된다고 한다. 즉 외운 것을 되도록 오래 까먹지 않고 싶으면 깊은 수면을 취하라는 것이다. 바이오닉 기술은 뇌를 향상시키는 쪽에도 응용되는데 주로 이 두 가지를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기도 한다. 나아가 미래엔 '공각기동대'에서 두뇌에 직접 단말기를 연결했듯이 뇌의 특정 부위에 마이크로칩을 삽입하여 두뇌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도 가능해지는데 분명 여기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타고난 사람의 신체적 능력이 이제 가지고 있는 자본에 따라 차등되는 부작용도 우려된다. 이처럼 저자는 생체 공학이 가져온 어두운 면도 솔직하게 인정한다. 돈이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생체 공학 기술의 특성 상 이 기술의 발달이 또 다른 차별을 가져 올 위험 역시 큰 것이다. 이런 부작용이 생겨나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어떻게 정비할 것인가 또한 생체 공학 기술 발달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고민이라고 하겠다. 제도는 그렇다치고 공학자나 사업가나 생체 공학이 어떤 동기를 통해 오늘에 이르렀는지 생각한다면 이런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바로 생체 공학이 아프고 약한 자에 대한 측은지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말이다. 그렇게 생체 공학 중심엔 인간이 있었다. 막스 베버가 말했듯 과학 기술은 가치 중립적이다. 그 기술이 인간에게 악마가 되었던 때는 언제나 기술의 중심에 인간이 부재했을 때였다. 일차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시작되었고 오로지 그것을 지향하며 발전해 온 생체 공학이 원래 자신의 고향만 잘 기억한다면 생체 공학의 미래에 대해 조금은 낙관적이 되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끝이 이상해졌는데, 아무튼 여기서 총평 하자면, 현재 4차 산업 혁명이란 말이 유행 중이다. 생체 공학은 그 4차 산업 혁명에 있어 핵심 분야 중 하나라고 알고 있다. 혹시 그 때문에 관심이 생겨 바이오닉 기술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바이오닉 맨'은 좋은 안내자가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저자가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공학 이야기이지만 그렇게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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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4-1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뇌에 마이크로칩 넣는 방식은 앨런 머스크가 고려 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공각기동대처럼 군사용으로 시범적으로 써보려 한다는데...이 정도까지 말이 나왔다면 상용화할 기술이 나왔다고 봐야겠죠.

헤르메스 2017-04-16 14:18   좋아요 0 | URL
‘스텐트로드‘라고 해서 두개골을 열지 않고도 그런 게 가능하도록 만드는 기술까지 개발되었더군요. 예전 닥터 후의 한 에피소드에서 그런 것들이 상용된 세상을 그린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이면에 세뇌 프로그램이 있어 사용자 모두를 노예로 만들어 지구를 지배하려는 외계인의 음모가 있었다는 게 기억나네요.^^
어떤 기술이든 어둔 그늘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람 중시가 필요한 것 같아요^^

2017-04-17 01:57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18 15:12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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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을 받지도 하지도 않는 시대다. 지금은 구속이 된 박근혜 대통령만 봐도 집권 시절 기자 회견 장에 나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할 뿐 기자들의 질문은 일체 받지 않았으니 무슨 말이 또 필요할까? 비단 박근혜만이 아니라 내가 이제까지 만나 본 윗 사람들 대부분이 아래 사람의 질문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겼다. 동료들도 질문이 많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괜히 시간만 잡아먹고 일만 복잡하게 만든다고 핀잔을 주기 일쑤다. 나는 원래 질문이 많은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해가 안 되면 손을 번쩍 들고 질문부터 하고 보는 게 버릇이었다. 하지만 사회로 나오고 나서 난 변해 버렸다. 질문을 해도 '쓸데 없이'란 말 외에는 아무 것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과 질문을 할 때마다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받는 피로 때문에 점차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새 나처럼 질문을 곧잘 해대는 부하에게 짜증부터 부리는 내가 된 것을 보았다. 과거에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기에게 가장 실망할 때가 바로 이런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때부터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어쩌다 우리는 질문을, 특히나 받는 쪽에서 자신에 대한 불신이나 공격으로 먼저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정당한 질문조차도 질문 자체로 보지 않고 저의부터 의심하고 보는 버릇을 들이게 된 것일까? 질문을 받는 쪽이 그러하니 질문을 하는 쪽도 질문이 편할리 없다. 살면서 그림자처럼 뒤따르게 되는 질문이건만 반응이 그렇다 보니 손을 내리고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모르는 게 약점으로 여겨지기 시작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아는 척을 하거나 조금 아는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침소봉대 하게 된다. 검색이 수월해지면서 질문의 필요는 점점 더 사라진다. 본래 진정한 의미의 질문은 계단처럼 보다 더 깊은 차원으로 내려가는 매개물로 질문은 수명이 길수록 빛을 발하는 법인데 검색에서 바로 답을 찾을 수 있는 요즘에 있어 질문의 수명이란 그저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토록 질문의 가치와 수명이 한없이 추락 중인 이 시대에 오히려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가 한 사람 있다. 그가 바로 뇌과학자로도 유명한 김대식 교수다. 그는 이미 인류를 위대한 진보로 이끌었던 31개의 질문에 대해 한 권의 책을 쓴 바 있다. 그런 그가 조금은 더 대중적인 차원에서 다시금 질문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책을 들고 나왔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거기에 대해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책은 하나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떤 식으로 질문을 찾고 그것을 통해 자아를 확장해 왔는지 독자의 눈 앞에서 직접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주로 책을 통해서 말이다. 그가 사람이 아니라 책을 통해 질문을 찾아 가는 것은 사람에 대한 회의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책을 많이 읽게 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그는 책을 통해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그 해답을 만들어가는 지적 여정을 평생 계속해왔다. 바로 그 여정의 가장 최근 모습이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에 담겨 있다. 말하자면, 그의 내밀한 사유의 궤적이 녹화된 최신 테이프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책은 모두 6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삶의 가치를 고민하라', '더 깊은 근원으로 들어가라',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라', '과거에서 미래를 구하라', '답이 아니라 진실을 찾아라' 마지막으로 '더 큰 질문을 던져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두 질문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질문이란 실은 초월의 몸짓이다. 오늘 내가 처한 현실이 모든 게 아니라는 자각이 결국은 질문을 만든다. 질문은 현재 너머의 꿈을 꾸는 한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며 실제 그 너머로 도약하기 위한 발구르기와 같은 방법 찾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삶의 가치를 고민하게 되면 질문은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다. 아르튀르 랭보가 보다 풍성한 삶의 경험을 위해 시를 포기하고 인도네시아와 에티오피아를 전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 처한 현실에 대해 안주가 아니라 탈주를 취할 때 인간의 삶이란 보다 풍요로워질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차원에서 가장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첫 파트에 실린 책에 대한 이야기에서 절감할 수 있다. 질문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간수의 주머니에서 몰래 열쇠를 가지고 나와 안주의 철창에 갇힌 우리를 탈주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삶은 더 깊은 근원과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고 지금까지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세상의 질서와 상식들은 이제 우리가 억지로 거부하지 않아도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깨달음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더이상 구애받지 않게 된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처럼 꼭 기승전결일 필요가 없으며 더글러스 애덤스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에서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답'이 '42'이여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수긍하게 된다. '42'라는 숫자는 종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다시 또 달려야 한다는 신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다. 또한 어차피 삶의 의미란 어딘가에 숨어 있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추구를 위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 위에서 비로소 형성된다는 것을 질문의 여정 속에서 스스로 경험한 것을 통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글러스 애덤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질문 뿐이다.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삶의 진짜 가치는 지속에 있고 그렇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동력원이 바로 질문이기 때문이다. 아닐 아난타스와미가 자신의 책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나'라는 미스터리 하나만 해도 영원히 풀리지 않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보다 심층으로 내려가고 더욱 본질적인 것을 찾아간다. 역사는 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다발의 시간이 되고 다각적으로 오늘의 시간과 공간을 볼 수 있는 시야를 기르게 된다. 김대식 저자의 말대로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의미를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들은 언제나 폭력과 불행의 시작'이 되지만 질문의 신전에 존재를 의탁한 우리들에게 그런 것은 더이상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절대는 상대가 되고 영원은 잠정이 되기 때문이다. 토머스 쿤이 패러다임 이론을 통해 했던 것을 우리는 질문이라는 필터로 절대와 영원에 함유된 독소를 거른다. 모든 권위의 우상들은 회의(懷疑)의 밧줄로 쓰러질 것이며 타인을 무분별하게 모방하다 자기도 모르게 주입된 욕망은 좀 더 근본을 응시하고 헤아리는 마음 속에서 저절로 용해되어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질문은 바로 그것을 가져다 준다. 남이 만든 정답과 경계 안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잔뜩 안고서 웅크리고 있는 우리가 아니라 설령 아무 것도 없는 헐벗은 대지에 서 있다 하더라도 그 황무지 위에서 내가 만들어 갈 세상에 대한 기대감만으로도 당당하고 강해질 수 있는 우리가 되게 만든다. 이탈리아의 디자이너 루이지 세라피니가 존재하지 않는 것들로 '코덱스 세라피니아누스'라는 한 권의 백과사전을 만들었던 것처럼. 


 책에 삽입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백과사전 '코덱스 세라피니아누스'의 모습.


 먼 옛날, 질문 자체를 몰랐던 원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모른다고 해서 더이상 불안해 하거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는다. 설령 고향에서 추방된다고 해도 그것을 새로운 변화를 위한 계기로 받아들일 뿐이다. 진정한 고향은 어떤 외부의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든 어디나 다 고향이다'라는 말처럼 실은 내면에 정초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중심이 강하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 아닌 타자들에 대한 두려움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다. 더이상 타인 때문에 내쳐질 타향이나 변방이 존재하지 않고, 현재라는 과정 역시 어디에 닿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서 매 순간마다 미래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용과 공존 그리고 조화와 융합은 질문의 여정이 데려가는 진화의 장소이자 질문을 주관하는 여신의 발에 입을 맞추고 헌신을 맹세한 이상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나는 유발 하라리가 일컫는 '호모 데우스(신 같은 인간)'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감히 생각한다. 온갖 것과 융합되고 시간마저 초월하며 더이상 하나의 육체에 고정된 자아가 아닌 '호모 데우스'로 살아갈 수 있으려면 포용과 공존 그리고 조화와 융합은 필수일 테니까. 그리고 길고도 무수한 질문의 여정 속에 다다르게 된 존재인만큼 김대식 교수의 말처럼 설령 많은 의문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가 우려하듯 위험한 존재는 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질문을 이어가고 천착하는 한, 지배 보다는 공존을, 배제 보다는 포용을 택할 테니까. '너무 낙천적인 게 아니냐고?', '한낱 질문 하나에 그만한 진화의 동력이 있다니, 너무 과장이 아니냐고?'. 그렇게 내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 당신에게 나는 말없이 다만 이 책,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슬쩍 들이밀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나처럼 믿게 될 테니까. 최소한 비슷하게라도 생각은 할 테니까. 어쨌든 나는 힘을 얻었다. 질문에 깃든 엄청난 가능성을 알았으니 다시금 질문을 즐기던 예전의 나로 돌아가 볼 작정이다. 다시 사람들에게 치인다면 김대식 교수처럼 책을 통해서라도 질문의 여정을 이어가련다. 그리고 앞으로는 내게 찾아오는 모든 질문에 최대한 귀기울이고 함께 답을 찾아보려 노력하련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에 이어 '어떻게 답할 것인가'도 나의 주된 과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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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에도 불구하고
주말마다 나와서
촛불로 시대의 어둠과 맞서 싸웠던
여러분!!
오늘의 이 승리는
전부 여러분 덕분 입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대한민국 변화의
진정한 밑거름이 되신 여러분들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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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리 셰털리 지음, 고정아 옮김 / 동아엠앤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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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은 트럼프 정책에 대한 분명한 반대의 의사 표시 같았다. 인종 차별에 대한 영화들이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작과 출연진 전원 흑인으로 이뤄진 영화가 작품상을 받았다. 이건 아카데미 영화상 역사에서 최초이기도 하다.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식 자본주의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 때부터 시작된 위기의 징후는 점차 현실화 되고 있으며 그럴수록 사람들의 불안 역시 차츰 커지고 있다. 경제가 어렵게 되면 가장 고통 받는 것은 역시 최하층의 사람들이다. 빈곤에 시달리고 제대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해 이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온 상황을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에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 일단 차분히 생각할만한 삶의 여유가 없고, 합리적 성찰을 위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 몸과 마음으로 다가오는 불편과 불안을 자기 보다 못한 존재에 대한 책임 전가와 분노로 푸는 일이 잦다. 그게 손쉽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일이 수월한 것은 분노가 향하는 이들이 가진 것과 사람들의 숫자에 있어 모두 사회적으로 한없이 열악한 계층이라 자기가 그런 짓을 해도 비난과 해코지를 받을 염려가 덜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저 화풀이 대상이었겠지만 그런 것이 차츰 누적되어 가면서 이젠 정말로 그들 때문에 자기가 못살고 힘들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뇌는 확증 편향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증오는 가중되고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박근혜, 영국의 브렉시트, 미국의 트럼프가 대표적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다 이토록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하고 혀를 자꾸만 차게 되는 일들 모두 가만히 따져 보면 근본적으로 편견과 차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게을리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차별과 적대는 자신의 안정과 생존을 위해 날려 보내는 칼날이지만 역사가 분명히 보여주는 교훈은 곧 부머랭으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더 큰 위험과 불안으로 내몰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나라, 미국의 모습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존중과 관용은 약자의 비겁이나 이상주의적 허세가 아니다. 오늘의 불안을 잠재우고 파멸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방법이다.



 현재 알프레드 P 슬론 재단 연구원으로 있는 마고 리 셰털리의 '히든 피겨스' 역시 바로 이것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게 해 준다. 올해 아카데미 영화상 작품상 후보로 올랐던 영화 '히든 피겨스'의 원작이기도 하다. '히든 피겨스'는 과학에서 쓰는 용어로 주로 아직은 파악하지 못한, 그래서 숨겨진 수치를 뜻한다. 그런데 이 '피겨'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숨겨진 사람이라는 의미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 책이 담고 있는 존재들이 정말 그렇다. 이 책은 40년대부터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을 했던 69년까지 NASA와 그 전신이 되는 NACA에서 일한 흑인 여성 과학자들의 삶을 담고 있는데 그들 모두 미국의 항공 산업과 우주 개발에 있어 혁혁한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가 공식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은 영화처럼 세 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도로시 본, 메리 잭슨 그리고 캐서린 존슨이 바로 그들이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이들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어둠의 장막 뒤에 가려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과학자로 일했던 4,50년대는 이중의 차별이 그들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으니까. 하나는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이요, 다른 하나는 흑인으로 받는 차별이었다. 당시만 해도 과학은 여성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었다. 근대 초기 여성들에게 글을 쓰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처럼, 이 때에는 여성들이 과학을 한다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과학은 어디까지나 남성만의 영역이었다, 여성들은 단 한 번도 그 사회에서 과학자로 인정되지도, 대접받지도 못했다. 여성 과학자들은 그저 남성 과학자들의 보조에 불과했다. 이런 부당한 차별은 인종의 경우 더욱 심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사실 흑인에 대한 차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도로시 본이 랭글리의 웨스트 컴퓨팅팀이 되어 처음 출근했을 때, 그녀가 식당에서 마주한 것은 '유색인 컴퓨터'라는 푯말이었다.


 딱 그 대부분의 집단은 습관에 따라 앉았지만, 웨스트 컴퓨터들은 지시에 따라 앉았다. 식당 뒤쪽의 한 테이블에 흰색 종이 표시판이 있었다. 거기 깨끗하게 새겨진 검은 글자 '유색인 컴퓨터'는 식당의 위계를 분명히 알려 주었다. 그것은 웨스트 에이리어 식당의 유일한 표시판이었다. 다른 집단은 이런 좌석 지정을 받지 않았다. 청소부, 인부, 식당 일꾼은 그 식당에서 식사하지 않았다. 웨스트 컴퓨팅의 여자들은 연구소의 유일한 흑인 전문가 집단이었다. 딱히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통합되지도 않았다.(p. 73)


 그녀들은 화장실도 따로 써야 했다. 메리 잭슨은 처음 랭글리에 갔을 때, 자기 같은 흑인들은 따로 유색인 화장실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경악한다. 화장실을 애타게 찾고 있는 그녀에게 백인 여성들은 경멸과 조소만 보내왔다. 인종은 같은 여성끼리도 서로 갈라 놓았다. 인종 차별은 당시 다른 차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다른 것들은 용납될 수 있어도 인종에 대한 것은 용납되기 어려웠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파 프롬 헤븐'이다. 



 5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그 영화에서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백인 여성은 정원사로 오게 된 흑인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그렇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것은 남편 때문이었는데, 남편이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흑인과 사랑을 나눴다는 게 알려지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면서 떠났던 남편이 찾아와서 그녀를 비난한다. 어떻게 흑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느냐고? 직접 말로 하진 않았지만 그의 표정엔 '그러고도 당신이 사람이야?' 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당시 동성애자도 사회에서 허용받지 못한 존재였지만, 그런 동성애자들마저 흑인을 허용하지 않았다. 백인에게 있어 흑인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동물과 사랑을 나누는 수간(獸姦)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회로부터 소외 당하고 있다고 해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포용과 배려의 마음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다. 소외를 당하면 당할수록 낮아지는 자존감과 가중되는 불안감으로 인해 어떻게든 그 불안을 억누르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을 배척함으로써 자신의 우월감을 확보하려 들기 때문이다. '히든 피겨스'에서도 그랬다. 여기서 흑인들을 가장 많이 괴롭힌 이들은 비교적 사회적 상층부에 있는 과학자, 지식인들이 아니라 블루 칼라의 하층민 백인이었다. 결국은 별로 다를 것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유독 인종을 가지고 차별하고 적대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손쉽기 때문일 것이다. 인종의 차이는 눈에 바로 보이는 대상이니까 말이다. 결국 차별은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의 부족한 인내와 그만큼 더 달아오르는 해결에 대한 조급함이 만들어내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의 미국은 그 때와 다르다. 50년대 이후 과학을 비롯하여 흑인의 사회 진출도 많이 늘었다.(도로시 본이 처음 웨스트 컴퓨팅팀으로 갈 때만 해도 대학을 졸업한 흑인 여성 중 오직 2%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단순히 계산만 하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계기는 결코 미국 내부의 자성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외부의 압력 때문이었다. 바로 냉전 시대, 미국 최대의 적국이었던 소련. 그 소련이 스프투닉 위성을 하늘로 쏘아올리는 데 성공한 것이 미국으로 하여금 흑인들에게 다양한 방면의 사회 진출을 허용할 것을 압박하였던 것이다. 소련의 위성 발사 성공은 미국에게 정말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때는 아직 2차 대전 당시 나카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에 대한 공포가 상당할 때였다. 그런데 적국 소련의 위성이 미국의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성에서 언제든 수소 폭탄이 떨어질 수 있었다. 미국의 대중은 엄청난 공포를 느꼈고 미국 행정부는 그 공포를 달래기 위해 뭔가 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과학의 발전이었다. 당장 소련처럼 아이 때부터 과학 교육에 전념하도록 만드는 정책이 집행되었다. 하지만 커다란 난관이 있었다. 바로 인종 차별이었다. 이 때는 백인이 갈 수 있는 학교와 흑인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나뉘어 있었다. 마을도, 교통편도, 식당도 모두 서로에게 격리되어 있었다. 때문에 쓰지 않아도 좋을 불필요한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한 개 지을 운동장을 두 개 지어야 했고, 한 대 운영할 학교 버스를 두 대 운영해야 했으며 교실,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니 정작 교육에 쓸 재정이 없었다. 그래서 설령 유명한 백인 학교라 할지라도 돈이 없어 보수 하지 못하는 바람에 학교와 교구들은 계속 낡아지고 형편없어졌다. 이런 상황인데도 당시 교육계를 지배하고 있던 백인들은 오로지 흑인들을 자신의 학교에서 몰아내는 것에만 신경쓸 뿐, 교육에 대해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소련에서 쏘아올린 스푸트닉이 이 모든 것을 삽시간에 바꿔버린 것이다. 쓰나미처럼 몰려온 공포로 인해 미국 사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둘로 흑인들에게 학교를 개방하고 널리 사회 진출을 허용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흑인 여성 과학자 캐서린 존슨 역시 이것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인종 국가 미국, 모두들 지금 미국이 가진 저력은 미국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종과 이민자 때문이라고 말한다. 쇄국이 아니라 개방이 오늘의 미국을 만든 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실상은 통합이 아니라 분리가 더 많이 자행되었다. 그들은 내부에 온갖 격리 영역들을 만들고 위계와 차별을 통해 존속했다. 스푸트닉처럼 외부의 압력으로 거기에 가시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땅 속을 흐르는 물처럼 드러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랬기에 다시 한 번 트럼프 대통령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 민중들은 이미 스푸트닉 때 인종 차별이 어떤 부작용을 가져오는지 여실히 경험했다. 소련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미국이었지만 인종 차별 때문에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모으지 못했고 그래서 끝내 머리에 파멸을 가져올 수소 폭탄을 이고 사는 공포를 맛보았다. 그 때, 그들은 얼마나 후회했는가? 그래서 흑인들에게 학교를 개방해도, 사회 진출이 허락되어도 별 말 없이 내버려 두었다. 그랬던 그들이, 예전 그들의 후회를 깡그리 잊고 다시 인종 차별을 획책하는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외부의 압력으로 인한 변화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변화는 언제나 자신에게 닥쳐온 문제와 상황들을 그 누구의 판단도 아닌 자신의 힘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며 실천하는 것에서 가능하다. 내부로 부터의 자발적 변화만이 남도 살리고 나도 살리는 진정한 구원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흑인 제임스 톰슨이 '왜 우리를 차별하고 배척하는 미국을 위해 2차 대전에 나가 싸워야 하는가?'에 대해 '피츠버거 커리어'에 보낸 투고문에서 강조했던 '이중의 승리'도 바로 그것이었다.


 "유색 미국인들은 더블 V- 이중의 승리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첫 번째 V-는 외부의 적에 대한 승리이고, 두 번째 V-는 내부의 적에 대한 승리이다. 이 나라에서 추악한 편견을 자행하는 자들은 추축국 군대만큼이나 확실하게 우리의 민주적 정부를 해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p. 64)


 그런 사유와 성찰에 있어,'히든 피겨스'는 꽤 의미 있는 여정을 선사한다. 항공과 로켓 과학이 나오고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전혀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영화만큼 흥미로우며 페이지 또한 거침없이 넘어간다. 저자 마고 리 셰털리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조사하는 데만 5년을 투자했다고 한다. 그 5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책 자체가 온전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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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 세월호 이후 인문학의 기록 우리 시대의 질문 1
노명우 외 지음, 인문학협동조합 / 현실문화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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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은 자가 살아남지 못한 자들에 대해 쓴다는 것,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에 대해 쓴다는 것, 저 죽음들 앞에서 아직 살아 있다는 것, 끝내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령에 대해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고 쓴다는 것의 무능함 앞에서, 그는 목구멍 너머로 삼키는 자, 끊임없이 고쳐 쓰고 끊임없이 지우며 "머리말을 지우고 후기라고 고쳐" 쓰는 자이다. 그에게 언어의 가능성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완전한 침묵 속에서 사는 것,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이 아니라 절대적인 침묵 속에 사는 것이다. (p. 80)


 글의 첫 머리에 이광호가 쓴 글을 인용하는 것은 왠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다. 나는 여전히 세월호에 대해 뭔가 쓰는 것이 어렵다. 그것이 설령 세월호에 대한 책 리뷰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읽었다. 세월호 1주기에 발간된 이 책을 이제야 읽은 것이다. 왜 읽은 것일까? 답답해서일 것이다. 2년이나 흘렀는데도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고, 원흉들은 아예 당당하게 아무 잘못 없다고 떠들고 있으니. 거기다 세월호 리본을 보고 서슴없이 빨갱이라 부르는 노친네들이 주말마다 태극기를 흔들며 서울광장을 아우성치는 요즘이니 더더욱.


 2년동안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늘상 반복되는 사고들 중 하나로 경화시키려는 움직임과 싸워왔다. 마땅한 애도를 이념의 색깔을 뒤집어 씌워 왜곡하고 진실 규명을 위한 유족의 단식을 곁에서 폭식을 하는 것으로 조롱하며 계속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에 '아직도 세월호냐?'며 피로감부터 토로하며 얼른 과거사로 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맞서서 말이다. 그렇게 그저 불운한 사고로 돌리려는 치들은 팽목항의 바람을 잠재우려 애썼지만, 팽목항의 바람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그 모든 왜곡과 조롱 그리고 증거 조작과 무시가 김기춘이라는 국가 권력 최상층이 조직적으로 계획했다는 것이 드러난 지금, 그 바람은 더욱 거세어져 이 나라가 완전히 변화할 때까지 계속 불어올 것이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모든 글들은 바로 그러한 경화에 대한 저항이다. 아무런 성찰 없이 그저 침묵만 강요하는 세력에 대한 거울의 발화이다. 그들의 진실된 초상을 책의 언어들이 비춰주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잘도 감추고 있었던 국가의 민낯이 드러나는 계기였다. 그것은 증거였다. 진태원의 말처럼 우리의 국가가 실은 계급 국가이며 그 진실된 정체는 커다란 공백이고 검은 구멍(p. 145)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을 강타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을 때, 그 재난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바라볼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자연재해가 어느 정도 공평하고 무작위적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렇지만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 위험한 처지에 놓인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실상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가난은 위험하다. 흑인인 것은 위험하다. 라티노인 것은 위험하다.(p. 23)


 세월호도 바로 그것을 알려주었다. 진태원은 세월호 참사가 극명하게 드러낸 것은 국가가 놀랍도록 무능하다는 것과 구조의 무의지에서 표출된 국가가 결코 나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라고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했던 것과 비슷하게 국가의 무능력과 무의지에서 '가난한 나를 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각. 그리고 다음 차례는 바로 내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 바로 우리가 가진 분노의 원천은 아니었겠느냐고 그는 말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세월호 참사를 언제까지나 기억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만들고 거기에 얽힌 모든 진실을 규명하려 하는 것은 비단 희생된 이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한 유가족이 말했던 그대로 이대로 방치했을 경우 언젠가 나나 내 가족이 바로 그 희생자의 자리에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제가 30대 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어요. 사연 들으면서 많이 울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뒤로 제가 한 일이 없는 거예요. 10년마다 사고가 나는 나라에서 제도를 바꾸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서 제가 똑같은 일을 겪었어요. 지금 SNS 하면서 울고만 있는 젊은 사람들, 10년 뒤에 부모 되면 저처럼 돼요. 봉사하든 데모하든 뭐든 해야 해요."(p. 154)


 정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을 겪지 않도록 만드는 변화의 강풍이다.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는 촛불 또한 마찬가지다. 분명 한국사회는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전혀 다르게 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산 자들의 의무다. 전혀 다르게 만들기 위해선 모든 것의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몇 편의 논문들은 바로 그 지점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권명아는 고통의 타자성 혹은 타자의 고통에 대해 끝내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광호는 '문학의 언어는 언어의 불가능성과 침묵의 잠재성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사건 이후의 문학'은 말할 수 없는 자의 언어의 자리에서 그 모순과 분열을 '견디는' 남은 자의 글쓰기이다. 문학은 사라진 자들의 침묵의 능력에 의지한다. 문학은 말할 수 없는 자의 익명으로만 간신히 말할 수 있다. 주어를 알 수 없는 저 목소리들을 통해 이름은 지워지고 다시 태어난다(p. 104)'고 말한다. 이현정은 유민 아빠가 단식할 때 쏟아졌던 비난과 조롱 그리고 세월호 참사 때 희생된 이들 중에 있었던 외국인들의 존재를 통해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 하고 있는 가족의 개념이 얼마나 편협하고 폭력적인가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그 자리의 정당성에 대해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문과 의심은 하나의 권유이다. 소문과 선동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수동적 존재가 되지 말고 스스로 먼저 사유하고 성찰하는 능동적인 주체가 되라는 요청이다. 후반의 논문들은 이러한 우리의 주체적인 실천과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말들이 너무나 절실히 다가오는 것은 요즘 박근혜를 옹호하고 탄핵 기각을 바라는 가짜 뉴스들이 판을 치고 거기에 어이없이 휘말리는 이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교사와 같은 존재들. 세월호 참사를 반복시키는 잠재된 위험들. 바로 그런 그들이 있기에 세월호 참사는 기억되어야 하고, 팽목항의 바람은 멈춰선 안된다. 나는 언제까지나 그 바람을 기꺼이 맞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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