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위에도 불구하고
주말마다 나와서
촛불로 시대의 어둠과 맞서 싸웠던
여러분!!
오늘의 이 승리는
전부 여러분 덕분 입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대한민국 변화의
진정한 밑거름이 되신 여러분들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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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피겨스 - 미국의 우주 경쟁을 승리로 이끈, 천재 흑인 여성 수학자들의 이야기
마고 리 셰털리 지음, 고정아 옮김 / 동아엠앤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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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은 트럼프 정책에 대한 분명한 반대의 의사 표시 같았다. 인종 차별에 대한 영화들이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작과 출연진 전원 흑인으로 이뤄진 영화가 작품상을 받았다. 이건 아카데미 영화상 역사에서 최초이기도 하다.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식 자본주의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 때부터 시작된 위기의 징후는 점차 현실화 되고 있으며 그럴수록 사람들의 불안 역시 차츰 커지고 있다. 경제가 어렵게 되면 가장 고통 받는 것은 역시 최하층의 사람들이다. 빈곤에 시달리고 제대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해 이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온 상황을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에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 일단 차분히 생각할만한 삶의 여유가 없고, 합리적 성찰을 위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 몸과 마음으로 다가오는 불편과 불안을 자기 보다 못한 존재에 대한 책임 전가와 분노로 푸는 일이 잦다. 그게 손쉽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일이 수월한 것은 분노가 향하는 이들이 가진 것과 사람들의 숫자에 있어 모두 사회적으로 한없이 열악한 계층이라 자기가 그런 짓을 해도 비난과 해코지를 받을 염려가 덜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저 화풀이 대상이었겠지만 그런 것이 차츰 누적되어 가면서 이젠 정말로 그들 때문에 자기가 못살고 힘들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뇌는 확증 편향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증오는 가중되고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박근혜, 영국의 브렉시트, 미국의 트럼프가 대표적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다 이토록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하고 혀를 자꾸만 차게 되는 일들 모두 가만히 따져 보면 근본적으로 편견과 차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게을리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차별과 적대는 자신의 안정과 생존을 위해 날려 보내는 칼날이지만 역사가 분명히 보여주는 교훈은 곧 부머랭으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더 큰 위험과 불안으로 내몰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나라, 미국의 모습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존중과 관용은 약자의 비겁이나 이상주의적 허세가 아니다. 오늘의 불안을 잠재우고 파멸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방법이다.



 현재 알프레드 P 슬론 재단 연구원으로 있는 마고 리 셰털리의 '히든 피겨스' 역시 바로 이것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게 해 준다. 올해 아카데미 영화상 작품상 후보로 올랐던 영화 '히든 피겨스'의 원작이기도 하다. '히든 피겨스'는 과학에서 쓰는 용어로 주로 아직은 파악하지 못한, 그래서 숨겨진 수치를 뜻한다. 그런데 이 '피겨'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숨겨진 사람이라는 의미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 책이 담고 있는 존재들이 정말 그렇다. 이 책은 40년대부터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을 했던 69년까지 NASA와 그 전신이 되는 NACA에서 일한 흑인 여성 과학자들의 삶을 담고 있는데 그들 모두 미국의 항공 산업과 우주 개발에 있어 혁혁한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가 공식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은 영화처럼 세 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도로시 본, 메리 잭슨 그리고 캐서린 존슨이 바로 그들이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이들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어둠의 장막 뒤에 가려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과학자로 일했던 4,50년대는 이중의 차별이 그들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으니까. 하나는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이요, 다른 하나는 흑인으로 받는 차별이었다. 당시만 해도 과학은 여성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었다. 근대 초기 여성들에게 글을 쓰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처럼, 이 때에는 여성들이 과학을 한다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과학은 어디까지나 남성만의 영역이었다, 여성들은 단 한 번도 그 사회에서 과학자로 인정되지도, 대접받지도 못했다. 여성 과학자들은 그저 남성 과학자들의 보조에 불과했다. 이런 부당한 차별은 인종의 경우 더욱 심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사실 흑인에 대한 차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도로시 본이 랭글리의 웨스트 컴퓨팅팀이 되어 처음 출근했을 때, 그녀가 식당에서 마주한 것은 '유색인 컴퓨터'라는 푯말이었다.


 딱 그 대부분의 집단은 습관에 따라 앉았지만, 웨스트 컴퓨터들은 지시에 따라 앉았다. 식당 뒤쪽의 한 테이블에 흰색 종이 표시판이 있었다. 거기 깨끗하게 새겨진 검은 글자 '유색인 컴퓨터'는 식당의 위계를 분명히 알려 주었다. 그것은 웨스트 에이리어 식당의 유일한 표시판이었다. 다른 집단은 이런 좌석 지정을 받지 않았다. 청소부, 인부, 식당 일꾼은 그 식당에서 식사하지 않았다. 웨스트 컴퓨팅의 여자들은 연구소의 유일한 흑인 전문가 집단이었다. 딱히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통합되지도 않았다.(p. 73)


 그녀들은 화장실도 따로 써야 했다. 메리 잭슨은 처음 랭글리에 갔을 때, 자기 같은 흑인들은 따로 유색인 화장실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경악한다. 화장실을 애타게 찾고 있는 그녀에게 백인 여성들은 경멸과 조소만 보내왔다. 인종은 같은 여성끼리도 서로 갈라 놓았다. 인종 차별은 당시 다른 차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다른 것들은 용납될 수 있어도 인종에 대한 것은 용납되기 어려웠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파 프롬 헤븐'이다. 



 5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그 영화에서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백인 여성은 정원사로 오게 된 흑인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그렇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것은 남편 때문이었는데, 남편이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흑인과 사랑을 나눴다는 게 알려지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면서 떠났던 남편이 찾아와서 그녀를 비난한다. 어떻게 흑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느냐고? 직접 말로 하진 않았지만 그의 표정엔 '그러고도 당신이 사람이야?' 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당시 동성애자도 사회에서 허용받지 못한 존재였지만, 그런 동성애자들마저 흑인을 허용하지 않았다. 백인에게 있어 흑인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동물과 사랑을 나누는 수간(獸姦)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회로부터 소외 당하고 있다고 해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포용과 배려의 마음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다. 소외를 당하면 당할수록 낮아지는 자존감과 가중되는 불안감으로 인해 어떻게든 그 불안을 억누르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을 배척함으로써 자신의 우월감을 확보하려 들기 때문이다. '히든 피겨스'에서도 그랬다. 여기서 흑인들을 가장 많이 괴롭힌 이들은 비교적 사회적 상층부에 있는 과학자, 지식인들이 아니라 블루 칼라의 하층민 백인이었다. 결국은 별로 다를 것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유독 인종을 가지고 차별하고 적대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손쉽기 때문일 것이다. 인종의 차이는 눈에 바로 보이는 대상이니까 말이다. 결국 차별은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의 부족한 인내와 그만큼 더 달아오르는 해결에 대한 조급함이 만들어내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의 미국은 그 때와 다르다. 50년대 이후 과학을 비롯하여 흑인의 사회 진출도 많이 늘었다.(도로시 본이 처음 웨스트 컴퓨팅팀으로 갈 때만 해도 대학을 졸업한 흑인 여성 중 오직 2%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단순히 계산만 하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계기는 결코 미국 내부의 자성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외부의 압력 때문이었다. 바로 냉전 시대, 미국 최대의 적국이었던 소련. 그 소련이 스프투닉 위성을 하늘로 쏘아올리는 데 성공한 것이 미국으로 하여금 흑인들에게 다양한 방면의 사회 진출을 허용할 것을 압박하였던 것이다. 소련의 위성 발사 성공은 미국에게 정말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때는 아직 2차 대전 당시 나카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에 대한 공포가 상당할 때였다. 그런데 적국 소련의 위성이 미국의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성에서 언제든 수소 폭탄이 떨어질 수 있었다. 미국의 대중은 엄청난 공포를 느꼈고 미국 행정부는 그 공포를 달래기 위해 뭔가 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과학의 발전이었다. 당장 소련처럼 아이 때부터 과학 교육에 전념하도록 만드는 정책이 집행되었다. 하지만 커다란 난관이 있었다. 바로 인종 차별이었다. 이 때는 백인이 갈 수 있는 학교와 흑인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나뉘어 있었다. 마을도, 교통편도, 식당도 모두 서로에게 격리되어 있었다. 때문에 쓰지 않아도 좋을 불필요한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한 개 지을 운동장을 두 개 지어야 했고, 한 대 운영할 학교 버스를 두 대 운영해야 했으며 교실,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니 정작 교육에 쓸 재정이 없었다. 그래서 설령 유명한 백인 학교라 할지라도 돈이 없어 보수 하지 못하는 바람에 학교와 교구들은 계속 낡아지고 형편없어졌다. 이런 상황인데도 당시 교육계를 지배하고 있던 백인들은 오로지 흑인들을 자신의 학교에서 몰아내는 것에만 신경쓸 뿐, 교육에 대해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소련에서 쏘아올린 스푸트닉이 이 모든 것을 삽시간에 바꿔버린 것이다. 쓰나미처럼 몰려온 공포로 인해 미국 사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둘로 흑인들에게 학교를 개방하고 널리 사회 진출을 허용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흑인 여성 과학자 캐서린 존슨 역시 이것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인종 국가 미국, 모두들 지금 미국이 가진 저력은 미국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종과 이민자 때문이라고 말한다. 쇄국이 아니라 개방이 오늘의 미국을 만든 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실상은 통합이 아니라 분리가 더 많이 자행되었다. 그들은 내부에 온갖 격리 영역들을 만들고 위계와 차별을 통해 존속했다. 스푸트닉처럼 외부의 압력으로 거기에 가시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땅 속을 흐르는 물처럼 드러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랬기에 다시 한 번 트럼프 대통령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 민중들은 이미 스푸트닉 때 인종 차별이 어떤 부작용을 가져오는지 여실히 경험했다. 소련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미국이었지만 인종 차별 때문에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모으지 못했고 그래서 끝내 머리에 파멸을 가져올 수소 폭탄을 이고 사는 공포를 맛보았다. 그 때, 그들은 얼마나 후회했는가? 그래서 흑인들에게 학교를 개방해도, 사회 진출이 허락되어도 별 말 없이 내버려 두었다. 그랬던 그들이, 예전 그들의 후회를 깡그리 잊고 다시 인종 차별을 획책하는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외부의 압력으로 인한 변화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변화는 언제나 자신에게 닥쳐온 문제와 상황들을 그 누구의 판단도 아닌 자신의 힘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며 실천하는 것에서 가능하다. 내부로 부터의 자발적 변화만이 남도 살리고 나도 살리는 진정한 구원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흑인 제임스 톰슨이 '왜 우리를 차별하고 배척하는 미국을 위해 2차 대전에 나가 싸워야 하는가?'에 대해 '피츠버거 커리어'에 보낸 투고문에서 강조했던 '이중의 승리'도 바로 그것이었다.


 "유색 미국인들은 더블 V- 이중의 승리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첫 번째 V-는 외부의 적에 대한 승리이고, 두 번째 V-는 내부의 적에 대한 승리이다. 이 나라에서 추악한 편견을 자행하는 자들은 추축국 군대만큼이나 확실하게 우리의 민주적 정부를 해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p. 64)


 그런 사유와 성찰에 있어,'히든 피겨스'는 꽤 의미 있는 여정을 선사한다. 항공과 로켓 과학이 나오고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전혀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영화만큼 흥미로우며 페이지 또한 거침없이 넘어간다. 저자 마고 리 셰털리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조사하는 데만 5년을 투자했다고 한다. 그 5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책 자체가 온전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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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 세월호 이후 인문학의 기록 우리 시대의 질문 1
노명우 외 지음, 인문학협동조합 / 현실문화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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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은 자가 살아남지 못한 자들에 대해 쓴다는 것,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에 대해 쓴다는 것, 저 죽음들 앞에서 아직 살아 있다는 것, 끝내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령에 대해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고 쓴다는 것의 무능함 앞에서, 그는 목구멍 너머로 삼키는 자, 끊임없이 고쳐 쓰고 끊임없이 지우며 "머리말을 지우고 후기라고 고쳐" 쓰는 자이다. 그에게 언어의 가능성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완전한 침묵 속에서 사는 것,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이 아니라 절대적인 침묵 속에 사는 것이다. (p. 80)


 글의 첫 머리에 이광호가 쓴 글을 인용하는 것은 왠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다. 나는 여전히 세월호에 대해 뭔가 쓰는 것이 어렵다. 그것이 설령 세월호에 대한 책 리뷰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읽었다. 세월호 1주기에 발간된 이 책을 이제야 읽은 것이다. 왜 읽은 것일까? 답답해서일 것이다. 2년이나 흘렀는데도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고, 원흉들은 아예 당당하게 아무 잘못 없다고 떠들고 있으니. 거기다 세월호 리본을 보고 서슴없이 빨갱이라 부르는 노친네들이 주말마다 태극기를 흔들며 서울광장을 아우성치는 요즘이니 더더욱.


 2년동안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늘상 반복되는 사고들 중 하나로 경화시키려는 움직임과 싸워왔다. 마땅한 애도를 이념의 색깔을 뒤집어 씌워 왜곡하고 진실 규명을 위한 유족의 단식을 곁에서 폭식을 하는 것으로 조롱하며 계속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에 '아직도 세월호냐?'며 피로감부터 토로하며 얼른 과거사로 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맞서서 말이다. 그렇게 그저 불운한 사고로 돌리려는 치들은 팽목항의 바람을 잠재우려 애썼지만, 팽목항의 바람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그 모든 왜곡과 조롱 그리고 증거 조작과 무시가 김기춘이라는 국가 권력 최상층이 조직적으로 계획했다는 것이 드러난 지금, 그 바람은 더욱 거세어져 이 나라가 완전히 변화할 때까지 계속 불어올 것이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모든 글들은 바로 그러한 경화에 대한 저항이다. 아무런 성찰 없이 그저 침묵만 강요하는 세력에 대한 거울의 발화이다. 그들의 진실된 초상을 책의 언어들이 비춰주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잘도 감추고 있었던 국가의 민낯이 드러나는 계기였다. 그것은 증거였다. 진태원의 말처럼 우리의 국가가 실은 계급 국가이며 그 진실된 정체는 커다란 공백이고 검은 구멍(p. 145)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을 강타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을 때, 그 재난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바라볼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자연재해가 어느 정도 공평하고 무작위적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렇지만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 위험한 처지에 놓인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실상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가난은 위험하다. 흑인인 것은 위험하다. 라티노인 것은 위험하다.(p. 23)


 세월호도 바로 그것을 알려주었다. 진태원은 세월호 참사가 극명하게 드러낸 것은 국가가 놀랍도록 무능하다는 것과 구조의 무의지에서 표출된 국가가 결코 나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라고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했던 것과 비슷하게 국가의 무능력과 무의지에서 '가난한 나를 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각. 그리고 다음 차례는 바로 내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 바로 우리가 가진 분노의 원천은 아니었겠느냐고 그는 말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세월호 참사를 언제까지나 기억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만들고 거기에 얽힌 모든 진실을 규명하려 하는 것은 비단 희생된 이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한 유가족이 말했던 그대로 이대로 방치했을 경우 언젠가 나나 내 가족이 바로 그 희생자의 자리에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제가 30대 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어요. 사연 들으면서 많이 울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뒤로 제가 한 일이 없는 거예요. 10년마다 사고가 나는 나라에서 제도를 바꾸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서 제가 똑같은 일을 겪었어요. 지금 SNS 하면서 울고만 있는 젊은 사람들, 10년 뒤에 부모 되면 저처럼 돼요. 봉사하든 데모하든 뭐든 해야 해요."(p. 154)


 정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을 겪지 않도록 만드는 변화의 강풍이다.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는 촛불 또한 마찬가지다. 분명 한국사회는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전혀 다르게 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산 자들의 의무다. 전혀 다르게 만들기 위해선 모든 것의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몇 편의 논문들은 바로 그 지점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권명아는 고통의 타자성 혹은 타자의 고통에 대해 끝내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광호는 '문학의 언어는 언어의 불가능성과 침묵의 잠재성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사건 이후의 문학'은 말할 수 없는 자의 언어의 자리에서 그 모순과 분열을 '견디는' 남은 자의 글쓰기이다. 문학은 사라진 자들의 침묵의 능력에 의지한다. 문학은 말할 수 없는 자의 익명으로만 간신히 말할 수 있다. 주어를 알 수 없는 저 목소리들을 통해 이름은 지워지고 다시 태어난다(p. 104)'고 말한다. 이현정은 유민 아빠가 단식할 때 쏟아졌던 비난과 조롱 그리고 세월호 참사 때 희생된 이들 중에 있었던 외국인들의 존재를 통해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 하고 있는 가족의 개념이 얼마나 편협하고 폭력적인가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그 자리의 정당성에 대해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문과 의심은 하나의 권유이다. 소문과 선동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수동적 존재가 되지 말고 스스로 먼저 사유하고 성찰하는 능동적인 주체가 되라는 요청이다. 후반의 논문들은 이러한 우리의 주체적인 실천과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말들이 너무나 절실히 다가오는 것은 요즘 박근혜를 옹호하고 탄핵 기각을 바라는 가짜 뉴스들이 판을 치고 거기에 어이없이 휘말리는 이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교사와 같은 존재들. 세월호 참사를 반복시키는 잠재된 위험들. 바로 그런 그들이 있기에 세월호 참사는 기억되어야 하고, 팽목항의 바람은 멈춰선 안된다. 나는 언제까지나 그 바람을 기꺼이 맞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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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구속!
이것이 바로 우리가 촛불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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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무력 정치사 - 민족주의자와 경찰, 조폭으로 본 한국 근현대사
존슨 너새니얼 펄트, 박광호 / 현실문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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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미시간대에서 정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일본 호세이대에서 강사로 있는 존슨 너새니얼 펄트의 '대한민국 무력 정치사'는 국가가 자신의 통치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민간 행위자들과 공모, 협력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바로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말이다.


 국가들이 비국가 폭력 전문 집단과 협력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 역사는 오래되었고, 근거도 분명하다. 국가가 형성되는 초기 과정에서 국가 행위자들과 국가추구자들은 필요에 따라 해적, 용병, 불법 무장 단체, 깡패와 협력하곤 했다. 따라서 약하거나 이행기에 있는 사회에서, 혹은 이행기에 있는 약한 사회에서 그런 협력이 발생해왔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난해한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고능력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 행위자들이 자국 내에서 초법적 폭력을, 더욱이 자신들이 보호할 책임을 지고 있는 자국 시민들에게 그런 폭력을 수행할 때 민간 행위자들과 공모하게 되는 조건이다.(p. 9)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 어렵게 다가오지 않는다. 한국은 OECD에 들어갈 정도로 고능력의 국가가 되었지만 오늘도 재개발 현장에선 철거 용역들이, 거리에선 어버이 연합 같은 관제 데모 단체들이 활개를 치고 있으니까 말이다. 정주영이 노조를 진압하기 위해 처음 만들었던 '구사대'가 이제는 전혀 낯설지 않듯이, 국가 권력과 결탁한 민간 행위자들은 우리의 일상 속 깊이 들어와있다. 존슨 너새니얼 펄트는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났고 무엇이 그런 것을 지속시키고 있는지 이 책에서 뒤쫓는다. 모두 8장에 걸쳐 그것을 다루는데, 2장은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론과 방법에 대한 설명이고 결론인 8장을 제외한 나머지가 구체적인 한국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어떻게 국가가 민간 협력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국가가 강제력을 민간에게 하청하게 되는 것은 주로 국가의 강도와 상관관계가 있다(p.35) 여기서 '강도'란, 워싱턴대 정치학 교수인 조엘 미그달이 정의한 개념인데, '국가가 사회에 침투해 사회적 관계들을 조정하고 자원을 추출해 확고한 태도로 자원을 적절히 사용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즉, 국가가 제 사회적 관계들에게 얼마나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느냐가 관건인데, 그것이 작을수록 민간에게 강제력을 하청하는 정도는 많아진다. 예를 들어, 친일과 한국 전쟁으로 정당성이 없어서 자율성이 보잘 것 없었던 이승만은 반대 세력을 누르는 수단으로 정치 깡패를 많이 이용했다. 그것은 쿠데타를 통해 역시 아무런 정당성 없이 정권을 잡게된 박정희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박정희의 지배체제가 공고해지고 자율성이 강화되자 정치 깡패들은 자연히 토사구팽 되었다. 그런데 경제 위기가 닥쳐오고 지금까지 경제 성장을 떠받치고 있었던 노동자 저임금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박정희 체제는 다시 민간에게 강제력을 하청했다. 즉 경제 불안과 거센 민주화 요구로 인해 자율성이 축소되자 민간에게 자기 대신 폭력 행위를 해달라고 손을 내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단순히 자율성의 축소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유심히 들여다 보는 것은 당시 중산층의 성장이다. 저임금 기조에 기반한 경제 성장으로 늘어난 중산층이 국가의 직접적 폭력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던 것이다. 박정희는 중산층이 노동자에게 가담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중산층이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는 국가의 직접 폭력을 은폐하기 위해 민간 폭력 집단을 대신 내세웠던 것이다. 겉보기엔 민간 대 민간 사이의 일로 보이도록 말이다.


 이것은 박종철 고문 치사가 6월 항쟁을 낳았다는 것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6월 항쟁의 특징은 중산층이 대대적으로 국가에 대한 투쟁에 뛰어들었다는 것인데 그것을 가져온 '박종철 고문 치사'는 한 마디로 국가가 국민을 직접 살인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바로 이것, 중산층을 노동자 및 진보 세력과 철저히 분리시키는 것이 오늘날도 계속되는 강제력 민간 하청의 결정적 이유라고 저자는 본다.


 권위주의 시기에 중산층은 초기의 노동운동을 지지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점점 더 투쟁적이 되고 노동쟁의도 증가하면서 둘은 분열됐다. 민주적 선거 획득이 대개 중산층을 달랬지만 정권의 선언에는 노동이라는 사회경제적 관심사는 포함되지 않았다. 민주적 선거 이후에도 투쟁적이고 폭력적인 노동 관련 충돌이 계속되자 노동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생겨났고, 중산층은 노동운동이 '도덕적 권위'를 잃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경제적 또는 정치적 안정성에 대한 실재적이거나 인식된 위협들, 이를테면 친정부 언론이 잦은 노동쟁의의 결과라면서 쉽게 제시할 수 있는 사건들을 접하게 되면서 노동에 대한 중산층의 인식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p.152)


 저자의 이런 말은 국가가 사실은 폭력을 자행하고 있으면서도 구조적으로 은폐하여 부재의 가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켜 나간다는 지젝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중산층의 폭력에 대한 태도에 대해선 다시 깊은 비판과 성찰의 시선이 필요한 것 같으나 이 글에선 무리일 것 같다. 다만 지금 계속되고 있는 촛불 집회만 해도, 물론 이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비폭력이었기 때문에 천만 이상이 참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중산층은 되도록 사회가 안정되길 바란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늘 지키고 싶으니까. 하지만 폭력의 목격은 사회의 불안을 가중시킨다. 중산층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아마도 폭력 같은 것으로 사회의 경계가 무너지는, 홉스가 말한 '만인에게 만인이 늑대가 되는 사회'일 것이다. 그들의 인식을 억지로 바꾸려고 하기 보다는 그것을 수용하면서 사회 개혁을 진전시켜 나가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어쨌든 그들의 지지와 참여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대한민국 무력 정치사'는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철거 용역, 어버이 연합 같은 관제 데모 세력들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일상적으로 보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존재들이었는데, 그들의 탄생과 정착의 과정을 보면서 미래에 다시 그들을 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를 새로운 측면에서 바라보도록 했던 책이기도 했다. 국가와 결탁하여 국가 대신 폭력을 자행하는 존재들에 대해서 알고 싶다거나 관심이 있었다면 '대한민국 무력 정치사'는 좋은 길잡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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