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erennial Philosophy (Paperback)
Huxley, Aldous / Harper Perennial Modern Classics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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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대전이 서서히 끝나가던 1945년.
 '멋진 신세계'에서 현대 문명이 가열차게 추구하고 있는 물질주의가 가져오는 건 결국 인간 소외와 공허 밖에는 없다고 말했던 올더스 헉슬리는 한 권의 책을 발표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의 철학'이죠. 이 책이 일으킨 파장이 엄청났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흔히 '뉴에이지'라고 알고 있는 것들도 다 이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죠.

 원제는 'The Perennial Philosophy'. 책의 첫머리부터 올더스 헉슬리는 라이프니츠가 한 말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용어는 중세 때부터 있었습니다. 최초로 그 말을 쓴 것은 'Agostino Steuco'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인으로 주로 구약을 연구하던 학자였는데 당시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주도하고 있던 신플라톤주의를 그는 '영원의 철학'이라고 불렀다는 군요. 피치노는 당대 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신앙을 약화시키고 있다고까지 생각했죠. 그래서 그는 플라톤에게로 기울었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을 이길 수 있는 건 오직 그리스도 사상 밖에는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경건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그 플라톤 철학을 자신이 신봉하는 그리스도 신학과 합치고자 했죠. Steuco는 '경건의 철학'이라는 말을 살짝 바꾸어 '영원의 철학'으로 부른 것입니다. 네, 실은 조금 경멸의 의미였죠. 그건 신학이 아니라 철학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영원의 철학'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실재주의를 경유해 무엇보다 영혼의 불멸성을 강조했습니다. 그 불멸하는 인간의 영혼을 중심으로 우주를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플라톤처럼 가상인 우리의 현실과 이데아인 참 세계로 나누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을 통해 결합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인간 영혼의 목표는 초월적 존재이자 '이데아'인 신과의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보았죠. 이것은 후일 우리가 'perennialism'이라고 부르는 것이 됩니다. 영속주의 혹은 항존주의라고도 부르는 것이죠. 다년생 식물을 뜻하는 'perennia'의 뜻처럼 영원히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을 그렇게 부릅니다. 종교적 입장을 투영하자면 그 가치는 물론 신이 되겠죠. 피치노가 말했던 '신과의 합일'이 종교로서의 'perennialism'이 지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피치노처럼 기독교만이 유일의 통로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죠. 'perennialism'의 근본 목적은 신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이론과 방법들을 하나도 허투르 보지 않고 다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거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골라내 진정한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통로(흔히 '비전의 핵심'이라 이르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perennialism'입니다. 이 'perennialism'은 하나의 여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최초의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입니다.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물질문명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당연히 물질문명은 참된 정신에 의해 인도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더구나 바깥은 참된 정신으로 인도되지 않은 물질문명이 어떠한 비극을 초래하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에게 절박감은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36년에 나온 '가자에서 눈이 멀어'는 헉슬리의 그러한 심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죠.  그는 위안으로서든, 구원으로서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기독교는 그에게 그걸 가져다 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러했던가? 그 이유를 그는 이 책의 336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형이상학에 관해 집필하는 대부분의 유럽 및 미국의 저자들은 유대인, 그리스인, 지중해 연안 지역과 서구 유럽 사람들만이 이 주제에 관해 생각해본 것처럼 쓰고 있다. 완전히 자의적이면서 고의적인 무지가 20세기에 와서야 이렇게 드러난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는 영원한 세계 평화의 위협이 되고 있다.(p. 336)

 '멋진 신세계'와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서 이미 파시즘에 대한 공포와 환멸을 드러내고 있는 그입니다.
 그런 그에게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는 서양의 신학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치는 자신들의 전쟁을 '제2의 십자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이 필요했습니다. 하나가 아닌 다양한 길이. 모든 경계를 초월하고 동시에 아우르는 길이. 그 보편을 향한 대화. 그리하여 그는 '영원의 철학'을 썼습니다. 그냥 책이 아니라 쓴다는 것이 동시에 자기 구원의 노력이기도 한 책을. '영원의 철학'은 그런 책입니다.

 모두 27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건 올더스 헉슬리가 찾아낸 모든 종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가 27가지라는 뜻도 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 요소 하나를 각기 한 장씩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내용은 정말 광범위합니다. 불교, 도교, 유교를 비롯하여 동,서양의 종교들이 거의 다 인용되고 있으니까요. 정말 읽다보면 어떻게 이걸 다 혼자의 힘으로 찾아내고 더구나 체계적으로 정리까지 했는지, 거기 투영된 신학적 제국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집념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과연, 듣던대로 대단하구나!' 느낄 수 밖에 없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종교학자로 명망있는 오강남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단적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나는 그가 쓴 수많은 책 중에 단연 이 '영원의 철학'이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 단언하고 싶다.'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여파도 컸었지만 여기 들어간 그의 노고만으로도 그렇다고 인정해주고 싶어요. 내용도 그리 쉬운 편은 아니고 번역이 다소 불친절하여 읽는 속도가 좀 더딜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고 곱씹으면 이해못할 부분은 없습니다. 또한 의외로 올더스 헉슬리 스스로 자신이 개진하고자 하는 '영원의 철학'을 꽤나 체계적으로 다져놓고 있기도 합니다. 개념정리, 구분과 계층화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죠. 제가 그랬듯이 따로 노트를 준비하여 정리해가며 읽는 것도 이 책을 소화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년에 올더스 헉슬리는 신비주의로 더욱 기울었습니다. 죽을 때는 아내가 두 번이나 LSD를 놓아 되도록 그가 바라는 상태에서 세상과 작별하도록 하기도 했었죠. 이처럼 그 역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작가 켄 키지만큼이나 환각제가 깨달음을 위한 새로운 통로가 되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인식의 문'이란 책을 썼는데 짐 모리슨은 거기에 감명을 받아 나중에 자신이 조직한 락밴드의 이름을 'DOORS'라 짓기도 했습니다. 소설만큼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종교나 신비주의에 관한 책들도 영향을 많이 미쳤는데 거기에 관한 책들은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그랬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그것도 그 시기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의 철학'을. 덕분에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헉슬리 후기 모습에 대한 궁금증을 제대로 풀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다른 많은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가 풍부해진 듯 합니다. 특히 종교에 대해서라면 그것에 대한 시각을 근본부터 다시 되짚어 보게된 것 같습니다. 종교를 보다 폭넓은 시야로 이해하고 싶다면 분명 좋은 동반자가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직 책이 검색되지 않아 부득불 원서에다 리뷰를 올립니다.]
 


 
 
 
[히틀러의 철학자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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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본 세라트의 '히틀러의 철학자들'은  철학책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복원의 책이다. 논의 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형식은 일종의 파문과도 같다. 고요한 수면 위로 하나의 돌이 떨어지면 그것을 중심으로 동심원들이 퍼져 나간다. 가면 갈수록 동심원은 희미해진다. 중심의 동심원이 가장 뚜렷하다. 책은 이와 똑같다. 히틀러 시대의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시대 가장 정점에 섰던 히틀러에서 시작해 페이지 수가 늘어갈 수록 점점 그로 부터 멀리 떨어진 인물들을 배치시키는 것이다. 히틀러로 시작하여 그 뒤에는 히틀러 사상에 정당성을 주었거나 나치즘에 부역한 철학자들을 또 그 뒤에는 유대인이란 태생 때문에 또는 동조하지 않아서 망명하거나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신념대로 행동하다가 죽은 철학자를 이야기 한다. 놀랍게도 이본 세라트는 나치즘을 낳게한 원흉으로 칸트와 헤겔까지 들먹이는데 여기서부터 이 책이 가진 문제점은 드러나고 만다.



 분명 나는 문제라 말했다. 솔직히 난 이 책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편협함의 산물이 아닐까도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이제 말하려 한다. 일단 칸트와 헤겔부터.


 그녀가 칸트와 헤겔을 부정적인 철학자로 본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딱 하나다. 유대교와 유대인을 폄하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기존의 편견을 몰아내는 대신 자신만의 또 다른 편견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미개하고 비합리적인 모든 것에 화를 참지 못했는데 특히 고대의 한 종교가 그의 표적이 되었다. 바로 유대교였다. 칸트는 유대교를 시대에 역행하는 종교로 여겼으며 유대인을 미신적이고 미개하며 비합리적인 민족으로 규정했다.(...) 종교가 이성에 근거해야 한다고 믿었던 칸트는 이성에 근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대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았다. 종교적 이해에 관한 논문 '순수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칸트는 유대교는 사실상 종교가 아니라 한 부족민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 불과했다.(P. 73)


 다음은 헤겔이다.


 헤겔은 유대인을 유럽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모자라 그들을 인류 문명 바깥에 있는 열등한 존재로 분류했다.

 "유대인은 그들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생존해 있다. 사실상 진정한 의미의 유대인 역사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본질은 사라지고 단지 송장으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유대인이 보통 이하의 열등한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모시는 신도 열등한 신이었다. 헤겔은 이렇게 썼다.

 "다른 신들을 용인할 수 없는 유일한 신은 오직 편협한 유대인들의 신뿐이다. 그들의 엄격하고 민족적인 신은 질투의 화신이다."(P. 77)


 이걸 나치를 낳은 악의 철학자로 칸트와 헤겔을 가져온 이유다. 하하하! 원, 이런!

 실상 그녀가 인용한 칸트의 말에서 난 틀린 점을 도저히 못 찾겠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신과 종교에 대해 말한 것을 보면 분명 그렇게 여겼으리라 본다. 유대교만 특별히 편견을 가지고 대한 것이 아니다. 그에겐 사실 그 어떤 종교든 비합리적이었다. 그런 칸트에게 유대인들이 유대교를 내세우는 것은(선민의식이 강한 그들은 유독 내세우지 않았던가?) 분명 시대를 역행하는 일로 보였을 것이다. 헤겔은 더 우스꽝스럽다. 헤겔이 그들이 모시는 신을 열등하다고 말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질투의 화신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솔직히 구약을 읽으면 신에 대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구약의 신은 늘 믿음을 시험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무조건 믿을 것을 강요하며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도시나 세계를 한 순간에 멸망시켜 버린다. 이런 신을 두고 사랑과 평화의 신이라 운운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거기다 이것은 그저 헤겔이란 한 사람의 견해에 불과하다. 이런 말도 못하는가? 무조건 좋게 보아야 하는 것인가? 편견은 진실을 왜곡해서 보는 걸 이르는 것이지 그저 부정적 견해에 불과한 것을 두고 편견이라 말하지 않는다. 비판을 무조건 편견으로 치부하는 것이야 말로 이본 세라트가 그토록 증오하고 있는 나치즘의 철학과 닮은 꼴이다. 타자를 객관적인 잣대로 헤아리지 않는 그 유아독존적 아집 말이다.


 솔직히 말해 이 시대에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보편적이었다. 독일만이 아니었다. 전 유럽적 상황이었다. 이본 세라트는 욕하려면 세익스피어에게도 해야 했다. 그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을 더없는 속물에다 악덕 상인으로 묘사했으니까 말이다. 영국이 독일과 싸워서 면제부를 준 것인가?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드레퓌스 사건도 그렇다. 드레퓌스가 그토록 말도 안되는 누명을 썼던 것은 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란 사실 때문에 명확한 반대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처형을 지지했던 것이다. 그만큼 유대인들에 대한 증오가 깊었다. 왜 그랬을까? 유럽인들이 이유도 없이 그랬을 리는 없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그 뿌리깊은 증오의 이유는 드러난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고리의 금융업자였다. 그들이 믿는 신은 아무런 노동없이 남에게서 뭔가 받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고 똑같이 이자도 죄악의 과실로 여겼지만 그토록 신을 믿는다는 그들이 그것은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더 높은 고리로 앞뒤 가리지 않고 자본을 모았다. 덕분에 거대한 부는 유대인들 손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인들에게 유대인들은 이민자에 불과했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 체류한 동남아시아 노동자가 이건희가 된 것과 같았다.  토박이들 눈에 곱게 보일리 없었다. 거기다 유대인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도, 그 부를 신이 명령한 대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는 것도 아니었다. 악착같이 거머쥘 뿐이고 없는 이들을 무시할 뿐이었다. 단테도 그 희생양이었다. 그는 금융업자들을 가장 뜨거운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 묘사했다. 증오는 아무 이유없이 태어나지 않는다. 분명 연기나게 한 뭔가가 있다. 그에 대한 자성없이 유대인들을 비난한다고 해서 편협하다 비판하는 건 그것이야말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본 세라트는 편협하다. 정말 이 책 끝까지 그녀에게는 오로지 유대주의만 보이기 때문이다. 


 리뷰가 길어질 수 있기에 세세하게 다 말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서 유대인들에게 그만한 비극을 안겼는데 어떻게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학을 뗐다. 세라트는 정말 한나 아렌트가 무슨 이유로 그것을 말했는 지 모른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녀야말로 자신이 말하는 것에 몰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정답을 정해놓고 대상을 보고 있으니 편견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문체는 더욱 노골적이다. 부역한 철학자들에겐 더없이 신랄하지만 망명해야했거나 희생당한 철학자들은 무슨 신념에 따른 영웅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사실 벤야민과 아도르노는 안타까운 피해자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유대인인 그들이 독일에 어찌 남아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겐 이미 철학자의 양심으로 선택할 기회마저 없었다. 그저 망명하는 것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이 책을 읽고 개인적으로 아도르노에게 좀 한심함을 느꼈다. 지금 자신의 조국 독일에선 자신과 같은 유대인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는데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그레타 가르보를 만난 일 같은 것을 글로 쓰고 있으니. 발터 벤야민은 정말 불쌍했지만 아도르노의 미국 망명 생활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유대인 망명자들과 많은 교제도 가져 고독도 없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다. 여기서 이본 세라트는 또 웃긴 짓을 한다. 당시 얼마나 유명한 유대인들이 많았는지 언급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전쟁에도 불구하고 창조적인 작업을 지속해나갔다는 것도 콕 집어 넣는다. '알았다. 알았어. 너네들 정말 대단해. 이제 그만!'하고 싶을 정도다.


 분명 2차 대전에서 유대인들은 피해자였다. 그들의 학살은 정말 우리 인류가 두고두고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그 때의 피해자가 유대인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가장 많이 희생된 것도 아니다. 사실 나치에 의해 가장 많이 희생된 것은 집시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의 희생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이 당한 비극 때문에 문장마다 분노를 드러냈던 이본 세라트도 여기에 대해선 침묵이다.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마치 당한 이들은 유대인 밖에 없는 것 같다. 이왕 칸트와 헤겔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근대 자체에 배태되어 있던 인종 편견을 드러내려 작정했다면 반유대주의만 말할 것이 아니라 집시들이 당한 비극까지 말해야 했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멸하려 했던 건 그들이 외래적 존재였고 그만큼 약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 동일자와 타자에서 유대인들은 타자였다. 어차피 경계 바깥의 존재였기에 쉽게 바깥으로 내버릴 수 잇는 존재였던 것이다. 나치즘의 해악은 거기에 있다. 동일하지 않은 존재들은 무조건 배제해 버린다는 것. 타자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 거기에 유대인들과 집시는 똑같은 존재들이었다. 집시가 입은 피해가 여전히 '블랙아웃'인 것도 그만큼 그들의 지위가 열악하기 때문이다. 가장 약자는 누구도 돌아다보지 않는다. 정작 같은 피해를 입은 이들마저 마찬가지다.


 결국 그들도 그들이 왜 그런 비극을 겪어야 했는지 잊어버리고 같은 가해자가 되어 버렸다. 바로 얼마전에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미사일을 쏘아 민간인들을 비롯 어린아이까지 죽게 만들지않았던가. 남의 영토를 억지로 빼앗아 살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공존을 모르다. 공존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로 부터 엄청난 피해를 받았으면서도 그들의 지금 모습은 나치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들 스스로 그들의 희생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본 세라트는 그토록 나치에 부역한 철학자들을 비난하면서 왜 똑같은 일을 저지르는 현재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인지? 스스로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면 신랄한 비판의 칼날은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겨누어져야 한다.


 이 책은 분명 철학이 정치의 시녀가 되는 사태를 비관하여 그 반복을 막는 성찰을 위해서 쓰였을 것이다. 진정한 성찰은 부머랭이다. 결국은 나의 허물을 되돌아 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본 세라트의 성찰은 돌아오지 않는 부머랭이다. 적의만 있다. 그녀 역시 유대주의의 시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기에 공감도 배움도 반쪽에 불과하다. 역사로부터 진정한 교훈을 이끌어 내려면 언제나 탐구하는 자 스스로도 객관적 중립의 위치에 서야 한다. 저자는 한 쪽에 너무 치우쳤다. 에필로그에서 말한 자신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제대로 찾고 싶다면 그녀 역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게 좋을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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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겐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있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난, 내 인생 최초의 선생님. 최초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때의 나는 학교가 끝난 뒤 가장 마지막으로 집에 가는 아이였다. 집에 가도 맞아주는 이가 없었고 텅 빈 집에 홀로 있는 것을 싫어했기에 되도록 학교에 남아 있으려 한 까닭이다. 텅 빈 스탠드의 계단을 위 아래로 뛰어 오르내리다 저물어가는 태양에 나무들의 그림자가 운동장 위로 제법 길어지면 책가방을 다시 둘러매고 집에 오고는 했다. 태양을 눈 뜨고 오래 바라보는 버릇도 그 때 생겼던 것 같다.


 학교에 들어와 처음으로 깨친 것은 한글이 아니라 무료함과 외로움이었다. 나는 언제나 눈이 반쯤 내려가 있고 윗입술이 아래입술을 살짝 덮은 뚱한 표정으로 있었다. 아이들과 수다를 떨기 보다는 창 밖에 보이는 나뭇가지에 새가 날아와 앉기를 기다렸다. 혼자였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고 누구도 날 신경쓰지 않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러던 날 내내 누군가 보고 있었음을. 바로 담임 선생님이었다. 


 하루는 날 부르셨다.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도 여전히 교실에서 얼쩡거리던 나를 발견하고 부르신 것이었다. 선생님과 그렇게 가까이 있게 된 것은 처음이었는 지라 난 조금 겁먹은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던 내 손바닥 위에 미소와 더불어 올려주신 박하사탕 하나. 작고 하얀 조약돌 같기만 했던 그것을 입 안에 머금었다. 입 안 가득 알싸하게 퍼지는 감각에 놀라고 있는데 갑자기 선생님이 물으셨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냐고.


 그림이라 대답했다. 그림이 좋았다. 쉽게 그리고 혼자서도 아주 오래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였으니까. 그래, 그림을 좋아하는구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물으셨다. 좀 더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은 없는지. 로봇 만화를 좋아했던 나는 늘 만화처럼 똑같이 로봇을 그리지 못하는 게 싫었다. 마당에 묶인 강아지도, 부엌에서 졸기만 하는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다. 잘 그리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나고 남아서 선생님이랑 같이 그림 배워보지 않을래 하셨다. 선생님은 뭐든 다 잘 하는 줄 알았던 나는 선생님에게 배우면 잘 그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어차피 방과 후의 나란 너무 심심하기도 했다. 그 때부터 선생님에게 그림을 배웠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선생님에게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매일을. 여름방학 동안에도.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던 것 같은데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대부분은 선생님이 하나의 주제를 정해주면 그걸 내 마음껏 그림으로 표현하고 다 그리면 대화하는 식이었다. 사실 별 거 없었는 지도 모른다. 그저 혹시나 사고라도 당할까봐 그림을 핑계로 보호해주신 것일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일이지만. 


 나중에 내가 변했다는 걸 알았다. 내 눈은 어느새 온전히 떠 있었고 윗입술도 더이상 내려오지 않았다. 창 밖보다 아이들을 더 많이 보고 있는 내가 되었다. 아주 뒤늦게 뜻밖의 사건 때문에 깨닫게 되었다. 그 때 내가 배운 건 그림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았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것. 누군가 날 지켜봐주고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자신있게 내 의견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사랑은 무엇보다 꾸준한 지속이며 삶은 누군가 함께 있어야 버틸 수 있다는 것.  바로 그런 것들을 선생님과 함께 하면서 배웠다는 것을.


 그런 깨달음은 불현듯 찾아왔다. 많은 시간이 지나 전혀 예기치 않은 계기로써. 어느 날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들었다. 선생님이 누군가의 칼에 찔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모든 게 보도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름과 직업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니,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황망한 마음에 얼른 내려 동창들에게 전화했다. 확인은 이틀이 지나서야 얻을 수 있었다. 사실이었다.  선생님은 더이상 이 지상에 계시지 않으셨다. 졸업 후, 한 번 제대로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수화기를 놓기도 전에 왈칵 눈물이 났다. 내가 경험한 최초의 죽음이 선생님이라니. 그러고 보니 제대로 살게 된 것도 선생님 덕분이었다. 부모님은 몸의 첫 숨을 주었지만 영혼의 첫 숨을 준 것은 선생님이었다. 그렇게 주고가셨다. 삶도, 죽음도.


 그 후로 스승이란 말을 들으면 참 아련하다. 진한 그리움도 애잔한 슬픔도 함께 배여든다. 누군가의 집에서 흘러나오는 저녁밥 짓는 냄새를 맡으며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홀로 그네를 타고 있는 것만 같다. 곧 누군가 저녁밥 먹으라고 따스하게 불러줄 것 같기도 하고 내내 그대로 어둠에 사위워가는 놀이터를 볼 것만 같기도 하다. 복잡한 심정이다. 하지만 묻어나는 따스함이 더 크다. 언젠가 꼭 누군가 와 줄 것만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놓아버리려는 삶의 그네줄을 두 손 모두 힘있게 부여잡도록 한다. 지켜봐주었던 기억이, 사랑받았던 기억이 버티게 하는 것이다. 어둠속에 홀로라도.


 정민의 '삶을 바꾼 만남'은 다산 정약용과 평생을 두고 그를 스승으로 섬겼던 제자 황상의 이야기다. 다산의 강진 유배로부터 시작되어 황상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 사제지간의 인연을 다루고 있다. 담긴 세월이 길기에 깃든 이야기가 제법 된다. 그만큼 긴 시간을 벗한다. 거기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주고 받은 서간문까지 인용되어 있어 그들의 인연을 더욱 가까이서 음미하게 되었다. 적나라한 모습이랄까. 실감나게 가득 느낄 수 있는 인연이었다. 잘 삐치고 남의 눈이 무서워 유배지에서 맺었던 가족의 인연을 저버리기도 했던 다산이었지만 그래도 제자를 아끼는 마음만은 가득했던 스승이었다. 그 모습에 나도 그만 물들었던 것 같다. 물기어린 눈으로 선생님을 떠올리게 되었던 것은.


 제목처럼 좋은 스승과의 만남은 삶을 바꾼다. 경험으로 알고 있다. 점점 사제지간이 길연이 아니라 무연 혹은 악연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오래 생각하게 된다. 짙은 그리움을 부르는 좋은 사제의 인연이 많아지기를...


 



 
 
희선 2014-07-23 00:55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난 선생님 좋은 분이군요 아이를 잘 보는 분이었군요 그렇게 가시다니, 어쩌다가... 누구나 좋은 스승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헤르메스 님은 기억할 선생님이 있어서 좋겠습니다 지금도 스승과 제자로 좋은 인연을 맺는 사람 있을 거예요 안 좋은 게 더 알려져서 그렇지...


희선

헤르메스 2014-07-23 13:59   URL
제가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주었죠. 그렇게 좋으신 분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가실 수 있다니... 절망과 부정의 먹구름에 참 오래도록 휩싸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와 생각해보면 좋은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역시 가치있는 삶이란 타인들에게 얼마나 좋은 기억을 많이 남기느냐인 것 같아요. 분명, 그럴겁니다. 좋은 인연이 훨씬 많을 거에요. 더 많은 인연들이 봄날의 개나리꽃처럼 화사하게 만발하길 바랍니다. 진심으로. 희선님 말씀 감사드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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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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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이런 장면이 있던 게 생각난다. 나치가 유태인을 선별한다.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자만 추려내고 나머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내기 위해서다. 유태인들이 한 줄로 길게 서서 차례차례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 지 나치 군인들에게 밝히고 있다. 그 줄 어디쯤에 역사학자가 있었다. 평생 역사만 연구해온 노인 학자다. 그는 당당히 역사를 연구했다고 말할 참이다. 그 때, 그를 아는 한 젊은이가 다가오더니 그에게 절대 역사학자라 말하지 말고 냄비 때우는 일을 했다고 말하라 한다.  노인 학자는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평생 고귀한 역사를 공부해 온 나에게 고작 냄비 때우는 일이나 했다고 하라니. 도대체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반문한다. 젊은이는 살고 싶으면 그렇게 말하라고 한다. 고개를 가로젓는 노인. 젊은이는 그러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다. 자기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결국 노인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젊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분은 말을 할 줄 모르며 평생 냄비 때우는 일을 했다고. 그러자 나치 군인들은 잘됐네. 마침 식당에 때울 냄비가 가득한데 하면서 노인을 차출한다. 노인 학자는 이제 산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계속 억울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세상에 역사가... 역사를 연구하는 게 이리도 가치가 없다니... 중얼거리며.


 극단적은 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정작 중요한 순간 별 도움이 안 된다. 철학이라고 다를 것인가? 마찬가지이리라. 역사든, 철학이든 얼른 드는 인상은 실생활과 지극히 유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괜히 상아탑 학문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그건 철학이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짊어진 멍에였다. 그걸 우리는 탈레스에 관한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다. 탈레스가 누구인가? 서양철학사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 아니던가? 만물의 근원이 무엇인지 근심하여 물이라고 선언한 최초의 철학자. 그렇게 이 이야기는 철학의 태초에 있었던 것이다. 탈레스는 밤이면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즐겨 관찰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하늘의 별만 바라보며 가다가 그만 발 밑의 우물을 보지 못하고 빠지고 말았다. 그걸 본 트라키아의 한 하녀는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멀리 있는 밤하늘의 별들은 잘 보면서 어찌 발 앞의 우물은 보지 못하누."


 현장 인문학자 고병권은 이 하녀의 비웃음을 철학의 임무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책, '철학자와 하녀'는 교도소에서 재소자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던 도중 한 재소자의 질문 때문에 태어났다. 그 재소자는 저자에게 이렇게 질문했다고 한다.

 "왜 우리가 지금 여기서 철학을 공부해야 합니까?"


 쉰들러리스트의 역사학자, 트리키아 하녀의 비웃음, 재소자의 질문. 이 모두에서 잘 드러나듯이, 분명 철학과 현실엔 괴리가 있다. 철학은 현실 너머를 쫓으려고 하고 현실은 말뿐인 철학을 자신과 상관없다 여긴다. 철학은 배부른 돼지 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이렇게 배고픈데 철학 나부랭이 따위가 무슨 대수냐고 말한다. 허기를 줄여주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철학은 그런 현실을 우매하다고 하고, 현실은 그런 철학을 신선놀음이라 비아냥 거린다. 간격은 좁혀지지 않는다.


 고병권은 이것이 철학과 가난한 사람(나는 이것을 현실이라 부른 것이다.) 모두 불행하게 만든다고 한다.


 철학과 가난한 사람이 대립하는 곳에서는 철학도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도 불행하다. 철학은 기껏해야 현학적 유희이거나 비현실적 몽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가난한 사람은 현실 논리를 재빨리 추인함으로써 영리한 노예, 성공한 노예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p. 7)


 그러므로 이 같은 불행을 막으려면 단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다. 그 간격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의 책 '철학자와 하녀'는 바로 그것을 위한 여정이다.



 여기에는 전부 6장에 걸쳐 많은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아래로 통일되게 흐르는 근본적 태도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시각의 전환이다. 이를테면, 누구나 한계라고 생각했던 지점을 오히려  출발이라고 여기는 태도다. 쉽게 발상의 전환이라 해도 좋을 듯 하다. 그건 첫머리에서 그가 철학의 사명을 '지옥에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짓는 일'이며 철학은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이 중단된 곳, 즉 누구도 뛰어들고 싶지 않아 하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이미 드러난다.모두가 'NO'라고 외칠 때, 'YES'를 찾아내려 하는 것. 그것을 저자는 철학이라 여긴다. 아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진정한 철학은 무엇보다 이미 있는 현실이 아닌,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철학자와 하녀'는 그렇게 다르게 보기, 생각하기를 제안한다. 이것은 특히 17세기에 많은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저마다 앞다투어 신에 대해 언급한 것을 두고 그 의미에 대하여 들뢰즈가 생각한 것을 말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들뢰즈는 17세기에 스피노자, 데카르트, 말브랑슈, 라이프니츠 등이 한결같이 신에 대해서 말한 것에 흥미를 느꼈다. 물론 그 때까지는 여전히 기독교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다르게 생각했다. 시대가 신을 사유하도록 제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유에서 자유와 해방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들뢰즈는 이렇게 말했다. "신을 통해 회화는 인간적인 것들, 피조물로는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유한한 것들에서는 사유할 수 없었던 신을 통해 극한까지 가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 "극한에서는 종교적으로 가장 경건한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가장 불경한 사람이 되는 게 가능합니다."(P. 129)


 그러니까, 들뢰즈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약은 구속이 아니라 오히려 해방의 계기라고.

 또한 하이데거는 휠덜린의 시구를 인용해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위험이 있는 곳에는 구원의 힘도 자라네"라고(P. 170)


 바로 이러한 시각의 전환. 그것이야말로 철학이라는 것이며 우리가 그 태도를 지향할 때, 결국 철학과 현실 사이에 놓여진 간격도 줄일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와 하녀'는 이런 책이다. 그것을 하나의 근본 태도로 하여 여름의 수목처럼 가지를 쭉쭉 뻗어나간다. 그 가지의 손 끝에서 개념은 전혀 다르게 정립되고 그 바뀐 의미는 타자를 포용하는 여지를 더욱 넓혀준다. 바람은 언제나 비어있는 공간에 비례해 시원함을 가져다 준다. 자유를 느끼는 감각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우리는 확인하게 될 것이다. 철학은 궁극적으로 자유케 하는 것이라는 걸.


 그 자유를 향한 이 책의 여정은 철학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그리 어렵지 않다. 말은 쉽고 내용은 부담이 없으니 지하철 안에서나 카페에서 사람을 기다릴 때에도 얼마든지 벗할 수 있는 책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틀림없다.

 부디, 한 번 벗해보시기를...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07-19 18:06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좋군요. 오랜만에 한 글자 한 글자 빼지 않고 읽었습니다.

헤르메스 2014-07-20 17:10   URL
제게 참 과분한 칭찬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님 정말 감사합니다^ ^

2014-07-23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직업의 지리학 - 소득을 결정하는 일자리의 새로운 지형
엔리코 모레티 지음, 송철복 옮김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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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이라는 영화를 만나기 전까지 우리들에게도 생소했던 도시 시애틀. 그건 당사자인 미국도 다르지 않아서 시애틀이 미국의 도시냐는 농담이 종종 유행했다고 한다. 그럴만도 한 것이 사실 시애틀은 오래도록 최악의 도시 중 하나였다. 70년대 후반, <이코노미스트>는 시애틀을 '절망의 도시'라고 불렀다. "중고차, 중고 텔레비젼, 중고 주택을 미국에서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곳은 워싱턴의 주 시애틀이다. 식료품을 사고 집세를 낼 돈을 마련하기 위해 집집마다 생활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내다 파는 이 도시는 거대한 전당포나 다름없다."라고 말했다. 이런 옥외 광고판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시애틀을 떠나는 마지막 사람은 전등을 꺼주시기 바랍니다." 시애틀은 그런 도시였다. 말하자면 뉴욕과는 정반대의 도시. '시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 포스터에서도 그런 분위기가 감지된다.


 하지만 이런 시애틀의 모습은 이제 과거가 되었다. 지금은 "날씨 빼고는 모든 것이 완벽한 도시'라고 평가 받는다. 집에 있는 중고품이라도 팔아서 연명해야 했던 도시가 이제는 1인당 개인소득이 연간 5만 497달러가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최근 5년간 개인 소득이 꾸준히 2.6% 증가하는 중이다. 좋은 일자리가 많기로는 미국에서 5위고, 여성 기업가에게 좋기로는 2위이며 첨단 기술 도시 순위에서는 미국에서 당당히 1위이다. 절망의 도시 시애틀은 현재 살기 좋은 도시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아무래도 궁금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단 말인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지 않는다고 물론 계기가 있었다. 바로 1979년 1월 1일.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이전이다. 당시 빌게이츠가 설립한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종업원 13명의 작은 회사였지만 매출은 무려 100만 달러였다. 그것도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원래는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 있던 마이크로소프트는 그 날 시애틀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시애틀은 사업을 하기에 최악의 도시였지만 단 하나의 이유로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그것을 감행했다. 바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그 별 것 아닌 동기로 시작된 이전이 결국 시애틀이란 도시를 완전 바꾸어 버렸던 것이다. 원래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있던 앨버커키와 비교하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이전하기 직전만 해도 시애틀의 대졸 노동자들은 앨버커키보다 겨우 5% 많았다. 하지만 그 이전 후에 그 차이는 점점 벌어졌고 1990년대는 14%나 되었다. 2000년대는 첨단기술의 폭발적 성장과 더불어 무려 35%까지 치솟았다. 거의 미국과 그리스의 차이에 맞먹는 수치였다. 70년대만 해도 모든 것에서 비슷했던 시애틀과 앨버커기. 하지만 이제 시애틀의 노동자들은 앨버커키 보다 1만 4,000달러를 더 받는다. 시애틀은 미국의 소프트웨어 기술자들에게 지급되는 총 급여의 4분의 1을 받지만 앨버커키는 노동자들의 학력 수준이 점점 떨어져 값싼 임금의 질낮은 일자리만 보편화되고 있다.


 이렇게 지역간 격차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제 그 격차는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직업의 지리학'을 쓴 엔리코 모레티가 주장하는 바다. 그가 확신하는 이유가 있다. 이제 산업의 토양이 전혀 달라졌기 때문이다. '빅뱅 붕괴(우리나라엔 '어떻게 그들은 한순간에 시장을 장악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를 쓴 래리 다운즈와 폴 누네스의 말대로 이제는 혁신 산업이 시장을 좌지우지 한다. 애플,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같은 빅뱅 파괴자들 말이다. 혁신, 즉 새로운 산업 아이템을 만들어 내는 비용은 제조업 중심의 과거보다 지금 훨씬 적어졌다. 바로 통신을 비롯한 첨단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거기다 세계화도 한몫 한다. 혁신 기업에게는 시장이 넓으면 넓을수록 수익도 비례해서 커진다. 그것이 이전 기업과 다른 혁신 기업만의 독보적 장점이다. 그 이유는 개발과 연구에 따른 고정 비용만 있을 뿐 정작 생산에는 그리 큰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윈도우의 새로운 버전을 만들 때, 그 프로그램을 만들기까지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지만 한 번 만들어 놓기만 하면 아무리 그걸 거듭 복사해도 별 다른 비용이 들지 않는다. 겨우 몇 센트의 복사 비용만 가지고 주구장창 프로그램을 팔아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이런 특수한 상황 때문에 혁신 기업은 시장이 크면 클수록 수익은 비례해서 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구글이나 아마존,페이스북도 마찬가지다. 점점 큰 시장이 되어가고 있는 비디오 게임도 그러하다.



 이 때문에 혁신 기업은 오로지 하나의 가치만 중요하다. 이제 예전처럼 교통이나 지대, 혹은 관공서 같은 것들은 더이상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직 단 하나, 사람만이 중요하다. 혁신 사업에 필요한 사람,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템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 미래의 빅뱅 파괴자들. 그런 인적 자원만이 그들의 구미를 당기는 요소가 된다. 페이스북을 만들었던 마크 주커버그의 말 그대로다.


 "자신의 역할에서 특출한 사람은 꽤 잘하는 어떤 사람보다 단지 약간 나은 것이 아니다. 100배 낫다."(p. 106)


 같은 페이지에서 엔리코 모레티는 이 말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커버그의 이 언급은 특히 흥미로운 사실을 드러낸다. 혁신 부문의 발전은 재능의 가치 상승과 관련된다. 경제적 가치가 전에 없이 재능에 달려 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20세기에 경쟁은 물리적 자본 축적에 관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최고의 인적 자본 유치에 관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사람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자원이 된다. 아마존의 창립자 제프 베조스가 '월스트리트의 잘 나가는 대형 회사의 이사'를 그만두고 좀 더 커다란 성취를 위하여 '아마존'이란 인터넷 서점을 시애틀에서 차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시애틀에 자신이 인터넷 서점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인재 풀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맞는 풍부한 인적 자원이 그를 그 곳으로 불렀다. 더구나 첨단 기술의 중심이 된 시애틀은 제프 베조스가 하고자 하는 그런 사업에 대한 이해가 높아서 당시만해도 모험이나 다름없었던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투자를 두 번이나 받을 수 있게 했다. 분명 시애틀이 아니었다면 아마존은 이처럼 성공할 수 없었고 이제 아마존은 시애틀을 먹여 살리는 거대 기업이 되었다.


 바야흐로 시장의 중심 세력이 될 혁신 사업은 사람을 최우선 가치로 여긴다. 이제 사람을 중심으로 기업은 재편되고 시애틀처럼 이웃의 학력이 나의 급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엔리오 모레코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 모든 도시에서 지역의 인적 자원과 급여 사이의 관련성이 매우 큰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적으로 한 도시 내에 대졸자 비중이 늘어날수록 같은 도시내 고졸자의 연봉 역시 증가하는 게 확인되었다. 이를 '인적 자원 외부 효과'라 부른다. 학력은 이제 소득 견인의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섣부른 오해는 금물이다. 학력 지상주의의 재판(再版) 같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학력이란 무엇보다도 창의성을 증대하는 것, 즉 이전에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에 관계된 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가 주로 하고 있는 교육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기업에서 시키는 대로 일 잘 할 수 있는 기성품을 찍어내는 교육이 아닌 독창적인 생각과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재능을 키워내는 교육으로서의 학력인 것이다. 제인 제이콥스는 단적으로 이 학력을 '새 일(new work)'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 일컫는다.


 엔리코 모레티는 현재 지역적 격차가 날로 확대 일변도에 있음을 보여준다. 시애틀과 앨버커키처럼 인적 자원을 소유하지 못한 도시는 '절망의 도시'가 될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 산업의 풍토는 변했다. 무엇보다 사람이 중요해진 시대가 된 것이다. 페이스북은 2009년 친구들의 온라인 활동을 추적할 수 있게 돕는 회사인 '프렌드피드'를 무려 4200만 달러에 산 적이 있다. 하지만 그만한 돈을 주고서 그들이 원했던 것은 기업이나 기술이 아니었다. 그들이 필요했던 것은 오로지 사람이었다. 프렌드피드의 창업자 브렛 테일러를 비롯해서 눈독 들이고 있었던 제품 관리자와 기술자 12명. 오로지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페이스북은 4200만 달러를 쓴 것이었다. 이제 이런 일은 보편이 될 것이다. 엔리오 모레티의 '직업의 지리학'은 도시 행정가들에게 자신의 도시를 번영시키려면 무엇보다 창의적 재능으로 무장한 인적 자원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는 것을 주지시키겠지만 개인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리라 생각된다. 그건 바로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능력을 가지는 것만이 자신이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개인의 가치가 커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조직에 너무 주눅들어 있는 것은 아닌지도 생각해 볼 때다. 이제 정답이 하나뿐인 세상은 지나갔다고 본다. 그 어떤 분야에서든 남과는 다른 생각으로 독보적 능력을 닦는 것. 그것이 가장 안정적인 삶의 동아줄이 되어줄 것 같다. 또한 도시는 이제 그런 존재들에게 더욱 신경쓰고 그 능력을 더욱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보다 공교육의 정상화는 이를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하루 빨리 일반고 전성시대가 되어서 그들의 모든 자질들이 동등하게 존중받고 한껏 개성을 발휘하면서 자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생각보다 개인의 힘은 크다. 그걸 믿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