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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처 쇼크 - 위대한 석학 25인이 말하는 사회, 예술, 권력, 테크놀로지의 현재와 미래 베스트 오브 엣지 시리즈 2
존 브록만 엮음, 강주헌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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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나온 마음의 과학에 이어 엣지 시리즈 두번째 책이 드디어 나왔다.

 

 

 제목이 '컬처 쇼크'인데 이번엔 제목 그대로 문화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이야기 한다. '마음의 과학'만큼이나 이번에 실린 저자들의 면면도 역시 화려하다. 포문은 '총,균,쇠'로 우리들에게도 유명한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연다. 그는 흥미롭게도 '사회의 붕괴'를 테마로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가 드는 주요한 사례는 우리에게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이다.

 

 일단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이스터 섬 사람들, 즉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원래 숲으로 뒤덮여 있던 섬에 정착했다. 그 섬의 숲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야자나무들이 있었다. 이스터 섬 사람들은 숲에서 나무를 베어내 카누를 만들고 땔감으로 사용했으며 석상을 운반하고 세우는 데도 사용했다. (...) 결국 그들은 숲 전체를 베어내 모든 수종을 절멸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달리 말하면 더 이상 카누를 만들 수도 석상을 세울 수도 없었다. (...) 이로 인해 식인 풍습이 전염병처럼 번지며 섬 주민의 90%가 죽음을 맞았고 그들의 사회는 붕괴하고 말았다. (p. 24)

 

 우리가 알고 있는 이스터 섬은 이렇게 멸망했다. 언제고 꼭 한번은 가보고 싶었던 섬이지만 전혀 몰랐던 섬의 역사였기에 흥미로웠다. 하지만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이걸 흥미 본위의 붕괴 사례로서 말한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가 이 사례에서 주목했던 건 다음과 같은 물음이었다. "어떻게 한 사회가 전적으로 의존해 살아가던 생존 수단인 나무들을 모조리 베어내는 재앙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이것 말이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왜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이 질문에 주목한 이 글이 가장 먼저 나왔는지 깨닫게 된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여기서 우리들이 흔히 말하고 있는 이른바 '집단 지성'의 한계를 논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에게 집단 지성은 언제나(라고 까지는 비록 말하긴 어려워도) 그래도 올바른 쪽에 가까운 결정을 내린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흔히들 들고 있는 사례가 그것이다. 대충 사람들에게 평균을 짐작케하면 가장 많은 대답의 평균치가 실제 평균값하고 맞아떨어진다는 사례 말이다. 그래서 자주 사람들은 하나 보다는 둘이 , 둘 보다는 셋이 생각하는데 더 맞다는 말을 한다.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면서 자리잡게된 현상이기도 하다 아시다시피 민주주의를 이루는 주요한 원칙 중의 하나가 바로 '다수결 원칙'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이스터 섬 사례에서 보듯 집단 전체가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러고보면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의 나치 정당은 가장 많은 독일 민중의 지지를 받고 정권을 잡았었다. 그 역시도 집단의 선택이 꼭 올바르지 않음을 알려주는 좋은 사례다. 사실은 이 집단주의적 결정에 대한 불신은 고대 그리스 때부터 있었다. 플라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다수의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민주정을 쉽게 중우정치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보았으니까.

 

  이번에 나온 '컬쳐 쇼크'는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인터넷의 광범위화로 온갖 정보들이 너나할 것 없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렇게 지식과 문화가 집단적으로 창출되고 소비되고 있는 시대가 가져온 '문화적 쇼크'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 말이다.

 

  쉽게 말하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저번 세기말에 유행한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일종의 반격이라 할 수도 있다. 하긴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 대로 접어든 개념이니 반격이라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예술에 대한 제대로 된 정의를 추구하고 있는 데니스 더턴이나 문화에 대한 꼭 필요한 개념을 위해 이른바 문화 통일장 이론 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는 브라이언 이노(개인적으로 가장 반가웠던 글이다. 음악이 아닌 글로 만나보는 브라이언 이노라니 얼마나 신선하던지. 그의 대담을 읽는데 문득 그의 앨범  Another green world 가 다시 듣고 싶어졌고 그래서 음반을 틀어놓고 책을 읽었다.) 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탈색화 시켜버린 문화와 예술에 다시금 구별되고 그만의 독특한 의미망을 설정해주려는 작업이었다. 이렇게 이 책은 너무도 미시적으로 다원화 되어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알 수가 없고 그 모든 것이 똑같이 동시에 터져 나와 오히려 사람들을 무가치의 혼돈 속에 빠져들게 만드는 오늘날의 집단주의적 창출과 소비에 우려와 그것을 합리적으로 개선시킬 통로들을 사색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재런 레니어의 '디지털 마오이즘'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글과 뒤에 실린 논쟁들이 이 책의 핵심 부분이라고 본다. 재런 레니어는 이 글은 여러가지 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둔다. 직접 의미를 생산하는 자들 보다는 구글이나 우리나라의 포털과도 같이 오히려 정보를 통합하는 자들이 더욱 높은 수익을 얻고(음원 수익도 마찬가지라고 알고 있다. 창작자들 보다는 배포하는 자들이 더욱 돈을 많이 받는다.) '위키 피디아'나 '아메리칸 아이돌'의 투표와 같이 집단주의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의 옳고 그름을 판별한 수단이나 존재는 전무하여 다만 그 과정만이 전부인 이런 상황. 그렇게 디지털 사회로 깊숙이 들어서면서 이전과는 여러 면에서 분명 달라진 지금의 현실을 그는 디지털 마오이즘으로 부른다.

 

 '컬쳐 쇼크'는 점점 통합화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개인의 고유성을 다시금 복원시키려는 사유들이 모여있는 책이다.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글도, 예술의 의미나 문화의 의미를 추구하는 글도 사실 알고 보면 집단과 별개로 인정되고 존중되어야 할 개인의 정체성과 존재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대략 2006년 전후로 나온 이 글들이 그러나 뜬금없이 제기된 것은 아니다. 사실 지금의 사회는 알고보면 저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서 보듯이 파시즘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포스트 모더니즘이 결국은 보수와 파시즘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우려는 당시 부터 존재해 왔다. 지금 유럽이나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까지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 그들의 예언이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다. '컬쳐 쇼크'의 지식인들이 우려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더구나 스마트 폰을 비롯하여 디지털 환경이 더욱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사유라는 걸 하지 않게 되었다. 이 책에 실린 한 저자는 지금 사람들은 자신의 뇌를 머리가 아니라 외부의 하드웨어에 담아놓고 다닌다라고도 했다. 들뢰즈 역시 생전에 앞으로 사유 없는 무뇌아들의 사회가 될 것이라 경고한 바도 있다.

 

 사실 지금 사회가 개성이 넘친다고 하지만 그건 어불성설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개성의 대부분은 외모에만 치중된 일종의 기성품화된 개성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개성이란 외모만이 아닌 사유와 그에 뒷받침된 행위가 바탕이 될 때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컬쳐 쇼크'의 저자들이 건져내고 싶은 것도 바로 그것이다. 지극히 그 자신만의 사유와 성찰 그리고 행동이 근거가 된 개인의 고유성.

 

 이제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 되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알 수 있으며, 판단할 수 있는가? 예전에 칸트가 제기했던 인간학적 물음을 우리는 다시 해야 할 시기에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거기서 주어는 칸트와 달리 인간이 아니다. 바로 '나'다. 닥쳐오는 집단화(파시즘이라고 까지는 말하지 않겠다.)의 파도 앞에서 그렇게 계속 스스로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를 건져내 줄 유일한 구명 보트이다.

 

 



 
 
 
최고의 공부 - 창의성의 천재들에 대한 30년간의 연구보고서
켄 베인 지음, 이영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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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도 낯익고 지은이도 낯익다.

 

  '최고의 공부'라는 제목은 얼마전 방영한 KBS 다큐멘터리 '공부하는 인간'의 마지막 화 소제목이었다. 그 제목으로 지금 세계 최고의 명문대들은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는지 보여주었던 게 기억난다. 특히나 우리나라의 공부 방법과 비교해 주어서 더욱 인상 깊었는데 옥스포드를 비롯한 서양의 명문대들은 주로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상호 토론하는 것을 주요한 공부 방법으로 삼고 있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오로지 홀로 공부했다. 그들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주로 듣고 말을 했지만 우리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일방적으로 듣고 책을 읽거나 필기하는 것 뿐이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심리학과 교수가 행한 실험은 서양과 동양의 공부 방법이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같은 과제를 놓고 서양의 학생들은 주로 말을 하면서 해야 제대로 해냈고 동양의 학생들은 말없이 생각만 해야 제대로 잘 해냈다. 아주 어려운 수학문제를 주고 수학 전문가의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한 실험에서는 서양 학생의 경우 아무 부담없이 얼마든지 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했고 그렇게 했더라도 전혀 자존감이 낮아지지 않았는데 반면 동양의 학생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걸 내켜하지 않았고 도움을 요쳥한 경우에는 자존감이 매우 낮아졌다. 이렇게 서양과 동양의 공부 방법은 분명히 차이가 났다. 실험을 주도한 교수는 동양의 경우 말로 하기 보다는 묵상을 통해 정답에 이르는 것에 길들여져 있고 타인의 도움을 잘 구하지 않는 것도 서양보다 더욱 타인의 평판을 신경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도움을 요청하는 건 자신의 체면이 깍이는 일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새삼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고보니 대학까지 나왔지만 단 한 번도 공부 그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어릴 때 부터 늘 해오던 것을 한다는 생각만 했을 뿐, 진정한 공부의 의미와 어떻게 해야 공부를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춘기 이후로 우리가 내내 어른들로 부터 공부에 대해 들었던 말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그저 '기계'가 되라는 것이었으니까...

 

 정말 물어야 할 때에 묻지 않고 이렇게 어른이 다 되어서야 새삼 공부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우리 교육의 비극이 아닐까 한다. 낯익은 제목 때문에 잡게 된 켄 베인의 '최고의 공부'는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다.

 

 저자의 이름이 낯익은 것은 역시 방송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예전 EBS 다큐멘터리에서 그 이름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 가장 잘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다큐멘터리였을 것이다. EBS가 그때 켄 베인 교수를 특별히 섭외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그 주제에 대해 켄 베인이 책을 썼기 때문이다.

 

 

 그 책이 바로 'What the Best College Teachers Do' 란 책이다. 제목 그대로 최고의 강의로 유명한 명문대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나를 중점적으로 살펴본 책이다. 이번에 나온 '최고의 공부'는 원제가 'What the Best College Students Do' 로 그 책의 자매편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가장 뛰어난 학업 성취를 보여주는 명문대는 어떻게 공부하는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공부 방법을 실제로 디테일하게 알려준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책은 그러한 각론이라기 보다는 총론에 가까운 책이다. 그러니까 실제 방법 보다는 공부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을 알려주는 책인 것이다.

 

 

 켄 베인은 왜 거기에 더 중점을 두었는가? 그것은 공부야 말로 동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켄 베인은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 예전 스웨덴의 한 대학에서 했던 연구를 소개한다. 그 대학교 학생들의 공부 방법을 면밀히 조사해보니 모두 세 가지 패턴의 공부 방법이 나왔다고 한다. 하나는 책이든 무엇이든 주어진 것만 습득하고 보는 '피상적 유형'  다른 하나는 좋은 성적이든 아니면 출세든 어떤 목표를 미리 세워두고 거기에 맞춰 공부를 하는 '전략적 유형' 마지막으로 별다른 목표 없이 그저 자신이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알아서 공부를 하는 '심층적 유형' 이렇게다. 각 유형별 학업 성취도를 살펴보니 마지막 '심층적 유형'이 앞의 두 유형 보다 압도적으로 높았다. 즉 공부에 있어서는 그 동기가 많은 것을 좌우한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그것도 자발적인 동기가 되었을 때 더욱 많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켄 베인은 내가 알고 싶어서 하는 공부가 가장 효과적이며 공부는 또한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바로 세계의 리더들은 어떻게 공부했는지 보여준다. 과연 그들은 모두 내적 동기에 따라 공부한 자들이었고 또 그랬기 때문에 최고의 학습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내적 동기가 뒷받침 되어야 하는 이유는 또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이 바로 '메타 인지(metacognitive)'다. 이 '메타인지' 또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인데 그건 쉽게 말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다. 리더들은 모두 이러한 메타인지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래서 공부에 대한 내적 동기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메타인지는 자신의 현상태에 머무르게 하지 않으며 언제나 유동하는 정신으로 자신을 더 확장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구에 따르면 보상 같은 게 주어지는 외적 동기 보다 순수한 자기 만족을 위한 내적 동기가 더욱 공부를 오래 지속시키고 성취도 또한 더욱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니 공부에 있어 그 동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리하여 켄 베인은 그 동기를 고취시키기 위하여 이런 스타일로 책을 썼던 것이다.

 

 읽어보면 여지껏 내가 행했던 공부 방법과는 너무나 달라 왠지 많은 아쉬움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진작에 이렇게 말해주는 책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더욱 공부를 즐겁게 할 수 있었을텐데...'하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 같은 성인들 보다는 한창 공부 중인 청소년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늘 하고 있는 공부를 새롭게 바라보게 해서 더 이상 지겨운 것이 아닌 보다 즐길만한 것으로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 우리가 공부를 지겨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켄 베인은 특히 이걸 '기대 실패' 라 부르는데 우리의 두려움과는 달리 이러한 '기대 실패'야 말로 더욱 공부가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 한다. 연구에 따르면 해외에서 오래도록 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더 공부를 잘 했는데 그렇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기대 실패'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해외에 살면서 자기에게 익숙한 환경이 아닌 전혀 낯선 환경으로 인해 많은 '기대 실패'를 느꼈기 때문에 더욱 현재 상태에 머무르거나 자만에 빠지지 않고 타인과 세계에 대한 보다 확장된 관심으로 공부에 대한 내적 동기를 강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실패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해야 하며 그러므로 우리가 느끼는 공부에 대한 지겨움은 우리가 잘못된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음에 기인한다. 이렇게 공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정말 중요하다. 때문에 더욱 제대로 공부라는 것을 바라보게 해 주는 켄 베인의 이 책, '최고의 공부'를 벗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문제는 무기력이다 - 인지심리학자가 10년 이상의 체험 끝에 완성한 인생 독소 처방
박경숙 지음 / 와이즈베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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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그야말로 무기력의 계절이었다.

 

 

 

  무기력 의 사전적 정의는 뭘까?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기운이나 힘이 없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그 겨울 난 감당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었다.  그건 다른 것도 아니고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었다. 그 겨울 초입에 내가 마주했던 결과는 그 때까지 내가 보지 못했던, 아니 보았으나 믿고 싶지 않았던, 그래도 그나마 상식은 통하는 세상이겠지 하는 생각에 애써 덮어두기만 했었던 그러한 세상의 혹독한 진실을 보게 만든 것과 같았다.

  나는 그 때까지  내가 믿었던 가치가 있었고 또한 그것이 무엇보다 옳은 것이라 믿었었기에, 더우기  그것은 늘 나의 앞 길 저만치서 하나의 불빛이 되어 이 어둔 밤과도 같은 세상 속에서 내가 실족하지 않고 제대로  내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기도 하였기에, 그 신뢰가 여리고의 성벽처럼 여지없이  허물어져 버린 것을 확인한 날, 이 세상은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무언가가 되어버렸고 대지를 계속 짊어져야 할 의미를 잃어버린 아틀라스와도 같이 난 무기력 속에 폭삭 주저앉고 말았다.

 그랬기에 겨울은 정말 길었고 추웠다. 실제로도 그랬지만, 마음마저 그러하다보니 피부로 느껴지는 겨울의 길이와 추위가 몇 배나 더 되는 듯 했다.

 

 

 

 

 그렇게 더할 나위 없이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 이솝 이야기에 나오는 나그네처럼 봄이 되어 다시금 온기를 찾은 햇살은 자꾸만 나로 하여금 겨울 내내 꽁꽁 덮어쓰고만 있었던 무기력의 외투를 벗도록 유혹했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은 사람의 감정에도 통용되는 것인지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때 마음에 돋우었던 결기는 서서히 마모되고 있던 참이었다. 그리하여 난 다시금 책이란 걸 찾기 시작했고 시간이 나면 서점으로 발길을 돌리게도 되었다. '문제는 무기력이다'라는 책은 그러던 가운데 만난 책이었다. 겹겹이 껴입고 있었던 무기력의 외투를 이제는 좀 벗고 싶었던 나에게는 때마침 내린 단비와도 같은 만남이었다.

 

 

 

 이 책의 저자 박경숙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지과학 박사라고 한다. 그녀는 그러한 입장에서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마주하게 되는 무기력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녀가 중점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인지심리학자이자 동물행동학자인 Martin Seligman가 동물 실험을 통해 밝혀 낸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란 개념이다. '학습된 무기력'이란 쉽게 말해 무기력이라는 것이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의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Martin Seligman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다.

 

그림은
Martin Seligman 이 무기력이 학습되는 것임을 보여준 동물 실험의 모습
 
 
 하나의 방을 가운데 울타리를 놓아 저런 구조로 만들고 개가 A에서 B로 건너가려 하면 개가 있는 아래의 철판에 전류를 흐르게 하여 찌릿한 고통을 주었다. 개가 울타리를 넘으려 할 때마다 저렇게 반복적으로 고통을 주었더니 개는 차츰 건너가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되었고 나중엔 아예 울타리마저 치워버렸음에도 불구하고 B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결국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개가 되어버린 것이다.
 

 
 
 Martin Seligman 은 이 실험을 통해 무기력이라는 게 무엇보다 만들어지는 것이란 걸 알게되었다. 무기력은 어느 순간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집적된 일종의 결과물과도 같았다. 모든 존재가 느끼는 무기력함이란 초기의 시도가 부정적인 결과에 직면하고 그로 인해 가지게 된 감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례대로 반복적으로 누적됨으로써 발생하게 된 하나의 상태였던 것이다. 이렇게 Martin Seligman 은 무기력이란 게 무엇보다 신체의 상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감정의 상태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도 그냥 감정의 상태가 아닌 보다 본질적인 측면에서 말하자면 내가 살면서 알게 모르게 학습을 통해 받아들인 삶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궁극적으로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원인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책 표지에도 나와 있는 '실패하면 어쩌지?' '해도 안될거야' '될 리가 없어'와 같은 부정적인 말들을 입버릇처럼 되뇌이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무기력한 상태마저 초래하게 된 것이었다. 즉 우리의 무기력이란 우리 내부에 살면서 알게 모르게 굳어진 나의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나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무기력에 빠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게 무기력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열쇠는 더 이상 나의 바깥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건 바로 나의 내부에 있었다. Martin Seligman 은 결론적으로 나와 세계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무기력을 막을 수 있는 근원적 처방이라고 말한다. 저자 박경숙이 '문제는 무기력이다'라는 책을 통해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위의 그림처럼'학습된 무기력'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무기력이란 상자로 부터 벗어나는 일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냥 다른 것 없이 상자의 문을 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상자의 문이 애초부터 닫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닫혀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저 환경이 바뀌길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낙관하는 마으으로 그게 무엇이든 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핵심이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그녀는 책을 통해 충분히 깨우쳐 주는 것이다. 그것을 그녀는 그녀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까지 포함하여 아주 많은 실제적인 사례들로써 보여준다. 더구나 그 모습들은 어쩌면 우리 역시도 일상을 영위하면서 한번쯤은 가져보았을 그런 모습들이다.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살면서 우리들은 크고 작은 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엉킨 실타래를 풀 때 그 첫 시작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듯 우리들의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그 첫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아주 중요하다. 그 때 대부분 우리들의 시선은 직면한 문제에 두기 마련이다. 먼저 그 문제의 크기를 가늠하고 그 뒤 내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가늠한다. 하지만 '문제는 무기력이다'는 그 첫 시선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그 때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나'이다. 그것도 냉정하게 내가 할 수 있고 없고를 따지는 시선이 아니라 내가 아직 모르는 잠재된 가능성까지 믿고 응원하는 그런 시선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그 시선이 바로 문제 해결의 50%라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Slow and steady wins the race' 이라는 격언이 바로 문제를 직면한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어쨌든 포기하지 않는 꾸준한 걸음이 중요한 것이다.

 

 

 


 
 
 

 



 
 
 
미국을 만든 책 25 - 어떻게 하얀 고래, 콩코드 호숫가, 피곤한 블루스는 미국의 정신을 형성했는가
토마스 C. 포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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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미국이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생각한다면 그 역사가 건국한 지 겨우 2백 30년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절로 도대체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수십년 동안이나 세계 최강의 나라로 군림할 수 있었을까 하고 궁금하게 여기게 된다. 행여나 그들이 넓은 땅덩어리와 자원 때문일까 싶지만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도 아니고 그 보다 훨씬 넓은 나라와 많은 자원들을 가진 국가도 그러한 영예를 못 얻는 걸 보면 분명 그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게 외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제 우리의 눈이 향하는 곳은 내적인 부분이다. 말하자면 어떤 미국만의 정신 같은 것이 그러한 결과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 아닐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은 사실 그러한 것들을 건국 당시 부터 보여왔다. 바로 미국의 독립과 더불어 제정 발표된 미국 헌법과 당시까지로썬 세계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초유의 정치체제였던 대통령제가 그것이다. 미국 헌법은 가장 먼저 민주주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헌법으로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대통령제에 대해서는 두 말할 것도 없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들만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늘날엔 영국이 정립시킨 의원내각제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정치체제로 자리잡고 있으니까 말이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해서 기존의 이념과 체제로부터 자유로운 이러한 헌법과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당시 프랑스에서 판사로 재직중이던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미국이 보여준 놀라운 성과에 이러한 호기심을 가졌고 결국 스스로 미국으로 가서 현지 체험한 결과를 한 권의 책으로 펴내게 되었으니 그게 바로 '미국의 민주주의'다. 아시다시피 이 책은 정치학의 고전으로 많은 이들이 민주주의 가치를 지상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있어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미국이 유럽에게 어떤 존재였던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이는 체코의 유명한 작곡가 드보르작이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교향곡 9번은 당시 미국에서 느낀 새로운 활력에 대한 경이로움을 표현한 것인데 그래서 붙여진 이름 또한 '신세계 교향곡'이다. 그렇게 유럽에게 있어 미국은 '신세계'였고 미래를 앞서나가는 일종의 '프론티어'였다. 영국 식민지 시절 유럽의 모든 떨거지들의 집합소였던 곳이 단 시간 안에 유럽을 선도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이 그런 역량을 가지게 되었는지 당연히 궁금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정작 정신적인 것을 들여다 보려 해도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담겨 있는 눈에 보이는 존재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더듬을 수 밖에 없는데 거기에 있어 '책'은 바로 정신의 산물로 아주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현재 미국 미시간 대학에서 거의 40년 가까이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토마스 C 포스터의 '미국을 만든 책 25'는 바로 이렇게 미국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보여지는 25권의 책을 통하여 미국의 정신을 추출해 보려는 책이다.

 

 국가가 수립된 이래, 아니, 국가가 수립되기 전에도 미국은 글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 저술가들은 우리의 생각을 유도해왔다.(P. 10)

 

 그런데 미국엔 건국 이래로 수만권의 책이 있을 것인데 왜 하필 25권인가? 이건 그의 특별한 기준에 따른 결과다. 무엇보다 미국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책들만을 선정하다보니 25권이 된 것이다. 때문에 그 자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자'도 역시 포함되었다. 하지만 '어떤 변화인가? 변화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기에 25권을 고른 것인가?'란 질문이 가능하다. 포스터는 그 질문을 예상했음인지 이렇게 책에서 직접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미국(인)의 국민적 특성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또 미국인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며 사는 사람인지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변화로 보았다. (...) 그 이야기의 묶음에는 무엇이 담겨있는가? 우리 자신, 우리의 역사, 우리의 능력, 우리의 가치, 우리의 관심사, 우리의 가장 소중한 원칙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담겨있다.(P. 11)

 

  말하자면 이 책에 실린 프랭클린 자서전으로 부터 루이스 어드리치의 '사랑의 묘약'에 이르는 25권의 책들은 가장 미국적인 것, 그야말로 미국적 삶의 핵심들을 잘 보여주는 책인 것이다. 하지만 포스터는 이러한 미국의 진면목을 포획하기 위하여 25권의 책들을 하나의 단일한 논의로 이끌어가지 않고 각 작품 마다 개별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취한다. 비유하자면 일종의 모자이크적으로 접근하는 셈인데 그래서 이 책은 미국적인 삶의 핵심을 찾기 위한 하나의 여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25권 책들에 대한 개별적인 해설서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이 가장 이 책이 가진 독보적인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책이 독자들에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게 해 주기 때문이다. 즉 원래 목적인 미국 정신의 모습을 독자 스스로 그릴 수 있게 만들뿐 만 아니라 각 작품에 대해서도 훨씬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 작품에 대한 해설서로도 이 책은 완벽하다. 그래서 행여나 미국 정신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이 그저 '작은 아씨들'이나 '휘트먼의 시' 또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나 '모비딕' 처럼  그저 개별적인 작품들에 관심이 있어서 이 책을 잡게 된 독자라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사실 나 역시 여기에 놀랐다. 이 책을 잡을 때만 해도 작품에 드러난 미국 정신에 연계된 설명만 있을 뿐 개별 작품들 자체에 대한 충실한 분석은 별로 없을 뿐 알았는데 오히려 개별 작품들에 더욱 중심을 두고 분석하면서 그 중 하나로 거기에 드러난 미국 정신을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자이크적 접근이라고 일부러 말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모자이크화를 제대로 보려면 독자 스스로 거리를 조정하는 적극적 노력이 필요한데 이 책 역시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온전히 보려면 그만큼 더 노력을 요한다. 이 책엔 작품마다 드러난 미국 정신이 글마다 파편처럼 주어져 있다. 글 자체에 '여기가 바로 그 부분입니다'하는 경계마저 없으므로 그 부분을 추출하려면 독자에게 더욱 적극적인 매의 눈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게 이 책의 약점이 되지는 않는다. 이 책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작품 하나를 유기적인 전체로써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포스터는 우리가 하나의 작품을 온전히 소화하길 원한다. 그를 위해 그는 더없이 충실히 설명한다. 덕분에 우리는 하나의 작품에 대한 온전한 초상화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초상화를 통해 '아, 이 작품엔 미국 정신의 이런 모습이 나타났구나' 혹은 '미국 정신을 이렇게 만들어갔구나'하고 스스로 음미하게 되는 것이다. 책이 미국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간접적인 통로였듯이 그 역시 자신의 글이 독자들에게 직접적 설명이 되기 보다는 작품 전체의 온전한 이해를 통해 스스로 그 미국의 정신을 음미하는 간접적인 매개물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윌든'이 그냥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서부개척시대 갓 이민온 자들에 눈에는 그지없이 공포로 보였을 광할한 미국의 대지를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편안함과 애착의 대상으로 보게 하려는 의도였으며 루이자 메이 올곳의 '작은 아씨들'에서 굳이 작가가 '작은'을 고집하는 것도 결혼을 통해 어른 여성이 되어 남성 중심의 기성 사회에 편입되기('LITTLE'은 바로 그 어른 여성의 거부다.) 보다는 독립적으로 여성 중심의 가치를 끝끝내 고수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는 것과 더쉴 해미트의 '말타의 매'로 만개하게 된 '하드보일드'가 과도한 자본에 대한 욕망으로 더이상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미국 사회에 있어 네메시스적 존재였음을 또한 알게 된다. 이런 식으로 작품의 개별적 이해와 원래 이 책이 목적하는 미국 정신의 총체적 이해 역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분명한 경계와 명확한 설명이 따로 있진 않지만 그게 약점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포스터의 '미국을 만든 책 25'는 좋은 책이다. 무엇보다 '위대한 개츠비'나 '분노의 포도' 혹은 '닥터 수스 시리즈'나 케루악의 '길 위에서'와 같이 익히 들어왔고 한번쯤 읽어본 적이 있는 작품들에 대해 깊이 있는 해설을 원하셨던 분들에게는 더없이 좋을 책이다. 아마도 개인적으로는 미국에 대해서 아는 것 보다는 이 작품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지평이 열리는 게 더 많지 않을까 싶다. 솔직히 이 책에 대해서는 이렇게 긴 리뷰 따윈 별 쓸모도 없을 것 같다. 읽어보기만 해도 그 가치를 바로 알아버릴테니까. 그러니 속는 셈치고 한 번 읽어보면 어떨까? 아마도 오래도록 당신의 책상을 차지할 유력한 후보가 될지도 모른다.

 

 

 

 

 

 



 
 
희선 2013-02-17 02:49   댓글달기 | URL
미국을 만든 책 25 라는 제목은 어쩐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데,
제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군요
헤르메스 님이 책 속에서 작가가 말하려 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처럼, 이 책을 쓴 사람도 다른 책에서 미국 정신을 찾아냈군요
미국 정신에는 별로 관심 없지만, 다른 책에 대한 것은 재미있을 것 같군요


희선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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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고전의 시대다. 여기저기서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제는 인간 처세의 방법까지 고전을 통해 배우고 있다. 고전의 중요성은 시대를 막론하고 부침이 없었으나 그 요청에 있어서는 시대의 격량을 따라 이리저리 부침해 왔던 게 사실이다. 단순히 말해, 살만할 때 고전은 나른한 귀족을 위한 관현악과도 같다. 너무도 지루해 단지 쉽게 잠들기 위해 필요할 뿐인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저기 가지에 널린 과실을 따느라 바쁜 인부에게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귀찮은 소음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만 이루어져 있으니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그는 호메로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쇼! 정 내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그만 닥치고 기다란 막대기나 가져오란 말이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고전을 찾는다는 것, 그것도 열화와 같이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는 반영인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은 고전이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지도처럼 왜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미로에 빠진 것처럼 의문투성이가 되어버린 삶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오래 살아 남았는 걸 보면 뭔가 있지 않겠어?' 그런 생각으로 문제집 푸는 아이가 모범 답안을 찾듯 고전을 뒤적인다. 사실 고전 열풍은 그런 믿음들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고전을 읽으라고 부추기는 책들을 통해 고전의 중요성을 새로이 체득하는 게 아니라 익히 자기가 생각하고 있었던 고전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금연을 결심한 사람이 금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비디오를 보면서 다시금 결의를 다지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즉 금연을 결심하긴 했는데 잘 실천은 하지 않는 스스로를 채찍질 하기 위하여 비디오를 보듯이 고전에 대한 책들 역시도 같은 이유로 찾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책들이 더 쉽게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몰랐던 고전의 의미를 되새겨준다는 걸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측면에서 고전 안내서를 찾는 것은 분명 고전을 읽겠다는 다짐을 보다 의지를 가지고 실천할 수 있도록 촉매제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고전의 인플레이션은 시대의 디플레이션과 분명 관계가 있다.

 

  어쨌거나 상황은 이렇다. 고전 때문에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고전을 탓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남겨진 여지는 그래서 단 하나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다. 고전은 어쨌든 먼 과거의 산물이다.  어떤 것은 수천년도 된다. 거대한 역사의 유물도 그 정도 세월이면 풍화되어 사라지는데 하물며 한 권의 책에 담긴 뜻이 그 모습 그대로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우리가 서 있는 수천년 세월의 끝자락에서 원 뜻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건 그간에 있었던 인류 역사의 변화를 그대로 통째로 무시해버리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런 말이 있는 것이다. 고전은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게 새 포도주만은 아닌 것이다. 고전의 해석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 이 시간에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그들의 말이 살아있지 못하면 고전은 그 평가가 아무리 높고 화려해도 그저 묘비명에 새겨진 좋은 비문일 뿐이며 그 아래 안장된 죽은 말들의 주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우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고전이 그 생명을 지속시켜나갈 수 있는 것도 동시대에 알맞게 그 의미들이 새로이 채워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았다면 옆구리가 터져버려 나날이 속에 있는 밀짚을 쏟아내고 있는 허수아비처럼 진작에 먼 기억 속의 존재가 되어 산산이 흩어져 버렸을 것이다. 고전이 되지 못한 먼 옛날의 무수한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다시말해 고전이 고전으로 살아남는 이유는 작품 자체가 원래부터 그럴 정도로 탁월해서라기 보다는 각 시대가 새롭게 해석해서 그 의미를 채울 수 있는 그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고전을 만드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현대다.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얼마나 적절히 잘 부합할 수 있느냐가 고전의 수명을 장단을 결정하는 척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살아남은 고전은 시대에 따라 가지각색으로 자신의 색깔을 바꿔 왔다고 볼 수 있으므로 그야말로 카멜레온이 아닐까 싶다. 얼마나 새로운 해석으로 열 수 있는 수로가 많았기에 시대마다 지역마다 적재적소로 스스로를 변형하면서 그 오랜 세월을 견뎌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정작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어쩐지 숙연하게 된다. 이번에 나온 천명희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소크라테스 변론/크리톤/파이돈/향연'이 바로 거기에 대한 대표적인 존재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렇게 말을 하려면 먼저 한 가지를 증명해야 한다. 즉 과연 이 작품들이 지금 시대가 요청하는 의문에 대해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일단 여기에 실린 내용부터 간단하게나마 소개하고 나아가고 싶다. 앞서 말한대로 여기엔 네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이렇게 앞의 세 작품은 소크라테스의가 혹세무민으로 아테나이의 법정에 선 이후부터 독배를 마시고 죽기까지 시간 순으로 이어지는 작품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에 관한 일화들은 여기에 다 나온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이끌어내는 방법인 '대화법'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으며 '크리톤'에서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함께 가장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말인 '악법도 법이다'를 과연 어떤 연유로 말한 것인지 그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또한 '파이돈'에서는 기독교에 강한 영향을 끼친 '혼 불멸론'과 배움이란 전생에 알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라는 '상기론' 그리고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이 시작되는 고상한 모험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럼 남아있는 나머지 하나인 '향연'에서는 무엇을 들을 수 있을까? 여기에는 소크라테스의 '사랑관'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쓰곤하는 에로스니 플라토닉이니 하는 말은 다 여기서 나왔다. 사랑이 오직 그 육체를 탐하는 에로스일 뿐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자신 역시도 그리 생각했지만 예언녀 디오티마를 만나고 나서 바뀌었다며 순수한 정신적 사랑인 플라토닉이야말로 궁극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일단 이런 고전을 말했을 경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에 대해 대답하자면 절대 어렵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주로 하는 방법인 개인간의 대화를 통한 '산파술'답게 오로지 대화로만 이루어진('소크라테스의 변론'만은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변호하는 말이므로 독백으로 채워져있지만) 이 책은 원전 번역이지만 천병희 선생님이 너무도 대화체를 잘 살려 번역하셔서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듯 생생한 느낌마저 가질 수 있어서 더욱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언젠가 한 번 이름만 들었던 소크라테스의 진면목을 확인해 보리라 마음먹었던 분들에게는 이 책이야 말로 장본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 책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애초에 내가 던졌던 전제. 그러니까 이 책이 지금 시점에 있어 어떤 동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로 돌아가보자. 즉 지금 시대에 가장 디플레이션 되는 것과 관련하여 그 문제에 대해 과연 이 책이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를 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대에 있어 가장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지난 5년간 우리를 가장 스트레스 받게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그건 정치다. '80년대로 회귀하고 있다'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었듯이 민주주의의 후퇴. 그것이 가장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고 기필코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게 된 계기였다. 공기도 없어져봐야 그 소중함을 알듯이 정의나 민주주의도 잃어봐야 그 가치를 안다. 우리가 마이클 센델의 책을 통해 새삼 '정의'라는 가치를 생각했던 건, 불공정이 판을 치고 있을 때였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보이는 현상이 질문을 낳는 법이다. 그렇게 민간인 사찰이 이루어지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말할 수 없이 억압된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럴 때 우리는 고전을 찾는다. 동화를 보면 지혜로운 대답을 들려주는 존재는 언제나 아주 오래된 나무나 동물들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은 왠지 현명해 보인다. 아마도 보편적으로는 인간의 수명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한 존재라 보고 그런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현명함이 얼마나 많은 것을 볼 수 있는가 하는 시야의 넓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인류의 아주 오래된 생각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바로 거기에 제대로 된 해답을 줄 수 있을 때 고전은 죽은 유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육체가 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거기에 좋은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

 

 물론이다. 내가 이 책을 보고 다시금 놀랐던 것은 내용이 아니었다. 그건 소크라테스의 태도였다. '대화법'이라는 말을 많이 듣긴 했으나 그 진면목은 바로 이 책을 통해서야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화를 이끌어가는 이 소크라테스의 태도에 오늘의 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와 관련하여 여기서 드러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보여주는 특징을 말해보자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무지한 청년과 대화를 해도 절대 자신의 기준에 맞추는 법이 없다. 모르면 모르는만큼 그 수준에 맞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 나아감의 보폭을 결정하는 것 역시도 언제나 소크라테스에게 있지 않다. 그는 철저하게 듣는 상대가 나아갈 수 있을만큼 대화를 진행시킨다. 그 청년은 지혜나 언변에 있어 분명 소크라테스의 약자다. 이를테면 진중권 앞에 선 초등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얕잡아 보지 않는다. 그러기보다는 자신을 스스로 초등학생으로 맞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러면서도 그는 설득하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진리도 주장하지 않는다. 질문하고 상대방이 먼저 대답함을 통해 언제나 납득 시킨다.  설득과 납득. 비록 한 글자 차이지만 이것이 민주주의적 태도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설득은 진리는 오직 말하는 자에 있고 듣는자는 오직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만든다. 그는 듣는 귀만 있지 말할 입은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게 '설득'이다. 하지만 '납득'은 그렇지 않다. 어디까지나 상대방에 맞춰 그의 헤아림을 기초로 모두의 진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듣는 귀뿐만 아니라 말할 입까지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납득인 것이다. 지난 5년을 생각해보자. 미국 쇠고기, 4대강, 인천공항 민영화 그리고 지금의 철도 민영화까지 정부가 내내 해온 것은 설득이었다. 아무리 여론이 반대해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설득은 포기가 없다. 진리가 오직 자신들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까지 상대방이 설득되지 않으면 쉽게 단절이 일어난다. 그렇게 듣는 타자는 버려지고 '강행'만이 남는 것이다. '답답하다'는 것은 설득의 절기요 '오해'는 설득의 절세 신공이다. 우리 역시도 정부로 부터 이해하지 못해서 답답하다 혹은 오해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그들은 말하려는 입은 있어도 들으려는 귀가 없다. 그들이 대화하는 것은 다른 견해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생각을, 그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위장된 통로로 대화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듣는 타자를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거수기로 만드는 것.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설득의 근본 모습은 이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무엇이라 이야기 했던가? 제대로 된 증거자료를 가지고 납득시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소크라테스가 보여주는 대화의 태도에서 무엇보다 '납득'이 민주주의의 기본 태도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다.

 

 또 하나가 있다. 그건 '합의의 중시' 이다. 먼저 합의된 사항을 존중하고 언제나 그것을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간다는 게 또 하나의 소크라테스 대화의 원칙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이 바로 '우리가 합의한 대로'라는 말이다. 그렇게 소크라테스는 상호가 인정한 사항을 중심으로 그 안에서 상호 납득 가능한 진리를 찾아간다. 솔직히 놀라웠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오류를 저질렀을 때조차 요즘 '100분 토론'에서 흔히 보듯이 '에이~ 그게 아니죠.'하는 식으로 통박하지 않았다. 그러기 보다는 언제나 '당신과 내가 합의한 것에 따르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하는 식으로  상대방에게 먼저 자신이 시인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스스로 그 오류를 발견하도록 도왔다. 사실 '납득' 역시도 바로 그와 같은 과정으로 일어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철저한 '우리가 합의한 바에 따르자면'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옳다고 여긴 것을 떠올리게 하였으며 스스로 '생각해 보니 그걸 시인했다면 지금 이 말도 시인할 수 밖에 없겠군' 하는 생각으로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납득했던 것이다. 이러한 '합의의 중시'가 기본적인 민주적 태도라는 걸 굳이 '설득과 납득'처럼 지난 5년의 경험을 들어 달리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저 지금 우리 현실에서 '합의'나 '약속'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공허해졌는가만 떠올려도(대통령조차 선거 공약은 홍보의 일환일 뿐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거기에 대한 설명은 다 되지 않을까 싶다.

 

  이상으로 내가 내세웠던 고전의 전제, 즉 지금 현실의 시대적 요청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어야 진정한 고전이라 할 수 있다에 대해 나름 응답을 해 보았는데 제대로 대답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도 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비롯한 네 작품이 고전의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은 설명되지 않았나 싶다. 어떤 이가 내게 말하길 고전은 운명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 한다. 그냥 세상에 툭 내던져지는 고전은 없다는 것이다. 운명의 시계가 딱 맞아 떨어져서 시대가 자신을 요구할 때 나와야 고전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야말로 운명의 시계가 딱 맞아 떨어졌을 때 나오지 않았는가 싶다. 점점 후퇴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로 진정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생각해보게 되는 이 때, 이 책은 그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태도의 모습을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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