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 - 유럽 근대의 뿌리가 된 공자와 동양사상
황태연.김종록 지음 / 김영사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명에도 천칭 같은 것이 있어,

 양쪽에 각각 동양과 서양을 올려놓았다고 한다면 근대 이후론 확실히 서양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동양은 서양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 역방향의 영향이란 전무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나라엔 개화가 있었고, 일본엔 메이지유신이 있었으며 중국엔 양무운동이 있었다. 그 모두가 자신보다 더 강하고 발전한 서양을 본받고자 한 움직임이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서양과 조금도 다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책이 한 권 나왔다.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황태연과 전주대 문화산업대 객원교수인 김종록이 공저한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가 그것이다. 제목에서 바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맹점으로 남아있었던 근대 시기의 동양에서 서양으로 뻗어나간 영향의 역사를 복원하고 있다. 나는 사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는데 공자로 대표되는 중국 사상이 서양에 끼친 영향이 생각 이상으로 컸던 모양이다. 솔직히 난 동양에서 서양에 끼친 영향이란 고흐와 고갱을 비롯한 인상주의학파가 많은 영향을 받았던 일본의 우키요예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이런 것을 알려주는 책에 더욱 흥미가 갈 수밖에 없었다. 공자의 사상이 유럽에 전해지게 된 것은 중국에 온 선교사 덕분이라고 한다. 당시 선교의 주류적 경향은 '적응주의 선교'라고 해서 쉽게 말하면 선교 대상인 지역의 문화를 먼저 긍정하고 거기에 눈높이를 맞춰 선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선교사들은 대상이 되는 지역의 문화를 연구하고 공유를 위해 보고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일환으로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공자가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서양은 한창 기독교의 헤게모니가 서서히 침윤되고 있었던 시점으로,

 공자를 새로운 가능성의 사상으로 환영한 것도 당대의 기독교 중심주의를 공박하던 지식인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기독교는 지성 또한 신의 은총이라 여겼는데 공자는 무신론자이면서도 높은 지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좋은 반박거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공자가 살던 중국은 유럽과 달리 하나의 종교가 지배하지 않는, 종교 자유주의의 나라였다. 그러니  르네상스의 이성에 근거한 인문주의적 태도와 종교개혁으로 대표되는 기존 기독교에 대한 개혁주의적 태도를 공유하고 있었던 유럽 지식인들에겐 무신론의 바탕 위에서 합리주의적 태도로 사상을 만들어간 공자라는 존재가 아무래도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양의 공자에 대한 열렬한 수용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책은 이런 역사적 추이를,

 프랑스의 로코코 양식은 중국의 선비 문화를 복사한 것이며 경제학 원론에서 한 번은 꼭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제학자이기도 한 케네의 중농주의도 실은 서양보다 생산력이 훨씬 높았던 중국의 농업 경제를 모델로 했다라는 식으로 하나 하나 상세히 짚어나가며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대부분 역사 속에 실재했던 누군가의 주장이나 현실에서 이뤄졌던 논쟁을 가져와 이뤄지므로 근거가 확실한만큼 꽤나 설득적이다. 솔직히 이토록 많이 인용 하려면 정말 문헌을 많이 뒤졌어야 했을 것 같아서  새삼 한 권의 책에 투여한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장점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일반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아무래도 과도하게 한 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으려 하다 보면 그것이 급경사일수록 억센 힘을 필요로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만한 힘을 내려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무리할 수도 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확실히 서양에서 동양으로의 일방적 영향 관계는 우리에게 오랜 세월 굳어진 생각이며 그런 의미에서 고정관념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저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 굳어질 대로 굳어진 고정관념과 싸워야 하는데 상대가 워낙 억세다 보니 주장의 날을 더욱 벼려야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그만 조금은 아전인수적 해석과 상대에 대한 비하가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걸 무엇보다도 중국에 대한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의 논쟁에서 느꼈는데

 물론 저자들 보다 쥐뿔도 아는 것이 없는 처지에 이런 말 하는 것이 좀 저어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변호삼아 말한다면 다소 주관적인 해석의 남용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몽테스키외의 방법이란 '사물의 본성'에 치중해 그 대상을 평가하는 것이다. 즉, 관찰자의 입장이 아닌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먼저 주안점을 두고 장단점을 따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여러 나라의 풍속을 연구했는데 거기엔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본다. 분명 몽테스키외는 중국을 많이 비판했다. 그런데 그것이 저자들 말대로 온전히 시기심 때문이었는 지는 모르겠다. 물론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몽테스키외의 비판도 나름 객관적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절대적으로 객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몽테스키외는 당시 유럽 전제 정치의 문제점을 견제와 균형의 삼권 분립이라는 것으로 바로잡으려 했으므로 중국의 전제정치 또한 곱게 보일 리는 없었을 것이다. 몽테스키외의 중국 비판은 어쩌면 그러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른 결과일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다 보니 나오게 된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나는 몽테스키외에게 반발하고 중국에 찬사를 보냈다는 볼테르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볼테르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볼테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종교의 자유였다. 패권적 종교가 없는 상태. 그것이 볼테르가 꿈꾸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볼테르는 중국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리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둘 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달랐다. 몽테스키외에겐 중국의 전제 정치가 시야에 먼저 들어온 반면, 볼테르에겐 종교의 자유가 먼저 들어온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건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결부되었고 하여 둘은 중국에 대한 평가를 두고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견지하는 입장이 있으며 외재하는 것들을 그 입장에 따라 평가하기 마련이다. 뇌과학자들도 입을 모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두뇌는 교묘한 이야기꾼이라 외부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조작한다고.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둘 다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본다. 물론 이 책의 저자들도 마찬가지다. 나라고 다를 것 없다.


 정리해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이 좀 더 균형잡힌 시각이었으면 좋아겠다는 것이다. 보다 중립적인 서술로서 거기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도록 했으면 어떨까 싶다. 시각이 한 쪽으로 치우치다 보니 저자들이 날 '계몽'하려 하는구나 싶어 조금은 불편했다. 진심을 전하고픈 방법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쪽에 치우친 설득은 듣는 이에게 강권으로 다가오기 쉽고 그러다 보면 아무리 좋은 진심도 '됐거든요' 하면서 사양할 수 있다. 외판원과 고객과의 관계가 여기서도 통용되는 것이다. 두 개의 물건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팔려는 물건의 장점만을 말하기 보다 둘 다를 온전하게 보여주고 가장 객관적인 상황에서 독자로 하여금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사람은 내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상황에서 이 모든 걸 보며 듣고 있구나 할 때 가장 설득되기 쉬우니까 말이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이 책을 통해 지향하는 패치워크 문명에 맞는 태도이기도 할 것이다. 297페이지에 나오는 바에 따르면 패치워크 문명의 특징은 어디까지나 자기비판적 개방성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되려면 무엇보다 내가 오류일 가능성을 긍정해야 한다. 자기 비판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런 가능성의 긍정에서 객관성은 도래하고 개방도 '타자 중심의 포용'이라는 보다 온전한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니 좀 서술이 아쉬운 것이다. 물론 내용은 전체적으로 내가 그동안 가졌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라 좋았다. 금상첨화랄까? 서술까지 내가 원했던 분위기를 느끼게 만들었으면 정말 만족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아쉬움을 토로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에서 마음이 찔렸다. 리베카 솔닛이 결정적으로 이 책을 쓰도록 만들었던 에피소드를 언급했을 때는 화끈거렸다. 제목의 남자는 언젠가의 나였고, 에피소드의 남자도 언젠가의 나였다. 나는 공범이었다. 나 역시 자주 상담을 자처하며 다 아는 척을 했으며 때로는 내가 옳다고 강요까지 했던 것이다. 딴에는 상대방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했었지만 과연 동기가 그것만이 전부였나고 물으면 섣불리 자신하지 못한다. 솔직히 우월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쉽게 옹졸로 치닫는 남자의 자존심과 아무 곳에나 손을 뻗치는 무분별한 정복욕이 '맨스플레인'의 엔진을 더욱 가열시켰을 것이다. 분명.



 이런 반성과 더불어 책을 읽었다. 저자인 리베카 솔닛과의 만남은 두 번째다. 이전에 '이 폐허를 응시하라'란 책으로 첫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그 책은 내게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었다. 재난 현장을 세밀하게 스케치했던 그 책은 특히나 재난이 터졌을 때와 그 이후 사람들이 진실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게 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인간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꿔 버렸다.


 우리는 흔히 재난이 일어나면 카오스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저마다 자신의 안전을 획득하고 싶은 욕구로 질서는 무너지고 아비규환이 펼쳐지리라 쉽게 여긴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그것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진실은 아니었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리베카 솔닛은 전혀 다른 진실을 보여주었다. 재난이 터졌을 때나 그 이후에도 사람들은 무질서 하지 않았다. 아비규환을 초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질서를 지켰으며 평상시 보다 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 아이들이 침착하게 질서를 지키며 구조되기를 기다렸다고 보도로 들었을 때, 나는 리베카 솔닛의 책을 읽었기에 사실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동영상을 보았을 때 결국은 리베카 솔닛의 말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그렇게 위기의 순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는 괴물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괴물로만 생각할까? 그만큼 타인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까? 거기에 바로 권력의 힘이 작용했다. 권력은 언제나 다수를 두려워한다. 서로 믿고 결집한 다수의 힘을.


 세월호 참사가 그러하듯 재난은 권력의 위기를 가져온다. 권력이 가장 약화된 그 시점에 다수가 하나된 힘으로 뭉치면 언제든 무너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권력은 더욱 사람들 서로를 불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한 상징 조작으로 위험에 처하면 자기만 살자고 내뺄 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는 그렇게 당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커다란 위험이 닥치면 당신은 더 먼 곳을 보고 어떤 행동이 나와 모두를 구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당신의 진실이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저 약하고 이기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권력이 주문한 결과일 뿐. 당신은 스스로를 오해하고 있다. 재난이 오히려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조금은 어이없게 생각될 정도로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 대해 길게 썼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난 두 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우리가 스스로의 진실된 모습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권력이 주입한 것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불안을 낳는 재난이 오히려 우리에게 진실과 더 나은 자신을 위한 기회를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바로 이 두 가지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도 이어지는 것이다.


 이 책은 하나의 동기에서 나왔다. 저자가 언젠가 참여한 파티에서 주최한 남자가 저자가 쓴 책인지도 모르고 그 책에 관하여 저자에게 주절주절 떠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거기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하고 듣기만 했다. 남자가 알량한 자신의 권위를 자꾸만 드높여갈 때, 그녀는 침묵했다. 왜 그랬던 것일까? 그 이유를 생각하다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남자처럼 남자들이 자꾸만 가르치려 드는 이유가 여성 스스로 자신을 왜소하다고 여기게 만들어 남성들의 지배를 강고히 만들려는 것임을.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나 종종 괴로움을 겪는다.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 (p. 15)


 바로 여기에 '이 폐허를 응시하라'의 첫 번째 주제가 들어가 있다. 권력이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오해하게 만들었듯이 여성들 스스로 자신의 능력과 가치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하고 있는데 그건 진실이 아니라 남성 권력이 조장한 결과인 것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이러한 남성 권력이 덧씌운 편견의 껍질을 깨어 여성들에게 더이상 주눅들 필요도, 참을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책이다.



 애석한 일이지만 요즘은 페미니즘의 주가가 많이 떨어졌다. 이제는 옛날과 다르게 오히려 여성상위시대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동안의 투사적 모습에 질렸음인지 공공연히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사람들도 많이 보게 된다. 언젠가 한 개그 프로그램엔 오히려 남성의 권익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코너도 있었다만 과연 정말로 많이 달라진 것일까?


 리베카 솔닛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남성들의 폭력과 성희롱에 노출된 불안한 여성의 위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바뀐 것이 없다. 미국만 해도 6.2분마다 한번씩 경찰에 신고되는 강간이 벌어지고 여성 다섯명중 한명은 살면서 강간을 당한다. 매년 8,7000건이 넘는 강간이 벌어진다. 거기다 구타는 9초마다 당한다.(리베카 솔닛이 강조한 대로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에 의한 부상은 미국 여성의 부상 원인 중 첫번째다. 미국 임산부의 사망 원인 중 수위에 꼽히는 것 역시 배우자 폭행이라고 한다. 9.11 이후부터 2012년까지 가정 폭력으로 사망한 여성의 수는 11,766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를 두고 과연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리베카 솔닛은 말한다.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 있다.(p. 37)


 마치 이 말을 입증하듯 우리가 '재스민 혁명' 또는 '아랍의 봄'이라 불렀던 민주화의 열기가 드높았던 그 때조차 남성 시위자들은 여성 시위자들에 대해 100건이 넘는 집단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을 벌였다. 그러고 보니 나도 처음 폭력이란 걸 휘둘렀을 때가 생각난다. 대학 다닐 때였는데 무슨 모임 세미나 뒤풀이였는데 맞은 편에 앉은 남자 선배 하나가 술에 취한 것을 빙자에 후배 여학우를 자꾸만 노골적으로 더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학우는 싫은데도 선배라 뭐라 대거리를 못하고 있었는데 보다 못한 내가 그만두라고 소리치면서 막걸리 잔을 머리에 던져버렸다. 물론 술자리가 아수라장이 된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나는 선배들에게 불려가서 정말 엄청 혼났는데 그 때도 오직 내 하극상이 오르내렸을뿐, 성추행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남자들의 세계가 이렇다. 설령 민주주의를 떠들어도 말이다. 이런 사실은 최영미 작가가 자신의 운동권 시절을 회상한 자전적 소설인 '청동정원'만 읽어봐도 다 나온다. 말하자면, 우리에겐 역사가 거듭되어도 언제나 변하지 않고 있는 전장이 하나 있다는 거다. 바로 여자와 남자의 전쟁이다. 그런 이유로 리베카 솔닛은 2장의 제목을 '가장 긴 전쟁'으로 붙였다. 그런데도 페미니즘이 유통기한이 다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바로 얼마전에도 우리나라 여군을 아가씨라 비하한 국회의원이 있었고 상관이 성적인 수작을 걸면 가만히 있으라는 공식적인 여군 매뉴얼이 존재하며 부하 직원인 것을 악용하여 잠자리까지 끌여들었는 데도 성추행이 아니라고 법원이 판단하는 지경인데.


 리베카 솔닛의 말대로 여성의 진정한 해방이란 밤길을 안심하고 다닐 수 있을 때일 것이다. 그 때까지는 여성은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리베카 솔닛은 여성들에게 주눅들지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말해야 할 이 때에, 더 많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맨스플레인'에도 투영되어 있듯이 남성 권력의 속성은 분리하는데 있다. 여성과 남성을 나누고 부국과 빈국을 나누며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나눈다. 바로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여 질서를 편성하기 위해서다. 남성 권력이 원하는 세계란 서열이 확고한 코스모스다. 그들은 태양이고 나머지는 그저 자신을 맴도는 별이 되길 원한다. 홀로 빛나기 위해서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아래의 존재들에게 끊임없이 열등하다고 세뇌시킨다. 그들은 그것을 정상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위반하는 존재들은 비정상이라는 굴레를 씌우다가 급기야는 19세기의 여성 작가들을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 불렀듯이 광기로 몰아간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스스로 표현하는 여성이야말로 남성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라는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를 위한다면 그들이 가장 무서워할 존재가 되어야 한다. 리베카 솔닛이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거미줄처럼 짓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여자들은 한번에 조금씩 삭제되고, 어떤 여자들은 단번에 몽땅 삭제된다. 어떤 여자들은 도로 나타난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모든 여자들은 지금도 그들을 사라지게 하려는 세력들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 여자의 이야기를 자기가 대신 말하려는 세력들과, 여자를 이야기와 족보와 인권헌장과 법률에 기록하지 않으려는 세력들과, 자신의 이야기를 단어로든 이미지로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로 이미 승리다. 그 자체로 이미 반란이다.(p. 112)


 하지만 이 이야기에선 배제가 있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페미니즘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 생각해야 한다. '여성주의'란 의미에 대하여. 그것은 정말 어떤 의미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그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사유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동일성과 타자라는 이분법에 침윤된 남성 권력의 방식이 아닌, 그렇게 선별과 배제가 아닌 방식을. 여성 해방을 일종의 권력 투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에 반하는 길일 것이다. 권력 투쟁은 지극히 남성 권력의 방식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길 없는 곳에서 길 만들기이며, 광막한 미로를 더듬어 경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여기엔 고정된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건 유동적이며 그래서 더욱 개별적이다. 하지만 그 어느 개별적인 것도 놓치지 않는 포용의 과정이다. 그것은 배제된 영향력을 아우르는 작업인데 그것을 두고 리베카 솔닛은 '할머니'라 부른다.


 누구나 그처럼 정규 교육에 앞선 사건들, 일상에 불현듯 등장한 사건들에서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 배제된 영향력들을 나는 할머니들이라고 부른다.(P. 105)

 


 이 말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 더 자세히 표현된다.

 

 사실 그 옛날에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자가 거의 없었다. 여자가 어떤 이미지를 공개적으로 만들고, 세상을 보는 방식을 드러내고, 그럼으로서 생계를 꾸리고, 그로부터 오백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을 제작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페르난데스의 그림에서 주름과 그림자로 많은 것을 표현하고 있는 흰 천은 침대보다. 침대보는 집을, 침대를, 침대에서 벌어지는 일과 사후에 씻겨나가는 일을, 집 청소를, 여성의 노동을 말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그림이 말하지만 그림에서 안 보이는 것들이다. 그림에 표현된 여자는 가려져 있지만, 그림으로 표현한 여자는 그렇지 않다.(p. 116)


 이런 식으로 드러내는 것. 그래서 리베카 솔닛을 특별히 거미줄이라 부른다. 아시다시피 거미줄엔 정형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정형한데다 언제나 과정 중에 있다. 그물을 짜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남성 권력이 하듯이 지향하는 목표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매일 조금씩 더 많이 새롭게 창조해 나갈 뿐이다. 그것이 바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다.


 그물을 짜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 세상을 창조하는 것. 자신의 운명을 다스리는 것, 아버지들만이 아니라 할머니들을 호명하는 것, 직선만이 아니라 그물을 그리는 것, 청소부만이 아니라 제작자가 되는 것, 침묵당하지 않고 노래하는 것, 베일을 걷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내가 빨랫줄에 너는 현수막들이다.(p. 118)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리베카 솔닛은 구체적 사례를 하나 가져온다. 바로 가장 목소리를 내었다고 볼 수 있는 버지니아 울프다. 그는 울프의 다음과 같은 말을 하나의 지표로 삼으려 한다.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p. 121)


 이 말에 따라 리베카 솔닛은 미래의 어둠을 어둠으로 두려고 한다. 섣불리 현재의 욕망을 미래에다 투사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아무 것도 규정할 수 없기에 희망이라 여긴다.


 무언가를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물들이 합쳐지고 변화하고 매료되고 흥분하고 충만해지고 사로잡히고 풀려나고 재생되는 시간이다.(p. 123)


 여기서 리베카 솔닛은 사고의 전환을 꾀한다. 앞서 '이 페허를 응시하라'에서 두 번째 지적했던 것과 같다. 재난이 오히려 자신과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보게 했듯이, 열려있는 어둠, 불확실하기에 불안할 뿐인 상황 자체가 오히려 여성에겐 희망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르기 (p. 125)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낯선 골목에서 방황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럴 때 그녀는 사회가 규정한 온갖 정체성에서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아니 할 수 없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는 모든 것이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자기 내부의 다수성과 환원불가능성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으며 그렇게 모든 것이 미스터리로 남길 원했다. 리베카 솔닛은 여기에 '할머니와 거미줄'을 지향하는 이야기하기의 구체적 방법이 있음을 본다. 다수성의 긍정은 배제된 영향력까지 아우르는 모든 할머니의 보존이면서 환원불가능성은 중심과 목적을 두지 않는 거미줄 짓기와 통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미스터리다. 미스터리는 결정적인 진실은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미스터리란 문득 들어선 샛길과 같아서 원래 가고자 했던 곳과 전혀 다른 곳에 날 데려다 놓을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런 식으로 자신과 독자마저 스스로에게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모든 것이 미스터리가 되면 무엇이 남는가? 하나다. 진실은 이제 믿음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현대의 여성들의 카산드라의 운명을 따르고 있다. 진실된 예언을 말해도 신뢰를 못 받았던 카산드라처럼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우리나라 법원도 그러하듯 남성 권력은 믿어주지 않는 것이다.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면 다짜고짜 네가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느냐는 말부터 떨어진다.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 의심하는 반응을 보인다.(p. 154)


 이런 일은 우리 주위에 비일비재하다. 뭔가 바른 소리를 하는 여성에게 남자들은 곧잘 '히스테리'라는 딱지를 붙인다. 남자들은 언제나 자신이 하는 말과 스스로의 인격을 구별해 주길 바라면서 여자들의 말은 언제나 인격과 결부지어 생각한다. 말은 들어오지 않고 감춘 저의만 캐내려 애쓴다. 흔히 쓰는 '여성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비하인 것이다. 진실 따위는 상관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여성만이라도 같은 여성의 말을 믿고 더 귀기울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이것은 리베카 솔닛이 여전히 기나긴 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여성에게 보내는 연대의 요청이다. 여성들 중 누군가 목소리를 낼 때 그녀를 믿고 같이 목소리를 내자는 것이다. 2014년 5월에 일어난 남성 아일리비스타의 여성 학살 사건 뒤, 여성들이 트위터에 '여자들은 다 겪는다'란 태그로 그간 자신이 당했던 남성들로부터의 온갖 희롱과 폭력을 다 올렸던 것처럼.


 그 중 제니 추라는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p. 183)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전혀.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추행이나 폭력, 강간이 비일비재하고 여성들의 두려움이 존재하는 한, 양성평등은 아직 요원한 것이다. 그러니 여성을 경청할만한 존재로 만드는 페미니즘은 필요하고 여성들은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금 여성들이 그나마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면 그건 모두 같은 여성이 합심하여 목소리를 내어 쟁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남성 권력에게서 자발적으로 주어진 것이 없다. 여성들이 항의 전화를 하고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하는 등의 적극적인 행위로 빼앗아 온 것이다. 아직도 여성에겐 가져와야 할 것이 많다. 더구나 지금 남성 권력은 더욱 여성을 길들이려 하고 여성에게서 주체성을 앗아가려고 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아주 발버둥치는 느낌이다. 여성 혐오가 곳곳에서 자주 표출되는 것을 보노라면.


 이런 상황에서 리베카 솔닛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자신의 능력과 힘을 믿고 연대하라는 것이다. 가야할 길이 천마일이 넘는 먼 길이라고 해도 '길은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아가며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원하는 세상은 거미줄처럼 걷는 와중에 어느덧 도래할 것이라며. 설령 도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기억은 남을 것이며 그러면 또 누군가 그 기억을 이어갈 것이라며.


 그녀가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오지 않으리란 것은 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걷지 않는다. 수많은 남자, 여자들, 그보다 더 흥미로운 다양한 젠더의 사람들이 함께할 지 모른다. 여기 판도라가 손에 들었던 상자와 지니가 풀려난 호리병이 있다. 지금 그것들은 감옥과 관처럼 보인다. 이 전쟁에서 사람들은 죽을지언정, 생각들은 지워지지 않는다.(p. 227)


 (덧붙여, 인용한 그림은 모두 책에 인용된 그림으로 아나 떼레사 페르난데스의 그림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으므로, 자기 자신이든 자기 어머니든 다른 유명인이든 누군가의 삶에 대해서 혹은 어떤 사건이나 어떤 위기나 다른 문화에 대해서 진실하게 쓴다는 것은 드문드문 존재하는 어두운 부분과 역사의 밤들과 미지의 장소들을 거듭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어둠들은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는 본질적인 미스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실은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보는 개념부터가 한계가 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freyja 2015-05-23 06:00   댓글달기 | URL
꼼꼼하고 유익한 리뷰 감사합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와 함께 찜해둡니다. 즐거운 토요일 보내세요, 헤르메스님

헤르메스 2015-06-01 07:25   URL
프레이야님 말씀 감사합나^ ^ 이 페허를 응시하라도 제겐 정말 좋은 책이었는데 프레이야님 마음에도 드셨으면 좋겠네요. 벌써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어요. 이번 한 주도 잘 보내시길 바랄게요^ ^

아무개 2015-05-23 10:35   댓글달기 | URL
멋진리뷰 감사합니다!

헤르메스 2015-06-01 07:26   URL
감동댓글, 감사합니다! 아무개님^ ^

다락방 2015-05-26 08:44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이 폐허를 응시하라]를 보관함에 넣게 되었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헤르메스 2015-06-01 07:28   URL
웃! 다락방님, 말씀 감사합니다.^ ^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어떻게 읽으실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
 
젊은 장인, 몸으로 부딪쳐! - 열혈 청춘을 위한 진로 이야기
강상균.조상범 지음 / 탐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로 결정에 대해서 의문이 하나 든다. 우리나라의 경우 자발적 선택이 많을까 아니면 타율적 선택이 많을까? '이거다!' 하고 확실히 말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후자가 더 많지 않을까 생각된다. IMF가 결정적이 되어 진로가 더이상 자아실현이 아니라 오로지 생존을 위한 안정된 기반 확보의 수단으로 바뀌면서 더욱 그렇게 된 것 같다. 솔직히 이제 진로는 다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 같다. 그러니 더욱 마치 공장에서 규격화된 틀로 펑펑 찍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저마다 비슷한 진로로 생각할 여지도 없이 뛰어드는 것이겠지. 앉을 수 있는 의자의 수는 정해져 있고 원하는 사람은 많아 병목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만은, 내 아이만은 그래도 다르리라는 전혀 입증되지 못한 가설에 매달린 채.


 하지만 이제 그것도 수명을 다했다. 그들에게 충분한 의자를 공급해 줄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률이 더이상 늘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대기업이고 중소 기업이고 할 것 없이 낮은 채용률만 봐도 알 수 있다. 일시적 경기 불황에 따른 취업 한파면 좋겠지만 예측되는 사정은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 많은 전문가들이 이제 수출 보다는 내수 경제를 살리는데 신경써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것이다. 무상 보육이나 의무 급식과 같은 복지 증진은 모두 그것을 위한 것이다. 아무튼 앞으로 터널의 어둠이 더욱 깊어질 것만 같으니 병목 현상은 한층 심해질 것이다. 모두 같은 진로의 레이스를 달리고 있으니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비싼 학원비와 등록금을 바쳐봤자 원하는 의자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개인에게 달린 일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러는 연줄이나 낙하산과 같은 개인의 역량을 뛰어넘는 일도 발생하여 열심히 달리는 이들을 힘빠지게 만든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자신의 딸을 5급 사무관으로 특채하여 고려시대 이후로 사라졌던 '음서'라는 말을 부활시킨 것도 얼마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인데도 여전히 같은 진로를 고집한다는 것은 거기서 치뤄야 할 엄청난 시간 그리고 막대한 비용을 생각할 때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니 이제 '대마 불사'라는 믿음으로 남들이 다 가는 길을 가기 보다는 뭔가 다른, 자기만의 진로를 모색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덤으로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여 애저녁에 잊혀졌던 '자아실현'까지 이룰 수 있으면 더욱 좋고.



 '젊은 장인 몸으로 부딪쳐'는 그런 생각으로 읽게 된 책이다. 여기에는 '뭐야, 이런 직업도 있었어?'할 정도로 주위에서 잘 볼 수 없는, 그렇게 남의 진로와 닮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다섯 명의 장인들 이야기가 실려 있다. 수제 노트를 만드는 장인, 길거리 포차를 운영하는 안주 요리의 장인, 자전거를 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드는 장인, 경마 기수로 일하는 장인 그리고 한옥 시공만 전문으로 장인이 바로 그것이다. 예전에 다큐멘터리로 보았던 경마 기수를 제외하고는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났다. 모두 실제 인물들로 새삼 자신만의 신념으로 남들과 전혀 다른 길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꿋꿋하게 걸어가는 이들이 많구나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말인데 자신만의 진로를 가려고 생각은 하는데 막상 용기가 안난다면 혹시 이 책을 보면 필요한 용기를 얻을 지도 모르겠다. 책은 평균 이하의 성적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기엔 좀 위태위태한 고3 수험생을 주인공으로 하여 소설처럼 되어 있다. 캐릭터 설정이 재미있고 그 어법까지 톡톡 튀어서 독특한 진로의 소개가 목적인 책이지만 꽤나 재밌게 읽을 수가 있다. 그렇다고 단순히 재미만 추구하지도 않는다. 한 꼭지가 끝나면 반드시 실제 모델이었던 사람과 그가 일하는 가게 혹은 블로그를 소개하거나 실제 인터뷰를 수록하여 필요한 정보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런 진로에 관심이 있었다면 더욱 마춤한 안내서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 책에서 다섯 장인이 입을 모아 한결 같이 말하는 것은 남들과 다른 꿈을 꾼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행복하다는 것도 누누이 강조한다. 물론 나름대로 성공했기에 하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록 실패하더라도 자기가 선택한 길을 가다 그런 것이니 남들과 같은 길을 가다 실패한 것과는 그 마음의 상처가 많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가려고 하는 길이 나만은 다를 것이라는 가설에 기대지 않고 객관적으로 따져보니 시간과 비용 대비 득보다 실이 많다면 다른 길도 하나의 가능성으로써 고려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럴 때 벗하면 좋을 것 같다. 유쾌함과 진지함을 잘 버무려 진로에 대한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벌거벗음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영훈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지금 가장 주목을 많이 받는 철학자 중의 하나다. 아감벤의 저서를 읽어보았다면 '벌거벗음'이야말로 아감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유 대상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아감벤의 주저이자 그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호모 사케르'에서 그가'이 책의 주인공은 바로 '벌거벗은 생명'이다.'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도대체 '벌거벗음'이 무엇이기에 아감벤은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호모 사케르'에서 그는 먼저 고대 그리스의 생명관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명을 두 가지 용어로 구별하여 사용했는데 하나는 '조에'라고 해서 모든 생명체에 공통되는 그저 '살아있다'라는 의미로 썼고 다른 하나는 '비오스'라고 해서 한 개인이나 집단이 가진 고유한 삶의 방식이나 형태를 가리키기 위해 썼다. 그러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서서히 가치 있는 삶만이 진정한 삶으로 존중받는데 아감벤은 바로 이러한 분리와 목적 중시 태도가 근본적으로 문제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삶은 하나의 지속이며 그 자체로서 고유한 가치가 있고 존중받을만한 자격이 있는데 이러한 분리적 사고와 목적 중시 태도는 삶을 파편화시키고 그 파편화된 삶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벌거벗음'이 아감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분리된 삶을 결합하여 '삶-의-형태'로 삶을 바라보게 만들고 '벌거벗음'이라는 상태는 다른 것 하나 없이 오로지 현시된 육체 자체가 모든 의미이므로 삶을 목적 혹은 결과를 통해 바라보게 하지 않고 그 순수한 지속에서 혹은 순수한 경험에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즉 아감벤에게 '벌거벗음'은 사유 자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사유란 '우리가 가진 삶의 형태를 [삶을 그 형태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맥락으로, 즉 '삶-의 -형태'로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에게 사유란 한 개인이 행사하는 정신적 능력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과 인간 지성의 잠재적 성격을 대상으로 하는 경험', 나아가서는 실험이다. 아감벤이 굳이 경험이나 실험이라는 말을 쓴 것은 사유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그 사유를 할 때의 개인이 무엇보다 '사유하기'를 스스로 체험하는 까닭이다.


 '단지 내가 항상 그저 현실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과 역량을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단지 내가 겪고 이해한 것 속에서 매번의 삶과 이해 자체가 있을 수 있다면, 달리 말해 이런 의미에서 사유가 있을 수 있다면, 삶의 형태는 그 자신의 사실성과 사물성에 있어서 '삶-의-형태'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삶-의-형태'에서는 벌거벗은 생명 같은 뭔가를 고립시키는 일이 전적으로 불가능해질 것이다.'


 조금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여기서 아감벤의 사유란 들뢰즈의 탈주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아감벤이 사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것이 푸코식으로 말하면 우리의 주체를 구성하고 여전히 우리의 생각과 취향 그리고 욕망마저 마치 우리가 스스로 가진 것인양 생산하고 있는 권력의 그물망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즉 아감벤의 사유는 우리를 '지금-여기'의 절대적 외부로 데려간다. 거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권력에 의해 단절되어 있었던 삶을 하나로 이어붙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어떤 정체성으로서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을 순수하게 지속하는 '벌거벗은' 나로 인지한다, 나를 구성하고 내게 여전히 대타자의 욕망을 주입하여 맹목과 불안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 권력에 대한 저항은 바로 거기서 시작될 것이다. 그렇기에 '벌거벗음'은 아감벤의 '그라운드 제로'이며 타율화되고 궤적화되지 않은. 시민이 아니라 인민(여기서 인민이란 아감벤에 따르면 법에 의해 포획되지 않은, 즉 시민이 아닌 '비시민'을 의미한다. 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인간 자체)으로 구축하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는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2009년에 나온 'NUDITA', 즉 '벌거벗음'은 이러한 성격을 모두 10장에 걸쳐서 다양한 맥락으로 풀어간 책이다. 앞서 '역사'를 언급했지만 '벌거벗음'으로 회귀하려는 아감벤은 우리의 굳어진 역사나 시간 개념도 거부한다. '모든 인민은 집시이며 모든 언어는 은어다(모두 정체성과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듯이 고유한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도 달리 이해해야 한다. 그 시간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의 1장과 2장이다. 1장은 지금은 사라진 종교 상의 예언을 통해 구원이 창조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2장은 동시대성에 대해 진정한 동시대인이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현존하는 시대의 모습이 아닌 그 뒤나 너머에 있는 어둠을 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예언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때는 오로지 그 예언이 성취된 때이다. 아감벤은 예언이 점점 쇠망하고 그 자리를 철학이 대신했음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편린을 본다. 바로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쓴 11번째 테제 말이다. 즉 아감벤이 설명하는 창조와 구원의 관계란 바로 해석과 실천의 관계에 다름아니다. 그 11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이 말은 마르크스의 무덤 비석에도 새겨져 있다.


 바로 이것을 아감벤은 창조와 구원의 관계로 말한 것이다. 구원이 창조에 앞선다는 것은 예언의 참 가치가 오로지 예언이 실현에서 생겨나는 것처럼 실제 행동으로 전화되어야 그 해석 역시 가치를 가질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벌거벗음의 사유'를 두고 아감벤이 굳이 실험이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아감벤이 첫 머리부터 창조와 구원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사유가 행여나 우리가 흔히 오해하듯이 오로지 해석으로만 그칠 수 있음을 염려한 까닭이 아닌가 싶다. 사유는 현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즉 아주 적극적인 작업이다. 실험이란 말을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실험은 가장 적극적인 검증 행위이니까 말이다. 즉 아감벤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적극적이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돌파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적극성은 그 다음의 논의인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앞서 아감벤은 동시대인이란 지금 눈 앞에 있는 시대의 모습이 아닌 그 어둠을 보려 하는 자들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고 말했다. 바로 그 어둠의 인식 또한 사유의 적극성을 강조하고 있다.


시각신경생리학의 논의에 따르면 어둠을 인식하는 일은 타성이나 수동적인 양상을 띠지 않는다. 차라리 이것은 어떤 특별한 활동과 능력을 내포한다. (P. 27)

 

 

 여기서 내포가 뜻하는 것이 바로 자기 의지의 개입 임을 부러 말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유의 강조는 카프카의 소설 '소송'에 대한 논의에서도 계속된다. 아감벤은 주인공 K를 지금까지의 주류적인 해석 입장과는 달리 그를 무고한 이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K를 고발한 사람은 K 그 자신'이라고 말한다. 아시다시피 아감벤에게 법은 부정적인 것이다. 법은 고유한 가치로 충만한 개인을 자신의 그물망으로 포획하여 단순한 사물로 만들어 버린다. '피고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삶의 맥락은 법이 정한 형벌의 세 가지 요건, 즉 구성요건과 위법성 그리고 책임에 의해 필요한 것만 걸려지고 모조리 싹뚝 잘려 나간다.



레미제라블의 자비에르 경감을 떠올려 보자. 그에게 있어 장발장은 그가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한들 자신이 기필코 체포해야 하는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다. 장발장이 거쳐온 삶의 이야기는 자베르에게 있어 한낱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그는 오로지 법이 규정한 조문만으로 그를 판단한다. 법이 규정한 정체성이 장발장 고유의 정체성을 지배해 버린다. 법이 개인에게 하는 일이라는 게 이렇다. 푸코가 말했던 권력 효과. 그래서 K는 그 법을 거부하고 아니, 근본부터 뒤흔들어 전복시키려고 스스로를 무고했다는 것이다.(이 책에서는 거짓 고발자라고 하고 있으나 우리 형법에는 그것을 무고죄라 하고 있으므로 '무고'라 말하기로 한다.) K의 자신에 대한 무고가 그런 힘을 갖는 것은 법은 오로지 '고소'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맞다. 사실 법이 전면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때는 언제나 고소가 이뤄질 때다. 성문법이 없어 오로지 기존의 판례에 근거해 판결하는 미국에서는 법현실주의라는 독특한 법철학 사조가 생겨났는데 거기 대표적 인물인 홈즈 판사는 법은 판결을 통해 비로소 탄생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아감벤의 말은 그것과 비슷하다. 그 판결은 오로지 고소가 있고서야 태어나니 아감벤의 말 그대로 법의 존재란 고소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고소가 되는 순간 법은 개인에 대해 막강한 힘을 얻는다. 피고가 된 개인을 소환해 그에게 진실을 추궁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법 앞에서 개인은 진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받는데 법은 바로 그 고백을 이끌어 내는 힘을 가지고 진실을 토하게 만들어 주체를 새롭게 구성한다. 물론 그 진실은 어디까지나 법만이 원하는 진실로, 그 힘에 의해 장발장은 동정의 여지가 많은 '호모 사케르'에서 '죄인'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K는 스스로를 무고함으로써 오히려 법을 혼란에 빠뜨려 버린다. 무고는 죄가 없는 자를 고소 했을 때 성립되는데 자기 무고가 죄로 인정되면 그것은 더이상 무고가 아니게 된다. 즉, 법이 K에게 자백을 받아 죄를 인정하는 순간 죄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K의 전략을 통해 아감벤은 우리를 생산하고 있는 권력이 아무리 강고해 보인다 하더라도 주체의 적극적인 움직임 앞에서 또 얼마나 허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적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를 논의하는 5장에서는 아예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지 않을 가능성을 유지하는 능력(P. 75)'이라고까지 말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권력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주지시켜 우리를 무능력하게 여기도록 만든다. 사실 우리 삶의 왜소함과 불안은 대부분 자신이 무능하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아감벤은 그것을 전혀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현대의 인간이 외면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그 '비능력'인데 이것은 무엇보다 현대가 그 옛날 누군가가 외쳤던 '하면 된다'라는 구호처럼 개인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한 마디로 과잉된 믿음이 가져온 부작용이다. 


 자기 배역의 불안정성이나 불확실성과 반비례해서 오만해지는 단역 배우는 우리 시대의 직업과 소명, 직업적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 사이의 결정적인 혼동을 잘 드러낸다. 바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생각, 오늘 나를 검진하고 있는 의사가 내일 영상예술가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를 죽이는 사형집행인이 카프카의 '소송'처럼 실제로는 가수일 수 있다는 의혹, 이들은 모든 사람들이 유연성에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 유연성이 바로 오늘날  시장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가장 우선시하는 가치이다. (P. 76)


 즉 그러한 과잉된 믿음 또한 권력에 의해 생산된 것이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렇게 권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생산되어 이제는 오히려 우리의 진짜 가치를 보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식된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본 탓에 그것에 왜곡되어 우리가 가진 긍정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그저 무능력과 왜소함만 각인시켰던 것이다. 바로 이 왜곡의 장막을 찢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벌거벗음의 사유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에게 사유란 손가락이며 갈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벌거벗음의 사유가 가진 정당성이 입증되고 난 뒤, 7장인 '벌거벗음'에서는 본격적으로 '벌거벗음의 사유'가 진행된다. 2005년에  베를린에서 열렸던 바네사 크로포트의 퍼포먼스에서 벌거벗음의 상태가 과연 어떤 것인지 본 다음 선악과를 통해 벌거벗음을 최초로 알았던 창세기의 신화를 경유해 그 의미를 탐색한다. 벌거벗음은 다름아닌 지속적인 무화(NULLIFY)라는 것을 말이다.


   바네사 크로포트의 퍼포먼스


 벌거벗음의 진정한 의미는 보이면서 감춘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는 이에게 하나의 의미로 규정짓게 하지 않으며 언제나 그 외부에 있는 어딘가로 달아나거나 무언가를 가져와 지금 떠오른 대상에 대한 나의 규정을 스스로 지우게 만든다. 그것은 머물지 못하게 한다. 반복적인 단절을 낳는다. 나 스스로를 결코 수동적인 감상자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의미는 이제 대상이 아닌 나에게서 만들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맨 앞으로 돌아간다. 벌거벗음은 해석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오직 가능한 것은 스스로 경험과 실험을 통해 창조해 나가는 것 뿐이다. 어둠을 보려는 능력처럼 말이다.


 이 말이 오해를 낳을지 몰라서 부언하자면, 이 때의 창조는 규정이 되어서는 안된다. 타자를 내 자의대로 반죽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아감벤이 '벌거벗음'을 이렇게 강조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의 절대적인 비규정성에 있다. 우리의 창조는 그것에 한계지워진다. 우리가 아무리 그것에 이름을 짓더라도 이미 그것의 비규정성을 자각한 우리들은 지금의 내 규정이 어디까지나 자의적인 것임을 충분히 인식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절대적 타자로서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지금의 내 규정은 결코 결정적이지 않으며 언제 또 바뀔지 모르는 한시적인 것임을 충분히 납득한다. 그런 면에서의 창조다. 아감벤이 마지막 장에서 말하는 '비인식 영역'의 인식.


 사실상 우리가 무지할 수 있는 방법이 정확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지위를 규정한다. 그렇기에 비인식 영역에 대한 분절은 우리가 가진 모든 인식 조건이며 시금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181)


 이상으로 할 수 있는 한 줄여가며 아감벤의 '벌거벗음'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소개해 보았다. 개인적인 느낌으론 아감벤 사유의 진전이라기 보다는 사유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책에 실린 글을 통해 그동안 아감벤이 했던 말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책을 리뷰할 땐 언제나 마지막 부분이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뭔가 멋있게 마무리를 하고 싶은데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갈무리가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 투박하게나마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길.


 아감벤 사유의 중심에 놓여 있는 '벌거벗음'에 대해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15-02-11 12:45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이 책을 서점에서 확인해 봐야 겠습니다. 번역만 매끄럽게 됐다면 냉큼 집어 오겠습니다.ㅎ

헤르메스 2015-02-23 00:37   URL
앗! 저야말로 yamoo님의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번역은 개인적으로는 아주 좋다라고 할 수는 없어도 이해하기엔 그리 어렵지 않은 무난한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 박정희 vs 마오쩌둥 - 한국 중국 독재 정치의 역사
박형기 지음 / 알렙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젊은 세대들은 궁금하다. 독재자인 박정희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인기를 누리는 것일까? 이것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 아니면 그저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고 기껏해야 그런 작위적인 환상의 연장에 불과한 것일까? 저자 박형기는 <머니 투데이>에서 오래도록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문제를 담당한 언론인이다. 그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너무 국내적인 시각에만 머물러 있다고 여겼다. 이제 그것을 국제적인 시야로 넓힐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중국을 끌여들여 평가해 보기로 했다. 그것도 박정희와 똑같은 독재자인 마오쩌둥과 덩샤오핑과의 비교를 통하여.

 마오쩌뚱의 유명한 말이기도 한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는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총 세 가지 부분에 걸쳐 세 명의 독재자를 비교한다. 첫 번째 부분은 필부의 몸에서 최고 권력을 장악하기까지의 과정이고 두 번째 부분은 박정희가 가장 내세우고 있는 업적인 경제 부문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별로 업적이 없는 마오쩌둥은 생략되었다. 그런데 독재는 장악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지속이다. 마지막 부분은 어떻게 그 권력을 지속시켰는 지를 비교한다. 이야기 형식인데다 서술은 평이해서 이해 못할 부분은 없다. 334페이지라는 다소 적은 분량으로 세 명의 독재자 이야기를 담았지만 그렇다고 내용의 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무슨 일을 했던가를 제대로 습득하기에 족한 책이라는 것이다. 혹시 박정희나 마오쩌둥 그리고 덩샤오핑에 관심이 있었고 좀 쉽게 알게 해 줄 책을 찾고 있었다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적절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머니 투데이>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행여나 오른쪽으로 편향된 서술이지 않을까 우려된다면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더없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으니. 애초에 이 책이 나오게 된 것도 남유진 구미시장이 박정희를 '반신반인'라고 부른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정말 '반신반인'인지 한 번 제대로 따져보자는 심정으로 말이다.


 권력의 쟁취과정에서는 잘 몰랐던 박정희의 만주 군관 학교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만주를 제대로 지배하기 위해 수많은 인력이 필요했고 모자라는 인력을 조선인으로 채울 계획을 세웠다. 만주의 장악을 위한 인력 수급인만큼 그냥 조선인은 대상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할 수 있는 자들만이 대상이었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친일자들이 만주로 몰려들었고 청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의 친일 청년들에게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보다 일본군 장교가 되는 것이었다. 장교가 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만주에 있는 군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다. 일본군 장교가 되어 출세하려는 야망이 강했던 박정희는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은 합격 요건이 엄격했다. 일단 박정희는 나이 제한부터 걸려버렸다. 때문에 비교적 입학 자격이 허술한 만주 군관 학교에 들어간 것이다.(여기도 나이 제한 때문에 한 차례 낙방해 박정희는 모병 담당자에게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는 혈서를 써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입학한 후인 40년에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한다.) 


 만주 군관 학교는 졸업하면 만주군에 편입되는데 만주군의 주요 임무는 독립군 소탕이었다. 같은 시기 '유신 시절 박정희의 저격수'로 유명했던 장준하와 김준엽은 일제에 징병되었지만 일본 부대를 탈출했고 독립군이 되기 위해 6천리 길을 걸어갔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박형기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박정희는 큰 칼을 차고 싶어서, 즉 군인으로 출세하고 싶어서 만주로 갔고, 만군 장교로서 일본  제국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알뜰하게. 일제에 견마의 충성을 다했을 뿐이다.(p. 53)


 다소 이야기가 길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어떤 분위기인지 짐작케 하기 위하여 조금 무리를 해 보았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박정희와 마오쩌둥 그리고 덩샤오핑에 대한 일화들을 들을 수 있다. 더하여 정치적 격변기의 우리나라 모습도 아우를 수 있다. 이를테면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같은 것은 원래 만주를 지배했던 기시 노부스케의 만주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본받은 것이라든지 개인청구권을 포기하여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만 더 커지게 만든 굴욕적인 한일 조약을 체결하게 된 뒷배경이라든지(덕분에 박정희 정권은 자금 3억불과 차관 5억불을 일본으로부터 지원받았다.) 독일로부터 빌린 돈 5천만 달러를 상환할 능력이 없어 우리나라의 광부와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하게 되어 63년부터 15년간 모두 7만 9천명의 광부와 1만여 명의 간호사가 서독으로 가게 된 사연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그 중 '65명의 광부와 44명의 간호사 그리고 8명의 기능공이 현지에서 사망했다. 외로움에 시달려 자살한 수도 광부 5명, 간호사 19명이었다.' 라고 책은 밝히고 있다.) 물론 베트남전 파병이나 그들의 희생으로 건설된 경부고속도로도 빼놓지 않는다.


 이렇게 박정희와 그 때의 우리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보니 영화에 '국제시장'이 있다면 책엔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가 아련한 과거의 향수로 덧칠한 것을 이 책은 벗겨내어 그 객관적 진실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어 준다고나 할까. 어쨌든 좀 더 소상히 그 때의 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여기에 더하여 중국의 이야기까지(이렇게 쓰고 보니 박정희 분량만 상당할 것 같다는 인상을 줄 것도 같은데 그렇지 않다. 세 명이 차지하는 분량은 고른 편이다.).


 아무래도 대상이 대상이다 보니 뭔가 덧붙이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냥 결론만 이야기 하는 것이 읽는 이나 나를 위해 나을 것 같다. 그렇게 결론만 이야기한다. 꽤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고 판단에 있어 좀 더 객관적인 자리로 데려가는 좋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