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음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영훈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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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지금 가장 주목을 많이 받는 철학자 중의 하나다. 아감벤의 저서를 읽어보았다면 '벌거벗음'이야말로 아감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사유 대상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아감벤의 주저이자 그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린 '호모 사케르'에서 그가'이 책의 주인공은 바로 '벌거벗은 생명'이다.'라고 말했듯이 말이다.



 도대체 '벌거벗음'이 무엇이기에 아감벤은 이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호모 사케르'에서 그는 먼저 고대 그리스의 생명관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생명을 두 가지 용어로 구별하여 사용했는데 하나는 '조에'라고 해서 모든 생명체에 공통되는 그저 '살아있다'라는 의미로 썼고 다른 하나는 '비오스'라고 해서 한 개인이나 집단이 가진 고유한 삶의 방식이나 형태를 가리키기 위해 썼다. 그러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면 서서히 가치 있는 삶만이 진정한 삶으로 존중받는데 아감벤은 바로 이러한 분리와 목적 중시 태도가 근본적으로 문제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삶은 하나의 지속이며 그 자체로서 고유한 가치가 있고 존중받을만한 자격이 있는데 이러한 분리적 사고와 목적 중시 태도는 삶을 파편화시키고 그 파편화된 삶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벌거벗음'이 아감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분리된 삶을 결합하여 '삶-의-형태'로 삶을 바라보게 만들고 '벌거벗음'이라는 상태는 다른 것 하나 없이 오로지 현시된 육체 자체가 모든 의미이므로 삶을 목적 혹은 결과를 통해 바라보게 하지 않고 그 순수한 지속에서 혹은 순수한 경험에서 바라보게 하기 때문이다. 즉 아감벤에게 '벌거벗음'은 사유 자체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사유란 '우리가 가진 삶의 형태를 [삶을 그 형태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맥락으로, 즉 '삶-의 -형태'로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에게 사유란 한 개인이 행사하는 정신적 능력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과 인간 지성의 잠재적 성격을 대상으로 하는 경험', 나아가서는 실험이다. 아감벤이 굳이 경험이나 실험이라는 말을 쓴 것은 사유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그 사유를 할 때의 개인이 무엇보다 '사유하기'를 스스로 체험하는 까닭이다.


 '단지 내가 항상 그저 현실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과 역량을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단지 내가 겪고 이해한 것 속에서 매번의 삶과 이해 자체가 있을 수 있다면, 달리 말해 이런 의미에서 사유가 있을 수 있다면, 삶의 형태는 그 자신의 사실성과 사물성에 있어서 '삶-의-형태'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삶-의-형태'에서는 벌거벗은 생명 같은 뭔가를 고립시키는 일이 전적으로 불가능해질 것이다.'


 조금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여기서 아감벤의 사유란 들뢰즈의 탈주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아감벤이 사유를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것이 푸코식으로 말하면 우리의 주체를 구성하고 여전히 우리의 생각과 취향 그리고 욕망마저 마치 우리가 스스로 가진 것인양 생산하고 있는 권력의 그물망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즉 아감벤의 사유는 우리를 '지금-여기'의 절대적 외부로 데려간다. 거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권력에 의해 단절되어 있었던 삶을 하나로 이어붙이고 무엇보다 자신을 어떤 정체성으로서가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을 순수하게 지속하는 '벌거벗은' 나로 인지한다, 나를 구성하고 내게 여전히 대타자의 욕망을 주입하여 맹목과 불안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 권력에 대한 저항은 바로 거기서 시작될 것이다. 그렇기에 '벌거벗음'은 아감벤의 '그라운드 제로'이며 타율화되고 궤적화되지 않은. 시민이 아니라 인민(여기서 인민이란 아감벤에 따르면 법에 의해 포획되지 않은, 즉 시민이 아닌 '비시민'을 의미한다. 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인간 자체)으로 구축하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는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2009년에 나온 'NUDITA', 즉 '벌거벗음'은 이러한 성격을 모두 10장에 걸쳐서 다양한 맥락으로 풀어간 책이다. 앞서 '역사'를 언급했지만 '벌거벗음'으로 회귀하려는 아감벤은 우리의 굳어진 역사나 시간 개념도 거부한다. '모든 인민은 집시이며 모든 언어는 은어다(모두 정체성과 의미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듯이 고유한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도 달리 이해해야 한다. 그 시간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의 1장과 2장이다. 1장은 지금은 사라진 종교 상의 예언을 통해 구원이 창조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2장은 동시대성에 대해 진정한 동시대인이란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현존하는 시대의 모습이 아닌 그 뒤나 너머에 있는 어둠을 보는 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예언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때는 오로지 그 예언이 성취된 때이다. 아감벤은 예언이 점점 쇠망하고 그 자리를 철학이 대신했음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편린을 본다. 바로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쓴 11번째 테제 말이다. 즉 아감벤이 설명하는 창조와 구원의 관계란 바로 해석과 실천의 관계에 다름아니다. 그 11번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이 말은 마르크스의 무덤 비석에도 새겨져 있다.


 바로 이것을 아감벤은 창조와 구원의 관계로 말한 것이다. 구원이 창조에 앞선다는 것은 예언의 참 가치가 오로지 예언이 실현에서 생겨나는 것처럼 실제 행동으로 전화되어야 그 해석 역시 가치를 가질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벌거벗음의 사유'를 두고 아감벤이 굳이 실험이라고 불렀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아감벤이 첫 머리부터 창조와 구원을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중요하다고 강조한 사유가 행여나 우리가 흔히 오해하듯이 오로지 해석으로만 그칠 수 있음을 염려한 까닭이 아닌가 싶다. 사유는 현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즉 아주 적극적인 작업이다. 실험이란 말을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실험은 가장 적극적인 검증 행위이니까 말이다. 즉 아감벤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적극적이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이 주체가 되어 돌파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적극성은 그 다음의 논의인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앞서 아감벤은 동시대인이란 지금 눈 앞에 있는 시대의 모습이 아닌 그 어둠을 보려 하는 자들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고 말했다. 바로 그 어둠의 인식 또한 사유의 적극성을 강조하고 있다.


 시각신경생리학의 논의에 따르면 어둠을 인식하는 일은 타성이나 수동적인 양상을 띠지 않는다. 차라리 이것은 어떤 특별한 활동과 능력을 내포한다. (P. 27)


 여기서 내포가 뜻하는 것이 바로 자기 의지의 개입 임을 부러 말할 필요는 없을 듯 하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사유의 강조는 카프카의 소설 '소송'에 대한 논의에서도 계속된다. 아감벤은 주인공 K를 지금까지의 주류적인 해석 입장과는 달리 그를 무고한 이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K를 고발한 사람은 K 그 자신'이라고 말한다. 아시다시피 아감벤에게 법은 부정적인 것이다. 법은 고유한 가치로 충만한 개인을 자신의 그물망으로 포획하여 단순한 사물로 만들어 버린다. '피고인'이 된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이제까지 살아온 모든 삶의 맥락은 법이 정한 형벌의 세 가지 요건, 즉 구성요건과 위법성 그리고 책임에 의해 필요한 것만 걸려지고 모조리 싹뚝 잘려 나간다.



 레미제라블의 자비에르 경감을 떠올려 보자. 그에게 있어 장발장은 그가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한들 자신이 기필코 체포해야 하는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다. 장발장이 거쳐온 삶의 이야기는 자베르에게 있어 한낱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그는 오로지 법이 규정한 조문만으로 그를 판단한다. 법이 규정한 정체성이 장발장 고유의 정체성을 지배해 버린다. 법이 개인에게 하는 일이라는 게 이렇다. 푸코가 말했던 권력 효과. 그래서 K는 그 법을 거부하고 아니, 근본부터 뒤흔들어 전복시키려고 스스로를 무고했다는 것이다.(이 책에서는 거짓 고발자라고 하고 있으나 우리 형법에는 그것을 무고죄라 하고 있으므로 '무고'라 말하기로 한다.) K의 자신에 대한 무고가 그런 힘을 갖는 것은 법은 오로지 '고소'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맞다. 사실 법이 전면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때는 언제나 고소가 이뤄질 때다. 성문법이 없어 오로지 기존의 판례에 근거해 판결하는 미국에서는 법현실주의라는 독특한 법철학 사조가 생겨났는데 거기 대표적 인물인 홈즈 판사는 법은 판결을 통해 비로소 탄생한다고 말한 바 있다.


 아감벤의 말은 그것과 비슷하다. 그 판결은 오로지 고소가 있고서야 태어나니 아감벤의 말 그대로 법의 존재란 고소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고소가 되는 순간 법은 개인에 대해 막강한 힘을 얻는다. 피고가 된 개인을 소환해 그에게 진실을 추궁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법 앞에서 개인은 진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받는데 법은 바로 그 고백을 이끌어 내는 힘을 가지고 진실을 토하게 만들어 주체를 새롭게 구성한다. 물론 그 진실은 어디까지나 법만이 원하는 진실로, 그 힘에 의해 장발장은 동정의 여지가 많은 '호모 사케르'에서 '죄인'으로 규정된다. 그런데 K는 스스로를 무고함으로써 오히려 법을 혼란에 빠뜨려 버린다. 무고는 죄가 없는 자를 고소 했을 때 성립되는데 자기 무고가 죄로 인정되면 그것은 더이상 무고가 아니게 된다. 즉, 법이 K에게 자백을 받아 죄를 인정하는 순간 죄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K의 전략을 통해 아감벤은 우리를 생산하고 있는 권력이 아무리 강고해 보인다 하더라도 주체의 적극적인 움직임 앞에서 또 얼마나 허약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적극성을 강조하기 위해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를 논의하는 5장에서는 아예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지 않을 가능성을 유지하는 능력(P. 75)'이라고까지 말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권력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주지시켜 우리를 무능력하게 여기도록 만든다. 사실 우리 삶의 왜소함과 불안은 대부분 자신이 무능하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아감벤은 그것을 전혀 부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현대의 인간이 외면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그 '비능력'인데 이것은 무엇보다 현대가 그 옛날 누군가가 외쳤던 '하면 된다'라는 구호처럼 개인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다는 한 마디로 과잉된 믿음이 가져온 부작용이다. 


 자기 배역의 불안정성이나 불확실성과 반비례해서 오만해지는 단역 배우는 우리 시대의 직업과 소명, 직업적 정체성과 사회적 역할 사이의 결정적인 혼동을 잘 드러낸다. 바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생각, 오늘 나를 검진하고 있는 의사가 내일 영상예술가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를 죽이는 사형집행인이 카프카의 '소송'처럼 실제로는 가수일 수 있다는 의혹, 이들은 모든 사람들이 유연성에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 유연성이 바로 오늘날  시장이 모든 사람들에게서 가장 우선시하는 가치이다. (P. 76)


 즉 그러한 과잉된 믿음 또한 권력에 의해 생산된 것이었다. 우리의 믿음은 이렇게 권력이 원하는 방향으로 생산되어 이제는 오히려 우리의 진짜 가치를 보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식된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본 탓에 그것에 왜곡되어 우리가 가진 긍정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그저 무능력과 왜소함만 각인시켰던 것이다. 바로 이 왜곡의 장막을 찢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벌거벗음의 사유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에게 사유란 손가락이며 갈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벌거벗음의 사유가 가진 정당성이 입증되고 난 뒤, 7장인 '벌거벗음'에서는 본격적으로 '벌거벗음의 사유'가 진행된다. 2005년에  베를린에서 열렸던 바네사 크로포트의 퍼포먼스에서 벌거벗음의 상태가 과연 어떤 것인지 본 다음 선악과를 통해 벌거벗음을 최초로 알았던 창세기의 신화를 경유해 그 의미를 탐색한다. 벌거벗음은 다름아닌 지속적인 무화(NULLIFY)라는 것을 말이다.


   바네사 크로포트의 퍼포먼스


 벌거벗음의 진정한 의미는 보이면서 감춘다는 것이다. 그것은 보는 이에게 하나의 의미로 규정짓게 하지 않으며 언제나 그 외부에 있는 어딘가로 달아나거나 무언가를 가져와 지금 떠오른 대상에 대한 나의 규정을 스스로 지우게 만든다. 그것은 머물지 못하게 한다. 반복적인 단절을 낳는다. 나 스스로를 결코 수동적인 감상자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의미는 이제 대상이 아닌 나에게서 만들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맨 앞으로 돌아간다. 벌거벗음은 해석의 불가능성을 말한다. 오직 가능한 것은 스스로 경험과 실험을 통해 창조해 나가는 것 뿐이다. 어둠을 보려는 능력처럼 말이다.


 이 말이 오해를 낳을지 몰라서 부언하자면, 이 때의 창조는 규정이 되어서는 안된다. 타자를 내 자의대로 반죽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아감벤이 '벌거벗음'을 이렇게 강조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의 절대적인 비규정성에 있다. 우리의 창조는 그것에 한계지워진다. 우리가 아무리 그것에 이름을 짓더라도 이미 그것의 비규정성을 자각한 우리들은 지금의 내 규정이 어디까지나 자의적인 것임을 충분히 인식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절대적 타자로서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지금의 내 규정은 결코 결정적이지 않으며 언제 또 바뀔지 모르는 한시적인 것임을 충분히 납득한다. 그런 면에서의 창조다. 아감벤이 마지막 장에서 말하는 '비인식 영역'의 인식.


 사실상 우리가 무지할 수 있는 방법이 정확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지위를 규정한다. 그렇기에 비인식 영역에 대한 분절은 우리가 가진 모든 인식 조건이며 시금석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181)


 이상으로 할 수 있는 한 줄여가며 아감벤의 '벌거벗음'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소개해 보았다. 개인적인 느낌으론 아감벤 사유의 진전이라기 보다는 사유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책에 실린 글을 통해 그동안 아감벤이 했던 말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책을 리뷰할 땐 언제나 마지막 부분이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린다. 뭔가 멋있게 마무리를 하고 싶은데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갈무리가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 투박하게나마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길.


 아감벤 사유의 중심에 놓여 있는 '벌거벗음'에 대해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었던 좋은 책이었다.






 
 
yamoo 2015-02-11 12:45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이 책을 서점에서 확인해 봐야 겠습니다. 번역만 매끄럽게 됐다면 냉큼 집어 오겠습니다.ㅎ

헤르메스 2015-02-23 00:37   URL
앗! 저야말로 yamoo님의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번역은 개인적으로는 아주 좋다라고 할 수는 없어도 이해하기엔 그리 어렵지 않은 무난한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 : 박정희 vs 마오쩌둥 - 한국 중국 독재 정치의 역사
박형기 지음 / 알렙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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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들은 궁금하다. 독재자인 박정희가 어떻게 오늘날까지 인기를 누리는 것일까? 이것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 아니면 그저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고 기껏해야 그런 작위적인 환상의 연장에 불과한 것일까? 저자 박형기는 <머니 투데이>에서 오래도록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문제를 담당한 언론인이다. 그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너무 국내적인 시각에만 머물러 있다고 여겼다. 이제 그것을 국제적인 시야로 넓힐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중국을 끌여들여 평가해 보기로 했다. 그것도 박정희와 똑같은 독재자인 마오쩌둥과 덩샤오핑과의 비교를 통하여.

 마오쩌뚱의 유명한 말이기도 한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는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총 세 가지 부분에 걸쳐 세 명의 독재자를 비교한다. 첫 번째 부분은 필부의 몸에서 최고 권력을 장악하기까지의 과정이고 두 번째 부분은 박정희가 가장 내세우고 있는 업적인 경제 부문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 별로 업적이 없는 마오쩌둥은 생략되었다. 그런데 독재는 장악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지속이다. 마지막 부분은 어떻게 그 권력을 지속시켰는 지를 비교한다. 이야기 형식인데다 서술은 평이해서 이해 못할 부분은 없다. 334페이지라는 다소 적은 분량으로 세 명의 독재자 이야기를 담았지만 그렇다고 내용의 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무슨 일을 했던가를 제대로 습득하기에 족한 책이라는 것이다. 혹시 박정희나 마오쩌둥 그리고 덩샤오핑에 관심이 있었고 좀 쉽게 알게 해 줄 책을 찾고 있었다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적절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머니 투데이>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행여나 오른쪽으로 편향된 서술이지 않을까 우려된다면 그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더없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으니. 애초에 이 책이 나오게 된 것도 남유진 구미시장이 박정희를 '반신반인'라고 부른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정말 '반신반인'인지 한 번 제대로 따져보자는 심정으로 말이다.


 권력의 쟁취과정에서는 잘 몰랐던 박정희의 만주 군관 학교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만주를 제대로 지배하기 위해 수많은 인력이 필요했고 모자라는 인력을 조선인으로 채울 계획을 세웠다. 만주의 장악을 위한 인력 수급인만큼 그냥 조선인은 대상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할 수 있는 자들만이 대상이었다. 이런 이유로 수많은 친일자들이 만주로 몰려들었고 청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의 친일 청년들에게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보다 일본군 장교가 되는 것이었다. 장교가 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만주에 있는 군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다. 일본군 장교가 되어 출세하려는 야망이 강했던 박정희는 일본 육군 사관 학교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은 합격 요건이 엄격했다. 일단 박정희는 나이 제한부터 걸려버렸다. 때문에 비교적 입학 자격이 허술한 만주 군관 학교에 들어간 것이다.(여기도 나이 제한 때문에 한 차례 낙방해 박정희는 모병 담당자에게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는 혈서를 써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입학한 후인 40년에 다카키 마사오로 창씨개명한다.) 


 만주 군관 학교는 졸업하면 만주군에 편입되는데 만주군의 주요 임무는 독립군 소탕이었다. 같은 시기 '유신 시절 박정희의 저격수'로 유명했던 장준하와 김준엽은 일제에 징병되었지만 일본 부대를 탈출했고 독립군이 되기 위해 6천리 길을 걸어갔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박형기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박정희는 큰 칼을 차고 싶어서, 즉 군인으로 출세하고 싶어서 만주로 갔고, 만군 장교로서 일본  제국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알뜰하게. 일제에 견마의 충성을 다했을 뿐이다.(p. 53)


 다소 이야기가 길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어떤 분위기인지 짐작케 하기 위하여 조금 무리를 해 보았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박정희와 마오쩌둥 그리고 덩샤오핑에 대한 일화들을 들을 수 있다. 더하여 정치적 격변기의 우리나라 모습도 아우를 수 있다. 이를테면 박정희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같은 것은 원래 만주를 지배했던 기시 노부스케의 만주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본받은 것이라든지 개인청구권을 포기하여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만 더 커지게 만든 굴욕적인 한일 조약을 체결하게 된 뒷배경이라든지(덕분에 박정희 정권은 자금 3억불과 차관 5억불을 일본으로부터 지원받았다.) 독일로부터 빌린 돈 5천만 달러를 상환할 능력이 없어 우리나라의 광부와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하게 되어 63년부터 15년간 모두 7만 9천명의 광부와 1만여 명의 간호사가 서독으로 가게 된 사연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그 중 '65명의 광부와 44명의 간호사 그리고 8명의 기능공이 현지에서 사망했다. 외로움에 시달려 자살한 수도 광부 5명, 간호사 19명이었다.' 라고 책은 밝히고 있다.) 물론 베트남전 파병이나 그들의 희생으로 건설된 경부고속도로도 빼놓지 않는다.


 이렇게 박정희와 그 때의 우리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읽다보니 영화에 '국제시장'이 있다면 책엔 '권력은 총구에서 나왔다'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가 아련한 과거의 향수로 덧칠한 것을 이 책은 벗겨내어 그 객관적 진실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어 준다고나 할까. 어쨌든 좀 더 소상히 그 때의 이야기를 알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여기에 더하여 중국의 이야기까지(이렇게 쓰고 보니 박정희 분량만 상당할 것 같다는 인상을 줄 것도 같은데 그렇지 않다. 세 명이 차지하는 분량은 고른 편이다.).


 아무래도 대상이 대상이다 보니 뭔가 덧붙이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냥 결론만 이야기 하는 것이 읽는 이나 나를 위해 나을 것 같다. 그렇게 결론만 이야기한다. 꽤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고 판단에 있어 좀 더 객관적인 자리로 데려가는 좋은 책이었다.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 불멸의 인생 멘토 공자, 내 안의 지혜를 깨우다
우간린 지음, 임대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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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부터 시작된 논어 열풍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듯 합니다. 논어에 대한 책들이 지금도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죠. 시작은 분명 중국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전의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면서 중국 역시 사회주의 몰락 후의 러시아와 똑같은 상황에 처해더랬죠. 즉 중국 내 소수 민족과 지역들의 분리 요구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영토가 크면 다양한 민족과 지역성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 때까지 중국은 러시아와 똑같이 사회주의라는 틀로 그들을 묶어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불가능해졌습니다. 자본주의는 연대보다는 경쟁을 강조하니까요. 우열이 생기고 차별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우리가 알다시피 많은 대가를 치뤘었죠. 중국은 그런 비용을 치루고 싶지 않았습니다. 얼른 통합에 나서야 했죠. 하지만 어떤 틀로?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죠. 그 때 구원처럼 도래한 것이 민족주의였습니다. 한자동맹으로 나누어져던 독일이 같은 게르만 민족이라는 이름하에 통일했듯이 중국도 그렇게 한 것이죠. 그 때, 기틀이 되어주었던 사상이 바로 공자의 '논어'였습니다. 그렇게 논어는 위로부터의 필요에 의해 다시금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문화대혁명 시절, 논어는 대표적인 구습의 사상으로 공식적으로 매장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논어일까? 왠지 호기심이 일더군요. 민족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중국 고전 사상을 빌려와야 했다면 논어 외에도 도교의 노자나 장자의 책, 혹은 대표적인 현실주의적인 통치철학이라 할 수 있는 한비자도 있으니까요.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일단 민족주의라는 것으로 하나로 묶는데 있어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의 '장자'는 탈락입니다. '무위'와 '소요유'를 강조하는 그런 철학은 개인에겐 환영받겠지만 통치자들에겐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데 어떤 통치자들이 허수아비가 되는 것을 원할까요? 더구나 정치 사상으로써 그 철학들은 아주 헐겁기까지 하죠. 그렇다고 백성을 '빡세게' 만드는 한비자를 가져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한비자의 사상은 현실적인 유용성이야 많지만 일단 분위기가 너무 차갑잖아요. 그건 그대로 중국 사회주의의 분위기와 다를 바 없으니, 자본주의의 수용과 함께 이미지 변신을 꽤하는 중국에게 그건 별로 달가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져다 주면서도 끈끈한 연대마저 놓치지 않는 '논어'를 선택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일단 '논어'는 따스함과 부드러움이 감도는 '인'을 강조하니까요. 아마도 지금 중국의 대중들이 논어에 몰려드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오래도록 맡지 못했고 때문에 더욱 그리움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인 내음이 논어엔 가득 드리워져 있었으니까요.


 그 인간학적 면모로 논어는 원래 정치철학적 성격이 강하지만 처세의 책으로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나온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사는가?"도 실은 그러한 방면의 책입니다. 정치 철학이 아닌 처세에 보다 초점을 맞춘 책이라는 것이죠. 그건 제목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것 같네요. 저자는 우간린으로 중국의 경제학자이자 인재 개발 컨설턴트라고 합니다. 저자의 약력을 보면 더욱 이 책이 초점을 어디다 두고 있는지 더욱 감이 오실 듯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여타 논어 책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간린은 논어의 이야기를 공자의 제자인 자공을 주인공으로 하여 하나의 소설처럼 일련된 이야기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가 허다한 다른 논어 책들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입니다. 물론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지루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지루한 소설이 참 많기도 하지요. 그런데 우간린 이 사람, 참 맛깔나게 썼습니다. 평이한 문장으로 별다른 지루함을 느끼지 않게 공자의 이야기를 머리에 쏙쏙 들어오도록 잘 썼습니다. 한 마디로 꽤나 읽을만한 이야기라는 것이죠. 저는 우간린의 약력까지 의심하게 되더군요. 실은 경제학자가 아니라 소설가가 아닐까 하고 말이죠. 그런 면에서 논어를 깊이 이해하는 건 바라지 않고 그저 논어에 어떤 이야기들이 나오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벗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우간린이 그저 대중들에게 논어를 쉽게 이해시키자는 목적으로만 이 책을 쓴 것은 아닙니다. 그에겐 보다 더 큰 목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공자의 이야기에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사실 공자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래도록 자신의 알아줄 이를 찾아 유랑 생활을 했지만 그런 자를 만나지 못했고 결국 세상에 자신의 뜻을 펴는 것을 포기하고 은둔의 삶으로 돌아가 하고 싶은 공부나 하면서 '주역'이나 '춘추' 같은 것을 쓰며 말년을 보냈습니다.


 공자는 삶의 쓴 맛을 볼 대로 본 사람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믿었던 군주와 제자의 배신, 반복된 꿈의 좌절. 공자는 거친 길 위에서 허기와 피로의 나날들을 보내며 차오르는 아픔을 삭여야 했습니다. 우간린의 책은 바로 그런 공자를 가져옵니다. 우리와 똑같이 삶에 산적한 많은 문제들로 고민하고 아파했던 공자를 말입니다. 우간린이 바라는 것은 거기서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공자가 겪은 문제는 비록 먼 과거의 일이라 해도 비단 공자만이 겪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고 알고 보면 우리 역시도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의 보편적 형상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문제들로만 우간린은 이 책을 엮었습니다. 그리하여 거기서 공자가 찾아낸 현명한 해답으로 그와 비슷한 문제를 가진 우리 역시 출구를 찾게하려고 말이죠.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는 그런 책입니다. 그냥 탁상공론이 아닌 실제 우리 삶에 뭔가 플러스적인 것을 주려는 책. 때문에 더욱 쉽게 대중들에게 들려줄 필요가 있었고 그리하여 이렇게 소설 형식으로 쓰인 것이죠.


 덕분에 책은 꽤나 읽을만 합니다. 글마다 맨 앞엔 이 글의 출처가 되는 원래 논어에 나온 공자의 말씀을 적어놓았고 마지막에는 공자의 가르침이라 하여 글의 요지를 간략히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짚어주는 건 너무 과잉된 친절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말이죠.


 그러고 보니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게 다가온 부분이 있습니다. 앞서 공자의 말년을 잠깐 얘기했습니다만 바로 그것과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공자는 어째서 공적인 정치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기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건 다른 것도 아닌 어느 여성과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공자는 한 여인이 구슬피 곡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찾아가 그 연유를 물어보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신의 집안은 사냥으로 먹고살았는데 태산에 호랑이와 이리가 날뛰어 걸핏 하면 사람을 다치거나 죽게 한다는 것이었다. 시아버지는 벌써 10년 전에 호랑이에게 잡아먹혀서 겨우 유골만 찾아왔다고 했다. 또 두 해전에는 남편이 호랑이에게 잡혀갔는데 이번에는뼈조차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바로 며칠 전 여덟아홉살난 아들마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고 말았다는 것이다. (p.314)


 그러자 같이 간 제자 하나가 다시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산에 호랑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이 곳을 떠나지 않았느냐구요. 진작에 떠났다면 아들만이라도 지킬 수 있지 않았느냐구요. 그러자 여인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원래는 산 아랫마을에 살았지요. 밭을 일구면서요. 그런데 탐관오리들이 어찌나 괴롭히는지 갈수록 말도 하지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더는 버틸 수가 없어서 이곳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이곳에 호랑이는 있지만 그래도 포악한 정치나 탐관오리는 없지 않습니까." (p. 314)


 그걸 듣고 공자는 이렇게 탄식했다고 합니다.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구나! 호랑이가 있는 곳에서는 그래도 모두가 잡아먹히지 않지만 가혹한 정치 아래에서는 살아남을 사람이 없구나!(p. 315)


 그리고 그 날로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시와 음악을 고치고 '역경'과 예법을 바로 잡기 위한 연구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관직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일조차 없었다고 하는군요. 어쩌면 공자가 자신이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는 정치에 그만 환멸을 느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다시는 그런 여인이 없도록 정말 자기가 힘써야 할 것은 위로 부터의 변화가 아니라 아래부터 바꿔나가는 것이라고 깨달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가호맹사성'이라는 공자의 말은 가슴의 현을 울립니다. 세월호의 수장된 아이들의 넋조차 제대로 위로하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 또한 그러한 탓이겠죠.


 그러고 보니, 공자가 언급한 명재상이라 칭송받았던 관중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관중이 모시던 군주인 환공이 어느 날에 사냥을 나갔다가 한 노인을 만났습니다. 여기가 어디냐고 노인에게 물으니 노인은 '우공의 계곡'이라 답했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불리냐고 했더니 노인은 그 우공이 바로 자신인데 말 새끼를 어리석게 빼앗긴 곳이라서 그렇다고 했답니다. 환공이 빼앗기게 된 경위를 물으니 노인은 자신이 기르던 암소가 새끼를 낳아 그 새끼를 팔아 말 새끼를 사왔는데 여기서 한 젊은이가 나타나서는 노인에게 "소가 말 새끼를 낳을 수 없느니 그 말 새끼는 분명 훔친 것이다." 말했다고 합니다. 결국 청년의 말재간을 당해낼 수 없었던 노인은 말새끼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이웃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노인이 정말 어리석다고 생각해 우공의 계곡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환공이 재미있어하면서 관중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관중은 갑자기 사죄의 의미로 환공에게 두 번 큰 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노인의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바로 제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하면서요. 환공이 당황하며 그 연유를 묻자, 관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정치와 법률을 공명정대하게 운용되도록 만들었다면 어찌 노인이 그 말만 듣고 말 새끼를 청년에게 내주었겠습니까? 정치와 법률이 공명정대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니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라 믿고 내 준 것이죠. 그러니 그렇게 만들지 못한 제 어리석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관중을 공자는 진정한 군자라 칭송했습니다. 이런 혜안과 책임감을 가지는 인물이 참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1. 논어(論語)
    from 512 2015-02-14 15:04 
    유학의 정수. 논어.‘유교’ 하면 공자가 떠오르고, ‘공자’라는 이름은 딱딱한 인상을 줬다. 알지는 못하지만, 왠지 가까이하면 피곤해질 것 같은 느낌. 그래서 공자를 애써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재미난 에피소드를 하나 들었다.어느 날 임권택 감독이 변영주 감독에게 “국악 좋아하느냐.”라고 물었다. 변영주 감독이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임권...
 
 
 
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
남재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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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언영색의 시대입니다.

 번지르르한 말들만 난무하고 실천이 뒤따르는 속이 알찬 말들은 만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저 한 순간만 속여 넘기고 보자는 무게 잃은 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기꾼의 언어만 판치는 세상이니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믿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라!'는 현대인들의 모토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요?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 '라이어게임'에서 순해서 늘 남에게 속는 여주인공은 이렇게 항변하더군요.

"사람이 사람을 믿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맞습니다. 그건 잘못일 수 없습니다. 그게 잘못이라면 세상이 잘못된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이런 사람을 바보라고 여깁니다. 더러는 호구라고도 부릅니다. 사실 드라마에서 그녀는 참 울화통이 터지는 존재입니다. 맨날 속으면서도 사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저절로 '으이구, 또 속네. 이 답답아.'하며 가슴을 치게 됩니다. 사람을 믿는 게 옳은 건데 믿는 족족 그녀는 바로 파멸의 위기에 봉착합니다. 이것은 거꾸로 이 시대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바로 불신이야말로 이 시대의 생존법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런 시대입니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요? 여기에 대해 그건 '세상의 부와 권력을 가진 1%의 잘못이다!'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남재일입니다. 그는 '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은 누구나 세상에 말을 건네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기묘한 노출증의 시대가 아닌가. 이렇게 유혹의 정치는 99%의 물질적 생활뿐만 아니라 사람 관계와 개인의 정서까지 망쳐놓는다.(p. 7)



 이 유혹의 정치가 바로 번지르르한 말들이 넘쳐나게 한 원흉입니다. 그런데 왜 1%의 탓이냐구요? 그건 바로 이 유혹의 정치가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유지를 위한 문화적 전략(p. 7)'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1%는 자신의 지배 체제를 세 가지 방법으로 유지시켜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협의 정치, 기만의 정치 그리고 유혹의 정치입니다. 저자는 곤충이 적을 상대하는 것에 비유해 그것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보다 더 큰 적이 나타나도 달아나지 않고 오로지 위협만 하는 사마귀는 위협의 정치를, 물리적 충돌은 피하면서 자신의 그물에 포섭하여 천천히 포식하는 거미는 기만의 정치를, 마지막으로 숙주에 기생하여 이익만 취하다가 번식할 때가되면 뇌의 호르몬을 조종해 자신이 원하는 물로 들어가도록 만드는 연가시는 유혹의 정치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바로 이 유혹의 정치가 지금의 1%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99%를 지배하는 방식입니다. 즉 연가시가 하듯이 개인을 세뇌시켜 그들이 원하는 규율을 스스로 부과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실은 1%가 원하는 것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어 그들이 원하는 쪽으로 행동하면서도 그걸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이라 여기도록 하는 것이 바로 '유혹의 정치'입니다. 가장 세련된 방식의 착취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당하는 이들이 자신의 선택이라 여기므로 실은 가열차게 착취를 당하면서도 그것을 몰라서 아무런 반발도, 저항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1%의 꿈은 그렇게 '지배없는 착취'인데 바로 유혹의 정치가 그것을 이루어줍니다. 때문에 행위가 따르지 않는 가벼운 말들, 그래서 거짓과 기만의 말들이 넘치게 된 것입니다. 유혹은 상대와의 진실한 약속이 아니라 단순히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꼬이려는 말들이니까요. 그 대표적인 유혹의 말이 바로 욕망입니다. 현대 사회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욕망을 불러 넣지요. 영화나 드라마의 현란한 상류 사회의 모습을 통해서나 광고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지속적으로 어떤 지위나 물건을 갖지 못했을 경우 모자란 인간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가장 많이 가진 자와 완벽한 상태의 육체를 삶의 기본으로 제시해 마치 그것을 가지지 못하면 사람으로써 인정받지도 못한다고 위협까지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자신의 현재를 스스로의 기준이 아닌 보다 상위의 남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고 늘 현재의 모습을 채점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피로사회'를 쓴 한병철은 그것을 두고 현대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했다고 말했었죠.

 맞습니다. 성과가 전부입니다. 요즘 누가 과정에 신경쓰나요?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게 지금의 보편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결과를 평가하는 눈은 누구의 눈일까요? 바로 1%의 눈이죠. 1%가 원하는 학력, 원하는 돈의 액수, 원하는 아파트, 원하는 체형, 원하는 스펙, 원하는 결혼, 모두 그것에 맞춰 우리 스스로를 보고 있지 않나요? 자신이 실제로는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그저 군대에서 흔히 받는 '선착순 1명' 얼차레처럼 1%가 가리키는 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면서 그것을 나의 욕망으로 여기는 게 진정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짜증을 내고(보다 뛰어난 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과 항상 나 상위에 있는 기준 때문에 더 무능하게만 보이는 자신 때문이죠.) 설령 누구나 다 원하는 것을 이루더라도 자주 우리에게 남는 게 허무인 것이겠죠.

 이 책의 제목이 '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이 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남재일은 지금 우리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진정 자유로운 주체가 되려면 무엇보다 싸워야 할 것이 바로 이 무게 없는 유혹의 말들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싸울 것인가? 장 보드리야르는 제대로 해석을 해서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살려내는 것이라 말했지만 남재일은 알랭 바디우의 힘을 빌어 더 멀리 나아가려 합니다. 단순히 해석만이 아니라 정치적 실천으로 그 거짓과 기만의 말들을 봉쇄해야 한다고 말이죠. 즉,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알랭 바디우가 말했던 진리 사건(알랭 바디우는 예수가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진리 사건의 예로 듭니다. 그 사건은 예수가 스스로 자신의 말을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진리 사건이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말이 육신으로 현전하는 것이죠.)을 스스로 창출하는 것이죠. 몸으로 실천되는 말들의 확산. 이것만이 유혹의 정치에 대한 유효한 대안이라 그는 보고 있습니다.

 이 책은 거기로 나아가기 위한 중간 단계입니다.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발적 복종으로 이끄는 여러 유혹의 말들을 분석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진짜 의미를 제대로 사유하는 게 이 책의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여기엔 우리를 유혹하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많은 말들의 해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두 5부에 걸쳐서 열 한 두개의 짧은 글들로 말이죠. 설명은 어렵지 않고 분량도 부담없기 때문에 가볍게 벗하실 수 있을 듯 합니다.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말들의 옥석을 가릴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어줄 것입니다.

 
  




 
 
 
마키아벨리 군주론 - 이탈리어 완역 결정판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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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키아벨리에게 끌린다는 것은 굶주렸다는 증거다.

 꿈꾸는 세상이 그다지 원대하지 않는데도 마음을 기대고 싶은 이상이 도무지 나아가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행보만 보여주기 때문이다. 급히 먹는 떡이 체한다지만 기다려도 너무 기다렸다. 보이는 세상이 미치도록 답답하여 화병으로 죽지 않으면 기다리다 굶어죽을 판이니 체증 따위가 뭐가 두렵단 말인가? 제발 한 발짝이라도 좋으니 뭔가 가시적인 결과 좀 보여줘. 그래야 내가 이 허기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참을 수 있지 않겠어? 군주론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마음이다. 그렇다고 군주론에 나오는 '군주는 빼앗은 땅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다면 이전 지배자의 친족을 남김없이 학살해야한다'는 말까지 동의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어쨌든 지독한 허기가 군주론으로 이끈다. 그런데 정작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쓰게 된 것도 그의 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공자와 비슷한 데가 있다. 공자처럼 그 역시 공명심이 강했고 공자가 유세했듯이 일선 정치의 무대에 서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공자와 마키아벨리, 둘 다 현실정치에 대한 지독한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바로 그 허기가 공자에겐 '논어'를, 마키아벨리에겐 '군주론'을 가져다 준 것이다. 하지만 나아간 곳은 달랐다.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비슷했다. 모두 혼돈의 도가니. 중국의 춘추전국으로, 이탈리아는 교황, 나폴리, 밀라노, 베네치아, 피란체 등의 5대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평안과는 거리가 먼 시절. 바깥을 둘러보면 지금만큼이나 갑갑증이 몸 가득 차오르던 시절이었다. 누구나 안정을 바라던 그 시대에 공자도, 마키아벨리도 어떻게 하면 안정을 얻을 수 있는가 생각했다. 비슷한 상황에 비슷한 고민이었으나 도출한 대안은 달랐다. 공자나 마키아벨리나 사람을 보는 시선을 같았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 사익추구의 경향을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공자는 칸트적인 데가 있었다. 자신의 이익만 우선하려는 경향을 막으려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했고 그러자면 무엇보다 그 누구의 이해로 기울지 않는 불편부당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칸트처럼 하나의 당위로써 중용적인 '인'을 가져왔다. 한 마디로 높은 이상을 통해 사익 추구의 경향을 '예'라는 틀로 스스로 억압하게 만들어서 한데 묶으려는 것이었다. 공자는 사람들이 그 정도는 알아들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똑똑하다면 무엇이 정말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 현명하게 선택할 테지. 공자는 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달랐다. 마키아벨리는 공자가 사람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보았다. 아무리 그렇게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자를 만나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바보야, 그래도 문제는 이익이야! 사람은 말이지, 죽는 것보다 자기 재산 뺏기는 것을 더 싫어한다고!"


'사람은 아버지의 원수보다 재산상의 손실을 더 오래 기억 한다'


 마키아벨리는 사람이 중심이었다. 그는 당위로는 절대 사람을 자신이 원하는 물가로 인도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당나귀를 끌고 가기 위해 당근을 눈앞에 보여주듯이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가 그 습성을 잘 이용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사람들을 그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깊이 헤아리는 것. 그것이 마키아벨리에겐 '현실'이란 것이었고 정치의 바탕이었다. 인사가 만사요, 사람에 대해 제대로 통찰하면 만사불여튼튼이었다. 군주론이 정치 논문(그는 '로마사 논고'에서 군주론을 논문이라 부른다.)임에도 한비자처럼 처세술의 용도로도 읽히는 것은 이런 관점 탓이다.


 허기는 자주 조급증을 낳는다. 그건 그대로 '군주론'에 영향을 미쳤다. 이것이 더욱 현실적이 된 것은 그의 조급증이 한몫했다. 그는 빠른 결과를 원했다. 사실 공직을 바라고 쓴 글이기도 해서 더 그랬다. 이상은 알콜 램프로 라면을 끓이는 것과 같았다. 그런 시간이라면 마키아벨리는 물론이고 군주론을 읽는(그가 염두에 두었던) 줄리아노 디 로렌초 데 메디치조차 하품할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수출해야 하는 품목에 대한 PT처럼 현실 가능한 것을 알기 쉽게 요점 정리해서 알려줘야 했다. '군주론'은 그런 스타일의 책이고 그에게 이것은 '단기 계획'이었다. 그는 늘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말했다. '군주론'은 대망의 목적을 위한 단기적인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가 바라는 대망의 진정한 모습은 '로마사 논고'에서 구체화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군주론을 읽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너무나 답보적인 보다 평등한 세상을 향한 이상들에게 조금이나마 숨통을 트여주려고 하는 것인데.(우리라고 한 것이 성급한 일반화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마음이 나 하나는 아니라는 바람으로 굳이 써 본다.)


 꼭 그런 세상이 오리라 믿는 우리가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 같아서 말이다. 점점 가빠져오는 호흡 때문에 아예 포기해버릴까 싶다가도 현실정치의 교본이라는 여기서 라면 행여 스포이트처럼 방울방울 떨어지더라도 그 물로 지독한 갈증을 조금이라도 달랠 것 같아서.


 어쨌거나 나는 그런 마음으로 읽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책이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술술 읽히니까. 이해하는 데 가장 적은 뇌세포와 시간을 요구하길래 읽었다. 솔직히 번역이 얼마나 정확하나 따위는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원래 번역에 까다로운 편도 아니고. 그저 원문의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술술 읽히는 번역이라면 '장땡'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허기는 해소할 수 있었냐고?


 하나는 얻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람을 너무 과대평가 하지 말라는 거.

 그러고 보니 재확인이다. 그렇지 않아도 허기는 깨닫게 한다. 사람은 결코 멀리 내다보지 않는다는 것을(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다. 알지만 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다. 뭐가 옳은 지는 알지만 내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안 한다는 뉘앙스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죽을 때까지 유세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는 옳은 걸 안다면 행동하리라 생각했지만 여보세요,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거든요.) 사람은 그만한 그릇이 못된다. 역사 속의 몇몇 영웅들 때문에 무량할 것 같지만 어불성설! 그러면 이런 분통터지는 세상이 되지 않았겠지.


 그러고 보니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이런 말을 하더라.


 군주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무릇 백성이란 다정하게 다독이거나 아니면 철저히 제압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사람은 작은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을 꾀하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보복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법이다. 부득불 백성에게 피해를 끼칠 경우 그들의 보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철저히 제압할 필요가 있다.(P. 74~75)


 지금 우리가 당하는 그대로가 아닌가. 습관처럼 해외 유람하시는 저 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하시는 분도 군주론은 읽었나보다.

 그러면 이런 말도 좀 새겨두실 것이지.


 공화국 체제 하에서는 군주국에 비해 더 큰 활력과 증오, 더 큰 복수심이 작동한다. 과거의 자유에 대한 기억으로 인해 결코 잠자코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P. 97)


 아니면 그 뒤의 말에 더 집중하기로 하셨나?


 가장 확실한 방안은 그런 체제를 말살하는 것이다.(P. 97)


 진짜라면 소름이 쫙!

 그러면 이런 말도 좀 읽었다면,


인간은 해롭게 생각된 사람으로부터 뜻밖의 은혜를 입으면 더욱 고마움을 느끼게 마련이다. 백성은 자신의 지지로 보위에 오른 군주보다 이런 군주에게 더 우호적이다. 군주는 다양한 방법으로 백성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다만 하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원칙은 군주는 늘 백성을 자기편으로 삼아두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경에 처했을때 속수무책의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P. 134)


 편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요. 절반이 아니라. 그것도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데.


 그러니 이런 말은 더욱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네요.


 군주는 앞서 언급한 선한 품성을 구비하지 못할지라도 마치 이를 구비한 것처럼 가장할 필요가 있다. 장담컨대 실제로 그런 뛰어난 품성을 구비해 행동으로 옮기면 군주에게 해롭지만 구비한 것처럼 가장하면 오히려 이롭다. 자비롭고, 신의 있고, 정직하고, 인정 많고, 신앙심이 깊은 것처럼 보일 필요가 있다. 실제로 그리하는 게 좋다.(P. 195)


 적어도 자기가 한 약속은 지키는 척이라도...


 그리고 이런 말도...


 군주가 증오의 대상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탐욕스럽게도 백성의 재산과 부녀자를 빼앗는데 있다. 대다수 백성은 군주가 그들의 재산과 명예를 훼손하지 않는 한 대략 자족하며 살아간다. 군주의 경계 대상은 소수의 야심 많은 귀족들이다.(P. 199)


 어쩌다 리뷰가 이렇게 되었나? 군주론의 말들이 너무나 현실적이라 나도 모르게 지금의 현실에다 이입해버렸나 보다. 냉정해질 수가 없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인데 그럴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좋은 리뷰 쓰는 것은 애당초 포기했다. 읽을 때부터 분통, 푸념, 넋두리의 짬뽕이 될 것을 알았다. 그런 시대니까. 제정신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시대니까. 그러니 이 리뷰로 군주론이 어떤지 가늠하려 하지 말라. 직접 읽고 스스로 군주론의 초상화를 그리는 게 좋겠다.


 부록으로 이탈리아의 역사, 군주론의 출현배경 및 그 용어 설명, 거기에 군주론과 관련한 서한을 비롯 마키아벨리의 삶과 사상 그리고 군주론의 인명사전까지 거의 책의 절반 가까운 분량을 차지하는 두툼한 부연 설명이 있으니 그게 이 글보다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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