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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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원래 추사 김정희를 잘 몰랐다.

 그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왔던 '세한도'를 그린 사람 정도만 알았다. 책은 '세한도'가 정말 걸작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어린 마음엔 솔직히 '내가 그려도 이것보다 잘 그리겠는데 이런 그림이 걸작이라고?'만 생각했다. 외워야 하니까 이름을 외웠을 뿐, 흥미도 관심도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추사의 위대함에 대해 제대로 알게되었던 건, 유홍준의 '완당 평전' 을 읽고나서였다. 아마도 최초로 추사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 아닐까 기억한다. 유홍준에게 추사란 삶에서 한 번은 꼭 정복해야할 산 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오로지 추사를 연구하기 위해 나이 40에 성균관대 박사 과정에 입학할 정도로 말이다. 그는 5년 간 박사 논문을 위해 열심히 추사를 연구했지만 유일하게 추사의 학문 세계를 밝힐 근거가 되는 '완당선생전집'의 부실 때문에 논문은 쓰지 못하고 그 연구의 결실은 '완당 평전'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이 책으로 나처럼 추사를 비로소 진정으로 만나게 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런저런 비판과 질정도 많이 받은 모양이다. 보다 완전한 추사에 대한 책을 위해 유홍준은 '완당 평전'을 시나브로 절판시켰다고 한다. 그러다 2017년. 칠순을 앞둔 작가는 다시금 추사란 산을 올라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미흡하기 때문에 절판시켜 버린 '완당 평전'을 2006년, 추사 서거 150주년을 맞아 공개된 무수한 새자료를 비롯 그동안 발굴하고 연구한 자료까지 포함시켜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완당 평전'을 고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후기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완당 평전'의 성격은 학술인 동시에 문학인데 지금 당장 보완하기 힘든 것은 학술의 문제이지 문학의 문제는 아니었다. 새로운 자료가 아무리 많아도 내가 그려낸 추사 김정희의 인간상과 작가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완당 평전'을 전기 문학으로 개고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예술가의 전기는 나의 학문적 과제였다.(...) 그 생각을 하면서 머리가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학술적 정확성을 위해서는 자료를 제시할 때마다 출처를 밝히고 고증해야 하지만 문학으로 임한다 생각하니 그런 주석과 고증은 오히려 독서를 방해하는 군더더기였다.(...) 그로인해 역시 추사의 학문과 예술은 논문 형태보다 전기로 기술되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p. 576)


 그렇게 하여 이번엔 전기의 형태로 다시금 추사의 생애가 우리 앞으로 찾아왔다. 그것이 바로 '추사 김정희'라는 책이다.



 유홍준에 의하면 추사의 일생은 보통 이렇게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1) 1786 ~ 1809년(1 ~ 24세) : 출생부터 연경에 다녀오기까지 청년 수업기

 2) 1809 ~ 19년(24 ~ 34세) : 대과에 합격하기까지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3) 1819 ~ 40년(34 ~ 55세) : 출세해서 관직에 있는 21년의 중년기

 4) 1840 ~ 49년(55 ~ 64세) : 8년 3개월간의 제주 유배기

 5) 1849 ~ 56년(64 ~ 71세) : 해배 후 서거까지 8년간의 만년기.


 책은 이 모든 시기를 시간 순서대로 담고 있고 그렇게 서장과 종장을 합하여 모두 12장에 걸쳐 추사의 삶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삶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고 살면서 안팎으로 이런저런 관계를 맺게 마련이다. 특히 상호 영향 관계가 두드러지는 학문과 예술은 더욱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추사의 삶이 그랬다. 그는 먼 청나라까지 정말 많은 교류를 폭넓게 했다. 그의 시야는 학문과 예술 모두에 걸쳐 결코 한정된 영역에 머무르지 않았다. 특히 금석학과 글씨에 대한 부분은 이러한 추사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자신만 옳다하지 않는 것, 이만큼이면 되었다 자부하지 않는 것,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더욱 타인의 것을 제 것처럼 살피며 공부하는 것. 어쩌면 바로 그러한 타자에의 열림이야말로 추사를 위대하게 만든 원천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더불어 하면서 함께 쌓인 것들이 추사의 삶 전체에 걸쳐 녹여져 있기 때문에 유홍준이 책의 마지막에 술회한 것처럼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란 정녕 산숭심해(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가 되는 것은 아닐지.


 사진은 청나라 유학자들이 '세한도'를 보고 찬()한 글로, '세한도' 뒤에 저렇게 길게 붙어 있다고 한다.

 국제교류가 얼마나 활발했는지 엿 볼 수 있는 단면이다.


 '완당 평전'과 비교하자면(정확한 비교를 위해 책을 찾았으나 내 집의 서림(書林)을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 없기에 할 수 없이 예전에 읽은 막연한 기억에 기대어 말해야 한다는 게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지만), 확실히 이 책이 추사의 삶을 더 일목요연하게 잘 보여준다. 전기라서 삶의 세세한 면모를 더욱 잘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서로 주고받은 서신이나 추사가 타인에게 하거나 타인이 추사에게 한 찬()이나 논()도 많이 인용되고 있기에 추사의 내면은 물론 객관적인 모습까지 조망할 수 있어서 더욱 그렇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이 책은 추사의 삶이 가진 모든 변곡점마다 그것이 어떤 상호 영향 관계로 이뤄졌는지 잘 나타내고 있기에 삶의 모든 굽이마다 추사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만큼은 확실히 알게 만든다. 때로는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너무 많은 자료 때문에 곤혹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달리 보면 그게 또 어떻게든 추사의 산을 넘어보려는 작가의 집념 혹은 추사에 대한 존경으로 되도록 왜곡이나 훼손 없이 추사의 삶을 온전히 보여주려는 노력 같아서 지루함을 느끼려는 머리를 스스로 채찍질하게 만든다. 과문한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지만, 어쨌든 내게만은 이 책은 '추사 김정희에 관한 집대성'으로 보인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책에 실린 풍부한 도판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엔 정말 많은 도판이 컬러로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추사가 평생 동안 심혈을 기울인 것이 금석학과 글씨인 것만큼 그 실체를 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에 이렇게 많은 사진 자료가 실린 것은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빠짐 없이 수록되어 있기에 추사의 학문과 예술이 삶 전체에 걸쳐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 여정을 시각적으로도 인지할 수 있다.


 이 책은 특히 잘 알려지지 않은 강상 시절의 추사를 볼 수 있어 좋았다.

 사진은 강상 시절에 쓴 추사의 걸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잔서완석루'이다.



 추사는 타고난 천재였지만 오늘의 그를 만든 것의 8할은 교류였다. 사람과 정파, 국적을 가리지 않은 많고도 다양한 사귐이 '추사'라는 '산숭심해'를 만든 것이었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으로 그 옛날의 추사처럼 교류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동북아 시대가 열리려는 지금, 이러한 추사의 삶은 특히나 시사하는 바가 많다. 추사 개인의 삶은 물론이고 은연 중에 오늘의 시대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 것까지 알려주는 이 책을 주저없이 추천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추사가 말년에 강조했던 허화로움과 고졸함의 가치가 한껏 드러난, 

과천 시절의 대표작이자 기념비적 명작인 '산해숭심, 유천희해'.

 '산해숭심'은 원래 옹방강이 실사구시 정신을 풀이한 말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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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3 22: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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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4 11: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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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의 종말 - 평균이라는 허상은 어떻게 교육을 속여왔나
토드 로즈 지음, 정미나 옮김, 이우일 감수 / 21세기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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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 혹은 신념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자제해 왔습니다. 어떤 조직에 들어가면 되도록 자신을 티내지 않고 두리뭉실 섞이는 게 가장 좋은 처세로 통하기도 했었죠. 그만큼 우리는 '평균', '평준화'를 하나의 이상처럼 생각해 온 듯 합니다. 부작용이 없진 않았습니다. 모난 돌을 내리치는 정처럼 평균에 속하지 않거나 모자라는 이들에게 그것은 '닮아야 한다', '속해야 한다'의 강요로 작용했습니다. '평균'이란 어디까지나 데이터 상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는 의미밖에 없었지만 때로는 그것만이 진리인 것처럼 타인을 멋대로 분류하며 압박한 것이죠. 그런 평균이 가진 진정한 의미에 대해 잘 알려주는 책을 만났습니다. 현재 하버드 교육대에서 개개인학 연구소를 맡아 이끌고 있는 '토드 로즈'의 '평균의 종말'이란 책입니다.






 토드 로즈는 '노르마'라는 한 여인 조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노르마는 부인과 의사인 로버트 L 디킨슨 박사가 조각가 아브람 벨스키와 합작해 만든 조각상으로 만 오천 명의 젊은 여성 신체 치수 자료를 수집하여 가장 평균의 신체 치수로 만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원래 그리스어인 이름의 뜻처럼 젊은 여성 신체 치수의 보편적 규범(norma)과 같은 존재였죠. 이 조각상을 전시한 클리블랜드 건강 박물관은 이 조각상의 모습을 미국의 젊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되어야 할 이상형으로 제시하고자 '노르마'와 가장 근접하는 신체 치수를 지닌 여성 찾기 대회를 열었습니다. 대회를 주관하는 자들은 그런 여성들이 많아 승부가 밀리미터 차원에서 아슬아슬하게 갈릴 것이라 내다 봤지만 천만의 말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뚜껑을 열어 본 결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참가자 3,864명 중에 평균치에 든 여성은 겨우 40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것도 전체 9개의 항목, 모두에서는 '노르마'가 가지고 있는 평균에 들어간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평균의 이상형이라는 '노르마'가 순전한 허상이었다는 게 밝혀진 것이죠.


 '평균의 종말'은 이 '노르마'가 여전히 우리 주위에 많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 자리잡은 '평균'과 '표준'이 어느새 만고의 진리가 되어 다양한 면모와 자질을 가진 개인들을 억압, 관리하고 공장에서 찍어낸 기성품처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직장에서 사람을 뽑을 때도, 아이들이 대학에 지원할 때도 이런 것들이 튀어나와 무지개 빛깔처럼 다양한 존재들을 오직 하나의 잣대만 가지고 일렬로 줄을 세웠습니다.


 토드 로즈는 이것이 왜 잘못된 일인지, 교육이나 성격 그리고 아이들 발달 상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진 최근 연구 결과들을 가지고 보여줍니다. 그리고 왜 우리가 쉽게 평균의 함정에 빠지는가도 설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개인이 가진 다양한 면모와 자질을 일일이 살피고 고려하자면 너무 귀찮으니까, 눈에 쉽게 드러나는 것으로만 파악해 얼른 끝내버리려는 '일차원적 사고' 때문이라고 말이죠. 그렇지만 지금 많은 학문 연구에서 드러나는 것은 개인이 '다차원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면모도 재능도 모두. 그러므로 하나의 잣대로는 결코 온전히 파악할 수 없으며 개인이 가진 들쭉날쭉한 측면들을 모두 고려하는 '들쭉날쭉 원칙'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차원적 사고는 우리 내면에 깊이 뿌리내린 본질주의적 사고 때문에 생겨납니다. 이런 본질주의적 사고는 종종 성격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얘기되던 것입니다. 흔히 사람의 성격을 외향성, 내향성으로 분류하잖아요? 그것이 바로 본질주의 사고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람의 성격을 이렇게 두 가지 중의 하나로 절대 규정될 수 없는데, 이런 것들이 통용되게 만드는 것이죠. 여기엔 사람이 타고난 성격, 그렇게 본질이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현재 성격의 연구들이 보여주는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람의 성격에는 고정된 것이 하나도 없으며 언제나 상황과 맥락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평균의 권위는 어디까지나 본질주의적 사고에서 생기는 것만큼 그런 본질주의적 사고가 현대 연구의 결과로 더이상 설 자리를 잃었다면 거기에 기반한 평균의 권위 또한 허물어지는 게 맞겠죠. 토드 로즈는 그런 사실을 자신의 경험까지 넣어가며 쉽고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후반은 특히 교육 부분에 집중되는데, 아이가 남과 달라서 고민이신 부모님들이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최근 교육부가 발표한 정시 확대를 두고 다시 한 번 정시와 수시의 비중에 대한 논쟁이 불붙었습니다. 짧은 머리로 어떻게 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선 말할 수 없으나 다만 이왕 이렇게 논쟁이 붙은 참에 누구를 붙이고 누구를 떨어뜨릴 것인가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아이들이 저마다 가진 성격과 재능이 온전히 존중되며 그것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평가 방법을 만들어 나가는 것에도 많은 생각이 모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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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의 종말 - 탐욕이 부른 국가 이기주의와 불신의 시대
스티븐 D. 킹 지음, 곽동훈 옮김 / 비즈니스맵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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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한국은행이 무려 6년 반만에 기준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리뷰가 작성된 시점이 금리 인상한 날이었습니다^^;)

 이는 양적 완화가 더이상 없을 것이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양적 완화'란 중앙 은행이 금리 인하로도 경기 부양이 안 될때 시장에 직접 개입하여 자본의 유동성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금리 인상이란 곧 양적 완화의 종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해가 거듭될수록 경제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인데도 국민들이 그것에 대해 어떤 제동 조치를 요구할 때마다 그것으로 이익을 보고 있는 자들이 그 목소리를 무마하기 위해 자주 이용하는 두 가지 이론이 있었다. 하나는 '낙수 효과'요, 다른 하나는 '양적 완화'였다. 낙수 효과는 경제 정책이 오로지 대기업과 가진 자들 위주로 펼쳐지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였다. 많이 가진 이들이 더 많이 벌면 넘쳐 흐른 물처럼 아래 사람들이 그 떡고물을 받아 먹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양적 완화'는 주로 불경기일 때 돈을 많이 풀면 모두의 주머니로 고루 들어가 쓸 돈이 생겨나니 경기가 살아난다는 논리로 돈을 마구 풀어 집값과 전셋값이 해마다 올라 주거 불안정으로 가뜩이나 심란한 판인데 물가마저 도무지 내려갈 줄 모르니 실질 임금이 자꾸만 하락하는 것으로 인한 대중의 불만을 누그려뜨리는 데 일조했다.

 

 낙수 효과는 거짓이었다는 게 애시당초 판명났지만, '양적완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들렸는데 이조차 거짓이었다는 걸 바로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금융 관련 저널리스트이자 현재 영국 하원 재무위원회 특별 자문이기도 한 스티븐 D 킹(호러 소설의 대가로 유명한 '스티븐 킹'과는 혼동하지 말자.)이 집필한 '세계화의 종말'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단언한다. '양적 완화라는 프로그램은 주식이나 국채, 회사채 등의 금융 자산 가치를 높이고 세계의 자산 귀족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설계된 것(p. 253)'이라고 말이다. 이 주장을 그동안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각국의 통화 정책과 국제 자본 흐름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예리하게 분석하면서 말하기에 설득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드디어 '양적 완화'를 거두겠다는 분명한 신호이기도 한 오늘의 금리 인상이 더욱 반가웠고 이 글 첫머리에 언급까지 하고 말았다. 그런 사정으로 이 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이런 통찰을 가져다 준 것에 대한 감사부터  먼저 표하고 싶다. 





 그래서 '세계화의 종말'은 과연 어떤 책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TPP(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 탈퇴와 영국의 유럽 연합 탈퇴인 '브렉시트'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한창 가속화되고 있는 '세계화' 붕괴의 현상을 상세하게 관찰하고 이것이 왜 일어났는지 또 이런 추세는 정녕 바람직한지를 과거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두루 고찰하여 상세하게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시사적인 문제들과 돌아가고 있는 경제 상황에 유독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책이 정말 유용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요즘 세계 문제는 광범위한 영역에서 다양한 동기와 분야로 펼쳐지기에 거기서 어떤 일관된 움직임을 간파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경제 분야도 마찬가지다. 한 나라의 경제가 전 세계 경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데다 워낙 자본의 국제적인 이동이 활발하고 무작위적이라 지극히 복잡하여 여기서도 내게 유용한 정보들을 찾아 취합한다는 게 절대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책은 마냥 엉킨 실타래와 같은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 상황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직접 경험한 것이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의 세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헤아려 다가올 미래를 제대로 대비하기 위함이다. 스티브 잡스가 그토록 강조했던 '인문학적 통찰'의 요지 또한 그것이 아니었던가? 미래에 대해 제대로 예측하고 올바르게 대처하려면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를 잘 헤아려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이 책이 그렇다. 그런 것을 가능케 한다. 그리하여 다가올 미래를 가늠하고 나름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만든다.


 어떻게 그렇게 만드냐고?

 워낙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라 자세하게 설명하기엔 이 한정된 지면으로 곤란하다. 그러므로 이 책이 독자들에게 주려는 기본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이 기본적 태도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어떤 이념이나 상황을 접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판단이나 행동에 있어서 바람직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태도란, 쉽게 풀이해 말하자면, 이면을 보려는 노력이다. 눈앞에 보이는 부분이 전부라 여기고 자기 생각으로 쉽게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 의심하고 조사하여 그것이 내 앞에 도래하게 된 과정이나 아래 놓여 있는 동기도 살펴 이면에 감춰진 내막도 헤아리려는 태도. 바로 그것이다. 앞에서 내가 낙수효과나 양적완화를 말했던 것도 이와 관련있다. 그 둘은 이면에 깃든 내막을 짚어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쉽사리 속아 넘어간 대표적인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정말 저자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 주려 한다.

 그러므로 제목인 '세계화의 종말'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이 책은 세계화가 종말로 치닫고 있는 상황을 거의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세밀하게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세계화'가 이제 쓸모없는 개념이 되었으니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이 책이 더욱 주력하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화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는 아니었다는 것, 다시 말해 이처럼 왜곡되고 본말이 전도된 세계화 관념을 우리의 뇌리에서 불식(拂拭)하고 보다 올바른 세계화의 관념을 심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우리의 시각 교정이다. 그는 이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이분법적 사고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에 대한 것도 그러하다. 그동안 우리는 '세계화'와 자국의 이익 보호를 위한 보호무역을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하나를 취하면 어느 하나는 버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세계화를 원하는 사람은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모든 조치에 대해 무작정 반대했고 국내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계화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모두 오직 한 쪽만 보고 생각했기에 나타난 결과였다.


 스티븐 D 킹은 그동안 인류 역사에 있었던 세계화 노력을 설명하면서 그 어떤 국면에서도 이면엔 전혀 다른 것이 존재했다는 것을 소상하게 보여준다. 특히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부분이 그러하다.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인한 전 세계적인 경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44년, 44개국이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튼우즈에 모였다. 이 회의 결과 전후 경제와 금융의 세계화를 위한 초석이 될 세 개의 제도가 탄생했다. 바로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그리고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이다. 이는 세계 경제의 일원화로 나아가는 커다란 발걸음이었으나 이를 주도했던 미국의 속셈은 사실 그것에 있지 않았다. 저자에 따르면 그 때 미국이 의욕적으로 브레튼우즈 체제를 만들려했던 이유는 단 하나 다시는 세계에 영국과 같은 제국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데 있었다. 다시 말해, 미국에 이익이 되지 않는 패권국가의 출현을 막으려는 자국 이기주의의 발로였다. 이처럼 세계화의 모든 국면엔 사실 국가 이기주의가 있었다.

 

 그것을 저자는 현재 세계화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인 '다보스 포럼'이 열리는 곳이 실은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유명한 소설 '마의 산'에 등장하는 다보스의 요양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면서 실은 '다보스 포럼'의 실체가 그 요양원의 다음과 같은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꼬집는다.


 그들은 온종일 먹고, 생각하고, 발코니에 앉아 휴식 치료를 하면서 동료 환자에게 욕정을 느끼고, 기막히게 얇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다른 폐병 환자의 성적인 장난 소리를 듣고, 가끔 흉부 엑스레이를 찍고 기흉에 걸린 허약한 폐로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고, 많은 경우 불가피하게도 마침내 죽음이 다가왔음을 실감한다.(p. 132)


 '세계화'나 '다보스 포럼'이나 모두 우리는 하나라고 소리치며 저마다 이타주의적으로 행동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내면엔 이런 개인주의와 이기적인 면모만 가득했던 것이다.


 이것은 현재도 이뤄지는 공정 무역이라는 미명 하에 강대국이 약소국에 가하는 경제 개방 압력에서도 허다하게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장하준 교수가 '사다리 걷어차기'란 책에서 잘 설명했듯이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강대국이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은 사실 개방을 거부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온갖 정책적인 조치를 취한 데 있었다. 수입품에 많은 관세를 매기는 굳건한 보호무역주의와 외국과의 경쟁에 뒤처진 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 등 그런 정책들이 오늘의 강대국을 만든 것이었다. 때문에 강대국들은 자기가 경험한 바 약소국들이 어떻게 해야 부강해지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약소국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자신에게 결코 이로울 게 없다. 완전히 개방시키는 것이 자신에게 더 이롭다. 더 많은 자본과 권력 그리고 발달된 기술을 가진 강대국이 약소국과의 경쟁에 있어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강대국이 공정한 무역을 해야 한다면서 약소국이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는 것은 한 마디로 강대국이 이익을 획득하는데 장애가 되는 방해물들을 스스로 제거하라는 요구에 불과하다. 그들이 말한 공정의 진짜 의미는 불공정이었고 그들이 말한 '세계화'란 자기보다 약한 국가가 거기에 속아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모든 노력들을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교묘한 거짓말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그래프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50년부터 2000년까지 전 세계 지니계수를 측정한 그래프다. 지니계수는 소득 불평등을 나타내며 클수록 불평등 정도가 높다. 세계화는 8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심화할수록 세계적인 불평등 정도도 더 심해졌다는 게 그래프로 분명히 확인된다. 세계화는 그것을 찬양하는 사람이 주장하듯 평평하지 못한 운동장을 평평한 곳으로 만드는 게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욱 기울게 했을 뿐이다.


 이렇게 모든 '세계화'의 발자취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의 노래'가 은밀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여기서 굳이 신화적 존재를 언급하는 것은 저자 자신이 국가의 이익을 신화와 역사의 재해석이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화와 역사는 하나의 의미로 해석되지 않으며 설령 그것이 된다고 한들 항구하지도 않는다. 시대가 변하면 신화와 역사의 해석도 달라진다. 그러니 이것이 진리다 하고 내세우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사실을 말하자면, 세상에는 영원한 '국제 공동체' 같은 건 없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들은 불확실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운 이 세상에서 자기 이익대로 행동하며, 일시적인 동맹을 맺고 몇 주나 몇 달, 몇 년, 때로는 몇십 년까지도 유지하지만, 동맹이란 언젠가는 깨지기 마련이다. 한편, 각 나라의 이익을 규정하는 것은 그 나라의 신화와 역사이며, 또한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신화와 역사의 재해석이다. 20세기가 막 시작될 때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대영 제국은 경이와 자부심의 원천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21세기가 시작될 때 영국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대영 제국은 부끄러움의 원천에 가깝다.(p. 146)


 그건 곧 세이렌의 노래에 현혹되는 것과 같다. 그 노래에 무작정 도취되면 남아 있는 것은 죽음 뿐이다. '세계화'나 '이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눈 앞의 친절한 미소와 들리는 허황된 말만 믿고 무턱대고 뛰어들면 자신을 기다리는 건 끝내 파멸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저자가 국가 이익마저 실은 신화와 역사의 해석에 불과하다며 누군가의 해석을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말고 언제나 그 이면을 살피고 헤아리려 노력하라고 독자에게 누누이 권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낱낱이 파헤쳐서 길어낸 소중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훈은 작가가 서문에 제시한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고 싶은 여섯 개의 명제에도 깃들어 있다.


첫째, 지금까지 주류 경제학은 경제적인 진보로 국경이 없어지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세계화는 얼마든지 반대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둘째, 세계화를 증진시킨다고 믿었던 과학 기술이 오히려 세계화를 파괴할 수도 있다.

셋째, 경제 성장이 국가 간 불평등을 감소시키는 반면 국가 내 불평등을 증폭시키는 현상은 한 국가가 국제적 생활 수준에 비추어 부유하게 되고자 하는 욕망과 국내의 사회, 경제적 안정 추구 사이의 긴장 또한 필연적으로 고조시킨다.

넷째, 21세기의 거대한 이민 물결이 국내 안정을 해칠 수 있다.

다섯째, 세계화 진전에 기여했던 국제 기구들이 신뢰를 잃어간다. 

여섯째, 세계화엔 한가지 버전만 있는 게 아니다. 냉전 시대가 두 열강이 경쟁하는 시대였다면 21세기는 19세기 제국주의 경쟁 때처럼 다수 열강이 경쟁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p. 12 ~ 13에 나온 것을 개인적으로 정리함.)


 여기서 우리는 이 명제들이 무언가에 대한 반대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 명제들이 반대하는 것은 사실 지금까지 세계화를 긍정하고 그 추세가 더욱 심화할 것이라 주장했던 자들이 제시했던 근거들이다. 그렇게 그들은 국가들이 세계화를 통해 더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국경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라 생각했고 그런 세계화 흐름을 과학기술이 통신과 고통을 한껏 발달시켜 가속할 것이라 내다 보았으며 국제적으로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히 국내의 불평등도 해소될 거라며 세계화를 찬양하기 바빴다. 또한, 거센 이민의 물결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한없이 유동적인 것으로 만들어 새뮤얼 헌팅턴이 예언했던 '문명의 충돌'을 조소 거리로 만들 것이라 여겼고 앞으로는 국제기구가 국가보다 더 강한 힘을 가져서 열강들이 과거처럼 약소국에 큰소리를 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잘 보여주듯 이 모든 것은 현재 하나도 들어맞고 있지 않다.


 그런데 저자가 단순히 그 지지와 근거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핵심 명제들을 만들었다고 보이진 않는다. 여기엔 그보다 훨씬 깊은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해 저자가 자신의 핵심 명제를 굳이 세계화와 그 심화의 근거들에 대한 반박으로 형성한 것은 그 자체로 '모든 것은 양면을 가지고 있으니 그 이면까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이면을 헤아릴 때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 얼마나 달리 해석되는 지는 이 책 곳곳에서 목격하게 되지만 특별히 3부, '21세기의 도전'이 압권이라고 생각된다. 거기서 세계화를 더욱 진전시킬 것이라 여겨졌던, 이민과 테크놀로지 그리고 돈이 실은 거꾸로 점점 더 강하게 세계화를 파괴시킬 것이라는 걸 참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앞에 보는 것을 단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여기저기서 우리를 현혹하고 판단을 착란하게 만드는 가짜 뉴스와 정보들이 횡행하는 요즘엔 더욱 그렇고 말이다.


 물론 이 책이 당부하는 세계화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그대로 그 반대에 있는 국가의 이기주의적 면모를 대할 때도 당연히 가져야 하는 태도다.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섣불리 응원 또는 비난을 하기 전에 그 근저에 가로 놓여 있는 동기와 목적은 무엇이며 또 그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 구체적 모습을 이루었는지 부터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선동으로 장차 어떠한 위험을 초래할지도 모르고 무작정 '브렉시트'를 찬성한 영국 민중처럼 나중에 더 뼈아픈 후회를 남길테니까 말이다.


 금융 위기를 거치면서 정책 결정자들은 돈이 한 나라의 경제적 부담을 다른 나라로 떠넘길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짓을 자꾸 할수록 세상은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분열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승자 독식의 양상을 더욱 인식할수록 점점 더 세계화를 뒤로 돌리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p. 258)


 세계화이든,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든, 어느 것을 대하더라도 섣부른 예단으로 낙관이나 비관을 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이 가지고 있는 한계에 쉽게 굴하지 않고 그나마 잔존하는 긍정적인 가능성을 활용하여 최대한 바람직한 대안을 찾거나 만들어가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가 '세계화의 종말'을 쓴 궁극적인 동기도 바로 그런 사유와 실천의 움직임에 대한 희구에서 나왔을 것이다. 미래란 저절로 떨어지는 감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형성하고 있는 것에서 발아되고 결국 그것이 모이고 쌓여 구현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오늘의 현명한 생각과 행동이 현명한 미래를 낳는다. 분명 '세계화의 종말'은 그런 미래를 출산하는데 좋은 산파가 되어줄 것이다.


 어떤 이에게 공정이 다른 이에겐 불공정이었듯, 누군가에게 종말도 또 다른 누군가에겐 시작일 것이다. 다가올 세상이 부디 많은 이들에게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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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이야기 11 - 초한쟁패, 엇갈린 영웅의 꿈 춘추전국이야기 11
공원국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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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다닐 때, 중국 역사 강의를 들었다. 그 때 교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게 기억난다. 춘추 전국 시대에 활동했던 사람들의 삶을 잘 살피면 앞으로 살아가는 데 많이 도움이 될 거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춘추 전국 시대가 두 가지 점에서 오늘날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저마다 생존과 정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무한 경쟁 시대라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타고난 태생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능력이 모든 것을 좌우했던 시대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춘추 전국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의 면면을 잘 살피고 헤아리면 분명 그와 비슷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꽤 많은 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당시 나는 춘추 전국 시대를 그저 공자가 유세를 하던 때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의 그런 말씀은 꽤나 흥미로웠고 그 때부터 춘추 전국 시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찾기란 어려웠다. 교수님은 사마천의 '사기'를 훌륭한 텍스트로 추천해 주셨지만 '사기'를 읽어본 분은 아시겠지만, 특히 열전은 인물 별로 나열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지라 얼른 명쾌하게 정리하기가 다소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춘추 전국 시대를 자세히 들여다 보고 싶은 바람은 못 다 이룬 꿈으로만 남았다. 그러다 사는 게 바빠 그 미련조차 깡그리 잊고 있을 무렵, 불현듯 인터넷 서점 광고로 한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공원국 작가 '춘추 전국 이야기'였다. 



 제목을 보자마자 예전의 열망이 삽시간에 환기되면서 그 책을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요모조모 살펴보니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갔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집필한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내가 찾고 있었던 바로 그 책이었다. 2010년에 첫 선을 보인 이 책은 시리즈로 계속 나오다 어느덧 8년의 세월이 흘러 드디어 올해 11권으로 대단원의 막까지 내린 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어떻게 이 책의 존재를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가진 바람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던 관심을 타박하면서 난 얼른 이 책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 읽은 책은 11권, 그러니까 마지막 권이다. 부제는 '초한쟁패'로 진이 망할 무렵에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중국의 패자를 두고 자웅을 겨루었던 때를 담고 있다. 나는 '초한지'를 언젠가 꼭 한 번 읽어봐야지 마음 먹고 있을 정도로 항우와 유방에게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목구멍 아니 호기심이 포도청이라 이 책부터 만나기로 했다. 


 사실 11권이 담고 있는 시간은 엄밀히 말해 '춘추 전국'이 아니다. 춘추 전국 시대는 진나라의 통일로 끝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 역사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대해 의아하게 여길 수도 있으리라. 저자도 그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던 듯 하다. 책 머리에 왜 이 책을 써야만 했는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원래는 진나라의 통일로 춘추 전국 이야기가 끝났어야 하지만 굳이 이처럼 한 권의 책을 더 더하면서 그것도 진나라가 갈가리 쪼개지고 유방에 의해 다시 한으로 통일되는 시대의 이야기를 하게 된 연유엔 사실 한 인물이 있었다. 첫 권의 주인공인 관중에 필적할만한 인물이 이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하는데, 작가는 그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아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인물이야 말로 자신이 왜 춘추 전국 이야기를 썼는지, 그 주제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춘추 전국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보이고 싶었던 이상적인 군주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고 그가 세운 나라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그나마 가장 바람직한 체제의 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야 그는 꼭 그 이야기를 하여야만 하였다. 그 인물이 바로 유방이다. 본디 결말이란 작가의 주제가 한껏 드러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권에서 이렇게 유방과 한 나라를 통하여 8년 간 계속해온 춘추 전국 이야기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는지 전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라 할만 하며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가진 영웅과 체제 그리고 역사에 대한 시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사마천의 '사기'와 함께 보면 더 좋을 것 같아 찍어 본 사진입니다.

 '춘추전국이야기'를 읽고 '사기'를 읽었는데 '사기'의 내용을 훨씬 더 쉽고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책은 진시황의 둘째 아들 2세가 이사와 조고의 음모로 장자인 형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진나라 말기의 시간으로 시작의 문을 연다. 나라는 하늘이 정해주지 않은 자가 간사한 무리의 협잡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인지 국운은 쇠퇴하여 당장 내일 멸망한다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되어 있다. 무릇 나라가 이렇게 되는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사해서 따지고 보면 결국 그 자리에 있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 온갖 간사한 꾀와 아첨하는 세치 혀로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조고가 그랬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왕위의 정당한 후계자를 죽음으로 몰았으며 덜 떨어지고 조고만큼 자기밖에 모르는 2세를 왕위에 앉혔다. 위가 그러니 아래 또한 어떻게 바르겠는가? 똥에 똥파리가 꼬이듯 대저 꾀와 아첨으로 흥한 자 곁에는 그와 비슷한 무리가 모이게 마련이다. '회남자'에게 이르기를 나라가 망하기 가장 손쉬운 길은 상 받을 자가 벌을 받고 벌 받을 자가 상을 받으면 된다고 했는데, 이 때의 진나라가 그와 같았다. 이러한 나라는 백성의 신뢰를 금방 잃게 되니 곧 진승과 오광 같은 자들이 나왔다.


 진승과 오광. 그들은 정말 가진 것 하나 없는 무지렁이 백성이었다. 죄마저 지어 진나라 수도로 압송되어 가던 도중, 진승과 오광은 어차피 죽을 거 이름이나 남겨 보자면서 사람을 모아 난을 일으켰다.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자가 아무런 준비 없이 일으킨 봉기 임에도 불구하고 삽시간에 많은 사람이 호응하여 그 아래로 모인 것을 보면 나라가 백성에게 얼마나 신망을 잃었는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진승이 사람을 불러 모은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이 말을 우리들 대부분은 국사 교과서를 통해 고려시대 노비 만적이 난을 일으키며 했던 것으로 알고 있을 테지만 실은 그 말의 원래 저작권은 진승의 것이었다. 진승의 난은 결국 성공하여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진에게 커다란 위기를 안긴다. 그러나 옛 초나라 사람들이 진승을 왕으로 추대하자 그는 그만 안주하고 더이상 전쟁 선봉에 나서지 않는다. 저자는 그것을 진승의 대단한 패착으로 평가한다. 신념이 아니라 더이상 이대로 못살겠다고 일어난 난이요 사람들이 모인 이상 그 마음이 변질되지 않고 바라는 세상이 올 때까지 지속되기 위해선 흔들리지 않게 잡아줄 구심점이 필요한데 그래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의 불씨가 되어준 진승은 전장의 선봉이 되어야 했다. 사람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따를 수 있도록. 하지만 큰 눈으로 천하를 도모하기 보다 자기 잇속에 빠져버렸고 그 때문에 모처럼 평범한 백성에 의해 타올랐던 혁명의 불길 또한 중원 모두를 불태우진 못했다. 진승이 자기 잇속만 챙기자 그를 따르던 이들 역시 진승의 명을 받아 정벌하러 나갔던 무신이 진여와 장의의 간계로 진승의 명을 어기고 조나라 왕이 되었듯 자기 잇속만 챙겼던 것이다.


 이는 큰일을 도모할 때 자신이 언제 나아가고 언제 물러가야 하는지에 대한 소중한 교훈이 된다. 항우와 유방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항우와 유방은 진승과 달리 자신의 전쟁에서 항상 선봉에 섰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잘 알듯, 항우는 졌고 유방은 이겼다. 전쟁에서 승패란 모두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지만, 그래도 궁금증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과연 무엇이 승패를 갈랐던 것일까? 항우와 유방은 태생부터 많이 달랐다. 쉽게 말해 항우는 고귀한 신분에 기골 장대한 육체하며 많은 것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유방은 미천한 신분에 가진 것도 거의 없었다. 항우는 일찌기 장수로 이름을 날렸지만 유방은 건달로 지내다가 겨우 말석의 벼슬 하나 얻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천하는 끝내 유방의 차지가 되었으니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항우는 결코 하지 못했던 보다 더 큰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기 것을 희생하는 마음가짐이었다. 항우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오만했고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인정하지 않았던 반면, 유방은 늘 자신의 장점 보다 결점을 더 많이 생각했고 사람에 대해 항상 겸손하게 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것은 챙기려 하지 않았고 언제나 득실을 따져야 할 때마다 이해 관계 보다 대의를 중시했다. 결국 나 보다 더 큰 것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유방으로 하여금 천하를 손에 쥐게 했던 것이다.


 이는 진나라의 재상 이사를 봐도 알 수 있다. 이사는 진시황을 도와 춘추 전국을 끝내고 통일한 뛰어난 재상이다. 원래 그는 장량만큼 현명한 책사였지만 진나라가 통일하고 높은 벼슬 자리에 오르자 그만 거기에 깊이 안주한 나머지 조고의 세치 혀에 어리석게 놀아나 결국 진나라도 패망하고 자신과 가문 또한 멸문 당하게 만든다. 진승도 그랬고, 항우도 그랬듯 모두 자신이라는 따스한 이불속을 절대 벗어나려 하지 않은 결과였다.


 오로지 유방만이 유일하게 이불 속을 박차고 뛰쳐 나갔다. 그래서 비록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세상이라 하여도 더 가까이 보듬어 안으려 노력했다. 궁극적으로 그런 자세가 유방을 천하의 제왕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지략과 무예 모두 유방을 월등하게 앞섰지만 결국 유방에게 배신당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한신 또한 이불 속이 주는 온기에 취해버린 자였다. 그만한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헛되이 삶을 잃어버리고 만 것은 괴철의 충고를 깊이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철은 그런 일이 있기 훨씬 전에 한신에게 '토사구팽'을 이야기 하며 너무 뛰어난 사람은 바로 그 뛰어남이 군주에게 위험이 되어 시대가 평안하게 되면 살아남지 못하게 되니 지금 한신의 나라로 항우와 유방과 더불어 천하를 삼분하는 쪽으로 나아가라고 권했지만 새겨듣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과 현재 상황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모험 보다 안주의 길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보자면 결국 자신을 얼마나 던질 수 있느냐가 승패를 좌우하는 것 같다.

 '11권'의 역사는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신을 내려놓고 더 멀리 볼 수록 승리의 여신에게 안길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아마도 이런 유방의 면모가 저자로 하여금 유방을 관중과 같은 뛰어난 존재로 평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진과 한의 싸움은 인간의 복합성을 재정의 하는 싸움이었고 한과 초의 씨움은 제왕이 되고자 하는 이와 패자로 만족하고자 하는 이의 싸움이었다.(p. 16)


 '춘추 전국 이야기'의 마지막 권은 역사란 궁극적으로 자신을 얼마나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잘 알려주는 책이었다.

 아무리 커다란 나라를 다스리고 또 아무리 천하의 대권을 두고 다퉈도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늘 일상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을 대할 때 취하는 태도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보다 큰 것을 위해 자신을 얼마나 잘 통제할 수 있느냐가 성공 여부를 좌우했던 것이다. 나의 것을 많이 내려놓고 더 많은 사람과 더 큰 세계를 품에 안을수록 성공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것은 마치 손을 쥐고 펴는 것과 같았다. 내 것을 지키려 움켜쥐는 손은 주먹 안의 협소한 공간밖에 가지지 못하지만 내주려 손을 활짝 벌리면 하늘 전체를 받칠 수 있듯이 말이다. 이제야 왜 대학 교수님이 오늘을 살아가는데 정말 필요한 지혜는 춘추 전국 시대에서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지 잘 알겠다. 앞에 한 말을 그냥 들었다면 난 전혀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승과 항우, 이사와 한신 그리고 유방의 구체적 삶을 통해 여실히 느끼고 나니 마음에 깊이 와 닿지 않을 수 없다. 유방은 큰일을 본격적으로 도모하기 직전 도망자의 몸이 된 적이 있는데 그 때 자신의 길을 가로막은 뱀을 칼로 베어버렸다고 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장차 그가 진을 멸망시킬 계시라 여겼으나 지금 드는 생각으론 유방이 베었던 뱀은 바로 자신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욕망, 이해 관계, 이기심 같은 것들. 진승과 항우 그리고 이사와 한신을 보니 결국 자신의 길을 가로 막았던 뱀은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말이다. 내게도 그런 뱀이 있다. 지금까진 그 뱀을 못 본척 하고 비켜가거나 살살 달래기만 했는데 유방의 이야기를 한껏 겪은 지금 이제는 베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미루는 것도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것 역시 책을 통해 똑똑히 보았으니.


 무협지를 읽는 것만큼 재밌고 흥미진진한 역사서였다. 그러나 항우와 유방이 활약했던 시대보다 더 많은 알게 된 건 바로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역사가 무엇보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에 대한 답을 알고 싶다면 '춘추 전국 이야기'를 벗해보시라 권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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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1-28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타고난 태생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이 모든 걸 좌우하던 시대˝가 잠깐 왔다가 끝나버려서 춘추전국시대가 난감해졌겠어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헤르메스 2017-11-28 17:56   좋아요 1 | URL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도 한나라까지는 이어졌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으셨을지도 모르겠네요^^
끝나도 아예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어떤 시대든 좋은 것들은 자취를 남겨 뒤에 오는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는 것 같습니다. 길이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걸어갔기에 길이 되었다는 루쉰의 말처럼.^^

양철나무꾼 2017-11-28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11권까지 다 구해놓고는,
지금 앞부분 어디에서 잠깐 멈춤입니다.
제가 이쪽에 대해서 지식이 워낙 얄팍하다보니,
군데 군데 숨은 복병처럼 막혀버립니다.

일단 팟캐스트 방송 들으며 워밍업하고,
다시 내달려야 겠습니다.^^

저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헤르메스 2017-11-28 18:00   좋아요 0 | URL
앗! 양철나무꾼님 너무 반갑습니다. 말씀도 감사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막혀버리는 게 양철나무꾼님의 지식이 아니라 문장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제게도 좀 편한 문장들은 아니었거든요. 어쨌든 이렇게 말씀 남겨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기쁘네요. 양철나무꾼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합니다^^
 
침팬지와의 대화
로저 파우츠. 스티븐 투겔 밀스 지음, 허진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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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래된 질문입니다. 쌓여 있는 시간만큼 많은 대답이 존재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것은 도구였습니다.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하여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죠. 경험칙상 맞기도 했습니다.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은 없었으니까요. 이것은 1960년대 제인 구달이 아프리카에서 침팬지가 인간과 똑같이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함에 따라 비로소 깨어졌습니다. 그러자 다른 하나가 나왔습니다. 바로 '언어'입니다. 동물은 말할 수 없고 말도 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오래지 않아 깨어졌습니다. 오래도록 침팬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관찰한 로저 파우츠가 '워쇼'라는 침팬지를 통해 침팬지가 수화를 통해 언어를 배우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입니다.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가장 강력한 선 하나가 이렇게 하여 사라졌습니다. 이제 인간은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라 연속 상의 한 존재라는 게 밝혀진 것입니다. 이번에 나온 로저 파우츠의 '침팬지와의 대화'는 바로 그것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원래는 아동 심리학을 전공하려 했던 로저 파우츠가 어쩌다 '워쇼'를 통해 동물 행동학에 뛰어들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워쇼와 다른 침팬지를 통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워쇼는 동물이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세상, 또 그러한 생각과 감정을 통해 소통할 수 있는 세상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 놀라운 여행에서 나는 다른 침팬지도 수십 마리 만났는데, 다들 워쇼만큼이나 개성 있고 표현을 잘했다. 결국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훨씬 더 많이 배우게 되엇다. 인간 지성의 본질, 인간 언어의 근원에 대해서, 또 우리가 어디까지 연민을 느끼는지, 우리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p. 17)


 진실로 이 책은 그가 워쇼와 다른 침팬지를 통해 배웠다고 고백했던 것들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하게 알려줍니다.

 그렇게 우리는 워쇼와 함께 한 로저 파우츠의 기록을 따라서 당시까지만 해도 지성계를 지배하고 있었던 스키너의 '동물의 행동이란 그저 자연 조건에 따라 형성된 것 뿐이다'라는 <조작 형성 이론>과 노엄 촘스키의 '인간의 언어 습득은 뇌 어딘가에 언어 통사론 규칙이 코딩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보편 문법 이론>이 어떻게 차레대로 오류로 드러나는가와 이러한 침팬지의 수화 학습 능력이 자폐아와의 소통과 치료에도 응용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과학계에 널리 퍼져 있는 인류 공영을 위해서라면 동물을 기꺼이 실험의 희생자로 삼을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로저 파우츠가 워쇼와 함께 했던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있기에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인류와 가장 가까운 혈족인 침팬지에게 그동안 과학과 인류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인간들이 저지른 죄악들을 보며 그런 인간의 하나로서 참회하기도 했습니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침팬지에겐 달갑지 않은 운명이 닥쳐왔습니다. 미국이 우주 비행을 소련과 경쟁하던 무렵에는 아프리카에서 포획된 60마리 이상의 침팬지가 비행 훈련을 받았습니다. 작은 종 모양의 캡슐을 타고 우주로 돌진할 경우 어떤 위험이 있을지 아직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기에 인간 대신 침팬지를 보내 알아보려는 속셈으로 말이죠. 네, 침팬지는 옛날에 흔히 광산에서 갱도에 혹시 유독 가스가 나오지 않을까 알기 위하여 유독 가스를 맡으면 바로 죽기 때문에 가져갔던 카나리아와 똑같았습니다. 그런 침팬지를 스키너의 조작 형성 이론에 따라 시키는 대로 하면 바나나가 나오는 보상을 주면서 열심히 훈련 시켰지만 최초로 궤도에 진입하여 지구를 돌았던 침팬지 <에노스>는 기계 고장으로 제대로 조작 했는데도 바나나가 나오기는 커녕 전기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버튼을 잘 눌러서 결국 로켓 결함에도 불구하고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스키너의 이론에 보기좋게 엿을 먹였습니다. 동물이 단순히 조건 반사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에노스>는 비행 1년 후, 비행에 따른 후유증 때문이었을까요? 이질로 죽고맙니다.


 소련과의 우주 경쟁이 끝난 뒤에도 침팬지에게 안식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인간과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침팬지는 인간을 대신하여 다양한 실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죠. 특히 의학 실험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위해 엄마 품에서 강제로 떼어내 연구소로 운반되는 어린 침팬지들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침팬지도 인간만큼 모성이 강한 존재라 그렇게 아이를 잃어버리면 커다란 상처를 받습니다. 그건 강제로 어미와 헤어진 어린 침팬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AIDS가 본격적으로 알려졌던 80년대엔, 인간처럼 감염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침팬지가 치료제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AIDS 바이러스를 투여 받았고 그것으로 죽어갔습니다. 정말 인간의 침팬지에 대한 잔혹한 만행이 끝도 없습니다. 워쇼도 그렇게 실험을 위해 끌려온 침팬지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의학 실험체로 쓰이기 전에 앨런과 비어트리스 가드너 박사 부부가 자신의 연구를 위해 가져옵니다. 원래는 캐시란 이름이었는데 가드너 부부는 연구에 쓸 동물에게 사람 이름을 붙이는 건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여 거리 이름인 '워쇼'를 붙여줍니다. 그만큼 그들에게 워쇼는 그저 동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워쇼'에게 플라톤과 데카르트를 거쳐 오래도록 서양 문명에 굳건히 자리잡아온 '인간 중심주의'를 붕괴시킬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으리라곤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이 바로 로저 파우츠였습니다.

 워쇼가 수화를 통해 사람과 소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말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전공과 꿈마저 바꿔버렸습니다. 그러나 워쇼가 열어 준 길은 그에게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 길은 학계의 주류와 정면으로 싸워야 하는 길이기도 했으니까요. 특히 노엄 촘스키의 <보편 문법 이론>이 그랬습니다. 언어 통사 문법 자체가 인간의 뇌 어딘가에 코딩되어 있다는 그 이론은 언어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며 그런 해부학적 구조를 가지지 못한 동물은 언어를 가질 수 없다고 아예 배제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워쇼는 언어란 모방과 학습을 통해 얼마든지 습득할 수 있으며 창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렇게 언어 또한 해부학적 구조가 아니라 소통을 위한 몸짓의 발전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로저 파우츠는 자신이 워쇼에게 본 것을 믿고 저널에 발표했고 제인 구달의 도움까지 받아 노엄 촘스키 이론에 짙게 투영된 인간 중심주의를 허물어갔습니다. 당시 유명한 동물 행동학자이던 롬 하레도 원래는 촘스키 이론을 지지했는데 어느 날 워쇼가 잡지를 보며 수화로 혼잣말 하는 것을 보고는 놀라며 바로 그 입장을 철회해 버렸습니다. 워쇼가 로저 파우츠에게 심어준 신념은 침팬지와의 소통이 자폐아와의 소통에도 그대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한층 더 확고해졌습니다.



 사진은 제인구달과 함께 있는 로저 파우츠의 모습. 안고 있는 침팬지는 '타투'로 가드너 부부가 지원금이 끊어지자 더 이상 키우지 않고 동물원에 넘기려고 하는 걸 로저 파우츠가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맡아 키웠습니다. '타투'는 꽤 얌전한 성격으로 별로 말썽을 부리지 않았으며 자기가 갖고 논 장난감은 항상 제자리에 정리했다고 합니다.


 그가 계속해 온 워쇼와의 대화는 외부만 무너뜨린 게 아니었습니다.

 로저 파우츠 자신도 많이 변하게 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동물의 권리에 대해 생각하게 한 것입니다. 워쇼를 비롯한 많은 침팬지들이 보여준 인간적인 면모는 로저 파우츠로 하여금 인간과 동물을 그리 다르지 않은 존재로 보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인간>이란 <존재>의 한 형태일 뿐임을, 나에게 나의 본질은 인간이 아니라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은 워쇼였다. 세상에 인간이라는 존재, 침팬지라는 존재, 고양이라는 존재가 있다. 나는 한 때 그러한 존재들 사이에 그었던 선 - 어떤 종은 가두고 어떤 종에게는 실험을 하도록 허락하는 선 - 을 더 이상 도덕적으로 옹호할 수 없었다.(p. 404 ~ 5)


 하여, 로저 파우츠는 제인 구달과 함께 적어도 침팬지만큼은 실험하지 않도록 하는 규약을 마련하려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류를 위해 동물을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다고 믿는 주류 과학계는 오히려 로저와 제인을 비합리적이라 비난하고 결국 규약 정립은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이런 과학자들의 편협과 냉담을 경험했으니, 로저 파우츠가 책에 이렇게 쓰고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우리는 과학이 항상 객관적 지식을 고결하게 추구하면서 진실을 향해 전진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과학자는 자기 시대의 편견을 체화한다. 그리고 과학자는 무지를 지식인 척 포장할 수 있고 그들이 주장하는 <사실>이 윤리적 경계를 세우고 뒷받침하는 데 쓰일 수 있기 때문에 편협한 일반인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불행히도 역사가 증명하듯 무지와 오만이 결합하면 해당 문화의 윤리적 우주 바깥의 존재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다.(p. 452)

 

 그러므로 우리는 로저 파우츠가 했던 다음과 같은 질문을 아무래도 숙고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인간의 고통이 침팬지의 고통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까? 인간의 생명이 왜 침팬지의 생명보다 더 소중할까? 우리는 윤리적 원칙이 아니라 기껏해야 노골적인 자기 이익 때문에 침팬지를 대상으로 실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내가 이웃의 심장을 꺼내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웃과 나는 다르지만 무척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가 나의 직계 가족은 아니지만 우리는 공동의 선조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사촌이다. 내가 우리 사이에 긋는 유전적 경계는 임의적이며, 나는 이웃을 죽여서 내 아이를 살리고 싶다는 자연적인 생각을 꺽어야 한다.(...) 진화론적으로 보면 침팬지의 심장을 꺼내는 것은 옆집으로 걸어 들어가서 이웃의 심장을 꺼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침팬지가 내 딸만큼 나와 가깝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고통의 조상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침팬지는 내 이웃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촌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원칙을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에게만 적용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개와도 공동의 선조를 가지고 있다. 개들에게까지 권리를 확장해야할까? 쥐는 어떨까? 어디서 멈춰야할까?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중에 <덜 바람직한> 동물들까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윤리적 우주의 빗장을 걸어 잠글 수는 없다. 시간은 계속 전진하고 우리의 윤리적 영역은 계속 확장될 뿐 축소되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p. 457 ~ 9)

 

 하나의 빗금은 안과 밖을 나눕니다.

 그러나 빗금이 딱 하나만 그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한 번 빗금을 허용하면 두 번, 세 번도 가능하게 됩니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인류와 동물 사이에 놓인 빗금이 흑인에게도 긋게 했으며 제국주의 때는 식민지 백성에게도 긋게 했고 사회주의가 유포될 때는 다른 이념을 가진 자에게 그었으며 우리나라에선 지역마다 빗금을 그었고 지금은 이주자에게 긋고 있듯이 말이죠. 이처럼 하나의 선은 복제되고 확장됩니다. 이것을 통해 빗금이 그어지는 결정적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저 파우츠의 말대로 자기 이익 때문에 그어진다는 것을 말이죠. 보다 많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경쟁자가 보다 많이 줄어들어야 할테니까요. 빗금을 통해 잠재적 경쟁자들을 아예 경쟁자들을 배제해 버리는 것만큼 경쟁에 유리한 것도 또 없고 말이죠. 타자를 고려하고 배려하면 할수록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쾌락은 적어지는 법이니 빗금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달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빗금이 실은 이익보다 고통을 더 많이 가져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그어 놓은 차별과 배제의 빗금은 언젠가 내게도 그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빗장은 이익에 따라 임의로 그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로저 파우츠 말대로 윤리적 영역의 확장은 좋은 일입니다. 물론 그것을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에 대해선 신중한 고민과 많은 논의가 이뤄져야 하겠죠. 그 고민과 논의의 시작을 이 책, '침팬지와의 대화'와 더불어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인식의 전환과 그 필요성을 충분히 느끼게 만드는 책이니까요. 분명 깊은 인상을 남길 것이며 그 여운 속에서 동물의 권리와 나 아닌 다른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 정립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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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17-10-27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빗금에 관한글이 인상적입니다

2017-10-31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7-11-0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팬지뿐 아니라 많은 동물을 실험에 이용했죠 그런 걸 처음 할 때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텐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걸 아예 생각하지 않게 된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동물도 권리가 있죠 사람이 마음대로 이용하면 안 될 듯합니다 말도 사람과 다른 말을 쓸 뿐 같은 동물은 서로 말하겠죠 사람보다 간단할지라도... 사람은 그런 것을 알게 되고 신기하게 여기기도 하는군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