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특허 표류기
이가라시 쿄우헤이 지음, 김해용 옮김 / 여운(주)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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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조업과 같은 전통 분야의 산업들은 이미 성장의 한계에 다달았다는 분석이 많다. 언론들은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무한정 늘어날 것이라 설레발을 치지만 연구에 따르면 벌써 성장의 한계에 직면해 버렸다는 지적이다. 더이상 파이는 늘어나지 않는다. 그 때 활로를 뚫어줄 것이라 기대되는 분야가 바로 '바이오 산업'이다. 대표적인 차세대 유력 분야인 바이오 산업은 과연 그에 걸맞게 왕성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2007년 3조 7천억이었던 바이오 산업이 2011년엔 6조 6천억의 시장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한국만 해도 이러하니 전세계적으로 보자면 얼마나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을까? 안 봐도 비디오다. 사실 바이오 산업은 가장 경쟁이 치열한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그 수익 대부분이 '특허'를 통해 보장되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먼저 '특허'를 가지고 있어야 수익의 현실화를 도모할 수 있다. 덕분에 우리 인체 곳곳이 특허의 대상이다. 그 중 인간의 유전자는 특허를 얻기 위한 각축전이 가장 치열하다. 한 마디로 우리 몸 자체가 바이오 산업에서 보자면 특허의 전장터인 것이다.


 이가라시 쿄우헤이의 '인체특허 표류기'는 그러한 현실의 단면과 그 그늘을 추적하는 책이다. 원래 그는 NHK의 다큐멘터리 PD로 2001년에 '인체 특허'란 제목으로 유전자 특허와 관련된 산업의 명암을 그려내 일본의 문부과학대신상을 받은 바 있다. 이 책은 그 내용과 그 이후의 것까지 포함하여 한 권의 내용으로 정리하여 펴낸 것이다.



 유전자가 뭐길래 특허 때문에 그 난리가 나는 것일까 생각하실 분들을 위하여 잠깐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해 본다면 이러하다.


 'CCR5'란 유전자가 있다. 나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는데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는 저 혼자 에이즈를 인간에게 감염시킬 수 없는 모양이다. 세포 표면에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하는데 바로 그 도움을 주는 것이 'CCR5' 유전자라 한다. 이 유전자는 우리들 세포 표면에 있다. 문제는 HIV와 이 CCR5가 정확히 들어맞아야 우리 몸 안으로 HIV가 들어와 에이즈를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은 HIV와 CCR5를 열쇠와 열쇠구멍으로 표한한다. HIV가 열쇠라면 CCR5는 열쇠구멍이다. 열쇠와 열쇠구멍이 제대로 들어맞아야 문이 열리듯이 HIV와 CCR5도 제대로 들어맞아야 HIV는 우리 몸에 들어올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CCR5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그 형태가 달라지기라도 한다면 HIV는 결코 우리 몸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이즈로 부터 해방되는 길은 간단하다. 열쇠구멍이 되는 CCR5를 바꿔버리면 되는 것이다.


사실 에이즈 치료 연구는 그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CCR5' 유전자는 과학자들 혼자서 찾아낸 것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한 사람의 자발적 신고로 이루어졌다. 그 장본인은 바로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스티브 크론이란 화가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성적 성향의 주변 인물들이 하나같이 에이즈에 감염됨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은 감염되지 않는 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자신에게 있을 것이라 생각한 그는 자발적으로 연구소를 찾아가 자신의 혈액을 제공했다.


 그 제공된 혈액 덕분에 연구팀은 에이즈 치료의 획기적 대안을 제공할 'CCR5' 유전자를 찾은 것이다. 만일 에이즈 치료제 개발에 성공한다면 그 수익은 천문학적이 될 것이라 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것을 발견할 수 있게 제공했던 당사자인 스티브 크론은 그 수익을 하나도 얻지 못한다. 특허권자에 자신의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스티브 크론에게 그런 건 상관 없었다. 그가 혈액을 제공했던 것은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라 에이즈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인류 때문이었으니까. 자신의 혈액으로 많은 이들이 에이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면 그것으로 그는 만족했다. 하지만 그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연구소의 기업이 'CCR5'의 특허권을 독점해버렸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된 수익은 오직 그 기업만의 것이며 다른 연구소가 더 좋은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 그것을 연구하려고 해도 그 기업은 특허권을 이용해 막을 수 있다.


 스티브 크론의 바람과는 반대로 오히려 특허권이 인류가 에이즈로부터 해방되는 길에 장애물로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같은 어둠을 정말로 잘 보여준 사례가 있다. 그것 역시 유전자 특허권 때문이었는데 바로 'BRCA1'이란 유전자다. 여성이라면 알지도 모르겠다. 안젤리나 졸리 때문에 유명해진 유전자이기도 하다. 2013년 5월 14일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미국에서 있었다. 브래드 피트의 아내이자 '툼레이더'로 유명한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가 유방암도 아니면서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원인이 바로 'BRCA1' 유전자 때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유방암으로 투병하다 죽었다. 안젤리나 졸리는 그 때문에 유전자 검사를 받았는데 그녀에게 BRCA1이란 돌연변이 유전자가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유방암이나 난소암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저의 경우 유방암에 걸릴 가능성이 87%이며, 난소암에 걸릴 가능성은 50%라고 했습니다.(P. 136)


 그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 유방을 절제했다. 사실 BRCA1 유전자의 발견은 유방암으로 고통받거나 고통받을 지도 모를 여성과 소수의 남성들에게 환영할만한 소식이었다.(책에 따르면 남성도 유방암으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라고 한다. 남성의 4% 정도는 유방암에 걸린다고 한다.) 특히나 잠재적 유방암에 있어서는 획기적이었다. 유전자 검사로 BRCA1이나 BRCA2 유전자 존재의 확인 유무를 통해 안젤리나 졸리처럼 유방암의 가능성을 손쉽게 점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유전자의 검사가 거센 환영을 받을 것은 당연해 보였다. 유방암의 소멸이라는 장밋빛 미래도 멀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도 헛된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바로 특허권 때문이었다.


 BRCA1과 BRCA2의 특허권이 모두 '미리어드'라는 미국의 한 벤처 기업에게 있었던 것이다.(참으로 이상하게도 대부분 유전자의 특허권이 이런 벤처 기업들에게 있다.) 그 기업은 재빨리 이 유전자의 특허권을 미국에서 인정받았고 그 특허권을 바탕으로 바로 독점권을 행사했다. 그 유전자를 소재로 한 모든 연구는 중지되었고 유전자 검사 또한 미리어드가 지정한 병원에서만 할 수 있도록 했으며 비용 또한 유관 기관에게 천문학적인 액수를 요구했다. 그 모든 건 당연히 환자의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리어드는 획기적인 치유로 나갈 수 있었던 진로를 탐욕과 독점으로 망쳐버린 대표적인 사례였다. 특허권엔 이런 어둠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어둠이 막대한 수익을 보장한다. 그것도 언제까지나. 그러니 바이오 기업들은 앞다투어 이 어둠을 소유하려 달려든다.


 여기서 우리는 스티븐 크론의 분노에 찬 다음과 같은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유전자는 누구의 것입니까? 그것은 '인류 전체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유전자 특허를 취득한 사람이 그것을 독점해도 괜찮을까요? (P.24)


 이 책이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도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의 독점으로 오히려 치유에 장애가 되는 유전자 특허권을 과연 이대로 내버려두어도 될까하고 묻는 것이다. 유럽과 일본은 여기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다. 이 유전자 특허권에 앞장서고 미리어드와 같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지적재산권을 만들고 그것을 널리 유포시키려 애쓰고 있는 미국이다.


 생명체에 대해 특허권을 가장 먼저 인정한 것도 바로 미국이다. 1972년 6월에 그 일은 일어났다.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연구원이었던 인도인 아난다 차크라바티는 당시 잦은 유조선 사고로 바다가 원유에 오염되자 그 원유를 미생물을 통해 정화할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원유를 분해하는 미생물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 미생물의 특허를 신청한 것이다. 처음 미국의 특허를 관리하는 특허상표청은 그 신청을 기각했다. 당시 특허법 101조는 특허의 대상을 어디까지나 생물이 아닌 조성물이나 제조물에만 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계에 없었던 것을 새로 발명한 것은 인정되었지만 미생물이 생물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음으로 기각되었다. 차크라바티는 항소했다. 특허항소법원은 차크라바티의 손을 들어주었다. 특허의 강조점을 생물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없은 것을 만들어낸 것에 두었기 때문이다.


 미생물이 생물이라는 사실은 특허법의 목적으로 보아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P. 164)


 그들은 결국 이렇게 판결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미생물은 특허법 101조에 따라 특허의 대상이 된다. 심리의 대상이 된 미생물은 제조물 또는 조성물에 해당한다.(P. 165)


 이렇게 하여 세계 최초로 생명에 대한 특허가 인정되었다. 그들은 생명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모두 특허의 대상으로 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유전자와 같은 생명 특허는 거침없이 확장되어갔다. 지금은 그 권리가 더욱 넓혀져 과정 일체에 포괄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기본특허까지 인정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제는 더욱 나아가 약의 조합과 투약 방법까지 특허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뜨겁게 공방 중이기까지 하다.


 유전자는 발명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 신체에 본래 있던 것으로 발견의 대상이다. 약의 조합이나 투약 방법 역시 발명이 아니라 발견의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허의 대상으로 삼으려 치열하게 로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름아닌 독점을 통한 고수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특히 바이오 산업에 있어 하나의 특허권엔 반드시 기다란 암울의 그림자가 뒤따르므로 여기엔 상세한 권리의 바운더리가 만들어져야 하지만 정작 문제를 일으킨 미국은 수수방관이다. 사실 그들의 관심 영역도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이 끊임없이 유포하고 주장하고 있는 지적재산권이야말로 미국의 가장 커다란 수익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득에 점점 눈이 멀어 무분별한 특허권의 남용이 가져올 위험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방치되어서는 안되는 위험이다. 왜냐하면 질병은 국적과 인종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 특허권에 따르는 위험은 언젠가 결국 우리 모두의 위험이 된다. 더구나 바이오 산업이 한창 성장 중이다. 이제 우리의 또 어떤 부분이 특허의 대상이 되어 연구와 치료에 어떤 제한을 받게 될 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도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이 같은 위험을 막으려면 한 가지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다. 특허권을 그가 진정 봉사해야 할 대상인 인류의 공영을 위해 쓰여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정당한 사용을 고취하기 위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내용 자체도 흥미롭지만 결코 모르쇠할 수 없는 문제라서 더욱 귀기울여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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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
토마스 키스트너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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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파 마피아'는 독일의 스포츠 저널리스트로 잔뼈가 굵은 토마스 키스트너의 르포르탸쥬다. 참으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는데 영화나 미니시리즈의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았다. 공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조직에서 사익 추구에만 혈안이 된 이들의 검은 커넥션을 흔히 '마피아'라고 하는데 제목 그대로 공익 단체라 세금까지 면제받고 있는 '피파'를 철저히 사익 추구의 도구로 이용해온 이들의 이야기를 꼼꼼하게 들려주는 책이다.


 국제축구연맹 '피파'의 역사는 꽤나 길다. 처음 결성된 것이 1904년으로 벌써 백년이 넘은 조직이다. 사실 이 때만 해도 힘이 미미한 조직이었다. 종주국인 잉글랜드조차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한창 진행되던 제국주의에 발맞춰 축구의 인기가 유럽을 넘어 남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파급되자 피파도 힘을 키워갔다. 오늘날 피파의 힘은 제국주의가 바탕된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피파의 힘이 강성해진 것은 3대 회장을 역임했던 쥘 미레 때였다. 그의 헌신과 노력으로 소수 나라들 간의 리그에 불과했던 월드컵은 무려 85개국 출전이라는 오늘날과 같은 월드컵의 모습이 될 수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축구에 대한 순수한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토마스 키스트너에 따르면 지금의 피파란 온갖 사적인 착복과 뇌물이 오고가는 추악한 부패의 온상이다.


 어쩌다 이렇게 변질되어 버렸을까? 토마스 키스트너는 그 최초의 계기로 1974년에 회장으로 취임한 아발란제를 꼽는다. 피파와 관련해 아발란제의 취임은 의미가 크다. 아바란제의 취임으로 피파의 성격이 협회에서 기업으로 변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날과 같은 피파의 모습은 아발란제가 만든 것이다. 아발란제는 오로지 주관하는 월드컵에서만 나오는 수익으로 근근히 운영되던 피파를 일신하여 적극적으로 수익을 창출해 나갔다. 덕분에 겨우 직원 12명에 불과하던 피파는 무려 120명의 직원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조직이 되었다. 현재 피파의 매출은 작년만 해도 1조 4천 백억원. 실로 어마어마한 조직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돈이 다 어디로 가는 지 알길이 없다. 피파는 월드컵이 열리는 해를 기준으로 4년마다 예산을 집행하고 결산한다. 하지만 제대로 된 감사를 받은 적은 아발란제 이후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토마스 키스트너에 따르면 피파는 회계와 감사를 한 민간 기업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고 있는데 그 기업은 회장의 통제 하에 있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회장의 전횡을 감시할 만한 것은 아무 데도 없는 것이고 피파가 벌어들이는 그 많은 돈들은 모두 눈 먼 돈일 뿐이다. 엑셀 경이란 사람은 예전에 이런 현명한 말을 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라고. '피파 마피아'는 전임 회장 아발란제와 현재의 회장인 블라터로 이어지는 악취로 들끓는 부패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는 책이다.


 스포츠는 공정이 생명이지만 그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비열한 권력게임이다. 절대 권력을 얻을 수 있는 데다 그 많은 돈을 제 주머니에 마음껏 채워 넣을 수 있는 자리인만큼 회장 선거때마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부패의 악취는 결코 숨길 수 없다. 누군가는 맡고 조직을 변화시켜야겠다고 마음먹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아발란제와 블라터의 악행에 맞서 피파를 지키려 해왔다. 하지만 그 때마다 아발란제와 블라터는 평소에 챙겨 놓은 비자금을 살포해 이들의 도전을 막았다. 거기에는 2002년의 한국 월드컵도 자유롭지 못하다. 토마스 키스트너는 의심한다. 그 때 한국이 전 세계의 예상을 뒤엎고 4강까지 가게 된 것엔 당시 블라터를 지지하지 않았던 정몽준과 모종의 거래를 했기 때문이 아니냐고. 특히 한국과 이탈리아의 16강 전에서 비론 모레노 심판이 페널티 박스 안에서 이탈리아 선수 토티가 일대일 상황에서 송종국의 태클에 걸려 넘어진 것을 두고 헐리우드 액션으로 판정하여 퇴장시킨 것은 많은 논란을 가져온 판정 중 하나인데 모레노가 그렇게 했던 것이 바로 블라터가 정몽준의 지지를 받아내기 위해 한 일은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정몽준은 대통령이 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이 월드컵에서 높은 성적을 올려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둘의 이해관계는 그렇게 맞아 떨어졌다. 그래서일까 뒤이은 스페인과의 8강에서도 한국을 승리로 이끈 명백한 오심이 반복되었다. 정황은 있었다. 월드컵 후에 모레노 씀씀이가 커진 것이다. 월드컵 전만 하더라도 빚이 많아 생활에 쪼들렸던 모레노였는데 갑자기 어디서 큰 돈이라도 들어왔는지 돈을 펑펑 물쓰듯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이탈리아 팀의 주장이자 수비수로 뛰었던 크리스티안 파누치는 "모레노 심판은 오직 한국이 8강에 진출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기적과도 같았던 한국의 4강 진출. 과연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 그대로 순수한 꿈의 성취였을까 아니면 모종의 뒷거래가 가져온 결과였을 뿐일까? 하지만 책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악행도 마다않는 블라터의 행보를 보노라면 그저 순수한 꿈의 성취라고 믿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피파의 현재는 경기에서 맛보는 순수한 감동마저도 오염시키고 있다. 토마스 키스트너는 서문에서 한 조직에서 일어나는 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차원에서 규제 없는 권력이 얼마나 끝없이 부패할 수 있는지의 사례로 보아줄 것을 당부한다. 마침 우리에게도 해수부 마피아, 원전 마피아 같은 관피아들이 쏙쏙 드러나고 있는 상황. 비록 축구에 관심이 없더라도 경종을 울리는 의미로다가 한 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재미까지 있어 읽는 부담도 적으니.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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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오후 - 남자, 나이듦에 대하여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 / 현실문화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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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전 한 결혼정보회사가 대한민국 젊은 남녀들이 과연 얼마나 연애를 하는지 조사했다고 한다. 열 명 중 두 명 꼴로 연애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주말 번화가에 나가보면 나 빼고 다 연애하고 있는 것같아도 실상은 이러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삼포세대'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지금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는 연애,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하려 한다. 경제적 상황도, 놓인 미래도 끝도 없이 불안하기만 하니 리스크를 줄이는 것은 당연지사다. 바야흐로 싱글이 대세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그렇게 된다는 게 비극적이긴 하지만 앞으로 전통적인 가족 개념은 많이 달라지리라 생각된다. 


 이웃 나라인 일본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독신의 오후'를 쓴 저명한 일본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에 따르면 앞으로 일본 남성 3명 중 1명은 죽을 때까지 싱글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한다. 특히 남성의 경우엔 이러한 연애와 결혼 포기 풍조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잃어버린 10년'으로 경제적 고난이 젊은 세대에게 더 빨리 닥쳐온 탓이 아닐까 싶다. '초식남'이 그 증거다. 이 말은 칼럼니스트인 후카사와 마키가 당시 유행하고 있는 일본 젊은 남성의 라이프 스타일을 두고 지칭한 신조어였는데 그건 여성스런 취향을 가진 젊은 독신 남자를 뜻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보다 넓게는 일찌감치 연애를 포기하고 싱글로 살아가려는 남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찌나 '초식남'의 인기가 강했던지 아베 히로시가 주연한 드라마 '결혼못하는남자'까지 만들어질 정도였는데 그만큼 일본 젊은 남자들 사이에선 '싱글'이 보편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독신의 오후'는 남자들 사이에서 싱글이 선택이 아니라 운명처럼 여겨졌을 때 나온 책이었다. 아베 히로시의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듯이 이 책이 일본에서만 무려 75만부가 팔린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우에노 지즈코는 싱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특별히 '싱글력'이라고 칭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과연 남자들에게도 싱글력이 있을까 하고 묻는다. 여성에게 있다는 것은 당연히 전제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의 보편적 특성을 두고 한 것이라기 보다는 개인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같다. 우에노 자신이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싱글로 살아왔던 것이다. 그녀는 1948년 생이다. 책은 2009년에 나왔다. 대략 싱글로 살아온 연륜의 크기가 얼마인지 짐작된다. 그런 그녀이기에 싱글의 삶에 대해 이렇게 쉽고도 설득력있게 쓸 수 있었을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 책은 부정적 답변에서 비롯되었다. 남성들은 싱글력이 아예 없거나 약하다는 것이다. 그걸 그녀는 늙으면 누구나 한 번은 닥치게 마련인 간병의 문제와 사별의 문제를 통해서 보여준다. 섹스 문제도 있다. 이제와 이야기지만 이 책은 보편적인 남성 싱글의 삶을 다루기 보다는 중년 이후 싱글의 삶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제목이 '오후'인 것은 그 때문이다.


 모두 남자들은 한계를 보여줬다. 이유가 있었다. 일본 남성의 경우, 특히 기성 세대는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환경 안에서 자라오고 거기에 익숙해져서 아내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삶을 특히나 힘들어했다. 단적인 예로 일본에서 노년 부부의 배우자 간병의 경우 여성보다 남성이 간병받는 이를 살해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사별의 경우에도 남성들이 홀로 있는 것을 더욱 어려워했다. 전통적인 일본 남성 가치관에 따라 집안의 일은 모두 아내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바깥 일만 했기 때문에 살림을 꾸려가는 것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거기다 퇴직은 곧 모든 사회적 연결망의 단절이 되고 직업 말고는 다른 취미를 가져본 적도 없는 그들은 삶의 의미를 달리 쉽게 찾는 것도 어려워서 이제 홀로 보내야 할 시간들이 모두 우울과 불안으로 닥쳐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에 길들였던 습관은 그대로 남아서 자식들에겐 늘 권위 있는 가장으로 행세하려고만 드니 가족으로부터 고립마저 초래해 싱글의 삶은 더욱 힘들어진다.


 이런 문제점으로 인해 우에노 지즈코는 책을 쓰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노년으로 가면 갈수록 쇠약해질 수밖에 없는 일본 남성의 싱글력을 길러주려는 책이다. 그 구체적인 노하우를 많은 싱글들의 실제 삶과 평생 싱글로서 살아온 자신의 경험까지 더해 가르쳐 주려는 책인 것이다. 싱글로 맞이할 수 있는 삶의 모습 전반을 다루면서도 내용은 소화하기에 전혀 부담이 없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거기다 어조가 솔직하기까지 하다. 


 예컨대, 배우자를 간병하는 남성의 경우 해소하기 어려운 성욕 문제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아내야 행복할지 어떨지 몰라도 남편이 참 안됐어요. 남자 50대면 한창 나이인데 성욕을 체념하고 살아야 하다니 말이에요"

 어렵쇼, 그 사람은 섹스는 부부끼리만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라면 그토록 아내를 아끼는 멋진 남성의 애인이 되어 "당신 덕분에 나는 아내 간병에 전념할 수 있어, 고마워."라는 말을 듣고 싶건만. 싱글은 이럴 때 진정으로 자유롭다. 이런 생각이나 하는 나는 대체 남성 편만 들고 여성에게는 적이 될 심보일까?(p. 53)


 75만부 중의 한 만 부 정도는 이 말 때문이지 않을까? 이 봐, 정색할 것은 없다고. 물론 농담이니까. 깊이가 없는 것도 아니고 의외로 촌철살인 식으로 이런 저런 생각 지점들을 꽤 짚어주는 편인데도 어조가 이런 식이라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진중함을 이런 가벼움으로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내가 익히고 싶은 것인데 높은 내공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 언감생심이다. 과연, 우에노 지즈코는 일본에서 젠더 분야의 선구적 이론가이자 일본 최고의 지성이라고 한다.  


 '독신의 오후'를 읽다보면 느끼게 되는 한 가지는 만일 정말로 노년 남성의 홀로 삶이 그토록 힘들다면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로 어떤 안간힘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예전 삶을 그대로 고수하려는 안간힘 말이다. 이 안간힘은 생각 이상으로 힘이 세다. 노년이 되면 될수록 고집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흔히 보게되지 않는가. 이는 노년의 가장 큰 문제는 육체의 쇠약과 사회적 연결망의 단절로 자존감이 극도로 위축되는 것인데 노년에겐 이제까지 늘 지녀온 자기 생각이나 습관을 포기하는 일도 자존감의 상실로 받아들여 지는 탓이다. 이렇게 자존감과 연결된 것이기에 안감힘을 써서 버티는 것이고 그 때문에 고래 심줄보다 더 질겨서 잘라내기가 힘든 것이다.


 하지만 우에노 지즈코는 변하지 않으면 도래하는 것은 비극 밖에 없다고 말한다. 달리 생각해보면 노년이 자존감을 지키려 그토록 매달리는 통칭 '보수(지녀온 자기 것을 내내 고수한다는 점에서)'는 알고보면 매뉴얼과 같다. 대부분 자기가 계획하고 판단한 삶의 모습이 아니라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외부로 부터 주입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명절이 되면 당신들은 늘 다시 태어나면 절대 결혼 안한다고 하시면서 독신인 자녀에게는 왜 빨리 결혼 안하냐고 다그치는 부모나 친지들도 실은 매뉴얼 대로의 삶을 자식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 말은 쉽게 생각하자는 것이다. 삶 자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입되 매뉴얼을 좀 더 자유로운 쪽으로 업데이트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되면 낯선 삶의 환경을 받아들이는 일도, 오래도록 싱글로 산다고 해서 자신을 '패배한 개'처럼 여기지 않는 것도 한결 수월해질 테니까.


 사카이 준코의 베스트 셀러 '노처녀의 절규'에는 남편도 없고 자신감도 없는 30대 이상 여성을 '패배한 개'로 정의하며 자기 비하를 보여준 끝에 "그래요, 나 노처녀예요. 그게 뭐 어때서요?"하고 반문하는 퍼포먼스가 나온다. 싱글 남성 세계에서도 모태 싱글 40년차입니다만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뭐요?"라는 상식이 통하게 되면 남성들도 훨씬 편해질 텐데 말이다(p. 82)


 이런 주눅들지 않는 당당함. 기꺼이 삶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맞이하려는 태도. 결국 '독신의 오후'가 권하는 부드러운 홍차란 이런 원기를 북돋아주고자 함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영원의 철학 - 모든 위대한 가르침의 핵심
올더스 헉슬리 지음, 조옥경 옮김, 오강남 / 김영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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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대전이 서서히 끝나가던 1945년.
 '멋진 신세계'에서 현대 문명이 가열차게 추구하고 있는 물질주의가 가져오는 건 결국 인간 소외와 공허 밖에는 없다고 말했던 올더스 헉슬리는 한 권의 책을 발표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의 철학'이죠. 이 책이 일으킨 파장이 엄청났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흔히 '뉴에이지'라고 알고 있는 것들도 다 이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죠.

 원제는 'The Perennial Philosophy'. 책의 첫머리부터 올더스 헉슬리는 라이프니츠가 한 말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이 용어는 중세 때부터 있었습니다. 최초로 그 말을 쓴 것은 'Agostino Steuco'라고 합니다. 이탈리아인으로 주로 구약을 연구하던 학자였는데 당시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주도하고 있던 신플라톤주의를 그는 '영원의 철학'이라고 불렀다는 군요. 피치노는 당대 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신앙을 약화시키고 있다고까지 생각했죠. 그래서 그는 플라톤에게로 기울었습니다. 플라톤의 사상을 이길 수 있는 건 오직 그리스도 사상 밖에는 없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을 '경건의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그 플라톤 철학을 자신이 신봉하는 그리스도 신학과 합치고자 했죠. Steuco는 '경건의 철학'이라는 말을 살짝 바꾸어 '영원의 철학'으로 부른 것입니다. 네, 실은 조금 경멸의 의미였죠. 그건 신학이 아니라 철학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어쨌든 '영원의 철학'은 그렇게 생겨났습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실재주의를 경유해 무엇보다 영혼의 불멸성을 강조했습니다. 그 불멸하는 인간의 영혼을 중심으로 우주를 새롭게 구성했습니다. 플라톤처럼 가상인 우리의 현실과 이데아인 참 세계로 나누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을 통해 결합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인간 영혼의 목표는 초월적 존재이자 '이데아'인 신과의 합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 보았죠. 이것은 후일 우리가 'perennialism'이라고 부르는 것이 됩니다. 영속주의 혹은 항존주의라고도 부르는 것이죠. 다년생 식물을 뜻하는 'perennia'의 뜻처럼 영원히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을 그렇게 부릅니다. 종교적 입장을 투영하자면 그 가치는 물론 신이 되겠죠. 피치노가 말했던 '신과의 합일'이 종교로서의 'perennialism'이 지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길이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피치노처럼 기독교만이 유일의 통로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죠. 'perennialism'의 근본 목적은 신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동,서양의 모든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이론과 방법들을 하나도 허투르 보지 않고 다 의미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거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골라내 진정한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통로(흔히 '비전의 핵심'이라 이르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 바로 이것이'perennialism'입니다. 이 'perennialism'은 하나의 여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최초의 거대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 바로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입니다.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에서 이미 물질문명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당연히 물질문명은 참된 정신에 의해 인도되어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더구나 바깥은 참된 정신으로 인도되지 않은 물질문명이 어떠한 비극을 초래하는가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이었습니다. 올더스 헉슬리에게 절박감은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36년에 나온 '가자에서 눈이 멀어'는 헉슬리의 그러한 심리를 잘 나타내 주고 있죠.  그는 위안으로서든, 구원으로서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기독교는 그에게 그걸 가져다 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러했던가? 그 이유를 그는 이 책의 336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와 형이상학에 관해 집필하는 대부분의 유럽 및 미국의 저자들은 유대인, 그리스인, 지중해 연안 지역과 서구 유럽 사람들만이 이 주제에 관해 생각해본 것처럼 쓰고 있다. 완전히 자의적이면서 고의적인 무지가 20세기에 와서야 이렇게 드러난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불명예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사회적으로 위험하기까지 하다.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는 영원한 세계 평화의 위협이 되고 있다.(p. 336)

 '멋진 신세계'와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서 이미 파시즘에 대한 공포와 환멸을 드러내고 있는 그입니다.
 그런 그에게 오로지 하나의 진리만 있다고 주장하며 다른 모든 것을 배척하는 서양의 신학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치는 자신들의 전쟁을 '제2의 십자군'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길이 필요했습니다. 하나가 아닌 다양한 길이. 모든 경계를 초월하고 동시에 아우르는 길이. 그 보편을 향한 대화. 그리하여 그는 '영원의 철학'을 썼습니다. 그냥 책이 아니라 쓴다는 것이 동시에 자기 구원의 노력이기도 한 책을. '영원의 철학'은 그런 책입니다.

 모두 27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건 올더스 헉슬리가 찾아낸 모든 종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요소가 27가지라는 뜻도 됩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 요소 하나를 각기 한 장씩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내용은 정말 광범위합니다. 불교, 도교, 유교를 비롯하여 동,서양의 종교들이 거의 다 인용되고 있으니까요. 정말 읽다보면 어떻게 이걸 다 혼자의 힘으로 찾아내고 더구나 체계적으로 정리까지 했는지, 거기 투영된 신학적 제국주의를 벗어나고자 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집념이 무서울 정도입니다. '과연, 듣던대로 대단하구나!' 느낄 수 밖에 없더군요. 아니나 다를까, 종교학자로 명망있는 오강남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단적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나는 그가 쓴 수많은 책 중에 단연 이 '영원의 철학'이 가장 중요한 저작이라 단언하고 싶다.'

 저도 동의합니다. 물론 여파도 컸었지만 여기 들어간 그의 노고만으로도 그렇다고 인정해주고 싶어요. 내용도 그리 쉬운 편은 아니고 번역이 다소 불친절하여 읽는 속도가 좀 더딜 수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고 곱씹으면 이해못할 부분은 없습니다. 또한 의외로 올더스 헉슬리 스스로 자신이 개진하고자 하는 '영원의 철학'을 꽤나 체계적으로 다져놓고 있기도 합니다. 개념정리, 구분과 계층화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죠. 제가 그랬듯이 따로 노트를 준비하여 정리해가며 읽는 것도 이 책을 소화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년에 올더스 헉슬리는 신비주의로 더욱 기울었습니다. 죽을 때는 아내가 두 번이나 LSD를 놓아 되도록 그가 바라는 상태에서 세상과 작별하도록 하기도 했었죠. 이처럼 그 역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작가 켄 키지만큼이나 환각제가 깨달음을 위한 새로운 통로가 되어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는 '인식의 문'이란 책을 썼는데 짐 모리슨은 거기에 감명을 받아 나중에 자신이 조직한 락밴드의 이름을 'DOORS'라 짓기도 했습니다. 소설만큼이나 올더스 헉슬리의 종교나 신비주의에 관한 책들도 영향을 많이 미쳤는데 거기에 관한 책들은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그랬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었네요. 그것도 그 시기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의 철학'을. 덕분에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헉슬리 후기 모습에 대한 궁금증을 제대로 풀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다른 많은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가 풍부해진 듯 합니다. 특히 종교에 대해서라면 그것에 대한 시각을 근본부터 다시 되짚어 보게된 것 같습니다. 종교를 보다 폭넓은 시야로 이해하고 싶다면 분명 좋은 동반자가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고종석의 문장 한국어 글쓰기 강좌 1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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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궐선거 결과를 보고 하도 열받아 '이 개 같은 나라에서'라고 제목을 썼다가 지웠다. 고종석이 그의 책 '문장'에서 자고로 글은 기품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퍼뜩 생각났던 것이다. 읽지말 것을 그랬나? 이처럼 은근히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그래, 읽었다. 원래 글쓰기마저 이런저런 코치를 받아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는데 리뷰를 보니 하도 좋다는 말이 많길래 글 솜씨도 없고 귀도 한없이 얇은 나는 덥썩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고종석은 '왜 글을 쓰는가?'부터 시작한다. 아, 그 전에 고종석은 이름 뒤에 '씨'를 붙이는 게 좋다고 했는데 난 그냥 생략하련다. 마음이 무간지옥에 빠진 것처럼 착잡하니 그 한 자 쓰는 것도 귀찮아진다. 이러면 또 글의 기품이 없어지는데 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와인 마시는 것도 아니고 소주병 까고 있는데 기품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쓰다가 자판 위로 그대로 쓰러져 잠들 지도 모른다. 그러면 알 수 없는 자음과 모음의 수열들이 길게 펼쳐질 것이다. 흐음, 글의 앞은 기품이 흐르는데 뒤는 의미 불명의 긴 뱀꼬리라. 이거, 딱 '용두사미'가 아닌가? 그럴 바에야 한결같은 수준을 유지하는 게 차라리 더 기품을 지니는 길일 것이다. 하여, 자기 검열 따위 던져버리고 내키는 대로 쓰겠다. 당신은 지금 취중 작문의 현장을 보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더라? 아, 맞다. '왜 글을 쓰는가?'였지. 사실은 써 놓은 글을 다시 읽어봤다. 고종석은 조지 오웰이 말한 네 가지의 글쓰는 동기를 가지고 그것을 설명한다. 내 경우로 말하자면 순전한 이기심에서 정치 목적인 동기로 옮겨가는 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온라인에 지속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물만두님 추모 1회 리뷰대회 때였으니까 벌써 몇 년 된 것 같다. 정확히 얼마 되었는 지는 모르겠다. 술기운 덕분인지 기억이 안난다. 처음엔 그저 내가 좋아서 글을 썼었다. 방문자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내가 좋은 쪽으로만 썼다.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다. 그러다 차츰 방문자 수가 많아지면서 그래봐야 병아리 눈꼽만큼이지만 누군가 읽고 있구나 자각했던 것 같고 내 생각을 전달시키기 위한 쪽으로 글을 썼던 것 같다. 좋아서 쓸 때는 잘 쓰고 싶은 마음도 없었는데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을 쓰자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솟아나는 걸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오래 고여 있었던 그 마음이 결정적으로 이 책을 손에 잡게 한 것 같다. 내가 비록 문외한이긴 해도 예전부터 고종석이 글을 그것도 참 잘 쓴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책은 이론과 실기의 이중나선처럼 되어 있다. 하나를 설명한 뒤 하나의 실전으로 들어간다. 나는 실전이 재밌었다. 그런데 예전 같으면 분명 나는 뒤에 '개인적으로' 썼을 것이다. 그런데 책의 실전 부분을 보니 '개인적으로'라는 말은 쓰지 말라고 하더라. '나는'을 이미 썼는데 왜 '개인적으로'를 또 쓰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나'가 개인적으로 말하지 집단적으로 말하던가?'라고. 읽는 순간 화끈했다. 자주 그런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아서 앞으로는 그러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처럼 시시콜콜하게 지적해 주어 난 실전을 흥미롭게 읽었다. 의외로 고쳐야 할 습관이 많아서 지금까지 내 글을 읽은 얼굴 모르는 모두에게 아주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좋은 글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의성어도 많이 배우고 색깔을 표현하는 말들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되도록 중언부언 하지 않고 접속사는 꼭 필요한 경우 아니면 생략해서 문장과 문장 사이가 긴장을 낳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어에서 유래된 '의','적' 표현도 가급적 삼가고 말이죠.


 이런. 하나하나 열거하다 보니 책을 글 쓸때마다 사전처럼 옆에 놓아두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실전의 시시콜콜은 유용하다는 의미다. 소주가 바닥났다. 새벽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자조가 든다. 랭보처럼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 글쓰기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람 하는 생각도 든다. 위안도 희망도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 오웰의 네 가지 동기는 하나만 빼고 다 헛소리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 개인의 순수한 글쓰기에 있어서만큼은. 그 하나는 순전한 이기심이다.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온 것인가? 그래도 어쨌든 글은 남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쓰는 것 같다. 지금만큼은 이 지옥을 버티려고, 끝까지 버티려고 쓰는 것 같다. 다른 무언가로 뛰어들어서 이 짊어진 현실의 중력을 피하기 위해서 쓰는 것 같다. 정말로. 발 앞에 쓰러진 소주병처럼. 깨지지 않고 계속 뒹굴거리기 위해. 맞는 비유인건가? 여하튼 지금 내 생각은 그렇다. 사이먼과 가펑클은 험한 세상의 다리가 노래이길 바라고 나는 글이기를 바란다. 힘들면 힘들수록 많이 쓰길 바란다. 스티븐 킹이 말하길 글은 엉덩이로 쓴다고 했다. 이 참에 그 쪽 근육도 키워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리뷰란 결국 한 문장을 위한 쓸데없는 군더더기의 집합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좋다, 안 좋다를 말하는 그 한 문장. 이제와 깨닫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수고를 줄여주고 싶다.


 딱 한 문장으로 말하겠다. 이 책은 좋다. 이것만 읽기를...


다행히 자판 위로 안 쓰러졌다. 신의 가호일까? 이 나라에도 좀 주세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