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과 반전의 순간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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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을 오래도록 많이 들었다. 자연히 신뢰하는 평론가가 있게 마련인데 강헌은 그 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있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강헌의 첫 책이다. 놀랐다. 얼마나 오래도록 활동했으며 유명세도 제법 있는 편인데 이제야 첫 책이라니!(가장 첫 페이지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호는 의박이며 자는 산만이어서 나이 50이 넘도록 책 한 권 내지 못한다. 책 표지에 들어가는 프로필을 쓰게 되어 만감이 교차한다.) 또 하나 딱따구리가 뇌리를 쪼았던 순간은 강헌이 팟캐스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무려 2013년부터! 헉! 나는 그 사실을 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진작 팟캐스트와 친하게 지내볼 것을!'하는 후회를 더운 여름 밤의 맥주처럼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 책이 있어서.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2013년부터 시작된 팟캐스트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 한다. 물론 녹취록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고 한 권의 책이라는 완결된 형태로 만들기 위해 내용을 대폭 보완했다고 한다. 나처럼 뒤늦게 팟캐스트(나는 끝까지 팟캐스트가 방송법 적용을 받는 것을 반대하기 위해 '방송'이란 용어를 쓰지 않으련다.)의 존재를 알게 된 이를 위해 커다란 선물이 아닐 수 없다.(굳이 '커다란이란 형용사를 쓴 것은 이 책을 통해 정말로 많은 것들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20세기 이후 인간의 일상에 음악이 개입하지 않는 순간은 없었다.'고 믿는 강헌은 비록 음악이 인간이 의식과 무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기긴 하였지만 '음악만큼 신비화의 추앙을 받은 예술도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 또한 시행착오의 존재인 인간이 만들어낸 수많은 역사적 생산물 중의 하나일 뿐이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 생성되는 예술적 욕망의 결과물일 뿐이다.' 여기서 나는 어떤 문장을 특별히 볼드체로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음악을 투시하는 데 있어 이 책이 취하는 방법론의 가장 기본이 되는 소실점이기 때문이다. 강헌은 음악을 사회적 생산물로 바라본다. 아무리 뛰어난 음악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전적으로 천재의 영감이나 내재된 가치의 탁월함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정한 사회적 환경의 반향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마치 마르크스의 '생산양식'과도 같이 음악도 일정한 형식의 음악을 탄생시킨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조건들이 중요하기에 그는 역사를 훑는다. 표지에 나오는 'MUSIC IN HISTORY, HISTORY IN MUSIC'이 나오는 이유다.



 그런 기나긴 음악사 속에서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특별히 네 개의 역사적 순간을 담는다. 제목 그대로 과거를 전복하고 음악의 진화를 가져온 대표적인 순간이다. 하나씩 간단히 열거해 본다면 이러하다. 먼저 메이저리티의 전유물이기만 했던 음악을 마이너리티의 손으로 쥐게 만든, 진정한 의미의 전복적인 순간이라 할 수 있는 재즈와 로큰롤의 탄생, 그리고 우리나라의 60년대, 독재의 시퍼런 칼날 아래서 숨죽인 민중들에게 자유와 저항의 바람을 불어넣었던 통기타 혁명과 그룹 사운드, 여기에다 지금은 가장 대표적인 클래식으로 추앙받으나 당대에는 왕정 중심의 클래식에 반발해 자신의 음악에서 공화주의적 정신을 고취한, 한 마디로 안티클래식이었던 모차르트와 베토벤(특히 이 부분에서 살리에르에 대한 평가는 그야말로 '반전이다. 강헌은 지금 우리의 살리에르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오해에 불과한 지를 여기서 조목조목 밝히고 있는데 거기에 맞춰 모차르트와 베토벤 또한 재평가 된다.)에다 마지막으로 군부시절만큼이나 자유와 희망이 억압되었던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절, 어떻게 일본의 엔카가 한국의 트로트가 되어 대중음악사를 비로소 열어젖히게 되었는지 그 '반전'의 순간을 윤심덕의 '사의 찬미'와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중심으로 담는다.


 그런데도 페이지는 357이나 되고 글자 폰트도 겨우 9(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무튼 보통의 책 폰트보다는 작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겨우 네 개의 장면을 담는다지만 그와 관련해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지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이 책은 시쳇말로 '정보의 바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재즈부터 트로트까지 다양한 음악 형식에 관련된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태어나게 만든 미국과 유럽 그리고 우리나라의 6, 70년대와 일제 시대 사회상에 대한 것까지 페이지마자 정보들이 좁쌀처럼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책도 음식과 같아서 알찬 정보들을 많이 섭취하다 보면 책 한 권을 다 읽었을 때 포만감을 느끼는 데 이 책이 정말 그렇다. 어쩌면 너무 많이 먹어서 한동안 책을 내려놓고 숨을 골라야 할 지도 모를 지경이다. 무엇보다 재즈와 로큰롤의 입문자라면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이 책엔 빛나는 순간들이 많은데, '역시 강헌이구나!' 느끼게 되는 순간들로 '점원들'이나 '체이싱 아미' 같은 영화로 유명한 감독 케빈 스미스가 톰 크루즈를 인터뷰할 때 호들갑을 떨면서 톰 크루즈 영화엔 톰 크루즈가 빛나는 '톰 크루즈 순간'이 있다고 드립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따와 나도 '강헌 순간'이라 부르련다. 그런 '강헌 순간'에서 가장 눈부신 장면은 역시 김민기의 '아침 이슬'의 곡 전개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아침이슬>에 대한 설명은 138페이지에서 143페이지까지 6페이지에 걸쳐 전개되는데 그 중 절반이 '아침이슬'의 음악적 구조에 대한 설명에 할애되어 있다. 분량만 봐도 얼마나 곡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길어서 인용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인데 간단히 정리해 본다면 원래 대중음악은 형식적으로 A-B-A로 구성된다고 한다. 여기서 A와 B는 테마로 아름다운 선율로 청자를 이상향과도 같은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A테마가 있고 그것에 이어 열창을 통해 더욱 드라마틱하게 발전시키는 B테마가 있다는 것이다. 강헌은 이렇게 설명하지 않았지만 내 생각에 B테마는 A테마가 그리는 세상에 들어가지 못하는 지금 내 삶의 불안, 고통 같은 것이 반영된 게 아닐까 한다. 결코 열리지 않을 유리창으로 이상향을 바라본다면 내 삶의 누추함이 더 강조될 터이니까 말이다. 강헌은 가요가 대중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마지막에 가서 다시 A테마로 돌아와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A-B-A인 것이다. 거기엔 현실에서는 가 닿을 수 없는 세계를 노래로나마 닿고 싶어하는 대중의 마음이 투영된 한 편, 현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변화시켜 A세상을 추구하겠다는 대중의 의지가 녹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아침이슬'은 이 구조를 배반한다. '나 이제 가노라~' 후의 부분은 A테마로 돌아가지 않고 전혀 다른 C테마로 청자를 데려가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당시의 기준으로 봤을 때 이 노래의 상업적 가치는 끝난 것이라 강헌은 말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이 노래는 7080 세대의 가장 대표적인 노래이나 당시엔 3천장 밖에는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음악을 사회적 환경의 반향으로 보는 강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래가 많은 이들에게 불려줬던 사회적 맥락을 읽어낸다. 바로 그것이 '대학생'이 주축이 되었던 청년 문화가 가진 한계의 반영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과 끝없이 타협해야 하는 선민 집단의 일원이면서도 기존의 기득권 세력의 비민주적인 전횡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길을 새롭게 모색해야 했던 이 혁명적 낭만주의의 자식들에게, 이 대책없는 C테마로의 도약은 바로 낭만주의 그 자체였다. 혁명은 낭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다시 A테마로 돌아와서 대중성을 쟁취하고 권력을 쟁취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장 낭만적인 초원의 지평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것이 1970년대 청년문화의 혁명적 낭만주의 감수성과 그 구조가 딱 들어맞았다.(P. 142)


 그렇다고 이게 딱히 그 세대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당시 혁명은 낭만화 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혁명이 정말 무엇이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치열한 고민이 없었다. 그저 자신들을 억압하고 폐를 조이는 군부독재라는 장막만 걷혀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다 누리는 표현의 자유를 조금도 누리지 못한 채, 바보로 살아야 하는 시대를 끝장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낭만화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물론 그 시대의 한계가 그대로 정체되어 또 다시 지금 이 시대를 과거로 회귀하게 만드는데 주역을 담당하도록 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노래 하나에 대한 치밀한 분석으로 이렇게까지 담아내는 것은 내게 무엇보다도 '강헌의 순간'이었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이런 이야기로 가득찬 책이다. '아침 이슬'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인용한 것도 이 책이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보이기 위함이었다. 살리에르에 대한 부분도 그렇고, 엔카와 트로트의 역사나 음악에 대한 구조적 분석도 그렇고, 인용하고 싶은 부분이 참 많은데 리뷰가 너무 길어질까봐 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한대수와 신중현(신중현은 박정희에게 가장 많은 탄압을 받은 뮤지션이다. 이유는 너무도 약소했다. 박정희가 일제시대 총독부가 행했던 선동 가요를 본받아 정권 선전을 위해 자신이 직접 노래를 만들어 음반을 제작하려고 신중현에게 의뢰했는데 신중현이 가타부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중현은 그 뒤 '대마초 사범 연예인 1호'가 되어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탄압을 받는데 한 마디로 '괘씸죄'였다. 원래 우리나라는 그 때까지 대마초 흡연이 금지되지 않았다. 박정희의 '복수혈전'으로 비로소 범죄가 된 것이다.) 그리고 박정희 시절에 이루어졌던 노래 검열 부분도 빼놓을 수 없다. 세상에나 김세환의 '길가에 앉아서'가 금지곡이었고 그 이유가 '근로 의욕 저하~'라니. 과연 창조 경제의 전통은 거기서 시작되었나 보다. 검열의 이유들이 참 창조적이다. 하지만 그것도 화수분은 아니었던지 '아침이슬'은 금지된 이유조차 없이 금지되었다. 한 마디로 묻지마 금지곡.


 정말 많은 말을 들을 수 있는데 이처럼 흥미로운 부분이 많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음악과 사회의 연관성을 이처럼 뛰어나게 보여주는 책이 달리 없는 것 같지만 설령 그것에 관심이 없다 하더라도 음악에 대한 이야기, 문화에 대한 이야기 만으로도 제 값어치를 충분히 하는 책이다. 한 마디로 강추할 수 밖에 없는 책. 나는 지금 강헌의 팟캐스트 들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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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컴맹 2015-08-22 15:31   댓글달기 | URL
디테일한 서평 참 잘읽었습니다

헤르메스 2015-08-24 12:24   URL
21세기 컴맹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yamoo 2015-08-23 21:26   댓글달기 | URL
오! 이 글만으로도 책의 가치를 알겠습니다. 얼른 구매하도록 하지요~
음악 평론에 관한 책은 좋은 책을 만나기 힘든데, 감사합니다!ㅎ

헤르메스 2015-08-24 12:25   URL
정말 음악 평론 책은 만족할만한 것을 찾기 힘든데 이 책은 정말 만족스럽더군요^^ 야무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도 정말 감사합니다^^
 
로버트 라이시의 1대 99를 넘어 - 부의 불평등을 바로잡는 11가지 액션플랜
로버트 라이시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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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라이시의 '1대 99를 넘어'의 원서 제목은 'BEYOND OUTRAGE'이다.

 우리말로 하면 '격노를 넘어'쯤 될 것이다. 분노보다 더 강도가 센 격노다. 그는 왜 이런 제목을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이 책을 읽어보면 안다. 아니 대번에 느낀다고 해야 하나?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절대 1%에 속할 리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분명 이 책을 읽고 정말 격노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왜?

 당신이 1%의 거짓말에 속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도 의문을 가졌으리라. 열심히 일하는데 왜 삶이 조금도 나아지지 못하는 걸까?

 연례 행사처럼 보도되는 연봉 서열을 보면서 어쩌면 내 능력이 모자라서 그런 지도 몰라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보도의 목적이 바로 그것이다. 당신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은 당신의 현재가 오로지 당신 탓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괜한 음모론 아니냐고? 지금의 언론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군. 푸코의 통치성에 관한 강의를 읽어보자.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근대 이후로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의 계급의식과 집단 행동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세밀하게 통치 기술을 조련해 왔는지.


 일례로 보험이 있다.

 보험이 순수하게 언제가 당할지 모르는 리스크로부터 당신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보험이 나왔던 진짜 목적은 원래 사회가 맡았어야 할 리스크의 책임을 오로지 개인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야 노동 계급이 똘똘 뭉치지 않을 테니까. 모든 리스크, 현재 삶의 상태를 순전히 개인 책임으로 돌려버리면 지배 계급은 그만큼 더 수월해진다. 노동자들은 실은 구조적 모순 때문에 가난해지는 것인데도 어리석게도 자기 탓으로만 생각해 더 지배 계급이 하라는 대로 할 뿐, 뭉쳐서 뭔가 변화를 이루어내려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계급 의식은 저지 되고 그만큼 집단 행동도 와해 된다. 제도 변화의 핵심은 주로 그런 쪽으로 섬세하게 튜닝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파업이 마냥 나쁜 것으로만 여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파업이 노동자들에게 해가 되는 경우는 없다. 설령 귀족 노조의 파업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사실 귀족노조란 노동자들이 분열하길 바라는 프레임에 불과하다.) 어떤 파업이든 종국엔 노동자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배층은 더욱 파업이 양성화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이제는 재판을 통해 노조에 천문학적인 배상 판결을 때린다. 실직한 노동자들에게까지 어마어마한 액수의 배상금을 내도록 한다. 쌍용자동차의 해고자들과 그 가족들이 연속적으로 자살한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다. 그러니 사법살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얼마전 또 하나의 사법 살인이 있었다. 대법원이 외주로 돌린 KTX의 여승무원을 한국철도공사의 직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판결하는 바람에 복직이 좌절되었을 뿐만아니라 1심과 2심의 승소로 받게 된 과거 4년간의 임금과 소송비용(1인당 8640만원)을 다시 토해내게 되어 절망한 나머지 다섯 살과 세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던 여승무원이 그만 투신 자살한 것이다. 엄마가 가장 필요했을 나이의 자식을 두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그녀에게 정말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지만 그녀는 가족을 위해 뛰어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토해내야 하는 배상액으로 인해 가족 모두가 커다란 고통을 겪을 것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녀를 투신 자살로 내몬 것은 바로 대법원이다. 그녀의 유언은 '빚만 남기고 떠나서 미안해.'였다.


 이게 비단 그녀만의 비극일까? 아니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얼마든지 닥쳐올 수 있는 일이다.  그녀들이 이런 비극에 처해졌던 것은 노동의 유연화로 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노동의 유연화는 앞으로도 더욱 거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얼마전에도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정규직 과보호로 비정규직을 양산한다며 정규직 과보호를 개선해야 한다고 떠들어대지 않았던가. 이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언제든 쉽게 쳐낼 수 있고 가급적 노동자 복지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기를 바라고 있다. 그들의 소망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 너무나 많은 실업자가 있어서 아주 적은 임금으로도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부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언젠가 앨런 그리스펀이 말했던 대로다. 그는 말했다. '미국의 노동자에게 너무 많은 임금을 주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되니 노동자들에겐 그저 삶이 약간 아슬아슬할 정도의 임금만 줘야 한다.'고.


 굳이 그런 임금 정책을 펼 것도 없이 실은 지금도 계속 노동자들은 원래 자신이 가져야 할 몫을 자본가들에게 빼앗기고 있다. 무엇보다 그건 당신의 노동생산성과 실제로 받는 임금의 격차에서 나타난다. IMF가 터지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은 노동생산성이 오르면 오른만큼 실제 임금으로 돌려 받았다. 그랬기에 영화 '국제시장' 같은 이야기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당신의 노동생산성과 실질 임금의 격차가 커지고 있다.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 일한 만큼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부분을 자본가들에게 빼앗기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 앞에서 말한 그 '왜?'에 대한 답을 해야겠다.


 당신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삶이 전혀 나아지지 못했다고 여기는 것은 당신이 일하는만큼 전혀 돌려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선진국들은 그 격차가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심하므로 우리 역시 앞으로도 점점 더 빼앗길 것이 뻔하다. 그렇지 않으려면 1%가 아닌 99%를 위해 일하는 정권을 창출해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의 주머니는 빈약하게 될 것이고 내수가 결코 살아나지 않을 것이니(정말 지금의 불경기가 세월호와 메르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갈수록 더 가볍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당신이 아무리 자기 계발서를 읽고 용을 써도 바라는 미래는 결코 도래하지 않는다. 그냥 그 돈으로 몸 보신이나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의료민영화를 대비해야 하니.


 희망? 그런 게 과연 있을까?

 있다면 오로지 하나 당신의 행동 밖에는 없다. 그렇기에 로버트 라이시도 격노만 하지 말고 행동하라는 뜻에서 'BEYOND'를 쓴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다른 게 아니다. 착취의 노골화다. 더 뻔뻔하고 더 무제한으로 노동자들의 몫을 빼앗아 오는 것이다. 그래도 이러다 노동자들이 화내지는 않을까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푸코가 정확히 내다봤듯이 기업가 마인드를 전 노동자에게 파급하여 노동자 스스로가 자신의 모든 삶을 기업가적인 눈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다. 즉 노동자에게 경영자 코스프레를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결코 해당될 리 없는 종부세를 가지고 반대했던 어리석은 이들이나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을 걱정해 그들을 위한 정당에 투표하듯이. 그런 존재로 만들어 일체의 저항을 무력화 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목표인 것이다. 순응주의자들의 양산. 지금 보니 아주 잘 되고 있군 그래.


 그러니 행동의 전망은 요원하다. 신자유주의는 체계적으로 노동자들의 분노와 의지를 기화시켜왔다. 물론 월스트리트의 점령하라 운동도 있었고 지금도 유럽에선 저항이 일어나고 있지만 근본적인 개혁은 힘들다. 그러니까 미국의 루즈벨트가 했었던 그런 개혁 말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에 따르면 그 시기야 말로 미국의 전성기라고 한다. 사실 지금도 옛 세대들은 그 때를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가들에겐 아니었다. 가장 엄혹의 세월이었다. 흔한 말로 잃어버린 10년이었다. 루즈벨트가 부자들에겐 높은 세금을 매겼기 때문이다. 루즈벨트 전만 해도 대부분의 백만장자들이 요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루즈벨트 시대엔 그런 부자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 돈은 모두 케인즈 이론에 따라 노동자들과 그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쪽으로 흘러 갔다. 그리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행복한 시대를 이루었다. 지금의 미국은 힘들다. 행복지수가 우리나라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아주 낮다. 그런데 최상위 1%의 부자들은 행복하다. 세금이 50년간 계속해서 51%에서 26%의 비율로 낮아졌기 때문이다.(p. 49) 미국의 역사는 이것을 증명한다. 부유층의 세금이 많아질수록 다수가 행복해진다. 그들의 세금이 적어질수록 다수가 불행해진다는 것을. 그건 우리나라의 부자 감세도 마찬가지다.


 하나 더, 대공황 이야기를 해 보자. 대공황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너무 과잉된 탓일까? 그렇다면 왜 수요가 갑자기 줄어들었을까? 그 이유는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소비자인 노동자들의 수입이 대폭 줄었기 때문이란 걸 말이다. 실제로 그랬다.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었을 때, 수 년간 노동자들의 임금은 제자리였다. 노동시간은 여전했고 노동생산성은 올랐으나 그들은 증가한 만큼 돌려 받지 못했다. 그 대부분의 이익은 기업과 부유층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노동자들은 임금이 더이상 늘지 않았지만 여전히 현재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 했고(대부분 그런 생활의 관성이 있는 고로 어찌할 수 없다.) 덕분에 부채의 늪에 깊숙이 빠졌다. 대공황은 그러다 터진 것이다.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이 계속해서 가계 부채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경고를 보내는 것도 이런 역사적 경험 때문이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도 대공황과 판박이였다. 그러니 우리만 예외라고 섣불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자면 이런 상황은 쉽게 개선되지 않을 것 같다. 그의 말에 의하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어디까지나 부채의 지속적인 증가로 지탱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는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빚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야말로 은행이 가장 혐오하는 고객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정부가 계속해서 금리를 낮추는 것이다. 그들이 언제나 말하는 국제경제의 불안 때문이 아니다. 부채를 늘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편이 그들에게 훨씬 이익이 되니까.


 우리들은 그저 세금을 내는 도구에 불과하다. 그 세금으로 그들은 배를 불린다. MB 시절의 4대강, 사자방. 그렇게 우리의 세금은 그들의 이익으로 전환된다. 이번에도 최경환 부총리는 15조의 추가경정예산을 요구했다. 경기를 진작시키겠다는 게 이유다. 똑같은 이유로 지금까지 최경환이 가져다 쓴 예산은 3년 동안 모두 90조. 그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다 어디에 썼는지 경기는 3년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살림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내수가 죽어 자영업자의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그 돈은 서민이 아니라 기업들에게로 대부분 흘러갔을 것이다. 이미 유통기한이 지난 낙수효과를 운운하면서. 어떤 은행 광고처럼 기업이 살아나면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 말하지만 실제론 망상에 불과했다. 기업이 얻은 이익은 전혀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 현대자동차처럼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저 쌓아만 두었다. 사실 그들이 시설 투자와 고용을 늘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봤자 아무런 이익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시설을 확장하고 고용을 늘려 아무리 생산을 많이 해봐야 사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낙수 효과가 내수를 진작시키지 않는다.

 진실은 거꾸로다. 내수를 먼저 진작시켜야 낙수효과도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임금은 늘 제자리다. 수요가 줄어드니 물가는 계속 오른다. 어떤 당의 대표는 애국하는 마음으로 이번 휴가는 외국으로 가지 말고 우리나라에서 즐기자고 했다는데 과연 외국으로 휴가를 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알아는 보았는 지 모르겠다. 아니면 그에게 국민이란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만 해당되거나.


 어쨌거나 최저임금은 겨우 6,030원.(가장 행복한 나라로 늘 꼽히는 노르웨이의 최저 임금은 2만원. 최저 임금은 다수의 행복과 비례한다. 극소수의 행복과는 반비례하더라도.) 앞은 깜깜하다. 그래도 아직도 많은 이들이 나만은 예외일 것이란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분노해야 할 때 침묵하고 행동해야 할 때 무임승차만 바랄 것이다. 그렇게 언제까지나 우리나라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예외이길 꿈꾸었던 사람들 모두에게 무자비한 현실로 밀어닥칠 것이다. 셜리 잭슨의 '제비뽑기'처럼 뽑은 그 순간엔 아무리 저항해도 이미 늦었다.


 * 로버트 라이시의 책을 읽고 화가 너무 난 나머지 새벽의 멜랑꼴리한 기분도 돕고 해서 책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동안 생각하던 것들을 마구 써버리고 말았는데(그래도 책의 기본 논지와는 통하기는 하는데...) 어쩌면 나중에 이 글을 지워버릴 지도 모르겠다. 이런 글은 써봤자 기분만 꿀꿀해진다. 보면 꿀꿀해지는 글을 일부러 놔 둘 필요는 없겠지. 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나중에 이 책의 리뷰를 다시 쓸 지도 모르겠다는 말만 해 놓기로 하자. 가급적 적은 분들이 이 글을 보기를...(뭐, 어차피 내 서재는 메르스 때의 평택처럼 인적이 뜸한 곳이니 괜한 바람 같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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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옛상인의 지혜 인간사랑 중국사 5
리샤오 지음, 이기흥 옮김 / 인간사랑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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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했었다. 상인의 '상'자가 왜 하필이면 '상' 나라의 '상'자일까? 까닭이 있더라.

 알고보니 슬픈 역사의 결과물이었다. 중국 고대 왕조인 상은 결국 주나라에게 망한다. 나라가 망했으니 특히나 상나라의 귀족들은 더이상 예전처럼 살 수 없었다. 그들은 농사도 지을 줄 몰랐고 이렇다할 수공업 기술도 가지지 못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했다는 뜻이다. 하여 그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이기도 한 장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주나라에서 직업적으로 장사를 했던 이들은 대부분 이렇게 상나라 사람이었다. 그래서 장사하는 이들을 오늘도 '상인'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인간사랑에서 중국사 시리즈 다섯번째로 나온 '중국 옛 상인의 지혜'를 읽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제목처럼 이 책은 중국의 상인 역사를 담고 있다.

 모조리 담는 것은 아니고 사마천의 '사기' 중 '화식열전'을 저본으로 하여 강의하는 형식의 책이다. 아니나 다를까 원래 중국의 국영방송 cctv에서 강연했던 내용이라고 한다. 어쩐지 알기 쉽고 요점 정리가 잘 된 것 같더라니. 사기를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화식열전'은 열전의 거의 마지막에 나온다. 순서가 그렇게 된 것은 아마도 상공업을 경시하던 당대 가치관의 반영으로 보인다. 한나라에서도 상앙이 실시한 '중농억상' 정책은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었으니까. 사실 이렇게 상공업의 역사를 기술한 책조차 '사기'와 '한서' 밖에는 없다. 역사적으로는 '화식열전'이 최초의 기록이다. 어쩌면 이건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울분이 낳은 반골 기질 탓인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그는 상공업을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으로 여겼고 춘추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52명의 상공업인의 역사를 '화식열전'에 기록했다. 제목의 '화식'이란 재화의 '화'자와 불어날 '식'의 결합으로 재화가 쉼없이 늘어난다는 것으로 상인으로 성공한 자들을 뜻한다. 그러나 52명 모두가 상세히 기술되는 것은 아니고 그 중 10명만 자세히 기록할 뿐 나머지는 간략하게 정리하거나 이름만 올린 경우도 있다.


 아무튼 중국정법대학 교수인 저자 리샤오는 여기서 '화식열전'에 기록된 상인들을 통해서 오늘날의 상인들이 본받으면 좋을만한 것들을 중심으로 들려주고 있는데 '화식열전' 맨 앞에 나오는 주나라의 강자아(흔히 강태공이라고 잘 알려진)부터 한나라의 복식까지 7명(상성으로 추앙받는 범려는 무려 두 챕터를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과 전통적으로 국가의 중요한 치부책이었던 '염철(소금과 철)'에 따로 한 꼭지를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물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인물이 활약했던 당대 상업환경과 그 이유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짚어주기에 꽤나 얻는 게 많고 그래서 읽는 맛이 제법 나는 책이다. 대표적으로 중국 영화에서 친구를 말할 때마다 듣게 되는 '붕우'가 실은 상행위에서 나온 말이었다는 것과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관포지교'가 단순히 우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실은 사람을 경영하는 CEO의 자세를 보여주는 일화였음을 아는 것은 느낌이 새로웠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여 말하자면 특히나 인상 깊었던 것은 범려였다.

 그는 '오월동주'란 고사성어로도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의 대립 시절, 패배해 오왕 부차의 똥까지 먹었던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이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범려가 한 권의 책대로 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계연지책'이다. 그는 나중에 월나라가 기틀을 잡자  '계연의 책략은 모두 일곱가지인데 월나라에선 그 중 다섯가지만 쓰고도 뜻을 이루었다. 나라에서 효과를 보았으니 이제 집안을 다스리는데 쓰리라.'라며 모든 권세를 내려놓고 낙향하는데 월왕이 '그대가 가는 것은 하늘이 이 월나라를 버리는 것과 같으니 제발 여기 남아서 우리 나라를 분할하여 다스리도록 합시다. 만일 그래도 가겠다면 그대의 처자식은 모두 목숨을 잃을 것이오.'라며 붙잡았으나 범려는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고 결국 아내와 아이, 하인 몇 명만 데리고 도주한다. 그렇게 거의 가진 것 없이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그는 염전과 수산물의 무역으로 크게 성공하여 거부가 되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돈이나 성공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범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열아홉 해 동안 세 번 큰 돈을 모았지만 또 몇 차례나 가난한 친구와 먼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니까 그가 세 번이나 큰 돈을 모으게 된 것도 사업이 실패해서가 아니라 돈을 모두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는 벌고 쌓아두는 사람이 아니라 나눠주기 위해 버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돈이란 '계연지책'이 누누이 강조하는 대로 저장의 대상이 아니라 순환의 흐름이었다. 하여 사마천은 그를 '자기가 가진 재산을 어진 덕으로 널리 나누어주기를 좋아한 군자'라며 크게 기렸다고 한다. 범려가 무려 상성으로 추앙받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고 보니 조선 최고 거상이라 칭했던 김만덕이 생각난다. 중국보다 더 심한 '중농억상'에다 가부장제가 강력했던 조선에서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고아로 태어나 여인의 몸으로 그만한 거상이 된 것도 대단하지만 그렇게 마련한 재물을 모두 백성의 구휼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었다는 것에서 더욱 놀랄만한 인물이었다.


 얻는 것 보다 주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다.

 우리나라 최고 부자라는 삼성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상속세를 탈루하고자 전환사채라는 법망의 구멍을 교묘히이용, 단 46억으로 에버랜드를 차지하고 그 에버랜드의 지분으로 삼성을 장악했던 것과 똑같이 삼성물산을 통해 삼성을 지배하고자 이번엔 제일모직으로 사명을 바꿔 그 주식의 가치를 세배나 뻥튀기 해 삼성물산과 무리한 합병을 했다. 언론을 동원하여 합병을 가로막는 헤지펀드 엘리엇을 공격하는 한편 합병만 하면 주식의 가치가 상승하리라 선전했지만 현재 결과는 거꾸로 주가가 추락하는 중이다. 캐나다 연기금을 비롯한 해외 장기 투자자들이 삼성에 등을 돌렸다고도 한다.


 문득 원숭이 잡는 법이 떠오른다.

 구덩이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곡식을 갖다두고 위를 단단한 판자로 덮은 다음 원숭이 손 하나 정도만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둔다. 원숭이가 곡식 냄새를 맡고 구멍 안으로 손을 집어 넣어 곡식을 잡는다. 그런데 곡식을 잡느라 움켜쥔 손은 구멍을 빠져나오지 못한다. 곡식을 버리면 손은 쉽게 빠져나올 수 있지만 원숭이는 손에 잡은 곡식을 놓치기 싫어 계속 움켜쥐고 있다가 잡힌다는 것이다. 상업이라는 게 이 원숭이와 같지 않을까? 시간 문제일 뿐 움켜쥔 손은 언젠가 화를 부른다. 삼성의 이번 합병은 국제의 신임을 잃었고 그것은 언젠가 타격으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도 과도한 대출을 받아 하루가 멀다하고 불안에 빠져있는 하우스푸어처럼 소유의 집착은 더 큰 고통을 양산한다. 역사에 이름을 올린 거상들은 꼬리인 돈을 쫓지 않았다. 보다 큰 뜻을 품고 내어주는데 힘쓰다 보니 절로 돈이 따라온 격이었다. 절제와 포기 그리고 베품이 사업 확장, 수입 확대 그리고 세습 경영보다 더 중요했다. 바로 눈 앞의 이익이 아니라 보다 멀리 볼 수 있었던 자들. 무엇보다 그런 안목이 그들을 거상으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문자 그대로 물질 만능이요, 배금주의의 시대.

 날로 탐욕스러워지고 천박해져만 가는 이 자본의 시대에 부의 진정한 의미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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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 - 유럽 근대의 뿌리가 된 공자와 동양사상
황태연.김종록 지음 / 김영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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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에도 천칭 같은 것이 있어,

 양쪽에 각각 동양과 서양을 올려놓았다고 한다면 근대 이후론 확실히 서양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동양은 서양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그 역방향의 영향이란 전무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나라엔 개화가 있었고, 일본엔 메이지유신이 있었으며 중국엔 양무운동이 있었다. 그 모두가 자신보다 더 강하고 발전한 서양을 본받고자 한 움직임이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서양과 조금도 다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거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책이 한 권 나왔다.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황태연과 전주대 문화산업대 객원교수인 김종록이 공저한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가 그것이다. 제목에서 바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맹점으로 남아있었던 근대 시기의 동양에서 서양으로 뻗어나간 영향의 역사를 복원하고 있다. 나는 사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는데 공자로 대표되는 중국 사상이 서양에 끼친 영향이 생각 이상으로 컸던 모양이다. 솔직히 난 동양에서 서양에 끼친 영향이란 고흐와 고갱을 비롯한 인상주의학파가 많은 영향을 받았던 일본의 우키요예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이런 것을 알려주는 책에 더욱 흥미가 갈 수밖에 없었다. 공자의 사상이 유럽에 전해지게 된 것은 중국에 온 선교사 덕분이라고 한다. 당시 선교의 주류적 경향은 '적응주의 선교'라고 해서 쉽게 말하면 선교 대상인 지역의 문화를 먼저 긍정하고 거기에 눈높이를 맞춰 선교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선교사들은 대상이 되는 지역의 문화를 연구하고 공유를 위해 보고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일환으로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공자가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서양은 한창 기독교의 헤게모니가 서서히 침윤되고 있었던 시점으로,

 공자를 새로운 가능성의 사상으로 환영한 것도 당대의 기독교 중심주의를 공박하던 지식인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기독교는 지성 또한 신의 은총이라 여겼는데 공자는 무신론자이면서도 높은 지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좋은 반박거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공자가 살던 중국은 유럽과 달리 하나의 종교가 지배하지 않는, 종교 자유주의의 나라였다. 그러니  르네상스의 이성에 근거한 인문주의적 태도와 종교개혁으로 대표되는 기존 기독교에 대한 개혁주의적 태도를 공유하고 있었던 유럽 지식인들에겐 무신론의 바탕 위에서 합리주의적 태도로 사상을 만들어간 공자라는 존재가 아무래도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서양의 공자에 대한 열렬한 수용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었다.


 책은 이런 역사적 추이를,

 프랑스의 로코코 양식은 중국의 선비 문화를 복사한 것이며 경제학 원론에서 한 번은 꼭 언급하고 넘어가는 경제학자이기도 한 케네의 중농주의도 실은 서양보다 생산력이 훨씬 높았던 중국의 농업 경제를 모델로 했다라는 식으로 하나 하나 상세히 짚어나가며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대부분 역사 속에 실재했던 누군가의 주장이나 현실에서 이뤄졌던 논쟁을 가져와 이뤄지므로 근거가 확실한만큼 꽤나 설득적이다. 솔직히 이토록 많이 인용 하려면 정말 문헌을 많이 뒤졌어야 했을 것 같아서  새삼 한 권의 책에 투여한 그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장점만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일반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아무래도 과도하게 한 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으려 하다 보면 그것이 급경사일수록 억센 힘을 필요로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만한 힘을 내려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무리할 수도 있다. 무슨 말인고 하면, 확실히 서양에서 동양으로의 일방적 영향 관계는 우리에게 오랜 세월 굳어진 생각이며 그런 의미에서 고정관념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저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 굳어질 대로 굳어진 고정관념과 싸워야 하는데 상대가 워낙 억세다 보니 주장의 날을 더욱 벼려야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그만 조금은 아전인수적 해석과 상대에 대한 비하가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걸 무엇보다도 중국에 대한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의 논쟁에서 느꼈는데

 물론 저자들 보다 쥐뿔도 아는 것이 없는 처지에 이런 말 하는 것이 좀 저어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변호삼아 말한다면 다소 주관적인 해석의 남용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몽테스키외의 방법이란 '사물의 본성'에 치중해 그 대상을 평가하는 것이다. 즉, 관찰자의 입장이 아닌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먼저 주안점을 두고 장단점을 따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여러 나라의 풍속을 연구했는데 거기엔 중국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본다. 분명 몽테스키외는 중국을 많이 비판했다. 그런데 그것이 저자들 말대로 온전히 시기심 때문이었는 지는 모르겠다. 물론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몽테스키외의 비판도 나름 객관적이라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절대적으로 객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몽테스키외는 당시 유럽 전제 정치의 문제점을 견제와 균형의 삼권 분립이라는 것으로 바로잡으려 했으므로 중국의 전제정치 또한 곱게 보일 리는 없었을 것이다. 몽테스키외의 중국 비판은 어쩌면 그러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따른 결과일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다 보니 나오게 된 부산물이라는 것이다. 나는 몽테스키외에게 반발하고 중국에 찬사를 보냈다는 볼테르도 마찬가지였다고 본다. 볼테르도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볼테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종교의 자유였다. 패권적 종교가 없는 상태. 그것이 볼테르가 꿈꾸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볼테르는 중국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리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둘 다 중국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달랐다. 몽테스키외에겐 중국의 전제 정치가 시야에 먼저 들어온 반면, 볼테르에겐 종교의 자유가 먼저 들어온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그건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결부되었고 하여 둘은 중국에 대한 평가를 두고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견지하는 입장이 있으며 외재하는 것들을 그 입장에 따라 평가하기 마련이다. 뇌과학자들도 입을 모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두뇌는 교묘한 이야기꾼이라 외부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조작한다고.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둘 다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본다. 물론 이 책의 저자들도 마찬가지다. 나라고 다를 것 없다.


 정리해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이 좀 더 균형잡힌 시각이었으면 좋아겠다는 것이다. 보다 중립적인 서술로서 거기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도록 했으면 어떨까 싶다. 시각이 한 쪽으로 치우치다 보니 저자들이 날 '계몽'하려 하는구나 싶어 조금은 불편했다. 진심을 전하고픈 방법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쪽에 치우친 설득은 듣는 이에게 강권으로 다가오기 쉽고 그러다 보면 아무리 좋은 진심도 '됐거든요' 하면서 사양할 수 있다. 외판원과 고객과의 관계가 여기서도 통용되는 것이다. 두 개의 물건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팔려는 물건의 장점만을 말하기 보다 둘 다를 온전하게 보여주고 가장 객관적인 상황에서 독자로 하여금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사람은 내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상황에서 이 모든 걸 보며 듣고 있구나 할 때 가장 설득되기 쉬우니까 말이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이 책을 통해 지향하는 패치워크 문명에 맞는 태도이기도 할 것이다. 297페이지에 나오는 바에 따르면 패치워크 문명의 특징은 어디까지나 자기비판적 개방성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되려면 무엇보다 내가 오류일 가능성을 긍정해야 한다. 자기 비판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런 가능성의 긍정에서 객관성은 도래하고 개방도 '타자 중심의 포용'이라는 보다 온전한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니 좀 서술이 아쉬운 것이다. 물론 내용은 전체적으로 내가 그동안 가졌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라 좋았다. 금상첨화랄까? 서술까지 내가 원했던 분위기를 느끼게 만들었으면 정말 만족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아쉬움을 토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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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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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서 마음이 찔렸다. 리베카 솔닛이 결정적으로 이 책을 쓰도록 만들었던 에피소드를 언급했을 때는 화끈거렸다. 제목의 남자는 언젠가의 나였고, 에피소드의 남자도 언젠가의 나였다. 나는 공범이었다. 나 역시 자주 상담을 자처하며 다 아는 척을 했으며 때로는 내가 옳다고 강요까지 했던 것이다. 딴에는 상대방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했었지만 과연 동기가 그것만이 전부였나고 물으면 섣불리 자신하지 못한다. 솔직히 우월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쉽게 옹졸로 치닫는 남자의 자존심과 아무 곳에나 손을 뻗치는 무분별한 정복욕이 '맨스플레인'의 엔진을 더욱 가열시켰을 것이다. 분명.



 이런 반성과 더불어 책을 읽었다. 저자인 리베카 솔닛과의 만남은 두 번째다. 이전에 '이 폐허를 응시하라'란 책으로 첫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그 책은 내게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었다. 재난 현장을 세밀하게 스케치했던 그 책은 특히나 재난이 터졌을 때와 그 이후 사람들이 진실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게 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인간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꿔 버렸다.


 우리는 흔히 재난이 일어나면 카오스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저마다 자신의 안전을 획득하고 싶은 욕구로 질서는 무너지고 아비규환이 펼쳐지리라 쉽게 여긴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그것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진실은 아니었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리베카 솔닛은 전혀 다른 진실을 보여주었다. 재난이 터졌을 때나 그 이후에도 사람들은 무질서 하지 않았다. 아비규환을 초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질서를 지켰으며 평상시 보다 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 아이들이 침착하게 질서를 지키며 구조되기를 기다렸다고 보도로 들었을 때, 나는 리베카 솔닛의 책을 읽었기에 사실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동영상을 보았을 때 결국은 리베카 솔닛의 말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그렇게 위기의 순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는 괴물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괴물로만 생각할까? 그만큼 타인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까? 거기에 바로 권력의 힘이 작용했다. 권력은 언제나 다수를 두려워한다. 서로 믿고 결집한 다수의 힘을.


 세월호 참사가 그러하듯 재난은 권력의 위기를 가져온다. 권력이 가장 약화된 그 시점에 다수가 하나된 힘으로 뭉치면 언제든 무너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권력은 더욱 사람들 서로를 불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한 상징 조작으로 위험에 처하면 자기만 살자고 내뺄 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는 그렇게 당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커다란 위험이 닥치면 당신은 더 먼 곳을 보고 어떤 행동이 나와 모두를 구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당신의 진실이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저 약하고 이기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권력이 주문한 결과일 뿐. 당신은 스스로를 오해하고 있다. 재난이 오히려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조금은 어이없게 생각될 정도로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 대해 길게 썼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난 두 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우리가 스스로의 진실된 모습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권력이 주입한 것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불안을 낳는 재난이 오히려 우리에게 진실과 더 나은 자신을 위한 기회를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바로 이 두 가지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도 이어지는 것이다.


 이 책은 하나의 동기에서 나왔다. 저자가 언젠가 참여한 파티에서 주최한 남자가 저자가 쓴 책인지도 모르고 그 책에 관하여 저자에게 주절주절 떠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거기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하고 듣기만 했다. 남자가 알량한 자신의 권위를 자꾸만 드높여갈 때, 그녀는 침묵했다. 왜 그랬던 것일까? 그 이유를 생각하다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남자처럼 남자들이 자꾸만 가르치려 드는 이유가 여성 스스로 자신을 왜소하다고 여기게 만들어 남성들의 지배를 강고히 만들려는 것임을.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나 종종 괴로움을 겪는다.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 (p. 15)


 바로 여기에 '이 폐허를 응시하라'의 첫 번째 주제가 들어가 있다. 권력이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오해하게 만들었듯이 여성들 스스로 자신의 능력과 가치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하고 있는데 그건 진실이 아니라 남성 권력이 조장한 결과인 것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이러한 남성 권력이 덧씌운 편견의 껍질을 깨어 여성들에게 더이상 주눅들 필요도, 참을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책이다.



 애석한 일이지만 요즘은 페미니즘의 주가가 많이 떨어졌다. 이제는 옛날과 다르게 오히려 여성상위시대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동안의 투사적 모습에 질렸음인지 공공연히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사람들도 많이 보게 된다. 언젠가 한 개그 프로그램엔 오히려 남성의 권익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코너도 있었다만 과연 정말로 많이 달라진 것일까?


 리베카 솔닛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남성들의 폭력과 성희롱에 노출된 불안한 여성의 위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바뀐 것이 없다. 미국만 해도 6.2분마다 한번씩 경찰에 신고되는 강간이 벌어지고 여성 다섯명중 한명은 살면서 강간을 당한다. 매년 8,7000건이 넘는 강간이 벌어진다. 거기다 구타는 9초마다 당한다.(리베카 솔닛이 강조한 대로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에 의한 부상은 미국 여성의 부상 원인 중 첫번째다. 미국 임산부의 사망 원인 중 수위에 꼽히는 것 역시 배우자 폭행이라고 한다. 9.11 이후부터 2012년까지 가정 폭력으로 사망한 여성의 수는 11,766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를 두고 과연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리베카 솔닛은 말한다.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 있다.(p. 37)


 마치 이 말을 입증하듯 우리가 '재스민 혁명' 또는 '아랍의 봄'이라 불렀던 민주화의 열기가 드높았던 그 때조차 남성 시위자들은 여성 시위자들에 대해 100건이 넘는 집단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을 벌였다. 그러고 보니 나도 처음 폭력이란 걸 휘둘렀을 때가 생각난다. 대학 다닐 때였는데 무슨 모임 세미나 뒤풀이였는데 맞은 편에 앉은 남자 선배 하나가 술에 취한 것을 빙자에 후배 여학우를 자꾸만 노골적으로 더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학우는 싫은데도 선배라 뭐라 대거리를 못하고 있었는데 보다 못한 내가 그만두라고 소리치면서 막걸리 잔을 머리에 던져버렸다. 물론 술자리가 아수라장이 된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나는 선배들에게 불려가서 정말 엄청 혼났는데 그 때도 오직 내 하극상이 오르내렸을뿐, 성추행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남자들의 세계가 이렇다. 설령 민주주의를 떠들어도 말이다. 이런 사실은 최영미 작가가 자신의 운동권 시절을 회상한 자전적 소설인 '청동정원'만 읽어봐도 다 나온다. 말하자면, 우리에겐 역사가 거듭되어도 언제나 변하지 않고 있는 전장이 하나 있다는 거다. 바로 여자와 남자의 전쟁이다. 그런 이유로 리베카 솔닛은 2장의 제목을 '가장 긴 전쟁'으로 붙였다. 그런데도 페미니즘이 유통기한이 다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바로 얼마전에도 우리나라 여군을 아가씨라 비하한 국회의원이 있었고 상관이 성적인 수작을 걸면 가만히 있으라는 공식적인 여군 매뉴얼이 존재하며 부하 직원인 것을 악용하여 잠자리까지 끌여들었는 데도 성추행이 아니라고 법원이 판단하는 지경인데.


 리베카 솔닛의 말대로 여성의 진정한 해방이란 밤길을 안심하고 다닐 수 있을 때일 것이다. 그 때까지는 여성은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리베카 솔닛은 여성들에게 주눅들지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말해야 할 이 때에, 더 많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맨스플레인'에도 투영되어 있듯이 남성 권력의 속성은 분리하는데 있다. 여성과 남성을 나누고 부국과 빈국을 나누며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나눈다. 바로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여 질서를 편성하기 위해서다. 남성 권력이 원하는 세계란 서열이 확고한 코스모스다. 그들은 태양이고 나머지는 그저 자신을 맴도는 별이 되길 원한다. 홀로 빛나기 위해서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아래의 존재들에게 끊임없이 열등하다고 세뇌시킨다. 그들은 그것을 정상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위반하는 존재들은 비정상이라는 굴레를 씌우다가 급기야는 19세기의 여성 작가들을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 불렀듯이 광기로 몰아간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스스로 표현하는 여성이야말로 남성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라는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를 위한다면 그들이 가장 무서워할 존재가 되어야 한다. 리베카 솔닛이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거미줄처럼 짓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여자들은 한번에 조금씩 삭제되고, 어떤 여자들은 단번에 몽땅 삭제된다. 어떤 여자들은 도로 나타난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모든 여자들은 지금도 그들을 사라지게 하려는 세력들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 여자의 이야기를 자기가 대신 말하려는 세력들과, 여자를 이야기와 족보와 인권헌장과 법률에 기록하지 않으려는 세력들과, 자신의 이야기를 단어로든 이미지로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로 이미 승리다. 그 자체로 이미 반란이다.(p. 112)


 하지만 이 이야기에선 배제가 있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페미니즘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 생각해야 한다. '여성주의'란 의미에 대하여. 그것은 정말 어떤 의미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그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사유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동일성과 타자라는 이분법에 침윤된 남성 권력의 방식이 아닌, 그렇게 선별과 배제가 아닌 방식을. 여성 해방을 일종의 권력 투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에 반하는 길일 것이다. 권력 투쟁은 지극히 남성 권력의 방식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길 없는 곳에서 길 만들기이며, 광막한 미로를 더듬어 경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여기엔 고정된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건 유동적이며 그래서 더욱 개별적이다. 하지만 그 어느 개별적인 것도 놓치지 않는 포용의 과정이다. 그것은 배제된 영향력을 아우르는 작업인데 그것을 두고 리베카 솔닛은 '할머니'라 부른다.


 누구나 그처럼 정규 교육에 앞선 사건들, 일상에 불현듯 등장한 사건들에서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 배제된 영향력들을 나는 할머니들이라고 부른다.(P. 105)

 


 이 말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 더 자세히 표현된다.

 

 사실 그 옛날에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자가 거의 없었다. 여자가 어떤 이미지를 공개적으로 만들고, 세상을 보는 방식을 드러내고, 그럼으로서 생계를 꾸리고, 그로부터 오백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을 제작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페르난데스의 그림에서 주름과 그림자로 많은 것을 표현하고 있는 흰 천은 침대보다. 침대보는 집을, 침대를, 침대에서 벌어지는 일과 사후에 씻겨나가는 일을, 집 청소를, 여성의 노동을 말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그림이 말하지만 그림에서 안 보이는 것들이다. 그림에 표현된 여자는 가려져 있지만, 그림으로 표현한 여자는 그렇지 않다.(p. 116)


 이런 식으로 드러내는 것. 그래서 리베카 솔닛을 특별히 거미줄이라 부른다. 아시다시피 거미줄엔 정형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정형한데다 언제나 과정 중에 있다. 그물을 짜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남성 권력이 하듯이 지향하는 목표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매일 조금씩 더 많이 새롭게 창조해 나갈 뿐이다. 그것이 바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다.


 그물을 짜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 세상을 창조하는 것. 자신의 운명을 다스리는 것, 아버지들만이 아니라 할머니들을 호명하는 것, 직선만이 아니라 그물을 그리는 것, 청소부만이 아니라 제작자가 되는 것, 침묵당하지 않고 노래하는 것, 베일을 걷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내가 빨랫줄에 너는 현수막들이다.(p. 118)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리베카 솔닛은 구체적 사례를 하나 가져온다. 바로 가장 목소리를 내었다고 볼 수 있는 버지니아 울프다. 그는 울프의 다음과 같은 말을 하나의 지표로 삼으려 한다.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p. 121)


 이 말에 따라 리베카 솔닛은 미래의 어둠을 어둠으로 두려고 한다. 섣불리 현재의 욕망을 미래에다 투사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아무 것도 규정할 수 없기에 희망이라 여긴다.


 무언가를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물들이 합쳐지고 변화하고 매료되고 흥분하고 충만해지고 사로잡히고 풀려나고 재생되는 시간이다.(p. 123)


 여기서 리베카 솔닛은 사고의 전환을 꾀한다. 앞서 '이 페허를 응시하라'에서 두 번째 지적했던 것과 같다. 재난이 오히려 자신과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보게 했듯이, 열려있는 어둠, 불확실하기에 불안할 뿐인 상황 자체가 오히려 여성에겐 희망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르기 (p. 125)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낯선 골목에서 방황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럴 때 그녀는 사회가 규정한 온갖 정체성에서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아니 할 수 없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는 모든 것이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자기 내부의 다수성과 환원불가능성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으며 그렇게 모든 것이 미스터리로 남길 원했다. 리베카 솔닛은 여기에 '할머니와 거미줄'을 지향하는 이야기하기의 구체적 방법이 있음을 본다. 다수성의 긍정은 배제된 영향력까지 아우르는 모든 할머니의 보존이면서 환원불가능성은 중심과 목적을 두지 않는 거미줄 짓기와 통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미스터리다. 미스터리는 결정적인 진실은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미스터리란 문득 들어선 샛길과 같아서 원래 가고자 했던 곳과 전혀 다른 곳에 날 데려다 놓을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런 식으로 자신과 독자마저 스스로에게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모든 것이 미스터리가 되면 무엇이 남는가? 하나다. 진실은 이제 믿음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현대의 여성들의 카산드라의 운명을 따르고 있다. 진실된 예언을 말해도 신뢰를 못 받았던 카산드라처럼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우리나라 법원도 그러하듯 남성 권력은 믿어주지 않는 것이다.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면 다짜고짜 네가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느냐는 말부터 떨어진다.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 의심하는 반응을 보인다.(p. 154)


 이런 일은 우리 주위에 비일비재하다. 뭔가 바른 소리를 하는 여성에게 남자들은 곧잘 '히스테리'라는 딱지를 붙인다. 남자들은 언제나 자신이 하는 말과 스스로의 인격을 구별해 주길 바라면서 여자들의 말은 언제나 인격과 결부지어 생각한다. 말은 들어오지 않고 감춘 저의만 캐내려 애쓴다. 흔히 쓰는 '여성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비하인 것이다. 진실 따위는 상관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여성만이라도 같은 여성의 말을 믿고 더 귀기울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이것은 리베카 솔닛이 여전히 기나긴 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여성에게 보내는 연대의 요청이다. 여성들 중 누군가 목소리를 낼 때 그녀를 믿고 같이 목소리를 내자는 것이다. 2014년 5월에 일어난 남성 아일리비스타의 여성 학살 사건 뒤, 여성들이 트위터에 '여자들은 다 겪는다'란 태그로 그간 자신이 당했던 남성들로부터의 온갖 희롱과 폭력을 다 올렸던 것처럼.


 그 중 제니 추라는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p. 183)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전혀.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추행이나 폭력, 강간이 비일비재하고 여성들의 두려움이 존재하는 한, 양성평등은 아직 요원한 것이다. 그러니 여성을 경청할만한 존재로 만드는 페미니즘은 필요하고 여성들은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금 여성들이 그나마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면 그건 모두 같은 여성이 합심하여 목소리를 내어 쟁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남성 권력에게서 자발적으로 주어진 것이 없다. 여성들이 항의 전화를 하고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하는 등의 적극적인 행위로 빼앗아 온 것이다. 아직도 여성에겐 가져와야 할 것이 많다. 더구나 지금 남성 권력은 더욱 여성을 길들이려 하고 여성에게서 주체성을 앗아가려고 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아주 발버둥치는 느낌이다. 여성 혐오가 곳곳에서 자주 표출되는 것을 보노라면.


 이런 상황에서 리베카 솔닛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자신의 능력과 힘을 믿고 연대하라는 것이다. 가야할 길이 천마일이 넘는 먼 길이라고 해도 '길은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아가며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원하는 세상은 거미줄처럼 걷는 와중에 어느덧 도래할 것이라며. 설령 도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기억은 남을 것이며 그러면 또 누군가 그 기억을 이어갈 것이라며.


 그녀가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오지 않으리란 것은 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걷지 않는다. 수많은 남자, 여자들, 그보다 더 흥미로운 다양한 젠더의 사람들이 함께할 지 모른다. 여기 판도라가 손에 들었던 상자와 지니가 풀려난 호리병이 있다. 지금 그것들은 감옥과 관처럼 보인다. 이 전쟁에서 사람들은 죽을지언정, 생각들은 지워지지 않는다.(p. 227)


 (덧붙여, 인용한 그림은 모두 책에 인용된 그림으로 아나 떼레사 페르난데스의 그림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으므로, 자기 자신이든 자기 어머니든 다른 유명인이든 누군가의 삶에 대해서 혹은 어떤 사건이나 어떤 위기나 다른 문화에 대해서 진실하게 쓴다는 것은 드문드문 존재하는 어두운 부분과 역사의 밤들과 미지의 장소들을 거듭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어둠들은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는 본질적인 미스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실은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보는 개념부터가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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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freyja 2015-05-23 06:00   댓글달기 | URL
꼼꼼하고 유익한 리뷰 감사합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와 함께 찜해둡니다. 즐거운 토요일 보내세요, 헤르메스님

헤르메스 2015-06-01 07:25   URL
프레이야님 말씀 감사합나^ ^ 이 페허를 응시하라도 제겐 정말 좋은 책이었는데 프레이야님 마음에도 드셨으면 좋겠네요. 벌써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어요. 이번 한 주도 잘 보내시길 바랄게요^ ^

아무개 2015-05-23 10:35   댓글달기 | URL
멋진리뷰 감사합니다!

헤르메스 2015-06-01 07:26   URL
감동댓글, 감사합니다! 아무개님^ ^

다락방 2015-05-26 08:44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이 폐허를 응시하라]를 보관함에 넣게 되었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헤르메스 2015-06-01 07:28   URL
웃! 다락방님, 말씀 감사합니다.^ ^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어떻게 읽으실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