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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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리처드 도킨스와 더불어 대표적 무신론자인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스완송', 그러니까 그가 세상에 가장 마지막으로 내놓은 유작이다. 2011년 12월 15일, 그는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그렇게 떠나기까지의 마지막 여정을 담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히친슨을 수식하는 것들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것들이 특히 대표적이다. 논쟁가, 독설가, 무신론자. 그는 40년간 수많은 칼럼, 에세이, 기사 그리고 책을 썼지만 그래도 이러한 수식어를 갖도록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단연 '신은 위대하지 않다'라는 책일 것이다.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장본인이기도 한 이 책에서 그는 제목 그대로 신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그동안 종교가 신의 사랑과 인격성을 설파해온 것에 반발해 사실 신은 지극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며 따라서 이런 신에게 사랑을 바라는 건 자기모순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리하여 종교가 겁주는 대로 '신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물론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신이 있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낫다고 단언한다. 이 책은 정말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고 그를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종교계의 주적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런 그이니만큼 그의 최후는 아무래도 세인들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그동안 그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대었던 사람들은 이런 최후의 순간에도 과연 그가 신을 안 믿는지 어디 한 번 두고보자 는 심정이었다. 그들은 그걸 신의 복수라고 생각했다. 목소리로 신을 부정했기 때문에 신이 하필이면 바로 그 목에다 암을 생기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에게 용서를 빌고 그에게 구원받을 것을 설득하는 메일들이 잇달아 날아오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까지 생겨난다. 유투브에까지 그런 동영상이 걸린다.


 그래서 말인데, 이 책은 대답이다. 바로 그런 그들의 냉소와 바람 그리고 기도에 대한 냉정하면서도 신랄한 대답인 것이다.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죽음을 목전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신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라는 그들의 물음에 그는 이런 식으로 기꺼이 대답한 것이다. 몸으로, 삶으로 직접.  신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 지를. 이 책은 그 기록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크라테스적 죽음의 재현과도 같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셨을 때 그는 죽음이 어떻게 찾아오는지 보겠다며 끝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음이 찾아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도 이와 같다. 끝까지 냉정하고 차분하게 자신을 객관화한다. 인정에 호소하지도 않고 동정을 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신랄하게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리얼리티 쇼처럼. 신 없이 죽어가는 과정을.


 이 책의 원래 제목은 'MORTALITY'다. 죽음을 뜻하는 허다한 말들 중에서 이 말은 특히나 '필멸', '반드시 죽음', 이렇게  '피할 수 없음'을 강조 하고 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이 궤적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히친스도 그랬다. 그는 2010년 6월 8일, 자신의 새책을 위한 홍보 여행을 시작한 첫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죽음으로 가는 여정의 티켓을 받았다. 


 살면서 자다가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눈을 뜬 적이 지금까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내 '시체'에 족쇄로 묶여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의식을 되찾은 6월의 어느 이른 아침은 그런 것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가슴과 흉곽 전체를 텅 비워버린 다음 서서히 굳는 시멘트를 채워넣은 것 같았다.(p. 19)


 당연히 그 역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미래가 말살되어 버리는 순간 앞에서 아무리 히친스라 하더라도 냉정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결국 어차피 도래할 죽음. 그는 지금 일어나는 모든 울분들이 무엇인지 잘 안다.


 다음 10년 동안 할 일들을 진지하게 계획해두고,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계획한 일들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정말로 살아서 아이들의 결혼식을 볼 수 없을까? 세계무역센터가 다시 솟아오르는 것도 볼 수 없을까? 헨리 키신저나 요세프 라칭거 같은 늙은 악당들의 사망 기사를 쓸 수는 없더라도 읽는 것은 할 수 없을까? 하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쓸데없는 생각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감상과 자기 연민이라는 것을.(p. 24)

 

그리고 이런 냉정함이 찾아온다.


 "왜 하필 나인가?"라는 멍청한 질문에 우주는 아주 귀찮다는 듯 간신히 대답해준다. "안 될 것도 없잖아?"(P. 25)


 이왕 이렇게 되었다면, 신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 히친스. 그는 자신이 몸소 겪어야 말을 하는 사람이다. 경험이 바탕되지 않는 말은 섣불리 하지 않는다. 물고문이 가져오는 고통을 말해야할 때 그는 정말 물고문이 얼마나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망치는 지 알기 위해 자신에게 실제 그것을 자행하도록 했다. 그 정도로 그는 자기가 겪은 것과 알고 있는 것만을 쓰는 사람이다. 내 생각에 히친스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말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자기가 신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걸 말했다면 그 삶의 모습마저도 그러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기록은 조금의 꾸밈도 없이 일어난 사실 그대로를 써야 한다고.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그렇게 써내려나간 기록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흔히 기대하곤 하는 것들은 하나도 없다. 암과의 모진 싸움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나가는 영웅적인 면모도, 삶의 끝자락에서 타인과의 유대를 통하여 다시금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식의 읽는 이도 감동으로 치유되는 이야기도,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지?" 식의 토로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히친스는 '왜 심장병이나 신장병도 암처럼 오래도록 사람을 고생하게 만드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투쟁이나 싸움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유독 암에게만 그런 말을 붙여 그 과정을 영웅적인 투쟁으로 보이게 하는지 의문을 표시하며 '잘 지냈어요? '어떻게 괜찮아요?' 같은 환자들에게 의례히 묻곤 하는, 설령 뭔가 환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건네는 말이라 할지라도 고문과도 같은 과잉 배려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런 친절은 바로 코 앞에 닥친 막막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잊게 하려는 마음일 것이나 그렇다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이나 죽음이라면 차라리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고 솔직하게 지금 현존하는 고통이나 비극적 상황에 대해 말을 나누는 게 나을 것이라 말한다.


 죽음이 언젠가는 도래하고말 생리적 현상이라면 거기에 대해 그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더 보태거나 빼지말고 그냥 직시하고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그저 충실히 삶을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지 않을까 하는 뜻을 내비치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엔 종양으로, 그리고 화학치료로 육체가 망가지는 고통은 있어도 거기에 대한 슬픔과 곧 삶을 떠나게 된다는 자각에서 오는 한 같은 것은 없다. 치유를 위한 기도도, 내세를 위한 기도도 그는 원하지 않는다. 그저 홀연히 세상을 떠나게 될 때까지 어떻게든 남은 시간을 충실히 보내고 싶을 뿐이다. 진정 그것 뿐이다. 이 기록 역시도 바로 그 충실을 위한 것이다. 사실은 그럼으로써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신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 지 말이다.


 예전에 한 드라마가 암 세포도 생명이라고 제거 수술을 거부한다고 해서 많은 이들의 조롱을 받은 적이 있다. 재밌게도 히친스가 마치 거기에 대해 답변한 것과도 내용이 있었다. 그는 암세포도 생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무생물적인 현상에 생물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한심한 오류(P. 31)'라고 답한다. 


 내가 식도에 생긴 종양을 '감정도 없고 맹목적인 외계인'으로 묘사한 것은 나조차도 그것에게 모종의 생명체 같은 성질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인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이 실수였음은 알고 있다. 무생물적인 현상에 생물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한심한 오류의 한 사례인 것이다. 암 덩어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유기체가 필요하지만 암덩어리는 결코 살아있는 유기체가 될 수 없다. 그것의 악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것의 '최선'이 곧 숙주와 함께 죽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숙주는 암 때문에 죽어버리거나, 아니면 암을 박멸하고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내는 수 밖에 없다.(P.32)


 암만 특별하게 투쟁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과 이렇게 종양에 생명체 같은 성질을 부여하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에게 도래한 상황이나 고통에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자 함인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이 상황이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무의미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의미가 있을 것을 원한다. 그래야 그것을 당하고 있는 그 존재도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이대로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투쟁으로 영웅적으로 만들고 생명체로 만들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맞다. 이 모든, 사실은 무익한 노력의 본질엔 바로 '자기 연민'이 있다. 이대로 허무하게 없어질 자신이 불쌍해죽겠다는 고백이 있는 것이다. 히친스가 이런 말을 하는 건, 그것이 신에 대한 태도에도 그대로 통하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신에 의지하는 것. 그것 역시도 정말로 신을 믿거나 의지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연민 때문임을 말이다.


 그러니 히친스에게 신 없이 죽을 수 있는 것엔 아무런 문제도, 어려움도 없다. 자기 연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에 걸친 현재 자신의 육체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신랄한 묘사도 그리고 어떤 위안과 유대감을 가지려는 병원이나 지인들의 친절에 까칠하게 구는 것도 알고보면 그 때문이다. 언제나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봐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죽음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경험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생각도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도 이 책이 하나의 대답이라고 했지만 히친스가 자신의 삶을 정답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다. 무신론자로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삶에 뚜렷한 정답이 없다는 것과 같다. 종교가 특히 그렇지만 정답이란 많은 부분 도그마가 되어 그 진실 여부에 대한 제대로 된 검증없이 사람의 삶을 구속한다. 무신론자는 그렇게 구속 받는 것을, 나아가 그런 구속을 줄 수 있는 것을 일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는 전도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삶을 살 뿐이다. 그 삶의 여정을 보고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든 오로지 그들의 몫인 것이다.


  히친스는 이 책의 제목을 'MORTALITY'라고 했다. 이것은 '지금은 내 이야기이지만 언젠가는 바로 너의 이야기이다.'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함인 것 같다. 필연코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죽음 앞에서 히친스가 '나는 이렇게 살다 가는데 너는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를 묻는 것 같은 뉘앙스를 이 제목은 풍기고 있다. 그렇게 이 책 자체는 독자에게 하나의 질문이며 이제 독자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죽음에 대한 태도의 역사적 변화를 밝혀 유명해진 필립 아리에스라는 역사가는 근대 이후로 죽음이 점점 개인화되고 부정적인 것으로 변모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건 공동묘지가 점점 공동체 사회로 부터 멀어지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도 한다. 그렇게 현재는 체계적으로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고 그럼으로써 삶에서 배제해 왔다. 어떤 학자들은 그러한 삶에서의 죽음 추방이 지금처럼 삶을 욕망 추구의 극단적 현장으로 만들어버렸다고도 한다.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두라'는 '메멘토 모리'는 중세인들 모두가 뇌리에 새겨둔 격언이었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죽음과의 대면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현명하게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에게도 바로 그런 대면이 필요한 것 같다. 모의 장례식 체험처럼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당신을 고해성사를 받듯 죽음과의 대면으로 데려간다. 무엇을 얻게 될 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이끄는 대로 한 번 걸음을 내맡겨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진심으로.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신광은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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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어떻게 이 리뷰를 읽게 되었을까 생각해 봤다. 물론 어릴 때 보았던 로봇 애니메이션을 얼른 연상시키는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라는 제목이 호기심에 불을 당겼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호기심. 어떤 책일까 궁금했겠지만 리뷰까지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뷰를 읽는다는 건 어디까지나 책에 대한 정보를 더 원해서이고 그건 이 책을 한 번 읽어볼까 마음이 생겼기 때문일 테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왜 이 책을 읽어볼 생각을 했을까? 그건 아마도 부제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국 교회가 만들어낸 거대한 괴물'이 바로 '아르뱅주의'라고 하고 있으니. 이 부제에 눈길이 머물렀다면 최소한 당신 스스로도 지금의 한국 교회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쪽일 것이다. 실제로 지금의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구태여 그 증거를 여기서 밝힐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된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봐도 비리와 범죄로 얼룩진 한국 교회의 모습은 허다하게 나올테니까. 지금 한국 교회는 세 명의 노예다. 권력의 노예고 자본의 노예이며 욕망의 노예이다. 지도자나 성도들 할 것없이 하는 행태를 볼라치면 그들이 말하는 사랑과 그들이 두려워하는 지옥은 오로지 그들의 입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어둠이 짙어지면 작은 반딧불도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법이듯, 이렇듯 문제가 심각해지면 고조된 위기감으로 스스로 자정해보려는 목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구약시대 황무지를 떠돌며 당대의 이스라엘을 정죄하고 종말을 선포했던 선지자들이 그러했듯이.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도 그런 목소리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 일단 '아르뱅주의'라는 뜻모를 말부터 살펴보자. 분명 처음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말은 저자가 만든 말이니까 말이다. 아르뱅주의는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합친 말이다. 저자 신광은은 이 두가지를 한국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으로 보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칼뱅의 사상은 스코틀랜드인 그의 제자 존 녹스에 의해 장로교가 되었고 그 장로교는 지금 한국 개신교에서 가장 세력이 큰 교파이니까 말이다. 그럼 아르미니우스는? 나도 아르미니우스는 잘 몰랐는데 뿌리는 칼뱅 신학에 있으나 몇 가지 점에 반발해 나온 사상이라고 한다.  저자가 특별히 이 두 가지를 들고 나온 것은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잘못된 구원론에 있으며 그 문제가 되는 구원론의 중심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주의이기 때문이다.


 이 예민한 구원론을 건드리려고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오늘날 유통되고 있는 통속적 구원론은 종교개혁자들의 본래의 가르침에서 떠나버렸다. 현대 기독교 대중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희한한 구원론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거짓 위안을 누리고 있다. 둘째, 500년전 종교 개혁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들이 있다. 그들은 시대의 아들로서 당시의 역사적 과제와 맞서 위대한 싸움을 했고 그 결과 우리는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그들의 한계를 발견하고, 21세기라는 현 상황과 그들의 신학 사이의 부조화되는 면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우리가 종교 개혁가들의 후예라면 미진한 개혁을 온전히 하는 데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다.(p. 104~ 105)


 이러한 동기와 문제의식으로 그는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주의에 천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칼뱅 교리를 다루고 있는 2부와 아르미니우스 교리를 다루고 있는 3부가 이 책의 등뼈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대략적으로 소개해 본다면 이렇다.


 사실 막스 베버도 인정했듯이 칼뱅은 현대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낳게 한 장본인으로 그 영향력은 비단 신학에만 그치지 않지만 지금의 주제와 관련해서 말해본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정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예정론'을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미리 결정해 놓은 것으로 오해하곤 하는데 사실 칼뱅의 예정론은 선행 결정된 구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칼뱅이 예정론을 통해 말하고 싶어했던 건 단 하나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전적인 무력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즉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만이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 바로 예정론의 핵심이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무력함. 칼뱅의 신학은 바로 이것을 반석으로 세워진 사상이었다. 신광은은 칼뱅 교리의 핵심 5가지를 들어 TULIP, 즉 튤립 교리라 말하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아르미니우스와의 차이점에 관해서라면 그렇게까지 나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저자 스스로 아르미니우스의 주요 문제를 '자유의지 없으면 책임 없다'에서 찾고 있으니.


 그러니까 핵심은 간결하다. 때로는 이렇게 포커스를 좁히는 것이 이해가 보다 더 선명해질 것이다. 지금 '자유의지'가 나왔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논쟁을 통해 갈라져 나온 사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르미니우스가 칼뱅에 대해 공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그게 자유의지였다. 왜냐하면 칼뱅은 오로지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 인정하므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로지 선이나 악중 하나를 택할 수 있을 뿐 칼뱅에 따르면 다른 자유는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신이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다를 바 없으니 어떻게 그 행위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지울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뱅은 윤리적, 사회적, 종교적 책임을 강조했다. 이건 모순이다. 이건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래도 말해본다면 때문에 칼뱅은 좀 무리를 했다.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은 오직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뿐, 의지까지 하나님이 가로막은 것은 아니라는 둥, 하나님이 인간 의지에 반하여 악을 선택하도록 외압을 가하지는 않는다라는 둥 하고 말이다. 예외가 늘어나고 변명이 붙는다. 이렇게 되면 이론은 설득력을 잃는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로 그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모순을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히 해결할 수 있는 '스켈레톤 키'가 있다.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 바로 아르미니우스의 핵심이다. 그들의 모든 주장은 바로 이 전제로부터 출발했다. 책에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핵심을 칼뱅과 똑같이 다섯 개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칼뱅주의 


 자연적 무능력                                                                   전적 타락  

 조건적 선택                                                                      무조건적 선택  

 보편 속죄                                                                         제한 속죄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조건적 견인                                                                      성도의 견인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얼른 무슨 의미인지 납득이 안된다면 괜히 말만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은 저 말의 뜻에 대하여 저자가 설명한 것을 읽어봐도 얼른 이해 안 가기도 한다.(내가 신학적 용어에 과문한 탓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자연적 무능력의 경우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로 회복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무능력이라고 할 수 없지 않나? '자연적 무능력'을 따로 항목으로 하여 설명하는 곳에서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믿음은 인간 자신의 행위'라고 말하여 믿음을 인간의 능력으로 보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나온 용어인지 알송달송하다.


 그 외에는 이해하기에 별로 어려울 게 없는 듯 하다.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다른 하나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만 염두에 두고 보면 모두 그로부터 나오는 뻔한 결론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으니.

 인간이 자유의지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이상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축소될 것이기에 무조건적 선택이 아니라 조건적 선택이 될 수 밖에 없고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이상 속죄의 가능성 역시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반항의 자유가 인정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전적인 끌어당김만 가능한 칼뱅과는 달리 자유의지가 있는 이상 인간 스스로 거룩하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니 '성화'가 강조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자, 이렇게 2부와 3부에 걸쳐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설명한 다음 본격적인 저자의 할말은 비로소 4부에서 시작되는데 여기서 그는 한국 교회를 망친 주범인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를 해부한다. 그에 따르면 '아르뱅주의' 역시 그 핵심을 다섯가지로 말할 수 있다고 한다.

 

 1) 타락에 대해 : 전적인 - 전적이지 않은 전적 타락

 2) 선택에 대해 : 조건적 - 무조건적 선택

 3) 속죄에 대해 : 보편 속죄

 4) 은혜에 대해 : 저항할 수 있는 은혜

 5) 견인에 대해 : 성도의 견인(완전한 견인)


 이상인데 1)과 2)는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혼합했고, 3)과 4)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이며 5)는 칼뱅의 것이다. 한국 교회의 구원론은 이렇게 혼합되어 있는데 저자에 따르면 여기엔 어떤 원칙도 없다고 한다. 그저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와 썼을 뿐. 그래서 그는 싸구려 구원론이라 부른다. 저자가 아르뱅주의를 '싸구려'라고 부르는 것은 그 무원칙성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더 커다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아르뱅주의가 교인 스스로 윤리적으로 살려는(그러니까 원래 하나님과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노력을 방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일례로 교회 내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문제들에 교인들이 직면하게 되는 경우, 즉 '교인의 위선적인 삶에 실망할 때나, 목회자들이 전혀 본이 되지 않음을 발견할 때 혹은 교회가 윤리적으로 파탄 났을 때 아르뱅주의자들은 신자의 전적인 타락설로 이를 변명한다. "인간은 철저하게 타락한 죄인이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악한 걸 어쩌겠어!"(P. 227) 등으로. 그렇게 스스로 잘못된 점을 고치려는 노력을 가로막는다. 또한 무조건적 선택은 죄를 저지른 이들을 쉽게 용서하게 만들기도 한다. 저자는 이러한 아르뱅주의의 특성이 고문기술자로 유명한 이근안을 목사로 되게 만든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문제를 일으킨 교회의 지도자가 계속 버젓이 그 교회의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고 말이다. 회개하는 척만 해도 모든 게 다 손쉽게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쉬운 용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마저도 쉽게 만든다. 이게 바로 보편 속죄가 가진 달콤한 독약이다. 그저 '믿음'의 고백만으로 구원 받게 하여 교인 스스로 구원을 위한 노력에 힘쓰지 못하게 만들고 더구나 '예수천국불신지옥'이라는 단순화마저 낳아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이쯤되면 저자가 왜 아르뱅주의를 이토록 문제삼는지 그 진짜 이유가 조금쯤은 내다보일 것 같다. 바로 교회와 성도 모두를 어항 속의 물고기로 만들기 때문임이 말이다. 현실에 어떤 문제가 있고 자신들이 아무리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해도 자신들은 이미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어항과도 같은 그 갇힌 세계 속에서 빠져나오려는 아무런 노력 없이 그저 평안히 유영하기만 하는 영혼이 죽어버린 좀비로.


 그렇게 스스로 정화하려는 노력을,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현실 참여의 노력을 뱀파이어처럼 현재의 아르뱅주의가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아르뱅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구원론이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5부와 6부는 그것을 위한 일종의 정지(整地)작업이다.


 그는 그것을 위해 사실 좀 멀리까지 나아가는데, 무려 지금 신학의 주춧돌이 되었을 그리스 철학까지 공격한다. 특히 실체를 상정하는 존재론과 모든 문장을 명제화시키는 논리론을 공격한다. 그리스 철학은 지금의 신학을 있게 한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기초가 되었는데 그 그리스 철학을 공격한다 함은 지금까지 이어온 신학 전통을 깡그리 비판하는 것이어서 얼른 보기에도 무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렇게 공격을 감행하는 까닭은 그가 세우려는 새로운 구원관과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생겨나게 된 근본 원인을 생각하다보니 그런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 철학이 주로 했던 존재와 명제에 대한 집착 탓이라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유의 전통이 성경에 있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실체를 상정하게 함으로써 그 존재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사유하게 만들고 또 그 모든 문장들을 명제화시켜 그 참과 거짓을 따져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성경에 대한 지나친 인간의 개입을 염려하고 있다. 되도록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을 것을 바라고 있다. 이는 성경의 원저자인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아서 여기서 저자가 은근히 다시 칼뱅에게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비록 그의 문제 의식에는 상당히 동의하지만 사실 이 부분에서는 개인적으로 선뜻 동의하지는 못한다.


 지은이와 달리 나는 '철학자들의 신'이 절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에게 전적으로 타자일 수 밖에 없는 무한성을 생각하는 건 피할 수 없는 본능이라고 생각된다. '헤아림'은 우리에게 떨어질 수 없는 그림자와도 같다. '말씀'이 우리 눈 앞에 놓여있는 한 그 말의 주체에 대해 사유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 말이 옳고 그름을 검증해서 생기는 문제들도 있겠지만 무턱대고 믿어서 생겨나는 문제들도 그에 못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 기독교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진정 인격신이고 그가 우리들의 사랑을 받길 원한다면 그 존재에 대한 사유와 말이 가진 진리치에 대한 사유는 오히려 필수라고 생각된다. 사랑은 이해의 차원에서 생겨나는 감정이다. 우리는 납득할 수 있을 때 사랑할 수 있다. 아무런 사유없는 전적인 나의 내맡김을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지 않고 숭배라 부르는 건 그 때문이다.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숭배했던 게 그 무사유 때문이지 않았던가. 지은이도 이 책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주장하는 자유의지에 대해 반박할 때 '집단악'을 이야기하면서 아이히만이 자행한 유태인 학살을 예로 들었는데 한나 아렌트 말대로 그 역시도 무사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대로 교회와 신도 모두가 스스로 정화되고 성화되는 노력을 하는데 있어 어떻게 존재와 말에 대한 사유 없이 그게 가능할까? 인간은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순순히 따르는 기계가 아니다. 특히 윤리적 삶과 관계된 종교라면 인간 스스로 자발적 이해를 통해 그것을 내면화시켰을 때 더욱 지키려 애를 쓸 것이다. 타인이 지켜보든 말든 상관없이. 


 앞서 말했다시피 아르뱅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써의 새로운 구원관에 관해서라면 이 책에서는 정지 작업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구원관의 정확한 모습보다는 지금 우리가 극복해야할 낡은 구원관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 책은 끝이 난다. 그 구원관들은 영지주의가 정착시킨 육체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천상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구원관이며 지옥을 피하고 천국에 가고픈 이원론적 구원관이다. 이 모두는 죽음 이후의 구원관을 말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현실에서의 노력을 포기하게 만듦으로 그는 바로 이 삶에서 그런 노력을 할 수 있게끔 삶적인 차원에서의 구원관을 새로이 가져온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다. 하지만 여기서의 '나라'는 영토,즉 공간의 개념이 아니다. 그건 낡은 구원관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개념이었다. 낡은 구원관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을 상정했다. 하지만 저자는 '바로 이 삶에서의 노력'을 강조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됨'을 강조한다. 즉 '나라'를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의 개념으로 바꾸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에 편입되는 것이며 그 진정한 뜻은 이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구원이란 내가 어디를 거거나 내 존재의 바뀜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이 삶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내세의 지복을 위해 현실의 삶을 내버려둔다면 그건 구원이 아니며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추방되는 것이다. 그가 세우려는 구원관은 바로 이런 것이며 여기서 방점은 어디까지나 '실제 삶에서 노력하게 만드는' 곳에다 찍혀야 한다. 이런 구원관에는 나도 동의한다. 진실로 나역시 현실적인 삶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는 이런 책이다. 감사의 글과 각주를 빼면 모두 490페이지로 다소 두터운 분량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말하는 것에 비해 분량이 좀 많다고 생각된다. 이유를 짐작하자면 저자가 너무 친절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생략하고 건너뛰어도 될 설명들이 많았다. 어쩌면 이런 방면에 전혀 경험이 없는 초심자를 위한 배려일 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용어들을 좀 알기 쉽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신학에서는 굳어진 용어들이라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일반인의 눈에 얼른 납득가지 않는 용어들이 다소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복음주의'에 대한 부분이었다. 사실 한국 교회를 가장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복음주의'일 것이다. '복음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산물이다. '복음주의'는 주로 전도 집회를 통해 퍼졌는데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주장하는 '보편 속죄'와 믿기로 결단하는 '자유의지'를 믿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책 제목이 칼뱅이 앞에 나오는 '칼배아르주의'가 되지 않고 '아르뱅주의'가 된 것도(뭐, 확실히 '칼배아르주의'가 어감상으로 영 아니긴 하지만) 이와 관계가 있을 듯 하다. 한국교회가 이처럼 복음주의에 빠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왔던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집회 때문이라고 한다. 그 때 빌리 그레이엄은 하나님과 개인이 일대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고 그 전까지는 들어보지 못했던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하나님에게 감명받아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다른 교회들에게 복음주의가 바로 성장의 열쇠라는 걸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때부터 '제자 훈련'이나 '경배와 찬양'등 전도에 주력하는 교회 프로그램이 자리잡으면서 교인 모두가 전도에 열을 올리는 '총동원체제'를 낳아 결국 교회가 대형화되는 추세로 이어졌다. 그렇게 밖으로만 밖으로만 열을 올릴 뿐 정작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할 현실 속 자신의 삶을 신경쓰지 않아 오늘의 한국 교회는 타인들에게 괴물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본다면 진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은데 과연 이렇게 우연히 자리잡게 된 '복음주의'를 어떻게 극복할지 책을 덮으며 문득 떠오르게 되는 의문이다. 여기엔 이 책보다 더 정교하고 설득력 있는 논의들이 필요할 것 같은데, 여기서는 그저 스케치만 이루어진 새로운 구원관이 언젠가 제대로 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는 날 그 역시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며 이만 글을 줄인다.

  



 



 
 
 
제3의 성공 - 더 가치있게 더 충실하게 더 행복하게 살기
아리아나 허핑턴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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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뉴스 애그리게이터로 미국에서 유명하던 허핑턴포스트가 이제 전세계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디지털 미디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최고 권위의 언론상인 풀리처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건 비단 허핑턴포스트만의 경사는 아니었다. 일간지에 비해 늘 2인자로 취급받던 디지털 미디어가 이제 그들과 대등한 존재가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사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향력은 이미 압도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았다. 그 해, 허핑턴포스트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 사이트 1위에 랭크되었을뿐 만 아니라 방문자 수 또한 미국의 유명한 주요 일간지들의 방문자 수를 넘어서고 있었으니까. 누구도 이런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다. 그것을 현실로 만든 오늘의 허핑턴포스트를 낳게 한 이가 바로 아리아나 허핑턴이다.




 
 이번에 나온 '제3의 성공(THRIVE)'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간되는 그녀의 책이자 1950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나 1973년에 처음으로 책을 집필했던 그녀가 2014년인 올해 14번째로 내놓는 책이다. 원래 아리아나 허핑턴은 정치 성향이 강했고 그리스인답게 투사 기질도 있는 편이었다. 그녀의 적극적이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 오늘의 허핑턴포스트를 낳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제3의 성공'을 들춰본다면 이런 내 말이 의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책에는 그러한 그녀의 성향이나 기질을 전혀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그녀는 변했다. 허핑턴포스트를 초기부터 보아왔던 사람들도 그런 평가를 내렸다. 그녀는 보수적이 되었다. 관심도 정치에서 삶으로 이동했다. '어떻게 하면 보다 제대로 된 삶을 살 것인가?' 이제 이것이 그녀의 화두가 되었다. 그 계기가 있었다. 때는 2007년 4월 6일. 그녀는 사무실 책상에서 일어서려다 갑자기 쓰러졌다. 쓰러지면서 책상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혔고 광대뼈가 부러지면서 기절해버렸다. 허핑턴포스트의 성공을 위해 너무 자신을 몰아세운 나머지 과로와 수면 부족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그걸 경고라 생각했고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 때, 그녀는 이미 타임지에서 세계에서 가장 영량력 있는 100인 중 한 사람으로 뽑을 정도로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으나 그 사건은 지금의 삶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 시각 속에서 그녀는 지금의 삶을 성공적이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어떤 삶이어야 그것이 가능할까를 추구했다. '제3의 성공'은 바로 그런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나도 잘 안다. 성공한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처럼 식상하고 지루한 책도 또 없다는 것을. 아무리 그 아리아나 허핑턴의 책이라고는 하지만 이 책을 들었을 때, 그런 걱정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앞에서 내가 아리아나 허핑턴이 변했다는 말까지 하지 않았나? 하지만 지금 나는 이렇게 분명히 말한다. 그건 기우였다고. '제3의 성공'은 흔한 성공한 자들의 삶에 대한 조언과는 다르다. 잠깐 비교를 해볼까? 대부분 성공한 자들의 조언은 말 뿐인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부지런히 살아야 한다'고 그들이 말한다면 그냥 그것 뿐인 것이다. 온갖 미사여구가 동원되고 미문으로 차고 넘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그 근거에 대한 것은 정작 빠져있다. 아니, 있긴 있다. 그래, 자기 이야기. 자기가 이래저래 해서 이렇게 성공했으니 잔말말고 그대로 따르라는 식이다. 이런 책에서 느끼는 식상함, 지루함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교과서적인 말만 잔뜩 늘어놓고 기껏 근거를 댄다는 것이 자기 자랑 밖에는 없으니까.

 하지만 아리아나 허핑턴은 다르다. '제3의 성공'은 다른 책에서는 생략된 그 근거에 오히려 집중한다. '번창하다'라는 뜻을 가진 'THRIVE'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책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지 알려주는 책이다. 미리 말해두는데, 그것에 대해서 아리아나 허핑턴이 지금까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어떤 기발한 해답을 내놓을 것이라 기대한다면 그만두는 게 좋다. 여기엔 좋은 삶을 살아가는데 당신이 예상했던 대답을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솔직히 흔한 말로 '뻔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를테면 첫 파트가 되는 '웰빙'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 아라아나 허핑턴이 제안하는 것들을 한 번볼까? '명상하기', '충분히 수면하기',' 걷기' 그리고 '반려동물 기르기'다.  처음 듣는 것이 있는가? 너무 뻔해서 어째 '피식'하고 헛웃음이 날 지경이 아닌가? 그렇다. 여기에 별로 새로울 것은 없다. 오히려 흔하디 흔만 것만 있을 뿐. 그렇다면 나는 왜 이리 주저리주저리 이 책에 대해 쓰고 있을까?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그러니 답은 바로 나온다. 이 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으로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타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와는 다르게 전개되는 이 책의 매력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글이 이만한 길이에 이를 때쯤엔 어쩌면 날지도 모르는 당신의 짜증을 무릎쓰고서라도 여기까지 떠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당신을 이처럼 수고롭게 만들면서까지 말해야 했던 이 책의 매력이 바로 '근거에 대한 집중'이다. 아리아나 허핑턴은 해답 보다는 과정을, 그렇게 명령 보다는 이유를 독자들에게 더 이해시키려는 책이다. 그래서 다른 책들과 다르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뻔한 말들이지만 오히려 더욱 설득적이다. 그것을 독자들에게 충분히 납득시키기 위해 과학적 연구 결과, 다른 학자들의 이론, 다른 이들의 삶이나 말까지 모조리 가져와 근거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명상, 수면, 걷기, 반려동물을 비롯하여 모두가 다 그렇다. 당신은 여기서 참 많은 것들을 듣게 될 것이다. 심리학도, 진화학도, 생물학도, 사회학도, 경제학도, 철학도. 탈무드 식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당신을 성공이라는 물가로 억지로 끌고가지 않는다. 그 많은 근거와 사려깊은 설명을 통해 스스로 그 물가로 가도록 만든다. 그러니 다르다. 그래서 이렇게 수다스럽게 된다.

 그 물가로 당신 스스로 걷게 만들기 위해 아리아나 허핑턴은 '웰빙', '지혜', '경이' 그리고 '베풂', 이렇게 네 개이 장에다 필요한 당근들을 무던히도 놓아 두었다. 물론 그 당근들은 우리가 너무 익히도 아는 것들이다. '지헤'만 해도 혼자 조용히 머물며 마음의 균형을 찾는 것,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나쁜 습관을 깨뜨리는 것 등인데 다 어디서 많이 본 것들이 아니던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았다면 잘 알겠지만 그 처절한 약육강식의 미국 언론 시장에서 무명의 존재였던 '허핑턴포스트'를 업계 1위로 만들고 14권의 책까지 쓴(게다가 그녀는 오랜 편집자 경력 또한 있다.), 시쳇 말로 그 바닥에서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아리아나 허핑턴이 초등학생이 보기에도 하품이 날만한 말을 들려주려고 이 책을 썼을 리는 만무하다. 당연히 이 책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꺼진 불도 다시 보듯이 그 단순한 진리를 다시 보게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새롭게 보기'다. 흔히들 좋은 삶을 위한 진리들은 단순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살면서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고 말 할 정도다. 사실 아라아나 허핑턴이 성공적인 삶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들에 우리들 역시 인정한다. 다만 우리가 인상을 찡그리게 되는 것은 그 말들이 너무 원론적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우리가 이런 책을 찾는 것은 딱 하나다. 지름길이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 때문이다. 독창적이고 기발한 방법에 대한 기대도 사실은 그것이다. 그 독창적이고 기발한 방법들이 원론적이라서 너무 더딘 걸음들을 단축시켜 주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허다한 자기개발서를 읽었어도 여전한 우리 모습을 보면서 확실히 깨달았듯이 그런 지름길은 없다. 축지법도 없다. 그저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것 말고는. 진리는 참으로 단순한 것을.

 하지만 그 길은 늘 보는 익숙한 풍경을 계속 보고가는 것과 같다. 단순한 진리이기에 새로울 게 없고 식상한 풍경에 지루한 길이다. 그래서 아리아나 허핑턴은 새롭게 보기를 이 책에서 제안하는 것이다. 같은 풍경이라도 시선의 방향을 바꾸면 전혀 다르게 보게 된다. 그녀는 그 익숙한 길을 아주 새로운 풍경으로 보도록 이끈다. 바로 그 많은, 그리고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근거들을 통해서다. 그것은 마치 단색으로 칠해져 있던 벽의 페인트를 벗기고 그 안에 원래 있었던 화려하고 다양한 색깔들을 드러내는 것과 같아서 우리는 그 식상한 진리에 그토록 많은 합당한 이유가 존재함에 놀라게 되고 그러함으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구나 납득하게 된다. 걸어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 속으로부터 수긍한 가운데 걷는 길이라 이제 그 길은 남의 길이 아니며 나의 길이며 그래서 걸음은 좀 더 가볍고 여정의 풍경은 새롭게 보이게 된다. 그게 바로 '경이'다. 익숙한 삶을 전혀 새롭게 바라보게 만드는 낯선 경험. 아리아나 허핑턴은 이 경이를 이 책에서 독립한 장으로 만들어 따로 설명할만큼 중요하게 생각했다. 바로 그 경이를 그녀는 처음으로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부를 보고 놀라는 신랑처럼 우리가 아주 식상한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에다 주려고 한 것이다. 제목 그대로 그녀가 가져다 준 새로운 햇살과 비 그리고 바람을 통해 우리가 죽죽 성장이라는 잔가지를 뻗어 무성한 나무가 되도록.

 '제3의 성공'은 바로 그러한 책이다. 에필로그의 마지막에서 그녀는 이렇게 당부한다.

 당신도 설 자리를 찾아라. 지혜와 마음의 평화와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라.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당신이 규정한 성공의 기준에 따라 당신의 생각대로 세상을 다시 만들어보라. 그럼 우리 모두가 번영하고, 지금보다 더 품위 있고 더 즐거운 삶, 또 다른 사람들과 더 교감하고 감사하며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위로! 내면으로! (P. 323)

 나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제대로 깊이 뿌리내릴 대지와 햇살과 비를 아낌없이 베풀어줄 하늘을 찾게 되길. 그리하여 무성한 나무가 되어 넓은 그늘 아래 사람들을 쉬게 할 수 있게 되기를. 모두가 그렇게 되어 거대한 숲을 이룰 수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대구 -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꾼 물고기의 일대기
마크 쿨란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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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cod)는 대표적인 흰 살 생선이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인기는 그리 높지 않다. 그러니 어쩌면 마크 쿨란스키의 이름을 전세계에 대대적으로 알린 이 책 '대구'를 만났어도 그냥 쉽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책을 통해 여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 하나를 놓치게 되는 셈이다. 자주 독서를 여행에 비유하는 말들을 듣게 되곤 한다. 아무래도 책이 지금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낯선 세계를 눈 앞에 열어주기 때문이리라. 사실 책은 그런 것을 줄 수 있다. 이를테면 요네하라 마리의 '팬티 인문학'은 어떤가? 매일 입으면서도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팬티. 그것은 그저 하잘 것 없는 하나의 사물일지 모르지만 요네하라 마리의 손끝에서라면 다르다. 팬티 하나가 역사적으로 또 인류학적으로 거기에다 지정학적으로도 얼마나 다채로운 역할을 해왔으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녀는 진실로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말 놀라게 된다. 팬티라는 사물 하나에 엄청난 이야기의 신대륙이 저장되어 있음을 보고는.
  
 그래서 말인데 우리 주위의 하나의 사물은 땅아래 수많은 갈래로 여기저기 뻗어내려간 잔뿌리를 가지고 있는 들풀과도 같다. 책은 바로 그 잔뿌리를 모조리 들어내어 사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호미이며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서 권태말고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나를 둘러싼 일상이 얼마나 흥미진진하면서도 신비로운 매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인지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책이 위대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 않을까. 어쩌면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어졌고 미래에도 아주 오래도록 여전히 책이란 존재는 남을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전인미답의 신천지를 간직한 곳이기에.

 요네하라 마리가 '팬티 인문학'에서 팬티를 통해 보여주었던 것을 마크 쿨란스키는 '대구'라는 생선을 통해서 보여준다고 하면 이 책에 대한 설명으로 어울릴 것 같다. 아무튼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팬티 인문학'을 읽고 어떤 놀라움을 느꼈다면 분명 이 책에서 같은 것을 느낄 것이라는 거 말이다.


 책 표지에 쓰여 있는 바와도 같이 이 책은 대구라는 생선의 생태에 대해 말해주는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역사 속에서 대구라는 생선이 어떤 역할과 의미가 있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기껏해야 하나의 생선일 뿐인데 설사 역할과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뭐 얼마나 있겠어?'라고 생각하신다면 당장 이 책을 읽는 것이 좋겠다. 어부 집안 출신에다 어부를 동경했던 마크 쿨란스키는 놀랄만한 열정으로 샅샅이 자료를 조사하여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구'가 세계 역사에 미친 여파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으니까. 정말로 이 책을 읽게 되면 인기 없었던 대구를 다시 보게 될 지도 모른다.

 몰랐는데 대구는 대항해시대를 열어젖힌 장본인이었다. 오랜 항해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역시 음식이다. 냉장고도 얼음도 없던 시대이니 음식만큼 상하기 쉬운 것도 또 없기 때문이다. 로마시대 때부터 원정의 가장 골칫거리는 어떻게 하면 음식을 상하지 않게 오래도록 보관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통조림도 발명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는 소금이 맡았었다. 이 소금과 천생연분이었던 생선이 바로 대구였다. 소금에 절인 대구는 다른 어떤 생선보다 오래 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대구의 특성은 쿨란스키가 말하길 바스크 족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고 한다. 대구가 다른 생선보다 오래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최초의 종족은 바이킹이었으나 소금에 절이면 더욱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안 것은 바스크 족이었다고. 덕분에 그들은 바이킹 보다 훨씬 더 장기간 항해할 수 있었고 이후에 대항해시대까지 가능케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쿨란스키는 역사에 있어 문화에 있어 대구라는 생선이 끼친 여파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아주 세밀하게 촘촘히 짜 넣는다. 거의 대구에 관한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말미에는 세계 각지에서 대구를 어떻게 조리하는지 그 방법까지 나오고 있으니, 대구에 관해서라면 절대반지와 같은 책이라고 해도 그리 무리는 아닐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대구라는 생선을 보다 잘 알게 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보잘것 없는 하나의 작은 사물이라 하더라도 그냥 허투루 존재하는 법은 없으며 나름대로 세계 역사에 걸쳐 뚜렷한 존재의 의미와 깊이있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는 것에 있다고 보여진다. 대구라는 하나의 생선에 무려 339 페이지에 걸쳐 빼곡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이라고 해서 그게 안 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이 책은 그 존재 자체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태양 아래 의미가 없다거나 쓸모가 없다거나 보잘 것 없는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어떤 존재든 나름의 뚜렷한 의미와 커다란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모든 건 그 자체로 다 소중하다는 것을. 팬티도 그렇고 대구도 그러하니 이것을 믿지 않을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사회가 점점 커지고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한 개인이 가지는 가치는 점점 작아지게 되었다.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라는 영화에서 보여주었듯이 지금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한 개인이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나사 한 개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존재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사회가 그렇게 여기도록 만드는 것일 뿐이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도 나오듯이 그래야 별 저항없이 노동력을 가뿐히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존재와 능력에 대한 신뢰가 커지고 자긍심이 높아지는 것을 이 자본주의라는 사회는 바라지 않는다. 지금의 사회가 모든 미디어를 동원하여 필요없는 불안을 조장하고 학연이니 지연이니 배경을 중시하게 만들며 획일적인 기준으로 경쟁을 강요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존재 가치와 힘을 믿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인 것이다. 결국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고 자기 불신을 하게 만드는 것. 이 체제의 목적은 바로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작은 한 사물이라 할 지라도 풍부한 이야기의 보고이며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런 책들은 참 소중하다 할 것이다. 이 책들이 내 주위를 둘러싼 사물들의 긍정으로 이끌며 나아가서는 나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푸코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어쩌면 오늘날 주요 목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현재의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지 않을까? 개별화인 동시에 전체화이기도 한 근대적 권력구조의 정치적 이중구속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 우리가 누구일 수 있는가를 상상하고 구축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철학적 문제는 국가와 그 제도들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에 연결되어 있는 개별화의 형태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는 것이다."

 국가와 국가에 연결되어 있는 개별화란 부정적인 자기 인식을 통해 불안 속에서 전체에 달라붙게 만드는 이중구속을 유지시킨다. 그 이중구속 속에서 개인은 전체의 입맛에 맞는 인간으로 스스로 길들여간다. 당연히 그것은 진정한 개별화도, 그것이 수반할 주체화도 아니다. 기존의 권력 관계를 뒤엎는 새로운 주체화를 통한 저항은 그러므로 전혀 다른 쪽의 개별화로 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서투르게 표현하자면 그것이 바로 자기 긍정을 통한 개별화가 아닐까 말하고 싶다. 그런 저항의 선들을 만들기 위하여 이런 책들이 소중한 것 같다. 팬티든, 대구든, 그 무엇이든.

 일본의 인문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손을'에서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혁명임을 말한 바 있다. 혁명이 무엇보다 기존의 주체가 아닌 전혀 새로운 주체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임을 감안한다면 바로 이런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혁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명령 하나를 살짝 변형해서 이렇게 끝맺고 싶다. "읽어라, 잃는 것은 한 줌의 돈과 시간이요, 얻는 것은 해방과 전 세계일지니."






 
 
 
욕망하는 지도 - 12개의 지도로 읽는 세계사
제리 브로턴 지음, 이창신 옮김, 김기봉 해제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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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에 미친 사람을 뜻하는 '맵헤드'를 쓴, 그 역시도 이름난 지도광인 켄 제닝스는 어린 시절 지도가 나오지 않는 판타지 소설은 들춰보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웃겼다. 나도 그랬으니까. 지도가 들어있는 이야기들이 좋았다. 지도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어려서는 가장 많이 들여다 본 교과서가 사회과 부도였고 나이가 들어서는 조르주 뒤비의 '지도로 보는 세계사'였다. 내가 역사를 좋아하게 된 것은 실은 지도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떤 사건을 읽게되면 반드시 그 곳의 위치 그리고 형세를 보아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런 내가 '12개의 지도로 읽는 세계사'라는 부제가 붙은 제리 브로턴의 '욕망하는 지도'를 읽게 된 것은 내일 아침에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듯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읽어 본 소감? 한 마디로 경이로운 책이다. 구글 어스를 처음 보았을 때 잡지 'PC월드'의 편집장 해리 매크래컨은 "황홀하다"고 했다고 하는데 나 역시 이 책에 대해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듯 하다. 만일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어떤 것의 매력을 알려주고 지금까지 바라보았던 이상의 시야를 열어주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한다면 이 책이 그렇다. 번역되지 전부터 이 책의 존재를 알았고 이미 바깥의 상찬을 익히 봐왔던 터였는데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 나처럼 지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무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순식간에 홀라당 읽어버릴지도 모른다. 덕분에 나는 지금 엄청난 후유증을 치르는 중이다. 위장이 뒤틀려 며칠 동안 고생한 것도 모자라 지금은 잇몸이 부어올라 제대로 말하는 것조차 힘들다. 그러니 읽을 때 여유를 두고 읽으시길. 급히 먹다 체한다라는 말이 책에도 그대로 통용되는 말임을 이제서야 몸으로 알았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는 가상이 실제를 대체했다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지도를 든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실제 그 장소에 있을 때조차 그 곳이 내가 찾아가는 곳인지 알기 위하여 지도를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이제 실제는 가상의 보완이 없으면 그 존재조차 인정받기 어렵게 되었다. 그처럼 지도는 가상으로 엮어진 기호의 체계인데 바로 그 때문에 기호가 그러하듯이 있는 그대로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많은 인간적인 것에 좌우되기 십상이다. 이를테면 이 책의 제목처럼 욕망 혹은 가치관 같은 것들. 제리 브로턴은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지도를 만들려는 욕구는 인간의 기초적이고 지속적인 본능이다."라고 말했다. 본래 생물에겐 '인지적 관계대응'이라고 해서 거대하고 두렵고 인식할 수 없는 '저쪽' 세상과의 관계에서 나를 구별하고 정의내리기 위해 공간적 환경과 관련한 정보를 획득하고 처리하며 상기하는 행위를 본능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도 제작까지 나아가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다. 그러므로 나처럼 지도 보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어쩌면 나의 나됨을 붙잡고 싶은 욕망의 발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그냥 지도가 아니라 '세계지도'를 대상으로 한다. 저자에 따르면 세계지도는 좀 특별한 의미의 영역을 가진다고 한다. 다른 지도 제작과는 다른 도전과 기회에 직면하기 때문이다.(P.30) 지금과 같이 인공위성을 이용한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혁신적 기술이 태동하기 전에는 세계지도를 제작하는 데 있어 특별히 두 가지에 의존해야 했다고 한다. 하나는 머리 위의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력이다. 이 후자가 특히나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사람들이 파악할 수 있는 세계란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세계와는 달리 지극히 협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막대한 외부를 어떻게든 지도에 나타내려면 상상력에 의존하는 것 말고 달리 뭐를 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해서 지도는 실제의 공간을 복사기로 밀어내는 듯 만들어지지 못하고 인간적 욕망의 간섭 아래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건 결코 미개한 기술 때문이 아니다. 가장 혁신적인 기술을 보여주는 구글 어스에서조차 이러한 욕망의 간섭과 위험은 여전하다고 그는 말하고 있으니까.

 그러므로 지도란 결국 만드는 '나'의 표현이다. 나의 욕망, 가치관의 상관물이다. 따라서 지도를 들여다 보는 일은 단순히 공간의 위치를 특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만든 이들의 욕망, 가치관을 들여다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지도란 책이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란 책을 읽어보면 허클베리 핀이 자신이 도와주는 한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구절이 나온다. 
"당신의 얼굴은 책 같아요. 그들은 당신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얼굴에서 다 읽게 될 거에요."
지도가 바로 그렇다. 제리 브로턴은 자신의 책을 통해 이것을 입증한다. 그렇게 우리는 제리 브로턴의 인도로 12개의 세게 지도를 만나면서 허클베리 핀이 말했던 그대로 당시 그 지도를 제작했던 이들이나 국가의 심중에 무엇이 있었는지 혹은 바랐는지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읽는가? 먼저 이 책은 지도로 읽는 세계사이다. 우리나라 책에는 부제로 쓰였지만 원래 제목은 이것이었다. 제목 그대로다. 정말로 우리는 지도를 매개로 역사적으로 세계가 변천해 온 과정을 읽을 수 있다. 특히나 3장,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는 '헤리퍼드 마타문디'와 5장,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는 마르틴 발트제묄러의 세계지도'를 비교해 보라. 여기서 우리는 정확히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굴곡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300년경에 제작된 헤리퍼드 마파문디

(중세 시대의 대표적 지도로 영국의 해리퍼드 성당의 별관에 보관되어 있어 그렇게 불리고 있다. 마파문디라는 말은 넵킨을 뜻하는 라틴어 '마파'와 세계를 뜻하는 라틴어를 합친 말이다. 현재 유네스코 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기독교가 지배하던 당시 중세의 가치관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도 맨 위에 예수님이 보이고 예루살렘이 지도의 중심에 놓여져 있고 그 곳이 속한 아시아가 지도의 2/3을 차지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도의 위쪽이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북쪽이 아니라 동쪽이라는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도의 위쪽은 북쪽으로 하는 게 좋다고 하여 그 때부터 북쪽으로 해왔는데 여기서는 무시된 것이다.(이는 중세 지도의 특징이기도 하다.) 더구나 프톨레마이오스의 격자선도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거대한 구안에 갇힌 세계는 이 지도가 보여주려는 게 세계가 아니라 예수가 다스리는 세상이라는 기독교를 보여주려는 듯 하다.
 

 '미국의 출생성명서'로 유명한 마르틴 발터제묄러의 세계지도
(1507년에 제작되었고 목판 인쇄되었다. 1998년 미국 의회도서관이 무려 천만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구입해 더욱 유명해졌다. 지도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미국 의회도서관은 특히 유명한 곳이다. 세계에서 희귀하다는 지도가 거의 다 여기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출생증명서'라는 말은 이 지도의 진위를 처음 검증하고 이 구입의 필요성을 미국 의회도서관에 알린 영국의 유명한 지도 거래상이자 아메리카지도 전문가인 필립 버든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는 처음 이 지도를 보았을 때 미국 독립선언서와 미국 헌법 다음으로 중요한 미국 문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당시 지도는 독일의 한 백작이 소유했었는데 그 매각 의뢰서를 '발견자들'로 유명한 대니얼 부어스틴(여기서 이 이름을 만나게 될 줄이야.)이 썼다고 한다. 이 지도가 그만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처음으로 아메리카를 독립된 대륙으로 묘사하고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붙여 준 지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바로 이 지도에는 당시 한창 꽃피우던 르네상스적 정신이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파문디와는 다르게 더이상 예수 같은 성경 상의 인물도 등장하지 않고 다시금 프톨레마이오스의 전통으로 돌아가 지도의 위쪽도 그의 권고대로 북쪽으로 잡고 있다. 거기다 르네상스 시대에 새로 발견된 지역들을 프톨레마이오스의 고전적 세계모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한 노력도 현저하다. 이처럼 지도에는 당시 지배하던 가치관들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세계지도를 통해 세계사를 읽는 일이 허언이 아닌 것이다.)

1969년에 발표된 영국의 락그룸 'EAST OF EDEN'의 데뷔 앨범 커버

 (여인의 나신에 메르카토르의 지도가 문신처럼 그려져 있는 멋진 커버로 내가 좋아하는 앨범이기도 하여 이 자리에서 소개해 본다. 앨범 이름 역시 메르카토르 프로젝트이다. 한 마디로 메르카토르가 지도를 통해 하려고 했던 일을 음악을 통해 하겠다는 뜻을 표방한 것. 이들은 주로 인도 음악 스타일을 많이 연주했는데 그런 면에서 관용을 지도를 통해 구현하려 했던 메르카토르의 이념을 잘 따르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LP로 보면 더욱 근사한 커버다.)

 그런데 이렇게 읽다보면 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지도를 만들고 보고 읽는 '인간'이다.

 지도에 투사하고 있는 가치관, 지도에 투영된 인간의 욕망들을 읽다보면 저 마파문디와 발터제묄러의 세계지도 차이에서 보듯 인간들의 생각들이 어떻게 바뀌고 그 욕망 또한 어떻게 달라졌던가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파문디에선 없었던 국가와 개체의 발견이 발터제묄러에서는 나타나는가 싶더니 종교개혁과 더불어 나타난 메르카토르의 투영법이 사실은 오로지 하나만 군림하며 그것을 중심으로 주변과 변방만을 만들어내던 세계를 떠나 어디까지나 모든 지역을 똑같은 존재로서 공평하게 다루려 한 이념이 투영된이었음을 알게되면서 개체라는 독립성의 발견과 함께 이 장의 제목대로 '관용'에 인류가 눈을 뜨게 되는 것을 목도하는가 하면 바로 그 관용이 개체의 독립이 더욱 굳어짐에 따라 서로 자기가 중심이 되려는 욕망으로 변질되어 결국은 매킨더에 의해 만들어져 이후 전쟁을 일으킨 주요한 원인이 된 '지정학'의 탄생으로 굴절되는 걸 보면서 자연히 인간의 마음이 흘러온 길을 더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세가지를 준다.
 하나는 지도와 그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거리들을. 다른 하나는 지도의 변천을 둘러싼 세계 역사의 변화를. 마지막으로 그 경로를 따라 이행해 온 인간 마음의 발자취를 말이다. 단적으로 지도라는 것이 이렇게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풍부한 텍스트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깊이 느끼게 된다. 그러니 지도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어찌 황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몸이 비상벨을 아무리 울려도 다음 페이지로 넘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래서 요모양 요꼴로 고생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왠지 풍요로워진 느낌이다. 아무튼 좋은 책이다. 아마도 당신에게는 여덟 번째로 권하는 것 같다. 만나는 이들마다 권하고 다녔는데 제대로 헤아려 보질 못했네. 몸이 이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