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 세월호 이후 인문학의 기록 우리 시대의 질문 1
노명우 외 지음, 인문학협동조합 / 현실문화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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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남은 자가 살아남지 못한 자들에 대해 쓴다는 것, 자신이 살아남은 이유에 대해 쓴다는 것, 저 죽음들 앞에서 아직 살아 있다는 것, 끝내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령에 대해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고 쓴다는 것의 무능함 앞에서, 그는 목구멍 너머로 삼키는 자, 끊임없이 고쳐 쓰고 끊임없이 지우며 "머리말을 지우고 후기라고 고쳐" 쓰는 자이다. 그에게 언어의 가능성은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완전한 침묵 속에서 사는 것,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이 아니라 절대적인 침묵 속에 사는 것이다. (p. 80)


 글의 첫 머리에 이광호가 쓴 글을 인용하는 것은 왠지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서다. 나는 여전히 세월호에 대해 뭔가 쓰는 것이 어렵다. 그것이 설령 세월호에 대한 책 리뷰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읽었다. 세월호 1주기에 발간된 이 책을 이제야 읽은 것이다. 왜 읽은 것일까? 답답해서일 것이다. 2년이나 흘렀는데도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고, 원흉들은 아예 당당하게 아무 잘못 없다고 떠들고 있으니. 거기다 세월호 리본을 보고 서슴없이 빨갱이라 부르는 노친네들이 주말마다 태극기를 흔들며 서울광장을 아우성치는 요즘이니 더더욱.


 2년동안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늘상 반복되는 사고들 중 하나로 경화시키려는 움직임과 싸워왔다. 마땅한 애도를 이념의 색깔을 뒤집어 씌워 왜곡하고 진실 규명을 위한 유족의 단식을 곁에서 폭식을 하는 것으로 조롱하며 계속된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에 '아직도 세월호냐?'며 피로감부터 토로하며 얼른 과거사로 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맞서서 말이다. 그렇게 그저 불운한 사고로 돌리려는 치들은 팽목항의 바람을 잠재우려 애썼지만, 팽목항의 바람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그 모든 왜곡과 조롱 그리고 증거 조작과 무시가 김기춘이라는 국가 권력 최상층이 조직적으로 계획했다는 것이 드러난 지금, 그 바람은 더욱 거세어져 이 나라가 완전히 변화할 때까지 계속 불어올 것이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모든 글들은 바로 그러한 경화에 대한 저항이다. 아무런 성찰 없이 그저 침묵만 강요하는 세력에 대한 거울의 발화이다. 그들의 진실된 초상을 책의 언어들이 비춰주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잘도 감추고 있었던 국가의 민낯이 드러나는 계기였다. 그것은 증거였다. 진태원의 말처럼 우리의 국가가 실은 계급 국가이며 그 진실된 정체는 커다란 공백이고 검은 구멍(p. 145)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을 강타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을 때, 그 재난에 대해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바라볼 것을 요청했다.


 우리는 자연재해가 어느 정도 공평하고 무작위적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렇지만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 위험한 처지에 놓인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실상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가난은 위험하다. 흑인인 것은 위험하다. 라티노인 것은 위험하다.(p. 23)


 세월호도 바로 그것을 알려주었다. 진태원은 세월호 참사가 극명하게 드러낸 것은 국가가 놀랍도록 무능하다는 것과 구조의 무의지에서 표출된 국가가 결코 나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라고 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했던 것과 비슷하게 국가의 무능력과 무의지에서 '가난한 나를 위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각. 그리고 다음 차례는 바로 내가 될 수 있다는 자각'이 바로 우리가 가진 분노의 원천은 아니었겠느냐고 그는 말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금 세월호 참사를 언제까지나 기억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만들고 거기에 얽힌 모든 진실을 규명하려 하는 것은 비단 희생된 이들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한 유가족이 말했던 그대로 이대로 방치했을 경우 언젠가 나나 내 가족이 바로 그 희생자의 자리에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제가 30대 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어요. 사연 들으면서 많이 울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뒤로 제가 한 일이 없는 거예요. 10년마다 사고가 나는 나라에서 제도를 바꾸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서 제가 똑같은 일을 겪었어요. 지금 SNS 하면서 울고만 있는 젊은 사람들, 10년 뒤에 부모 되면 저처럼 돼요. 봉사하든 데모하든 뭐든 해야 해요."(p. 154)


 정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을 겪지 않도록 만드는 변화의 강풍이다.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우는 촛불 또한 마찬가지다. 분명 한국사회는 세월호 참사를 기점으로 전혀 다르게 될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산 자들의 의무다. 전혀 다르게 만들기 위해선 모든 것의 원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몇 편의 논문들은 바로 그 지점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권명아는 고통의 타자성 혹은 타자의 고통에 대해 끝내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것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광호는 '문학의 언어는 언어의 불가능성과 침묵의 잠재성에서부터 다시 시작된다. '사건 이후의 문학'은 말할 수 없는 자의 언어의 자리에서 그 모순과 분열을 '견디는' 남은 자의 글쓰기이다. 문학은 사라진 자들의 침묵의 능력에 의지한다. 문학은 말할 수 없는 자의 익명으로만 간신히 말할 수 있다. 주어를 알 수 없는 저 목소리들을 통해 이름은 지워지고 다시 태어난다(p. 104)'고 말한다. 이현정은 유민 아빠가 단식할 때 쏟아졌던 비난과 조롱 그리고 세월호 참사 때 희생된 이들 중에 있었던 외국인들의 존재를 통해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 하고 있는 가족의 개념이 얼마나 편협하고 폭력적인가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우리는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표하고 그 자리의 정당성에 대해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의문과 의심은 하나의 권유이다. 소문과 선동에 속절없이 휘둘리는 수동적 존재가 되지 말고 스스로 먼저 사유하고 성찰하는 능동적인 주체가 되라는 요청이다. 후반의 논문들은 이러한 우리의 주체적인 실천과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말들이 너무나 절실히 다가오는 것은 요즘 박근혜를 옹호하고 탄핵 기각을 바라는 가짜 뉴스들이 판을 치고 거기에 어이없이 휘말리는 이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교사와 같은 존재들. 세월호 참사를 반복시키는 잠재된 위험들. 바로 그런 그들이 있기에 세월호 참사는 기억되어야 하고, 팽목항의 바람은 멈춰선 안된다. 나는 언제까지나 그 바람을 기꺼이 맞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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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구속!
이것이 바로 우리가 촛불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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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무력 정치사 - 민족주의자와 경찰, 조폭으로 본 한국 근현대사
존슨 너새니얼 펄트, 박광호 / 현실문화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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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미시간대에서 정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 일본 호세이대에서 강사로 있는 존슨 너새니얼 펄트의 '대한민국 무력 정치사'는 국가가 자신의 통치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민간 행위자들과 공모, 협력하는 것을 다루고 있다. 바로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말이다.


 국가들이 비국가 폭력 전문 집단과 협력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 역사는 오래되었고, 근거도 분명하다. 국가가 형성되는 초기 과정에서 국가 행위자들과 국가추구자들은 필요에 따라 해적, 용병, 불법 무장 단체, 깡패와 협력하곤 했다. 따라서 약하거나 이행기에 있는 사회에서, 혹은 이행기에 있는 약한 사회에서 그런 협력이 발생해왔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난해한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고능력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 행위자들이 자국 내에서 초법적 폭력을, 더욱이 자신들이 보호할 책임을 지고 있는 자국 시민들에게 그런 폭력을 수행할 때 민간 행위자들과 공모하게 되는 조건이다.(p. 9)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 어렵게 다가오지 않는다. 한국은 OECD에 들어갈 정도로 고능력의 국가가 되었지만 오늘도 재개발 현장에선 철거 용역들이, 거리에선 어버이 연합 같은 관제 데모 단체들이 활개를 치고 있으니까 말이다. 정주영이 노조를 진압하기 위해 처음 만들었던 '구사대'가 이제는 전혀 낯설지 않듯이, 국가 권력과 결탁한 민간 행위자들은 우리의 일상 속 깊이 들어와있다. 존슨 너새니얼 펄트는 왜 이런 상황이 일어났고 무엇이 그런 것을 지속시키고 있는지 이 책에서 뒤쫓는다. 모두 8장에 걸쳐 그것을 다루는데, 2장은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론과 방법에 대한 설명이고 결론인 8장을 제외한 나머지가 구체적인 한국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어떻게 국가가 민간 협력자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까지 이르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국가가 강제력을 민간에게 하청하게 되는 것은 주로 국가의 강도와 상관관계가 있다(p.35) 여기서 '강도'란, 워싱턴대 정치학 교수인 조엘 미그달이 정의한 개념인데, '국가가 사회에 침투해 사회적 관계들을 조정하고 자원을 추출해 확고한 태도로 자원을 적절히 사용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즉, 국가가 제 사회적 관계들에게 얼마나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느냐가 관건인데, 그것이 작을수록 민간에게 강제력을 하청하는 정도는 많아진다. 예를 들어, 친일과 한국 전쟁으로 정당성이 없어서 자율성이 보잘 것 없었던 이승만은 반대 세력을 누르는 수단으로 정치 깡패를 많이 이용했다. 그것은 쿠데타를 통해 역시 아무런 정당성 없이 정권을 잡게된 박정희도 마찬가지였다. 그 후, 박정희의 지배체제가 공고해지고 자율성이 강화되자 정치 깡패들은 자연히 토사구팽 되었다. 그런데 경제 위기가 닥쳐오고 지금까지 경제 성장을 떠받치고 있었던 노동자 저임금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박정희 체제는 다시 민간에게 강제력을 하청했다. 즉 경제 불안과 거센 민주화 요구로 인해 자율성이 축소되자 민간에게 자기 대신 폭력 행위를 해달라고 손을 내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단순히 자율성의 축소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유심히 들여다 보는 것은 당시 중산층의 성장이다. 저임금 기조에 기반한 경제 성장으로 늘어난 중산층이 국가의 직접적 폭력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던 것이다. 박정희는 중산층이 노동자에게 가담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중산층이 가장 혐오스럽게 여기는 국가의 직접 폭력을 은폐하기 위해 민간 폭력 집단을 대신 내세웠던 것이다. 겉보기엔 민간 대 민간 사이의 일로 보이도록 말이다.


 이것은 박종철 고문 치사가 6월 항쟁을 낳았다는 것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6월 항쟁의 특징은 중산층이 대대적으로 국가에 대한 투쟁에 뛰어들었다는 것인데 그것을 가져온 '박종철 고문 치사'는 한 마디로 국가가 국민을 직접 살인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바로 이것, 중산층을 노동자 및 진보 세력과 철저히 분리시키는 것이 오늘날도 계속되는 강제력 민간 하청의 결정적 이유라고 저자는 본다.


 권위주의 시기에 중산층은 초기의 노동운동을 지지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점점 더 투쟁적이 되고 노동쟁의도 증가하면서 둘은 분열됐다. 민주적 선거 획득이 대개 중산층을 달랬지만 정권의 선언에는 노동이라는 사회경제적 관심사는 포함되지 않았다. 민주적 선거 이후에도 투쟁적이고 폭력적인 노동 관련 충돌이 계속되자 노동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생겨났고, 중산층은 노동운동이 '도덕적 권위'를 잃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경제적 또는 정치적 안정성에 대한 실재적이거나 인식된 위협들, 이를테면 친정부 언론이 잦은 노동쟁의의 결과라면서 쉽게 제시할 수 있는 사건들을 접하게 되면서 노동에 대한 중산층의 인식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p.152)


 저자의 이런 말은 국가가 사실은 폭력을 자행하고 있으면서도 구조적으로 은폐하여 부재의 가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켜 나간다는 지젝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중산층의 폭력에 대한 태도에 대해선 다시 깊은 비판과 성찰의 시선이 필요한 것 같으나 이 글에선 무리일 것 같다. 다만 지금 계속되고 있는 촛불 집회만 해도, 물론 이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비폭력이었기 때문에 천만 이상이 참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중산층은 되도록 사회가 안정되길 바란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늘 지키고 싶으니까. 하지만 폭력의 목격은 사회의 불안을 가중시킨다. 중산층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아마도 폭력 같은 것으로 사회의 경계가 무너지는, 홉스가 말한 '만인에게 만인이 늑대가 되는 사회'일 것이다. 그들의 인식을 억지로 바꾸려고 하기 보다는 그것을 수용하면서 사회 개혁을 진전시켜 나가는 것도 필요한 것 같다. 어쨌든 그들의 지지와 참여가 필요하니까 말이다.


 '대한민국 무력 정치사'는 이제는 일상이 되어버린 철거 용역, 어버이 연합 같은 관제 데모 세력들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일상적으로 보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존재들이었는데, 그들의 탄생과 정착의 과정을 보면서 미래에 다시 그들을 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를 새로운 측면에서 바라보도록 했던 책이기도 했다. 국가와 결탁하여 국가 대신 폭력을 자행하는 존재들에 대해서 알고 싶다거나 관심이 있었다면 '대한민국 무력 정치사'는 좋은 길잡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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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 - 꼿꼿하고 당당한 털의 역사 사소한 이야기
커트 스텐 지음, 하인해 옮김 / Mid(엠아이디)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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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 집사로 사는 일은 한 편으론 털과의 전쟁이다. 검은 옷은 세심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잘 입지 못하게 되고, 냄비 뚜껑은 잘 덮어놓아야 하며, 탁자 위에 둔 컵에 물을 따를 때에도 한 번은 들여다 보아야 한다. 목구멍에서 뭔가 묘한 이물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인간에게서 나오는 털도 그 양을 무시하지 못하는데, 동물에게서 나오는 털까지 숟가락도 아니고 주걱으로 얹어 놓고 있다 보니 치우고 또 치우다가 절로 이런 원망과 푸념이 뒤섞인 질문을 하게 되는 걸 어쩔 수 없다.

 '신은 왜 하필 이런 털을 만든 것일까?'


 아마도 이런 질문을 '헤어'의 저자 커트 스텐이 들었다면 내게 '뭘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하고 있어?' 하면서 바로 역정을 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에겐 '털'이 자기 밥그릇이니까 말이다. 그는 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다. 그것도 무려 30년이나. 얼른 '헤에? 털만 연구하는 학자도 있어?'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나만 그랬나? 하긴 별로 신기할 게 없을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학자들은 바닷 속 물고기처럼 많고 다들 별의별 것을 다 연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이런 반응이 그리 별나진 않은 모양이다. 털만 연구한 그가 30년이 지나 비로소 털의 역사에 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하게 만든 것도 바로 이런 반응이었으니까. 그 일은 그가 자주 다니는 이발소에서 일어났다. 어느 날 이발사가 머리를 깎다가 우연히 몇 년동안 다녔는데도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그의 직업을 물었다. 그가 털을 연구한다고 하자, 이발사는 재밌는 농담을 들은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암묵적으로 '그런 걸 연구하는 사람이 어딨어?' 하는 반응을. 그것으로 작가는 보통 사람들이 털에 대해 아주 '협소하고 근시안적인 시각에 갇혀 있다(p.15)'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사람들을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털의 전체적인 그림과 털이 인간의 삶에 이제까지 해온, 그리고 앞으로 기여할 역할에 대해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p.15)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글의 대상인 '헤어'는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다.




 이 책엔 정말 털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일단 털은 진화의 과정 중에 태어났다. 털이 주로 포유류에게만 있다는 점에서 털의 기원과 역할은 아무래도 파충류와 비교해봐야 할 것 같다. 그랬을 경우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포유류는 파충류와 달리 태양의 직접적인 도움 없이 내부의 신진대사를 통해 스스로 열을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포유류는 파충류와 다르게 야간과 추운 지방에서도 사냥 활동이 가능했는데, 피부는 그런 체내의 열을 보존할 수 있게끔 진화했다. 털 역시 바로 거기에 맞춰 생겨났고 진화해왔다고 한다. 털이 가진 역할이란 무엇보다 모든 종류의 열이동의 차단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단열이야말로 피부와 털 모두에게 있어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역할인 것이다. 때문에 포유류에겐 한가지 습관이 생겨났다. 개라면 더우면 혀를 길게 내밀며 헐떡거리고, 고양이라면 혀로써 털을 닦는 행위 말이다. 이 모든 게 사실은 몸을 식히려는 몸짓이었다. 그동안 고양이를 키우며 '그루밍' 하는 것이 단순히 몸을 깨끗하게 만드는 행위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 책을 보니 체온을 떨어뜨리는 행위이기도 했던 것이다. 새삼 털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인간은 털을 없애는 쪽으로 진화해 온 것일까?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가 인류를 '털 없는 원숭이'라고 부를만큼 포유류 중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몸에 거의 털이 없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바로 두뇌의 온도 때문이었다. 인간의 두뇌가 발달하면서 털이 있는 인간에겐 큰 문제가 하나 생겼다. 그건 바로 두뇌가 열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털은 단열 효과로 체내의 열을 유지하거나 증가시킬 뿐 감소시키지는 못한다. 점점 커져만 가는 두뇌에겐 굉장히 걱정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인류는 지금처럼 털을 가급적 없애는 방향으로 진화해왔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진화론적 경험이 그대로 DNA의 기억으로 남아 동서양을 막론하고 털 없는 것을 털 있는 것보다 더 우월하게 여기도록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구약성서에서 털이 없는 야곱이 사냥에 능하고 털이 많은 에서를 속여 그 시대 가장 중요한 권리인 장자권을 가져왔듯이, '성경에서 털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선택받은 자(p. 87)'로 나오고 17~21세기 제국시대 말기의 중국철학자(책에는 이렇게만 나와 있는데 어떤 시대를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21세기는 지금이므로 현재의 중국을 제국이라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기원전이라는 말이 빠진 것이 아닐까 싶고, 여기서의 제국은 중국 최초 통일 국가인 진나라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다음에 말할 내용은 당시 유학자들의 주장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들도 인간다움은 몸에 자라는 털의 양과 반비례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헤어'는 이런 이야기를 자세하고도 쉽게 들려준다. 생물학적 측면만이 아니라 문화적 측면까지 아울러 세세하게 짚어주기 때문에 커트 스텐의 야심처럼 아무래도 털을 새롭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모발 관리는 중요한 건강 관리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발사가 외과 의사 역할을 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20세기 이전 미국에서 이발소는 주로 흑인들 차지였다는 것은 몰랐다. 흑인 노예들 중 일부 주인의 치장을 담당했던 이들이 나아가 주인들이 경영하는 이발소를 맡아 일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1860~80년 사이 흑인은 전국의 이발소를 독점하고 결국 19세기 말부터 흑인 고객까지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때를 기점으로 흑인의 이발소는 흑인들 커뮤니티의 아주 중요한 장소로 자리매김해왔다. 미국 영화 중에 '바버샵'이라는 게 있는데, 그 이발소 역시 흑인 공동체 사회에서 중요한 소통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것이 현대와 생겨난 게 아니라 실은 오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흥미로웠다. 가발에 대한 이야기도 재밌었다. 프랑스 혁명 전에 가발은 유럽 전역에서 귀족 신분과 권력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고 한다. 털이 많은 것은 야만인으로 취급받는데, 머리카락이 많다는 것은 왜 교양과 권력의 상징이 되었을까? 이것은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조선시대까지 상투를 틀어서라도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을 금기시했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엔 당시 널리 유행했던 신비주의 사상 때문에 머리카락에 영혼이 깃든다는 생각까지 퍼져 있었다고 한다. 다른 털과 달리 머리카락은 건강과 매력 그리고 성적인 메시지가 되었기 때문이리라. 성경 속 삼손의 이야기는 아마도 이것에 대한 가장 뚜려한 사례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헤어'는 인간의 털을 넘어 동물의 털까지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재밌고도 흥미로운 책이다. 늘 매만지거나 뽑고 얼른 치우기만 했지 깊이 헤아려보지는 않았던 털에 대해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면 좋은 안내자가 되어줄 것 같다. 그렇다고 고양이 털을 좀 더 기분좋게 치우게 되지는 않더라만... 하아... 나는 또 고양이 털을 쓸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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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 - 28인의 과학자, 생물학의 지평을 넓히다
강석기 지음 / Mid(엠아이디)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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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존재를 알았을 때 반가웠다. 그동안 유전자에 대한 책을 많이 읽게 되면서 생명과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하지만 너무나 어렵고 방대한 영역이라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선뜻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좀 더 쉽게 그것과 만나게 해 줄 길잡이 같은 것이 있었으면 했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이 나타난 것이다. 강석기 작가의 '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바로 그 장본인인데, 이 책은 생명과학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는데 기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논문 28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시작점을 찾아야 한다. 생명과학의 현재 지형도를 가늠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현재의 모든 성과는 그것의 시작이 되는 논문을 밑거름으로 하여 성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게 생명과학을 보다 수월하게 이해하게 만들 최적의 안내서로 보였다. 그리고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맞아 떨어졌다.



 책은 28편의 논문을 주제 별로 모두 7개의 파트로 나눠 4편씩 담는다. 그 파트란, '현대 생명과학의 탄생', '유전자 사냥', '진화의 진화', '생리학의 재발견', '발생의 미학', '떠오르는 신경과학' 그리고 '상식의 벽을 넘다'이다. 생명과학에 대해선 모르는 것이 많아서 실린 논문 모두가 흥미로웠는데 그 중 가장 내 눈을 빛내게 만든 것은 1957년에 발표된, 조지 윌리엄스의 '노화진화이론' 논문이었다. 노화는 죽음과 함께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두려움을 준다. 거기다 고령화 사회가 되어가면서 노화는 현재 더욱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런데 노화란 무엇일까? '늙는다'는 것은 생명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다윈에 따르면 사실 이런 노화는 오래전에 퇴화되어 사라져야 했다. 정신과 육체 모두 쇠약을 가져오는 노화는 진화의 절대 명령인 생존과 번성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화란 다윈의 자연 선택에 대한 중대한 반대 증거일까? 31세의 젊은 나이로 막 미국 미시건 주립대 교수가 된 조지 윌리엄스는 오히려 노화가 자연 선택의 결과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그것이 노화에 대한 생명과학의 이해 방향을 확 비틀었다. 그는 사람들이 생명의 노화를 사물에 빗대어 말하는 것은 노화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노화는 자동차 부품이 닳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조지 윌리엄스에 따르면 노화는 그렇게 마모의 과정이 아니다. 노화는 다만 '인체를 조절하고 유지하는 메커니즘의 정밀도가 떨어지는'(p. 119) 현상이다. 그래서 노화는 늙었다는 말과도 다르다. 나이가 젊어도 조절과 유지 메커니즘의 정밀도가 떨어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득 '노안'이 생각났다. 노안은 눈을 오래 써서 그 능력이 약화된 것이 아니라 초점을 맞추는 정밀도가 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생각하니 조지 윌리엄스의 노화에 대한 이야기가 꽤 신빙성 있게 다가왔다. 피부도 나이가 들수록 약해지는 것도, 조지 윌리어슴에 따르면, 피부가 닳아서 그런 게 아니라 젊었을 때만큼 피부를 통해 체온을 유지하고 상처를 치유하며 건강을 유지하는 게 덜 효율적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한 마디로 노화는 생명이 시간의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정밀도의 약화는 오히려 반 자연 선택적이지 않나? 여기에 대해서도 조지 윌리엄스는 설명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노화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다면 발현 유전자인데, 주로 성적인 징후를 만들고 번식하는데 유용한 유전자들이 이에 속한다. 다면 발현이란, 유전자가 한 쪽으로만 작용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도 작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성적 유전자들이 그랬다. '개체가 성장해 성적으로 가장 왕성할 때 발현돼 번식 확률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유전자가 훗날에는 정밀한 대사 조절 능력을 잃게 해 암이나 심혈관계 질환, 당뇨병 같은 병을 일으키는 등 노화를 촉진'(p. 120)했던 것이다. 즉 노화란 자연 선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쓴 결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부머랭 같은 것이었다. 짧은 글이었지만 관점이 워낙 독특하고 글 또한 설득력 있어 이것만으로도 노화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기엔 충분했다.


 이 책엔 그런 순간들이 많았다. 노화에 대한 앞서의 이야기는 이 책이 내게 어떤 것을 남겼는지 대표적으로 밝히기 위해서였다. '스트레스'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 한스 셀리에, '페로몬'의 존재를 처음 거론한 마샤 맥클린톡의 '월경 동기화 현상' 논문들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 처음에 어떻게 밝혀졌던가 알려줘서 흥미로웠고, DNA의 특정 서열을 독립적으로 복제하는 기술을 처음 개발하여 생명과학의 지평을 확 넓혀버린, 허버트 보이어의 재조합 DNA 실험이 29살의 한 실직자 청년에 제의로 어마어마한 자본의 기업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재밌었다. 역시 성공은 두 가지, 가능성을 꿰뚫어 보는 눈 그리고 그것을 밀어붙일 수 있는 용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이 일화를 통해 다시금 깨달았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분명 있었지만 그래도 저자가 쉽게 잘 설명하고 있어 대부분은 소화시킬 수 있었다. 물론 많은 전문 용어들에 대해서 별도의 검색을 통해 알아야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나는 이 책을 통해 전보다는 훨씬 더 가까이 생명과학의 대지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생명과학이 어디까지 왔고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도 대충은 가늠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데, '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는 나처럼 초심자라 하더라고 생명과학이 무엇이고 그 얼개나마 알고 싶은 이들에게 좋은 가이드가 되어주리라 생각한다. 각 논문에 대한 글의 분량이 길지 않고 재미도 있어서 더욱 수월하게 여행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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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2-01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체가 아니라 종의 개념으로 보면 노화는 진화의 필수 요소죠. 비정한 말이긴 하지만 노화로 쓸모없는 개체는 빨리 사라져 주고 젊은 유전자 개체가 번식을 담당하는...할머니 이론이 말해 주듯이 성적인 필요성이 사라져도 번식에 필요한 존재론적 가치는 여전히 확보되고 있지만.... 과학 기술이 더 발달해 아무도 늙지 않는다면 이런 구조적 상황은 어찌 달라질까 싶죠. 육아는 사회가 맡는 시스템이 더 확산될테니 안심일까 하면....아직은 멀고 먼 이야기 같은^^;

헤르메스님 서재를 웹으로 보고 있는데 고양이 가득ㅎㅎ.... 즐겁게 글 읽을 수 있는 벽지네요^^
새해 인사 안 드렸던 거 같은데... 새해 건강히 평안히/

ICE-9 2017-02-05 23:10   좋아요 1 | URL
이 책을 읽고 더욱 느꼈는데, 정말 생물학적 관점은 상식적인 관점과 많이 다른 점이 있더군요. 아갈마님 말씀대로 노화가 사라진 세상은 과연 어떠한 사회적 혹은 윤리적이거나 실존적인 문제에 직면할지 궁금해집니다. 요즘엔,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 ‘나라야마 부시고‘가 긍정적으로 묘사했듯, 고려장이라는 것도 그 사회에선 나름 합리적인 제도였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영화 속 할머니가 어린 세대들을 위해 일부러 건강한 이를 스스로 빼면서까지 기꺼이 고려장을 당했듯 노년 세대들도 뒷 세대에 대한 관용과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제가 고양이 집사라 서재를 온통 고양이들로 채워봤습니다. 너무 단순한가요?^^
어쨌든 아갈마님 새해 인사 감사합니다. 아갈마님도 늘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는 새해 되시길 바랍니다.
댓글이 너무 늦어 죄송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