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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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아는 것에 있어선 종결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널리 알려져 있고 많이 연구된 것이라 하더라도 섣불리 이걸로 충분해 하면서 흙을 덮어선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미국 예일대 역사 교수로 있는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을 읽은 탓이다. 예전부터 아우슈비츠 수용소 학살로 대표되는 홀로코스트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선 꽤 많이 읽었다. 물론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블러드랜드', 즉 동유럽에 대해서도 익히 보았다.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과연 내가 뭘 알고 있었나 의문을 갖도록 만들었다. 무려 800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듣는 내용들이 끝도 없이 쏟아졌던 것이다. 당연했다. 저자의 시선이 향하는 눈높이가 이전에 나온 책들과 달랐던 것이다. 여지껏 내가 만난 동유럽을 다룬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들은 초점이 위에 있었다. 전쟁을 지도한 사람, 그 아래서 전략을 수립하고 전술로 수행한 사람 그리고 그들이 벌였던 전투. 이러한 군사적인 게 중심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시야를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이전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전쟁에 휘말려 억울하게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을. 그는 말했다. 이 책은 희생자들 스스로의 목소리를 소환할 것이며, 그들의 친구와 가족의 목소리 또한 울리게(p. 19) 할 거라고.



 그렇게 하자, 새로운 사실들의 대륙이 열렸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이겼느냐에 관한 지식만 갖고 있던 나는 이 책을 통해 처음 만나게 된 사실의 얼굴들을 확인하면서 충격과 당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학살로 인한 희생자의 규모는 내 생각 이상으로 아주 막대했고 그 학살을 수행하는 방법의 잔인성 또한 상상을 초월했다. 임산부나 아이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아기까지 무참히 살육했다니! 더우기 천명도 아니고 만명 단위로 곳곳에서 굶겨 죽이거나 총살하거나 가스실로 보내 죽이는 것을 보고 절로 저자도 물었던 물음을 나 또한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그토록 많은 사람이 폭력적인 최후를 맞게 할 수 있는가(있었는가)?'(p. 682). 그것도 같은 인간이.


 티머시 스나이더의 '블러드랜드'는 그 의문의 대답을 찾는 궤적이다. 도대체 어떻게 단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 사람에게 인간의 얼굴을 오롯이 지워버릴 수 있었는가?

 그 추적은 다음과 같은 기준에 따라 전개된다.


 1) 과거의 어떤 사건도 역사적 이해를 초월할 수 없다. 또는 역사 탐구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고수할 것.

 2) 당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확실히 있었는지에 대해 숙고할 것.

 3) 다수의 민간인 및 전쟁포로를 학살한 스탈린과 나치의 정책을 시기순으로 정연히 따져볼 것. 이는 제국의 지정학에서가 아니라 희생자의 지리학에서 구성되는 문제다.(p. 21)


 정확히 소련이 처음 집단화 정책을 시작했던 1933년부터 '프라하의 봄'이 일어났던 1968년까지 모두 11개의 시기로 구분하여 블러드랜드에 일어났던 일을 담는다. 시작은 1933년, 소련이 열었다. 이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홀로코스트는 오직 독일만 자행한 줄 알았는데 '독소전쟁'에서 대적했던 소련 또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학살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것도 독일보다 먼저. 소련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전에 세 번이나 대대적으로 그러한 일을 감행했다. 1차는 집단화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농민의 의지를 꺾기 위해서였고, 2차는 당시 실시한 계획경제의 성공을 국제 사회에 선전하고자 수출 목표를 여건 상 불가능한데도 무리하게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로인해 전자에선 많은 이들이 정든 고향에서 강제추방 되었고 결론이 지어진 3인으로 구성된 '트로이카'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당했다. 후자에선 오직 목표 수치를 맞추기 위해 특히나 곡창 지대로 유명한 우크라이나에서 강제적으로 굶김을 당했다. 애초에 소련의 사회주의는 농민의 계급적 해방과 자유를 위한 것이었지만 오직 지도자 스탈린의 무오류성을 입증하기 위해 평범한 농민들마저 당국의 손에 의해 계급의 적인 '부농'으로 둔갑되어 처형되었고 살던 곳에 머무를 자유와 내가 생산한 것을 먹을 자유마저 박탈당했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미 소련은 만인을 위한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오직 스탈린 하나만을 위한 사회주의였다. 이건 뒤이은 1938년과 1939년에 일어난 3차 학살에서 더욱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스탈린은 5개년 계획이 자신이 바라는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자 그 이유를 블러드랜드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 탓으로 돌려버렸다. 자기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소수 민족이 소련의 적과 결탁하여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무려 25만 명이 소수 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목숨을 잃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주장은 이제 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계급이 아닌 명목상의 개인적 정체성이나 문화적 연관성 때문에 유죄가 되었다.(p. 195)

 초기 소련은 박해받는 인종과 민족에게 기꺼이 자신의 문을 열어주는 나라였다. 그렇게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 다문화 국가'(p. 171)로 다른 체제보다 우월하다는 걸 내세우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젠 뻔뻔해져 있었다. 소련이 직접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한 건 내부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민초들의 반응 같은 건 그에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까마득한 저 아래에 있었다. 같은 인간이지만 스탈린이란 개인과 블러드랜드에 사는 평범한 개인의 차이란 실로 엄청났다. 




 여기에 서쪽으로 스탈린만한 권력을 가진 또 한 명의 개인이 있었다. 바로 독일의 히틀러다. 그 또한 염원하는 제국을 만든 위대한 지도자란 미래의 광휘에 눈이 멀어 아래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자다. 그에게 인간이란 설령 자국민이라 하여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인간을 판단하는 관점은 오직 하나 유용성이었다. 거기에 유대인은 독일 제국 건설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걸림돌로 보였다. 그는 그걸 유럽에서 치워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원래는 아프리카에 있는 마다가스카르 섬에 모조리 격리시켜버릴 계획이었으나 여의치 않자 일단 폴란드를 다른 유럽 유대인들을 최종 제거 전에 모아두는 집단거주지로 삼고자(p. 202) 소련과 불가침협약을 맺은 뒤 침공한다. 원래 사회주의는 반파시즘을 천명하고 있기에 소련은 독일 나치와 손을 잡아서는 안되었지만 바로 눈 앞으로 당도한 영토 확장의 유혹은 스탈린에게 너무나 달콤했다. 소련은 불가침협약과 동시에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맺었고 리투아니아를 차지했다. 스탈린의 눈에 블러드랜드의 인민은 더이상 사회주의를 함께 건설하는 동료가 아니었다. 히틀러와 똑같이 오직 자신의 위상을 드높일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 둘의 오만하고 비정한 시선 아래에서 수많은 이들이 게토로 강제 추방 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때로는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로 나치 독일에 의해 공개적으로 또 때로는 다만 지식인이란 이유로 소련에 의해 은밀하게.


 히틀러와 스탈린, 두 개인에겐 야망이 있었다.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강대국의 지도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런데 영국이 문제였다. 제국이 되려면 국토의 식량과 자원이 한정된 이상 바깥의 것들을 가져올 수 있는 해외 통로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막강한 해군력으로 해상을 장악하고 있는 영국 때문에 그건 불가능했다. 어떻게 바다로 세계 시장과 안정되게 연결되지 않고서도 번영을 구가하며 그를 통해 자신의 지배권을 영구히 확보할 것인가가 화두가 되었다. 그렇게 되려면 경제적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광대한 영토가 필수적(p. 283)이었다. 히틀러의 눈에 마침 그런 나라가 보였다. 바로 소련이었다. 거기 있는 슬라브 민족을 모조리 제거하고 독일인을 이주시키면 전쟁으로 인한 자국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식량과 자원 창고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히틀러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오늘의 막역한 동지라도 얼마든지 적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는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침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행한다. 이른바 '독소전쟁'이 개전된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일이 계획한 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속도가 문제였다. 당초 계획은 12주 안(p. 302)에 전쟁을 끝낼 작정이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질질 늘어졌다. 원체 용의주도하지 못했던 나치 독일은 이런 상황의 대비책을 전혀 세워두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독일군이 먹을 식량은 매우 부족해졌다. 이에 독일은 1933년에 소련이 우크라이나에서 했던 일을 반복했다. 자기들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이 구축한 집단화를 그대로 이어받아 거기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강제적으로 굶겨죽인 것이다. 레닌그라드가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다. 독일은 도시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여 탈출로를 봉쇄하고 그 안의 시민들이 굶어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결국 포위가 끝나는 1944년까지 무려 100만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p. 309) 이런 무자비함은 민간인에게만 행해지지 않았다. 소련인 전쟁 포로 또한 그 대상이었다. '독소전쟁' 동안 나치 독일이 만든 포로수용서는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수용된 포로들의 삶을 끝장내버리는 것(p. 316)이었다.


 이러한 처사는 나치 독일이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걸 티머시 스나이더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것은 특정 인간들은 없애버려야 할 식충일 뿐이며 슬라브인, 유대인, 아시아인들과 그 밖에 소련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존재로, 소모품보다 못한 것들이라는 논리였다.(p. 319)


 이 논리는 독일인에게 한 번도 반박당하지 않았다. 대놓고 과오라고 말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다들 얌전히 추종했고 수족처럼 움직였다. 더러는 하달받은 목표량보다 더 많이 살상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치 히틀러가 머리가 되고 각 독일인들은 저마다 손 발 몸통 등이 되어 거대한 육체를 이룬 듯했다. 토머스 홉스가 국가를 비유한 성경 속 괴수 리바이어던을 묘사했던 그대로. 가히 '전체주의'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형상이었다. 소련도 다르지 않았다. 블러드랜드는 두 전체주의의 거인들에게 무참히 짓이겨지고 있었고 육체의 부분이 되지 못하는 타자들은 죽음만이 허용되었다.




 애초에 이 거인을 태어나게 한 것은 공동체를 위한 이념이었다. 하지만 이제 거인은 이념이 아니라 꼭대기에 자리잡은 한 개인의 욕망으로 움직였다. 그가 원하는 건 모두가 원하는 것이었다. 누가 이롭고 방해가 되는가에 대한 그의 규정 역시 모두의 규정이 되었다. 지금의 시선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나치 독일의 '마지막 해결책'은 그래서 가능했다. 나치 독일은 패전의 기미가 짙어지자 더욱 유대인 대량학살에 박차를 가했다. 본래 패전의 가능성이 높아지면 훗날에 살길을 도모하고자 관대함을 보이기 마련인데 나치 독일은 거꾸로 나아갔던 것이다. 패색이 차츰 짙어질 때마다 마치 기를 쓰듯 한 명이라도 더 유대인을 학살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히틀러의 망상 때문이었다. 그는 독일이 패할 것을 알았지만 유대인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면 그만큼 승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폴란드엔 베우제츠, 트레블린카, 소비부르에서 수용소를 빙자한 학살 공장이 운영되고 있었지만 그건 식량 부족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였고 때때로 노동력 수급을 위해 멈춰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온전히 대량 학살 그 자체만을 위한 수용소가 만들어졌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단 한 사람의 부조리한 망집이 탄생시킨, 오직 폴란드 외의 유대인 학살만이 목적인 장소. 유대인들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것처럼 그대로 가스실로 보내졌다.(우리는 유대인이 수용소에 얼마간 있다가 살해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저자에 따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유대인들만이 수용소에서 생활했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모두 바로 처형되었다고 한다.(p. 676))


 어쩌면 광기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 학살 때문에 유독 '아우슈비츠 수용소'만이 우리 뇌리에 각인되었고 오직 그곳만이 존재한다고 여기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별안간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나치 독일이 해왔던 것의 연장선 상에 있었고 그 정점에 달한 것이라 봐야 옳았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소련도 엄연히 독일과 대등할 정도로 대량 학살의 집행자였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이미지가 없는 것은 소련은 비밀리에 움직였다는 것과 스탈린이 끝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는 히틀러와 달리 필요할 때 자제할 줄 알았기(p. 686) 때문이다. 이러한 둘의 성향 차이가 결국 둘의 운명을 갈랐을지 모른다. 스탈린 역시 제국을 꿈꿨으나 이건 확장 보다는 바야흐로 점점 거세지는 서양 제국에 맞서 자기의 체제를 수호하려는 게 일차적인 목적이었다. 그는 지키는 것에 강박적이었다. 이것이 전후 폴란드를 비롯한 블러드랜드의 사람들에게 암울한 운명의 장막을 드리웠다. 폴란드의 유대인 공산주의자가 대표하듯이, 체제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것 같으면 설령 같은 이념의 헌신자라고 할 지라도 제거해 버렸던 것이다. 히틀러는 자기 생애에 구상한 유토피아를 이룩하지 못하는 걸 걱정했지만 스탈린은 누군가 자기의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를 염려했다. 전체주의가 하나의 거대한 개인이라는 비유는 여기서도 연유한다. 나치 독일도, 소련도 한 개인의 성향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걸었으니까 말이다.


 내가 글에서 개인을 자주 호명하는 것은 티머시 스나이더의 이 책 또한 그런 개인을 역사의 무대 위로 복원하고자 하는 것에 동조해서다. 물론 그가 데려오고자 하는 건, 지금까지 역사의 어둠 속에 내버려졌던 개인이다. 두 전체주의 체제 사이에 끼여 번갈아가며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 당시 역사의 가장 커다란 피해자였던 그들은 이름조차 한 번 호명되지 못하고 망각의 흙더미 아래 묻혀있었다. 티머시 스나이더는 그 흙을 모두 걷어내고 바깥에 얼굴을 드러내어 이름을 불러주려 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김춘수의 시, '꽃'이 말하듯이 호명은 부르는 대상에게 유의미한 실존을 가져다 준다. 그는 그렇게 되살리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꼭꼭 새겨두기 위하여. 비극적인 역사는 망각과 억압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역사가 없어지면, 숫자는 부풀려지고 기억은 억눌려지면, 공포스런 상황이 찾아온다.(p. 714)

 그가 책 곳곳에서 필요할 때마다 희생자 한 명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그 혹은 그녀의 삶을 삽입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티머시 스나이더는 이것을 통해 지금까지 역사 서술에서 재현의 중심을 차지했던 가해자 개인들에 맞서 희생자 개인을 대조시킨다. 이는 내가 보기에 서로 대등한 개인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이다.(나 또한 그래서 히틀러와 스탈린의 개인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글을 썼다.) 마땅히 그들에게도 히틀러, 스탈린에 대해 쏟는 것만큼 관심을 분여해야한다는 뜻으로. 문득 궁금해진다. 그가 이토록 개인적인 차원을 부각시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쩌면 그가 그것을 통해 블러드랜드의 비극을 저지할 대안을 슬쩍 내놓고 있는 건 아닐까? 이렇게 추측하는 건, 하나가 지배하는 거대한 몸체에 달라붙어 각자가 가진 고유한 얼굴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전체주의가 자행한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쳐서다. 


 개인의 위상이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티머시 스나이더가 정확히 지적하는 대로 장차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체주의로 자라날 싹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돋아나 있었다. 그 전쟁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미증유의 것이었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총력전으로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별은 물론, 경제와 정치, 국가와 시민 사회의 구별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참전한 모든 국가는 전대미문의 규모로 임했으며 그 압도적인 동원과 조직 속에서 개인의 의미는 미미해졌다. 뿐만 아니라 예전엔 포로로 잡히면 부모나 형제에게 몸값을 받아 풀려날 수 있어서 군인 보단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지만 이젠 그런 거래 없이 오직 패배한 부대의 일부분이 되어 1차 세계대전 때 처음 생긴 포로수용소에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리면서 속박되었다. 더구나 이 때 개발된 독가스는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많은 군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해버렸다. 여기서부터 사람은 수치로 기록되었다. 규모가 그랬던 것만큼 개인 하나를 식별할만한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개인은 그렇게 고유의 가치를 잃고 자기보다 훨씬 더 큰 것의 부분이 되어갔다. 전쟁의 성격이 사회 전체의 전면적 동원으로 달라져버렸기에 이제 유럽의 국가들은 사람들을 필요할 때마다 차출할 수 있도록 애국심이든 민족주의든 이념이든 뭐든 다 이용해서 일원으로 만들었고 거기에 발맞춰 개인들은 자신보다 자기가 속한 전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도록 설득되거나 선동되었다. 이것은 흘러흘러 마침내 전체주의를 낳았다. 또한 개인이 지닌 고유한 본질 보다 외피를 중시하는 것은 타인 또한 아주 사소한 이유로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도록 이끌고 말았다. 


 한 마디로 각 개인 간의 거리가 모두 없어진 것이다. 한 몸이 되어 머리의 존재가 생각하는 대로 생각했고 욕망하는 대로 욕망했다. 이제 그들의 눈은 자신의 눈이 아니라 달라붙은 몸의 눈으로 보았고 다른 몸의 인간들은 인간이 아니라 그냥 다른 몸이 되었다. 너무 단순한 결론인지도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 블러드랜드의 참혹한 비극은 개인이 전체와 분리되지 못하여 일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극을 또 언제든 양산할 수 있는 몸을 파훼하는 방법은 간격을 형성하는 데 있다. 분리와 거리두기로 개인의 고유성을 복원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개인으로 하여금 달라붙었던 몸의 생각과 시각의 복제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자신만의 독립적인 사고와 시선으로 다른 인간을 대등하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엔 더이상 그 어떤 외부적 규정의 간섭이 없다. 오직 서로 함께 경험하면서 생성된 자신만의 견해가 있을 뿐이다. 직접 보고 느낀 것으로 층층이 이뤄져서 웬만하면 흔들리지 않는. 이러면 아무리 힘있는 자가 자신의 규정을 강요해도 저항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길 것이다. 우리는 이 자유를 누려보지 못한 이들의 모습을 책 후반에서 확인한다. 전쟁 후, 블러드랜드의 폴란드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이 자신에게 어떤 꼬리표를 갖다 붙일까 전전긍긍하며 그 규정에서 벗어나려고 스탈린의 손가락이 가리키자마자 충성의 증명으로 같은 유대인들을 핍박했다. 점령자들이 바뀔 때마다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꿔 이쪽 저쪽에 달라붙기 바빴던 부역자들도 있었다. 모두 너무 오랫동안 달라붙어 있어서 독립의 기회가 찾아왔을 때조자 그걸 붙잡을 용기를 못냈던 이들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안전이 언제까지나 보장되진 못했다. 몰로토프처럼 제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어도 조석변개하는 스탈린의 규정 앞에선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 이것이 궁극의 운명이라면 처음부터 그 길을 걷지 않는 도리밖에는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티머시 스나이더는 개인에 집중한다. 그 모든 사람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절대무이(絶代無二)의 주체들이며 단순히 희생자라는 범주에 넣어 뭉뚱그려서 말해선 안된다고 말이다.


  희생자들은 사람이었다. 그들과 진정으로 동일시되고 싶다면, 그들의 죽음만 볼 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봐야 한다.(p. 703)

 그래서 그가 사이 사이에 살아있는 희생자 개인의 삶을 누벼놓았던 것이다. 그들이 겪은 비극과 느낀 참혹함을 감정적으로 공명까지 할 수 있도록 생생하게. 우리는 그것을 통해 단지 희생자의 리스트 속 한 줄로 남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이 가족을 사랑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 그렇게 하여 더욱 그들의 삶을 무참하게 끝장낸 비정한 폭력이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를 곱씹게 만들고 다시는 그와 같은 죽음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간에게서 인간의 얼굴을 지워 사물로 만드는 일을 경계할 것이라 다짐케 한다. 그리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상대에게서 인간성을 벗겨내기 전에 그가 아무리 불가해하더라도 헤아림의 노력을 거두지 않고 대화를 시도해야 하는 것 또한. 물론 귀찮고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이 한 걸음이 모이고 쌓인다면 블러드랜드의 비극이 다시 반복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른 인간을 인간 이하의 존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신이 인간 이하다.(...) 그런 유혹에 굴복해 다른 사람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규정하는 일은 나치의 입장으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다. 물러서는 일이 아니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은 이해를 포기하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버리는 일이다.(p. 703)

 티머시 스나이더의 안내를 따라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역사를 알아가는 것이 단순한 과거의 복기가 아니라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과거의 참상을 막는 노력이기도 하다는 걸 선연히 깨닫는다. 더구나 블러드랜드에서 비극을 가져온 것은 현재도 횡행하고 있기에 그가 재현한 역사와 그를 통한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건 더욱 긴요한 일이다. 얼마 전 미국에서 있었던 'BLACK LIVES MATTER!' 사건이나 최근 단지 아시아 여성이란 이유로 총격이나 구타를 가한 사건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어떤 이들은 요즘 들어 우익화가 날로 심화되고 타자에 대한 적대가 늘어가는 유럽을 보며 흡사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전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블러드랜드의 비극은 생각하는 것만큼 멀리 있지 않다. 사이드미러에 쓰인 글대로 정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요즘 세상은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차별과 적대를 조장하는 가짜 뉴스들로 가득하다. 여기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며 타자에게 먼저 공존을 위한 대화를 건네는 작지만 더없이 소중한 노력들이 필요한 때다. 바실리 그로스만이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 한 다음과 같은 말이 모두의 입에서 울려나올 때까지.


  "사람이다. 그들도 사람인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사람임을 알았다.(p. 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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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5-03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 때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딘가에서 전쟁 때 사람을 죽이고 싶은 사람은 죽인다고 한 말을 보기도 했는데... 그런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겠지요 전쟁을 겪고 충격을 받은 사람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숫자가 아닌 사람을 봐야 할 텐데... 이건 전쟁 때만 그래야 하는 건 아닌 듯합니다


희선

희선 2021-05-12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일로이 님... 우수작 축하합니다 기쁘시겠습니다


희선
 
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 - 격변하는 현대 사회의 다섯 가지 위기
마르쿠스 가브리엘 지음, 오노 가즈모토 엮음, 김윤경 옮김 / 타인의사유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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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실재론은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 생겨난 철학의 새로운 사조이다. 

사실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로 철학의 영토에 있어서 주목할만한 신선한 흐름은 별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다 2006년, 퀑탱 메이야수가 '유한성 이후'란 책을 발표했고 그걸 시작으로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인해 더욱 부각된 실재와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에 대해 반발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걸 사람들은 '사변적 실재론'이라 불렀다. 이후, 퀑탱 메이야수가 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마우리치오 페라리스와 마르쿠스 가브리엘의 실재론적 복권의 시도가 있었으니 그걸 두고 '신실재론'이라 이름하였다. 신실재론은 실상과 가상, 진리와 허구의 구별이 점차 사라지고 그동안 옳고 그름의 문제는 오직 해석의 영역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팽배했던 시대에 반기를 들고 옳고 그름은 엄연히 존재하며 반드시 가를 수 있다는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특히나 이러한 신실재론은 인터넷의 발달한 지금 시대에 강한 문제를 제기한다. 인터넷은 언뜻 보면 민주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방대한 정보들은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손길을 거쳐 유포된다. 현재 우리나라 포털 메인에 올라오는 뉴스들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에서 매일 수많은 뉴스가 생산되지만 포털의 메인엔 언제나 포털이 선정한 것만 노출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포털 메인의 뉴스만 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여론은 포털의 입맛에 따라 형성된다. 한 마디로 포털이 여론 몰이할 수 있는 의제를 게이트키핑하며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신실재론은 이러한 흐름에 제동을 걸려고 한다. 인터넷이 은폐하고 있는 비민주적인 면모를 교정하여 미디어를 민주적인 디바이스로 새롭게 창출하는 것이다. 그런 고로 신실재론은 현재의 상황과 긴밀하게 연동하는 현재진행형 철학이라고 하겠다. 이런 신실재론의 대표적 학자 한 사람이 앞서 말한 마르쿠스 가브리엘이다. 1980년생인 그는 젊은 나이에 신실재론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지금은 독일 본 대학 석좌교수로 있다. 사상 최연소라고 한다.


이번에 나온 '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는 신실재론 입장에서 지금의 사회를 비판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현 시대를 단적으로 세계사의 시간이 거꾸로 있다고 정의하는데, 그건 지금 세계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그야말로 19세기로 돌아가려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9세기는 국민국가가 가장 달콤한 떡고물을 무던히 먹었던 시기다. 그는 총 다섯 가지 분야에서 이러한 퇴행이 감지된다고 하는데, 그건 차례로 가치, 민주주의, 자본주의, 테크놀로지 그리고 표상이다. 220 페이지 남짓 되는 이 작은 책은 그걸 한 챕터씩 할애하여 설명한다. 복잡하거나 난해하게 말하지 않고 철학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별 어려움이 없도록 쉽게 설명하고 있다. 신실재론의 기본적인 철학 태도나 그러한 시야로 바라본 현대의 모습이 궁금하였다면 볼만한 책이다. 신실재론은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진리, 선이 존재한다고 믿으므로 이러한 시각으로 곳곳에서 다양성과 상대주의가 넘쳐나 때로는 정말 그른 것으로 생각되는 것에도 제대로 비난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질 때, 그걸 어떻게 분명하게 판단하고 옳고 그른 것을 가려낼 수 있는지 도움이 된다. 다시 말해 신실재론은 다양성과 상대주의가 희석시키고 있는 윤리적 차원을 다시금 보다 명징하게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자본주의의 위기 진단에서 그가 한 주장이 주목을 끈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이윤을 위해 윤리를 쉽게 무시하는데 가브리엘은 공면역주의를 주장한다. 기업을 포함한 사회의 목표를 수입의 증가가 아닌 도덕의 진보, 즉 인간성의 향상에 맞추는 것이다. 그것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내용은 아직 부재하지만, 빈익빈부익부가 날로 심화되는 상황에서 자본 소유의 고저에 따라 비인간화가 많이 발생하는 요즘을 보면 꽤 귀기울일만한 주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 표상은 신실재론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인데, 지금까지 철학은 표상을 어디까지나 인간과 상호 연결된 것으로 생각해왔다. 

이건 쇼펜하우어의 말이 대표적인데,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이렇게 표상이 홀로 객관적이지 않고 칸트가 말했듯 인간의 주관과 연결되어 형성되다보니, 어느덧 표상을 매개하는 미디어가 더 커다란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매체의 과도한 권력에서 과학의 역할 역시 과장되게 된 것이다. 신실재론은 이러한 과학중심주의, 즉 과학만이 실재를 표상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자연주의'라 부르며 비판한다. 신실재론은 과학만이 실재를 표상할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그들이 보는 건 많은 현실로 이뤄진 의미장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말한다. 가브리엘은 하나의 사물에 수많은 현실이 존재할 수 있고 보고 있는 인간과 완전히 독립된 현실, 즉 실재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물리적인 것만 아니라 우리의 감정이나 상상력 또한 모두 현실이라 말한다. 그 모든 현실이 모여 의미장이 되는 것이며 그렇다고 하나의 현실이 되는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 신실재론이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건 이래서다. 의미장을 구성하는 수많은 현실은 그 어디에도 권력에 의한 위계질서가 없다. 이것은 다만 대등한 배열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의 순서를 부여하는 특수한 콘셉트의 '의도'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3개의 정육면체가 눈앞에 있다고 한다면 보통 사람에게 그것이 몇 개냐고 물으면 3개라고 대답하겠지만 양자역학을 하는 하이젠베르크는 원자의 수를 세어 엄청나게 많은 수를 말할 것이다. 이 둘 중에 누가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모두 자신만의 특별한 콘셉트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콘셉트가 '몇 개'라는 의미를 생산했다. 그러므로 가브리엘은 의미란 의도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현실은 그 의도에 의미장이 응답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AFA(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은 인터넷 표상을 독점하고 유일무이한 현실을 양산하여 소비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독재를 용납하는데, 그건 우리가 그들이 생산한 정보를 공짜로 누리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브리엘은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오히려 우리가 GAFA를 위해 무상 노동을 제공하고 있다고. 쉬운 예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이 있기 전에 우리는 사진을 그렇게 열심히 찍지 않았다. 맛있는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카메라부터 들이대지 않았다. 여행에서도 풍경을 음미하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는다. 사진이 먼저고 감각과 생각은 나중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혹은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위해서. 그렇게 우리는 그들의 광고 수익을 증대하기 위한 노동을 자발적으로 무상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우리를 가브리엘은 '디지털 프롤레타리아'라고 부른다. 그는 이제 GAFA를 위한 우리의 노동에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GAFA에게 그 노동의 대가에 따른 세금을 매겨 그걸 기본소득의 재원으로 삼는 것이다. 가브리엘은 기본소득이 윤리적으로 도래에야 하는 제도로 본다. 이런 식으로 가브리엘은 자꾸만 거꾸로 가고 있는 세계사의 시간을 어떻게 하면 되돌릴 수 있는지 설명한다. 어떤 부분은 물론 설명이 빈약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프롤레타리아'처럼 뇌를 신선하게 자극하는 새로운 관점들은 확실히 이 책의 독서를 흥미롭게 만든다. 부담없이 벗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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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 편 - 개정증보판 유럽 도자기 여행
조용준 지음 / 도도(도서출판)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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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도자기 하면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갔을 때가 생각난다. 

 8월의 여름밤은 대통령 궁 가까이 있는 구시가지에서 보내기 좋다. 늦은 밤에도 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녀 떠들석 하고 넓직한 광장 주위엔 앉아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데도 많아 여유롭게 이국의 밤을 즐기기엔 제격이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토속 맥주를 이것저것 맛보다가 술이나 깰 겸 사람들에 섞여 거리를 걸었다. 가는 도중에 갑자기 동행한 지인이 날 어떤 가게로 끌고 들어갔는데 거기가 바로 폴란드 도자기를 전문적으로 파는 곳이었다. 원래 도자기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므로 나는 그제서야 폴란드 도자기를 처음 본 것인데 흔히 그들의 말로 공작의 눈이라 부르는 코발트 블루와 흰색의 공백으로 이루어진 도자기들은 단순한 디자인인데도 제법 멋이 났었다. 그 때서야 지인은 바르샤바를 고집했던 것이 폴란드 도자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여러 개를 골랐고 우린 그걸 거의 한 달 가까이 되는 유럽 여행 또한 내내 가지고 다녔다. 가게 주인이 아주 튼튼하게 포장해줘서 다행이었다.




[여행 때 구입한 폴란드 도자기 커피잔과 함께 한 컷^^]



 기자 출신인 조용준 작가의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 편'을 읽게 된 것은 그 기억 탓이 크다. 

 어쨌든 나도 그걸 계기로 폴란드 도자기에 대해 알게 되었고 몇 개도 구입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심이 생겼으니 더 많이 알고 싶었다. 이 책은 그런 내게 꽤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여하튼 이 책엔 제목 그대로 폴란드는 물론이고 독일을 비롯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의 도자기들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많은 도판과 함께 실려 있다. 유럽 자기의 역사는 생각한 것보다 짧았다. 유럽에서 최초로 자기를 만드는 데 성공하여 자기 공장이 설립한 게 1710년이라고 하니까 말이다. 18세기라면 조선 후기고 그 때면 이미 고려 청자는 물론 조선 백자도 한참 시간이 지났을 때다. 유럽 자기의 역사는 그만큼 늦었던 것이다. 자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베를린 출신의 연금술사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다. 그는 기독교에 의해 이단시 되었던 연금술을 했다가 걸려 당시 작센과 폴란드 군주였던 아우구스트 1세 의해 강제로 자기를 만들게 되었다. 자기는 도기와 다르게 철 함유량이 3% 이하인 고령토를 사용해 1300도씨 이상의 고온에서 굽는데(도기는 철 함유량이 3% 이상인 점토를 사용해 900도씨 내외의 온도에서 굽는다.) 마침 독일 작센과 체코 보헤미아의 경계에 있는 에르츠게바르게 산맥에서 일종의 고령토인 슈노르가 발견된 것이다. 그렇게 하여 도자기는 처음 공장이 세워진 마이슨을 시작으로 동유럽 각지로 퍼져나가게 된다. 책은 그 발자취를 따라 나간다. 제목에 여행이 들어간 것은 그래서다. 어디로 가면 어떤 도자기의 역사를 볼 수 있는지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동유럽의 도자기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면 이 책이 밟았던 여정을 그대로 답습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론 한 달 간의 유럽 여행 일정과 비슷해서 더 흥미로웠다. 책에 나왔던 대부분의 장소가 그 때 발을 디뎠던 곳이었던 것이다. 나는 밤베르트가 동유럽 도자기에서 중요한 명소인 줄은 몰랐다. 황혼녁의 밤베르크의 유명한 시청사를 보면서 훈제 맥주인 라우흐비어(이거 정말 추천합니다. 밤베르크에 가시면 꼭 한 번 드셔보세요.)를 마시긴 했어도 초콜릿 제조와 판매로 얻은 막대한 수입을 미술품 수집에 바쳤던 페터 루드비히의 컬렉션을 거기서 볼 수 있다는 건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프라하에서 베를린 갈 때 들렀던 드레스든 또한 커트 보네것의 '제 5 도살장'을 생각하며 명소들을 방문했을 뿐 그 곳의 박물관에서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가장 유명한 일본 도자기인 아리타 도자기를 만들어 낸 조선 도공 이삼평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다는 건 몰랐다. 뮌헨의 레지덴츠와 님펜부르크 궁전에서 전시된 허다한 도자기들을 봤어도(이 당시엔 귀족들 사이에서 자신이 수집한 도자기 컬렉션을 전시하는 도자기 방을 만드는 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그것에 어떤 의미들이 있는 지 또한 몰랐다. 그 도자기들의 흥망성쇠가 바이에른 공화국의 흥망성쇠와도 관련 있었다니. 폴란드 도자기와는 또 다른 디자인을 가진 체코의 쯔비벨무스터와 헝가리의 헤렌드를 알게 된 것도 이 책 덕분이었다. 체코와 헝가리의 도자기들은 유럽의 것과 많이 닮아있어 개성적인 맛은 좀 떨어졌다. 폴란드 도자기들은 미국에서 먼저 유명해져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건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 폴란드가 가장 먼저 민주주의 국가가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 때 동유럽 국가들 중 처음으로 개방 사회가 되어 독일에서 근무하고 있던 많은 미군들이 폴란드로 여행을 갔고 거기서 독특한 미를 가진 폴란드 도자기들을 조국에 귀환할 때 선물로 많이 사갔던 것이다. 


 이처럼 그냥 보고 마시고 먹기만 했었던 도자기들에 대한 역사와 여러가지 정보들을 얻을 수 있어서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 편'은 내게 꽤 유용한 책이었다. 또한 코로나 19 때문에 언제 또 다시 가게 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리워 하게 되는 8월의 유럽 여행을 겹쳐진 여정 때문에 마구 소환하게 되어 더 각별한 독서 경험이었다. 언젠가 다시 가게 된다면 그 때는 도자기들에 대해서도 눈여겨 살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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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7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19 0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1-03-18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란드 바르샤바 하면 쇼팽 피아노 콩쿠르가 떠오릅니다 거기에는 도자기도 있군요 책 색깔이 바로 폴란드 도자기 색을 나타내는 거였네요 폴란드에서 산 커피잔 멋지네요 저기에 커피 마시기 조금 아깝겠지만, 그래도 자주 쓰시겠지요


희선

ICE-9 2021-03-19 02:25   좋아요 0 | URL
도자기에겐 미안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게 마구 사용하고 있답니다.^^
저도 동유럽에 그렇게 다양한 도자기들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여행하면서 많이 봤지만 다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곳에서 건너온 거겠거니 생각했을 뿐이었죠. 그런데 독일이 그 시작이었다니! 뭐든 쉽게 단정해선 안된다는 걸 그렇게 또 배웠습니다^^
 
로마 황제 열전 - 제국을 이끈 10인의 카이사르
배리 스트라우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까치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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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로 고대 전쟁사 분야에 있어 탁월한 학자로 알려져 있는 미국 코넬대 역사학 교수인 배리 스트라우스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통해 처음 만났다. 거기서 고대사에 있어서 유명한 사건을 전통적인 견해에 자신을 묶지 않고 직접 발로 뛰며 찾아낸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사건에 대한 풍성하고도 입체적인 묘사와 독창적인 통찰력을 보여주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저자는 이번 책, '로마 황제 열전'에서도 여전했다. '로마 황제 열전'은 카이사르에 의해 처음 정립된 황제 체제를 그의 뒤를 이어 굳건히 한 아우구스투스부터 처음으로 기독교를 국가 공인 종교로 인정하고 황제로선 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된 콘스타니누스에 이르기까지 모두 10명의 황제를 각 개인 별로 소개하는 책이다. 지금까지 로마 역사에 관한 책은 많았으나 이렇게 황제에게만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는 책은 없었기에 그렇지 않아도 로마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의 흥미를 대번에 낚아채 버렸다.

 

 

 책은 로마 황제의 궁전들이 있었던 팔라티노 언덕에서 시작하여 로마 제국 말기 마지막으로 로마의 빛이 명멸했던 동방의 라벤나에서 끝난다. 

 지금도 '팍스 로마나'란 말로 유명한 로마 제국의 역사는 사실상 황제 체제의 정립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그 체제의 종말과 더불어 끝났기에 '로마 황제 열전'은 로마 제국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비록 황제가 중심이긴 하지만 로마 제국이 어떻게 운영되었고 유지되었으며 확장되는 반면 수축되어 갔는가 역시 살펴볼 수 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배리 스트라우스가 이 책에 실린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네로, 베스파시아누스, 트리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도합 10명의 황제 개인의 삶은 물론 그를 둘러 싼 로마와 국제 정세까지 두루 자세하게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마 황제가 얼마나 많은데 왜 10명 밖에 없냐는 의문이 있을 것 같아서 작가의 말을 빌어 얼른 대답해 두자면, 이 10명의 황제가 가장 유능하고 성공적이었던 황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 네로만은 성공적이라고 말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가장 흥미를 돋우는 황제라 넣어놓았다고 한다. 어쨌든 뭐, 제국의 역사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거창한 이유를 제외해 놓고서라도 여행을 갔다든가 해서 이탈리아 문화 자체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어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본다. 콘크리트를 처음 만든 것이 네로 황제 때라든지, 로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축물인 '콜로세움'을 지은 것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라든지 이탈리아 문화에 관한 이런 저런 소소한 정보들도 많기 때문이다. 거기다 꽤 재밌다. 로마 황제 개인의 사생활은 정말 이혼과 재혼이 반복되고 차기 황제의 승계를 위해 자기 아내를 딸로 입양하는 등 요즘 드라마에 유행하는 막장도 많아서 전혀 지루하지 않다.

 

 그렇다고 재미만으로 퉁치기엔 이 책에 담겨 있는, 이전엔 미처 몰랐던 로마 역사의 새로운 면모가 많아서 좀 아까운 생각이 든다.

 먼저, 우리는 로마 황제들이 마치 조선 왕조가 그렇듯이 하나의 혈통 속에서 계속 계승되었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초기 로마 황제를 고르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이던 카이사르의 혈통은 불과 4대인 네로를 끝으로 끊어졌다. 네로는 원로원과 군대의 하야 압박에 못 이겨 달아나다 로마 도시 바로 바깥에서 자살했는데 동시에 카이사르의 혈통마저 단절되었던 것이다. 당시 로마인들에겐 카이사르의 혈통이 아니면 황제가 제대로 통치할 수 없다고 여겨 비 카이사르 혈통 황제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그것을 보기 좋게 깨뜨린 사람이 바로 로마 북동쪽 사비니 지방 출신인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였다. 그는 로마인도 아니었고 심지어 어릴 땐 염소 치는 일이나 하던 평민이었지만 개인의 능력으로 황제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그는 걸출한 통치력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버금가는 로마의 전성기를 이룩했으니 로마 사람들은 더이상 황제가 카이사르 혈통이 아니더라도 훌륭히 통치할 수 있다는 걸 믿을 수밖에 없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흉상]

 

 그렇게 하여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이후에는 비 로마인들이 많이 황제 자리에 올랐다. 로마 역사상 최고의 군주로 알려진 트리야누스 황제는 로마 사람들이 시골로 치부하던 히스파니아 출신이었다. 로마 문화의 모태가 된 그리스 문화를 선망하여 진정한 그리스 가치관으로 로마 제국을 하나로 묶으려 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 역시 그 동향이었고 '명상록'으로 유명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역시 그의 조상들은 '스페인 마피아'에 속하는 타지 사람들이었으며 셉티이무스 세베루스 황제는 무려 아프리카 사람이었다.(그가 흑인인지 아닌지에 대해선 아직 명확히 밝혀진 게 없다고 한다. 그건 기록이 없기 때문인데 이건 애초에 로마인들이 황제의 피부색에 연연해하지 않았다는 걸 뜻할 수도 있다.)

 

 이처럼 황제 계승의 역사에서 보듯 로마는 점차 개방성을 뚜렷하게 드러내었다. 그들은 제국을 열심히 확장했지만 그렇다고 오직 로마인만이 그 정점에 서야한다고 여기진 않았다. 그들이 제국의 존속을 위하여 가장 우선적으로 폈던 정책은 속주가 된 지방 엘리트들에게 출세길을 열어주어 포용하는 것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를 비롯 타 지역 출신의 많은 황제들이 가능했던 건 그런 로마의 기본 정책 때문이었다. 이들의 개방성은 거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여성에 대해서도 그러했고 다른 지역이 평민들에게도 그러했다. 여성의 경우 공식적으로 정치 진출이 인정되지 않았으나 이런 저런 황제 승계에 있어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미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여성이었다. 황제들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거나 물려주기 위해 기꺼이 여성에게 자신의 권력과 부를 나눠주었다. 아무리 다른 남자의 아내이고 그의 아이를 배었다 하더라도 왕비로 삼는 것엔 문제가 없었고 때로 티베리우스처럼 전 남편의 아이가 황제가 될 수도 있었다. 세상엔 이런 말이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건 남자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건 여자다.' 나중에 읽어보면 알겠지만 로마 황제의 역사만큼 이 말을 실감시켜 주는 것도 또 없다.

 

 더하여 다른 지방의 평민에 대해서도 로마의 벽은 차츰 허물어져 갔다. 로마에겐 시민권이라는 게 있다. 그건 로마의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자격이다. 처음엔 오직 로마인에게만 주어졌디만 제국의 역사가 지속될수록 그 범위 또한 비 로마인에게로 넓혀졌다. 마침내 후기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속주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로마 시민권을 모조리 부여하는 아주 파격적인 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건 기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는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왕성한 포교 활동을 펼쳤다. 유대(책에서는 '유다이아'라고 부른다.)지방은 로마 제국 역사 내내 골칫거리 였다. 반란이 잦았던 땅으로 그 유다이아 지방을 평정하는 것이야 말로 황제의 중요한 공적이 되곤 했다. 하드리아누스 때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가장 거대한 반란이 일어나서 그 진압에 친히 나서야 할 때도 있었다. 유대인들이 가장 저주하는 로마 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인데, 그가 이른바 '기독교 대박해'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있었지만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지 않았다. 문제가 되었을 때도 되도록 관대하게 되었고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포교만 한다면 대체적으로 내버려두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그리스적 문화로 통일하려 했었는데 그건 기독교가 점차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유일신에다 내세 중심인 기독교가 로마 제국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청년을 신격화하여 이성과 다양성 그리고 현세 중심인 그리스적 종교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역사는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곳으로 흘러갔고 그렇게 되는데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역시 필요하거나 인정할만하다면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던 로마의 개방성이었다.

 

 이러한 로마 제국의 모습은 타자에 대한 혐오와 배척이 심해지는 오늘날 정말 시사하는 바가 많다. '로마 황제 열전'이 잘 보여주듯이 무려 1,200년에 이르는 로마 제국의 역사가 다른 것도 아닌 특유의 개방성이 원동력이 되었음을 상기한다면 이제 그런 태도들은 버려야한다는 게 절로 자명해진다. 타자에 대한 배척과 차별은 분열과 붕괴를 가져올 뿐이다. 공존을 위한 존중과 배려만이 나의 장기 지속 또한 가능하게 만든다는 걸 '로마 황제 열전'이 상세한 정보와 흥미로운 서술로 세공한 로마 제국의 역사는 선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객관적으로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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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현대 일러스트 미술의 선구자 무하의 삶과 예술
장우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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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를 여행할 때 한 번은 찾아가게 되는 성 비투스 성당. 거기엔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아 절로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하나 있다. 슬라브 민족에게 처음으로 기독교를 전했다고 여겨지는 성 키릴로스와 성 메토디우스의 형제의 일대기를 재현한 것인데 무엇보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보이는 화려한 색채 때문에 작가의 이름을 뇌리에 단단히 새겨두게 된다. 그 작가의 이름은 알폰소 무하. 오랫동안 미술을 바라보던 시각에 있어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던 고전주의에서 벗어나 현대 감각에 걸맞게 새로운 시야로 미술을 해석하고 표현했다고 하여 '아르누보'란 이름으로 알려진 사조의 대표 화가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뭐, 단순히 말하자면 아르누보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화가인 셈인데 그러나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그만한 위치에 서 있는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에 대해 한 권의 분량을 전적으로 할애하는 책은 만나보지 못한 것 같다. 알폰스 무하의 매력에 빠진 사람으로썬 참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이제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게 되었다. 알폰스 무하에 대해서만 얘기해주는 책을 드디어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미술이론가 강우진이 쓴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이란 책이다.




 이 책은 무엇보다 단편적인 지식으론 잘 알 수 없었던 알폰스 무하의 생애과 그 예술 여정을 체계적이면서 쉽게 알려주고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가 어떤 인생 역정을 거쳐서 일러스트로 대변되는 그의 독특한 미술 세계를 정립했으며 또 말년엔 슬라브 민족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는지 그걸 명확하게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그의 인생 항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1860년 7월 24일, 체코 모라비아의 작은 마을 이반지체에서 태어난 무하는 처음엔 성직자로 키우고 싶은 부모님의 뜻을 따라 어릴 때 성가대로 일하기도 했으나 곧 변성기가 찾아오고 더이상 음악으로 신에게 봉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그는 우연히 보게 된 지방 화가 음라우프의 '예수의 탄생'이란 그림 때문에 미술에 헌신하기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는 빈에서 무대 미술을 전담할 화가를 구한다는 소식에 그것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난다. 떠날 때만 해도 무려 30년 동안이나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건 알지 못했다. 무하는 빈에서 미술에 있어서 한창 불고 있던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만끽했으며 빈에서 뮌헨으로 그리고 파리로 옮겨가면서 그것을 주로 밑바닥 민중의 생생한 생활상들을 스케치 하는 것을 통해 점점 자기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하하면 얼른 떠오르는 '일러스트'는 예술적 소신이 낳은 선택은 아니었다. 원초적인 이유는 궁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일이었다. 자신을 후원한 백작의 지원도 끊기고 생계 유지를 위한 수단도 어디서든 마련할 수 없어 생존이 정말 절박해졌을 때 겨우 들어온 일거리가 아이들을 위한 신문이 삽화를 그리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는 작업실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작업실을 찾은 많은 파리의 아티스트들과 교류(여기엔 고갱도 있었다.)하다가 결정적으로 당시 파리의 가장 유명한 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주연하는 연극 '지스몽다'의 포스터를 맡게 됨으로써 그의 예술적 세계가 만개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잘 아는 무하의 예술들은 이러한 여정들을 거쳐 태어났던 것이다. 미술에 대한 전통적인 고전주의적 시각에선 무하가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일러스트는 하찮은 것들이었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과 결별은 선언하는 아르누보의 입장에서 무하의 작품들은 고인 물과도 같은 예술에 신선한 물을 공급하는 마중물과도 같았다. 그렇게 그는 아르누보의 대표 화가가 되어갔지만 그러면서도 어릴 때부터 갖고 있었던 종교적 신념은 퇴색되지 않았다. 그는 1차 대전으로 향해가는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점점 불안해지는 체코의 상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같은 배를 타고 있는 체코 민중들에게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써 성좌를 그려주려 한다. 종교적 신념과 체코의 민족주의를 화합하는 것을 통해. 그것이 바로 무하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슬라브 서사시'이다. 성 비투스 성당에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도 바로 그 '슬라브 서사시'의 일환이다.


 [책에 나오는 무하가 만든 성 비투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냥 그림으로 봤을 땐 무하가 왜 저 때 하필이면 저런 그림을 그렸으며 과연 어떤 마음이 변화의 거센 노도 속에서 그 스타일을 통해 관통하도록 만들었을까 알지 못했다. 그냥 참 예쁜 그림이구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 이제 이 책을 통해 무하의 생애와 예술에 투영된 신념들을 헤아리고 나니 가벼워 보이는 그림 속에도 실은 아주 진중한 터치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흔히들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알폰스 무하의 그림만큼 그 말이 잘 들어맞는 것도 없을 듯하다. 분명 이 책을 읽고 난 뒤의 무하 그림은 전혀 다르게 다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나처럼 알폰스 무하에 대해 잘 알고 싶었다면 어쩌면 유일한 선택일 이 책을 추천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하여 무하의 그림들이 컬러로 많이 삽입되어 있어 눈까지 즐겁게 함으로 더욱 그렇다.


[이런 무하의 그림 도판이 책엔 많이 삽입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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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3-03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폰스 무하 그림이 그때는 아주 새로운 거였군요 지금이라면 많은 사람이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도 좋아하는 사람 많았겠지요 아르누보 대표 작가니... 화가라고 해서 다 처음부터 그림을 그린 건 아니군요 그런 사람이 알폰스 무하만은 아니겠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고 재능도 있었네요 그림을 그린 사람 마음이 어땠는지 알고 그림을 보면 다르게 보이기도 하겠습니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