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 러시아 고전산책 6
막심 고리키 지음, 이수경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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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는 대학 초년생들에게 있어 필독서였습니다.
 평범한 주부였다가 남편의 죽음과 아들의 인도로 점점 혁명에 눈 뜨고 결국 혁명의 화신이 되는 펠라게야 밀로브나의 삶이 마치 화인처럼 그 가슴에 새겨지곤 했죠. 아직도 '그러나 우리가 더 많을 것이다.'라는 그녀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많을 줄 압니다. 뭔가 의지의 힘줄을 돋구게 만들었던 그녀의 말들이 아직도 새록새록 떠오르는군요.

 '마부'는 그 고리키의 소설입니다. 장편은 아니고 단편집입니다.
 그의 나이 39살에 쓴 '어머니'는 25살에 작가로 데뷔한 그가 세상에 내놓은 첫 장편이었죠. 그 14년이라는 세월의 간격 동안 고리키는 단편과 중편 그리고 희곡을 썼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소개된 그의 단편집 '마부'가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고리키의초기 모습을 흠뻑 맛볼 수 있다는 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그가 서른이 되기 전에 발표한 것들이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막심 고리키가 첫 작가적 여정을 시작할 때 과연 어떠했는지, 달리 말하면 '어머니'라는 걸작은 과연 어떻게 해서 가능했던 것이지 그 실상이자 흔적을 바로 이 단편집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죠.




 모두 10개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버릴 게 하나도 없는 단편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무엇보다 '의식화'가 아니라 공감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혁명으로 나아갔듯이 바로 악마란 그러한 공감이 결여된 존재임을 보여주는, 조금은 초현실주의적이라고 해도 좋을 '마부'부터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의 유령'처럼 크리스마스 날 문득,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인생을 의미있게 남길 수 있는 지를 한 환영의 존재를 통해 깨닫게 되는 한 부유한 가장이 등장하는 '환영'에다 자신이 헌납한 종이 깨어짐으로 인해 드디어 그동안 저질렀던 죄악이 어떤 형태로든 결코 지워질 수 없을 것을 깨닫는 자본가를 그린 '종'과도 같이 하나같이 뚜렷이 부각되는 주제와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인지라 무려 130년 이상이라는 세월의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감가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4번째 이야기인 '로맨스'와 그 뒤로 죽 이어지는 '아름다움','푸른 눈의 여인' 그리고 '아쿨리나 할머니' 입니다. 불우한 소년시절 우연히 만난 한 여인 때문에 평생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내를 그린 '로맨스'와 역시나 산책길에서 우연히 보게된 아름다운 이국적 여인에 대한 매혹을 그린 '아름다움'은 '혁명' 자체를 은유하고 있는 듯 보여집니다. 혁명도 그렇게 첫사랑처럼 매혹으로 시작되니까요. 그러다 '로맨스'의 주인공처럼 이기적 욕망으로 변질되고 말죠. '아름다움'은 그 시작의 순간을, '로맨스'는 그런 과정을 그린 듯 합니다. 사내는 결국 그 첫 만남을 잊지 못하고 결국은 그 미련 때문에 자기 인생마저 망치고 마는데 그렇다고 고리키가 삶에 다가온 그 전면적 변화의 순간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내가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하니까요.

 "내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좋은 거였네... 얼마 안 되지, 그래... 이렇게 술로 세월을 보낸다네. 그런데 그녀에 대해 회상하면... 기분이 좋아져. 난 이렇게 회상하는 걸 좋아한다네. 그녀가 없었더라도... 살았겠지만.... 이야기할 거리도 없었겠지! 빌어먹을... 어떻게든 살다 죽었겠지. 어찌 되건 상관없어. 그런데 그녀가 있어서 회상할 거리가 있다네..."(P. 102)

 이걸 읽고 문득 이와이 슌지의 영화 '러브레터'가 생각났습니다.
 혹 기억나실까요? 왜 산에서 조난당해 죽은 후지이 이츠키를 같이 조난당했던 동료들이 기억하는 장면 말입니다. 그런 추위 속에서 잠들면 죽기 때문에 동료들이 잠들지 못하도록 끝까지 노래를 불렀던 후지이 이츠키를 회상하는 장면. 전 그게 묘하게 감동적이더군요. 결국 인생이란 그렇게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가지거나 남긴다는 게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심 고리키도 그런 면에서 혁명이라는 걸, 혹은 변화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생각되더군요. 설사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한 번 전부를 걸어보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있다고 말이죠.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이 진짜 이야기로 남아 내내 기억속에서 갓 잡은 활어처럼 퍼덕이며 삶에 의미를 충전시켜 줄 것이라고.

 이 마음을 저는 다음의 이야기인 '푸른 눈의 여인'과 '아쿨리나 할머니'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두 단편만으로도 이 단편집을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푸른 눈의 여인'은 타인의 외형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는 한 경찰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너무나 세파에 찌들었기에 타인의 진심은 보지못하는 청맹과니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전혀 잘못 보고 있었음을 가슴 아프게 깨닫게 됩니다. '푸른 눈의 여인'은 삶과도 같습니다. 우리도 보고 싶은 쪽으로만 보고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산적이고 소극적입니다. 그 경찰관처럼 우리도 서푼어치의 지식과 경험으로 삶 전체를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지요. 바로 그런 우리의 어리석음을 통박해 오는 것이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아쿨리나 할머니'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이 단편과 '푸른 눈의 여인'이 어머니의 원형이 되는 것 같습니다. '모성의 강함과 위대함'을 잘 보여주는 단편들이기도 하니까요.

 아쿨리나 할머니는 참 감동적이면서도 아픈 단편입니다.
 그녀는 '늙은 악마'로 통하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거지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는 손자, 손녀로 통하는 장성한 여덟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은 모두 작고 축축한 지하 방에 모여 삽니다. 그 여덟 명은 일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아쿨리나 할머니의 동냥질에 의해서만 살아갑니다. 그들 역시 아쿨리나 할머니만큼이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쿨리나 할머니에게 왔다는 것 자체가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자들만이 아쿨리나 할머니에게 옵니다 그런 그들을 아쿨리나 할머니는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먹이려고 매일 동냥질을 합니다. 

 헌신.
 하지만 그런 헌신을 사람들은 할머니를 '늙은 악마'라 부르듯이 경멸할 뿐이죠. 당연합니다. 구제될 길이 전혀 없는 사회 패배자인데다가 인간성도 나빠서 분명 밑뚫린 항아리에 물 붓는 것처럼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할 헌신임을 잘 아는 까닭이죠. 사람들의 시선이야 어떻든 할머니는 계속 먹이려고 동냥질을 합니다. 대가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걸 해 줄 인간들이 아니라는 것조차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자신이 아파 누워도 병원에 데려가는 걸 귀찮아하고 묘자리를 위해 모아 둔 돈 역시 자기들 배채우는 데 써버리는 인간들이지만 할머니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꺼이 그 돈을 내어줍니다. 그리고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숨을 거두죠.

 생각해보면 이만큼 바보 같은 삶도 없습니다.
 타산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으로 보자면 말입니다. 뭔가 희생을 할 때 사람들은 언제나 대가가 부머랭처럼 되돌아오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아쿨리나 할머니에겐 오직 그 '헌신' 자체, 그렇게 그 '과정'만이 중요했습니다. 결국 구원을 얻는 것은 누구인가요? 바로 할머니입니다. 이 단편엔 할머니의 시신을 묘지로 운반하는 후일담이 있는데 바로 거기서 밝혀집니다. 할머니의 삶이 무엇을 남겼는가 하는 것이 말이죠. 후지이 이츠키랑 비슷합니다. 마지막 단편에 나오는 이르제길 노파의 단코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그 단코 역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심장을 불태우지만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은 채 죽습니다. 남은 건 그 기억, 이야기 뿐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들은 자의 가슴에 낙인처럼 새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새겨진 이야기가 자기 삶을 살아가는데 하나의 횃불이 되어줍니다. 모두가 욕망에 눈멀어 이기심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온갖 어지러운 타산으로 거미줄처럼 얽혀져 그저 삶이 어두운 정글 같기만 하고 나홀로 거기에 외따로 버려져 있다고 느껴질 때, 단단히 중심을 잡고 옳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횃불말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남기고, 결국은 사람을 남기는 것. 그것이야 말로 삶의 진짜 의미라고 고리키는 이 단편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또한 이것은 그대로 앞서 나왔던 '환영'과 '종'의 최종 해답이기도 하며 삶이 결국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라는 건 마지막 단편인 '이르제길 노파'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유독 고리키가 이토록 삶의 의미에 대해 천착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삶이 어린 나무와도 같았던 시절, 잇다른 비극을 그가 맛보았기 때문이죠. 그의 나이 네살 때, 아버지가 콜레라로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고리키를 외할아버지에게 맡기고 재혼해버렸습니다. 엄마가, 가족의 따스한 보호가 가장 필요할 시기에 그는 혼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비극은 계속되었습니다 11살 때는 외할아버지가 파산했습니다. 바로 다음 해엔 재혼한 어머니마저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이제 그는 고아에다 가난뱅이였습니다. 사회 밑바닥의 삶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 대학생들을 만나고 마르크시즘에도 눈을 떴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현실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는 권총 자살까지 감행합니다. 하지만 실패했고 남은 건 만성 폐결핵 환자라는 사실 뿐입니다. 고리키의 문학은 그런 삶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수없이 겪어온 비극과 고통 그리고 불안. 거기서 끊임없이 되물었던 삶의 의미가 결국 문학이란 형태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물도 가장 밑바닥의 것이 가장 달듯이, 바로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자가 길어낸 해답인지라 더욱 공감을 자아내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과 그 속에서의 성찰이 빚어낸 단편들이 모여있기에 저는 감히 어느 단편 하나도 버릴 게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죠.

 저처럼, '어머니'의 여운을 간직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분명 이 단편집도 흡족하게 읽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건 이 단편집을 통해 고리키를 처음 만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하여, '마부'나 '환영' 그리고 '종'의 주인공들처럼 도대체 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계셨다면, 그와 똑같이 많은 고민을 한 이 고리키의 단편집이 좋은 벗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르제길 노파가 말하듯, 삶에 마구 천둥 번개가 몰아칠 때, 미리 나타나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스텝의 푸른 불꽃이 되어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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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4
윌리엄 골딩 지음, 안지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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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대왕'에 이어 두번째로 윌리엄 골딩의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피라미드'는 '파리대왕'과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어 자못 흥미로웠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으로 참전했던 윌리엄 골딩은 전쟁동안 겪었던 뼈아픈 경험을 한 권의 소설로 승화시켰다. '파리대왕'은 인간의 영혼은 마치 백지와도 같이 선과 악, 질서와 야만 환경에 따라 어디로든 쓰여질 수 있으며 그런 인간들을 적절히 통제해 줄 문명이 그 힘을 잃어버렸을 경우 인간들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스스로 혼돈을 초래할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렇게 '파리대왕'은 문명이 가진 긍정적인 의미를 어느 정도 보여주었는데 하지만 이번에 읽은 '피라미드'는 달랐다. 그 문명이 자기만의 궤도에만 과도하게 집착하여 원래 문명이 존중해야 할 인간을 더이상 존중하지 않을 경우 도리어 인간들에게 얼마나 감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이 그렇게 된 사회를 단적으로 윌리엄 골딩은 '피라미드'라 부른다. 이 소설은 '스틸본'이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지만 사실은 현대 사회 어디라도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적 질서를 집약적으로 드러낸 공간이기도 하다.

 

 나는 그녀의 고개 뒤로 강을 쳐다보았지만 대신 챈들러스 클로스의 그림이 즉각 떠올랐다. 배비컴 중사의 집은 윌멋 대위 집 입구 건너편에 있었다. 두 집이 나머지 집들보다 뚜렷하게 우월했다. 그 너머로는 집들이 점점 더 작아지고 초라해지고 더러워지고 퇴락해서 폐허가 된 공장까지 이르렀다. 남자 아이들은 '가난한 소년'의 운동복을 입었다 아버지의 바지를 잘라 입었는데, 버려진 셔츠가 밑으로 튀어나왔다. 대부분 맨발이었다. 나는 거기가 신문에서 빈민가라는 부르는 곳임을 갑자기 깨달았다.( P. 67). 


스틸본의 모습을 표지로 사용한 한 '피라미드' 표지 중에서...

 이런 공간 속에서 주인공 올리버는 세 명의 인물을 통해 '피라미드'적 사회의 진실을 깨달아 나간다. 그 '스틸본'은 '파리대왕'에 나오는 문명화되지 못한 무인도와는 정반대로 한껏 문명화된 공간이지만 그 속에서 만나고 느끼게 되는 위험과 숨막힘은 결코 거기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면에서 '피라미드'라는 제목은 중의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처럼 층층이 이루어진 계급 사회를 뜻하기도 하지만 '피라미드'의 단면인 '트라이앵글'처럼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세 명의 인물을 통해 전개되어 나가는 이야기를 뜻하기도 한다. 그렇게 이 '피라미드'란 소설은 사실 세 개의 이야기가 주인공을 중심으로 통합된 이야기이며 그 각각은 주인공이 '피라미드'적 사회의 진실에 대해 눈을 뜨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피라미드를 형상화한 표지...

 단순하게 말하면 올리버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피라미드'에서 그를 진실로 인도하는 세 꼭지점의 인물들은 각각 이비, 애벌린, 바운스로 그들은 모두 올리버에게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비는 아직 '피라미드'적 사회의 허상을 깨닫지 못한 올리버가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상위 계급에 대한 선망의 대리 충족 역할을 한다. 즉 올리버의 이비에 대한 욕망은 정말 이비를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보다 상위 계급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의 비뚤어진 투영인 것이다. 올리버가 이비를 원한 것이 원래 동경했던 상위 계급의 화신과도 같았던 이모젠의 약혼 소식을 듣고 이루어졌다는 점과 무엇보다 이비를 원하게 되었던 계기가 자기보다 상위 계급인 보비와 함께 있는 것은 본 뒤였다는 게 그것을 증명한다. 즉 올리버에게 이비의 육체란 단순히 여자의 육체가 아닌 자기 스스로를 상위 계급으로 여기게끔 만들어 주는 일종의 전리품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사실은 이비가 자신과의 정사로 임신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젖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 임신 가능성을 통해 올리버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계급에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비는 결국 올리버보다 더 상위 계급의 누군가와 관계된 문제로 인해 마을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비의 사라짐은 올리버의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비의 사라짐을 통해 '피라미드'적 사회가 약자에게 얼마나 가혹한지를 그는 새삼 깨닫게 된다.


 

 그 두려움이 있어서인지 다음의 이야기는 보다 더 상위 계급에 서고자 옥스포드 대학에 들어간 올리버를 보여준다. 이비처럼 사라지지 않기 위해 그는 사회가 바라는 단계를 착실히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그가 휴가를 맞아 다시 '스틸본'으로 돌아오고 엄마의 강권으로(그는 원래 바이올린 연주를 했는데 그 연주를 맡은 사람이 갑자기 연극에 참여할 수 없게 되어 올리버의 엄마가 그에게 거의 억지로 떠맡긴 것이다.) 연극을 하게 된다. 애벌린은 바로 거기서 만나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연극 연출자다. 이 부분에서 연극이 나오는 이유는 이비를 그렇게 사라지게 만들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해왔고, 그 때문에 좀 더 사다리의 윗 쪽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해왔던 올리버에게 사실은 그 사회가 보는 것만큼 강하지 않으며 오히려 연극과 마찬가지로 진실한 의미라고는 모조리 텅 비어버린 환영에 불과함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이 부분의 연출이 참으로 절묘한데, 골딩은 이 연극이 사실은 얼마나 계급적인 것인가를 먼저 보여준다. 시장의 아내가 주인공이었을 때와 거의 내쫓겼다시피 했을 때의 시 당국으로부터 배우들이 받는 대접의 차이를 통해 이런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실력이 아니라 바로 계급 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소음이나 다를 바 없는 노래 실력을 지닌 시장 아내가 늘 프리마돈나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골딩이 이런 에피소드를 깔아 놓는 것은 무엇보다 현재 올리버가 기울이는 노력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보이기 위함이다. 결국 사회는 그의 예상 대로 되지 않을 것이며 그가 아무리 노력한들 이비의 운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는 한편, 그토록 올리버가 매달리려고 하는 이 사회가 과연 실제로 가치있는 것인가를 연극 연습과 공연을 통해 보여준다. 거기서 올리버는 분명히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선망해왔던 이모젠의 모습이 사실은 다 연기였음을, 그리고 그 이모젠이 대표하고 있었던 상위 계급 역시도 상연되는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연극만큼이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이는 애벌린이다. 그런데 그 애벌린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질이 낮은 인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육체는 남자지만 내면은 여성인 인물인 것이다. 애벌린은 그러한 자신의 진실을 용기있게 올리버에게 간접적으로 전하지만 올리버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소리로 비웃어 애벌린을 수치심에 젖게 한다. 비록 이 '피라미드'적 사회가 허상이라는 것에는 눈을 떴으나 아직 완전히 헤어나오지는 못한 올리버는 인간이 얼마든지 다양한 면모를 지닐 수 있다는 것과 그걸 배려하거나 포용해야 한다는 것까지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올리버를 거기까지 이르도록 해 주는 인물이 바로 세번째로 나오는 인물인 바운스다. 올리버가 그것을 보지 못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동안 사회가 만든 가치관에 깊숙이 길들여져 있었던 탓이었다. 때문에 그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온전히 자기만의 시선으로 보기 위해서는 그 과거로 다시금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바운스는 바로 그것을 위해 나오는 인물이며, 그렇게 올리버 과거의 인물이다. 바로 그 과거의 시간 속에서 올리버는 상위 계급으로 가기 위해 포기해 버렸던 원래 되고 싶었던 음악가가 되고 싶어하는 자신과 다시 만난다. 그 시간을 헤아리면서 올리버는 무분별하게 도취되어 있었던 상위 계급을 향한 선망 속에서 잃어버렸던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바운스는 바로 그러한 것들의 상징이다. '스틸본'에서 죽은 지 오래된 오필리어처럼 살고 있었던 바운스는 사회에 길들어지느라 자신이 진정 원했던 것을 모조리 흘려보내야 했던 주인공의 모습과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바운스도 이비나 애벌린처럼 '스틸본'에 의해 사라진다. 올리버는 그 사라짐을 마치 몸을 불로 지진 것처럼 기억에 새긴다.

 

 또한 나는 그 장면이 불로 지진 것처럼 내 몸에 흔적을 남겼다는 것 그리고 내가 사는 곳에 지울 수 없도록 각인되었다는 걸 당시에도 알았다. (...) 아무도 바운스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틸본이 공동으로 등을 돌린 몇몇 사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내가 대놓고 일부러 묻지 않았더라면 그 많은 세월 그녀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P. 277)

 

 그 사라짐이 그토록 올리버에게 깊이 새겨진 것은 바로 그것이 자신의 사라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스틸본에 의해 추방되었던 바운스는 스틸본에 의해 자기 꿈을 억지로 수정해야 했던 올리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 바운스의 사라짐은 진정한 자기 자신의 사라짐과도 똑같았다. 그 바운스를 회상하면서 올리버는 자기가 잃어버린 것, 그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지금 다다른 곳이 어디인가를 똑똑히 깨닫는다. 그건 다시 만나게 된 바운스의 작별인사와 곧이어 이어지는 무덤의 장면으로 완성된다.

 

 "잘 가라. 이제 다시 만날 일은 없는 것 같다."(P. 284)

 

이렇게 '피라미드'는 올리버처럼 사회에서 주입된 관념으로 보다 계급의 상위로 올라가려는 무분별한 욕망 속에서 정작 우리가 얼마나 큰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를 아프게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올리버는 너무나 뒤늦게 그것을 깨닫게 되는 바람에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피라미드'의 사회는 한 번 깊숙이 편입되면 놓여나는 것을 잘 허락하지 않는다는 암시임과 동시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빠져나오는 것도 역시나 커다란 용기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의 암시이기도 하다. 골딩이 마지막에 올리버에게 가족을 허락하고 유독 그의 두 아이를 강조하는 것과 바운스가 집에 불이 나면 아이 보다는 차라리 앵무새를 구하겠다는 말이 그것을 드러내는 듯 하다. '파리대왕'이 인간이 문명의 통제로 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때의 근심이 낳은 산물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피라미드'는 우리에게 너무 과도하게 이루어지는 문명화에 대한 근심이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골딩의 근심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걸까 하고 묻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올리버의 비극적이라고 해도 좋을 삶을 이처럼 세 가지의 이야기로 보여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일종의 타산지석처럼 너무 뒤늦기 전에 지금 찬찬히 자신의 삶을 잘 들여보라는 뜻으로.

 

 그렇게 '피라미드'는 나 역시 이 피라미드의 보다 위 쪽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지금 너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나 있지는 않는지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정말로 너무 뒤늦은 후회를 하기 전에 소설을 통해 그런 사유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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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2-3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2013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목을 보니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책속에 나온 사람들은 다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아니, 바뀌는 사람도 있지만 한번 정해지면 그 삶만을 되풀이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바뀔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만 저는 예전과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군요^^

한 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이대로 살아가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쉽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달라진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다시 생각하니 우리 삶도 한번뿐이군요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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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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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러한 상황은 나로 하여금 과거 1호 지구에서 읽었던 '파피용'이라는 공상 과학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노아의 방주'라는 주제에 착안하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들을 태양계로 실어 나를 우주선을 제작하는 상황을 상상한다. 이 때 이 '파피용 프로젝트'가 해결해야 했던 가장 어려운 과제는 무엇이었던가? 인류가 동일한 과오를 영원히 반복하지 않게끔 최선의 후보자들을 선발하는 작업이 아니었던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신 6권 p. 373 중에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베르베르의 데뷔작 '개미'와 그 후에 나왔던 '타나토노스', '천사들의 제국', 그리고 '신'은 하나로 모아지는 연속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개미'는 주인공이 조나탕 웰즈와 니콜라 웰즈 그리고 쥘리 팽송 등으로 이후와 다르긴 하나 특히나 쥘리와 미카엘의 경우 베르베르가 주인공들에게 계속 같은 '팽송'이라는 성을 준 것은 아무래도 독자들이 이 이야기들을 일련의 이어지는 이야기로 받아들이도록 배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볼 경우, 다소 주제가 뚜렷해 보이는 '개미'는 논외로 하더라도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작가 베르베르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썼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베르베르가 전혀 별개의 소재로 보여지는 이야기들을 하나의 연속된 이야기로 보여지기를 원했다는 건 분명 거기에는 어떤 뜻한 바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다소 무리라는 걸 무릎쓰고 추정해 보자면 결국 '타나토노스'부터 '신'까지 이어지는 미카엘 팽송의 여정은 처음에 그가 개미들을 통해 구축했었던 세계를 다시금 인간적 차원으로 승화시키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근거는 물론 '개미'에서 만들어진 세계의 디테일들이 '천사들의 제국'이나 '신'에서 설정된 세계의 디테일과 유사하다는 것에 찾아진다.

 

 일례로 '개미'에서 에드몽 웰즈가 남긴 수수께끼를 풀어 개미들과 통신할 수 있는 로제타 석을 찾고 결국  지하실에 유폐된 이들과 합류하여 개미와 공존해 살아가는 니콜라 웰즈는 그 로제타 석을 이용하여 개미들의 신으로 군림하게 되는데 이는 '신'에서 주인공 미카엘 팽송이 자신이 다스리는 1호 지구의 신으로 군림하는 것과 방식이 유사하다. 이런 식으로 은연중 드러나는 유사성이 베르베르 작품 세계의 원점엔 역시나 '개미'가 있음을 생각하게 만들며, 그 개미의 세계를 그저 소설 속 상상의 세계로 놓아두지 않고 인간의 체제로 현실화 시켰을 때, 일어날 수 있는 난관과 그 난관의 해결에 필요한 것들을 헤아려 보는 것. 그것이 바로 미카엘 팽송의 여정에서 베르베르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가 아닐까 여겨지게 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제3인류'도 그 연속성 위에 있는 작품이다.

 그건 분명하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이전의 여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었던 에드몽 웰즈의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이 여기서도 여전히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아예 이번은 그 '개미'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천재 곤충학자이자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을 쓴 장본인이기도 한 에드몽 웰즈의 손자 다비드 웰즈가 주인공이기까지 하다. 이건 어쩌면 하나의 단서일까? '제3인류'가 사실은 인간판 '개미'라는 것의.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앞서 '개미'에는 로제타 석을 이용하여 개미의 신으로 군림하게 되는 니콜라 이야기를 했지만 '제3인류'에도 그런 존재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가이아다. 아, 이런 식으로 소설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신이 나오긴 하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신도 아니다. 여기서의 신은 지구 그 자체다. 지구가 사람처럼 인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그는 신만큼이나 전지전능하다. 필요하면 기상도 마음대로 조정하고 쓰나미도 일으켜 원하는 곳을 타격할 수 있다. 그는 병원균까지 창조하고 조종할 수 있다. 가히 신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가이아란 이름을 붙여 본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왔던 대지의 여신 이름을.

 

 고대 그리스 신들은 신탁이라는 것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자신의 의지르 전할 수 있었다. 이 신도 그렇다. 아주 구체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전할 수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가이아란 이름이 어울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소설에서도 그 이름을 언급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지구 자체를 인격신으로 여길 경우 얼른 떠오르는 것은 전작 '신'에서의 미카엘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똑같은 1호 지구를 담당하여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구 위 인간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던 미카엘.

 

 

 순전히 자신의 생존만 신경쓰고 지구 위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들은 신경쓰지 않는 '제3인류'의 지구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 미카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이 지구라는 신의 자기 안위만 생각하는 냉혹성과 맹목성도 어느정도 이해는 되었다. 아마 당신도 이 소설을 읽게 되면 이 지구라는 신을 그리 달갑게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지구는 자신의 기억을 유지하는, 인간으로 치면 뉴런과 같은 석유를 자꾸만 빼앗아간다는 이유로 인간을 응징하는데, 그게 신종플루같은 독감균을 만들어 거의 수십억 단위로 인간들을 몰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인간들은 쓰나미다 뭐다 해서 마치 발로 일군의 개미들을 짓밟듯 지구에의해 가볍게 제노사이드를 당한다. 그동안 인간들에게 당한 지구의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는 이해 못할 바가 아니나 그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인간인 이상 이렇게 엄청난 수의 인간들이 죽어나가는 걸 코를 풀듯 가볍게 해버리는 지구를 무턱대고 납득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구에겐 그럴만한 속사정이 있었다. 그에게도 트라우마라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혹시 아주 먼 옛날 유카탄 반도에 떨어져 공룡을 멸종시켰다는 운석을 기억하시는지? 지구의 잔혹함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오래 전, 지구는 정말로 갑자기 다가온 소행성 때문에 죽을 뻔 했던 것이다.

 

 테이아.

 충돌은 너무나 강력했다. 그 때문에 내 중심축은 0도에서 15도로 기울어졌다. 그에 따라 사계절이 생겨났다.

 그 때부터 나는 내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p. 105) 

 

 다행히 화성의 위성 하나가 대신 희생해 지금은 지구의 달이 되는 것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그 공포가 너무 컸기에 지구는 다시 또 그런 일이 일어날 지 몰라 매일을 두려움 속에 보내게 되었다. 패배를 두려워하는 '신'의 미카엘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는 미카엘이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것과 똑같이 생존을 위해 인류에게 개입한다. 그러니까 우리 인류의 진화는 다름아닌 지구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셈이다. 지금의 인류는 바로 그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선별되었던 것이다.

 

 '개입'과 '선별'은 베르베르의 전 작품을 통해 이어지는 핵심 주제다.

  이같은 지구가 생존을 위해 자신의 피조물을 이용하는 것은 첫 작품 '개미'에서도 두드러졌던 일이었다. 대표적인 게 바로 '메르쿠리우스 임무'다. 개미들과 공존하며 살아가던 인간들이 새로 추대된 클리푸니 개미 여왕의 음식 공급 중단으로 죽을 정도로 굶주림에 허덕이자 개미들에게 지하실에 갇힌 자신들을 구조해달라는 메세지를 지상의 인간들에게 전하도록 하는데 그것이 바로 '메르쿠리우스 임무'다. 이건 '제3인류'의 지구가 자신에게 생존의 위협이 되는 행성을 인간들을 시켜 폭파하도록 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제3인류'가 인간판 '개미'라는 것도 이같은 유서성 때문인데 아무튼 지구는 그 때문에 원래 거인족이었던 인류를 멸망당하게 만들어 지금과 같은 인류가 지구를 지배하도록 초래하고 말았다. 플라톤이 대서양에 있었다고 말했던 '아틀란티스'도 그 희생양이었다. 지구는 아틀란티스의 거인 인류를 자신의 목숨줄을 보호할 수단으로 선별했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그들에게 전달했고 그들은 복종했다. 영화 '아마겟돈'처럼 로켓에 핵폭탄을 실어 행성을 파괴하고자 하였으나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끝났다. 무엇보다 커다란 그들이 탑승할 수 없어 정밀 타격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안에서 직접 조종할 수 있도록 소형화된 인간을 만든다. 평균 키가 170cm 정도의. 바로 우리 같은 현생 인류를 말이다.

 

 지금의 인류는 그들에 의해, 그와 같은 목적으로 창조되었다. 베르베르는 그런 우리를 '제2인류'라 부른다. 물론 '제1인류'는 거인들이다. 그렇다면 '제3인류'는? 그렇게 이 소설은 인류의 미래를 상상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인류의 진화지만 지구 입장에서는 보다 자신을 더 잘 생존시켜줄 수단적 존재들의 선별이다. 프롤로그가 지난 뒤 책은 처음부터 이 선별을 들고 나온다. <인류 진화의 미래>라는 연구 주제를 두고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연구인가를 선별하는 콘테스트가 진행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인공 다비드 웰즈는 '인류의 소형화'를 들고 나온다. 인류 중 가장 작다는 피그미족이 각종의 병원균으로 부터 면역되어 있음에 착안하여 소형화만이  미래에 보다 더 생존에 적합할 것이라 내다 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 샤를 웰즈는 다비드 웰즈의 의견과는 반대로 '거인화'가 될 것이라 보았다. 그는 애초 인류는 거인이었고 결국 진화는 오똑이처럼 다시 균형을 찾아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니 거인화가 될 것이라 본 것이다. 지금 인류의 신장도 나날이 커가고 있으니까 말이다. 다비드 웰즈의 소형화는 에드몽 웰즈의 '개미'에 관한 책에서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건 사실 아버지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샤를 웰즈 역시 거인화를 주장하게 된 이유는 아버지인 에드몽 웰즈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이렇게 여기엔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 연쇄되어 있는데 이는 여주인공인 오르르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도 아버지란 존재는 공백이다. 아버지가 있긴 있지만 그녀의 존재를 몰랐다. 오르르의 엄마는 오르르의 존재를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키웠다. 그녀 역시 다비드가 참가했던 인류 진화의 미래 콘테스트에 참가하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인류의 진화는 여성화였다.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방사능에 잘 견딘다는 등의 근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아마조네스를 연구하려 한다. 그 연구를 하러 떠나기 전 그녀는 스스로 아버지라고 생각되는 인물을 찾아온다. 여기서 그녀는 아버지를 아버지처럼 대하기 보단 거의 친구처럼 대하는데(어른으로 성장한 후 처음 아버지를 만난다는 감상주의가 여기엔 모조리 탈색되어 있다.) 여기서도 '아버지'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리려는 베르베르의 의도가 짐작된다.

 

 베르베르, 그는 왜 이렇게 아버지를 지워버리려 하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베르베르가 작품에다 내내 새기고 있는 개입과 선별이라는 주제와 관계 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아버지를 지워버리려 하는 건 일종의 거부이다. 그러니까 존재에 대한 거부이다. 왜 그 존재를 거부하는가? 그건 바로 그가 개입과 선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그 개입과 선별에 대한 대표적인 존재가 아니었던가?

 

 소설에서 개입과 선별은 누가 하고 있는가? 바로 지구다. 자신이 살기 위해 그는 가장 적합한 수단을 찾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개입하고 선별한다. 인류의 진화는 그 결과였다. 다비드와 오르르의 이론들조차 지구에겐 더 좋은 선택지의 의미만 가질 뿐이다. 이제 와서야 깨닫는다. 그런 그에게 가이아란 이름은 어울리지 않음을. 가이아는 모성의 이름이다. 하지만 지금 지구의 모습은 부성 그대로이다. 무엇보다 베르베르가 직접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한낱 소행성이 아니다. 나는 한낱 암석 덩어리가 아니다. 나는 한낱 수동적인 광물성의 구체가 아니다. 어느 모로 보나 나는 독특한 존재이다.(p. 106)

 

 이같은 지구의 자기 과시 발언이 있은 뒤 베르베르는 뒤이어 국가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대통령을 등장시킨다. 장면배치를 이렇게 한 이유는 간단하다. 둘이 똑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면이 바뀌고 프랑스 대통령이 등장했을 때 그가 가장 먼저 내뱉는 대사는 이것이다.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요? 나는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이오!"(p. 106)

 

  하하하! 갑자기 김문수 도지사가 떠오른다. 통치자란 하나같이 다 그런 것일까? 여지없이 자기현시의 욕구로 똘똘 뭉쳐져 있다. 지구나 프랑스 대통령이나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장면의 연쇄나 대사의 받아치는 타이밍을 통하여 베르베르는 분명히 드러낸다. 이 지구 역시도 프랑스 대통령만큼이나 권위주의적 아버지라는 사실을!

 

 그런 아버지들이 하는 일도 똑같다. 개입과 선별이다.

 지구는 자기가 살기 위해 개입과 선별을 하고 프랑스 대통령은 역사에 오래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개입과 선별을 한다. 인류 진화 프로젝트에 개입하고 그 주제를 선별하는 것이 바로 그다. 그러므로 베르베르가 아버지를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 개입과 선별을 거부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자, 인류의 진화도 나왔고 아버지의 거부도 나왔다.

  이쯤되면 떠오르는 베르베르의 소설이 하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아버지들의 아버지'다. '제3인류'가 인류 진화의 미래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면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인류의 기원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제3인류'는 '아버지들의 아버지'와 얼른 보면 구성이 비슷하다. '제3인류'가 샤를 웰즈의 죽음에서 시작하듯이 그 소설도 한 고생물학자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거기다 '제3인류'에서 인류가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를 두고 다양한 이론들이 서로 맞부딪혔듯,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도 인류 기원의 모습을 두고 이론들이 서로 다툰다 아무튼 그 고생물학자는 인류가 현생 인류로 진화하는 데 있어 지금까지 그 연속성에 있어서 존재했던 미싱 링크, 즉 빠져 있는 고리를 드디어 찾아내었는데 그건 바로 지금의 인류는 인간이 돼지와의 교미를 통해서 나왔다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야기는 현재 일어난 고생물학자 죽음의 미스터리 추적과 과거 최초 인류의 이야기, 이렇게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결국 주인공은 고생물학자는 자살했으면 돼지와의 교미 끝에 현생 인류가 나왔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표면적으로는 근원의 아버지를 추적하는 이야기지만 실상은 지금까지 진실로 알았던 아버지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내내 아버지의 말 안에서 그것에 매달려왔던 이가 그 모든 게 다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건 그대로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거부와 마찬가지다. 베르베르에겐 이같은 통렬한 거부가 있으며 그것은 무엇보다 아버지가 개입과 선별의 존재라는 것에 있었다. 그렇다면 역시나 똑같이 지구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에마슈'라는 소형화된 인류를 만들었던 다비드와 오르르 일행에게도 베르베르는 해피엔딩을 선사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영역 안에서 자유로이 삶을 살았던 그들이 에마슈에 관해서라면 여지없이 자신의 아버지들을 닮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이 장차 어떤 길을 걸어갈 것인지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제3인류' 곳곳에 많은 죽음과 비극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세계가 오로지 아버지들로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개입과 선별의 제국이었던 신자유주의가 그랬듯이 그런 가득한 아버지들이 가져오는 것도 해고와 같은 죽음과 차별에 따른 아픔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베르베르는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거부의 존재라 할 수 있는 여성화와 소형화가 합쳐진 '에마슈'를 '제3인류'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베르베르는 거대한 3부의 첫 이야기인 이 '제3인류'의 마지막에서 이러한 의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에마슈가 바로 남성이 아닌 '나탈리아 여신'이라는 여성의 말을 들으며 혁명의 선봉에 서는 에마슈 역시 여성이라는 점을 통해서.

 

  결국 베르베르는 이 모든 개입과 선별이 비극의 원흉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모두가 인간을 인간 자체로 바라보며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잣대만 강요하여 고유한 존재의 빛을 획일화된 감옥에다 가둬버리기 때문이다. 일례로 그의 또다른 작품 '인간'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지금 장난칠 기분이 나요? 잠시 잊은 모양인데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어요.(p. 175)

 

  그렇다. 우리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 우리 자신의 잠재된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개입과 고유한 존재 가치를 바라보려 하지 않는 선별의 시선으로 인한 감옥에. 그 감옥 안에서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똑같은 아버지들의 개입과 선별로 지구 곳곳에서 죽어나가는 수많은 생명들을 보며 화가 나서 텔레비젼을 부셔버린 이지도르는 한 줄기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한다. "온통 나를 때리고 찌르고 괴롭히는 것뿐이군요." 우리도 다르지 않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저들의 이야기가 결코 저들의 이야기일수만은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그래서 베르베르는 아버지를 거부한다. 개입과 선별 따위 돼지에게나 갖다주라고 말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공백이다. 그대로 자유의 영토이며 그 자체가 긍정의 근거가 되는...

 '신'의 결말이 너무도 잘 보여주듯이 말이다. 최종 관문을 통과한 미카엘이 본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건 빈 종이었다. 완벽한 공백. 거기서 베르베르는 에드몽 웰즈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읽기! 그리고 이 신성한 행위를 통하여 한 세계를 창조하기! 자네는 언제든지 상상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을 한 권 집어 들고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해 줄 수 있어."(p. 659) 

 

 이렇게 개입과 선별의 바리케이트를 넘어 담벼락 없는 상상의 활주를 확보하는 것. 베르베르가 소설들을 통하여 추구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과거에 우리가 어땠나나 미래에 우리가 어떠할 것인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현재이며, 그것은 우리라는 존재가 그 자체로 긍정할만한 무엇이며 온전히 무한한 가능성으로 충만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들의 아버지'에서 이지도르의 마지막 말이 바로 그것을 나타내주고 있지 아니한가?

 

 "당신은 내게 무엇이 빠진 고리냐고 묻곤 했어요. 이제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생각하기에 사실... 우리 모두는 과도기저 존재에 불과해요. 진정한 인간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는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가 바로 빠진 고리에요." (p. 531 ~ 532)

 

 이는 다른 작품, '인간'에서 절망하는 라울에게 여인 사만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의 남녀 한 쌍이 우주에 살아 있는 한, 인류의 불씨는 살아있는 거에요. 어떤 감옥 벽도 그 불씨가 불꽃으로 활활 일어나는 것을 막지는 못할 거에요."

 "글쎄요..."

 "우리는 우리 자식들을 믿어야 해요. 그들은 우리보다 이 곤경을 더 잘 헤쳐 나갈 거에요."

 "과연 그럴까요?"

 사만타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의심을 의심하라. 그러면 믿게 되리라..." (p. 175 ~ 176)

 

 사만타의 마지막 말은 베르베르 작품에 있어서 핵심과 같다. 사실 그가 그토록 천착하는 상상력이라는 것도 결국은 의심을 의심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제3인류'의 지구를 비롯하여 종국엔 비극만을 불러왔던 모든 아버지들의 개입과 선별은 '의심을 의심하지 않은 것'에서 나왔다. 지구가 그랬듯이 의심은 두려움이 낳은 것이었으니 의심을 재차 의심하지 않은 건 그대로 두려움에 굴복해버린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베르베르에게 상상력이 중요한 것도 바로 이 두려움을 없앨 수 있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라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오직 상상력 하나만으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처럼 베르베르도 두려움이란 오로지 부정적 가능성만 생각하는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의 감옥임을 믿는다. 그것도 진실된 정보가 바탕되지 않은 오로지 부정으로만 보려는 눈이 개입과 선별로 획득한 오해와 편견의 과실로만 이루어진 감옥.

 

  그 감옥의 창살들을 깨뜨리기 위하여 베르베르는 미래의 결과는 두려워하지 말고 과정 중에 되어가는 자신을 믿고 현재에 충실하라고 말한다. 그 어떤 개입에도 굴하지 말고 선별의 시선에 주눅들지도 말라고.

 그리고 당부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로지 자신만의 상상의 나래를 통해 마음껏 자유를 활공하는 것이라고.

 아마도 이것이 베르베르가 보여주려는 인류 진화의 미래인 '제3인류'의 진정한 정체이리라!

 에마슈가 아니라...

 

 과연 맞을지, 안맞을지? 나는 이제 내기를 해보려 하는데 그 때문이라도 다음 이야기들이 빨리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개미를 제외한 지금까지 인용한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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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30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르베르를 생각하면 마음이 다소 복잡합니다.
어릴 때 베르베르를 접했던 그 충격과 놀라움, 경이 때문에 그에게 큰 것을 기대하는게 아닐까 싶어져요. 개미와 타나토스는 저를 정말 설레게 했습니다. 한번도 본 적 없는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었죠. 그래서 저는... 그가 답을 줄거라고 기대했나 봅니다. '신'이라는 거창하고, 절대적인 제목의 소설에서 그런 기대가 컸었죠. 그리고 마지막 백지에서 그 기대는 무참하게 무너져내리고, 저는 열린 결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답니다. 동시에 분개하기도 했죠.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를 한줄 한줄 읽으면서, 그랬지, 아버지에 대해서 그랬어, 라고 동감하면서도 도저히 손을 내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제가 베르베르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곰곰히 생각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ICE-9 2013-12-31 22:50   좋아요 0 | URL
사실은 저도 '신'의 결말을 보았을 때는 좀 당황스럽더군요. 작가로서 뭔가 무책임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하고^ ^;...
이번 '제3인류'도 개미나 뇌의 베르베르를 생각하면 아쉬운 점이 좀 있어보이더군요. 요즘 제가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어서 설정이나 전개가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걸 선호하지 않아서 말을 하지는 않았는데 설정이나 구성상에 구멍이 있어 보입니다. 특히나 전염병으로 수십억이 죽었는데 윌드컵이 계속된다는 건 말이 안되잖아요? 그런 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장면들이 있더군요. 어쩌면 이 리뷰는 오래도록 그의 작품을 보아온 사람으로써 어떤 정 때문에 좋은 쪽으로만 편향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다만 아버지에 대한 관점, 그리고 개입과 선별이라는 아버지 질서에 대한 거부가 내내 눈에 띄길래 그런 쪽으로 한번 정리해봐야겠다 싶어서 쓴 리뷰입니다. 마녀고양이님이 베르베르에 대해 어떤 것을 기대하는지 정말 궁금하네요. 언젠가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2013년 마지막 날이네요. 어둡고 긴 겨울의 한 굽이가 이렇게 지나가네요. 철도 파업도 그렇게 끝나고 더 춥고 긴 겨울이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래도 마녀고양이님만은 원하시는 일 잘 하시면서 건강히 잘 지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검은 모래 - 2013년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구소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집에 갔는데 낯선 이들이 잔뜩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는데 친척이라고 했다. 아버지도 모르는, 오로지 할아버지만 알고 있는 친척들. 알고보니 일제 시대 때 강제 징용으로 사할린으로 끌려가 영영 헤어져 있다가 당시 가족 방문이 허용되자 할아버지의 요청으로 오게 되신 분들이었다. 수십년이나 못 보았으니 쌓인 할 말과 나눠야 할 감정은 당연히 많았고 그 날 우리 집엔 밤 늦도록 술자리가 벌어졌다. 하지만 마지막엔 울음이었다.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내 조그만 머리로 그 수 십년간 쌓인 고생과 설움 그리고 울분을 따라잡기엔 너무도 벅찼으니까. 그냥 눈만 멀뚱하게 뜬 채, 안주만 주워먹다가 느닷없이 할아버지와 방문한 이들의 울음을 보게 된 것이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그 날 밤이 떠오른다. 나라를 빼앗기게 되는 바람에 강제로 이리저리 뿔뿔히 흩어진 피붙이들이 수 십년간 받아온 남의 땅에서의 설움과 쌓여온 고향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설령 서로 어렵게 만나더라도 끝내 내어놓을 수 있는 건 말이 아니라 그저 울음 밖에는 없었던 그런 밤이. 구소은의 소설 '검은 모래'에 나오는 해금도 그랬으리라. 어릴 때 떠나와 평생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해금이 만일 '우도 동쪽에 자리잡은 조일리란 마을의 검은 모래 해변'에 어떻게 다시 설 수 있게 되었다면 분명 나오는 것은 그저 눈물 뿐이었으리라. 감정은 때로 언어를 넘어서는 법이다. 게다가 그만한 세월 속에 묵혀온 감정이 아니던가. 어떻게 언어라는 작은 그릇에 다 담겨지겠는가?


 어쩌면 내가 이 소설을 진짜 읽게 된 것은 4. 3 평화수상작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날 밤 보게 된 그 눈물들을 이해하고자 함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시절에 문득 가지게 된 그런 궁금증이 잔모래를 만지는 것과도 같은 감촉을 지닌 이 푸른 표지의 책을 넘겨보게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더구나 여기의 이야기는 바로 나에게도 아주 익숙한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도 강제징용자였다. 오사카의 부두 하역장이 할아버지가 징용되어 주로 일한 곳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난 할아버지로부터 그 때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약주를 하시면 늘 같은 말만 반복하시는 술버릇까지 있으셨는데 취하시면 늘 그 이야기만 하셔서 더욱 반복해서 들어야했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힘겨운 고생담이었다. 겨우 한 줌의 밥만 먹으면서 하루종일 엄청난 짐들을 날랐고 그런데도 열심히 일을 안한다고 일본인 감독관으로부터 가해지는 가혹한 매질을 견뎌야 했다. 당신이 살이 오르지 않는 것도 그 때 하도 고생했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나라를 빼앗기면 가장 힘든 것은 우리같은 약한 사람들 뿐이라고 당시를 회상할 때면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에겐 일제가 할퀴고 간 상처가 적지 않다. 누군가는 머나먼 척박한 땅으로 끌려갔고 또 누군가는 한 세월을 오로지 가축처럼 취급받으며 일만 해야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이야기일까? 아닐 것이다. 당시에 조선에 살았던 일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왔을 보편적인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편적 아픔은 자꾸만 누군가만이 당했던 특별한 아픔이 되어가고 있다. 아픔을 직접 경험한 자들이 보상은 커녕 그들의 경험조차 제대로 후세에 새기지 못한 채 빠르게 이 땅에서 사라지고 있는 데다가 강제 수탈을 수출로, 강제징용을 자원한 인력 수출로 왜곡하는 말도 안되는 움직임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거대한 아픔을 그렇게 개간하고 다시 포장 도로를 깔아 그 아래 깃들어 있을 고통과 신음의 뼈들을 얼른 보이지 않게 치워버리려 하는데 어찌 그 아픔을 똑똑히 보아왔고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통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걸 그치게 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다. 지우려들면 들수록 더욱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그 어떤 역사적 아픔의 편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담아두고 되새기는 것. 그것이 수난의 역사에 자신의 삶과 가족들을 빼앗긴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난 더욱 이 구소은의 '검은모래'가 소중한 것 같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문학적으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일제 시대 제주 해녀들의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저 역사의 어둠 속 구석진 자리에 있던 것에다 이 소설이 최초로 밝은 빛을 비춘 것과 같다. 문학이 비극적 역사의 반복을 끊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다시는 되풀이 되지말아야 할 그 역사적 모습을 제대로 재현하여 독자로 하여금 왜 그것의 반복을 막아야 하는지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소은의 '검은모래'는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형상화되지 못했던 '마이너리티'의 역사를 복원하면서도 재현은 생생하고 성찰의 시야까지 폭넓게 가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좌표를 잃고 그저 속절없이 부유하고 있는 것만 같은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보다 확실한 과거에 대한 성찰은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게 만들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도 있듯이.



 소설은 '태어나면서부터 나라를 잃은 신세였고, 태어나면서부터 잠녀(p. 14)'였던 구월로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딸 해금을 거쳐 해금의 아들 켄과 켄의 딸 미유까지 세대를 달리하며 일제강점기부터 오늘까지 이르는 한 가족의 역사를 담아낸다. 그 역사는 늘 힘겨운 물질을 해야 하는 구월의 삶 그대로 고난이요 홀로 존재하는 섬처럼 뿔뿔이 헤어짐으로 가득하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사는 것도 사랑도 다 그렇다. 하루종일 작은 꿈을 이루기 위해 거친 물 속으로 뛰어들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 빈손이요 뜻하지 않은 이별이다. 그 숱한 시간 동안 그들이 건져내는 건 오로지 고통과 눈물 밖에는 없어보인다. 언젠가 구월은 남편을 찾기 위해 원폭이 떨어진 나가사키로 갔다. 그러나 거기서 보게 된 것은 남편이 아니라 폐허로 변해버린 땅뿐이었다. 구월과 해금의 삶도 그 나가사키의 폐허와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물질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에게 세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설령 아픔과 이별 뿐이라 하더라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섬에 있다고 한들 해금이 텃밭에 박씨를 심듯, 그녀들은 어제도 오늘도 물질을 하고 내일도 물질에 나설 것이었다. 그 지속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이다지도 개인의 삶을 쉽게 짓밟아 버리는 역사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유일한 테왁(박의 씨 통을 파내고 구멍을 막아서 해녀들이 작업할 때 바다에 가지고 가서 타는 물건)이기나 하다는 듯이 말이다. 해금이 운명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텃밭에다 박씨를 심는 것이었다. 구월의 시어머니도 박씨를 심다가 운명했다. 잠녀들이 박씨를 심는 건 다름아닌 희망을 심는 것이다. 해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화산섬에서조차 열심히 내일을 기약하는 박씨를 심는다. 그것은 아직은 끝이 아니며 내일을 계속 이어가리라는 희망을 하나의 신념처럼 심는 것과 같았다. 한 마디로 그건 쇠뜨기였다. 구월이 나가사키 페허에서 본, 가장 먼저 대지의 절망을 뚫고 올라왔던 희망과 재생의 상징이기도 한 쇠뜨기.


 죽음의 땅에서도 돋아나는 것이 있었다. 검게 녹은 불모의 대지를 헤집고 비 온 뒤 죽순이 솟듯 새싹들이 움튼다. 뱀 대가리처럼 생긴 연한 갈색 포자낭이 서로 키를 재며 쭉쭉 뻗어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자연의 경이이며, 그 어떤 모진 환경도 견뎌내는 생명의 숭고함이다.
 우악스럽도록 질긴 뿌리가 살아 있는 한, 식물은 홀씨를 퍼뜨리며 제 깜냥대로 생존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 인간의 삶이 어찌 그와 다르겠는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제일 먼저 돋아난 생명이 바로 이 쇠뜨기였다.(p. 126)


 구월과 해금. 그리고 그녀들을 비롯한 어두운 역사 속에서도 지지 않고 삶을 지속해나가는 이들 모두가 사실은 쇠뜨기라 할 수 있다. 쇠뜨기가 나가사키에 다시금 생명을 가져왔듯 그런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었다. 역사는 거대한 나라들이 아니라 오늘의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내일의 희망을 믿고 해야 할 일을 지속해나가는 그들이 만든 것이었다. 그들을 식물에 비유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미유가 켄의 정원에서 본 그대로 소설에서 식물은 아무리 무겁고 짙은 어둠이 몰려와도 다시금 시작할 '회생의 기회가 있음(p.129)'을 뜻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켄의 정원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쇠뜨기에서 바로 이어지는 켄의 정원은 그 장의 제목 그대로 '식물의 유혹'을 담고 있지만 그것의 의미는 더이상 해금의 박씨와 같지 않았다. 해금은 박씨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박이야 내가 없으면 저 혼자 잘 크겠지 뭐. 정성을 다해 키우던 것들은 손을 타야 살지만, 그건 인간의 오지랖이 지나쳐서 그렇게 된 게지. 그냥 두면 알아서 다 살아가게 되어 있더구나.(p. 67)


 식물이 쇠뜨기처럼 강렬한 생명력을 지닌 회생의 존재가 된 것은 이러한 인간의 손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자연적 자생력에 있었다. 그건 원폭에도 살아남을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해금의 말은 이러한 식물의 힘을 존중하고 있다. 해금이 식물을 키운다는 의미에서 그건 그대로 거대한 역사나 국가가 백성과 가지는 관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존중은 역사나 국가 또한 한 개인에 대해서 가져야하는 태도였다. 박씨와 쇠뜨기를 비롯한 식물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말하기 위해 나왔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역사와 국가는 그렇지 못했다. 존중은 커녕 개인을 그저 자기 이익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기에 바빴다. 전쟁은 그것의 극명한 증거가 아니었던가. 켄의 정원도 마찬가지다. 식물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켄은 식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서로의 욕망을 채워주고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지속적인 공존의 방법임을 인간보다 식물이 먼저 깨달았다. (p. 144)


 하지만 말뿐이다. 그 때의 역사나 국가가 그랬듯이. 켄은 식물에서 보았던 것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그는 타인을 믿지 못했고 자신의 안정된 삶은 스스로 만들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걸림돌이라 생각되는 모든 것을 버렸다. 엄마인 해금을 비롯하여 가족을 버렸고 자신의 뿌리인 '한국인'을 버렸다. 그렇게 된 것엔 불신의 힘이 컸다.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불안이 중첩된 불신. 그건 바로 개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역사와 국가는 모든 개인이 소중하고 그대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거짓된 보편화에 불과했다. 당시의 개인은 그저 국가가 필요하면 동원할 수 있는 존재 이상의 보편적 의미는 가지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구월이 조선 해녀에게 가해지는 불평등을 호소했을 때 일본이 국적을 이유로 무시해버렸던 것처럼. 입으로는 보편을 말하지만 손으로는 인위적인 이유로 온갖 것으로 나누었다. 켄의 정원은 그러한 거짓 보편화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공간이다. 그 어떤 자연적인 자람을 거부한 채 오로지 인위적인 손길만 가해지는데다가 그저 안으로 채집되기만 할 뿐 아무런 바깥으로의 넘나듦이 말끔히 제거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 한껏 고양된 인위성과 오로지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폐쇄성은 현실 국가의 은유라 할 수 있었다. 거기서 식물은 본래의 자생력을 잃고 어디까지나 켄에 의해 길러지는 껍데기뿐인 식물로 남는다. 개인의 존재와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국가에게 개인이 그렇듯이. 미유와 지로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도 그것이다. 미유는 켄과 해금의 언쟁으로 인해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대로 4분의 1만 피가 섞인 쿼터가 아니라 반이 섞인 '하프'임을 알게 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일본이 한국에게 지자 한국을 마구 비하하는 지로에게 미유는 화가나 자신이 하프임을 밝히며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해 줄 것을 고백한다. 미유는 지로의 사랑을 믿었으나 지로는 그러지 못했다. 텅빈 케이크 전문점에서 지로는 미유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이또한 서로의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 거짓 보편화가 얼마나 허위인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구소은 작가가 주로 일본의 모습에서 이러한 거짓 보편화를 가져오는 건 이유가 있다. 바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 외쳤던 '대동아공영'처럼 거짓 보편화의 대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범 아시아적인 번영을 위해서 전쟁을 벌인다고 미화했지만 사실은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한 일이었다. 켄이 식물에 대한 말과는 달리 타인을 불신하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미유를 버리는 지로처럼 말이다. 거짓 보편화란 이렇게 그저 교언영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현재 일본의 진실된 모습은 어떠한가? 오로지 가상만 남아버린 일본은 실상 텅 비어있다. 구소은 작가는 지로가 미유에게 이별을 말할 때 텅 비어있는 케이크 전문점과 해금이 사는 미이케우라 섬이 밤에는 텅 비어 있음을 통하여 이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일본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가상에만 만족하고 속을 채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들이 저지른 죄과에 대한 진실된 속죄와 깊은 뉘우침으로만 가능했는데 번영이라는 가상에만 취한 나머지 그걸 방기하고만 것이다. 그건 미유와 지로가 연애할 때 함께 했던 스쿠버 다이빙에서도 드러난다. 미유와 지로에게 바다란 구월과 해금처럼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야 하는 치열한 전장이 아니다. 그저 한가롭게 구경할 수 있는 관광 장소일 뿐이다. 그렇게 가상만 취할 수 있을 때 그들은 피를 따지지 않고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해금의 삶과 함께 바다가 더이상 가상이길 포기하자 그들은 헤어진다. 이로써 구소은 작가는 해녀의 삶과 현재 일본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선명히 한다. 그녀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일본처럼 속 빈 강정이 되지 않기 위한 대안을 바로 해녀의 삶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건 어떤 모습인가? 그건 단적으로 일본과 우리나라의 테왁이 가지는 차이점을 말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다른 것이 있다면 부표로 만든 테왁의 소재와 모양인데, 여기서는 박속을 파내고 잘 말려서 만든 테왁을 쓰지 않고 나무로 만든 북 모양의 일본식 테왁인 탐포를 사용했다. (...) 해녀들은 자신의 몸집과 힘에 맞춰 테왁을 만들었는데, 일률적인 일본식 탐포는 익숙해지기까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p. 96)


 과연 거짓 보편화의 일본답게 일본의 테왁은 개인의 개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이지만 조선의 테왁은 각 개인의 개성을 고려하고 보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작가가 구월과 해금의 삶을 하나의 대안으로 가져오는 이유이다. 거짓 보편화가 하듯이 한 개인이 가진 고유한 존재 가치와 시간을 함부로 없애지 않으며 제 가치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도록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켄의 정원과 구월과 해금이 하는 대표적인 행위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켄은 식물을 기르지만 구월과 해금은 바다에서 캐낸다. 기르는 것은 개체를 보편이란 토양에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반면 캐내는 것은 개체가 가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져오는 것이다. 여기엔 아무런 인위적 조작이 없다. 이러한 캐내는 것이 가진 개체 보존의 투명성. 구소은 작가는 해녀들이 하는 행위의 대표적인 모습을 통해 거짓 보편화에 맞서는 대안이 바로 개체들의 투명한 보존과 복원에 있음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검은 모래'에서 구소은 작가가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추구하는 대안으로써의 해녀 모습 그대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망각이라는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던 일제 강점기 해녀들의 삶을 마치 해녀가 바다에서 캐내듯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그 모습에 담긴 뜻이 또한 오늘의 시대가 텅 빈 모습이 되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되는 지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여 더욱 예사로이 보아 넘기지 못하도록 만든다.


 늘 일본에게 올바른 역사 청산을 이야기 할 때마다 위정자들에게서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있다. '과거 보다는 미래가 소중하다. 이제 더이상 서로 안 좋은 과거에는 집착하지 말고 협력해서 앞만 보고 나아가자'는 말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과거의 일본이 외쳤던 구호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거짓된 보편화다. 역사에 실존했던 개인의 고통과 눈물을 현실적 이익이라는 이유로 쉽사리 제거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결국 그러한 제거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게 만들어 그 반성이 가져올 보다 나은 오늘에 대한 성찰을 조금도 매개하지 못하고 그렇지 않았다면 피할 수 있었을 잘못된 과거의 반복을 결국엔 거듭하도록 만든다. 꾸며낸 영업적인 미소가 거래의 신뢰를 조금도 보장하지 못하듯, 진실된 반성과 사죄가 뒷받침되지 못한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억지 화합은 관계의 공허함만 가져다 줄 뿐이다. 아마도 종국엔 관계에 내실을 가져다 주는 진정한 가치는 모조리 사라지고 그저 겉모습만 존재하는 텅 빈 관계가 되고말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구소은의 '검은모래'가 지금 던져주는 주제가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 희생한 개체의 존재와 삶에 대한 온전한 보존과 최대한의 존중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화해 역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작품 전체로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사할린에서 온 친척들과 할아버지가 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해금 역시 다시 고향의 검은 모래 해변에 서게 되더라도 그저 울 수 밖에 없는 것은 오늘의 사회가 거기에 대해 그 어떤 존중과 사죄도 하지 않고 그저 지우려고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정 그들이 고향의 검은 모래 위에 섰을 때 그나마 밝은 얼굴을 하도록 만들 수 있는 건 오로지 우리가 그들의 눈물을, 아픔을 내 것처럼 소중히 할 때 뿐이리라. 그것을 위해 우리가 우선 해야 할 것이 바로 그 삶을 발굴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소은 작가의 '검은 모래'는 실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단단한 첫 걸음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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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에 대하여
라이오넬 슈라이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케빈에 대하여'로 가족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결코 적지않게 묵직한 여운을 남겼던 라이오넬 슈라이버가 다시 한 번 그 가족에 대한 것을 들고 우리들에게 찾아왔다. 소설 '내 아내에 대하여'가 바로 그 작품이다.


  원제는 'So Much For That'이다. 우리 말로 하자면 '거기에 대해 할만큼 했다' 정도의 뜻일텐데 소설 제목으로는 참 어울리지 않는 지라 굳이 '내 아내에 대하여'로 바꾼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닌 것 같다. 원제에서 'That'은 주로 주인공 셰퍼드와 관계된 것으로, 그건 희귀한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아버린 아내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원래 재산이 좀 있는 중산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합리한 의료 보험 제도 때문에 아내의 병을 치료하느라 일시에 재정적 위기에 봉착하게 만들어버린 미국이란 국가를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내에 대해서라면 남편으로서 해 줄만큼 해줬다는 뜻이 될테고 국가에 대해서는 오로지 흡혈귀처럼 국민을 착취하기만 하는, 그런 불합리한 국가에 대해 참을만큼 참았다는 뜻이 될 것이다. 위싱턴 포스트지의 평론가 론 찰스는 '나는 감상주의가 없는 슈라이버의 작품을 존경한다'라고 말했는데 나도 동감이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이 작품이 '케빈에 대하여'보다 더 좋았다. 근거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경험에 있다. 집안에 연쇄살인마는 없어서 '케빈에 대하여'에서의 어머니 마음은 과연 어떨지, 소설의 말이 맞을지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최근 가까이서 좀 오래 병 수발을 해 본 나로서는 '내 아내에 대하여'에 드리운 셰퍼드의 경험과 고뇌들이 그저 진실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아프다는 것은, 그것도 누군가 꼭 곁에서 돌봐야 하는 정도의 중병이라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의 경험이 펼쳐지리라는 것을 뜻한다. 그건 생각했던 것만큼 결코 만만치 않다. 매일 일어나 산 위로 무거운 돌을 등짐지고 날랐던. 저 만리장성을 쌓았던 진나라의 백성들만큼이나 힘들고 마음 아픈 일상들이 계속된다. 마음과 몸만이라면 괜찮을 지 모른다. 어쩌면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은 보다 현실적인 문제들이지도 모른다. 나날이 쌓여져가는 치료에 드는 비용 같은 것들 말이다. 때로는 집까지 파는 것도 모자라 계속 빚을 내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한 사람에게 닥친 불행이 급기야 온 가족마저 어두운 미래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들은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 모든 희생을 감내한다. 도대체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So Much For That'을 하게 된다. 소설의 주인공 셰퍼드도 그렇다. 그는 원래 제법 괜찮게 사는 축이었다. 우연찮게 시작했던 사업이 성공을 거두었고 그 사업을 또한 백만달러라는 가격에 팔아 현재와 미래가 그리 불안하지 않았다. 그에겐 꿈이 있었다. 좀 더 저축하여 아프리카 같은 오지에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새로이 시작하고 싶다는 꿈. 그는 그걸 '세컨드 라이프'라고 불렀다. 하지만 우연히 맞이한 아내의 암으로 그 꿈을 이루기는 커녕 당면한 현실마저 급속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는 착실했다. 사업을 할 때도 조그만 자신의 이윤 보다는 고객의 신뢰를 선택하여 결국 성공에 이르게 한 사람이었다. 그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 잭슨은 언젠가 그런 그를 이렇게 타박했다. "왜 세상의 모든 짐을 너혼자 다 떠안으려 하느냐!"라고. 그만큼 그는 책임감이 강하다. 사랑하는 아내도, 요양이 필요한 목사였던 늙은 아버지도, 제 삶을 스스로 책임지기 보다는 예술한답시고 오빠에게 빌붙기 바쁜 여동생도 자기 밖에 모르는 딸도 그리고 이제는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린 아들까지 다 맡으려 한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아니라 가족들에게, 타인들에게 'So Much For That'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론 찰스의 '감상주의가 없다'라는 말은 그 때문이었다. 다른 작가였다면 어쩌면 영웅적으로도 묘사했을 셰퍼드의 모습을 슈라이버는 결코 그렇게 그리지 않는다. 슈라이버는 신중하게도 마치 작가 자신의 냉소를 대변하듯 누누히 옆에서 그의 짧은 식견과 바보 같음을 탓하는 존재를 소설에다 만들어놓았다. 그게 바로 그의 친구 잭슨이다. 잭슨은 끊임없이 셰퍼드가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냉소를 날린다.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고. 바보같은 믿음이라고. 과연 그 말 그대로 그토록 헌신한 셰퍼드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다. 친구 관계도 좋고 직원들에게 존경까지 받았던 셰퍼드지만 아내의 암과 더불어 있게 되자 모두들 떠나간다. 물론 처음엔 가족이고 친구고 이웃이고 할 것없이 달려와 위로의 말과 당연히 아낌없이 도와주겠다는 말들을 해댔다. 하지만 그건 말뿐이었고 결국 셰퍼드와 그의 아내가 맞닥뜨린 건 그들과의 결별 뿐이었다. 찾아오기는 커녕 연락도 오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사정을 뻔히 아는데도 여동생은 어떻게든 자신이 힘든 것을 피하려하고 회사 사장은 셰퍼드 때문에 늘어난 보험부담만 탓하더니 직장에서 잘리면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그건 곧 아내가 죽는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도) 매정하게 해고해 버린다. 잭슨도 그렇고 셰퍼드도 그렇고 결국 아무도 자신만큼 아파해 주지도, 대신해 주지도 않는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 할만큼 했다고 느낀 잭슨은 권총 자살을 하고 셰퍼드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버리게 된다.

 슈라이버의 냉정한 시선이 포착한 가족이나 이웃 그리고 친구들은 어디까지나 좋을 때만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사람들은 기꺼이 힘들 때 곁에 있겠다고 도와주겠다고 말들 하지만 진짜 어려움에 닥쳐보면 똑똑히 깨닫게 된다. 그건 정말로 빛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최근에 시작한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게도 이런 대사가 있더라. 인간이 철들기엔 인생이 너무도 짧다고. 인간은 약하다. 인간은 다른 이를 자기 몸처럼 챙길만한 존재가 못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꽤나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환자를 보살피고 있는 이들에게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걸 보면. 주로 실제 해보지도 않은 자들이 그런 말을 한다. 또한 그런 이들은 꼭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자기는 고생을 이만큼이나 해봤다는 식으로. 또한 그런 자들은 비슷한 태도를 보인다. 치료에 대해 어떤 제도적인 잘못된 점이나 개선해야 할 것을 말하면 꼭 온정주의적으로 응수한다. '좀 더 바지런히 수발하면 될 것을 뭘 그런 것까지 요구하나?' 혹은 '부모인데 그정도도 못 해줘? 나라면 기꺼이 가진 것 다 내놓겠다.'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소설 속 셰퍼드의 여동생 베럴의 반응이 그냥 소설 속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그들은 제도적 구멍, 불합리등을 보지 못한다. 당연하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겠지. 나서서 도와달라고 하면 '시간이 없는데', '이것 참 사정이 안 따라주네' 하면서 얼마든지 달아나서는 강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안다. 경험도 없고 생각이 가벼운 자들이 남 비판 또한 가벼이 한다는 것을. 또한 그런 그들에겐 더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것도.


 한 사람의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온정주의만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다. 슈라이버가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듯이 인간이 아직 그럴만한 그릇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제도를 만든 것이 아니던가? 개인에게 벅찬 짐이 될 것을 알기에 제도를 통하여 그 짐을 덜어주도록 말이다. 그 때문에 우리가 세금을 내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에게 사용료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임금을 주는 것이다. 그게 이런 국가의 기틀을 세운 홉스가 말한 사회계약론의 모토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의 국가는 소설에 나오는 잭슨의 말대로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세금은 대선에 개입할 목적으로 불법 댓글이나 달고 철도 민영화 저지를 위한 파업 진압을 위해 노조 사무실에 들어가려고 수천명의 경찰을 동원하고 세금으로 만들어진 각종 공기업을 민영화하여 비용은 우리같은 국민이 부담하게 만들고 이익은 소수의 힘있는 자들이 챙기게 하는 데 쓰이고 있다. 매일을 안녕하게 보내기 위해 국가를 만들었는데 보라! 이제 그 국가는 도리어 우리가 서로에게 '안녕하십니까?'하고 묻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국가가 나에게 뭘 해달라고 요구하기 전에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를 생각하라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모두는 어제도 오늘도 국가에 대해 'So Much For That'했다. 그런데 응당 받아야 할 몫은? 과연 우리는 준만큼 돌려받고 있는 것일까?

 슈라이버가 냉정한 시선으로 셰퍼드의 삶을 그리는 것은 우리에게 남아있는 온정주의, 아니 더 쉽게 말하자면 '휴머니티'적인 것을 지우고자 함이다. 언젠가 강신주가 경희대 강의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진짜 사랑한다는말을 할 수 있는 건 남편이 다리가 잘려 실직해 집에서 놀게 되었을 때 '아, 이제 비로소 내가 마음껏 돌봐줄 수 있게 되었다'면서 기뻐서 업고 다닐 때'라고. 휴머니티라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되어야 휴머니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남의 삶을 나의 삶만큼 책임져 줄 수 없다면 그건 그냥 아무 것도 아닌 것일 뿐이다. 아시다시피 그 정도를 해 줄 수 있는 인간은 정말로 얼마 없다. 아프기는 커녕 돈만 못 벌어도 내쳐지는 세상이다. IMF 때 급증한 이혼률이나 지금도 여전히 경제적 이유로 이혼하는 부부가 많음을 보라. 그러므로 제도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애초부터 제도라는 것이 인간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듯이 말이다. 환자에 대한 수발과 치료는 그 중에서도 한 인간의 힘으로는 가장 하기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제도가 반드시 도와줘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기꺼이 세금이라는 걸 내는 것이다. 슈라이버의 '내 아내에 대하여'는 그걸 똑똑히 보라고 말한다. 우리가 정말 무엇을 시급히 고쳐야 하는지 깨닫게 하기 위해 그녀는 소설이 불러 일으킬 모든 감상주의를 휘발시켜 버린 것이다.

 이 책에서 당신이 보게 되는 건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라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현실에 대한 냉정한 진실이다. 당신이 누가되었던 셰퍼드가 당했던 곤경을 당하면 당신도 혼자서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개인의 역량을 넘어서는 고난의 파도를 보다 쉽게 막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는 제도라는 둑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매일 그 둑을 좀 더 높고 두텁게 만들기 위해 세금을 낸다. 하지만 국가는 자꾸만 그 둑을 얇고 낮게 만들어 가고만 있다. 결국 셰퍼드는 미국을 포기한다. 마지막의 문장은 셰퍼드의 이같은 고백으로 끝난다.

  "다 허튼 소리였다. 그의 탈출은 끝내주게 좋았다."

  셰퍼드처럼 이제 우리도 국가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시작은 '내 아내에 대하여'였지만 그 끝은 '내 국가에 대하여'가 되는 소설. 오늘의 현실이 뭔가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고 왠지 주정뱅이에게 운전을 맡긴 것처럼 불안하다면 부디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당신이 이 책에 얼마의 시간을 투자하든 슈라이버는 국가와는 달리 충분한 보상을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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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12-26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빈에 대하여 영화를 절반 보고 못 보고 있습니다. 책은 구매하고 접근도 못 하고 있는 중이죠. 그런데 "내 아내에 대하여"는, 할만큼 했다 라는 원제가 더 와닿는 이 책은 정말 엄두가 안 나는군요. 저는 매일 제 한계에 대해서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을 하는 중입니다. 그건 참으로 중요하더군요.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을 시스템이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정말 뼈가 시리도록 느끼는 일이 많습니다. 특히............ 청소년에 대해서 말이죠. ㅠ

ICE-9 2013-12-29 04:45   좋아요 0 | URL
리뷰에도 썼지만 저는 '케빈에 대하여'보다 이 소설이 더 좋더군요. 감상주의까지 완전 덜어내고 보다 불합리한 제도와 거기에 분투(?)하는 개인들에 초점을 맞춰서인지 읽기도 전작보다 더 수월했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 때문에 슈라이버를 완전히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전 용감한 작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

마녀고양이님은 마음이 따뜻한 분이신데다 제도가 할퀴어버린 생채기를 안고 사는 청소년들을 직접 많이 만나보셔서 저보다는 이 현실이 더욱 시리실 것 같아요. 어떻게 잘 견디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요즘 까닭없이 눈물이 왈칵 솟을 때가 많아요. 영화 변호인 볼 때도 엄청 울겠구나 싶었는데 평소에 눈물을 좀 빼두었음인지 다행히 잘 나오지는 않더군요. CCR의 노래처럼 제발 언젠가는 누가 꼭 좀 이 비를 멈추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비란 정말로 약한 이들의 눈물이 아닐까 싶어요. 무자비한 국가가 뺨을 후려지는 바람에 터져나와버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