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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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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단념한 인간이다. 나와 오에를 처음 만나게 했던 문장이다. 매미들조차 더위에 짓눌러 침묵하던 여름날. 더위를 피하러 들어갔던 서점에서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오에의 책을 처음 만났다. 제목은 '우리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 핵의 위험이 결코 몽상만은 아니던 시절을 배경으로 집필된 이 소설은 내게 너무나 낯선 것이었고 그랬기에 매혹되었다. 그렇게 오에를 만났고 물론 늘 그랬던 것은 아니나 참 오랜 시간 함께 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자선 단편집을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현대문학에서 나오고 있는 세계문학단편선으로 나온 오에 겐자부로 단편선엔 1957년과 1992년 사이에 발표한 단편들 가운데 오에 자신이 직접 뽑은 23편이 초기, 중기 그리고 후기로 나누어 실려있다. 당연하게도 이미 만난 것도 있고 처음 보는 것도 있다. 오에를 생각할 때 언제나 떠오르는 단어는 두 가지다. 하나는 변신, 다른 하나는 타자다. 변신은 그의 소설들은 자주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 있으며 그 인물이 예전과 다른 모습이 되기를 원한다는 측면에서 떠오른 단어다. 타자는 오에의 아들 때문이다. 그의 아들은 자폐아이다. 여기에도 실린 '조용한 생활'에 등장하는 자폐아 이요는 오에의 아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지속적으로 그의 아들을 소설에 기입하는데 그것은 그대로 오에가 타자를 대하는 태도와 같다. 실은 변신의 욕망도 그와 관련있다. 타자가 다름아닌 아들로서 기입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리라 보는데, 소설에서 타자는 절대 자신에게로 올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는 탓이다. 나는 그를 내 의지로 규정하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이것이 오에의 타자다. 그런데 그 타자는 혈연인 아들처럼 임의로 지워버릴 수도, 배척할 수도 없는 존재다. 한 마디로 공존이 자신에게 불가항력적인 운명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오에는 그렇게 여긴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상생하는 길을 찾는 것밖에는 없고 변신은 그것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타자와 합일하려는 바람의 표현이다. 물론 여기의 타자엔 타인만이 있지 않다. 자연을 포함한 모든 세계가 그 대상이다. 초기의 단편들은 그가 작가로서 첫 발을 뗄 때부터 이미 타자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묘한 아르바이트'의 개나 '사자의 잘난 척'의 해부용 시체가 그러하다. 하나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하나는 이미 죽었다는 점에서 소설가의 전부라 할만한 언어 소통이 불가능한 대상들이다. 그런 존재들 앞에서 그는 커다란 당혹감을 안는다. 그는 자신 앞에 갑자기 출현한 이 정체불명의 세상을 두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그는 낯선 세계에 억지로 의미를 붙이거나 해석하지 않으며 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결말에서 주인공이 바꾸려고 참여했던 세계가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은 그런 결의의 표현이리라. 하지만 세상은 점점 그것을 어렵게 한다. 일본 내에서는 전공투가 일어나고, 프랑스에선 68혁명이, 베트남에선 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자폐아인 장남 히카리가 태어난다. 이제 그는 관찰자만을 자임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72년에 발표된 '공중괴물 이구이'에서 그런 위치는 주인공에게 우연히 날아온 돌맹이와 함께 끝장난다. 그 단편에서 주인공은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는데 그는 더이상 예전처럼 세계를 보지 못한다. 그것을 가져온 것이 이구이라는 타자임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그대로 이제 타자에게로 먼저 참여해야 한다는 표명으로 보인다.


 중기의 단편들은 타자와의 윤리학을 정초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타자는 한 세계를 대표하기 보다는 한 개인으로 집약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표정과 목소리를 가지고 작가에게 말을 걸어온다. 더구나 그들은 작가와 개인적인 인연까지 가지고 있다. 기피가 불가능한 상황. 그렇게 타인과의 연대는 더욱 끈끈해지고 그 타인에 대해 내가 어떤 태도를 표명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무조건적이면서 불가항력적인 참여만이 가능하다. 이렇게 중기의 단편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타인과의 나, 그 의무와 책임을 조명한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엔 아들과 오에의 관계가 깊게 침윤되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뒤따르는 태도의 변화는 어쩌면 아들의 성장에 따른 아버지로서의 오에 자신의 변화가 투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중기에서 오에는 세계에서 개인으로 들어간다. 그에게 소설은 거창한 세계를 담는 것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삶과 결부된 것들만 말할 수 있는 영역이 된다. 이것은 타자와의 윤리라는 것이 쉽게 뭐라고 치부하기가 어려운 탓이요, 심해만큼이나 깊이를 가지고 있어 모든 측면에서 성실히 탐색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보다 정밀한 관측을 통해 혜안을 찾고자 그는 소실점을 오로지 자기에게로 좁히는 것이다.


 더욱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는만큼 한층 더 내면적이 된 그의 글은 이제 글마저 타자가 된다. 중기까지 오에가 있던 자리에 후기에 가선 이제 독자를 거기로 불러 앉히는 것이다. 중기의 오에가 자신을 곤혹스럽게 만든 타자를 만났듯이 후기에선 독자가 그만큼 당황스러운 오에를 대면해야 한다. 결국 이 끝엔 뭐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지극히 낯선 것과의 대면이 자신을 무엇으로 변신시킬지 그 누구도 확언할 수 없는 까닭이다. 오에는 낯선 것을 낯선 것 그대로 놓아두길 원하며 불안과 불가해를 지향한다. 그의 언어는 분리와 균열을 일으키길 욕망한다. 전체가 될 수 없는 파편, 종합할 수 없는 산포. 우리가 마주하는 오에의 세계다. 오에는 후기에서 자크 마리탱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전인격이 참가하는 행위다.' 독자도 그렇게 참여하기를 후기의 오에는 원하는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초기와 중기 그리고 후기의 오에를 한 권으로 주욱 만나고 보니 변신과 타자라는 말이 더욱 또렷해진다. 내가 이렇게 확인했듯이, 이 책은 오에에게 관심 있던 분들이라면 오에가 무엇을 추구하며 그것을 위해 어떤 경로를 걸어왔는지 확인해 보는 좋은 경험이 되어줄 것 같다. 추천드린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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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6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7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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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나는 지금까지 오감 중에 미각을 가장 소홀히 여겼고 음식 역시 생존을 위한 섭취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었다. 맞벌이인 부모님 아래서 외로이 자라 집밥의 기억이 별로 없는 탓인 지도 모른다. 황석영 작가는 과거 홀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지느라 부엌에서 멀어지자 가게에서 사온 간단한 인스턴트 음식들로 끼니를 때웠다고 하던데 나도 그랬다. 솔직히 잘 차린 밥상은 내게 식욕 보다 텅 빈 집에서 홀로 마지못해 끼니를 때워야 했던 시간의 외로움을 먼저 상기시켰다. 상 위의 풍경이 풍성하면 할수록 생선가시만큼이나 앙상했던 내 과거가 더 두드러져 보였던 것이다. 그러니 억지로라도 음식에 별다른 가치를 두지 않으려 했다. 내게 밥도둑은 없었다. 밥도둑이 즐거운 식사를 달리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면 더욱 나와는 먼 존재였다. 내게 수저를 들게 만드는 진정한 신호는 식욕 보다는 허기였고 그것을 채우는 일도 정해진 시간에 태엽을 감아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왜 '황석영의 밥도둑'을 읽게 된 것일까? 실은 나도 잘 모른다. 단지 황석영 작가의 책이라기에 손에 들었고 처음 '철모에 삶아 먹은 닭 두 마리'를 읽을 때는 분명 그들만큼 곤궁했을 농부들의 닭과 돼지를 아무런 죄책감 없이 서리해가는 추억 속 인물들에게 화부터 났었다. 게다가 이 책은 나를 당혹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본디 내가 음식에 대해 잘 모르기도 하지만 이 책엔 생경한 음식들이 참 많이도 나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 페이지로 넘기는 것을 그만둘 수 없었다. 작가가 어찌나 하나의 음식에 얽힌 개인적인 추억담과 그 음식의 정보 그리고 만드는 방법을 흥미로우면서도 절묘하게 엮어내는지 이야기가 가진 중독성이 상당했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를 타칭 '조선의 3대 구라'라고 하더니만 헛소문이 아니었다. 잘 몰랐던 황석영 작가의 개인사를 알게 된 것도 좋았으나 특히 낯선 음식을 알아간다는 즐거움이 컸다. 나는 홍어에게 생식기가 있다는 것도, 그것으로 가격 차이가 심히 나는 암수를 구별한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러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더니 어느 순간 다 읽어버렸다. 뚜렷한 동기는 없었으나 읽는 재미가 완독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냥 재밌었다고 할 수만은 없다. 페이지가 거듭될수록 어느새 마음 속에 자리잡은 질투의 감정이 차츰 커져갔던 것이다. 그에겐 참으로 많은 음식에 대한 추억이 있었지만 내겐 없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깨닫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음식은 매듭이라는 사실이다. 음식은 그저 끼니의 수단만은 아니었다. 같이 먹는 사람, 함께 한 시간도 묶어 분별 가능한 하나의 마디로 만들어주는 존재였다. 삶은 어떻게 보면 모래강과도 같아서 단단히 묶어두지 않으면 사람도, 시간도 흘러가다 어느 순간 모래 아래로 가라앉아 망각되고 만다. 하지만 음식은 그걸 통조림처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적어도 황석영 작가의 개인적인 시공간에선 그랬다. 음식이 단단한 매듭이 되어 마치 책에 꽂아둔 책갈피처럼 작가가 누군가, 어떤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쉽게 찾아내선 그 추억을 오롯이 재현시켜 주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매듭이 음식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더라도 내 기억의 창고는 빈약했다. 빈 독의 바닥을 구르는 쌀 몇 톨. 씁쓸했다. 절로 서문의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도 아주 아프게.


그러나 배고픔은 어떤 먹을거리로든지 달랠 수가 있지만 누군가와 함께 먹었던 음식의 맛에 대한 그리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맛있었던 음식도 함께하는 이가 없으면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으며 넘쳐나는 풍성한 먹을거리도 고독한 식사의 허기를 달래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즈음 음식 프로가 부쩍 성행하는 것을 보며 음식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공동체성의 뿌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p.10~11)


 나는 홀로 먹는 것에 익숙했고 일부러 고수했다. 외로움을 되새기고 싶지 않아 지레 음식의 매듭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니 추억의 잔고가 별로 없는 것도 전적으로 내 책임이었다. 나를 지키려고 들인 습관이었지만 나를 더 빈곤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제 깨닫는다. 진정한 풍요는 내 성의 견고함이 아니라 타인과의 결부에서 온다는 것을. 내게도 황석영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처럼 타인이란 존재가 있어아만했던 것이다.


 내게는 어쨌든 내 존재를 비춰주고 확인시켜줄 타인이라는 거울이 필요했던 셈이다.(p.48)


 어쩌면 깨닫는 것이 너무 늦어버렸는 지도 모르겠다. 황석영 작가가 넌지시 알려주는 바에 따르면 음식의 매듭은 그것이 유일무이할 때 더욱 단단해진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타관 객지에서 그런 강렬한 토속 음식은 알지 못하게 시달렸던 다른 종족으로서의 정체성을 달래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p.197)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오직 한 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고유성이 함께 한 사람과 시간을 한층 더 굳건하게 묶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이 작가가 다시 가 본 해남 땅에서 보았던 것처럼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읍내를 둘러보니 온통 순댓국, 삼겹살, 해물탕 같은 간판이 즐비했다. 어디나 어슷비슷한 식당이 전국화되고 있는 것이다.(p.207)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처럼 음식도, 맛도 양산화, 평준화 되고 있는 것이다. 단조로운 일상이 우리의 신경을 무디게 만들듯, 어디서나 맛볼 수 있는 고유성을 상실한 닮은꼴의 음식들은 경험의 선명도를 떨어뜨린다. 결국 그렇지 않았다면 강렬했을 추억도 흐릿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처럼 함께했음에도 불구하고 남는 것은 다만 먹는 순간을 즐겼다는 것 뿐이다. 시간의 소비만 있지 추억의 예금은 없는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는 이렇게 과거의 나와 다르지 않은 아이들, 현재의 나와 판박이인 어른들이 많다고 밝힌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은 정체도 모를 미국식 페스트푸드로 점심을 때우고, 어른들도 야외에만 나가면 그저 고기를 떡 벌이지게 지글지글 구워서 독주에다 실컷 마시고 쿵쾅거리는 가라오케 기계를 틀어놓고 법석댄다. (p.107)


 현실은 점점 타인과 더불어 오래 공유할 추억을 만들기 힘든 상황으로 가고 있다. 더구나 지금의 인간 관계란 헤어질 때 버릇처럼 말하는 '언제 한 번 밥먹자'라는 말의 공허한 울림과도 같이 형식적이면서 파편화되어 버린지 오래다. 나는 정말로 뒤늦게 깨달았는 지도 모른다. 지금의 현실이 내가 뭔가 하기엔 너무나 버겁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이런 내 모습이 과거의 나와 너무 비슷하다는 것을. 그 때의 나는 외로움을 무척이나 많이 느꼈지만 그 상황에 나를 수동적으로 길들이려했을 뿐, 그것을 바꾸려는 노력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하여 현재의 후회와 자책을 가졌으면서도 나는 어느새 또 똑같은 잘못을 반복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래. 상황 탓은 그만두자. 그렇게 하여 본들 황석영 작가에 대한 부러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외부에서 나를 의탁할 곳을 찾고 그런 곳이 없다며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내가 먼저 그런 거점이 되자. 추억을 동냥하기 보다는 내가 먼저 나눠주기로 하자. 그것도 어디서도 대체가 불가능한 고유한 경험을. 이렇게 마음 먹는다. 앞에서 인용한 것에 바로 이어지는 말 그대로다.


 장아찌는 장독대가 사라지면서 백화점의 반찬가게로 옮겨갔고, 서로 담 너머로 장을 빌리거나 찬을 나누고 들밥을 함께 먹던 문화는 식구끼리의 외식문화로 바뀌었지만, 실천하기에 따라서는 회복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p. 107)


 동의한다. 실천이 중요하다. 나는 그것을 무엇보다 요리를 통해 해보려 생각한다. 이렇게 작정하게 된 것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책을 통해 음식이야말로 고유성의 발현 장소라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나 때문이다. 집밥의 경험이 거의 없었던 나. 내가 한 집밥을 누군가 먹고 즐거워한다면 그 때의 나에게도 위로가 될 것 같아서이다. 물론 내가 만든 음식으로 누군가를 즐겁게 만든다는 것이 지금의 내겐 턱없는 욕심이긴 하다만. 그래도 발걸음을 떼고 끝까지 걸어가 보고 싶다. 언젠가 내가 만든 음식 때문에 누군가 추억을 밥도둑처럼 즐거이 맛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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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관 1~3 세트 - 전3권 - 2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2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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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내게 라틴어를 가르친 한 스페인인 교수의 추천으로 읽게 된 콜린 매컬로의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는 여기에 대해 처음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관을 완전히 바꿔 주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를 직접 만나기 전의 나는 그것을 로마 역사를 배경으로 한 아주 재밌는 소설이겠구나 정도로만 여겼었다. 그런데 읽어보니 아니었다. 산만함을 용납하지 않는 달변의 화술로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도록 하는 소설로서의 재미도 월등했지만 더 나아가 뛰어난 역사서로써의 면모마저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2부, '풀잎관'이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 로마를 다룬 역사서에서 겨우 몇 개의 문장, 좀 더 나아가봐야 기껏 서너 페이지 정도로만 접했던 사건을 1권은 519페이지, 2권은 595페이지, 3권은 400페이지로 무려 세 권이나 되는 분량으로 다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놀랐는 지에 대해 말하려면 일단 제목인 '풀잎관'의 뜻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소설에서 콜린 매컬로가 묘사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흔한 풀잎으로 만든 소박한 관이지만, 개인의 용맹함과 결단력으로 군대나 군단 전체를 구한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 로마 역사 전체를 통틀어 받은 이가 겨우 몇 사람에 불과할 정도로 대단히 명예로운 훈장이다. 다시 말해, 풀잎관은 어디까지나 한 단체를 커다란 위기에서 구해내었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그대로 이 소설에서 로마는 엄청난 위기에 봉착한다. 그것이 바로 역사에선 '동맹시 전쟁(BC 91 ~ BC 88)'으로 기록된, 자신들에게 로마 시민권 부여를 거부하는 로마를 상대로 이탈리아인들이 일으킨 전쟁이다. 사실 이 전쟁은 로마에게 미증유의 위기를 가져왔다.


 왜냐하면 그 상대가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이탈리아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이 때까지 계속 로마와 거의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니발이 침략했을 때, 로마가 지금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니발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던 이탈리아였다. 그만큼 충성스럽게 오래도록 함께했기에 이탈리아는 많은 면에서 로마와 거의 다를 바 없었다. 이 말은 이탈리아가 로마와 똑같이 싸울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로마가 지금까지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만의 군대 편성, 전술의 덕이 컸다. 하지만 이제 로마는 그 이점을 전혀 얻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도 똑같은 로마의 군대 편제로 동일한 전술을 구사하며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로마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인 로마 자신과 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어찌 위기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 시간을 2부, '풀잎관'은 담는다. 그 전쟁이 어떻게 비롯되었고 경과했으며 무엇을 남겼는지, 그 과정을 세 권에 걸쳐 조목조목 아주 상세하게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읽은 역사서에 한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까지 겨우 몇 줄 혹은 몇 페이지로 밖에는 만나 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정말로 이만한 분량으로 다룬 책은 보지 못했다. 그러니 놀랐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나 풍부하게 쓸 수 있었을까 하고.


 물론 여기에 대해선 얼마든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소설이니 소설가가 상상력을 발휘하면 이만한 분량쯤은 어렵지도 않다고. 하지만 그럴 경우 위험이 따른다. 사료에 기반하지 않은 상상력은 쉽게 허황과 그것을 설득력있게 만들려다가 장황의 늪에 빠지고 그러다 그만 설득력을 잃고선 오히려 독자들의 차디찬 외면만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풀잎관'에서 자주 등장하는 원로원 의원들의 연설에서와 똑같이, 두말할 것도 없이 설득력이다. 그것이 작품의 성공을 좌우한다. 놀랍게도 이 소설은 설득력으로 가득하다. 어떤 사건이든, 로마 원로원의 어떤 연설이든, 중요 인물들의 어떤 심리이든, 모두 있음직하고 그럴만한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솔직히 실제 역사가 이렇게 진행되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만한 설득력이 그저 콜린 매컬로의 상상력, 필력으로만 이뤄질 것 같지는 않다. 분명 어마어마한 자료 조사와 충실한 검토, 그 의미에 대한 숙고가 있었으리라. 그래야 가능한 것이니까. 그러므로 나는 감히 이 소설이 그 어떤 사건이든 인물의 초상이든지 간에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있다고 생각하며 그렇기에 또 감히 이 소설을 뛰어난 역사서의 면모마저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솔직히 '동맹시 전쟁'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다른 무엇보다도 이 '풀잎관'을 읽는 게 가장 좋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앞서도 말했듯이 대부분의 역사서에는 아주 개략적인 소개만 있다. 설령 인물이 등장해도 '어디가서 무엇을 했고 결과가 이렇다'라는 정도의 '행위와 결과'만 있지 왜 그런 일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잘 나오지 않는다. 행여 나와도 깊이 서술하진 않는다. 하지만 콜린 매컬로는 오히려 거기에 더 주안점을 둔다. 이 인물이 어떤 연유로 그러한 선택을 하고 행위했는지 그 과정을 더 충실히 복원하여 독자를 깊이 참여토록 하는 것이다. 마리우스와 술라만이 아니다. 필리푸스, 카이오스, 루푸스, 드루수스, 술피키우스 그리고 킨나만이 아니다. 정치에서 소외되었다고 할 수 있는 여인들인 율리아, 리비아 그리고 아우렐리아만도 아니었다. 3편에서 마리우스의 탈출을 도와주었던 작은 도시 민투르나이의 일개 촌부의 마음마저도 콜린 매컬로는 독자들에게 깊이 체험토록 한다.(아아, 이 장면은 '풀잎관'에서 가장 멋진 장면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저마다 입체적인 면모를 지닌 독립적 인격으로 다가오고 그런 까닭에 마리우스의 성공과 파멸을 동시에 가져온 예언에 대한 집착도, 술라의 질투와 고독도, 루푸스의 정치에 대한 환멸도, 이탈리아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기 위한 드루수스의 절박함도, 미트리다테스의 학살로 문득 자신이 가야할 길에 눈을 뜨게 된 술피키우스의 회심도 다 생생하게 다가왔고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풀잎관'은 진정한 의미의 인간 드라마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당대의 역사를, 역사란 무엇보다도 생생한 인간들이 활약하는 장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이해하도록 만들었다.


 역사라는 말을 쓰니까 문득 영화 '변호인'에도 나와서 더욱 유명해진 역사학자 E.H 카아가 떠오른다. 그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다. 그가 '대화'란 말을 쓴 것은 과거의 사실이라고해서 고정불변의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선에 따라 그 의미가 늘 새롭게 재조명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 말을 실감하게 된 것이 바로 '풀잎관'이었다.(아마도 그래서 갑자기 그를 떠올리게 된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제 동맹시 전쟁을, 당시 주된 행위자였던 마리우스와 술라를, 그리고 로마와 이탈리아를 과거와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콜린 매컬로의 이 책을 통해 바뀌게 된 것들이 참 많았다. 특히나 예전엔 마리우스와 술라 모두 권력에 눈이 먼 이들로만 생각했었는데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로마와 이탈리아 반목의 원인이 되었던 로마 시민권 역시도 그것이 이탈리아인들에게 얼마나 절박했는지 잘 깨닫지 못했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알게되어 그것도 모르고 마냥 로마 편만 들었던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카아의 '대화'는 과거의 역사가 동시대의 문제를 풀어가는데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풀잎관'은 여기에도 해당되었다. 솔직히 이것은 소설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정말로 '풀잎관'은 당대의 긴급하면서도 긴요한 문제에 대해서 좋은 참조가 될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이 '풀잎관'을 한 번은 꼭 벗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 역시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해서 그렇다. 그것은 바로 이주(移住)의 문제이다. 실제 유럽에서는 이 문제가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바로 최근에도 시리아 난민 사태가 있었다. 난민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로 유럽 곳곳이 격한 논쟁과 갈등으로 시끌벅적했다. 더욱 난민을 통크게 받아들인 독일에선 올 새해 첫날에 난민들이 일으킨 쾰른 대성상 집단 성폭행 사태로 더욱 찬반양론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심각한 출산율 저하와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해 일찍 이주민을 유입시킨 유럽 사회에선 항상 그런 갈등이 있어왔다. 실제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유럽의 우익화는 늘어나는 이주민과 상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이주민이 유럽의 정치 지형마저 바꾸고 있는 것이다. 그 미래가 현재의 미국일 지도 모른다. 이주민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트럼프가 공화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가 되려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나라 역시도 모두 알다시피 고령화 사회로 착착 나아가고 있고 심각한 저출산을 겪고 있다. 유럽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일 지도 모른다. 더구나 우리는 북한도 있다. 만일 통일이 되면 우리도 필연적으로 '풀잎관'의 문제를 겪을 것이다.


 '풀잎관'은 바로 그럴 때 능히 도움이 될 수 있다. 이탈리아인에 대한 로마 시민권 부여 때문에 로마 원로원에서 일어난 갈등이 지금과 진정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갈등은 3부에 걸쳐 내내 재현된다. 리키니우스-무키우스 법이 발단이었다. 이 법은 '마스터 오브 로마 가이드 북'에 따르면 'BC 96년 인구조사에서 가짜 로마 시민 발각 사례가 급증한 것을 성토하는 목소리라 높아지자(p. 124)' 이에 대응하여 가짜 시민을 가려내어 신규 등록자를 처벌할 것을 목적으로 한 법이었는데 그렇게 가짜 시민으로 등록한 대부분이 바로 이탈리아의 로마 동맹 도시들의 사람인 지라 특히 처벌 조항 때문에 로마가 이탈리아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가 원로원에서 첨예한 논쟁을 일으켰다. 이 법을 옹호하는 자들, 즉 차별을 주장하는 자들과 그 법을 반대하는 자들, 즉 포용을 주장하는 자들의 언설이 지금의 논쟁과 아주 유사하다.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 보면 포용을 주장하는 이들이 제시하는 이유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일례로 포용 편에 섰던 루푸스는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1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디 리키니우스-무키우스의 법의 처벌 조항을 더 진지하게 들여다봅시다! 어떻게 우리가 군대와 돈을 대라고 요구하는, 우리가 더불어 공존해야 하는 사람들을 매질할 수 있습니까? 이 의사당의 일부 방종한 무리가 이곳 동료들의 혈통에 대해 비방할 수 있다고 한들, 우리가 이탈리아인들과 그렇게 다른 존재입니까? 이 점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 여러분이 숙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때려서 아들을 훈육하는 아버지는 나쁜 아버지입니다. 그 아들을 자란 후에 아버지를 증오하지, 사랑하거나 존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반도에 사는 우리의 이탈리아인 친족을 매질한다면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로마 시민권 획득을 막는다면, 속물적인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막대한 벌금으로 벌한다면, 탐욕스러운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집에서 쫓아낸다면, 냉담한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과 공존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을 모두 합치면 얼마나 큰 증오일까요? 원로원 의원 여러분, 퀴리테스 여러분, 그것은 우리와 똑같은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품게 하기에는 너무나 큰 증오입니다.”(1권, p. 373~374)


 '더불어 공존해야 할 존재들이라면 증오만 부추기는 수단 보다는 사랑과 존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루푸스의 말은 우리의 현실에서 증오만 부추기는 정책을 폈던 국가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생각한다면 꽤나 설득력이 있다. 비근한 예로 과거 일본이 재일한국인에게 했던 '외국인지문등록법'이 있다. 범죄가 일어났을 경우에만 필요한 지문을 그것도 하필이면 재일한국인만 등록하게 했던 그 법은 재일한국인 모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것이었고 하여 일본의 재일한국인 사회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마저 엄청난 공분을 자아내어 그 여파로 일본 사회마저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또한 2005년 프랑스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이주민들의 폭동은 이주민들에게만 가혹한 경찰이 처사와 그것을 정책적으로 방관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이 사회들이 이렇게 이주민들을 배제하면서 얻으려고 했던 것은 오직 안정이었다. '풀잎관'에서 이탈리아인들에게 시민권 주는 것을 결사적으로 거부했던 필리푸스와 카이오스가 내내 주장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그 정책이 가져다 준 것은 더 커다란 혼란 뿐이었다. 특히나 독일은 여기에 대해 명확한 반대 증거가 되고 있다. 독일도 프랑스와 비슷한 규모의 이주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프랑스와 같은 혼돈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전범국가였던 독일은 노동력이 되는 남성들이 아주 많이 사망하여 전후 독일 경제 부흥으로 노동력 수요가 급증하자 바깥 국가에서 이주민들을 대폭 받아들여야 했는데 그 때부터 이미 그들을 더불어 공존해야 할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이 독일 사회와 잘 조화될 수 있도록, 루푸스 말로 하자면 독일을 사랑할 수 있도록, 태도와 제도에 있어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서 그것을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정비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일의 모습은 루푸스의 방법이 얼마나 현명한 것인지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풀잎관'이 좋은 참조가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지금 우리 시대의 뜨거운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는 '풀잎관'에서 그 문제를 두고 등장하는 다양한 주장들을 우리가 있는 현재의 실제 사례들에 비추어 어느 것이 어리석고 또 어느 것이 현명한 것인지를 판단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풀잎관'은 결코 한 번의 감상으로 그치는 작품이 아니다. 반드시 오늘의 문제와 결부하여 몇 번씩 곱씹게 만든다. 카아의 '대화'엔 역사적 사실이 수동적인 습득의 대상이 아니고 적극적인 사유 참여의 대상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이런 면에서도 '풀잎관'은 합당한 면모를 보인다. 누구의 주장이든 그것은 우리의 사유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콜린 매컬로는 뛰어난 필력으로 그 주장들을 아주 논리적으로 담아내고 있기에(2권에서 필리푸스가 로마에 나타난 상서롭지 못한 현상들을 증거로 내세우며 드루수스를 공격할 때조차 그렇다. 거기서 필리푸스가 내세우는 많은 증거들은 설령 그것이 스카우루스의 말마따나 조작된 것임을 안다 해도 전혀 허무맹랑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 긴 목록은 그야말로 콜린 매컬로를 대단하게 보도록 만든다. 특히 그 목록을 빼곡히 채운 상상력과 왠지 납득하게 만드는 필력을. 소설에서 가장 증오를 받을 인물의 말조차 그렇게 세심하게 구성하다니, 이런 존중과 배려를 보면 콜린 매컬로야 말로 루푸스와 드루수스의 정신을 진정 실천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절로 거기로 이끌려 들어가 자신의 사유를 가필하게 된다. 다시 말해, 콜린 매컬로가 은근히 초대한 대화에 어느 순간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루푸스가 현실적인 측면에서 든 포용의 이유를, 2권의 드루수스는 좀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이렇게 밝히는데,


 “우리 로마에는 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 내에서 우리는 모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왕처럼 행동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느끼는 기분을 좋아하고 우리보다 열등한 사람들이 우리의 높은 콧대 밑에서 기어다니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왕 놀이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정말로 우리보다 열등하다고 하려면 무슨 핑계라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탈리아인들이 우리보다 열등하다는 그 어떤 자연적인 근거도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2권, p. 120)


“이제는 우리에게서 이 무서운 악을 없애야 할 때입니다! 이 악이란 이탈리아에 있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간주되는 것, 우리 로마인들을 계속해서 특권층으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원로원 의원 여러분, 로마는 이탈리아입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로마입니다. 이제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한 자격을 줍시다!”(2권, p. 123)


 이것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우열의 기준은 누군가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한없이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기준일 뿐인데 우리 역시 그것이 내게 이익이 된다는 이유로 타협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최근에 필리버스터로 더욱 우리들의 관심을 달군 '테러방지법'은 어떠한가? 여기에 대해서도 '풀잎관'은 1권에서 루푸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우리의 사유를 요청한다.

 “유급 정보제공자를 고용한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고국을 무기력하게 만들 질병을 수십 년 동안 확산시키는 꼴이 될 것입니다.  첩자들, 옹졸한 공갈범들, 그리고 친구는 물론이고 친척에 대한 끝도 없는 의심이라는 질병말입니다. 어느 공동체든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이런 자들은 공포가 사람들을 지배할 때나 억압적인 법이 제정될 때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기 마련이지요. 제발 이런 비루한 자들이 생겨나게 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늘 그래왔던 대로 로마인이 됩시다. 공포에서 해방된, 외국 왕의 술수 위에 있는 존재 말입니다.”(1권, p. 376)


 이렇게 '풀잎관'은 과거의 죽은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우리들을 단순한 감상자로 놔두지도 않는다. 소설에 있는 어떤 말이든, 사건이든 어느 순간 그와 비슷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슬쩍 다가와서는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은근히 묻는다. 발터 벤야민은 진리를 향한 읽기란 잠들려는 나를 뒤흔들어 깨우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풀잎관'의 독서가 정녕 그러하다. 되씹고, 곱씹다 어느새 사유의 지도를 그리게 된다. 그 지도는 어쩌면 지금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소마에 준이치라는 일본의 역사학자는 '상실과 노스텔지어'라는 책에서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그 자체는 담론이며 우리의 관념에서 상기됨으로써 처음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에 불과합니다.(상기 책, p. 21)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관념 속으로 지속적으로 들어와 집요하게 대화를 요청하는 콜린 매컬로의 '풀잎관'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로마 역사를 처음 만나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된다. 지금까지 겨우 몇 줄이나 얼마 안 되는 페이지 속의 초라한 실체로만 보았던 로마의 인물들인데, 이토록 풍성하고 자세하게 만나다 보니 이제야 비로소 그들을 제대로 알게 되어 마치 처음 만나는 것과 같은 기분을 가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이 만들어나가는 로마의 역사 또한 어떻게 처음처럼 다가오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동맹시 전쟁'을 둘러싼 제반 상황을 '풀잎관'을 통해 지금에서야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더욱 이렇게 간주할 수밖에 없다. '풀잎관'은 로마 역사의 신대륙으로 인도한다. 인물도, 사건도, 과정도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그것도 지금 나의 현실과 아주 밀접하게 결부하여. 그러니 사유 역시 일신(一新)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소마에 준이치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개인을 기점으로 역사를 생각한다는 것은 (...) 자신 안에 과거라는 어둠이 스며들어 내가 해체될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몸을 내던지는 것(같은 책, p. 33)'이라고. 이 말대로 역사는 현실을 상대화시켜 지금의 내가 가진 생각을 해체하고 전복할 수 있다. 여기서 자유를 느낀다면 '풀잎관'은 한층 더 즐거운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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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8 0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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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1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사랑 - 순수함을 열망한 문학적 천재의 이면
베르벨 레츠 지음, 김이섭 옮김 / 자음과모음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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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은 헤세의 약점이었다. 여성에게 헤세는 눈물의 씨앗이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무리 대문호라도 순간마다 일어나는 욕정은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여성들은 헤세에게 그물이 되고 싶었으나 결국 바람처럼 빠져나가고마는 헤세의 뒷 모습을 보며 좌절하고 괴로워하며 비통 속에서 결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베르벨 레츠의 '헤르만 헤세의 사랑'에는 그의 작품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작가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헤세의 모습이 있다.


 현실의 인간으로서 헤세는 연약한 남자였다. 자주 불안을 느끼는 신경증 환자였고 상처를 많이 받는 영혼이었다. 그 불안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헤세는 아랫도리를 주체하지 못하는 남자였다. 함부로 굴리지는 않았지만 혼인의 책임은 쉽게 저버릴 수는 있었다. 이 책의 첫 머리에는 다음과 같은 헤세의 고백이 나온다.

 나의 사상이나 예술관 때문에
내 인생에서, 혹은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종종 어려움에 봉착한다.
나는 사랑을 부여잡을 수도, 인간을 사랑할 수도,
삶 자체를 사랑할 수도 없다.

- 헤르만 헤세 -

 이 고백 그대로였다. 헤세는 누구보다 사랑에 굶주렸던 사람이었으나 사랑받는 것만 알았지 사랑할 줄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사랑에 있어서 헤세는 늘 젖을 달라 칭얼거리기만 하는 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 끊임없이 자기를 보아달라,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 내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달라 조르기만 할 뿐, 그 사랑을 주는 데 있어서는 인색한 남자였다. 그는 모든 것에 초연한 '데미안'과 같은 남자이고 싶었으나 그건 꿈일뿐, 결코 되지 못했다. 그는 크눌프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얻는 자유를 바랐으나 머릿 속에서만 일어나는 몽상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결코 껍질을 깨지 못한 아브락사스였으며 안락한 정원에서 잠깐의 백일몽으로 자유를 공상하는 존재였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기만이며 허위이고 위선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의 영혼은 분명 그렇게 되고 싶어했다. 그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에 대해 썼다. 하지만 그는 약했다. 인간으로서 그는 너무 약했다. 그 약함에 발이 걸려 그는 자주 넘어졌던 것이다. 특히 여성이 그에게 많이 돌부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베르벨 레츠의 책은 사랑과 욕망에 있어서는 한없이 이기적이었던 헤세의 모습을 충실하게 그려낸다. 그의 시가 아무리 청춘의 도망을 이야기하고 버리고 떠날 것을 찬미하더라도 그는 용기가 없었고 어쩌다 생겨도 그것은 오직 스스로 무책임하게 될 때만 생겨나는 것임을 말이다. 평생 결혼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헤세는 자신의 신념과 다르게 무려 세 번이나 결혼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결혼도 행복한 결말은 없었다. 열 살이나 많았던 마리아와의 첫 결혼은 두 아들까지 낳았지만 이혼으로 끝이 났다. 마리아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헤세가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끝까지 이혼하지 않으려 했지만 헤세는 그녀를 의사와 짜고 정신병원에까지 가둬 결국 이혼 승낙을 받아냈다. 그 이혼으로 그는 두 아들까지 버렸다. 그 때 헤세는 이미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진 후였다. '사랑과 전쟁'에 흔히 나오는 막장 스토리를 그 누구도 아닌 헤르만 헤세가 연출했던 것이다. 당시 사랑에 빠졌던 여성의 이름은 '루트'였다. 그녀는 헤세보다 열 살이나 어렸고 촉망받는 오페라 가수였는데 결국 헤세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모두들 영혼의 싱싱한 생명력이 가득한 여성이라고 보았던 루트였다. 헤세도 그 생기에 이끌렸다. 하지만 헤세와의 결혼은 흡혈귀 같았다. 루트는 결혼으로 인해 자신에게 있던 모든 생기를 빨리고 말았다. 루트의 결말은 마리아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한 여성이 있었다. 이름은 니논. 그녀는 결코 한 때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아니었다. 니논은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가 처음 나왔을 때 읽고 단번에 헤르만 헤세에게 매료되어 버렸다. 그 때, 그녀는 소녀였다. 엄마를 처음 본 아기새처럼 헤세와의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하지만 헤세는 다가가기에 아주 먼 남자였다. 그렇지만 니논은 헤세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고 헤세의 새 책이 나올 때마다 감상을 편지로 써 보냈다. 니논의 사랑은 아주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도중에 결혼하여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지만 헤세를 향한 니논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다. 결국 그 사랑은 결실을 맺어 헤세의 세 번째 아내가 되었다. 헤세의 결혼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니논은 헤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아내로 남아있었다. 니논은 행복했을 지 몰라도 제3자의 눈에 그 둘의 결혼 생활은 그리 아름답다고 할 수만은 없었다. 니논은 헤세에게 아낌없이 헌신했지만 헤세는 그만큼 니논을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결코 균형을 이루지 않았다. 한 쪽으로 너무 기운 사랑이었다. 니논은 희생하고 헤세는 그 혜택을 누렸다.

 그게 헤세였다.
 읽다보면 어쩔 수없이 서서히 그려지는 초상은 허세의 헤세다.
 '도대체 그가 시와 소설로 쓴 모든 말들은 다 무엇이었던가, 그냥 다 말장난에 불과했던 것인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책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를 해 보자. 헤세의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청춘의 헤세는 연상을 좋아했다. 그의 첫 사랑이었던 유제니 콜프는 그보다 무려 일곱 살이나 많았다. 헤세는 그녀를 열렬히 숭배했으나 유제니 콜프는 겨우 열 다섯 살에 불과한 헤세를 어린애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구애를 거절하자 헤세는 권총을 가지고 와서 괴테의 '베르테르'처럼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자살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유제니 콜프는 '첫 사랑은 결코 이뤄지는 법이 없어요'하며 거절했다. 자살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헤세는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헤세는 첫 사랑부터 그랬다.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 몰랐고 사랑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영혼이었다. 그저 자신의 사랑이 받아지나 안 받아지나만 중요했다. 타인의 감정보다는 자신의 감정만 소중했던 사람, 그것이 바로 헤세였다. 

 베르벨 레츠의 '헤르만 헤세의 사랑'은 그런 헤세의 모습을 가득 보여준다. 이 책의 원제는 '헤세의 여자들'이다. 제목 그대로 헤세를 중심에 두지 않고 헤세의 여인들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사이 사이에 헤세와 그 여인들이 진실로 주고받은 서신들을 통해 책의 이야기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님을 밝혀두고 있다는 것도 이 책이 가진 하나의 특색이다. 포르투칼의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는 '글을 타인의 손을 통해 꾸는 꿈'이라고 말했다. 베르벨 레츠의 책을 읽다보니 정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헤세의 작품을 통해 감명받고 깨달았던 것은 헤세의 진실은 아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말하는 것과 행위하는 것만이 일치했을 때만 진실하다고 할 수 있으면 말이다. 그건 헤세의 꿈에 불과했다. 아니, 어쩌면 바로 우리 자신의 꿈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정녕 바라던 것을 우리는 헤세의 손을 통해 꿈 꾼 것이다. 그 꿈결에 우리를 젖게 했기에 우리는 헤세의 소설들을 좋아했을 지도 모른다. 문학을 즐기고 사랑하는 것은 도대체 뭘까? 베르벨 레츠의 이 책은 결국 우리가 읽고 쓴다는 게 지극히 나르시시즘적인 행위가 아닐까 내비친다. 정말로 어쩌면 우리 모두는 타인의 글이 아니라 그 글이라는 수면 위에 비친 내 그림자만 보고 사랑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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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호랑이가 온다
피오나 맥팔레인 지음, 하윤숙 옮김 / 시공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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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75세의 할머니 루스. 5년 전에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장성한 두 아들이 있지만 혼자 지낸다. 그러던 어느날 새벽 네시. 그녀는 거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짐승의 헐떡임과 숨소리의 울림. 몸집이 거대함과 의도를 암시하는 숨소리의 울림'을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것을 그녀는 호랑이라 생각한다. 두려움에 떨다 용기를 내어 거실로 나가보니 호랑이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새로운 느낌, 대단히 중대한 느낌.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는데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호랑이인가, 아니면 중요한 일에 대한 느낌인가?(p. 11)


 정말로 대체 그 소린 무엇이었을까? 아들 제프리의 말대로 꿈결의 연장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느꼈던 그대로 이제껏 별 탈 없이 굴러왔던 인생에 무언가 닥쳐오고 있다는 신호였을까? 다음날. 과연 그 호랑이 소리가 신호이기라도 한 듯이 정체모를 한 여성의 방문을 받는다. 육중한 몸으로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는 그녀의 이름은 프리다. 그 존재감의 과시와 이름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을 자화상으로 자주 드러내었던 화가 프리다 칼로가 얼른 연상되는 그녀는 루스에게 다짜고짜 앞으로는 자기가 루스를 돌보게 될 것이라 말한다. 루스는 썩 내키지 않는 그녀를 자신의 둥지에서 몰아내고 싶지만 프리다는 막무가내다. 역시 호랑이는 프리다를 뜻하는 것이었을까?



 이 느닷없이 도래한 두 여성의 흥미로운 동거 이야기는 조금은 기묘해 보이는 여성 사이의 연대를 보여준다. 소설 초반에 우리는 루스의 과거를 보게 된다. 그 과거에서 드러나는 루스의 삶이란 그야말로 '안정'이라는 말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과 같은 모습이다. 루스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모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남편 해리와 똑같이 주어진 삶의 궤도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랬기에 프리다의 출현은 그녀의 조용한 삶의 수면에 문득 생겨난 파문과 같았다. 느닷없는 동거는 변함없이 돌고 돌았던 궤도의 이탈이었다. 그건 지금껏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던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었기에 위험이었고 모험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갇혀 있던 삶에다 바깥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만든 것이기도 했다. 그 모험은 탈옥에서 오는 두근거림이었다. 한 번 자유를 맛 본 이가 다시 예전의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제대한 병장이 다시는 부대를 뒤돌아보지 않듯이.


 그녀의 이름이 하필이면 '루스'인 것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 '루스'는 잃어버리다란 뜻의 'lose'를 연상시킨다. 그렇게 그녀는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다. 문학적 의미만은 아니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녀는 자꾸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점점 상실(lose)해 간다.


 이로서 호랑이 소리가 암시했던 중대한 일이 과연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그건 바로 이제 다시는 예전 삶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는 하나의 신탁이었던 것이다.


 왜 그녀는 과거의 삶을 상실해야 했을까? 작가 피오나 맥팔레인은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했던 것일까? 이 작품에 대해 흔히 할 수 있는 오해는 루스라는 존재 때문에 노년에 대한 소설이 아닐까 여기는 것이다. 노년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소외감, 무력감을 말하는. 분명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진심은 다른 데 있다. '밤, 호랑이가 온다'는 흔히 말하는 페미니즘 소설이다. 식상한 표현이 될 지도 모르지만 감히 말한다면 남성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 여성은 진정한 삶을 영위할 수 없으며 그 진정한 구원은 오로지 여성들만의 연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인 것이다.


 물론 결말은 이것을 명백히 부정한다. 하지만 왜 그런 결말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루스와 프리다, 그녀들 모두에게 닥쳐온 비극은 누구 때문이었나? 바로 남자들이다. 루스가 프리다에게 날로 의존하게 되었던 것은 예전의 연인 리처드 때문이었다. 리처드에 대한 집착이 프리다에 대한 무분별한 의존을 낳았다. 프리다는 남자 친구 조지를 신뢰했다. 그녀가 루스를 찾아와 헌신적인 노동을 한 것도 조지 때문이었다. 루스와 프리다. 둘은 결국 같은 존재였다. 그녀들의 세계는 남자를 중심으로 돌았다. 독립적으로 뭔가 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의존했다. 비극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루스에겐 두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루스가 그렇게 될 때까지 아들은 아무 도움이 안 되었다. 그들은 그저 멀리서 전화로 걱정을 전할 뿐이었다. 다시 만나게 된 리처드조차 마찬가지였다. 루스의 세계는 남자를 중심으로 돌았지만 정작 그녀가 얻는 것은 소외와 착취 뿐이었다. 프리다도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차근차근 뜯어보면 남성들의 무력함과 그에 대한 불신이 드리워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렇게 보면 소설 초반 해리의 죽음에 나왔던 앨런이라는 존재가 참 의미심장해진다. 앨런, 그녀는 착한 사마리아 인이었다.  5년 전 남편 해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심장 마비로 갑자기 죽었다. 해리는 늙어서 '시궁창의 개'처럼 객사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정말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해리 앞에 가던 차를 멈추고 다가와 그렇게 죽지 않도록 도와주었던 것이 바로 앨런이었다. 루스는 그녀를 착한 사마리아 인으로 불렀다. 루스는 앨런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착한 마음을 가진 낯선 이가 어느 날 나타나 다른 어떤 이유 없이 오로지 선의 하나만으로 그녀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앨런이 그 증거였다.(p. 32)


 이것이 바로 핵심이라는 것을 우리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느끼게 된다. 바로 이 가능성이 무엇보다 여성에게서 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만한 정도의 구원은 소설에서 오로지 앨런만이 준다.


"당신은 정말 생명을 구해주는 사람이에요" 필립이 말했다.(p. 369)


 다른 이는 아무도 루스에게 주지 못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예전의 연인 리처드도, 두 아들도.

 남자들은 사실 루스가 키웠던 수컷 고양이와 같았다. 최소한 하루에 한 번은 토해서 더럽히는 존재들.


 그걸 프리다가 걸레로 말끔히 닦아내듯 치유를 줄 수 있는 건 앨런 뿐이었다. 프리다도 줄 수 있었다. 루스는 (진짜였는지 연기였는지 알 수 없으나) 호랑이를 해치운 프리다를 보면서 자신이 그토록 갈구했던 안전을 그녀가 주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루스가 프리다가 하자는 대로 군말없이 한 것도 앨런이 주었던 것을 프리다가 주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루스는 앨런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아울러 프리다에게도 고마웠다. 프리다는 집과 고양이와 루스를 위해 끊임없는 관심을 쏟으며 자기 몸이 닳도록 일했고 호랑이를 쫓아내주었다.(p. 266)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 프리다마저 루스와 똑같이 여전히 남성에게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프리다가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했었다면, 루스 역시 더이상 리처드나 아들들에게 연연해하지 않고 순수하게 프리다와 연대하려 했었다면 아마도 결말의 비극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중에 앨런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난 프리다와 겨우 몇 분 정도밖에 이야기하지 못했어요. 앨런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가 당신 어머니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p.367)


 

소설의 표지를 넘기면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앙리 루소의 '이국의 숲에서 우산을 든 여인'의 그림이 나온다. 남성 중심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여성 홀로 우뚝 섰을 때 가지게 될 자유를 뜻하는 그림인데 커버 자체가 소설의 주제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밤, 호랑이가 온다'는 바로 이런 소설인 것이다. 결국 루스를 두려움에 젖게 했던 호랑이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바로 남성 혹은 그 남성에 여전히 얽매인 자신이 아니었을까?


 좀 더 보편적으로 의미를 확장해 보자면 이 소설은 독립적으로 서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무엇인가에 얽매이거나 의존하지 않는 것. 그런 이유로 루스가 하필이면 노년이 된 게 아닐까 싶다. 노년이란 무엇보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이니까 말이다.


 살면서 우리는 남성, 여성을 포함하여 여러가지 것들에 우리 자신을 얽매이게 한다. 그것들이 삶을 좀 더 쉽게 걸어가게 만들어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이 우리의 보행을 어렵게 하고 때로는 걸려 넘어지게 할 때가 많다. 얽매이면 얽매일수록 내 걸음만 늦춰질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때도 잦다. 이 소설은 문득 그런 과거를 떠오르게 한다. 그러면서 비록 이 세상에 온통 흙비가 내리더라도 나 홀로 우산을 받치고 견디려는 연습을 해야겠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진정한 연대도 그 때라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가 독립한 나가 될 수 있었을 때에.


 난폭한 운명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 소설이 거꾸로 보여주듯이 그 어떤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홀로 자유로운 바람이 되는 것 뿐이다. 프리다와 루스는 그를 위한 타산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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