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바다
이언 맥과이어 지음, 정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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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과 야만은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요?

 새삼스레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었습니다. 이언 맥과이어의 소설, '얼어붙은 바다'를 읽고 난 뒤에 말이죠. 먼저 소설에 대한 감상을 간단하게 말해 본다면, 이 소설 정말 압도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야기에 심취하게 하더니 끝까지 몰입도를 유지시켰습니다. 19세기, 석유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포경 산업이 점점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시기의 이야기가 이다지도 저를 빠지게 만들 줄 몰랐네요. 고래잡이 배가 배경이라 얼른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정말로 그 시기 고래 잡이의 아주 생생한 현장을 보여줍니다. 작품을 위해 정말 많이 자료 조사를 했다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작가의 고향을 보니 어느 정도 납득할 것 같더군요. 고향이 다름아닌 '헐(hull)'이었거든요. 근대 때부터 영국 포경 기지의 중심으로 포경에 있어선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곳이기도 하니까요. 고향과 고향 사람의 이야기인지라, 항구나 배의 묘사도, 선원에 대한 묘사도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합니다. 이런 생생한 리얼리티가 몰입도 높은 이야기와 만나니 끝가지 소설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울 수밖에요.



 그럼, 이야기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볼까요?

 소설은 두 인물의 등장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는 잔인한 성격이자 소아성애자인 작살꾼 드렉스, 또 하나는 인도에서 군의관으로 있었으나 세포이 항쟁 이후 알 수 없는 이유(여기에 대해선 소설 초반에 밝혀집니다만)로 지금은 영국에 와 왔는 섬너. 처음에는 전혀 접점이 없었던 두 사람은 곧 한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볼런티어 호'라는 포경선이죠. 선주 벡스터의 유혹에 섬너는 '볼런티어 호'에 오르는 것이 세포이 항쟁 당시 큰 상처를 받은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시간으로 생각하지만 곧 이 여행의 목적이 단순히 포경에 있지 않다는 게 드러납니다. 사실 '볼런티어 호'에는 선주 벡스터와 선장 브라운리 그리고 소수의 선원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 목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볼런티어 호'의 고의 침몰. 날로 사양 산업이 되고 있는 포경업에서 더이상 이익을 얻을 게 없으니 배를 일부러 침몰시켜 막대한 보험금을 편취할 계획이었죠. 그러나 이 계획이 아니더라도 섬너가 얼마나 위험한 항해에 참여했는지는 곧 드러납니다. 그가 다소 낭만적으로 생각했던 포경이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죠. 북쪽 바다는 그야말로 조금만 발을 잘못 디딛어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것과 똑같은 곳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야만과 위험으로 가득한 곳. 이성과 그것의 산물인 문명은 그야말로 바다의 거친 파도에 깨끗하게 실려가 버린 곳이었죠. 대화 보다는 폭력이, 사랑 보다는 증오와 죽음이 더 횡행하는 그 곳에서 섬너는 유일하게 문명의 대표자로 남습니다.


 바로 그것을 가늠하는 시험대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게 되죠.

 소년 사환 하나가 목이 졸려 살해된 채 발견된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남색가로 밝혀진 한 선원이 곧 범인으로 잡히는데, 섬너만이 유일하게 객관적이며 물리적인 증거로 그가 범인이 아니라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밝혀내지요. 바로 그 범인이,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히지 않겠습니다만), 섬너와 완전히 반대되는 인물로 무조건 감정이 시키는대로만 하는 완벽한 야만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렇게 작품은 이 소설의 진짜 테마가 다름아닌 문명과 야만의 관계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문명과 야만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차이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이죠.


 이 질문에 대하여 섬너가 우연히 배에서 기르게 되는 곰이 주요한 상징으로 쓰입니다.

 그 곰은 우리에 갇혀 섬너가 주는 먹이를 먹고 사는데, 처음엔 약하고 온순했던 이 곰이 항해가 계속 될수록 자신의 야성을 드러냅니다. 그러다 '볼런티어 호'가 계획대로 침몰되고 섬너를 비롯하여 배의 선원 모두가 더이상 문명의 보호를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곰은 야생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이런 과정을 보면 이 곰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번 항해를 통해 섬너가 꾹꾹 누르고 싶었던 자기 내면 속 야성이라는 것을 요. 다시 말해 곰은 섬너가 가진 야만의 상징이었던 겁니다.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재밌기에 가급적 읽었을 때의 재미를 빼앗지 않기 위해서 핵심적인 사항들을 많이 숨기느라 잘 말하지 못했습니다만 '얼어붙은 바다'는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가 더 많이 폭발하는 작품입니다. 그만큼 섬너가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는 문명과 야만의 경계 역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지요. 그러는 가운데 독자는 저절로 문명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힘겹게 유지되고 있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떠올려보게 됩니다.


 아직 올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앞으로 읽게 될 소설들이 참 많이 있을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얼어붙은 바다'는 올해 가장 인상 깊은 작품으로 만날 것이라고. 마치 선혈이 낭자한 생고기를 입에 넣는 것 같은 날 것의 이야기를 만나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요. 이언 맥과이어의 다른 소설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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