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패리시 부인 미드나잇 스릴러
리브 콘스탄틴 지음, 박지선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리브 콘스탄틴의 '마지막 패리시 부인'을 읽었습니다.

 리브 콘스탄틴은 원래 필명으로 실은 린 콘스탄틴과 발레리 콘스탄틴 자매가 함께 썼다고 하네요. 얼른 사촌이 함께 썼던 '엘러리 퀸'이 생각납니다. 이야기가 워낙 재밌고 구성도 탄탄하기에 기성 작가인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데뷔작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인 할머니가 들려준 옛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썼다고 하네요. 하지만 읽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이와 비슷한 몇 작품이 머리에 떠오르게 됩니다. 한 번 열거해 볼까요? 아이라 레빈의 '죽기 전의 키스', 아가사 크리스티의 '끝없는 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많은 리플리씨' 등. 그 중 가장 많은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아이라 레빈의 것입니다. 레빈이 23세 때 썼던 이 작품은 '버드 콜리스'란 남자가 주인공 입니다. 가진 게 쥐뿔도 없는데 야심은 너무 큰 이 남자는 소시오패스이기도 해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는 대학 때 우연히 만나 도로시란 여자가 구리 재벌로 유명한 사업가 킹쉽의 딸인 것을 알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아 혼인을 통해 신분 상승을 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쪽으로 머리 회전이 빠른 그는 계획대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제 결혼한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그만 도로시가 임신을 하고 맙니다. 혼전 임신은 엄격한 청교도인 킹쉽이 결코 용서하지 않아서 도로시와 결혼해도 원하는 돈을 전혀 얻지 못하리라 생각한 콜리스는 도로시를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합니다. 그리고 바로 둘째 언니 엘렌을 유혹할 계획을 세우죠. 이처럼 콜리스에겐 모든 인간적인 감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만 신경쓰는 야수일 뿐입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것을 빼앗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남자는 자신을 포식자로 여기니 야수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나 싶습니다.


 '마지막 패리시 부인'의 주연 중 하나인 '앰버'도 이와 같습니다. 주연 중 하나라고 말한 것은, 모두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이 각 부마다 화자를 달리하여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이 소설의 주연은 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1부의 화자, '앰버'이고 다른 화자는 2부의 화자, '대프니'입니다. 3부는 1인칭 주관적인 시점으로 전개되던 1부, 2부와 다르게 3인칭 객관적인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3부는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최종장이라 그렇게 설정한 것 같네요. 아무튼 앰버와 대프니는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입니다. 앰버는 가진 것이 오로지 몸밖에 없는 존재인 반면, 대프니는 아름다운 미모에  엄청난 재산, 거기다 잘생기고 능력 좋은 남편을 비롯 귀여운 두 딸까지,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존재이죠. 앰버에게 있어 대프니는 거의 아무리 손을 뻗쳐도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밤하늘의 별과 같습니다. 하지만 앰버는 그 별에 닿고자 합니다. 거기 있어야 할 사람은 대프니가 아니라 자신이라고 여기니까요. 앰버는 그 자리로 가기 위해 일단 대프니부터 공략하기로 합니다. 콜리스가 도로시부터 공략했던 것처럼 말이죠.



 대프니는 예전에 '낭포성 섬유증'이란 병으로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습니다. 그 때 겪은 상실감이 하도 커서 지금도 여동생의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지금의 남편 잭슨과 결혼하게 된 것 결정적인 계기도 여동생과의 이별 때문이었죠. 앰버는 바로 그런 대프니의 상실감을 공략해 들어갑니다. 자기에게도 대프니와 똑같이 낭포성 섬유증이란 병으로 잃어버린 여동생이 있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것을 시작으로 앰버는 대프니의 마음을 차례 차례 얻어갑니다. 사전에 대프니의 취향이나 가치관등 많은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종종 방해되는 인물도 나타나지만 그 때마다 술수와 거짓말로 능수능란하게 넘겨 버립니다. 그리고 드디어 잭슨과 단 둘이 있게 될 기회를 얻습니다. 1부는 그런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줍니다. 앰버라는 캐릭터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더욱 읽는 이의 기분을 쫄깃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더욱 쫄깃하게 만드는 전개가 펼쳐집니다. 바로 2부, '대프니' 입니다. 대프니의 입장에서 전개되는 이 이야기에서 많은 반전들이 펼쳐지기 때문이죠.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 없는 게 유감이네요. 그래서 갑작스럽지만 이렇게만 말하겠습니다. 끝까지 계속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고. 거기다 결말 또한 시원, 상쾌하다고. 그 통쾌함 때문에 저는 이 글의 제목을 하마터면 '악인이여, 지옥행 특급 열차를 타라!'라고 적을 뻔 했습니다.


 '마지막 패리시 부인'은 결핍과 질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비단 앰버에게만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으로 보이는 대프니와 그녀의 남편 잭슨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결핍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만족에는 절대 평가가 없기 때문이죠. 오로지 상대 평가 입니다. 자신의 만족은 어디까지나 타인과 비교해 우월해야만 이뤄지니까요. 아무리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있더라도 자기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 만족감이 덜하거나 사라지는 게 사람입니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결정되기에 인간은 늘 결핍을 느낍니다. 세상엔 자기보다 잘나고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즐비하기 마련이니까요. '엄친아'란 말이 존재하듯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있듯 질투도 늘 그림자처럼 달고 살게 됩니다.

 결핍과 질투는 사이좋은 연인처럼 꼭 붙어 다니는 한 쌍과도 같습니다. 사실 결핍이 없으면 질투할 것도 없겠죠. 때로 이것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의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다잡아,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매진하게 만드니까요. 그러나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없습니다. 결핍과 질투 또한 양날의 검이죠.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죠. 현재의 자신을 늘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높은 곳에 오르고 가진 것이 많아져도 만족할 줄 모르게 됩니다. '지존무상'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말이죠. 아니, 그런 자리에 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한 바 있지요.


 "우리는 나폴레옹을 부러워한다. 그는 세계 최고의 권력자였다는 점에서 부러움을 산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알렉산더 대왕을 부러워했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은 '실존 인물'이 아니었던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다."


이처럼 결핍과 질투엔 끝이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씻기지 않는 갈증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을 잘 알죠.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도 막상 갖고 보면 얼마안가 그 뿌듯함이 쉽게 사라져 버리는 것을 살면서 몇 번이나 경험했으니까요. 갈증의 끝에 허망함이 있다는 거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결핍과 질투의 끝없은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런 의문을 당신도 가지고 있다면 이 소설을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소설 속 인물 하나가 그것을 넌지시 알려주니까요.


 각설하고, 이 자매 작가 꽤나 재밌는 구석이 있습니다.

소설의 전개를 예측할 수 있는 단서를 이곳저곳에 미리 던져 놓았어요. 마치 동화 '헨젤과 그레텔'에서 헨젤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숲길에 조금씩 빵조각을 흘린 것처럼 말이죠. 일단 제목의 '패리시 부인'에서 '패리시'가 그러합니다. 제목의 패리시는 철자가 'PARRISH'이지만 이와 같은 발음이 나는 'PERISH'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이 참 재밌습니다. '몹시 괴롭히다', '멸망하다'란 뜻이거든요. 분명 이 'PERISH'란 단어 때문에 '패리시'란 이름을 썼을 것 같아요. 소설을 읽어보면 '패리시'가 단순한 이름만이 아닌, 중의적인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으니까요. 주연의 이름 또한 재밌습니다. '앰버'는 얼른  'AMBITIOUS'의 야심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선 아이가 유괴 되었을 때 전국적으로 경보를 내는데, 그것을 바로 '앰버 경고'라고 하죠. 그런 의미에서 '경고'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앰버'란 이름은 그 존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죠. '대프니'란 이름 또한 흥미롭습니다. 저는 '마지막 패리시 부인'이 영향 받았을 작품이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영화로도 만든 바 있는 '레베카'란 소설 말입니다. 그 소설의 작가가 바로 '대프니 듀 모리에'였죠. 아마도 소설 속 '대프니'란 이름은 바로 그 작가 이름을 따온 것 같습니다. 소설 '레베카'에서 레베카는 주인공이 생각했던 존재가 전혀 아니었다는 게 밝혀지거든요. 그처럼 '대프니 패리시'도 앰버가 생각하던 인물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말이죠.


 이런 것을 보노라면 이 자매가 소설의 디테일을 무척 공들여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소설의 재미를 더욱 돋궈주는군요. 앞에서 열거한 '죽기 전의 키스', '끝없는 밤' 그리고 '재능 많은 리플리씨'를 좋아하신다면 이 소설도 만나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어쩌면 자신의 결핍과 질투를 달리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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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9 20: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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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0 19: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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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0 2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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