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쉬왕의 딸
카렌 디온느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이런 상상, 한 번 해 봅니다. 지옥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지옥을 정상적인 세계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지옥에서 갑자기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된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될까요? 과거를 모조리 잊고 새로운 삶을 마냥 껴안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새롭게 가지게 된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자신이라 여기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특정한 정체성을 가집니다. 대표적으로 성별이 그러하죠. 국적이나 지역,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살아가면서 형성하는 정체성도 있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이런저런 지위를 갖거나 경험을 하게 마련이고 거기에 따라 만들어지는 특별한 가치관과 신념도 갖게 됩니다. 이것도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지요. 태어날 때 가지게 된 정체성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지게 된 것이지만 살면서 만드는 정체성은 자신의 의지로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정체성이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까요? 타고난 정체성일까요? 아니면 스스로 형성한 정체성일까요? 혹시 살면서 이런 의문 가져본 적 없으신가요? 그러셨다면 지금 말하고자 하는 이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으실 겁니다.

 미국 작가 카렌 디온느의 소설, '마쉬왕의 딸'은 흥미롭게도 이런 질문을 전면으로 다루고 있으니까요.




 먼저 제목인 '마쉬왕의 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마쉬왕의 딸'은 서양의 유명한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입니다. 줄거리는 대강 이러합니다. 이집트 공주가 하루는 백조로 변하는 깃털 옷을 입고 늪지대에 놀러왔다가 그만 늪을 다스리는 마쉬왕에게 납치됩니다. 그 후, 공주가 늪 아래로 끌려간 자리에 꽃봉오리 하나가 자라납니다. 그 꽃봉오리 아래엔 여자 아기가 잠들어 있습니다. 이 아기가 바로 '마쉬왕의 딸'인 것이죠. 이 아이가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그것을 본 황새는 근처 바이킹 왕비가 자식이 없어 슬퍼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거기에 갖다 줍니다. 아이는 바이킹 왕 부부에서 자라납니다. 그런데 이 아이 평범하지 않습니다. 태양이 비치는 낮에는 더없이 아름다운 사람인데, 밤만되면 개구리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닙니다. 고운 사람의 모습일 때는 성격이 그야말로 악하며 난폭하기 그지 없고 개구리일 때는 한없이 온순하고 착한 것입니다. 마치 외면과 내면이 작정하고 서로 반대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랑스러운 외모는 전혀 사랑할 수 없는 성격을 가졌고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외모는 사랑을 주기에 아깝지 않은 성격을 가졌습니다. 밤낮으로 변하는 정체성의 경계 위에서 이 아이는 과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그 과정과 대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동화 '마쉬왕의 딸'의 주된 줄거리입니다. '마쉬왕의 딸'은 한 마디로 혼종된 정체성의 소유자입니다.


 

삽화는 마쉬왕에게 끌려가는 이집트 공주를 그린 것입니다.


 카렌 디온느의 소설 주인공 헬레나 역시 그야말로 '마쉬왕의 딸'입니다.

 자신의 어머니가 십대 때 아버지에게 늪지대로 유괴되었고 자신은 그 유괴범 아버지와 피해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니까요. 그녀는 12살이 되어 거기서 빠져나올 때까지 그런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늪지대의 오두막을 세상의 전부라 여겼습니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사랑했고 그에게 인정받으려 애썼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말이 그에겐 진리였고 그가 가르쳐 주는 것은 뭐든지 의심하지 않고 쏙쏙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사냥하는 법과 야생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만큼 헬레나에게 있어 그 세계는 지극히 정상이었습니다. 물론 바깥 사람들에겐 오로지 비정상이었겠지만 말이죠. 그러다 동화 속 '신부'와 같은 자가 나타나 아버지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어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정상으로 알고 있던 모든 것을 비정상이라 말하는 세계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타고난 정체성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이 입혀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마치 스위치를 켜고 끄듯 내재된 정체성을 쉽게 바꾸지 못합니다. 문득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던 늪지대의 삶이 그립고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현재 헬레나는 결혼하여 두 딸까지 있는 가정을 이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쉬 지워지진 않습니다. 때로 그리움이 사무치면 2 주일 정도 야생으로 홀로 가서 지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헬레나는 타고난 정체성을 버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새로 입게된 정체성에 완전히 동화하지도 못한 채 다소 어정쩡한 상태로 있습니다. 그녀는 한 마디로 경계선 상의 존재입니다. 동화 속 '마쉬왕'의 딸과 같습니다. 밤낮으로 변하는 외면과 그 외면과 상반되는 내면 속에서 커다란 갈등을 겪는 동화 속 '마쉬왕의 딸' 그대로 헬레나 역시 어디에도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으니까요. 혼종된 정체성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더이상 그런 상태를 용납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태가 닥쳐옵니다. 자신이 탈출할 때 체포된 아버지가 간수를 죽이고 감옥에서 탈출한 것입니다. 헬레나는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확신합니다. 아버지가 다가온다는 것은 과거가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서서히 조여오는 과거 앞에서 헬레나는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물려준 정체성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스스로 형성한 정체성을 선택할 것인가? '마쉬왕의 딸'은 이런 심리적인 갈등이 생생하게 재현된 드라마입니다. 그 생생함의 정도를 아버지와 같이 살던 과거와 홀로 삶을 꾸리고 있는 현재로 이야기를 서로 교차하며 전개시키는 것으로 한껏 높이고 있죠. 상이한 정체성 사이의 갈등이란 테마로 읽으면 정말 재밌게 즐길 수 있는 작품입니다.


 

 또한 이 작품은 시의적절한 면이 있습니다.

 지금의 세계란 얼른 미국의 트럼프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타고난 정체성을 한없이 강조하는 시대이니까요. 타고난 정체성에 관대했던 유럽 연합조차 시리아 난민 사태를 맞아 다시금 타고난 정체성에 집착하며 영국 민중은 아예 '브렉시트'를 감행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혈통과 국적 그리고 성별의 원본을 중시하고 그것을 가지고 차별의 근거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자꾸만 뚜렷해지는 시대에 이 소설이 던지는 '타고난 '원본'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해?'라는 화두는 놀랍습니다. 그렇게 반문하면서도 '타고난 정체성'에서 쉽게 자유롭게 될 수 없다는 점 또한 충실히 재현하고 있어 작가가 작품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더욱 설득력있게 들려왔구요. 오늘의 시대 흐름과 관련하여 그저 스릴러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작품입니다.


 특히나 페미니즘과 관련해선 더욱 그렇습니다. 헬레나의 과거 세계는 그야말로 아버지가 중심이었습니다. 모든 사물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삶의 방식 전부를 오로지 아버지 혼자 결정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일은 사실 신이 한다고 여겨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그 아버지란 지금 가부장제를 떠받치고 있는 기독교처럼 남성중심문화의 상징으로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 그것이 여성 자신의 주체성을 자각하는 것으로 실현된다는 것에서 이 소설을 페미니즘으로 읽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여기서 그려지는 여성의 모습이 남성중심문화가 마녀로 치부하여 배제하려 했던 모습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네요.


 생각해 보면, 동화 '마쉬왕의 딸'은 무엇보다 같은 작가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와 대비되는 작품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타고난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쉬왕의 딸'은 살면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실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하고 있지요. 같은 작가가 쓴 이 두 동화는 그래서 모순의 관계에 있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1843년, 그러니까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이 전체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한창 민족주의를 형성해 가던 무렵에 나왔습니다. 시대의 흐름은 타고난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었고 '미운 오리 새끼'는 그것을 투명하게 반영한 것이지요. '마쉬왕의 딸은 그보다 15년 후인 1858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아마도 '마쉬왕의 딸'이 '미운 오리 새끼'와 완전 다른 얘기가 된 것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바로 1848년에 파리에서 일어난 2월 혁명 입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잘 분석했듯이 계급 투쟁이었습니다. 민족주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국가 내부의 문제가 그로 인해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2월 혁명을 통해 사람들은 한 나라 안에도 계급이란 분열의 지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타고난 정체성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따라 그 상황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마쉬왕의 딸'은 그것을 투명하게 반영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 육체가 상이한 정체성으로 분열되어 있고 각 자의 모습이 이전과 전혀 다르게 보인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후자의 외면과 내면의 상반은 2월 혁명 이후 지식인들이 주목하게 된 '이데올로기'를 형상화 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이데올로기는 보이는 외면과 그 안에 깃든 내면이 실은 아주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것이었죠.


 

 이 소설은 그러한 '마쉬왕의 딸'이 가진 의미에 집중하고 그것을 스릴러로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 텍스트 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작가의 역량이 심상치 않음을 느낍니다. 그런 역량이 다음 작품에서 어떻게 또 발현될 지 기대 되네요. 차기작을 얼른 만나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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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2-07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느끼는 거지만 헤르메스님의 리뷰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너무 잘 쓰셔서 내가 직접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보다 이 분 글을 보는 쪽이 훨씬 남는 게 많겠다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는 거예요......

양철나무꾼 2017-12-08 18:0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늘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말로 어찌표현해야 좋을지 몰랐거든요.
이런 글을 쓰는 분도, 이런 댓글을 달아주시는 분도 완전 멋지십니다~^^

ICE-9 2017-12-09 19:51   좋아요 0 | URL
아니, 이렇게나 과분한 칭찬의 댓글을 받다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syo님, 양철나무꾼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제 주말을 정말 행복하게 만들어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