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중력의 사람들
발레리아 루이셀리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무릇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무게를 지닌다. 무게는 중력의 반향이다. 존재는 중력의 자장 안에서 실존을 이룬다. 유령은 둥둥 떠다닌다. 그들에겐 무게가 없다. 중력의 자장을 벗어나 있다. 유령은 무중력의 존재다. 실수가 아닌 허수의 존재다. 실용주의에 물든 우리들은 실존이 아닌 이런 존재들에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유령은 그저 우리에게 불안과 공포만 가져다 줄 뿐, 실제 사는 데는 아무 도움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죽음을 인식시키고 영원히 살 것만 같은 우리들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으며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 엄연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때문이다. 근대의 역사란 죽음을 생활에서 몰아내는 역사였다. 중세엔 묘지들이 마을의 중심인 교회 옆에 있었지만, 근대가 되면서 죽음을 연상시키는 묘지들은 쉽게 찾아갈 수 없는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공동묘지가 그렇듯이. 중세는 '메멘토 모리'가 유행어였고 삶은 죽음을 통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이었지만, 근대 이후 죽음은 오로지 피해야만 할 것이 되었고 느닷없는 종결로 황망한 아픔만 가져다 줄 뿐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죽음의 잔영인 유령도 그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햄릿의 유령과 7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괴담인 아미타빌의 유령은 얼마나 다른가? 아미타빌 유령은 오직 선별과 배쳑을 통해 형성된 근대 생활 방식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햄릿의 유령은 체제가 은폐한 진실을 알려주는 진실의 목소리였으나 아미타빌의 유령은 그저 충격과 공포만 있는 괴물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다시금 햄릿의 유령으로 돌아가려는 작품이 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가장 독창적이고 지적이며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평가받는 멕시코 여성 작가 발레리아 루이셀리가 처음으로 쓴 장편, '무중력의 사람들'이다. 마치 작가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여성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편집자다. 그녀가 다니는 출판사는 아주 영세한 규모로 잘 알려지지 않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를 발굴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한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매일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케케묵은 먼지 가득한 장서들을 뒤진다. 망각이라는 지층 저 아래 묻혀버린 작가라는 존재들 사이를 떠돌아다닌다는 점에서 그녀에게 도서관이란 묘지나 다름없다. 그는 늘 덧없이 사라져간 삶들과 가까이 있고 때문에 유령은 친숙한 존재다. 아니, 그녀 스스로 죽음을 바라고 있다. 아무런 삶의 무게를 느낄 수 없는 그녀에게 자신의 실존이란 그저 뜻없이 배회하고 있는 유령인 것만 같아서 차라리 이럴거면 완전한 종지부를 찍고 싶은 것이다. 그녀가 멕시코 태생의 무명 시인 오웬이 살았다는 건물 옥상에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죽은 나무'에 마음이 꽂혀서는 몰래 집으로 가져오기까지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그녀의 염원을 나타낸다. 그녀는 어느 날 자신의 상사 화이트에게서 시인 에즈라 파운드 일화를 듣는다. 지하철에서 얼마 전 죽은 친구의 유령을 우연히 보게 된 그는 별안간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삶의 절대적인 허무를 절감하는데, 그렇게 자기 발 밑으로 벌어진 공허의 싱크홀 위에서 그는 거기로 빠지지 않기 위해 시를 쓰는 것으로 버틴다. 바로 그것이 그녀에게 영감을 주어, 썰물의 해변에 서 있는 것과도 같이 발 아래로 쓸려가는 모래처럼 차츰 붕괴되어가는 자신의 삶을 글쓰기로 지탱할 생각을 한다. 그녀는 오웬이란 유령에 대해 쓰고 그것이 자기 삶에 남긴 여파를 기록한다. 그 과정의 채록이 바로 '무중력의 사람들' 전체 이야기다. 유령이 저 바깥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령이 중심이고 삶이 그것을 기점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그렇지만 이 소설은 우리에게 익숙한 스타일로 전개되지 않는다. 일관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며 많고도 얼른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이야기로 산포된다. 주인공의 실제 삶과 허구의 이야기가 경계없이 뒤섞이며 주인공의 실제 경험 또한 과연 진실인지 아니면 꾸며낸 것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어느 것이 실제이고 어느 것이 허구인지 가늠하는 기준은 작중 인물이 실존의 무게를 지닐 때다. 작가는 독자에게 그 무게를 느끼게 하기 위해 등장인물이 우리처럼 땅을 단단히 발로 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여러 설정을 한다. 개인의 역사를 만들고 땀내가 느껴질만큼 그의 일상을 세부적으로 형성한다. 이 소설엔 그런 게 느슨하거나 아예 없다. 뚜렷한 상황 설명 없이 그저 목소리로만 남아 다른 이야기 중간에 삽입된다. 마치 유령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출현하는 것처럼. 실존을 이루는 배경은 점점 사라지고 우리는 어느새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목소리만이 전부인 세계에 처하게 된다. 유령들의 영토로.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유배인 것은 아니다. 주인공이 글쓰기를 통해 그런 세상을 창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란 주체가 되는 행위이다. 삶 속에서 우리의 주체란 온전히 우리가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규격으로 만들어 놓은 주체란 옷에 우리의 몸을 억지로 끼워맞추는 것에 불과하다. 일상에서 느끼는 우리의 답답함과 목마름은 바로 거기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은 아니라는 것에서 말이다. 그런데 글쓰기는 온전한 나로 있게 한다. 남이 규정한 내가 아닌, 나 스스로 고유한 나를 정립하는 여정이 된다. 그래서 소설에서 글을 통해 창조된 유령들의 대지는 비로소 그녀가 진정한 주체로 주권자가 되는 국가라고 해야 하리라. 중력이라는 외부가 부여한 실존이 아니라, 자신이 실존을 부여하며 그로 인해 의미와 진리가 형성되는 게토. 소설의 세계는 그렇게 일변한다. 이를 통해 발레리아 루이셀리는 햄릿의 유령처럼 유령이 불안과 공포의 징후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재단하고 규정하는 체제가 숨긴 진실을 드러내고 그것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만드는 새로운 목소리로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충실히 재현한다. 허구가 그저 무용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 숨결이 되고 진짜 자신이 될 수 있는 거름이라는 것을 말이다. 문득 우리가 소설을 즐겨 읽게 되는 것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단순히 이야기가 주는 재미의 탐닉이 아니라 유령과 허구에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고 있기에.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허구의 이야기가 쾌락의 대상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산에 오를 때마다 실존의 잔영이지만 온전히 내 것은 아닌 메아리를 만들고 듣는 것을 즐겨하는 것과도 같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