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팩스 부인과 여덟 개의 여권 스토리콜렉터 55
도로시 길먼 지음, 송섬별 옮김 / 북로드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미국 뉴저지 출신으로 현재는 코지 미스터리계 대모로 평가받는 도로시 길먼의 대표 시리즈인 '폴리팩스 부인'을 이제서야 읽어 보았다. 시리즈 첫 작품은 아니고 이번에 나온 세 번째 작품이다. 제목은 '폴리팩스 부인과 여덟개의 여권'. 도로시 길먼은 43세부터 77세까지 무려 35년 동안 14권의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를 썼다. 이혼으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그녀가 자신의 인생이 점점 쓸모없어지는 것 같아서 그러지 않으려고 뭔가 자기 삶에 대한 응원 같은 것으로 쓴 이 시리즈는 작가만큼이나 남편과 사별한 뒤 자식도 다 떠나보내고 홀로 쓸쓸하게 노년을 보내던 할머니가 뜻하지 않게 CIA의 스파이로 활약하며 인생의 전성기를 보낸다는 이야기다. 뭐랄까? 비유하자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과 이언 플레밍의 '007'의 콜라보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존 르 카레 식의 어두운 스파이 물을 좋아해서 코지 미스터리 분위기의 스파이라고 하니 그닥 끌리지 않았고 거기다 할머니가 스파이로 활약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나 싶어서 엄청 유명한 시리즈인 줄은 알지만 스킵해버렸는데 견물생심이라고 세 번째 작품까지 나온 것을 보니 도대체 어떤 작품이기에 발간된 지 몇 십년이 지난(이번에 나온 폴리팩스 부인과 여덟 개의 여권이 출간된 연도는 세상에 1971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계속 나오는가 문득 궁금해져 속는 셈 치고 읽어버렸다.


 그런데 왠걸... 꽤 재밌었다. 선우용녀에 빙의라도 된 듯 '뭐야 뭐야' 하면서 이야기에 거침없이 빠져들어 갔다. 폴리팩스 부인은 멕시코와 이스탄불에서의 스파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현재는 원래 사는 곳인 뉴브런스윅(이곳은 저자의 고향이기도 하다.)에서 스파이가 되기 전에 자신의 주력 분야였던 원예에 충실하고 있다. 현재 그녀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프로젝트는 손가락선인방의 꽃을 밤에 피우는 것. 소설은 그것의 성공과 함께 시작한다. 폴리팩스가 성공의 기쁨에 젖어있을 무렵, CIA의 카스테어스와 비숍은 불가리아에 파견되었던 정보원 쉽코프에게서 이상한 정황을 보고 받는다. 누군가 불가리아에서 비밀리에 정탐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쉽코프에게 다가와 그가 지금 불가리아 비밀경찰(이 때 불가리아는 사회주의 국가였다.)에 노출되었으니 이러이러한 경로로 빠져나가라고 하면서 만일 무사히 미국까지 가게 되거든 자신의 동료들이 불가리아를 탈출할 수 있도록 여권 여덟 개를 만들어 갖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 반신반의했던 쉽코프는 집에 갔다가 비밀경찰들이 있는 것을 보고 한번 더 속는셈 치고 그가 말해준 경로로 찾아간다. 그런데 정말 불가리아를 무사히 빠져나왔던 것이다. 그 사실을 들은 카스테어스와 비숍은 불가리아의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것에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거기 있는 쉽코프를 도와준 이들과의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여덟 개의 여권을 갖다주려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과연 누구에게 그 일을 맡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일이 잘못되면 불가리아와 미국과의 관계가 완전히 경색될 수도 있다. 되도록 정보원 티가 나지 않는 인물이 필요하다. 결국 카스테어스는 비숍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폴리팩스에게 다시 한 번 일을 맡긴다. 여덟 개의 여권을 그것을 위해 특별하게 제작한 모자에 숨겨 불가리아에 갖다 주도록.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 있는 릴라 호텔. 폴리팩스 부인이 묵게 되는 바로 그 호텔이다. 실제 있는 곳이다.

 혹시 여기 가게 되신다면 폴리팩스 부인을 생각하며 한 번 묵어보시길...


 처음엔 그렇게 단순한 임무였다. 그래서 카스테어스도 폴리 팩스 부인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 다 그렇듯 카스테어스의 예측 대로 흐르지 않는다. 불가리아로 가기 위해 바꿔 탈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던 베오그란데 공항에서 일은 터졌다. 폴리 팩스 부인은 거기서 우연히 배낭 여행 중이던 일단의 미국인 청년들을 만났는데, 절대 불가리아로 가지 않겠다던 필립이란 청년이 불가리아에 왔고 그만 간첩 혐의로 비밀경찰에 체포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필립과 같이 있던 데비란 아가씨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폴리팩스 부인은 자신의 임무와는 별개로 누구도 관심 가지지 않는 필립의 고초를 자기라도 나서서 해결해주려 한다. 그런데 그 일이 그만 불가리아의 비밀경찰까지 얽혀서는 폴리팩스 부인이 상상한 것 이상의 재난을 가져 온다. 무려 세 번이나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는 것도 모자라 끝내 불가리아 역사상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했다는 감옥까지 잠입하도록 만든다. 바야흐로 카스테어스와 비숍은 다시 한 번 속쓰림을 달랠 위장약을 연거푸 들이켜야 할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속표지의 모습이다. 소설에 나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표지에 신경을 많이 썼다. 전작을 못봐서 전작도 이런 표지인지 모르겠다. 이런 표지라면 다 소장하고 싶다.(나는 의외로 이런 외관에 약하다. 으음...) 아무래도 작품의 연식이 연식인지라 장르소설의 빈티지적 취향을 자극하는데(옛날 장르소설을 즐겨 읽으시는 분들이라면 이 느낌을 아실듯), 그런 작품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지 표지도 거기에 맞춰 빈티지스럽다. 마음에 든다.


 처음엔 폴리팩스 부인이 받은 미션이 별 것 아니라서 '할머니 스파이가 다 그렇지 뭐' 하고 흥미가 한풀 꺾였었는데(그래도 내처 읽었던 것은 폴리팩스 부인과 그녀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을 가지고 있는 카스테어스와 비숍이 빚어내는 케미 때문이었다. 분명 폴리팩스 부인의 상관인 그들이 폴리팩스 부인이 엄마, 그들이 자식으로 유사 모자 관계를 보여주어 흥미로웠다. 이런 것이 전반부터 느껴질 정도로 소설의 캐릭터 형성이 참 좋다. 특히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폴리팩스 부인과 동행하게 되는 데비와 정체불명의 불가리아 협력자 찬코의 캐릭터 묘사가 뛰어나다. 데비가 자신도 언젠가 폴리팩스 부인이 찬코에게 받았던 것처럼 남자에게서 그런 시선을 받고 싶다고 고백할 정도로 폴리팩스 부인과 찬코가 나누는 우정은 소설에서 가장 감미로운 부분 중 하나다.) 불가리아에 도착하고 나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지라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결말이 날까 궁금하여 증기기관차 화로에 석탄을 마구 던져넣듯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냥 푹 빠져서 재미만을 추구한다면 분명 만족스런 독서가 될만한 작품이다. 왜 이 시리즈가 인기 있는지 제대로 체감했다고나 할까.


 소설에서 폴리팩스 부인과 데비가 지나쳐 갔던 시프카 패스(Shipka Pass). 아시다시피 불가리아는 1396년부터 1878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876년 4월, 불가리아인들은 수백년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봉기를 일으켰다. 이것에 대해 터키인들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응답했는데 결국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학살당했다. 시프카 패스는 그 때 가장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학살당한 장소로 이름 높다. 무려 2만 8천명의 사람이 터키인들에게 무참히 도륙되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8명에 불과했다. 불가리아는 자신의 가장 아픈 역사를 이렇게 기념하고 있다. 폴리팩스 부인은 이곳을 지나가며 그런 사정을 데비에게 설명한다. 이런 역사는 나중에 필립의 비극과 오버랩 되면서 묘한 반향을 일으킨다. 과거의 피해자가 현재의 가해자가 되는 이러한 아이러니는 어떠한 연유로 생겨나는 것인가 하고.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내게는 이 이야기가 깊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최근에 일어난 한 비극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바로 북한에서 1년 넘게 억류되어 있다가 혼수상태로 미국에 송환되자마자 사망한 웜비어 말이다. 그는 여러모로 소설 속에서 간첩 혐의로 불가리아 비밀경찰에게 억류당하는 필립과 비슷하다. 일단 나이가 그렇고 풀려나자마자 심장마비로 죽는다는 점에서도 그렇다.(물론 여기엔 불가리아 비밀경찰을 장악한 이그나토프의 음모가 서려있다. 명확하게 혼수상태와 사인이 판명나지 않는 웜비어에게도 어떤 음모가 깃들어있는지 모를 일이다.) 무려 56년 전의 소설에 바로 오늘날 일어난 이야기가 들어 있으니 놀랍기도 하고 소설 속 세계와 현실 세계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한 편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똑같은 비극이 여전히 계속되는 것을 보면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에 깊은 회의가 든다. 사실 폴리팩스 부인이 필립의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미국 대사관을 비롯하여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필립의 생사와 안전에 대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때 박근혜 정부와 언론이 그러했듯이. 만일 폴리팩스 부인마저 모르쇠했다면 필립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최후를 맞았을 것이며 그 죽음을 통해 권력을 영원히 쥐려고 했던 이는 자기 소망을 이루었을 것이다. 어쩌면 무모하고 누군가에겐 귀찮기만한 그녀의 관심이었지만 그 하나가 많은 이들에게 삶의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주고 불가리아 또한 올바르게 통치할 계기를 마련해준 것을 보면 진정한 역사의 발전이란 이렇게 비록 우리처럼 작은 자라 하더라도 그 어떤 약자에게 닥친 비극도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바로 나의 일인 것처럼 관심을 갖고 실제 뭔가 실행하는 자들 덕분에 이뤄지는 것 같다.

 뭐, 이런 거창한 이야기는 사족에 불과하다. 캐릭터의 매력과 재미만으로도 책의 가치는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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