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만화가 오쿠 히로야가 2000년부터 무려 14년에 걸쳐 연재한 ‘간츠’는 현재 일본 SF 만화의 대표작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 ‘간츠’를 나는 우리나라에 단행본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읽어왔으니 나름 오래된 팬이라 할 만한데 그건 무엇보다 화려한 작화에 압도당한 게 컸다. 당시는 만화를 CG로 그리는 것이 아직 자리잡지 않았을 때였는데 오쿠 히로야는 아주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어 놀라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작가 자신이 워낙 영화 팬이라 그런지 만화의 페이지마다 영화적인 연출로 가득했던 것도 인상 깊었다. 이야기는 죽은 자들이 낯선 장소로 호출되고 거기에 있는 구체의 지시에 따라 특정 장소로 강제 전송 되어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성인’이라 부르는 존재와 싸운다(고 쓰고 ‘서바이벌 게임’이라 읽는다.)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독특하고, 또 어떻게 보면 뻔하게 보이는 설정의 단순한 구성이지만 슈트와 메카 그리고 병기의 묘사가 굉장히 뛰어나고 성인과의 전투가 정지 화면의 나열임에도 불구하고 역동적인데다 박력이 넘쳐 뒷 이야기를 기다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런 장면들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을 보고싶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간츠’의 커다란 인기 덕분에 몇 번이나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로 만들어져 그 소망은 쉽게 성취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차라리 소망하지 말 것을 하는 생각만 낳게할 뿐이었으니….




 원작의 아성을 뛰어넘는 것은 하나도 없었을 뿐더러 그러기는 커녕 처참하게 실패한 것들만 즐비했기 때문이다. 워낙에 화려한 비주얼을 보여주는 작품인만큼 그 때문에 오히려 영상화가 어려운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간츠:오'가 영화를 만들어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기대 보다는 우려가 더 컸던 것 같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나는 이 작품이 13년간 연재한 것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전투 이야기를 보여주는 ‘오사카 전투’라는 것. 개인적으로 나는 이 전투가 ‘간츠’의 사실상의 클라이막스라 생각한다. 무력으로 압도하는 적에 대한 공포, 그것을 무릅쓰고 벌어지는 처절하면서도 절박한 전투 그리고 깔끔한 마무리까지 모든 것이 잘 짜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런 에피소드를, 이게 바로 두 번째 이유인데, 순수한 CG 애니메이션으로 담다니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순수 CG 애니메이션에 대해 만족해 본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본에서 만든,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라면 더더욱.


 최근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믿음이 하나 있다. 일본에서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것들은 다 ‘꽝’이라는 믿음이다. 허황된 믿음이 아니다. 근거가 되는 팩트의 리스트가 즐비하다는 점에서 이제 신념으로 지녀도 좋을 정도다. CG 애니메이션은 더하다. ‘파이널 판타지’부터 시작해서 ‘캡틴 하록’까지.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의 피리 소리에 홀린 쥐가 된 기분을 들게 했다. 그리운 추억에 이끌려 뒤따라 갔다가 그 그리움마저 탈곡기에 탈탈 털리는 멘붕을 맛보았으니.

 이런 까닭에 처음엔‘간츠:오'에 대하여 회피 전략을 썼다. 그런데 먼저 개봉한 일본에서 반응이 너무 좋은 게 아닌가? 역대 최고의 애니메이션이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그럼 이제 ‘간츠’의 장면들이 제대로 영상화된 것을 볼 수 있는 거야?’ 하는 마음으로 귀가 쫑긋, 눈이 번뜩, 가슴이 벌렁벌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얼른 개봉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간츠 : 오'가 개봉되었다. 결론은 대만족. ‘간츠’의 가장 완벽한 영상화라 할 만하다.

 슈트를 입은 플레이어의 생동감은 얼굴 표정이나 몸짓 할 것 없이 뛰어나고 아주 자연스럽다. 


주인공 카토. 정말 실감나는 표정이다.


 특히 오사카 팀의 시마키가 다리 위에서 검을 휘두를 때의 재현은 정말 놀라웠다. 어찌나 유려하고 자연스러운지. 어쩐지 영화 ‘바람의 검심’에 나오는 켄신이 생각났다. 초반에 나오는 몇몇 엑스트라 중엔 진짜 인간처럼 보이는 이들까지 몇몇 있었다. 이처럼 CG로 사람을 리얼하게 묘사할 때 받게 되는 어색함이 이 애니메이션에선 꽤 덜한 편이다. 로버트 저메키스의 ‘폴라 익스프레스’부터 봐왔다면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액션이 좋았던 것도 분명 한없이 자연스럽게 보였던 CG 인물 덕분이었을 것이다. 인물 묘사가 CG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약점이 되는 부분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을 이만큼 잘 묘사했다고 한다면 다른 것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간츠’의 만화를 즐겨 본 이들이라면 두 가지에 특히 더 관심이 가지 않을까 싶다.(어쩌면 나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하나는 병기나 메카에 대한 묘사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성인과 싸우는 것에 대한 묘사이다. 전자에 관해서라면 꽤 훌륭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간츠 : 오’를 통해 간츠의 무기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을 정도로 병기의 묘사가 잘 되어있다. 원작에선 원래 카토의 무기였던 ‘Y건’의 포획이나 ‘Z’건의 중력파 묘사 모두 무척 실감이 날 정도로 재현이 잘 되었다. 덕분에  ‘Z’건의 중력파를 몇 번이나 맞고도 계속 일어서던 ‘텐구’의 무시무시한 멧집이 공포스러울 정도로 잘 다가왔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압권이라 할만한 장면 중의 하나는 소의 모습을 한 상체와 거미의 모습을 한 하체를 가진 규유키(오쿠 히로야는 단행본 말미에 오사카 미션에 나오는 모든 성인들이 실은 일본의 유명한 요괴 설화집인 ‘백귀야행’을 모티브로 한 것이며 여기 나오는 성인들이 어떤 요괴를 모델로 한 것인지 밝혀놓고 있다.)와 간츠 대원이 사용하는 거대 로봇의 전투라 할 것인데, 규우키가 강에서 솟아 오르는 장면이나 거대 로봇이 빌딩 사이에서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나 굉장한 박력을 보여준다. 분명 ‘퍼시픽 림’이 없었다면 이것에 대한 놀라움이 더 컸을 것 같다.




 아! 하나 더 있다. 오다 하치로가 입고 있었던‘하드 슈트’의 묘사도 좋았다. 만화에서의 박력이 애니메이션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게 또 있었으니 바로 최종 보스가 되는 누라리횽과의 대결이다.

 누라리횽은 원래 ‘백귀야행’에서 오사카 상인의 모습을 하고 함부로 남의 집에 들어가 주인 행세를 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요괴라고 한다.


누라리횽


‘간츠’의 누라리횽은 처음엔 그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실은 아주 무시무시한 변신 능력을 자랑한다. 죽여도, 죽여도 자꾸만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 되살아날 뿐 아니라 갈수록 더 강력해져 싸우는 사람이나 보는 이나 ‘이제 제발 죽어줘’ 하고 절로 애원하게 만드는 존재다. 그 변신이라는 것이 참으로 괴상하고 더러는 꽤나 망측한데 실은 이 영화를 볼 때 가장 궁금했던 부분도 이것이었다. ‘과연 이 애니메이션이 누라리횽의 변신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런데 놀라웠다. 딱 하나만 빼고(이건 사실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라서 빼도 무방한 존재다.) 제대로 다 묘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누라리횽의 변신 모습 중에는 여성 나체로만 이루어진 거대 여성도 있는데 이것은 아무리 잘 옮겨도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여지지 않을까 했었는데 그마저 실감나게 연출하고 있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절대 여성 나체를 무한정 볼 수 있었기에 감탄한 것은 아니다.) 특히나 카토의 절규와 함께 펼쳐지는 전투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 그 비통함이랄까 격노랄까 하는 것이 온전히 전해져 CG 애니메이션에서 모처럼 등장인물의 감정에 공감토록 만들었다.


'누라리횽'의 최종 진화형. 후덜덜한 카리스마로 마지막의 긴장감을 책임진다.


 ‘간츠’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간츠’의 장면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었던 사람으로서  ‘간츠 : 오’에게 정말 만족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클라이막스를 앞두고 있었던 야마자키 안조와 카토의 대화가 조금은 길어지는 바람에 그동안 잘 쌓아왔던 긴장감이 좀 풀어진다는 것과 초반 커다란 얼굴만 굴러다니는 성인과의 총격 장면이 이 애니메이션에서 유일하게  CG 전투처럼 보였다는(현실감이 떨어졌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다.) 것을 빼면 시쳇말로 꽤나 잘 빠진 작품이었다. 


 사실 나는 ‘간츠’에 대해 조금은 양가적 감정이었다. 좋아하지만 특히 성인과 관련하여 무작정 좋아하기가 좀 저어되었다. 성인이 내게는 현재 일본에 거주하는 이주자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즉 ‘간츠’에서 주인공들을 괴롭히고 학살 당하는 성인들은 현재 일본인이 가지고 있는 이주자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작품의 높은 인기는 그런 것을 정치적 올바름 따위는 집어던져 버리고 아주 노골적으로 해소시켜 주고 있기 때문은 아닌가 자꾸만 반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동안 일본이 보여준 타인에 대한 배척과 폐쇄성 때문에 성인과는 무조건적인 대결 뿐이며 주인공들의 결속과 구원 또한 오로지 성인의 제거를 통해 이뤄진다는 게 작품의 이야기와 액션을 즐기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선 불편했다. 그런데 그런 불편함을 이 애니메이션이 조금은 가시게 해 줘서 반가웠다. 바로 원작과 좀 다르게 묘사된 카토와 안조의 결말 부분이다. 카토와 안조의 설정도, 전개도 원작 그대로이지만 작품의 마지막에 결행되는 카토의 선택이 이주자와 관련해 조금은 희망적인 관측을 낳게 만든다. 그 선택이 나와 전혀 다른 것, 그것을 포용하여 하나의 진정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카토는 자신을 온통 지배하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타인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괴물이나 다를 바 없는 성인과 싸우는데, 그런 태도 때문에 더욱 카토의 선택이 ‘이주자에게로 열림’을 지향하고 있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간츠:오’가 더욱 마음에 든다.


야마자키 안조(카토와 안조의 관계가 이 영화의 테마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현재도 일본에선 만화가 활발하게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바람의 검심’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실망의 도미노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정말 못 만들어서 그렇기도 하고 영화 특유의 분위기는 무시하고 오로지 원작 그대로 무리하게 실사화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는 특히나 CG의 경우 너무 기술적인 측면에만 경도된 나머지 관객이 공감할만한 드라마를 형성하는 데 소홀이 한 탓이다. 그런 면에서  ‘간츠:오’는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작품이 될 수 있는지, 그 좋은 예를 보여주는 것 같다. 놀라운  CG 기술을 선보이지만 그것을 독보적으로 만들지 않고 진행 중인 드라마와 유기적으로 잘 연결하여 표현이라는 외형과 이야기라는 내면 서로가 균형을 잘 이루도록 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에게 다가가려면 기술도, 이야기도 어느 하나 허투루 해선 안된다는 걸   ‘간츠:오’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작품이기에 아무래도 속편도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나 마지막 결전인 카타스트로피 편이 궁금한데, 지구가 침공 당하고 미국이 사라지며 간츠 대원 전체가 인류 전체의 운명을 걸고 싸우는 장대한 스케일인지라 진정 블록버스터 급이라 할만한 그 이야기가 과연 어떻게 재현될지 몹시 기대된다.   ‘간츠:오’만큼이나 성공적이어서 이전의 실패작들을 기꺼이 흑 역사로 치부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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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점과 한계가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작을 이만큼 재현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라 생각되기에 여기서는 그저 칭찬만 하기로 한다. 부디 성공해서 카타스트로피 판도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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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17-05-21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시리즈가 계속 나왔으면 합니다ㅠb

ICE-9 2017-05-21 14:09   좋아요 1 | URL
앗! 고양이라디오님도 똑같은 마음이라니, 무척 반갑습니다.^^ 그 전 영상화된 작품들에 너무 실망이 컸기에 앞으로 나올 작품들에 대한 기대가 한껏 커지는 것 같습니다. 끝까지 만족할만한 작품들이 나와주길 고대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5-21 16:50   좋아요 0 | URL
전 반대로 <간츠: O>를 먼저 접하고 간츠 실사판 영화를 찾아보았습니다. 실망감이 몇 배로 크더군요ㅠㅋ 앞으로도 에니메이션 간츠 시리즈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ICE-9 2017-05-22 01:57   좋아요 1 | URL
아, 이런, ‘간츠:오‘를 먼저 접하고 실사판을 보셨다면 실망감이 더욱 컸었겠네요. 끝까지 보는 것조차 어렵지 않았을까 감히 추정해 봅니다. 얼른 후속작이 나와서 고양이라디오님에게 남아 있는 실사판의 기억을 남김없이 날려버리게 되길 기원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17-05-22 18:19   좋아요 0 | URL
정확하시네요ㅎ... 보통 영화를 보면 끝까지 보는 편이라... 힘들었습니다ㅠㅋ

ICE-9 2017-05-25 20:46   좋아요 1 | URL
동병상련이죠^^ 일본은 이제 실사판은 좀 안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은혼‘도 그리 기대되지 않아요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