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 신영복 유고 만남, 신영복의 말과 글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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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어떤 이름은 삶의 어느 때와 단단히 결박될 때가 있다. 신영복이라는 이름이 그렇다. 그 이름은 내 20대와 떼어낼 수 없다. 그의 책을 처음 읽었고 더불어 벗하면서 사람과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는 눈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타인의 눈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나로서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혼돈과 불안의 나날들을 그래도 자맥질을 하며 겨우 헤쳐나올 수 있었던 것은 신영복이라는 구명조끼 덕분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랬던 그는 이제 여기에 없다. 그것도 예전 인기를 끌었던 가요의 제목처럼 벌써 1년이다. 1주기를 맞이하여 유고집이 나왔다. 그가 살아 생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글 중 미처 책으로 엮이지 못한 글들이 여기에 실려있다. 얼레에 무수히 감긴 실처럼 그의 책에 절로 내 질긴 그리움이 거듭 칭칭 감기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그렇게 단단하게 얽히고 뭉친 그리움으로 육신 없는 혼의 언어를 소중히 받아든다.



 표지에 눈이 오래 머문다. 저자가 직접 쓴 글자들이 모여 있는 품새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지난 겨울 광화문 광장에 있던 내가 떠오른다. 이 글자들의 운집이 그 밤, 나 역시 일원이 되어 내부에서 목을 빼들고 바라봤던 촛불의 행렬과 꽤 닮아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냇물아 흘러 흘러’라는 노랫말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 때 바라봤던 촛불의 행진은 문자 그대로 함께 더불어 흘러가는 강물로 보였으니까. 어둠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저마다 작은 빛이라도 되어서 정의가 바로 서고 위계에 상관없이 공정하며 아프고 약한 자의 마음을 먼저 돌볼 줄 아는 데다 사람이 오로지 사람이기에 존중받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밝히겠다는 의지로 묵묵히 흐르고 있는 빛의 강은 그야말로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란 그의 말을 절로 떠올리게 했다. 힘겨운 겨울이었다. 그 겨울, 밤바람을 맞으며 광장에 서 있었던 것은 겨울 한파보다 더 시리고 매서운 현실의 칼바람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함 때문이었다. 모두가 너나없이 밤을 낮처럼 밝히는 하나의 숲이 되었던 덕분에 다행히 희망을 만들고 지켜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이제 막 하나의 고비를 넘겼을 뿐이다. 난파 중인 배에 고리를 걸어 그저 침몰을 막은 것에 불과하다. 이제 이 배를 어떻게 수리하고 어느 곳으로 몰고갈지 생각해야 한다. 겨우 결실을 맺기 시작한 희망의 과일이 다시 파과(破果)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 책무를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지 말고 자신의 것으로 여겨 대안을 구축하고 실현하는 주체로서 참여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이 더욱 운명처럼 우리 앞에 도래했다고 여겨진다. 읽어 보니 결코 과거의 것이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대답들이 글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책에 있는 글들이 20대에서 70대까지 거의 전 생애에 걸쳐서 발표한 것들이긴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마다 변치않고 일관되게 흐르는 것이 존재한다. 바위처럼 굳건하고 한결같기에 그의 신념 혹은 근본 철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이 말이다. 바로 '관계 중심'이다. 나는 이것이 중심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1998년에 '존재론으로부터 관계론으로'라는 논문을 발표했다고 하던가. 적어도 내겐 이것이 핵심으로 보인다. 그는 근대까지의 서양 철학이 내내 개별적 존재에게 중점을 두고 있었다고 말한다. 덕분에 개별 존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충돌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로 인해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마저 억압과 저항이 기저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은 예전의 그 역시 이런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감옥에 갇혔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얼른 상상하기 어려운, 무려 20년이라는 긴 수감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늘 함께하고자 했던 민중의 밑바닥 현실로 들어갈 수 있어서 자신의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로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는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드는 자신의 꿈에 있어서 바깥과 감옥이 구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꿈을 감옥에서 구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곧 씁쓸한 패배감을 맛보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무시하고 냉대했던 것이다. 누구보다 많이 배웠고 이론의 갑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가진 것도 없고 기댈 데도 없이 오로지 혼자의 몸으로 삶을 견뎌내야 하는 이들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그의 언어가 그들의 현실과 유리된 공허한 관념에 지나지 않았기에 제아무리 논리 정연하고 화려한 언변으로 포장되어 있어도 신뢰를 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 경험이 그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가져왔다. 시야의 지축이 흔들린 것이다. 그 때까지 그는 자기 앞의 사람을 자신이 이끌고 갈, 그만큼 그 사람에겐 자신만의 생각이나 삶의 경험이 없는 존재로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가진 삶이라는 거대한 맥락은 괄호쳐 버리고 눈 앞에 보이는 모습만 전부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감옥 생활을 통해, 통렬한 절망 뒤에 찾아온 혜안의 시야 속에서 그는 모든 이가 자신만큼 육중하면서도 광대한 삶의 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눈 앞의 존재란 그저 빙산의 일각이며,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체화된 모든 삶의 내막을 다 껴안을 수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도. 


 나의 존재라는 것이 과연 나의 개별적 존재로서 완성되는 것인가.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그 사람들의 걱정과 어떤 배려 속에 내가 여기저기 흩어져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내가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관계는 존재’라는 말도 생각났어요.(p. 50~51)


 바로 존재론에 빠진 서양의 시각이 그것을 무시한 채로 개인의 껍데기만 보고 있었고 그것의 한계란 그대로 그것만 공부한 그의 한계가 되었다. 그런 서양의 시각은 무엇을 낳았던가? 타인을 단순한 존재로 치부한 것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자신마저 남들에게 그렇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결국 개인은 내재된 가치에 상관없이 오로지 겉모습을 이루는 조건에 따라 쉽게 계량화 되었고 무엇과 교환될 수 있는지에 따라서만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게 되었다.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관계는 이뤄질 수 없다. 진정한 관계는 공존과 조화가 생명인데, 교환가치는 경쟁과 우열로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갈수록 인간관계가 황폐화되고 와해되는 것(p. 47)은 그 때문이었다.


 사람의 얼굴이 담겨 있지 않은 우리의 머리와, 사람과의 관계가 사라져 버린 우리들의 삶 속에 사람 대신 무엇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앉아있는지... 참으로 섬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p. 183)


 그는 그런 시야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사람을 교환가치가 아니라 그만이 가진 고유하고 온전한 가치로 봐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저마다 가진 삶의 결을 그의 처지에서 깊이 헤아릴 수 있는 '관계 중심'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관계론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었고, 지식이 아니라 뼈져린 삶의 경험이 바탕된 것이었기에 한층 더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삶 전체에 있어서 모음(母音)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진정한 배움을 감옥 생활이 가져다 주었기에 그는 감옥 생활을 사람들에게 '대학 시절'로 소개한다.


 내가 이것을 모음(母音)이라고 말한 것은 그냥 하는 표현이 아니다. 바로 여기서 그의 모든 신념과 작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책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전체에 걸쳐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가 석방 이후에 동양철학 연구에 더 심혈을 기울인 것이나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붓글씨가 그랬듯이 말이다. 모두 근본엔 '관계 중심'이 있었다. 개별적 사물이 가지고 있는 속성 보다 그것이 맺는 관계를 통해 발현되는 새로운 성격을 우위에 두고 있기에 동양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붓글씨 또한 그것의 높은 경지는 파격을 통한 균형 잡기에 있고 그것은 관계론적 사고가 없으면 성취되기 어려운 미학인지라 한층 더 수양에 힘을 쓰게 된 것이었다. 


 결과가 아니라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중시하기 위하여 고속 도로보다 완만한 속도 속에 풍경을 음미하여 그 안에 있는 자신을 조망할 수 있는 길을 선호하는 것도 이와 관련 있었다. 결과 중시는 얼마나 잘 그리고 빨리 이루느냐가 중요하기에 성장과 속도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도로의 문화다. 하지만 그것엔 모든 것을 수단으로 전락시킬 위험마저 내포되어 있다. 바로 그 위험이 지금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우리는 똑똑히 보고 있다. 아주 최근의 일이다. 삼성 중공업의 거제 조선소에서 크레인이 전복하여 7명이나 되는 노동자가 사망했다. 그것도 노동자들이 쉬어야 할 '노동절'에 말이다. 성정과 속도에만 치중한 나머지 당연히 해야 할 안전상의 조치들을 이행하지 않은 결과였다. 희생당한 그들이 기업으로써는 손쉽게 쓰고 버릴 수 있는 하청 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기에 더욱 소홀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수단이 되면 어떤 비극이 찾아오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역시 세월호 참사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허다하게 일어났던 사례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더욱 우리를 아프게 만든다. 언제까지 이렇게 어이없이 삶을 희생당하는 이들이 생겨나야 할까?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중시했다면, 그 어떤 이도 수단이 아니라 고유한 목적으로 대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성장과 속도의 혜택마저 모두에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 오로지 소수의 주머니만 채운다는 사실을 신자유주의 10년을 거쳐 맨 가슴으로 쏟아진 냉수처럼 선명하게 경험한 지금, '자본 논리에 맞서 인간 논리를 지키는 길이 '도로의 문화' 대신 '길의 문화', '길의 정서'를 키워야'(p. 70) 한다는 그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니리라.


 이는 그대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해당된다. 그렇지 않아도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태로 인해 역사를 올바로 세우지 못하면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얼마나 쉽게 그리고 처참하게 왜곡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알게 된 요즘이 아니던가? 이처럼 역사가 쉽게 오염되는 근본에는 역사가 그저 과거의 사실로 국한되어 그만큼 쉽게 규정 가능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존재론적으로 개인을 바라보는 시야가 그대로 역사에도 투영되고 있기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이다. 이런 무분별한 변질을 막기 위해서라도 역사 역시 관계론적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드러난 하나의 사실로 판단하기 보다는 그것을 하나의 흐름이 표출한 것으로 보고 거기까지 진행되었던 당대의 다양한 움직임과 깊은 내막을 당대의 처지와 한계를 고려하면서 두루 헤아려 보려는 노력이 말이다.


역사의 보편적 발전 구도는 오랜 불균형 상태와 일시적인 균형 상태의 교직이다. 이것이 사회 변화를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과정으로 파악하는 근거이다. 따라서 발전과 진보의 개념은 과정의 총체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더구나 선취된 이상적 모델로부터 실천을 받아 오는 과정도 아니다.(p. 243)


 이는 특히 진보의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꽤 둔중한 경고가 될 것 같다. 출근길의 지하철처럼 종착지만 생각하면 도중의 역들은 그저 시간을 지체시키는 장애물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미래의 모습만 고집하는 이들에게 현재란 바로 그와 같을 것이다. 자신이 정한 미래의 규격에만 맞추다 보면 현재란 늘 모자라고 부족하게 보이기 마련. 그래서 현재가 가진 장점과 긍정적인 가능성 또한 쉽게 무시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자주 범한다. 흔히들 보수는 쉽게 뭉치고 진보는 쉽게 분열한다는 말을 하곤 한다. 최근 대선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진보가 자주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신영복 선생의 말대로 자신이 선취하려는 이상적 모델을 현실과 상대에게 강요하고 있는 탓은 아닐까? 그러기 보다는 영국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말했던 대로 현재가 지금까지의 과정이 총체로 나타난 최선의 결과라 생각하고(이것은 현실의 한계를 온전히 긍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변혁 주체의 역량이 부족해서라거나, 대중이 덜 계몽된 탓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좀 더 나은 쪽으로 진전시킬 것인가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다면 대화와 협력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이 책엔 오늘날 당면하고 문제들과 관련하여 새겨 듣고 사색할만 말들이 참 많다. 더구나 이 말들은 한 순간 표출된 것들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줄기차게 그의 내면에서 영글어 왔으며 선생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까지 했기에 더욱 설득력을 얻고 신뢰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삶 자체를 통해 온전하게 구현된 '관계 중심'은 결국 나와 그의 삶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자각과 그래서 함께 이 구차한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정언 명령으로 향해 있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란 그 일생에 담겨 있는 시대의 양'이라는 말이나 '자기의 삶 속에 파편처럼 박혀 있는 분단의 상처'나 '개인의 팔자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민족의 팔자'(p. 192)라는 말에서 그것은 대표적으로 드러난다. 한 개인을 단면이 아닌 폭과 깊이를 지닌 입체로서의 인식하는 일은 이렇게 별개의 개인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삶의 어렵고 힘든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 공동 운명체로서의 인식으로 이어지고 시대의 부조리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전선도, 부당하게 고통 받고 있는 병실의 구분도 없게 만든다.


 좋은 음식을 받을 때 당신의 ‘밥’이 생각납니다. 따뜻한 겨울 난로를 만날 때 당신의 ‘방’이 생각납니다. 만원 버스 속에서 여자들과 몸 부대낄 때 나는 당신의 ‘밤’을 생각합니다. 도시의 거리와 거리에 넘치는 인파, 그 흔한 보행의 자유 속에서 나는 당신의 묶인 ‘발’을 생각합니다. 당신을 전선에 두고 혼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미안합니다. 당신을 병실에 남겨 두고 혼자 퇴원하여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곳만이 전선이 아니며 그곳만이 병실이 아니라던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p. 257)


 나는 그의 이 고백이 그가 지향하는 '관계 중심'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된다. 지금 내가 그 어떤 높은 지위와 좋은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로지 나로 인해서가 아니라 여기엔 내가 속하거나 어쩌면 내가 전혀 모를 수도 있는 다양한 삶의 주체와 맥락들이 연결되어 형성된 것이라는 깨달음과 설령 내가 가장 환한 곳에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 기꺼이 가장 어둔 곳에서 외롭고 아픈 이들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하는 마음. 이것이야 말로 초혼처럼 찾아온 그가 내게 전하고 싶은 밀알의 언어라고 믿는다. 더하여 광화문의 겨울밤을 밝혔던 빛의 강이 다음으로 나아갈 바다의 모습이라고 말이다. 


 나로 국한하자면, 그는 관계와 과정 중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될 내가 얼레가 되길 바란다고 할 수 있다. 나만 고집하지 않고 계속 타인들과 삶이 가진 다양한 측면들을 나처럼 여기며 감아갈 수 있도록. 그것도 무한정.


 냇물의 생명은 흐르는데 있다. 설사 바다에 다다른다고 해도 냇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신영복 선생이 일흔이 넘어서까지 과거의 자신을 고집하지 않고 계속 재구성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듯이 말이다. 유고를 먹먹한 그리움과 함께 읽고 난 지금, 나도 그 꿈을 꾸어본다. 감는 것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에 기쁨을 느끼는 얼레의 나를. 결코 멈추지 않고 언제나 유동하며 잘 섞이는 냇물의 나를. '떨리는 지남철'과도 같이.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어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약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p. 248)


 그렇게 오늘의 내가 아니라 달리 변화될 내일의 나를 더 기대하는 나를. 죽순의 짧은 마디에서 나오는 강고한 힘이 대나무의 곧고 큰 키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p. 204)고 했던가. 이 순간 가지게 된 소망을 이루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그런 힘을 가진 마디를 차근차근 만들어가려 한다. 죽순의 마디가 그 힘을 뿌리에게서 배우듯이 오늘 내가 처한 현실을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치열하게 껴안겠다고 마음 먹어 본다. 외면도 않고 순응도 없이 보다 많이 품고 깊이 헤아리려 하며 변화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 때까지 선생의 말은 내게 내내 '꽃세움 바람'이 되어주리라.


 봄바람은 가지를 흔들어 뿌리를 깨우는 바람입니다. 긴 겨울잠으로부터 뿌리를 깨워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는 바람입니다. 무성한 잎새와 아름다운 꽃을 피우게 하기 위한 바람입니다.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아니라 꽃을 세우기 위한 ‘꽃세움 바람’ 입니다.(p.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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