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누나 속편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수짱과 지하루. 확실히 둘은 다르다. 수짱은 마스다 미리의 대표적인 캐릭터고, 지하루는 스탠드 얼론이라 할 수 있는 '내 누나'에 나오는 누나 캐릭터다. 여러 면에서 둘은 차이가 난다. 수짱은 남자 하나 사귀는 것도 어려워하지만 지하루는 남자 친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남자를 거듭 만나며 그 날 기분에 따라 남자를 골라 만나기도 한다. 그래도 역시 가장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은 원하는 것을 얻는 태도이지 싶다. 수짱은 수동적이지만 지하루는 능동적이다. 지하루는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인연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그렇기에 질문이 많은 수짱과 달리 지하루는 그 어떤 질문이든 대답할 수 있는 지도 모른다. 수짱이라면 분명 쥰페이가 '다시 태어나면 남자와 여자 어느 쪽?'이라고 물었을 때 우물쭈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하루는 단호하게 '나!'라고 대답한다. 



 '내 누나'는 부모님이 모두 해외로 가버려 뜻하지 않게 둘만 있게 된 남매가 주로 일상을 끝내고 온 저녁 혹은 밤에 집에서 만나 이런 저런 대화를 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그들은 보통 식사를 하는 테이블이나 거실의 소파에서 대화를 하는데 질문을 하는 것은 주로 남동생 준페이다. 누나 지하루에게 대놓고 '무난한 타입'이란 말을 듣는 쥰페이는 여자의 심리를 전혀 모르는 전형적인 남성이고 여성에게 인기도 별로 없어서 아직 연애도 제대로 못해 봤으며 거기다 이제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한 사회 초년생이기도 하여 여자에 있어서나, 사랑에 있어서나, 일과 삶에 있어서나 모르는 것 투성이다. 아니 설령 알고 있는 게 있다고 해도 그게 또 어설퍼서 보완해야 할 게 잔뜩이다. 바로 그런 것에 지하루는 답을 준다. 쥰페이가 전혀 몰랐던 여자의 내면과 사랑의 방식 그리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삶의 태도 같은 것들을.



 수짱의 정체성을 질문으로 규정할 수 있다면, 지하루의 정체성은 '대답'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얼마나 강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느냐와 관련 있다. 수짱이 수짱이 질문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고 한다면 언제나 대답을 가지고 있는 지하루는 이미 그 주체성을 확립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수짱과 지하루를 연결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지하루를 수짱의 종착역 같은 존재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정말 마스다 미리의 의도였는지는 논외로 하고 말이다. 듣기에 수짱은 마스다 미리의 자전적 캐릭터라고 한다. 이게 맞다면 지하루는 마스다 미리가 되고 싶다고 바랐던 인물일 지도 모른다. 혹시 마스다 미리는 종종 꿈꾸지 않았을까? 연하의 귀여운 남자가 '누나' 하면서 찾아와 내 놓는 질문에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서는 '그건 말이지' 하며 단호하고 멋있게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만큼 독립적이며 확고한 주관성을. 이 그림과도 같은.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 수짱이 수많은 질문을 통해 가져야 했던 자신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바로 지하루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라고. 혹은 이렇게도 생각하게 된다. 그토록 질문이 많았던 그녀이니만큼 아무래도 이런 저런 타인들에게도 질문했을 것이 틀림없고 그러다 연상 남자로부터 뻔한 정답만 말하는 '맨스플레인'을 너무나 많이 당해버려 그것에 대한 반감 혹은 울화로 만일 반대의 위치에서 '우먼스플레인'을 한다면 과연 그것은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 위해 지하루 캐릭터를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때문에 지하루의 '익스플레인'은 보편적인 정답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제안이며 때로는 맥락이 없고 톡톡 튀는 개성으로 중무장하고 있는 게 아닐런 지.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는 대체 불가능의 '익스플레인'지라, 준페이가 그랬듯이 다 읽고 나서도 몇 번이고 계속해서 들춰보게 된다. 준페이가 늘 조금은 어이 없고 자존심 긁는 대답을 듣게 될 줄 알면서도 줄기차게 누나에게 이것 저것 질문을 하는 것은 분명 지하루가 초콜렛과 다라카츠카 공연에 중독된 것처럼 지하루의 대답에 중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만 준페이처럼 중독되어 버린 것 같다. 그랬기에 이 책 마지막에서 지하루가 이제 부모님이 온다고 하면서 둘만의 시간이 끝난다는 것을 암시했을 때, '더 읽을 수 없는 거야?' 하면서 적잖이 아쉬웠겠지. 지하루의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뭔가 또 다른 일이 생겨 귀국 시간이 하염없이 미뤄지면 좋겠다.



 지하루의 대답은 내게 여성은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보다는 사람은 참 다양한 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하나의 사물과 사건을 대하는 데도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하는 것도.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섣부른 단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판단하기에 앞서 더 많이 물어보고 대화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인 지도.

 정말로 '내 누나'가 수짱의 해답편 같은 것이라면 왜 '내 누나'의 주된 형식이 수짱의 그것과 다른 것인지 이해되는 것 같다. 수짱의 시간이 주로 독백의 시간이라면 '내 누나'의 시간은 주로 대화의 시간이다. 여기엔 언제나 더불어 언어와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 존재한다. 바로 이런 시간들이 보다 강한 주체성을 형성하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내가 너무 바라는 시간들이라 더 그렇게 생각되는 지도 모르겠다만.


 일상에서 꾸미지 않고 진솔하게 내면에 있는 결들을 모두 드러낼 수 있는 대화의 시간을 가진다는 게 참 어렵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스킵십 욕구가 많아진다고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반려동물을 기르게 되는 것이라고 하더라. 아마도 사람과 다르게 반려동물은 스킨십을 하기 전과 후에 질 수 있는 부담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바라는 대화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말을 꺼내기 전과 그 말을 내뱉고 난 뒤의 계산과 책임없이 그냥 툭 던지고 '이 말을 하면 이 사람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말해 놓고 괜히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하는 마음 없이 말을 나누고 싶다. 그러고 보면, 지하루가 그렇게 주체성 강한 여성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준페이와의 대화 때문일 지도 모른다. 지하루가 준페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쓰면서 전략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하면 '뭐야, 그렇게나 남의 눈치를 살피다니? 그렇다면 주체성이 약한 거 아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하루가 그렇게 하는 것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다. 데이트를 위해 열심히 꾸미고 남자와 만날 때 이런 저런 기교를 부리는 것은 어쩌면 다시는 이런 느낌, 경험을 할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니까 말이다. 그 시간을 영위하는 지금의 자신이 너무나 소중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지하루는 그토록 자신을 아끼는 존재다. 마스마 미리가 지하루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지하루를 있게 한 것은 준페이와의 대화였다. 아무래도 그렇게 보인다. 제아무리 자신을 소중히 여겨서 그런다고는 해도 매일 그렇게 살기란 누구에게나 힘든 법이다. 하루 중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는 준페이와의 대화 시간이 없었다면 지하루는 진작에 나가 떨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지하루가 여전히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부모님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준페이와의 대화로 에너지를 계속 충전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하루를 통해 다시 한 번 꾸밈 없는 진솔한 대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고 '준페이, 이 녀석 정말 부러운 걸!' 하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엔 이런 누나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뭘하고 있을지 문득 그립네(원래 이 글은 그 누나들에 대한 추억으로 장황하게 쓰였다가 급 수정 당했다. 후후). 그 그리움 때문에 지하루와 준페이의 대화가 더욱 애틋하게 다가와 자꾸 뒤적이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적극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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