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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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을 받지도 하지도 않는 시대다. 지금은 구속이 된 박근혜 대통령만 봐도 집권 시절 기자 회견 장에 나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할 뿐 기자들의 질문은 일체 받지 않았으니 무슨 말이 또 필요할까? 비단 박근혜만이 아니라 내가 이제까지 만나 본 윗 사람들 대부분이 아래 사람의 질문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겼다. 동료들도 질문이 많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괜히 시간만 잡아먹고 일만 복잡하게 만든다고 핀잔을 주기 일쑤다. 나는 원래 질문이 많은 편이었다. 어릴 때부터 이해가 안 되면 손을 번쩍 들고 질문부터 하고 보는 게 버릇이었다. 하지만 사회로 나오고 나서 난 변해 버렸다. 질문을 해도 '쓸데 없이'란 말 외에는 아무 것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과 질문을 할 때마다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받는 피로 때문에 점차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새 나처럼 질문을 곧잘 해대는 부하에게 짜증부터 부리는 내가 된 것을 보았다. 과거에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자기에게 가장 실망할 때가 바로 이런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 때부터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되었다. 어쩌다 우리는 질문을, 특히나 받는 쪽에서 자신에 대한 불신이나 공격으로 먼저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정당한 질문조차도 질문 자체로 보지 않고 저의부터 의심하고 보는 버릇을 들이게 된 것일까? 질문을 받는 쪽이 그러하니 질문을 하는 쪽도 질문이 편할리 없다. 살면서 그림자처럼 뒤따르게 되는 질문이건만 반응이 그렇다 보니 손을 내리고 입을 다물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모르는 게 약점으로 여겨지기 시작하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아는 척을 하거나 조금 아는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침소봉대 하게 된다. 검색이 수월해지면서 질문의 필요는 점점 더 사라진다. 본래 진정한 의미의 질문은 계단처럼 보다 더 깊은 차원으로 내려가는 매개물로 질문은 수명이 길수록 빛을 발하는 법인데 검색에서 바로 답을 찾을 수 있는 요즘에 있어 질문의 수명이란 그저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토록 질문의 가치와 수명이 한없이 추락 중인 이 시대에 오히려 질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가 한 사람 있다. 그가 바로 뇌과학자로도 유명한 김대식 교수다. 그는 이미 인류를 위대한 진보로 이끌었던 31개의 질문에 대해 한 권의 책을 쓴 바 있다. 그런 그가 조금은 더 대중적인 차원에서 다시금 질문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책을 들고 나왔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거기에 대해 직접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책은 하나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떤 식으로 질문을 찾고 그것을 통해 자아를 확장해 왔는지 독자의 눈 앞에서 직접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주로 책을 통해서 말이다. 그가 사람이 아니라 책을 통해 질문을 찾아 가는 것은 사람에 대한 회의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책을 많이 읽게 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그는 책을 통해 스스로 질문을 만들고 그 해답을 만들어가는 지적 여정을 평생 계속해왔다. 바로 그 여정의 가장 최근 모습이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에 담겨 있다. 말하자면, 그의 내밀한 사유의 궤적이 녹화된 최신 테이프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책은 모두 6개의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삶의 가치를 고민하라', '더 깊은 근원으로 들어가라',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라', '과거에서 미래를 구하라', '답이 아니라 진실을 찾아라' 마지막으로 '더 큰 질문을 던져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모두 질문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질문이란 실은 초월의 몸짓이다. 오늘 내가 처한 현실이 모든 게 아니라는 자각이 결국은 질문을 만든다. 질문은 현재 너머의 꿈을 꾸는 한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며 실제 그 너머로 도약하기 위한 발구르기와 같은 방법 찾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삶의 가치를 고민하게 되면 질문은 필연적으로 도래할 수밖에 없다. 아르튀르 랭보가 보다 풍성한 삶의 경험을 위해 시를 포기하고 인도네시아와 에티오피아를 전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 처한 현실에 대해 안주가 아니라 탈주를 취할 때 인간의 삶이란 보다 풍요로워질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차원에서 가장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첫 파트에 실린 책에 대한 이야기에서 절감할 수 있다. 질문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간수의 주머니에서 몰래 열쇠를 가지고 나와 안주의 철창에 갇힌 우리를 탈주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삶은 더 깊은 근원과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고 지금까지 우리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세상의 질서와 상식들은 이제 우리가 억지로 거부하지 않아도 그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깨달음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더이상 구애받지 않게 된다.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처럼 꼭 기승전결일 필요가 없으며 더글러스 애덤스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에서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답'이 '42'이여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수긍하게 된다. '42'라는 숫자는 종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다시 또 달려야 한다는 신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아는 까닭이다. 또한 어차피 삶의 의미란 어딘가에 숨어 있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추구를 위해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 위에서 비로소 형성된다는 것을 질문의 여정 속에서 스스로 경험한 것을 통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글러스 애덤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질문 뿐이다.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삶의 진짜 가치는 지속에 있고 그렇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동력원이 바로 질문이기 때문이다. 아닐 아난타스와미가 자신의 책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나'라는 미스터리 하나만 해도 영원히 풀리지 않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보다 심층으로 내려가고 더욱 본질적인 것을 찾아간다. 역사는 직선의 시간이 아니라 다발의 시간이 되고 다각적으로 오늘의 시간과 공간을 볼 수 있는 시야를 기르게 된다. 김대식 저자의 말대로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의미를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들은 언제나 폭력과 불행의 시작'이 되지만 질문의 신전에 존재를 의탁한 우리들에게 그런 것은 더이상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절대는 상대가 되고 영원은 잠정이 되기 때문이다. 토머스 쿤이 패러다임 이론을 통해 했던 것을 우리는 질문이라는 필터로 절대와 영원에 함유된 독소를 거른다. 모든 권위의 우상들은 회의(懷疑)의 밧줄로 쓰러질 것이며 타인을 무분별하게 모방하다 자기도 모르게 주입된 욕망은 좀 더 근본을 응시하고 헤아리는 마음 속에서 저절로 용해되어 자취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질문은 바로 그것을 가져다 준다. 남이 만든 정답과 경계 안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잔뜩 안고서 웅크리고 있는 우리가 아니라 설령 아무 것도 없는 헐벗은 대지에 서 있다 하더라도 그 황무지 위에서 내가 만들어 갈 세상에 대한 기대감만으로도 당당하고 강해질 수 있는 우리가 되게 만든다. 이탈리아의 디자이너 루이지 세라피니가 존재하지 않는 것들로 '코덱스 세라피니아누스'라는 한 권의 백과사전을 만들었던 것처럼. 


 책에 삽입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백과사전 '코덱스 세라피니아누스'의 모습.


 먼 옛날, 질문 자체를 몰랐던 원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모른다고 해서 더이상 불안해 하거나 두려움에 빠지지 않는다. 설령 고향에서 추방된다고 해도 그것을 새로운 변화를 위한 계기로 받아들일 뿐이다. 진정한 고향은 어떤 외부의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든 어디나 다 고향이다'라는 말처럼 실은 내면에 정초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중심이 강하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 아닌 타자들에 대한 두려움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다. 더이상 타인 때문에 내쳐질 타향이나 변방이 존재하지 않고, 현재라는 과정 역시 어디에 닿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에서 매 순간마다 미래가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용과 공존 그리고 조화와 융합은 질문의 여정이 데려가는 진화의 장소이자 질문을 주관하는 여신의 발에 입을 맞추고 헌신을 맹세한 이상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이다. 나는 유발 하라리가 일컫는 '호모 데우스(신 같은 인간)'이 이와 다르지 않다고 감히 생각한다. 온갖 것과 융합되고 시간마저 초월하며 더이상 하나의 육체에 고정된 자아가 아닌 '호모 데우스'로 살아갈 수 있으려면 포용과 공존 그리고 조화와 융합은 필수일 테니까. 그리고 길고도 무수한 질문의 여정 속에 다다르게 된 존재인만큼 김대식 교수의 말처럼 설령 많은 의문을 가진다 하더라도 그가 우려하듯 위험한 존재는 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질문을 이어가고 천착하는 한, 지배 보다는 공존을, 배제 보다는 포용을 택할 테니까. '너무 낙천적인 게 아니냐고?', '한낱 질문 하나에 그만한 진화의 동력이 있다니, 너무 과장이 아니냐고?'. 그렇게 내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 당신에게 나는 말없이 다만 이 책,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슬쩍 들이밀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나처럼 믿게 될 테니까. 최소한 비슷하게라도 생각은 할 테니까. 어쨌든 나는 힘을 얻었다. 질문에 깃든 엄청난 가능성을 알았으니 다시금 질문을 즐기던 예전의 나로 돌아가 볼 작정이다. 다시 사람들에게 치인다면 김대식 교수처럼 책을 통해서라도 질문의 여정을 이어가련다. 그리고 앞으로는 내게 찾아오는 모든 질문에 최대한 귀기울이고 함께 답을 찾아보려 노력하련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에 이어 '어떻게 답할 것인가'도 나의 주된 과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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