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재자'는  '칸다하르'와 '가베'로 유명한 이란 출신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2014년에 발표한 영화다.

 원제는 대통령을 뜻하는 'PRESIDENT'. 원래는 2014년에 개봉했어야 할 영화가 지금에서야 개봉한 것은 어쩌면 지금은 전직이 된 당시의 대통령 박근혜 때문일 지도 모른다. 제목이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전화 한 통화로 수도의 불 전체를 끌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독재자가 하루 아침에 몰락하여 손자와 함께 유리걸식 하다 민중들에게 잡혀선 곤욕을 치르는 영화이니 개봉이 되었다면 그렇지 않아도 유리멘탈인 그녀의 분명 심기를 많이 건드렸을 터. 안 그래도 세월호 참사로 골치가 아픈 대통령의 심기를 경호하느라 바쁜 이들이 알아서 긴다고 아예 대통령 눈에서 치워버리려 했을 수도 있을테니. 그 때는 영화 '변호인' 때문에 CJ가 가뜩이나 청와대에 찍혀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고.



 어쨌든 영화를 보고나니 지금이라도 개봉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거의 독재에 가깝게 권력을 휘둘렀던 대통령이 국민의 촛불로 탄핵을 당해 파면된 지금엔 우리나라 상황이 영화 속 내용과도 얼추 겹쳐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만들고 있기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독재자인데 제목이 'PRESIDENT'인 것은 현재 이란이 대통령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이 영화가 2014년에 발표된 것을 고려하면 이 영화가 한창 만들어지던 당시인 2013년에 이란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그 때 이란의 대통령 선거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2011년의 재스민 혁명이 과연 이란에도 번질 것인가?' 하는 것 때문이었다. 당시 이란 정권은 보수 강경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항할 개혁파 진영은 약체였다. 싸움의 결과는 보나마나다 하는 말들이 곧잘 회자되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예상을 뒤엎고 변화를 바라는 세력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영화 '어느 독재자'는 바로 이 변화를 직접 반영하고 있다. 영화 초반 민중들의 거센 저항으로 위기에 몰리는 독재자의 모습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닐런지. 또한 영화 속 독재자는 어디로 보나 강경 보수파로 보이고 라디오에선 계속 야당이 집권당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이란만이 아니라 모흐센 마흐말바프에게 자못 중요한 것이었다.  

 자신도 직접 영향을 받는 일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동안 만은 이란 정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영화 때문에 이란 정부와 강경 보수파로 부터 테러 위협을 끊임없이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딸이 영화를 만드는 현장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는 더이상 이란에 머물 수 없었다. 무려 2005년부터 계속 테러를 피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부산영화제는 그런 그를 공식적으로 지원했다. 영화 '어느 독재자'가 로드 무비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이런 그의 자전적 경험과도 연관 있을 것이다. 영화 후반으로 가면 주인공 독재자에 의해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혁명을 맞아 풀려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독재가가 도망하느라 자신들 처럼 정치범으로 위장하여 바로 곁에 있는 줄도 모르고 독재자를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어떤 이는 독재자를 무조건 죽일 것이라 선언하는데 옆에 있는 어떤 이는 그것에 반대하며 용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을 한 정치범은 영화 마지막에 독재자가 민중들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자 이렇게 증오와 폭력으로 그에게 복수할 거라면 차라리 자기부터 죽여달라고 기꺼이 목을 내어놓는다. 폭력이 가져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폭력 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리고 민중들에게도 말한다. 이 독재가가 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당신들은 무얼 했느냐고. 그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당신들이 실은 거기에 기생하고 있었던 게 아니냐고? 그런 그의 모습은 신약 성경의 예수 모습을 떠올린다.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죄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쳐라고 말했던. 독재자가 독재할 수 있도록 방기한 우리들의 책임을 폭력과 제거로 무마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뜻을 내비치는 그의 말은 그대로 감독이 재스민 혁명 이후의 중동 민중들에 대한 발언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정치범이 내겐 모흐센 마흐발파프의 분신으로 보인다. 10년이 넘도록 정치범 아닌 정치범으로 조국과 먼 이국의 땅을 방랑했기에 그는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재스민 혁명 후의 이란과 중동 국가들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이런 말을 했을 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가 복수 보다 용서, 폭력 보다 노래나 춤을 부르짖는 것은 영화에서 줄기차게 반복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권력의 속성 때문이다.

 영화는 처음에 권력의 막강한 힘을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되면 자신에게 저항했던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독재자의 모습이 나오는데, 손자가 계속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조른다. 독재자는 그러는 손자에게 자기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준다고 하면서 발 아래에 펼쳐진 도시의 눈부신 야경을 보라고 말한다. 손자가 그것을 바라보자, 독재자는 전화를 걸어 도시의 불을 당장 끄라고 말한다. 그러자 마법처럼 도시가 암흑으로 돌변한다. 그 광경으로 손자는 권력의 힘을 알게 되고 매혹된다. 



 독재자는 다시 전화를 걸어 손자의 명령이 곧 자신의 명령이라 말하며 손자에게 수화기를 건네 이번엔 네가 명령해 보라 한다. 손자가 불을 켜라고 명령하자 도시가 다시 눈부시게 변한다. 재미가 들린 손자가 다시 끄라고 하자 도시는 이내 어둠에 잠긴다. 손자와 독재자는 웃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힘을 한동안 맛보다가 손자가 다시 불을 켜라고 전화로 명령한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불은 들어오지 않는다. 이 때 카메라는 방향을 바꿔 도시가 아니라 손자와 독재자를 담는다. 그들이 아무리 명령 해도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도시처럼 이제 그들이 어둠 속에 있게 된다. 마치 그들이 허락하지 않았던 빛을 이제는 자신들이 허락받지 못하게 된 것처럼. 그런 가운데 그들은 어둠 속에서 수상한 총소리와 폭음을 듣게 된다. 그들은 위협하는 자였으나 이제 위협을 받는 것은 그들이다. 이렇게 자리 바꿈이 일어났다.



 

이 장면에 영감을 준 아프카니스탄에 있는 다룰 아만 궁전

소련 침공과 반복된 내전으로 점철된 아프카니스탄의 아픈 역사를 그 자체로 증거하는 공간이다.

모흐센 감독은 2005년 이 곳을 방문했는데, 이 궁전에서 독재자 할아버지가 자신의 손자에게

 절대 권력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영화 속 장면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독재자'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시나리오 작업 도중 재스민 혁명이 2011년에 일어났고

 그 때문에 시나리오를 다시 쓰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것, 언제든 누구의 자리든 정반대로 바꿔질 수 있다는 것이 감독으로 하여금 복수 보다는 용서, 폭력 보다는 노래나 춤을 강조하게 만든다. 영화는 내내 이런 자리 바꿈이 일어난다. 손자는 자신의 장난감과도 같았던(마리아가 손자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영화 초반 그들이 공항으로 달아나려 할 때 누나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손자가 마리아를 데려가고 싶다고 하자, 누나는 차 안을 네 장난감으로 넘치게 할 셈이야 하고 나무란다.) 마리아가 된다. 독재자는 자신과 손자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손자를 여자로 변장시키는데 그 모습은 꼭 손자가 마리아로 잘못 알고 따라간 소녀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그렇게 손자는 자기가 가진 권력의 대상이던 마리아가 된다. 이것은 군인들에 의해 이제 막 결혼한 신부가 겁탈 당하고 총살 당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그 때 군인들이 신부를 겁탈하기 위해 스크럼을 짜서 신랑과 그 가족을 막는 모습은 그대로 손자가 마리아를 공항으로 데려가겠다고 고집을 피울 때 집사들이 스크럼을 짜서 손자를 차 안으로 넣는 것과 정확히 겹친다. 이런 반복은 군인과 신부의 관계가 손자와 마리아의 관계가 동일하다는 것을 뜻한다.



 독재자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변장하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자신이 위해를 가하거나 박해를 한 인물들이다. 그는 변장을 위해 양치기와 이발사의 옷을 빼앗는데 그렇게 그들과 아주 비슷한 모습이 된다. 정치범과 함께 있을 때는 스스로 정치범인 척 연기한다. 그는 거리의 악사로도 변장하는데 그 모습은 단지 노래를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치범인 된 인물과 판박이다. 이렇게 그는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자리 바꿈을 한다. 이렇게 연속적인 자리 바꿈은 누구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으며 언젠가는 자신이 배척했던 바로 그 자리로 가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권력까지 포함하여 사람의 일에 있어 항상성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구든 언제든 자신이 피해 입힌 자의 위치에 설 수 있다. 오늘 내가 가한 증오와 폭력을 내일 내가 받을 수 있다. 그 악순환과 무상성을 알기에 모흐센 마흐발바프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의 입을 통하여 '춤을 추게 합시다!'라고 외치게 만든 게 아닐까 싶다.



 왜 하필 춤일까? 사실 춤은 이 영화에서 '자리바꿈' 만큼이나 아주 중요한 키워드다. 춤은 마리아를 그리워하는 손자의 회상 장면을 통해 영화에서 아주 많이 반복될 뿐만 아니라 독재자는 거리의 악사로 변장하기 위해 자신이 기타를 치고 손자에겐 여장을 시켜 춤을 추도록 만든다. 손자가 회상 장면 속에서 마리아와 같이 추는 사교 댄스와 실제로 혼자 추는 춤은 여러 면에서 아주 대조적이다. 여기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이 둘 있다. 하나는 독재자가 민중의 저항에 위험을 느껴 국외로 망명하러 공항으로 가자 그 전까지 독재자를 위해 연주하던 악대가 독재자가 공항에 나타나자마자 군복으로 갈아입고 독재자에게 총질을 하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다른 하나는 혁명 후 검문을 하던 군인들이 자신들이 3개월치나 월급을 못 받았다면서 검문에 걸린 사람들의 물건을 강탈하는 장면이다. 그 때 그는 독재자에게 노래를 시키고 모두 따라 부르게 하면서 물건을 갈취한다. 이제 막 결혼한 신부를 강간할  때도 모두에게 노래와 춤을 시킨다. 춤은 이렇게나 많이 나오고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감독은 왜 이렇게 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기도 영화 감독으로서 속해 있는 예술의 의미를 묻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춤은 예술의 상징이다. 독재자 체제에서의 예술은 손자의 회상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오로지 체제의 지속을 위해서만 기능하는 존재였다. 한 사람의 쾌락을 위해서만 부역하는 것에 불과했다. 



 군인들이 하게 만들었던 노래와 춤도 마찬가지다. 모두 현실에 존재하는 시대의 어둠을 가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불법에 조용히 순응하거나 참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예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예술은 권력의 시녀였고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민중을 길들이는 아편일 뿐이었다. 감독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옥에 갇혀 있다 이제 막 풀려난 악사의 반주에 맞춰 바다를 향해 혼자 춤을 추고 있는 손자의 모습을 통해 그런 예술과 대비되는 진정한 예술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 때 손자는 할아버지 독재자와 죽을 운명이었다. 독재자와 같이 자기도 죽여달라며 목을 내놓던 정치범의 호소 때문에 겨우 목숨을 구한 참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 시간이 계속될 지 장담할 수 없다. 할아버지가 처형되면 손자 역시 처형될 가능성이 높다. 손자는 그 때 있었던 사람들 중 가장 약한 존재였다. 악사는 바로 그 손자를 위해서만 연주하며 손자는 춤을 춘다. 이것이 바로 감독이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의 모습이다. 바로 사회의 가장 한없는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예술.



 조르조 아감벤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회의 호모 사케르들을 위한. 예술이 강자가 아니라 약자를 향해야 한다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무언의 외침은 폭력이 아니라 용서(폭력도 끝내는 강자가 되어 보려는 욕망의 굴절된 표현일 지 모른다.)가 결국은 진정한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말과 함께 꽤 묵직한 울림을 준다. 감독은 이렇게 예술가로서의 책임을 자각한다. 물론 이 예술엔 언론도 포함된다.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부역하지 않으며 오로지 약자를 위해서 그들의 고통과 목소리를 대변하며 거대 권력에 주눅들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예술의 모습은 우리들에게도 매우 절실한 것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런 면 때문에라도 '어느 독재자'는 우리가 꼭 한 번은 봐야할 영화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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