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반윙클의 신부
이와이 슌지 지음, 박재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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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립반윙클의 신부'는 영화 감독으로 더 유명한 이와이 슌지의 소설이다. 이와이 슌지의 영화들은 참 많이 봤는데, 소설은 처음이다. 결국 이 소설도 슌지의 손에 의해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소설의 언어들이 어떻게 영상으로 옮겨졌을 지 궁금하다. 일단 이야기는 22살의 한 여성이 주인공이다. 이름은 나니가와 미나미. 그녀를 단적으로 정의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선택해 본 적이 없는 사람. 그녀는 항상 남에게 조언을 구하고, 거기에 떠밀리듯 삶을 살아온 존재다. 그래서 끝내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이 기본 줄거리.




 시작부터 그랬다. 처음은 미나미가 22살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자와 연애하는 것이지만, 그 연애 역시 자신이 정말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22살까지 남자 경험이 없다는 사실에 너무 초조해진 나머지 그만 SNS로 섣불리 데이트 약속을 하고 그러다 첫만남에 바로 연애까지 이어져버린 경우였다. 그녀는 사실 남자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은 없었다. 사랑이 아니라 그저 남자가 연출하는 분위기에 편승한 것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또 다른 자아를 나타내는 SNS의 다른 계정, 클램본은 이런 말을 남긴다.


 맞선 사이트에서 남자 친구를 발견했다.

 어쩐지 너무나도 쉽게 손에 넣었다.

 인터넷 쇼핑을 하듯이 간단히 한 번의 클릭으로.

 정말 이런 식으로 남자를 만나도 되는 걸까?

 그 남자도 나를 손쉽게 손에 넣은 여자라고 생각할까? (p. 15)


 그녀의 삶은 내내 이렇다. 편승과 남들에게 조언 구하기의 무한 루프(loop)다. 파견제 교사인 그녀가 고작 교실에서 마이크로, 그것도 학생들이 요청해서 딱 한 번 수업했다는 사실로 학교에서 짤릴 때도 그랬고 결혼을 결정하는 것도 그랬다. 자신의 부모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이혼했다는 사실을 남자 친구에게 숨길 때도 그랬으며 결혼식장에 미나미가 초대할 손님이 많이 부족하자 신랑을 속이고 하객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도 그랬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다고 의심되는 상황이 되었을 때도 그랬고, 남편이 자신의 여자와 바람을 피고 있다면서 낯선 남자가 찾아왔는데 그 사실을 숨기는 것에만 급급해 결국 이혼까지 하게 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녀는 정말 단 한 번도 자신이 주체가 되어 닥쳐 온 상황과 정면으로 맞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남에게 조언을 구하고,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의 등 뒤로 피하려고만 했었다.


 어쩌면 그녀의 연약함은 바로 우리의 연약함인 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삶의 발을 거는 어려움 앞에서 정면 승부 보다는 나 아닌 뭔가에 무임 승차 하여 넘어가기를 더 많이 바라는 편이니까. 그런 우리기에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그럴수록 더 커다란 어려움만 닥친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안다. 미나미 역시 그렇다. 등 뒤로 피하면 피할수록 그녀에게 닥쳐오는 것은 더 춥고 어두운 혹한의 칼바람 뿐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왜 제목에서 미나미를 '립반윙클의 신부'라 불렀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물론 립반윙클은 마지막에 미나미가 만나는 여배우 마시로의 SNS 닉네임이지만, 실제로 둘이 같이 웨딩드레스를 입고 한 침대에 나란히 잠이 들기도 하지만, '립반윙클'이 정말 뜻하는 것은 거기에 있지 않다. 원래 '립반윙클'은 워싱턴 어빙이 쓴 단편에 나오는 인물이다. 아내의 잔소리를 피해 사냥을 떠났다가 우연히 만난 유령들의 술을 훔쳐 먹고는 20년을 자버린 사내. 그가 바로 립반윙클이다. 그는 잠으로 시간을 잃어버린 자다. 잠은 그대로 주체가 활동을 정지한 시간, 즉 주체가 주체로 있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그 잠 속에서 립반윙클의 시간은 죽은 시간이 된다. 그저 고여서 썩고 결국은 부스러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시간. 계속 흐르긴 하나 그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간. 바로 한결같이 남에게 선택을 맡겼던 미나미의 시간과 똑같다. 그래서 미나미는 '립반윙클의 신부'인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모습은 그녀를 둘러싼 두 명의 대표적인 인물들 때문에 더욱 두드러진다. 하나는 '아무로'(닉네임으로 '기동전사 건담'의 주인공의 이름인, 그 '아무로' 맞다.) 다른 하나는 마시로다. 미나미와는 반대로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한 주체로서 영위하려는 존재들이다. 아무로는 돈만 내면 어떤 일이든지 다 처리해 준다. 그 어떤 의뢰든지 피하지 않고 맡아서 해낸다는 점에서 아무로는 미나미와 너무나 대조된다. 마시로도 그러하다. 그녀는 미나미보다 훨씬 더 어둡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그런 삶일지라도 남에게 의탁하지 않으며 최후의 한 순간까지 자신의 온전한 의지로 살아내려 애쓴다. 사실 미나미는 이런 존재들의 생생한 존재감 때문에 변하는 것이다.


 사실 마시로는 소설 앞부분에 미나미가 우연히 만난 대학 동창 니타도리와 연장선 상에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미나미에게 스스로 AV에 출연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는데,(스포일러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마시로는 현역 AV 배우다.) 그 때 미나미는 고백하면서 우는 그녀가 자신에게 위로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 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녀는 빨간 도깨비와 파란 도깨비 동화를 떠올린다. 사람과 친해지고 싶었던 빨간 도깨비들은 사람들이 먼저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릴 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사람들은 오지 않고 계속 침울해져만 가는 빨간 도깨비를 위해 스스로 나쁜 짓을 하여 상대적으로 빨간 도깨비의 좋은 점을 사람들에게 알려 결국 사람들과 친해지게 만드는 이는 파란 도깨비다. 한 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마냥 수동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뤄지길 기다리는 빨간 도깨비가 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의지 않고 스스로 적극적으로 쟁취하려는 파란 도깨비가 있다. 소설에는 그렇게 빨간 도깨비와 같은 존재와 파란 도깨비 같은 존재가 등장한다. 미나미와 그녀에게 인터넷 과외를 받는 유일한 학생인 카논이 빨간 도깨비고, 아무로와 마시로 그리고 니타도리는 파란 도깨비다. 젊은 직원과 바람이 나서 이혼해 버린 미나미의 엄마도 파란 도깨비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인생의 모습을 선택하고 거기에 따르는 책임을 기꺼이 떠맡는다는 의미에서.


 이런 면에서 보자면 카논은 빨간 도깨비인 미나미의 자아를 인격화한 인물이기도 하다. 카논은 어디에도 깃들지 못하는 존재다. 오직 화상으로 만나는 미나미만이 그녀를 자신의 바깥 세계와 이어주는 유일한 접점이다. 그런 카논은 미나미가 시키는 것을 묵묵히 하며, 모르는 것은 늘 미나미에게 질문한다.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모르는 것을 스스로 찾아 볼 생각을 않는다는 점에서 카논은 미나미의 판박이다. 더구나 그녀는 소설 끝까지 작은 화상 안에서만 존재한다. 마치 미나미 의식의 크기와도 같이. 사실은 미나미가 그 화상을 통해 자신의 자아와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미나미가 진정한 주체가 되어 자신의 삶을 살아보기로 결단한 순간, 카논 역시 도쿄로 가보고 싶어한다는 것은 더욱 카논을 미나미의 자아로 보도록 만든다.


 과연 어떤 도깨비가 되는 것이 더 좋은 일일까?

 그것은 소설을 읽으면 자연히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혹시 파란 도깨비가 더 좋아서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 여기 마시로가 소설에서 직접 밝힌 팁을 공개하려 한다. 읽다보면 왠지 울컥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개인적으로.


 "나 따위를 위해서. 그 점원이 부지런히 봉투에 물건을 담아 준다고. 이런 쓰레기 같은 나를 위해서.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꽉 조여 오면서 괴로워져서 울고 싶어져. 나에게는 행복의 한계가 있어. 더 이상은 무리다 싶은 한계가 그 누구보다 더 빨리 찾아와. 그 한계가 개미보다 작아. 이 세상은 사실 행복으로 가득 차 있어. 모든 사람들이 잘 대해 주거든. 택배 아저씨는 내가 부탁한 곳까지 무거운 짐을 날라 주지. 비 오는 날에는 모르는 사람이 우산을 준 적도 있어. 하지만 그렇게 쉽게 행복해지면 나는 부서져 버려. 그래서 차라리 돈을 내고 사는 게 편해. 돈은 분명히 그런 걸 위해 존재할 거야. 사람들의 진심이나 친절함 등이 너무 또렷이 보이면 사람들은 너무 고맙고 또 고마워서 다들 부서지고 말 걸? 그래서 모두 돈으로 대신하며 그런 걸 보지 않은 척하는 거야. (p. 266)


 이게 어째서 팁이야? 하고 묻는다면 너무 무책임한 것 같지만 그래도 직접 읽어보면 알게 되리라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특히 엄마의 바람으로 너무나 쉽게 붕괴되어버리는 미나미의 가족과 그녀가 하객 아르바이트로 일원이 된 한 신랑의 가짜 가족이 보여주는 차이를 생각한다면 더욱 잘 느껴지지 않을까 한다.


 대가로 지불하는 돈은 정말로 타인의 기대에 아낌없이 부응하려는 그들의 친절과 노력이 그러지 못하는 내게 너무나 부끄러움으로 다가와 그런 나를 방어하기 위해 '그저 그들은 돈을 위해 저러는 것 뿐이야'로 쉽게 무마해 보려는 저의의 표현일 지도 모른다. 정녕 내가 부서질 지라도 그들의 친절과 노력에 순수하게 감사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물론 대가도 제대로 지불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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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6-10-15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빨간 도깨비와 파란 도깨비 이야기 봤어요 빨간 도깨비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싶지만 사람들은 빨간 도깨비를 무서워해요 파란 도깨비는 친구가 사람과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빨간 도깨비한테 자신이 사람을 괴롭히는 척할 때 자신을 멀리 쫓아내는 척하라고 하죠 그 일이 있은 뒤 빨간 도깨비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요 하지만 파란 도깨비는 멀리 떠나요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것과 친구 하나와 친하게 지내기, 빨간 도깨비는 둘에서 하나만 할 수 있다는 걸 몰랐을지도 몰라요 그걸 알았다면 파란 도깨비가 꾸민 계획을 따르지 않았을지도... 파란 도깨비는 친구가 행복하다면 괜찮다 생각한 거기도 합니다 이걸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만든 대로 살고, 누군가는 자기 뜻대로 산다고 볼 수도 있다니... 그냥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으로만 보고 싶기도 하네요

사람은 겉만 보고 빨간 도깨비가 무서울 거야, 했어요 그런 게 진짜 나오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지만... 겉만 보고 다른 사람이 어떻다 생각하지 않아야 하죠 그런 것도 생각할 수 있는데... 이와이 슌지가 그것을 봤을 때 한 생각이 이 책에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어떤 일을 했을 때 다음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고 하죠 그게 좋은 일일 때는 하고 싶어도 안 좋은 일일 때는 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좋은 쪽으로 흐르게 하면 안 될지... 어떻게든 그 방법을 찾아서... 둘 다인 것 같기도 해요 어딘가에 묻어가고 싶기도 하고,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한... 이건 더 안 좋은 걸까요 묻어가도 괜찮은 것과 그러지 않아야 할 것을 잘 구별한다면 좀 낫겠죠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