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마지막 날. 잠깐 비가 내렸다. 하늘이 낮고 흐리다. 벨벳 언더드라운드의 'After Hours'를 반복해서 들었다. 그룹의 유일한 홍일점 드러머인 먼로 터커의 음성으로. 역시 이런 날엔 이 음악이 잘 어울린다. 동영상을 링크하려 했는데, 곡의 분위기를 음반만큼 전달하지 못 하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이 노래엔 이런 후렴이 있다. '당신이 그 문을 닫으면, 난 다시는 하루를 볼 수 없을 거예요'. 이 사회엔 지금 이런 호소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문 닫는 일들이 많다. 닫힌 문 안쪽에 홀로 남게되는 이들에게 제발 나만 혼자라는 두려움, 잊혀진다는 두려움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름이다. 문은 확실히 열어두는 게 좋다.


 장르 소설을 즐겨 읽는다. 리뷰로도 쓴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쓰는 속도는 읽는 속도를 못 따라간다. 읽은 책과 리뷰로 쓰는 책은 압도적으로 차이날 수밖에 없다. 더하여, 내 기억력엔 한계가 있고, 마치 후발 주자들이 계속 골인 지점으로 뛰어들듯 몰려오는 책들에게 다시 또 기억의 일정 부분을 할애하다 보니 리뷰로 복기하지 않은 책들은 어느 샌가 가물가물 해져 버린다. 나이가 들면 기억이란 데이터베이스도 꼬이게 된다. '미스터 홈즈'란 영화를 보라. 기억력 하면 최고라 자부하는 셜록조차, 나이가 드니 자랑하는 기억의 궁전이 마구 엉클어지지 않았던가.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드'의 대사 중에 이런 게 있더라. 한 할아버지가 한 할머니와 함께 첫사랑의 추억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뜻하지 않게 1박을 같은 방에서 하게 되었을 때 나온 말이다. 할머니가 방 중앙에 보이지 않는 금을 긋고 넘어오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경고한다. 할아버지는 알겠다면서 자리에 눕는다. 그러고는 한숨을 섞어 이렇게 말한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난 지금 당장이라도 그 선을 넘어가 널 안고 싶은데, 나이가 드니 그 짓도 도저히 못 하겠다. 이거 너무 졸려서...'


 교훈은 뭐든 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미루지 말고 체력이 받쳐줄 때, 열심히 읽자. 여력이 남는다면 쓰기도 하자. 그렇게 미처 리뷰로 쓰지 못한 책들을 이 자리에서 살짝 언급해 본다.


 먼저, 켄 브루언의 '밤의 파수꾼'이다.

 올해 가장 최고의 책 을 선택 하라면, 나는 아직 반도 안 지났지만 이 책을 꼽고 싶다.

 원래 제목은 'THE GUARD'. 아일랜드 경찰을 뜻하는 말이다. 켄 브루언은 우리나라에서 별로 인기가 없는 작가다. 51년, 아일랜드 출생으로 93년에 데뷔한 그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명한 시리즈가 두 개나 있는 데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이 책을 제외하고 '런던 대로' 하나 뿐이다. 그나마 그것도 콜린 파렐 주연의 영화로 만든다기에 그 바람을 타고 나온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켄 브루언의 작품을 영영 만나지 못했으리라. 그래도 어쨌든 그렇게라도 나와 그동안 켄 브루언의 소설을 목마르게 기다리던 이들에게 병아리 눈물만큼이나마 해갈을 시켜주었다. 하지만 그조차 영화가 망하고 소설 역시 별다른 인기를 얻지 못한 탓에 켄 브루언의 차기작 도래는 요원해지고 말았다. 그게 2011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5년이 지나 불쑥 켄 브루언의 다른 책이 나온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제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자꾸 샐린저의 '호밀 밭의 파수꾼', 하퍼 리의 '파수꾼'이 연상된다.) 언급을 자제하고 싶은데, 여하튼 '밤의 파수꾼'은 켄 브루언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잭 테일러 시리즈'의 시작을 여는 책이다. 잭 테일러 라니, 주인공 이름을 막 지은 티가 난다. 이것만 봐도, 켄 브루언은 이 작품을 쓸 당시만 해도 여기에 대해 별 기대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작가가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저 자기 마음 흐르는 대로 써 내려간 소설이다. 이런 사실은 직접 읽어보기만 해도 확연히 다가온다. 소설은 하드보일드에 속한다. 그러나 탐정이 나오고, 의뢰를 받아 수사를 하는 것말고는 우리가 기대하는 하드보일드의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느슨한 서사, 서스펜스 제로. 게다가 탐정은 신념과 활력 보다는 끊임없는 자기 회의와 의기 소침에 빠져들어 '도대체 수사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하는 독자의 푸념을 절로 일으킨다. 때문에 소설은 재미를 더 치중하는 이들에겐 확실히 허들이 높다. '왜 내가 이걸 읽고 있지?' 하는 생각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적인 분위기, 실존적 고뇌 이런 것을 원한다면, 소설은 당신의 마음을 기꺼이 열게 만들 것이다. 여기엔 부조리한 고통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이해하지도, 치유를 주지도 못하는, 왜소하고 무기력한 존재의 내면이 투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독특한 문체와 캐릭터로 재현된다. 때로는 진한 블루스의 감성으로, 때로는 프리 재즈적인 감성으로 켄 브루언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바로 여기에 당신과 꼭 닮은 사람이 있다고. 때로 우리는 누군가에게서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는 것이 나 혼자 만은 아니다'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안과 버틸 힘을 얻는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영혼의 이웃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잭 테일러는 당신의 이웃이다.


 다음은, 마에카와 유타카의 '크리피'



  '절규'를 끝으로 공포 영화를 다시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모처럼 다시 만드는 공포 영화의 원작이라고 하니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현재 일본 호세이 대학 국제문화부 교수로 재직 중인 마에카와  유타카. 켄 브루언과 똑같이 51년 생이다. 물론 일본인. '크리피'는 7회 일본 미스터리문학대상 신인상 수상작이라고 한다. 평범해 보이기만 하는 이웃집 가장이 실은 겉보기와 전혀 다른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아이디어에 기반하고 있는데, 기요시가 공포 영화로 만들었다고 해서 공포물인 줄 알았지만 공포물은 아니었고 스릴러에 가까웠다. 읽은 느낌을 간단히 말하자면, 실망스러웠다. 그런 소설이 있다. 반전의 효과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이전의 설정과 이야기가 붕괴되는. '크리피'가 그러하다. 결정적으로 이 소설은 핍진성이 부족해 보인다. 범인도, 피해자도 행동에 개연성이 부족하다. 이야기를 작가 뜻대로 끌고 가기 위해 인물과 상황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장르 소설일 경우 독자에게 "과연 이렇게 될까?" 하는 의문을 자꾸 가지게 하는 것은 실패작이라 생각한다. '크리피'는 그렇게 만든다. 혹시 나만 그렇게 보이나? 정녕 내가 프로불편러라서 그런 것은 아니리라 믿는다.

 기요시 감독은 소설과 다른 형식을 취했다. 주인공의 입장이 바뀐 것인데, 소설에서 주인공은 구경꾼 역할이었다. 소설이 묘사하는 비극에 그는 간접적으로만 연루되었다. 하지만 기요시는 직접 당사자가 되도록 했다. 소설을 읽어본 결과, 나는 기요시의 입장이 낫다고 생각한다. 결정적으로 소설 초반에 묘사된 주인공의 불륜과 뒤이어 겪게 되는 사건의 의미가 전혀 맞물리지 않아, 도대체 왜 불륜이란 설정을 주인공에게 부여했을까 의아했다. 그런데 기요시의 설정대로라면 불륜이 의미를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크리피'는 기요시가 자신의 공포 영화를 통해 꾸준히 천착해 왔던 것, '괴물이 나타났다. 우리가 변해야 한다'라는 노선을 여전히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영화 '크리피'의 예습으로 읽어 본 것이다. 소설과 영화를 비교하면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가노 도모코, 일곱 가지 이야기.



 가노 도모코의 데뷔작이라고 하던가. 과연, 신인다운 풋풋함이 넘쳤던 작품이었다. 가노 도모코의 소설은 우리나라에 일본추리작가협회 수상작인 '유리 기린'을 비롯하여 여러 권 소개된 것 같은데, 정작 읽어 본 것은 '손 안의 작은 새'밖에 없다. 그 역시, 차가운 미스터리 소설과 어울리지 않는, 따스한 감성으로 풍부한 소설이었다. 그래서 가노 도모코의 이름은 내게 마쉬멜로 같은 미스터리를 쓰는 작가로 각인'되어 있는데, '일곱 가지 이야기'도 그랬다. 액자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일곱 가지 이야기'란 그림책이 중심인데, 그것을 읽고 이야기에 반한, 이제 갓 스물이 된 여성이 작가에게 보내는 팬레터와 그에 대한 작가의 답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여성이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난 기묘한 일을 편지에 적어 작가에게 보내면, 작가가 답장에서 자신의 추리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이 때, 여성은 일상의 미스터리를 꼭 '일곱 가지 이야기'의 그림책에 나오는 한 이야기와 결부시키므로, 그 내용이 소개되기도 하여 액자 소설 같아 보인다는 말을 참 시시콜콜 잘도 하고 있구나.

 어쨌든, 편하게 읽었다. 사소한 미스터리에 일상을 가볍게 터치하듯 진행되는 소설이라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너무 부담이 없어서 오히려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는 말을 이렇게 사족처럼 붙여두는 나는 음흉한 사람이려나. 어쨌든 신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감안하고 읽으면 일상 미스터리로써 괜찮은 축에 속한다. 신인만이 받을 수 있는 아유카와 데쓰야 상을 받았다. 92년에.

 네, 92년 입니다. 90년대 초에 소설이 나왔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두세요. 그래서 소설엔 휴대폰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인터넷 검색을 하지 않고 백과사전을 꺼내 봅니다. 하하^^


 마지막으로,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



 드디어, '종의 기원'이구나. 그래, 읽었다. 그것도 나오자마자. 양장본을 가지고 있다는 게 그것을 증명하겠지? 아마도. 하지만 리뷰로 쓰지 않았다. 실망했거든. 안 좋은 점을 줄줄 쓰는 게 싫어서. 어쩌면 그래서 이 페이퍼를 쓰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팬심으로 하는 불만 토로의 장 비슷하게. 맞다. 이게 진짜 이유다.

 나는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과 '28'도 읽었다. '종의 기원'에서 작가가 악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해 보려했다고 해서 혹시 전작과 비교해 보면 처음 읽었을 때에 든 실망감을 긍정으로 바꿀 소지도 있지 않을까 하여 시간을 들여 재독까지 했다. 그러나 역시 반전은 없었다.여전히 '종의 기원'은 읽은 것 중에 가장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종의 기원'의 유진은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녀가 그려내고 싶었던 악의 원점일 것이다. 그녀는 인간 본성에 깃들어 있는 악이라는 '어두운 숲'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했는데, 그것의 온전한 초상이 잘 잡히지 않아 '7년의 밤'의 오영제로, 또 '28'의 박동해로 다양하게 변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드디어 '종의 기원'에서 악인의 진정한 기원이자 실체로서의 유진을 드러냈다는 것인데, 내게는 성과가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일단 인간 포식자로 설정된 유진조차 그 악행에 있어서는 '28'의 동해보다 떨어져 보인다. 아마도 정유정 작품 중 최고의 악인은 유진이 아니라 바로 이 동해라고 생각한다. 설령 포식자라는 살벌한 닉네임이 없더라도 말이다. 그래도 '28'을 읽을 땐 동해의 악행 때문에 짜증이 났었다. 얼른 심판 받기를 속으로 바랐다. 나의 이런 반응은 작가가 악의 묘사에 성공했다는 것의 증거다. 하지만 유진은 전혀 그런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짜증은 커녕 유진의 모든 행동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소설 초반 자신의 살인을 모조리 잊었다. 팔에 엄마가 물어서 남긴 분명한 상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간밤에 일어난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망각은 자신의 악행을 대면할 수 없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것일까? 아니면 주인공의 실체를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단순한 소설 장치로만 기능하는 것일까? 유진은 자신의 악행이 들통날 위기의 상황마다 능수능란하게 대처하지도 못했고, 스스로에게마저 악행을 변명했으며, 자신의 본성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회의 그리고 가책에 빠지기도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이모로부터 포식자로 분류되어 집중 관리를 받아온 존재로서는 참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렇게나 미리 알고 관리를 해왔는데도 엄마와 이모는 정작 유진의 악행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어설프게 대처하는지, 그것도 이해가 안 되었다. 엄마는 유진의 첫 살인을 목격한 날에 유진을 다짜고짜 죽이려들고(이것은 과거에 유진 때문에 남편과 형이 죽었을 때의 반응과 얼마나 다른가. 그 때도 엄마는 유진의 고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죽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인간으로 만들려 한다. 너무 어려서 그랬나? 그렇게 오랜 세월 관리 했는데도 결국 살인자가 되었기에 절망해 버린 것인가? 그럼, 형의 대리자인 해진은? 입양한 아들이니까 관계없다고 생각했나? 엄마는 벌써부터 유진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은데, 그래서 동생에게 상담도 한 것 같은데 왜 해진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뒀을까? 솔직히 해진은 이 소설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캐릭터다. 초반, 유진에게 살인이 들킬지 모른다는 서스펜스를 주는 것 말고는.), 이모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유진을 감시하던 언니가 갑자기 사라졌는데도 유진을 경계하지 않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주요 캐릭터들이 내게는 어긋나 보였다. 이렇게 행동할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그래서 마리오네트 같다고 여겨졌다. 작가가 원하는 자리로 무조건 가야 하는 존재들. 그렇게 보였다. 이야기가 확고하게 설정된 대로 흘러가도록 복무하는 것말고는 아무 역할이 없는 존재들. 그래서 이야기도 재미없었다.

 사실 '종의 기원'은 너무 늦게 나왔다. 우리는 악의 초상에 대해서라면 너무나 많은 작품을 가지고 있다. 일단 정본으로써, 짐 톰슨의 '내 안의 살인마'가 있고, 프레데터를 자식으로 둔 엄마의 내면을 헤아리고 싶으면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케빈에 대하여'를 읽어도 된다.


 

거기서의 악은 유진과 많이 다르다. 그들은 태연히 악을 저지른다. 망각도 회의도, 번민도, 죄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냉정하게 계산하고 최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움직인다. 자신에게 위해가 될 것 같은 존재는 그 어떤 연민의 개입도 없이 제거한다. 그것에서 우리는 악의 순수한 초상을 본다. 케빈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내 이성을 모조리 초월한 그 존재 앞에서 우리가 짓는 것은 그저 망연자실한 표정 뿐이다.


 나는 '종의 기원'이 가진 근본적인 출발점이 잘못되었다고 본다. '종의 기원'은 작가 말대로 내 안에, 내가 몰랐던 어두운 숲을 내가 발견해 나가는 과정으로 그렸다. 그는 그런 악이 인간 본성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독자 역시 유진을 별개의 존재로 여기지 않도록 원해서 그렇게 구성했으리라. 하지만 이런 접근이 유진과 유진의 살인을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깊은 어둠이 아니라, 우연의 상황이 초래한 개인의 특별한 비극으로 더 보도록 만든다. 유진이 그렇게 선명한 악도 아니고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할만큼 악랄하게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동해는 그렇게 보였다. 유진은 포식자라기 보다는 겁먹은 아이처럼 보였다. 다만 충동을 조절하지 못해서, 또는 너무 두려워서 살인을 저지르는. 차라리 포식자 설정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조금은 유진을 납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작가는 자신의 말처럼 쓰면서 정말 한계에 봉착했던 것 같다. 엄마의 일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알게되는 설정은 얼마나 쉽고도 그래서 조악한 장치인가? 모든 사실을 알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죽는 이모와 해진은 또 어떤가? 그들의 무력함은 그대로 작가의 어쩔 수 없음을 드러내는 것 같다. 쉬운 도전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설익은 결과물을 내기 보다는 좀 더 숙성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좋아하는 작가이기에 아쉬움이 더 커진다. '28'에서도 느꼈던 것인데, 현재 작가는 '7년의 밤'에서 보여주었던 깔끔한 서사의 정돈을 전혀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28'은 이야기가 흘러 넘쳐 작가 자신조차 제대로 정돈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있었고, '종의 기원'은 이야기에서 작가가 어디에 자신의 포지션을 정해야 할 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으로, 일반화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좀 더 서사의 통제력을 키우고 자신의 관점을 확실히 잡는다면, 다시금 '7년의 밤'처럼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 원, 그냥 가볍게 그리고 적당한 길이로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나 많이 써버리고 말았다. 진이 빠진다. 나조차도 이야기를 통제하지 못해서 이런 꼴인데 감히 누구를 충고한단 말인가? 짧게 자조하고 길게 반성한다. 어쨌든 이것으로 채 리뷰로 옮기지 못한 책들에 대해 끄적이는 것을 마친다. 그래도 아직 좀 남았다. 그것은 다음에 또 정리하기로 하고(원래 종의 기원 때문에 쓴 것이라 과연 쓰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20000 GUN GUN(이런 표현은 차라리 안 하는 게 좋을 지도. 웬 병맛?)...



But if you close the door,
 I'd never have to see the day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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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슬비 2016-06-30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종의 기원 그냥 그랬는데, 헤르메스님의 글을 읽으니 제 머리속도 정리가 되는것 같아요.
`케빈에 대하여`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ICE-9 2016-06-30 21:16   좋아요 0 | URL
앗, 보슬비님, 말씀 감사드려요. `케빈에 대하여`는 정말 괜찮더군요. 저는 틸다 스윈튼이 엄마로 분한 영화도 봤는데, 그것도 잘 만들어졌어요. 유진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 그러니까 괴물을 낳아버린 엄마의 처절한 현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눠져야 하는 책임으로 인한 고통 같은 것은 오히려 이 소설을 통해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16-07-01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03 14: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