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을 봤습니다. 스포일러 많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말아 주세요. 이 영화는 스포일을 당하면 영화에서 가장 핵심 장면 중 하나인 후반이 의미없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영화는 오직 그것만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종구의 혼돈을 관객의 혼돈으로 만드는 것. 그래서 믿음과 의심 앞에서 불안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약한 부분을 절감토록 하는 것. 그것이 목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스포일러를 무조건, 모조리 피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나홍진 감독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추격자'와의 유사성이었습니다.

 '곡성'은 여러 면에서 '추격자'와 비슷합니다. 일단 주인공 종구(곽도원 분). '추격자'에서 포주인 주인공 중호(어쩐지 이름마저 비슷하게 느껴지네요)처럼 여성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종구는 장모와 아내 그리고 딸로 이루어진 가족 내에서 유일한 남자입니다. 종구의 직업은 경찰. 중호도 전직 경찰이었지요. 사건에 개입되는 방식도 유사합니다. '곡성'의 첫 장면은 아침 일찍 갑자기 걸려온 전화로 인해 종구가 사건 현장으로 호출되는 장면입니다. 그는 그렇게 사건에 발을 디디게 됩니다. '추격자'에서도 중호가 직접 사건에 뛰어들게 되었던 것은 '4885'라는 전화번호 때문이었죠. 주인공 자신이 정말 마주해야 하는 사건이 다가오는 방식도 비슷합니다. 모두 소문이 먼저였습니다.


종구는 동료 경찰이 말해준, 지금 동네에 떠돌고 있다는 일본 외지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먼저 들었었죠. 중호 역시 '추격자'에서 자신이 데리고 있는 여자로부터 사건의 진짜 내막에 대한 소문을 먼저 듣게됩니다. 그 전까지 중호는 여자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돈을 떼먹고 도망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반응도 똑같습니다. 종구도, 중호도 처음엔 믿지 않습니다. 소문의 당사자와 첫 대면이 우연이라는 것도 겹칩니다. 종구는 일가족이 몰살된 사건 현장이자 불타버린 집터에서 사건을 모두 목격했다고 말하는 무명을 찾다가 느닷없이 조우하고, '추격자'의 중호도 자신이 미끼로 보낸 미진을 찾다가 자기가 살해한 집주인을 찾아온 부부를 살해하고 어디론가 떠나던 범인 지영민과 갑작스런 차추돌로 만나게 됩니다.



 '미끼'란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이미 '추격자'에서 미끼는 나와 있었습니다. 중호는 4885란 번호를 쓰는 사람이 자신의 여자를 납치해 팔아버렸다고 생각하고 그 자를 잡기 위해 미진을 미끼로 씁니다. '곡성'에서 종구의 딸 이름은 '효진'인데, 아이의 상태가 괴이하게 되자 도움을 청해 찾아온 무당 일광(황정민 분)은 아이가 미끼에 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효진은 중호가 사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 미끼이기도 합니다. 사실 종구는 효진이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사건에 뛰어들지 않았을 겁니다. 영화는 초반에 종구가 얼마나 겁많고 소심한 지를 여러 장면을 통해 보여주니까요. '곡성'의 마지막에서 무명은 종구에게 놈이 원하는 것은 가족들의 피를 말리려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런 면에서도 효진은 피를 말리기 위한 미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광도 종구에게 "미끼를 통째로 삼켜버렸구만'이란 말을 하죠. 


 재밌는 것은 미끼가 되는 존재들도 비슷하게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일단 이름이 미진과 효진으로 비슷하고, 둘 다 미끼가 될 때 몸에 열이 나 아팠습니다. '추격자'에서 미진은 자신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호소하며 남자를 만날 수 없다고 했지만 중호가 억지로 보냈죠. '곡성'에서도 효진이 완전히 달라지기 직전 종구에게 아픔을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모두 그 호소는 의미 없게 됩니다.



 범인의 존재도 그러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추격자의 '지영민'과 '곡성'의 일본인은 적그리스도 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영민은 한 때 교회의 신자였으며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원래 교회 집사 부부의 집이었습니다. 지영민은 자신이 살해한 이들을 모두 그 집 정원에 매장하는데, 영화는 그 때까지 계속 예수상을 조각하는 지영민의 모습이나, 그가 살고 있는 동네의 밤이 십자가로 뒤덮인 장면 등을 통해 지영민을 기독교와 연결시켜 갑니다.(지영민의 골방에 붙어있던 그림과 일본인의 숨겨진 방 벽에 붙어 있던 사진들도 유사한 장면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영민을 이렇게 해석할 여지도 갖게 합니다. 지영민이 사실은 적그리스도고, 그는 살인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며 정원에 매장된 시신들은 모두 자신의 신도인 셈이라고.


 이렇게 보면 '곡성'의 일본인과 정말 유사하죠. 마지막 장면에 얼핏 보이는 일본인 손바닥에 난 성흔, 카메라로 자신이 파멸시킨 영혼들을 속박하는 것 등. 그렇게 그 역시 '추격자'의 지영민처럼 신도를 모으고 있었던 셈입니다. 일광이 말하는 '살'로 표현되는 저주가 그의 복음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은 일광의 굿 장면을 통해 더욱 전면적으로 형상화되었습니다. 결국 살이 향한 곳이 다름아닌 효진의 영이라고 생각할 때, 일광의 굿은 굿이 아니라 예배처럼 보이기도 하니까요. 일단 그가 입은 옷이 전통 무복은 아니죠. 하얀 색이 많은 것이 목사들이 예배할 때 흔히 입는 옷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제 착각일까요? 더구나 말이 전혀 없고(우리나라 굿은 응답 과정이 있으니까요) 시끄러운 음악과 현란하면서 과장된 몸 동작은 부흥회 같기도 하고, 염소 도살 같은 것은 구약의 번제를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다 효진 방의 제단 위에 놓인 소도 있지요. 그 소도 구약 때 번제에 사용되던 대표적인 동물이었습니다. 특히나 일본인이 되살린 시체가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예수의 나사로를 뜻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죽음에서 나사로를 되살렸듯 일본인이 되살린 것이죠. 하지만 일본인이 되살린 나사로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가져 옵니다. 동일한 행위, 정반대의 결과. 일본인이 가진 의미가 보다 명확해지는 순간이죠.


 이런 면에서 '곡성'은 '추격자'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었던 기독교적인 종말론 분위기가 더욱 확대되고 뚜렷하게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수긍한다면 감독이 첫 작품부터 관객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지금도 반복하는 것이며 다만 이번엔 좀 다른 방식을 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추격자'와 '황해'에서 거듭되었던 감독의 말은,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지옥이 바로 우리 발 밑까지 와 있으며 거기서 우리를 구원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추격자는 그래도 중호가 희생자의 아이를 떠맡으면서 희망의 싹이라도 보였지만 '황해'는 그조차 없습니다. '황해'의 주인공을 우리는 구원을 위해 별 짓 다하는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주인공 이름이 무엇보다 여기에 대한 증거가 아닐까요? 구남. 그대로 구원(영화에선 아내로 표상되었죠.)을 구하는 남자로 해석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천신만고라는 말이 결코 비유가 아닐만큼 그는 갖은 구원을 향한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얻는 것은 구원이 이미 상실되었다는 사실과 자신의 초라한 죽음 뿐이었죠. 결국 그는 돌아가지 못하고 황해가 그의 무덤이 됩니다.


 저는 '곡성'에서 종구가 일본인을 잡기 위해 높은 절벽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눈에 띄더군요. '황해'에서도 구남이 추운 겨울날에 높은 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냥 하는 생각으로 들어주셨으면 하는데, 이것은 바벨탑의 은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종종 인간의 능력은 '바벨탑'처럼 얼마나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는가로 그 우수성을 표현하기도 했었죠.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처럼 말이죠. 의미심장하게도 종구가 그 곳에 올랐을 때, 카메라는 흔들려 불안하게 그를 잡습니다. 비상 보다는 추락의 위험을 더 전해주기 위해서 말이죠. '황해'에서도 구남이 산으로 올랐던 것은 달아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총상마저 입어 그 높은 곳은 죽음의 접경이기도 했습니다.



 '곡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구의 몸은 비틀거리기까지 해서 더욱 추락의 위험을 가중시킵니다. 같이 간 친구들이 말리기까지 하죠. 인간의 위대함의 증거가 되었던 가장 높은 곳이 이제는 가장 위험한 곳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높은 곳으로 올라도 구원은 커녕 불안만 가중될 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올라간 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일본인이 바로 아래 있습니다. 이제 곧 지옥을 열 지도 모를 그 존재가, 바로 발 아래 보이지 않게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보기엔 '곡성'의 주제를 집약해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이 지옥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는 것.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 지라도 그것은 바로 우리 발 밑까지 와 있다는 것.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곡성'에선 주로 가족이 거주하는 집이 파괴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적어도 지금까지 이렇게 영화 본편에서 한 가족이 살던 집이 파괴당하는 장면은 감독의 영화에서 없었습니다. '추격자'는 나중에 간접적으로 전해 들을 뿐이었죠. '황해'에서도 가족이 생계와 불륜으로 붕괴되긴 했지만 완전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곡성'은 시작부터 가족 몰살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앞 장면인 종구의 가족이 모두 모여 아침을 먹는 모습에 더욱 대조됩니다. 원래 종구는 아침을 먹지 않고 사건 현장으로 거려 했습니다. 그러나 장모가 이런 말로 그를 붙잡습니다. "사람이 죽었어도, 산 사람은 먹어야 한다."


 '추격자'와 '황해'까지는 그렇게 별개의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습니다. 시대가 불안할수록 종종 가족은, 그들이 거주하는 집은 유일한 피난처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제 그럴 수 없습니다. 가족은 몰살당하고, 그 집은 전소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디에 의지해야 하나? 남은 것은 신 밖에 없습니다. '곡성'은 감독의 작품 중, 처음으로 신이 우리 앞에 현현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마치 마지노선이 무너져버린 것처럼 신이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신이 거하는 장소가 두 번 잡히는데(감독은 성당의 모습을 똑같이 보여 단독자 신이 거하는 장소의 유일성을 강조합니다.), 외관은 언제나 요괴가 출몰하는 어스름의 시간대에 낮게 웅크려 있고, 그 내부는 어둡고 비어있습니다.(외관의 모습은 마지막 장면에서 신이라고 할 수 있는 무명이 앉은 모습과 비슷합니다.) 신부는 작고 초라한 몰골이고, 부제 역시 그리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신인 무명 역시 종구의 비극을 막아주지 못합니다.



 종구에게 종말이 닥쳐온 순간, 신은 무력하게 어두운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있을 뿐입니다.(무명을 신으로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영화에서 가장 먼저 경계를 넘는 자라는 것. 그리고 '금어초'로 경계를 만드는 자라는 것 때문입니다. 경계를 초월하고 짓는 것은 신의 대표적인 속성이죠. 그녀가 종구에게 '아이의 아비가 죄를 지어', '의심' 운운 한 것도 그녀가 신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아이의 아비'는 성경에서 흔히 나오는 표현 방식이고, 죄와 믿음은 종교에서 신의 권위를 위해 가장 강조하는 것들이죠. '욥기'에서 왜 자신이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냐고 욥이 묻자 전혀 알 수 없는 대답을 하여 욥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신처럼 무명 역시 그렇게 대답합니다. 종구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신의 대답은 인간의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데 더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욥'에서 신이 자신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 신조차 무력합니다. 손까지 잡았는데도 종구의 비극을 막지 못합니다. 무기력하게 쪼그리고 앉은 모습이 우리가 영화에서 마지막 보는 신의 모습입니다. 그것은 곧 어둠에 먹힐 것 같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없습니다. 영화 초반의 유모차와 마지막 효진의 모습에서 미래마저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남은 것은 이 끔찍한 지옥으로서의 현재. 종구는 언제가 효진에게 했던,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버린 말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면서(아마도 이름이 종구인 것은 이런 중얼거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마지막 장면의 그를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끝내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 독백은 지금 우리의 모습과 닮았을 지 모릅니다. 장모가 처음 그에게 했던 말. '산 자는 산 자고, 죽은 자는 죽은 자다'. 그 말의 본질은 '아직 우리는 죽지 않았으니 괜찮다. 우리는 그것을 피해 나갈 수 있다.'는 말일 겁니다. '세월호'나 '강남역 무차별 살인' 같은 타인의 비극을 보아도 그게 적어도 내게 닥친 것은 아니니까 무심할 수 있는 마음의 본질에도 놓여 있는 말이죠.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아닐 거야, 난 그렇지 않을 거야' 하는 말은 종구의 마지막 독백처럼 허황된 주문에 불과합니다. 지옥은 벌써 우리 발 아래 와 있고, 언제라도 우리를 삼키려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이 바로 영화 초반에 언급된,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반복되는 누가 복음이 인용된 진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꼭 만져봐야 아느냐란 그 말은 직접 당해봐야 꼭 알겠느냐?'로도 얼마든지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 누가 복음 24장: 37~39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조우하는 비극들 중에 우리와 무관한 것은 없다. '곡성'은 그것을 보여주려는 영화가 아니었을까요? 그랬기에, 영화 초반 그 비극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것처럼만 보였던 종구가 결국엔 같은 운명을 걷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영화 초반, 종구는 사건 현장에 가장 늦게 오고, 와서도 멍하니 구경만 했습니다. 카메라는 현장에서 멀찍하게 벗어난 종구나 화면 구석으로 밀려난 종구를 많이 보여주죠. 그렇게 멀리, 얼마든지 구경꾼이 될 수 있는 그였습니다만 사건의 당사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파출소 정전 장면은 그래서 더 인상적입니다. '버섯 때문이래' 하면서 소문을 전혀 믿지 않았던 종구가 느닷없이 현관 유리창 바로 앞에 나타난 나신의 여인을 목격하니까요. 문자 그대로 그것은 엄습입니다. 예측할 수 없고 그래서 막을 수도 없습니다. 일광의 말처럼 이유도 없습니다. 종구는 이유를 찾고자 하지만 신의 대답은 아무 이유도 없다는 사실만 밝혀줄 뿐입니다. 그러니 더욱 어떤 비극도 나와 별개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떤 타인의 비극이든 무심해서는 안되며 나의 비극인 것처럼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곡성'이 말하는 것은 달아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만이 피할 수 있고, 안심할 수 있는 문제란 없다는 뜻입니다.


 타인의 비극에 대한 둔감과 망각이  결국은 우리 파멸의 열쇠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영화는 잘 보여주는 듯 합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너무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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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다구리 2016-05-27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무섭고 의미잡기가 어려운 줄만 알았는데, 그렇게도 볼 수 있다는 점.. 대단하시네요. 욥기의 주제와 관련시킨 점에 뭔가 머리를 둔기로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최근 <욥의 노래>라는 민음사의 시집에서 비슷한 해석을 읽었는데, <곡성>이란 영화도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놀랐습니다. 이 블로그를 여기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3467498 도서평에 소개할께요.^^

ICE-9 2016-06-09 23:59   좋아요 0 | URL
페라리님, 댓글이 많이 늦었네요. 좋게 봐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곡성의 마지막에서 종구와 무명의 대면은 제게 꼭 욥과 하나님의 대면처럼 보이더군요. 욥이 그 때 신에게 자신의 고통에 대한 이유를 물었듯이, 종구도 무명에게 그런 것을 묻는 것 같았어요. 욥기를 다룬 시집이 있다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꼭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2016-05-30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0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6-07-2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를 그저께 되어서야 한 번 보고,
어제 안 되겠어서 한 번 더 보았답니다..... 참 어려운 영화예요.

댓글을 하두 늦게 달아서 헤르메스님이 확인이나 하실 수 있으실지, ^^, 의심과 두려움, 공포로 인해 악으로 빠지는 인간의 나약함과 그것을 흡수하여 점점 세력이 커지는 ˝악˝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했습니다.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우리는 지나치게 자주 의심과 두려움으로 빠지는데, 신은 그저 ˝하지 마˝ 라고 하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