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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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아나 굶주림이란 말을 들을 때, 얼른 떠오르는 것은 노르웨이 작가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전망도 없이 아주 혹독한 빈곤을 경험했다. '굶주림'은 그 기억을 있는 그대로 토로한 자전적 소설이었다. 읽노라면 너무나 굶주렸기에 뼈다귀에 달라 붙은 살점이라도 먹으려고 주인에게 뼈다귀를 간절히 구걸하는 장면도 나오는 등 정말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묘사가 하도 생생했기에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은 1890년에 나왔다. 무려 120년도 더 된 소설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과거의 일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된 사건이 있었다. 그것도 바로 우리나라에서.


 2011년, 전도유망했던 한 시나리오 작가가 죽었다. 그녀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쪽지가 있었다. 아랫집 문에 꽂혀 있던 삼단으로 곱게 접은 쪽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죄송해서 몇 번을 망설였는데..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 번번이 정말 죄송합니다' 아랫집 주인은 그 쪽지를 보고 쌀과 김치를 들고 그녀의 방으로 찾아갔다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그녀를 발견했다. 크누트 함순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지병이 악화되어 숨진 것이었다. 크누트 함순의 고통이 자신이 가진 품성이나 능력과 무관했듯이, 그녀의 비극 또한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았다. 영화사의 계약을 깡그리 무시한 상습적인 임금 체불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런 불합리한 처사에도 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가중되는 구조적 모순이 불러온 죽음이었던 것이다.


 구조. 난 이것을 주목하게 된다. 사는 곳이 다르고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여전히 닮은 꼴의 비극이 반복되는 것은 역시 개인이 아니라 구조 탓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비단 개인만이 아니었다. 1999년만 놓고 보아도 심각한 기아 상태와 만성적인 영양실조를 다 합쳐 무려 8억 2,800만명이나 되는 세계적 규모의 기아에 있어서도 구조가 져야 하는 책임은 막중했다. 그것을 나는 유엔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 지글러의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이 책은 얇고, 초등학생인 자신의 아이에게 설명하고 있는 형식이라서 이해하기에도 더없이 쉽다. 그러나 품고 있는 내용은 만만치 않다. 기아의 세계적 규모와 원인, 그 실태와 구호가 이루어지는 실제 방식 그리고 기아 사태에 대한 선진국들의 행태와 거기서 비롯되는 국제 기구의 한계와 문제까지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현장에 있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라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사실이 참 많고 놀라게 되는 것도 허다했다. 일례로 아시아의 기아 인구가 5억 5천만명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1억 7천만명 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은 처음 알았고 난민 캠프에서 한정된 식량과 의약품 때문에 이뤄질 수밖에 없는 피난민 아이들의 선별 작업은 가슴 아픈 충격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기아의 규모든, 비극의 반복이든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지구가 현재보다 두 배나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p.37) 데도 상황이 이러한 것은 역시 구조적인 부조리가 깊이 침윤되어 있는 탓이다.


 굶주림은 비극적인 방식으로 더 심해지고 있어. 현재로서는 문제의 핵심이 사회구조에 있단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겐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그런 식으로 식량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매년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있는 거야.(p. 36~37)


 장 지글러는 기아를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로 나눈다. 경제적 기아는 '돌발적이고 급격한 일과성의 경제적 위기로 발생'하지만 구조적 기아는 '한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구조로 인해 빚어지는 필연적인 결과'(p. 49)라고 그는 설명한다. 경제적 기아는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 비록 한계가 있긴 해도 원조와 구호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구조적 기아는 경계도 모호하고 징후도 뚜렷하지 않아 해결이 지난하다.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은 그것이 한 나라에만 국한되지 않고 선진국을 포함해 세계 경제와도 긴밀히 연결된 문제라는 의미에서고, 징후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은 부실한 식생활과 부족한 영양 상태로 인해 여러가지 질환에 만성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로 아무래도 구조적으로 열악한 그들의 환경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치유가 어렵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기아를 정녕 해결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바로 여기서 태동한다. 선진국들은 자신들의 풍족한 육류 소비를 위해 후진국들에게 설령 제아무리 기아에 허덕여도 사료용 작물만을 재배할 것을 강요하거나 더러는 '부르키나파소'의 빈곤을 타파하려했던 상카라를 암살했듯이 자신들이 정치경제적으로 이용하기 쉽도록 항상적인 기아 상태에 일부러 빠뜨리기도 한다. 거기다 세계 곡물 시장을 지배하는 다국적 기업은 자주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후진국들을 곡물 가격 조작의 희생양으로 삼는다. 이렇게 여러 갈래로 세계 경제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한 나라만 바꿔서는 해결이 어렵다. 그래서 점진적 상황 개선을 위해 유엔식량농업기구(FAO)를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들이 있지만 그들의 역할 역시도 재정에 있어서 선진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만큼 수혜자들 보다는 시혜자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선진국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좀 더 이끌어내기 위해 기아에 허덕이는 현실을 투명하게 보고하지 않고 잘 포장해선 조금만 더 힘을 보태주면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취지로 장밋빛 전망만을 내어놓거나 원조한 것들이 수혜지의 권력층에 의해 횡령되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두는 게 바로 그것이다. 국제기구가 자주 후진국 권력층의 비리를 눈감아 주는 것은 그런 권력층으로 후진국을 쉽게 통제하려는 선진국의 바람 때문이다. 이렇게 한 나라의 기아는 결코 원인과 책임이 그 나라에만 있지 않다. 사실은 그들을 이용해 이익을 보려는 보다 더 힘있는 자들의 탐욕이 빚어낸 결과요, 전 세계가 이해관계를 초월한 협력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기아는 내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을 환기시켰다. 우리가 거기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들의 문제는 실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모두는 살바도르에 있는 '캄파 산토라는 묘지'(p. 39)에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 묘지는 죽은 자들의 사회적 계층에 따라 위계적으로 배치되었다. 그들의 자리는 그들의 자의가 아니라 그들의 주검을 옮긴 자들의 타의로 결정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얼마든지 구조적인 모순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장 지글러의 책이 내게 주는 가장 커다란 깨달음이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다른 나라의 빈곤이나 기아 문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저급한 생각으로 그런 문제는 모두 그들 자신이 초래했다고 여겼다. '얼마나 못났으면 저런 상황이 되도록 마냥 내버려두고만 있었을까?'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지글러 자신이 특히 선진국의 권력층과 부자들을 기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진정한 원인이라고 보았던 '맬서스의 자연도태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자연도태설을 입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지글러 말마따나 '자신들은 절대로 굶어죽지 않는다'(p. 38)는 확신 때문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진정시키고,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분노를 몰아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맬서스의 신화를 신봉하고 있어. 끔찍한 사태를 외면하고 무관심하게 만드는 사이비 이론을 말이다.(p. 43)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자기보다 약자인 자들의 고통과 죽음마저도 태연히 용인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글러가 이 책에서 잘 보여준 바와도 같이 나와 그들의 문제는 결코 별개가 아니다. 크누트 함순도, 최고은 작가도, 그들의 힘겨움이 결코 그들 탓이 아니었던 것만큼 나도 얼마든지 그들의 자리로 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온전히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오진 않는다. 사실 지금은 오히려 그런 생각이 팽배해 추락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더욱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 불안과 공포에서 달아나기 위해 한층 더 권력과 자본에 대한 욕망을 키우고 이기적이 되려 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런 상황을 두고 '불안이라는 유령으로부터 해방되려 자유를 포기하는 징후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나만의 꿈과 신념으로 나답게 되기 보다는 힘있고 돈많은 사람을 닮으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불안과 공포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배려와 협력으로 이끌 수 있는 지가 중요해진다. 지글러는 여기까지 나아가진 않는다. 다만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 태도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연대라는 매듭까지 나아가려면 다른 이의 것을 좀 빌려와야 할 것 같다. 여기에 일본의 유명한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오구마 에이지의 책, '사회를 바꾸려면'이 유용해 보인다. 현대인의 불안한 상황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설파하는 오구마 에이지는 그 시작점을 이렇게 정초한다.


 그렇다면 내 생각에 답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감각을 디딤돌 삼아 행동에 나선다. 거기에서 대화와 참가를 독려하며 사회구조를 바꿔 '우리'를 만드는 운동으로 연결시켜 나가는 것이다.(오구마 에이지, '사회를 바꾸려면' p. 375)


 오구마 에이지는 우리를 비관하도록 만드는 그것을 오히려 우리 모두가 실은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확인하는 '그라운드 제로'로 여긴다. 다 같은 출발점에서 2인3각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곳. 이렇게 되려면 먼저 비관을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해야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비관의 진짜 이유는 우리가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에 있다. 남들이 원하는 것과 바라는 지위를 얻는데 실패했다는 마음에 있는 것이다. 결국 나만의 시선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에 길들어진 눈으로 보고 있기에 '나와 타인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마저도 불안과 공포의 불길한 그림자에 물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불안이라는 유령에 지배당하여 자유를 포기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에서 더욱 자유롭게 되어 자기 본연의 시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안으로부터 진정 자유롭게 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또한 나와 너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우리'가 되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오구마 에이지는 지속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치켜드는 불안을 억누르고 내일의 일은 어찌되었든 언제 내가 될지도 모를 어려운 이들을 계속해서 도우라고 말이다. 그렇게 실천으로 꾸준히 보강되다 보면 의혹은 지워지고 신념이 자연스런 태도가 되어 타인 역시도 그것을 보고 응답해 줄 것이라고.


 문득 이번 선거에서 활약한 '시민의 날개'가 생각난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선거 부정을 막기 위해 사전투표함을 지키려고 며칠 밤을 뜬 눈으로 감시했던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나와 다를 것 없는 일반인이었고 누가 알아주거나 돈을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고 밤새 자지 않고 추위 속에서 벌벌 떨면서도 투표함을 지켰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오직 하나, 강자만의 세상이 아닌, 자신도 얼마든지 될 수 있는 약자가 강자만큼이나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나는 16년만의 여소야대 보다 이런 이들의 움직임 속에서 더 큰 희망을 느꼈다. 아니, 이런 그들의 자발적 참여가 있었기에 숙원이었던 여소야대가 이뤄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 속에서 오구마 에이지의 말이 한낱 몽상은 아니며 우리 서로가 모두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는 생각으로 약자를 돕는 연대에 기꺼이 참여한다면 정말로 언젠가는 지글러가 바라마지 않는, 더이상 기아에 고통받는 이가 없는 세상이 도래할 지도 모른다는 믿음마저 가지게 된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지금도 세계 각지의 난민 캠프에서 온갖 어려움과 싸우며 헌신하고 있는 구호단체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지글러는 그런 이들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구호단체는 극단적인 조건에서 활동하고, 갖가지 모순들과 싸워야 해. 그러나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그 모든 손해를 보상받게 되는 것이지.(p. 93)


 지글러가 이 책을 쓴 마음도 이와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닌 그들의 생명이었기에 방기했고 그래서 역사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참사가 된 세월호 2주기인 오늘.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고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마음 중심에다 단단히 결박해두어야 할 말이 아닐까 싶다.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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