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 내 영혼에 조용한 기쁨을 선사해준
이하준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어제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작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같이 온 이가 출판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어 자연스럽게 나온 화제였다. 책들을 헤아리다 보니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모두 실은 우리 불안의 응답이라는 점이었다. 보다 자세히 말한다면, 책을 구매하려는 자가 이미 가지고 있는 불안을 긍정하게 만들고 정당화시켜 주는 책이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주로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의 '미움받을 용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 책만이 가지고 있는 굉장한 내용이 있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 보다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불안이며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경쟁의 고도화와 유연화로 관계가 파편화되고 개인이 점점 고립됨으로써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불안인, 바로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라도 미움받을 수 있다는 불안에 대해서 '미움받을 용기'가 그런 불안은 사회에서 당연하며 그러므로 부정의 경험이라기 보다는 당위적 체험이니 오히려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미움을 받으라고 말해주었기에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불안을 가진 이들 모두가 바라고 있던 대답, '넌 잘못된 것이 아니야, 넌 네 자신을 긍정해도 돼!'를 그 책이 쉽고 설득력있게 들려주었기에 사람들이 앞다투어 찾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거듭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오롯이 긍정해 줄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말이다. 내가 모자르면 모자란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넌 아무렇지 않아 하고 말해주는 것을 말이다. 베스트셀러는 그 응답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치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자기 정당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하는 질문은 베스트셀러가 어떻게 되느냐 따위가 아니라 왜 우리는 이토록 자기 정당화를 필요로 하게 되었느냐에 있을 것이다. 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비하하고 그것이 원인이 된 불안 속에 끊임없이 떨고 있냐고 말이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을 쓴 야마다 히로키에게 묻는다면 거대 이념의 종말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거대 이념의 퇴조로 이제 모든 평가를 오롯이 개인이 감내하게 되었기 때문에 비하와 불안이 만연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미셀 푸코에 따르자면 이것은 자연스런 흐름이 아니라 거대 이념의 붕괴 이후 패권을 차지해버린 신자유주의가 명확히 의도한 결과다. 미셀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담론을 분석하면서 그것의 목적이 오로지 한 개인을 '1인 기업가'로 만드는 것에 있다고 밝혔다. 기업이 시장에서 당하는 결과에 대해 그것이 의도든 불운이든 사회가 전혀 책임지지 않듯이 그렇게 한 개인이 당하는 모든 위험을 개인에게 전적으로 부담시키며 또한 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능력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하듯 개인 역시 지속적인 자기 관리를 하도록 만드는데 있다고 말이다. 즉 개인은 이제 사회에게도, 노조에게도 기댈 수 없다. 자신이 당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오로지 홀로 파악하고 관리하며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쟁은 필연적인 부산물일 뿐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둘러보면 이와 같은 푸코의 분석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런 개인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 너무나 많아졌으므로 덩달아 불안도 커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우리를 너무도 옥죄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나 자신을 긍정해 줄 무언가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이 절박한 마음으로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현실은 신자유주의란 담론이 설계한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이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추상적이거나 허약하지 않다. 생생한 힘으로 구체적이면서 물리적인 현실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인문 또는 그것을 주로 만나게 하는 통로인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저 호사가의 취미라든가 정보 축적만은 아니다. 인문학자라는 말을 낳은 중세 후기의 이탈리아 고대 문헌 학자가 그랬듯이 몇 백년간 지속된 중세의 어둠을 계몽의 빛으로 몰아낼 힘도 얼마든지 태동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안과 자기 정당화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상호 심화되는 이런 질곡이 힘겹다면 그 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가 기대야 할 것도 오로지 언어, 담론 밖에 없다. 언어가 불안과 절망을 가져왔으나 구원 역시도 거기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수록 읽어야 한다. 그 언어들을 매개로 사유해야 한다. 진정한 해방을 위한 유일한 출구이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지금의 현실을 전혀 다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고전을 만나야 한다. 탈옥을 다루고 있는 유명한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에서는 주인공이 감옥 전체의 지도를 몸에 문신으로 새겨 들어간다. 이렇게 탈출에는 내가 지금 갇혀 있는 장소를 전체로 조감할 수 있는 지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바로 그것을 고전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과 많이 다르거나 혹은 지금이 태동하던 시기의 사유인 지라 동시대의 담론들 보다 훨씬 더 내가 갇힌 이 시대의 외곽을 잘 드러내어 그 안에 담긴 전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라는 책, 프롤로그에서 저자 이하준은 이렇게 말했다. '고전은 우리에게 자유 정신의 힘을 준다'라고. 그 자유의 힘이란 바로 현실이 가진 중력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바깥으로 데려가는 힘, 그리하여 객관적인 시야로 시대를 조망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테우리를 넘어서 나아감과 해방된 공간에서 홀로 던지는 시선이 이하준이 말하는 '대화'가 아닐까 여겨진다. 자유를 향한 월담과 해갈을 위한 대화를 체험해 보기에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도 좋은 선택이라고 본다. 일단 구성을 살펴보면 이 책은 네 개의 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나'와 '사랑', '관계' 그리고 '삶'인데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 연속성이 있음을 찾을 수 있다. ''나'에서 나아가면 '타인'이 있고, 그 '타인과의 함께'가 '사랑'이며 그것을 통해 '관계'가 형성되고 그 관계의 연쇄와 집적으로 하나의 유기적인 '삶'이 형성되니까 말이다. 한 마디로 확장의 경로인 것이다.


 그 확장의 경로를 따라 철학자 한 사람씩을 분배하여 철학자의 담론에 저자 자신의 담론을 가필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철학자의 담론은 삶에서 우리가 가지거나 만날 수 있는 질문으로 형성되어 있고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우리가 품을 수 있는 나와 존재의 의미 그리고 세계와 윤리에 대해 대부분의 의문을 망라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그렇다고 현학적이진 않으며 담론이 추상적 차원에 갇히지 않도록 구체적인 현실 문제와 연계되도록 하고 철학자의 언어도 독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가급적 일상적인 어투로 순화하고 있다. 초심자를 많이 배려하는 책이며 그러므로 시작하기에 좋은 책이다.


 그렇지만 입문에 그치진 않는다. 한 권의 책으로써의 완결성을 엄연히 지니고 있다. 저자는 이 책으로 고전의 대화가 어디로 데려갈 지 확실히 제시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는 이 책을 확장의 경로인 네 파트의 제목으로 알 수 있다. 일단 ''는 주체로 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여기에 있는 쇼펜하우어의 '고독' 찬양은 고독의 향유를 통해 자신과의 대화를 즐겨 정신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독립하게 만들기 위함이며, 뒤이은 니체의 '초인'은 초인의 의미를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밝혀 '어린아이는 스스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과정과 활동을 놀이처럼 즐기는 사람'으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존재'라고 하면서 이런 의미에서 초인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긍정하는 존재라고 제시한다. 그리하여 요즘 시대 우리 불안의 많은 부분이 타인과의 비교에서 엄습하는데 나보다 나은 타인에 대한 동경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강하게 긍정한 상태에서 동경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권유한다. 이런 식으로 왜 먼저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의심', 밀의 '용기와 관용',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에피쿠로스의 '외부의 자극에 쉽사리 동요하지 않는 내심의 평정' 마지막으로 몽테뉴의 '끊임없는 자기 숙고'를 하나하나 설명해 나간다.


 다음에 계속되는 '사랑'도 비슷한 형식으로 진행된다. 우리는 여기서 왜 먼저 주체가 되어야 하는 지, 그 이유를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나와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과의 관계 형성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 삶에서 무엇보다 나와 타인이 가지는 차이를 긍정하고 배려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우리는 가장 먼저 나오는 프롬의 마조히즘과 사디즘 적 사랑의 정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롬이 양자의 사랑에 공통점이 있으며 그 공통점은 '주체'로서 자립할 수 없는 사람들의 '주체'로 서기 두려움에 기초하고 있으며 타자를 통해 그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왜곡된 애착에 있다(P. 103)'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사랑은 온전한 주체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뒤이은 칸트와 마지막 아도르노에게서도 확인되며 특히 울리히 벡 부부에 이르러서는 모든 관계를 파현화 시키는 지금 사회의 유연화 흐름을 고려해 볼 때 제대로 된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꼭 필요한 태도라는 것을 알 게 된다. 때문에 저자는 독립된 주체의 성립을 우리들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와 타인이 가지는 차이의 긍정을 통해 자신을 먼저 내려 놓고 상호 이해와 협력을 한층 더 증진시키기 위해서다. 이러한 나 자신의 긍정과 타인에 대한 긍정은 '관계'와 '삶'까지 주욱 이어진다. 현실적인 관계 양상에서 그동안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받던 것들이 거기에 과연 긍정적인 가능성은 없는 것인지 재검토되고 '삶'에 가서는 누구나 겪는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과 '노년' 그리고 '죽음' 등 온갖 부정적인 경험들을 전복적으로 다시 의미 짓는다. 그리하여 경로 전체를 통해 온전히 절감하게 만든다. 지금 나로 하여금 그토록 나 자신을 정당화시켜줄 무언가를 찾게 만드는 이 불안을 잠재우고 싶다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지를 말이다. 그 확고한 자리로 우리를 넌지시 데려간다.


 생각해보면 저자의 제안은 꽤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불안은 신자유주의 이후 가속화되었는데 푸코의 말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개인 스스로 항상 자신을 관리하게 만드는데 있고 그런 관리는 우리도 경험상 잘 알고 있듯이 많이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베블렌이 '유한계급론'에서 자본주의의 소비는 어디까지나 과시를 위해 행해진다고 한 바 있듯이 실제 우리는 타인과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민감하다. 그렇지 않아도 라캉이 말한 바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조차 타인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으로 형성되며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이 원하는 것인지조차 모르는데 진정한 우리의 비극이 있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늘 타인과 견주어 날 볼 수밖에 없고 항상 나보다 뛰어난 존재들만 눈에 들어오는 법이니 내 모자람과 부족으로 인한 불안은 가실 길이 없다. 또한 이런 시선은 언제나 우열의 휘장을 두르기 마련이다. 나와의 높낮이에 따라 질시와 경멸의 시선이 왔다갔다 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개인에게서 사회적 보호막을 벗겨내어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으로 이끌어가려 하는데 이런 개인의 '기업가화'는 그것이 원하는 바를 제대로 이뤄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가 강요한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 그들의 눈이 아니라 온전한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또한 그 층위에서의 나와 만나는 타인에 대한 차이의 긍정 또한 진정 불안을 해소하고 싶다면 기필코 결부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는 이런 태도와 노력의 당위성을 조용히 납득시키는 힘이 있다. 쉬운 내용과 평이한 서술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다.


 우리는 우리를 구해줄 감 같은 것이 떨어지길 바란다. 언제나 감처럼 부와 성공 같은 현실적이며 물리적인 것들이 우리를 불안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나 자신 보다는 늘 외부에 눈과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외부에 종속되었고 점점 기울어진 중심으로 인해 더 불안해지기만 했다. 그러나 우리의 이 현실이 어떻게 형성되어졌는 지를 고찰한다면 언어가 오히려 현실과 물리적인 것들을 지배한다고 할 수 있다. 아니, 거기까지 나아갈 필요도 없이 지금 우리 생활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법만 봐도 자명하다. 지금 우리의 절망을 낳은 것도 기실은 언어고 구원을 위한 진정한 힘도 언어에 배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읽는 것은 전혀 무가치한 일이 아닌 것이다. 하물며 고전은 더욱 그러하다. 물론 저자도 말하듯이 고전이 만능 열쇠인 것은 아니다. 고전에 대한 무조건적 추종도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입된 상식으로 식민지가 되어버린 나의 내면을 신선한 시야와 사유로 가득찬 처녀지로 바꾸는 데 있어 고전만큼 좋은 자극은 없는 것 같다. 고전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과 시대상의 간격 때문이다. 토머스 쿤이 말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과학적 진리라고 해도 실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형성한다는 것을. 간격은 그 패러다임의 막을 찢고 구멍을 만든다. 그리고 그리로 자유로운 상상의 바람을 불어 넣는다. '오래된 생각'은 그런 자유의 숨결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대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자기 정당화를 향한 목마름을 진정 가시게 해 줄 우물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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