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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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이방인이다.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 2세로 태어나 죽 그렇게 살아왔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 그는 외국인이었다.

 외국인. 그는 경계 위에 사는 자다. 아니, 그 자신이 바로 경계다. 그는 서 있는 그 곳에서 자신을 타자로 만드는 국가와 대립하고 있다. 개인과 국가의 정체성이 맞부딪힌다. 국가는 평평한 대지다. 고정되고 동일한 정체성이라는 롤러로 밀어버린 포장도로와 마찬가지다. 거기서 외국인은 언덕 혹은 구멍으로 존재한다. 내리누를 수도, 메울 수도 없는 빈틈이 되어 균질된 국가에 불균질을 가져온다. 그렇게 하여 국가가 하나의 인위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힌다. 외국인이 국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이란 존재로 인해 국가가 재정립 되기에 그렇다. 외국인의 정체성을 기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부터 파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힘은 거꾸로 흐른다. 국가는 외국인에 대한 반정립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세공해 나간다. 외국인에겐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뽑도록 강제하면서 거꾸로 국가 자신은 뿌리를 더 깊이 내리려 한다. 자기 정체성의 부유함을 위해 외국인을 흡혈하는 것이다.



 그런 국가에게 외국인은 더이상 고유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국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하여 그 반대 명제로써 차용해야 할 특수한 맥락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외국인이 가진 존재 본연의 모습이 어떤 지에 대해선 국가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누가 되었던 외국인은 국가에게 그저 백지다. 그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다시 쓰기가 가능한, 인위적으로 산출되는 텍스트에 지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외국인은 문학이다.


 그것은 외국인이라는 존재 규정이 주로 증언에 의해 이뤄진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일본은 통신사의 증언으로, 미국은 유길준의 '서유견문'의 증언으로 우리에게 도래했다. 그와 똑같이 중국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허다한 선교사들의 증언으로 유럽에 소개 되었다. 돌연한 외국인과의 첫 만남은 먼저 텍스트의 매개, 즉 문학을 통해 이뤄진 것이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외국인은 문학으로 존재한다. 문학이 허구의 생산물이라고 한다면 외국인도 그러하다. 본질은 상관 없다.


 그런 외국인이었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처음으로 시를 썼다. 열 다섯의 나이였다. 자신의 조국이라 생각했던 곳을 방문한 뒤다. 고향의 실체를 움켜쥐고 싶어서 떠난 여정이었다. 거기는 일본에 의해 정체성이 강제적으로 규정되고 늘 뭔가 모자란 존재감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가 충만한 존재감을 주리라 기대되던 곳이었다. 그것을 보고 그는 '증언자'가 되려 했다. 존재 본연의 모습을 헤아리려는 노력 없이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적인 시각에서 단편의 인상만을 말할 뿐인 '목격자'들의 증언에 대항해 그들이 외국인으로 규정하는 타자 본연의 모습은 어떠한 지를 증언하려 했던 것이다. 문학에 문학으로 대항한 셈이다. 그의 시는 그렇게 나왔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란 존재자에게 은폐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장소였다. 그것이 그의 시였다.


 시란 고유한 존재의 증명, 국가에 의해 탈취된 존재의 회복이었다. 그러한 시 앞에서 외국인을 만들고 그 경계가 있어야만 존속할 수 있는 국가는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게공선'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일본의 대표적인 프롤레타리아 작가였던 고바야시 다키지가 1933년 2월 20일, 특별고등경찰에게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숨졌을 때 중국의 루쉰은 적국 일본의 사람이었던 그를 서슴없이 '동지'라 불렀다. 나카노 시게하루는 '루쉰 안내'란 책에서 루쉰이 이렇게 말했다고 증언했다.


 고바야시 다키기자 1933년 2월에 살해되었을 때, 루쉰은 일본어로 이렇게 말했다.

 "동지 고바야시 다키지의 죽음을 전해 듣고,

 일본과 지나의 대중은 원래부터 형제이다. 자산 계급은 대중을 속여 그 피로 경계를 그었으며, 또한 지금도 긋고 있다.

 그러나 무산 계급과 그 선구자들은 피로 그것을 씻어내고 있다.

 동지 고바야시의 죽음은 그 실증의 하나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잊지 않는다. 우리는 견고히 동지 고바야시의 혈로를 따라 전진하여 손을 맞잡을 것이다. 루쉰"    (p. 100)


 루쉰에게 다키지는 일본인이 아니었다. 국적은 아무 의미 없었다. 있는 것은 다만 같은 신념으로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지 뿐이었다. 루쉰에게도, 다키지에게도 시가 있었다. 그도 결국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통해 자신이 싸워야 할 현장은 나라를 가리지 않고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보편의 개념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편으로 여겼던 것은 특정 체제와 국가가 중심이 된, 사실은 특수한 것이었다. 그것이 고통을 가져온다면 많은 이들을 억압하고 권력 아래 가둬둔다면 이제 우리는 다른 특수를 찾아야 하고 그 특수가 보편을 획득하도록 해야 한다.


 현대 세계를 글로벌 자본주의가 석권하고 있는 와중에 인간 해방을 위한 대안이 없다면 이러한 자본주의의 보편성에 저항하는 쪽의 세계적 보편성을 찾아야만 한다. 이는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세계문학에 요구해야 할 보편성이다. (p. 166)


 사실 특수와 보편이 생각만큼 분명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외국인이란 존재가 자의적이듯, 보편과 특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 선이 분명하게 보였던 것은 누군가 명확히 금긋기를 하고 있던 탓이다. 그 금긋기가 국가를 만들었고 사람들은 이념이 아니라 국적 때문에 서로 타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 선이 가없이 자의적임이 밝혀진 이상, 서로를 나와 다른 얼굴로 여길 필요는 없어졌다.


 재일 조선인인인 나,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싸우는 이들, 팔레스타인 사람.... 우리는 서로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 있다. 쉽게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격려하고 있는 것이 근대 식민주의자들이 자의적으로 그어놓은 경계선인 이상, 식민지주의와의 부단한 투쟁 과정에서, 또한 그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서로 만나고, 새로운 차원의 우리를 향해 자기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보편성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을 것이다.(p. 167)


 시는 국가를 분쇄한다. 그들이 나누는 인위적인 경계, 그리하여 디아스포라를 자유가 아니라 결핍으로 만드는 모든 획책을 허문다.

 시는 모두를 외국인으로 만든다. 국가가 포섭할 수 없는 불균질의 영토로, 그 자신이 저항의 거점이 되도록 호명한다.


 요즘들어 갑자기 애국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애국이란 말이 사용되는 것은 대부분 국가가 국민에게 뭔가 요구할 때이다. 최근엔 애국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임금 피크제를 수용하라고 한다. 가뜩이나 경기가 어렵고 물가는 올라서 쓸 돈이 적은데 이제 노동자더러 보장되지 않는 정년과 갈수록 적어지는 임금을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왜 애국은 늘 약하고 가진 것이 적은 사람에게만 강요되는 것일까? 왜 재벌에겐 애국으로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것일까? 애국이라는 게 이토록 일방적이라면 도대체 애국의 대상이 되는 국가는 무엇일까?


 미국 프리스턴 대학의 정치학 교수 마우리치오 비롤리는 패트리어티즘과 내셔널리즘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패트리어티즘은 몇 세기에 걸쳐 하나의 집단 공동의 자유를 지탱하는 정치제도와 생활양식에 대한 사랑, 요컨대 공화정 전체에 대한 사랑을 강화하거나 환기할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내셔널리즘이라는 단어는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한 국민의 문화적, 언어적, 민족적 통일성과 동질성을 옹호하거나 강화할 목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공화주의 패트리어티즘의 적이 폭정이나 독재정치, 억압과 부패였던 것에 반해 내셔널리즘의 적은 타문화에 의한 자문화 오염, 이종 잡교, 인종적 불순, 그리고 사회적, 정치적, 지적 불통일이다.(p. 257)


 그들의 애국은 패트리어티즘이 아니라 내셔널리즘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된 것일 뿐이었다. 진정한 의미인 애국, 즉 패트리어티즘엔 보다시피 국가란 없다. 다수의 자유를 억압하고 소수의 기득권을 수호하는, 말하자면 마르크스가 말했던 부르조아의 집행위원회(최근 대법원의 한명숙 판결은 지금의 국가가 이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으로써의 국가는 없는 것이다. 시는 바로 그러한 패트리어티즘으로 이끄는 손짓이다.


 시는 국가만이 전유하고 있던 문학적 쓰기에 수많은 가필로 그 언어와 용법을 해체하고 새로운 언어와 문법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저자가 어머니에게서 발견한 것과 같다. 그의 어머니는 문맹이다. 처음에 그는 그런 어머니를 부끄러워 했다. 하지만 시로 인해 현상이 아니라 상황을 볼 수 있게 된 그는 어머니의 문맹이 일본 식민지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개인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결과였음을 받아들인다. '개인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커다란 역사나 사회구조의 반영'(p.182)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당시 어머니는 무려 네 개의 벽에 가로막혀 있었는데 그건 바로 젠더(가부장제), 경제(빈곤), 민족(식민지 지배), 정치였다. 장벽이 무려 네 개나 되었으니 그녀는 정말로 갇힌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굴하지 않는다. 설령 글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산다고 하더라도, 두 아들이 민주화 운동을 하다 조국에서 수형자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조금도 승복하지 않고 탈주와 저항의 흐름을 만들어 낸다. 일본에는 '다노모시코'라는 재일 조선인만의 풀뿌리 네트워크가 일본 국가의 권력을 교란시키며 한국에서는 비전향범의 어머니라는 신분이 국가 권력과 맞서게 한다. 국가화의 산물인 언어는 몰랐지만 오히려 비언어가 줄 수 있는 더 큰 자유로 권력이 만든 모든 장벽을 초월한 어머니는 그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어머니와 같은 존재(교육받지 못한 민중)의 목소리를 해석하고 언설화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으로써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께름칙함에 시달리게 된다. 거꾸로 생각하자면 어머니는 이러한 뼈아픈 반성을 촉구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교육받고 지식을 몸에 익힌 다음, 그 필터를 통해 해석하는 특권을 행사하는 상대에게, 특권을 지니고 있기에 갖게 된 권력을 자각하게 만들었달까. 나아가 그 특권을 지닌 인간이 있는 그대로를 겸허하게 응시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힘을 가진 어머니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p. 194)


 아마도 그 겸허한 응시가 '시의 힘'이 최종적으로 가져오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즉 그 힘은 우리 모두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파리아'로 만드려 한다. 파리아는 원래 인도의 불가촉천민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여기서는 어떤 사회, 제도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를 가리킨다. 모두가 파리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진정한 평등이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시의 힘은 그것을 갈구하며 그가 쓴 책, '시의 힘'은 그 갈구를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서경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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