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다시 벚꽃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2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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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란 한 줌의 벚꽃.

 손 안의 벚꽃잎은 제아무리 예뻐도 한 결 부는 바람에도 흩날려 속절없이 사라진다. 웃고 마시고 떠들다가도 문득 손등에 내려앉은 벚꽃잎이 서글프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작은 분홍빛 두어개에 간직된 허망함. 쇼노스케도 그랬을 것이다. 쇼노스케는 미야베 미유키의 '벚꽃, 다시 벚꽃'의 주인공이다. 소설에서 그가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문간 너머 저만치 서 있는 벚꽃 나무다. 그걸 그가 넋 놓고 보게 된 것 역시 허망함이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사무라이지만 도쿠가와 막부 시대가 열리면서 사무라이는 이제 칼을 들 일이 없어졌다. 칼로써 존재할 수 있었던 사무라이는 칼을 버려야 했고 그런 그들에게 사무라이라는 이름은 태평성대 막부 시대를 살아가는데 오히려 돌부리가 되었다. 거기다 믿고 따랐던 아비는 누명을 쓰고 할복했으며 가문은 결단나고 세속적 성공을 쫓던 어미와 형과는 소원해졌다. 그는 혼자다. 자신을 든든히 받쳐주던 모든 것들이 손 안에 벚꽃잎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고관 사카자카 시게히데가 그를 불러서는 아비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려준다. 아비는 횡령죄 혐의를 받았는데 적극적으로 항변했으나 한 장의 문서로 죄를 인정하고 할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문서가 사실은 누군가 아비의 필적을 흉내내어 만든 위조 문서라는 것이다. 놀라는 쇼노스케에게 사카자카 시게히데는 그 대서가가 현재 다른 크나큰 음모에도 연루되어 있으니 에도로 가서 그를 찾아 아비의 복수를 하라고 말한다. 아비의 명예회복을 간절히 바랐던 쇼노스케는 에도로 온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경험한다.




 에도로 와서 쇼노스케가 거하는 곳은 셋방살이하는 이들이 한데 모여 있는 지금으로치면 연립주택과 비슷하다. 인물과 살이의 묘사를 보노라면 옛날 TV에 방영했다고 하는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이 얼핏 연상될 정도이다. 없는 살림이지만 야박하지 않으며 모두가 제 일처럼 남을 도와준다. 소설은 처음부터 그 곳에 원래 있던 널담이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마치 상징이기라도 하듯 거기 사람을 사이엔 벽이 없다.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이타적이라는 것을 빼면 타카하시 루미코의 걸작 '메존일각(우리나라엔 도레미하우스란 제목으로 발간된 만화)'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같은 피를 나누었지만 남보다 먼 쇼노스케의 가족과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가족만큼 살가운 이웃들을 생각하면 과연 가족의 경계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밝히지만 실은 이것이 바로 '벚꽃, 다시 벚꽃'에서 미야베 미유키가 천착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대서인을 찾는 문제도 사실은 그가 권력다툼을 해결할 한 수장의 유언을 위조할 가능성 때문이다. 나중엔 또 한 여성의 납치 사건에도 연루되는데 그것도 진짜 가족과 입양의 문제가 얽힌다. 이렇게 소설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모두 가족을 중심으로 벌어진다. 그럴 때마다 중요해지는 것은 경계다. 진짜 유언을 보존하고, 순수 혈통을 고집하는 것은 진실을 고집하는 일과 같다. 그러나 진실은 아집에 가까울 정도로 언제나 확실한 경계선을 두려 한다. 나와 남을 나누고 거짓과 격리되려는 진실처럼 유익이 되지 않는 남은 내치는 것이다. 쇼노스케의 어미와 형이 도움이 되지 않는 아비와 동생을 멀리했듯이.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묻는다. 과연 그렇게 진짜를 고집하는 게 좋은 것일까?

 결국 사단은 언제나 진짜를 의식하고 그것을 확보하려 하거나 그것에 상처 받을 때 일어났다. 거기에서 미야베 미유키의 대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왜 미야베 미유키가 쇼노스케를 둘러싼 이웃들의 삶을 조금은 불필요하다고 싶을 정도로 많은 비중을 두어 묘사하는 지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가게 된다. 바로 사람 관계에 있어서 확실한 경계 따윈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었음을 말이다.


 이것은 에도로 올라온 쇼노스케의 직업이기도 한 '필사'에서 제대로 드러난다. 

 필사란 다시 쓰는 작업이다. 그것은 반복이지만 똑같지 않다. 소설에서도 분명히 언급한다. 마음이 일치되어야 똑같은 글이 가능하다고. 그러니 필사는 같지만 다르다. 원래 쓰는 자와 지금 쓰는 자, 그렇게 두 마음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일치된 글은 소설에서 비극을 낳았다. 하지만 일치되지 않은 글은 보다 많은 이에게 배움을 주었고 즐겁게 만들었다. 경계선의 넘나듦은 여기서도 존재한다. 필사란 글이 달라짐이요, 쓰는 이 또한 타인의 글에다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니 경계를 지워가는 행위다.(허나, 완벽한 일치란 또 하나의 확정된 경계선을 만드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쇼노스케는 필사를 하면서 점점 더 자신을 넓혀간다. 나중에 그는 어떤 공간을 입체로 만드는 '입체 그림'도 스스로 제작하는데 그 역시 현실 공간의 필사라고 볼 수 있으니 글씨라는 2차원의 필사 공간이라는 3차원의 필사로 더욱 넓혀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경계를 없애는 가장 대표적인 행위로써 필사가 주어진 것이며 그 필사를 새로운 직업으로 삼은 쇼노스케는 그대로 경계를 넘나드는 대표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 쇼노스케는 아예 자신마저 바꿔버린다. 모습은 그대로이나 다른 사람의 존재를 빌림으로써 이제는 궁극의 필사 단계라고 불러도 좋을 존재의 필사를 하는 것이다.(3단계 진화라니, 쇼노스케가 드래곤볼에 나오는 초샤이어인 같다.^ ^) 그렇지 않아도 지혜에가 기치에게 쏟았던 마음을 헤아리거나 쇼노스케와 와카가 서로에게 주는 배려를 보노라면 관계를 정말 두텁게 만드는 것은 각자의 처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재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포용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이렇게 말하는 쇼노스케를 짝사랑하는 긴의 마음은 얼마나 예쁜가?


 "무사 나리는 체면이 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거예요? 가난한 건 창피한 거예요?"

 엉엉 울고 있으니 말이 또렷하지 않다. 숨 쉬는 것도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띄엄띄엄 하는 말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서라도 부자가 돼요. 와다야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도 돼요. 나, 이제 질투하지 않을게요."

 쇼노스케는 할 말을 잃었다.

 "여기 계속 있으면, 쇼 씨도 언젠가, 이래선, 무사로서 창피하다고, 생각할 거 잖아요, 그럼...."

 긴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조그만 등이었다. 가느다란 목덜미였다. 이 처녀는 이 처녀대로 작은 몸뚱이로 생활을 책임지고 있다. (P.512)


소설에 화창한 봄날의 벚꽃 거리를 걷는 것 같은 다사로움이 가득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너나없이 함께 할 때, 서로의 이마에 반사된 햇살도 더욱 환해지는 법일 테니까.


 '고구레 사진관'부터였을까? 미야베 미유키의 사람과 세상을 보는 시선이 따스하다고 느꼈던 것은.

 '벚꽃, 다시 벚꽃'은 그런 미야베 미유키의 시선이 활짝 만개한 느낌이다. 여기서 만개란 표현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더 힘껏 밀고나갔음을 뜻한다. 소설은 쇼노스케를 통해 경계를 완전히 허무는 곳까지 나아가고 있으니까. 예전에 한 시인은 말했다. "나는 멸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마지막 장면에선 마치 그 시어를 반향으로 듣는 듯 했다.


 소설은 2013년에 나왔다. 시점을 고려한다면 이 소설은 현재 일본에 대한 미야베 미유키의 제안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가 묻는다면 그건 당시 집권한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정책을 고려해 본다면 대답이 될 것 같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아베 정권이 추진하는 우익 정책의 본질은 확실한 금긋기이다. 자국과 타국을 나누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국을 불안하게 만드는 일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마치 그런 아베에게 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미야베 미유키는 금긋기에 집착했던 인물들이 어떤 말로를 맞게 되는지 보여준다. 여기에 해당되는 인물은 모두 셋인데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므로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은 끝내 이전의 자신을 버릴 수 없어 할복하고 다른 이는 타인을 파멸시키는 범죄자가 되며 마지막 사람은 모든 것을 잃고 정처없는 떠돌이가 된다는 것만 밝혀두련다. 반면 기꺼이 경계를 뛰어넘었던 자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 쇼노스케를 제외하더라도 솜씨가 없었으면서도 아버지가 일으킨 장어 요리를 포기하지 못해 나락으로 점점 떨어지던 한 식당 주인은 한 사무라이의 조언으로 예전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음식을 시작하자 번성하게 되고 기치는 입양된 자신을 생각하지 않자 더 훌륭한 여성으로 성장한다. 이렇듯 선명하게 대비가 소설엔 존재하니 전자는 아베에게 보내는 경고요, 후자는 제안이라고 여겨도 그렇게 무리는 아닐듯 하다. 의미심장하게 와닿는 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쇼노스케의 스승이기도 한 사에키 노사가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다.


 "제자야."

 "아, 예."

 "뒤죽박죽이었구나." (P. 626)


 이 소설의 주제를 한 단어로 말하라고 한다면 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뒤죽박죽.

 우리는 거기서 얼른 혼돈을 떠올리고는 갸우뚱할 지도 모르겠지만 오히려 이렇게 너나의 경계없이 한데 얽히고 설키는 것이 사실은 더 좋은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존재나 그것이 지닌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으며 모두가 대등한 가운데 다양한 존재와 가능성의 하나로써 공존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물론 쇼노스케의 셋방 이웃들이 보여주었듯이 온전한 배려와 포용이 먼저 바탕되어야 하겠지만. 분명 그리 된다면 확실한 경계선 보다는 배제되는 아픔, 잘려나가는 통증이 덜할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널담이 모조리 사라진, 미야베 미유키가 꿈꾸는 세상이다. 일본이 그리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어린.


 '벚꽃, 다시 벚꽃'을 통해 우리는 그 꿈의 거리를 거닐 수 있다. 그러다 문득 '벚꽃박죽'이란 말을 떠올리고는 살짝 미소지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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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6-16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 여사의 에도 시리즈는 늘 사자마자 읽었는데
이 책은 출판사가 바뀐 바람에 다소의 꺼림직함이 있어요. ㅠㅠ. 하지말 읽겠죠, 미미 여사의 광팬이니.
읽고 나서 다시 한번 헤르메스님의 리뷰를 읽어야겠네요. 맞아요, 미미 여사의 시각이 참으로 따스해졌죠...

ICE-9 2015-06-22 20:42   좋아요 0 | URL
정말, 요즘은 `크로스파이어` 같은 처음의 날 선 칼날 같은 분위기가 많이 무뎌진 것 같아요. 화차나 이유, 모방범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새삼 얼마나 멀리 있는 지 실감하게 되죠. 저 개인적인 생각으론 역시 3.11의 영향이 아닐까 싶어지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