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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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서 마음이 찔렸다. 리베카 솔닛이 결정적으로 이 책을 쓰도록 만들었던 에피소드를 언급했을 때는 화끈거렸다. 제목의 남자는 언젠가의 나였고, 에피소드의 남자도 언젠가의 나였다. 나는 공범이었다. 나 역시 자주 상담을 자처하며 다 아는 척을 했으며 때로는 내가 옳다고 강요까지 했던 것이다. 딴에는 상대방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했었지만 과연 동기가 그것만이 전부였나고 물으면 섣불리 자신하지 못한다. 솔직히 우월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쉽게 옹졸로 치닫는 남자의 자존심과 아무 곳에나 손을 뻗치는 무분별한 정복욕이 '맨스플레인'의 엔진을 더욱 가열시켰을 것이다. 분명.



 이런 반성과 더불어 책을 읽었다. 저자인 리베카 솔닛과의 만남은 두 번째다. 이전에 '이 폐허를 응시하라'란 책으로 첫 만남을 가진 적이 있다. 그 책은 내게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었다. 재난 현장을 세밀하게 스케치했던 그 책은 특히나 재난이 터졌을 때와 그 이후 사람들이 진실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게 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인간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꿔 버렸다.


 우리는 흔히 재난이 일어나면 카오스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저마다 자신의 안전을 획득하고 싶은 욕구로 질서는 무너지고 아비규환이 펼쳐지리라 쉽게 여긴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그것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진실은 아니었다. 결코 그렇지 않았다. 리베카 솔닛은 전혀 다른 진실을 보여주었다. 재난이 터졌을 때나 그 이후에도 사람들은 무질서 하지 않았다. 아비규환을 초래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욱 질서를 지켰으며 평상시 보다 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 아이들이 침착하게 질서를 지키며 구조되기를 기다렸다고 보도로 들었을 때, 나는 리베카 솔닛의 책을 읽었기에 사실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동영상을 보았을 때 결국은 리베카 솔닛의 말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그렇게 위기의 순간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는 괴물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괴물로만 생각할까? 그만큼 타인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까? 거기에 바로 권력의 힘이 작용했다. 권력은 언제나 다수를 두려워한다. 서로 믿고 결집한 다수의 힘을.


 세월호 참사가 그러하듯 재난은 권력의 위기를 가져온다. 권력이 가장 약화된 그 시점에 다수가 하나된 힘으로 뭉치면 언제든 무너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권력은 더욱 사람들 서로를 불신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양한 미디어를 통한 상징 조작으로 위험에 처하면 자기만 살자고 내뺄 놈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는 그렇게 당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커다란 위험이 닥치면 당신은 더 먼 곳을 보고 어떤 행동이 나와 모두를 구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당신의 진실이다. 당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고 그저 약하고 이기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권력이 주문한 결과일 뿐. 당신은 스스로를 오해하고 있다. 재난이 오히려 당신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조금은 어이없게 생각될 정도로 '이 폐허를 응시하라'에 대해 길게 썼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난 두 가지를 말했다. 하나는 우리가 스스로의 진실된 모습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권력이 주입한 것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불안을 낳는 재난이 오히려 우리에게 진실과 더 나은 자신을 위한 기회를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바로 이 두 가지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도 이어지는 것이다.


 이 책은 하나의 동기에서 나왔다. 저자가 언젠가 참여한 파티에서 주최한 남자가 저자가 쓴 책인지도 모르고 그 책에 관하여 저자에게 주절주절 떠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거기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하고 듣기만 했다. 남자가 알량한 자신의 권위를 자꾸만 드높여갈 때, 그녀는 침묵했다. 왜 그랬던 것일까? 그 이유를 생각하다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남자처럼 남자들이 자꾸만 가르치려 드는 이유가 여성 스스로 자신을 왜소하다고 여기게 만들어 남성들의 지배를 강고히 만들려는 것임을.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나 종종 괴로움을 겪는다.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 (p. 15)


 바로 여기에 '이 폐허를 응시하라'의 첫 번째 주제가 들어가 있다. 권력이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오해하게 만들었듯이 여성들 스스로 자신의 능력과 가치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하고 있는데 그건 진실이 아니라 남성 권력이 조장한 결과인 것이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이러한 남성 권력이 덧씌운 편견의 껍질을 깨어 여성들에게 더이상 주눅들 필요도, 참을 필요도 없다고 말하는 책이다.



 애석한 일이지만 요즘은 페미니즘의 주가가 많이 떨어졌다. 이제는 옛날과 다르게 오히려 여성상위시대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동안의 투사적 모습에 질렸음인지 공공연히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는 사람들도 많이 보게 된다. 언젠가 한 개그 프로그램엔 오히려 남성의 권익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코너도 있었다만 과연 정말로 많이 달라진 것일까?


 리베카 솔닛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남성들의 폭력과 성희롱에 노출된 불안한 여성의 위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바뀐 것이 없다. 미국만 해도 6.2분마다 한번씩 경찰에 신고되는 강간이 벌어지고 여성 다섯명중 한명은 살면서 강간을 당한다. 매년 8,7000건이 넘는 강간이 벌어진다. 거기다 구타는 9초마다 당한다.(리베카 솔닛이 강조한 대로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에 의한 부상은 미국 여성의 부상 원인 중 첫번째다. 미국 임산부의 사망 원인 중 수위에 꼽히는 것 역시 배우자 폭행이라고 한다. 9.11 이후부터 2012년까지 가정 폭력으로 사망한 여성의 수는 11,766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를 두고 과연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리베카 솔닛은 말한다.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 있다.(p. 37)


 마치 이 말을 입증하듯 우리가 '재스민 혁명' 또는 '아랍의 봄'이라 불렀던 민주화의 열기가 드높았던 그 때조차 남성 시위자들은 여성 시위자들에 대해 100건이 넘는 집단성폭행, 성추행, 성희롱을 벌였다. 그러고 보니 나도 처음 폭력이란 걸 휘둘렀을 때가 생각난다. 대학 다닐 때였는데 무슨 모임 세미나 뒤풀이였는데 맞은 편에 앉은 남자 선배 하나가 술에 취한 것을 빙자에 후배 여학우를 자꾸만 노골적으로 더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학우는 싫은데도 선배라 뭐라 대거리를 못하고 있었는데 보다 못한 내가 그만두라고 소리치면서 막걸리 잔을 머리에 던져버렸다. 물론 술자리가 아수라장이 된 건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나는 선배들에게 불려가서 정말 엄청 혼났는데 그 때도 오직 내 하극상이 오르내렸을뿐, 성추행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남자들의 세계가 이렇다. 설령 민주주의를 떠들어도 말이다. 이런 사실은 최영미 작가가 자신의 운동권 시절을 회상한 자전적 소설인 '청동정원'만 읽어봐도 다 나온다. 말하자면, 우리에겐 역사가 거듭되어도 언제나 변하지 않고 있는 전장이 하나 있다는 거다. 바로 여자와 남자의 전쟁이다. 그런 이유로 리베카 솔닛은 2장의 제목을 '가장 긴 전쟁'으로 붙였다. 그런데도 페미니즘이 유통기한이 다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바로 얼마전에도 우리나라 여군을 아가씨라 비하한 국회의원이 있었고 상관이 성적인 수작을 걸면 가만히 있으라는 공식적인 여군 매뉴얼이 존재하며 부하 직원인 것을 악용하여 잠자리까지 끌여들었는 데도 성추행이 아니라고 법원이 판단하는 지경인데.


 리베카 솔닛의 말대로 여성의 진정한 해방이란 밤길을 안심하고 다닐 수 있을 때일 것이다. 그 때까지는 여성은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리베카 솔닛은 여성들에게 주눅들지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주문하는 것이다. 말해야 할 이 때에, 더 많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맨스플레인'에도 투영되어 있듯이 남성 권력의 속성은 분리하는데 있다. 여성과 남성을 나누고 부국과 빈국을 나누며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나눈다. 바로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여 질서를 편성하기 위해서다. 남성 권력이 원하는 세계란 서열이 확고한 코스모스다. 그들은 태양이고 나머지는 그저 자신을 맴도는 별이 되길 원한다. 홀로 빛나기 위해서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아래의 존재들에게 끊임없이 열등하다고 세뇌시킨다. 그들은 그것을 정상이라고 부르며 그것을 위반하는 존재들은 비정상이라는 굴레를 씌우다가 급기야는 19세기의 여성 작가들을 '다락방의 미친 여자'라 불렀듯이 광기로 몰아간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스스로 표현하는 여성이야말로 남성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라는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를 위한다면 그들이 가장 무서워할 존재가 되어야 한다. 리베카 솔닛이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여성이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거미줄처럼 짓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여자들은 한번에 조금씩 삭제되고, 어떤 여자들은 단번에 몽땅 삭제된다. 어떤 여자들은 도로 나타난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모든 여자들은 지금도 그들을 사라지게 하려는 세력들과 싸우고 있는 셈이다. 여자의 이야기를 자기가 대신 말하려는 세력들과, 여자를 이야기와 족보와 인권헌장과 법률에 기록하지 않으려는 세력들과, 자신의 이야기를 단어로든 이미지로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자체로 이미 승리다. 그 자체로 이미 반란이다.(p. 112)


 하지만 이 이야기에선 배제가 있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페미니즘의 진정한 의미를 이제 생각해야 한다. '여성주의'란 의미에 대하여. 그것은 정말 어떤 의미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그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태도로 사유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동일성과 타자라는 이분법에 침윤된 남성 권력의 방식이 아닌, 그렇게 선별과 배제가 아닌 방식을. 여성 해방을 일종의 권력 투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페미니즘에 반하는 길일 것이다. 권력 투쟁은 지극히 남성 권력의 방식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길 없는 곳에서 길 만들기이며, 광막한 미로를 더듬어 경로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여기엔 고정된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건 유동적이며 그래서 더욱 개별적이다. 하지만 그 어느 개별적인 것도 놓치지 않는 포용의 과정이다. 그것은 배제된 영향력을 아우르는 작업인데 그것을 두고 리베카 솔닛은 '할머니'라 부른다.


 누구나 그처럼 정규 교육에 앞선 사건들, 일상에 불현듯 등장한 사건들에서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그 배제된 영향력들을 나는 할머니들이라고 부른다.(P. 105)

 


 이 말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 더 자세히 표현된다.

 

 사실 그 옛날에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자가 거의 없었다. 여자가 어떤 이미지를 공개적으로 만들고, 세상을 보는 방식을 드러내고, 그럼으로서 생계를 꾸리고, 그로부터 오백년이 흐른 뒤에도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을 제작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페르난데스의 그림에서 주름과 그림자로 많은 것을 표현하고 있는 흰 천은 침대보다. 침대보는 집을, 침대를, 침대에서 벌어지는 일과 사후에 씻겨나가는 일을, 집 청소를, 여성의 노동을 말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그림이 말하지만 그림에서 안 보이는 것들이다. 그림에 표현된 여자는 가려져 있지만, 그림으로 표현한 여자는 그렇지 않다.(p. 116)


 이런 식으로 드러내는 것. 그래서 리베카 솔닛을 특별히 거미줄이라 부른다. 아시다시피 거미줄엔 정형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정형한데다 언제나 과정 중에 있다. 그물을 짜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남성 권력이 하듯이 지향하는 목표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매일 조금씩 더 많이 새롭게 창조해 나갈 뿐이다. 그것이 바로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는 방식이다.


 그물을 짜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 세상을 창조하는 것. 자신의 운명을 다스리는 것, 아버지들만이 아니라 할머니들을 호명하는 것, 직선만이 아니라 그물을 그리는 것, 청소부만이 아니라 제작자가 되는 것, 침묵당하지 않고 노래하는 것, 베일을 걷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내가 빨랫줄에 너는 현수막들이다.(p. 118)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리베카 솔닛은 구체적 사례를 하나 가져온다. 바로 가장 목소리를 내었다고 볼 수 있는 버지니아 울프다. 그는 울프의 다음과 같은 말을 하나의 지표로 삼으려 한다.

 

  미래는 어둡고, 나는 그것이 미래로서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p. 121)


 이 말에 따라 리베카 솔닛은 미래의 어둠을 어둠으로 두려고 한다. 섣불리 현재의 욕망을 미래에다 투사하지 않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아무 것도 규정할 수 없기에 희망이라 여긴다.


 무언가를 규정하기 힘든 밤이란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이다. 사물들이 합쳐지고 변화하고 매료되고 흥분하고 충만해지고 사로잡히고 풀려나고 재생되는 시간이다.(p. 123)


 여기서 리베카 솔닛은 사고의 전환을 꾀한다. 앞서 '이 페허를 응시하라'에서 두 번째 지적했던 것과 같다. 재난이 오히려 자신과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보게 했듯이, 열려있는 어둠, 불확실하기에 불안할 뿐인 상황 자체가 오히려 여성에겐 희망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언가를 다 안다고 착각할 때는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보다 사실 더 모르기 (p. 125)때문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낯선 골목에서 방황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럴 때 그녀는 사회가 규정한 온갖 정체성에서 해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느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아니 할 수 없는 자신을 느꼈다. 그녀는 모든 것이었고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자기 내부의 다수성과 환원불가능성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글을 썼으며 그렇게 모든 것이 미스터리로 남길 원했다. 리베카 솔닛은 여기에 '할머니와 거미줄'을 지향하는 이야기하기의 구체적 방법이 있음을 본다. 다수성의 긍정은 배제된 영향력까지 아우르는 모든 할머니의 보존이면서 환원불가능성은 중심과 목적을 두지 않는 거미줄 짓기와 통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미스터리다. 미스터리는 결정적인 진실은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미스터리란 문득 들어선 샛길과 같아서 원래 가고자 했던 곳과 전혀 다른 곳에 날 데려다 놓을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런 식으로 자신과 독자마저 스스로에게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모든 것이 미스터리가 되면 무엇이 남는가? 하나다. 진실은 이제 믿음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현대의 여성들의 카산드라의 운명을 따르고 있다. 진실된 예언을 말해도 신뢰를 못 받았던 카산드라처럼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우리나라 법원도 그러하듯 남성 권력은 믿어주지 않는 것이다. 여성이 성추행을 당하면 다짜고짜 네가 원인 제공을 하지 않았느냐는 말부터 떨어진다.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 의심하는 반응을 보인다.(p. 154)


 이런 일은 우리 주위에 비일비재하다. 뭔가 바른 소리를 하는 여성에게 남자들은 곧잘 '히스테리'라는 딱지를 붙인다. 남자들은 언제나 자신이 하는 말과 스스로의 인격을 구별해 주길 바라면서 여자들의 말은 언제나 인격과 결부지어 생각한다. 말은 들어오지 않고 감춘 저의만 캐내려 애쓴다. 흔히 쓰는 '여성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비하인 것이다. 진실 따위는 상관없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여성만이라도 같은 여성의 말을 믿고 더 귀기울여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하자면 이것은 리베카 솔닛이 여전히 기나긴 전쟁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여성에게 보내는 연대의 요청이다. 여성들 중 누군가 목소리를 낼 때 그녀를 믿고 같이 목소리를 내자는 것이다. 2014년 5월에 일어난 남성 아일리비스타의 여성 학살 사건 뒤, 여성들이 트위터에 '여자들은 다 겪는다'란 태그로 그간 자신이 당했던 남성들로부터의 온갖 희롱과 폭력을 다 올렸던 것처럼.


 그 중 제니 추라는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모든 남자가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는 점이다.(p. 183)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전혀.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추행이나 폭력, 강간이 비일비재하고 여성들의 두려움이 존재하는 한, 양성평등은 아직 요원한 것이다. 그러니 여성을 경청할만한 존재로 만드는 페미니즘은 필요하고 여성들은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지금 여성들이 그나마 권리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면 그건 모두 같은 여성이 합심하여 목소리를 내어 쟁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남성 권력에게서 자발적으로 주어진 것이 없다. 여성들이 항의 전화를 하고 피켓을 들고 집회를 하는 등의 적극적인 행위로 빼앗아 온 것이다. 아직도 여성에겐 가져와야 할 것이 많다. 더구나 지금 남성 권력은 더욱 여성을 길들이려 하고 여성에게서 주체성을 앗아가려고 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아주 발버둥치는 느낌이다. 여성 혐오가 곳곳에서 자주 표출되는 것을 보노라면.


 이런 상황에서 리베카 솔닛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자신의 능력과 힘을 믿고 연대하라는 것이다. 가야할 길이 천마일이 넘는 먼 길이라고 해도 '길은 원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나아가며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듯이 원하는 세상은 거미줄처럼 걷는 와중에 어느덧 도래할 것이라며. 설령 도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기억은 남을 것이며 그러면 또 누군가 그 기억을 이어갈 것이라며.


 그녀가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되돌아오지 않으리란 것은 안다. 그리고 그녀는 혼자 걷지 않는다. 수많은 남자, 여자들, 그보다 더 흥미로운 다양한 젠더의 사람들이 함께할 지 모른다. 여기 판도라가 손에 들었던 상자와 지니가 풀려난 호리병이 있다. 지금 그것들은 감옥과 관처럼 보인다. 이 전쟁에서 사람들은 죽을지언정, 생각들은 지워지지 않는다.(p. 227)


 (덧붙여, 인용한 그림은 모두 책에 인용된 그림으로 아나 떼레사 페르난데스의 그림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으므로, 자기 자신이든 자기 어머니든 다른 유명인이든 누군가의 삶에 대해서 혹은 어떤 사건이나 어떤 위기나 다른 문화에 대해서 진실하게 쓴다는 것은 드문드문 존재하는 어두운 부분과 역사의 밤들과 미지의 장소들을 거듭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어둠들은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는 본질적인 미스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실은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보는 개념부터가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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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23 0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하고 유익한 리뷰 감사합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와 함께 찜해둡니다. 즐거운 토요일 보내세요, 헤르메스님

ICE-9 2015-06-01 07:2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말씀 감사합나^ ^ 이 페허를 응시하라도 제겐 정말 좋은 책이었는데 프레이야님 마음에도 드셨으면 좋겠네요. 벌써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었어요. 이번 한 주도 잘 보내시길 바랄게요^ ^

아무개 2015-05-23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리뷰 감사합니다!

ICE-9 2015-06-01 07:26   좋아요 0 | URL
감동댓글, 감사합니다! 아무개님^ ^

다락방 2015-05-26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이 폐허를 응시하라]를 보관함에 넣게 되었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ICE-9 2015-06-01 07:28   좋아요 0 | URL
웃! 다락방님, 말씀 감사합니다.^ ^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어떻게 읽으실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