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트럴파크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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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의 마천루 아래를 걷다가 스트로베리 필즈를 지나 센트럴 파크 깊숙이 들어가다보면 갈수록 점점 더 별천지에 온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내내 오감을 괴롭히던 회색빛 도시의 소음과 번잡함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문자 그대로 여유와 평온을 머금은 것 같은 초록빛 자연을 흠뻑 느끼는 까닭이다. 그 때의 기분은 뭐랄까,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 '뉴욕 뉴욕'에서 다음과 같은 가사랑 비슷하다.


These little town blues are melting away.

I'm gonna make a brand new start of it,

in old New York, and...

센트럴 파크의 모습


 너무나 다른 분위기라 다시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지도 모른다. 요술문을 통해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은 아닌가 생각될 정도이니까. 문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는 삶이 예측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자주 문 뒤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말로 묘사하기도 한다. 상상할 수 없었던 아주 뜻밗의 것을 만나는 것은 문을 열자 완전히 낯선 세계가 펼쳐지는 것과도 같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가 처음 오즈의 나라에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콘크리트 밀림에 대조적인 초록빛 가득한 센트럴 파크의 생경한 풍경은 실로 현실로 도래한 '오즈의 나라' 같다. 어쩌면 뉴욕 태생인 프랭크 바움은 정말로 센트럴 파크에서의 경험을 가지고 '오즈의 마법사'를 썼는 지도 모른다. 센트럴 파크는 바움이 태어난 바로 다음 해(1857)에 개장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마치 도로시의 후예이기라도 하듯, '센트럴 파크'에서 진실로 살면서 가장 낯선 경험을 하게 된 이가 있으니 그녀가 바로 기욤 뮈소의 소설 '센트럴 파크'의 주인공 알리스이다. 그녀는 아침 햇살이 처음으로 뉴욕을 비칠 무렵 센트럴 파크에서 깨어난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거기가 어딘지 모른다. 기억하는 것은 어젯밤 친구들과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는 것 뿐. 집으로 돌아간 기억은 없다. 깨어나 보니 여기인 것이다. 그런데 위화감은 그것만이 아니다. 길바닥에서 일어난 것도 모자라서 한 팔엔 수갑까지 차고 있다. 더구나 그 수갑의 다른 한 쪽을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차고 있다. 이 수갑은 그녀의 것이다. 그녀는 사실 프랑스 경찰이고 강력반 형사다. 당황하며 일어나 살펴보니 놀랍게도 자신의 옷에 누군가 다른 사람의 혈흔이 잔뜩 묻어있다. 수갑 열쇠를 찾으려 호주머니를 뒤졌으나 그것도 없다. 설상가상. 도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그러나 더욱 경악할만한 사실이 하나 더 남았으니, 자신의 권총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대신 남의 권총이 자기의 품 속에 들어와 있는 것. 더구나 그 권총엔 총알 하나가 사용된 흔적이 분명했는데...


 남자도 난다. 남자의 이름은 가브리엘. 그도 어쩌다 지금과 같은 꼴이 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더구나 그는 이 곳이 아일랜드라 여긴다. 그녀는 가브리엘에게 멍청하다면서 여기는 프랑스라고 말한다. 남자는 알리스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여기는 절대 프랑스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옥신각신. 하지만 수갑을 풀기 위해 도움 줄 사람을 찾아 나섰을 때 그들이 보게 된 것은 보우 브릿지. 센트럴 파크의 명물이라는 바로 그 다리.


보우 브릿지


 "그.. 그렇다면 여기는 뉴욕? 도대체 어떻게?"

 대뇌의 전두엽까지 미치는 충격의 전율 속에서 그들은 아연실색할 뿐. 그도 그럴 것이 하룻밤 사이에 하나는 프랑스에서 다른 하나는 아일랜드에서 뉴욕까지 와서는 그것도 센트럴 파크에서 수갑을 각각 한 쪽씩 차고 깨어난 것도 모자라 지갑도 없고 신분증도 없으며 옷에는 다른 사람의 혈흔이 묻어 있고 한 발을 쏜 남의 권총까지 소지하고 있으니. 하지만 이조차 겨우 예고편에 불과하다. 더욱 놀랄만한 일들이 그들의 뒤통수를 정조준하며 언제 한 방을 먹일지 잔뜩 벼르고 있으니까.


 기욤 뮈소가 오랜만에 선보이는 스릴러 '센트럴 파크'는 양파 껍질을 까듯 거듭된 반전을 좋아하는 이라면 환영할만한 작품이다.



 전혀 낯선 곳에서 기억을 부분 상실한 채 깨어난다는 설정 자체야 영화만 해도 '큐브'와 '쏘우'가 있고 같은 스릴러 소설에서도 '본 아이덴티티'가 있을만큼 참신한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을 흥미롭게 끌어나가고 독자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곳에서 뜻밗의 반전을 만들어내는 솜씨가 좋기에 꽤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독자에 따라서는 마지막 반전을 심드렁하게 평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마도 그동안 기욤 뮈소의 소설을 즐겨 읽은 이라면 그다운 결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한편, 이 소설은 데니스 루헤인이 쓴 어떤 작품의 반전과 꽤나 유사하다.(제목을 밝히지 않겠다. 밝히는 것 자체가 이 책에 대한 스포일러가 되므로) 데니스 루헤인의 비난(어쩌면 소송까지)은 감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그건 그렇고 '알리스'라는 여주인공 이름 말인데 아무래도 배경이 '센트럴 파크'이다 보니 이 이름에서 바로 연상되는 것이 있다. 바로 센트럴 파크 동쪽 끝에 있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동상이다.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해보면 대략 이 동상의 크기를 짐작하실듯...

 꽤나 유명한 동상으로 아이들이 센트럴 파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상이기도 하다고 한다. 아마도 여주인공의 이름은 바로 이 동상의 주인공 엘리스에서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에서 그녀가 처한 상황은 상상도 못했던 낯선 상황에 빠져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그대로이니까 말이다. 더구나 소설에서 알리스는 센트럴 파크의 서쪽에 있는'램블'에서 깨어나는데 그것은 그대로 엘리스 동상이 있는 장소인 동쪽의 프랑스 여자가 서쪽의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깨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설을 읽어보면 기욤 뮈소가 센트럴 파크를 꽤나 열심히 답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어쩌면 그러다 이 동상이 마음에 든 그가 그대로 소설의 인물로 형상화 하자고 생각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남자의 이름이 가브리엘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성경에서 마리아에게 예수의 수태 고지를 한 천사로 유명한 가브리엘은 흔히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는 기욤 뮈소가 바로 그 천사의 이미지를 독자에게 연상시키고자 그 이름을 남자에게 부여한 것임을 무엇보다 마지막 반전에서 확인하게 된다. 그렇다면 기욤 뮈소는 하필이면 왜 가브리엘 천사를 가져와야 했을까? 여기서 눈치 빠른 당신은 어쩌면 이 소설의 진짜 목적을 알아차릴 지도 모르겠다. 분명 이 소설은 스릴러이지만 실은 치유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소설의 여정은 지금 그들에게 닥친 낯선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것이지만 그럴수록 밝혀지는 것은 지금의 사건이 과거의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에 그녀는 프랑스에서 유명한 연쇄 살인을 단독으로 수사한 적이 있다. 임신으로 휴직한 상태였지만 언제나 아버지처럼 영웅적인 경찰이 되고 싶었던 그녀는 임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추적을 감행하여 결국 범인을 밝혀낸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오히려 범인에게 공격당해 태중의 아이가 죽고 그것에 충격받은 사랑하는 남편마저 불귀의 객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녀는 한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가족도, 같은 경찰들의 인망도. 그것도 영웅이 되고 싶었던 자신의 열망 때문에.


 나는 기억한다.

 2011년 11월 21일에 자만심과 허영심에 사로잡힌 나는 지나친 만용을 부리다가 내 아기와 남편을 죽게 한다. (p. 154)


  그녀의 고백 그대로다. 그런데 그녀와 함께 있는 가브리엘 역시 같은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너무 자신에게만 골몰하느라 가족과 생이별한 처지였던 것이다. 그렇게 둘은 닮았고, 닮은 그들이 지금 함께 역경을 헤쳐 나가고 있는 것이다. 뉴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그들의 여정은 그리하여 두 개의 매듭을 푸는 것과 같다. 하나는 지금 처한 현실의 매듭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기심이 빚어낸, 그리고 이제는 치유 불가능한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과거의 매듭이다.


 푸는 과정은 속도감 빠른 전개와 거듭된 반전으로 재미나게 읽히지만 기욤 뮈소는 그러다가도 문득 주인공의 과거 기억과 심리를 투명하게 건져내어 적절하게 던져줌으로써 비트가 빠른 댄스 음악을 한창 듣다가 불현듯 차분한 명상 음악을 듣게 되는 것과 같은 순간을 마련한다. 마치 어쩌면 언젠가의 나였을 지도 모르는 그들의 실수와 상처의 결들을 읽으면서 문득 페이지를 넘기려는 손을 멈추고 나는 어땠는가 헤아려 보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들이 빠지는 허영, 자만이란 어느 누구도 걸려들 수 있는 것이기에....


 소설은 정말로 이런 순간을 마련한다.


 우리의 생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때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 순간이 있다. 당신이 지닌 모순, 두려움, 회한, 분노, 머릿속에 들어 있는 복잡한 생각을 그대로 인정하고 품어 안아주는 당신의 반쪽을 만나는 순간이 있다.(p. 87)


 기욤 뮈소는 분명 자신의 소설이 그런 반쪽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랬기에 '센트럴 파크'를 굳이 제목으로 썼던 것이 아닐까 싶다. 진실로 정신없는 뉴욕을 걷다가 센트럴 파크에 들어서면 그동안 겪은 모순, 두려움, 회한, 분노,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들이 한 순간 씻겨 나가는 느낌을 받게 되니까 말이다. 센트럴 파크는 그런 문의 공간이자 어찌 보면 뉴욕이 가진 구원의 땅이다. 뉴욕인들도 그것을 잘 알았기에 150년 이상이나 열심히 보존했던 것이리라. 제목인 '센트럴 파크'도 이 소설도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기욤 뮈소의 바람이 투영되어 있다. 알리스가 그랬듯이 아무리 어둡고 고통에 찬 인생이라 하더라도 어딘가에는 꼭 '센트럴 파크'와 같은 곳이 있다는 믿음을 이 소설을 통해 주고 싶은 것이다. 비록 잘 보이지도 않고 찾기도 어려워서 자주 우리는 낙담하지만 그럴 때마다 이 소설이라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굳게 닫힌 절망의 문을 여는 희망의 바람이 되었으면 하는 뮈소의 소망이 담긴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의 주인공 독백은 차라리 기욤 뮈소의 간구 같기도 하다. 그 간구의 마음은 '아마도'라는 말에 집약되어 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우리들에게 삶은 언제나  예측불가능으로 넘치는 '아마도'일 것이다. 너무나 세상의 고통과 불안에 지친 우리들은 그 예측불가능성을 오로지 절망의 무게로 여긴다. 하지만 기욤 뮈소는 너무 그렇게 보지 말고 오히려 잠재된 희망의 가능성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소설 마지막에서 많이 반복되는 '아마도'는(그 뒤에 따르는 내용과 결부지어 보면) 분명 그런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사르트르는 '작품이란 작가의 기도다'라고 말했다. 그대로 이 소설도 언젠가는 꼭 삶의 '센트럴 파크'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기욤 뮈소의 기도라고 생각된다. 이런 진심을 재미까지 놓치지 않으면서 그려내고 있기에 소설이 더욱 마음에 든다. 문득 궁금하다. 당신은 이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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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2-27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파 껍질을 까듯 거듭된 반전, 이런거 저는 완전 좋아합니다. ^^
기욤 뮈소는 이상하게 손이 안 가는 작가였는데, 헤르메스님 소개의 마력에 다시 빠져드네요. 에궁, 책임지세요.

ICE-9 2015-03-11 00:06   좋아요 0 | URL
반전은 진짜 많이 나오는데 결말 때문에 점수를 다 까먹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마녀고양이님도 분명 데니스 루헤인의 그 소설을 읽었을 것 같아서 말이죠. 물론 책임은 지겠습니다.
언제든 말씀 하세요. AS는 확실히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