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리처드 도킨스와 더불어 대표적 무신론자인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스완송', 그러니까 그가 세상에 가장 마지막으로 내놓은 유작이다. 2011년 12월 15일, 그는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그렇게 떠나기까지의 마지막 여정을 담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히친슨을 수식하는 것들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것들이 특히 대표적이다. 논쟁가, 독설가, 무신론자. 그는 40년간 수많은 칼럼, 에세이, 기사 그리고 책을 썼지만 그래도 이러한 수식어를 갖도록 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단연 '신은 위대하지 않다'라는 책일 것이다. 그의 이름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장본인이기도 한 이 책에서 그는 제목 그대로 신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무엇보다 이 책은 그동안 종교가 신의 사랑과 인격성을 설파해온 것에 반발해 사실 신은 지극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이며 따라서 이런 신에게 사랑을 바라는 건 자기모순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리하여 종교가 겁주는 대로 '신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 물론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신이 있는 것보다 오히려 더 낫다고 단언한다. 이 책은 정말로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일으켰고 그를 리처드 도킨스와 함께 종교계의 주적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런 그이니만큼 그의 최후는 아무래도 세인들의 관심을 끌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그동안 그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대었던 사람들은 이런 최후의 순간에도 과연 그가 신을 안 믿는지 어디 한 번 두고보자 는 심정이었다. 그들은 그걸 신의 복수라고 생각했다. 목소리로 신을 부정했기 때문에 신이 하필이면 바로 그 목에다 암을 생기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신에게 용서를 빌고 그에게 구원받을 것을 설득하는 메일들이 잇달아 날아오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모임까지 생겨난다. 유투브에까지 그런 동영상이 걸린다.


 그래서 말인데, 이 책은 대답이다. 바로 그런 그들의 냉소와 바람 그리고 기도에 대한 냉정하면서도 신랄한 대답인 것이다.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죽음을 목전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 '신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가?'라는 그들의 물음에 그는 이런 식으로 기꺼이 대답한 것이다. 몸으로, 삶으로 직접.  신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 지를. 이 책은 그 기록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크라테스적 죽음의 재현과도 같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셨을 때 그는 죽음이 어떻게 찾아오는지 보겠다며 끝까지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음이 찾아오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도 이와 같다. 끝까지 냉정하고 차분하게 자신을 객관화한다. 인정에 호소하지도 않고 동정을 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신랄하게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리얼리티 쇼처럼. 신 없이 죽어가는 과정을.


 이 책의 원래 제목은 'MORTALITY'다. 죽음을 뜻하는 허다한 말들 중에서 이 말은 특히나 '필멸', '반드시 죽음', 이렇게  '피할 수 없음'을 강조 하고 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이 궤적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히친스도 그랬다. 그는 2010년 6월 8일, 자신의 새책을 위한 홍보 여행을 시작한 첫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죽음으로 가는 여정의 티켓을 받았다. 


 살면서 자다가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눈을 뜬 적이 지금까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내 '시체'에 족쇄로 묶여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의식을 되찾은 6월의 어느 이른 아침은 그런 것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가슴과 흉곽 전체를 텅 비워버린 다음 서서히 굳는 시멘트를 채워넣은 것 같았다.(p. 19)


 당연히 그 역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든 미래가 말살되어 버리는 순간 앞에서 아무리 히친스라 하더라도 냉정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결국 어차피 도래할 죽음. 그는 지금 일어나는 모든 울분들이 무엇인지 잘 안다.


 다음 10년 동안 할 일들을 진지하게 계획해두고,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 계획한 일들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정말로 살아서 아이들의 결혼식을 볼 수 없을까? 세계무역센터가 다시 솟아오르는 것도 볼 수 없을까? 헨리 키신저나 요세프 라칭거 같은 늙은 악당들의 사망 기사를 쓸 수는 없더라도 읽는 것은 할 수 없을까? 하지만 나는 이런 종류의 쓸데없는 생각들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감상과 자기 연민이라는 것을.(p. 24)

 

그리고 이런 냉정함이 찾아온다.


 "왜 하필 나인가?"라는 멍청한 질문에 우주는 아주 귀찮다는 듯 간신히 대답해준다. "안 될 것도 없잖아?"(P. 25)


 이왕 이렇게 되었다면, 신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 히친스. 그는 자신이 몸소 겪어야 말을 하는 사람이다. 경험이 바탕되지 않는 말은 섣불리 하지 않는다. 물고문이 가져오는 고통을 말해야할 때 그는 정말 물고문이 얼마나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망치는 지 알기 위해 자신에게 실제 그것을 자행하도록 했다. 그 정도로 그는 자기가 겪은 것과 알고 있는 것만을 쓰는 사람이다. 내 생각에 히친스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말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자기가 신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걸 말했다면 그 삶의 모습마저도 그러해야 한다고. 그리고 그 기록은 조금의 꾸밈도 없이 일어난 사실 그대로를 써야 한다고.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그렇게 써내려나간 기록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흔히 기대하곤 하는 것들은 하나도 없다. 암과의 모진 싸움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텨나가는 영웅적인 면모도, 삶의 끝자락에서 타인과의 유대를 통하여 다시금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식의 읽는 이도 감동으로 치유되는 이야기도,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지?" 식의 토로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히친스는 '왜 심장병이나 신장병도 암처럼 오래도록 사람을 고생하게 만드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투쟁이나 싸움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유독 암에게만 그런 말을 붙여 그 과정을 영웅적인 투쟁으로 보이게 하는지 의문을 표시하며 '잘 지냈어요? '어떻게 괜찮아요?' 같은 환자들에게 의례히 묻곤 하는, 설령 뭔가 환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건네는 말이라 할지라도 고문과도 같은 과잉 배려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런 친절은 바로 코 앞에 닥친 막막한 현실을 조금이나마 잊게 하려는 마음일 것이나 그렇다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이나 죽음이라면 차라리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고 솔직하게 지금 현존하는 고통이나 비극적 상황에 대해 말을 나누는 게 나을 것이라 말한다.


 죽음이 언젠가는 도래하고말 생리적 현상이라면 거기에 대해 그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더 보태거나 빼지말고 그냥 직시하고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그저 충실히 삶을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지 않을까 하는 뜻을 내비치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엔 종양으로, 그리고 화학치료로 육체가 망가지는 고통은 있어도 거기에 대한 슬픔과 곧 삶을 떠나게 된다는 자각에서 오는 한 같은 것은 없다. 치유를 위한 기도도, 내세를 위한 기도도 그는 원하지 않는다. 그저 홀연히 세상을 떠나게 될 때까지 어떻게든 남은 시간을 충실히 보내고 싶을 뿐이다. 진정 그것 뿐이다. 이 기록 역시도 바로 그 충실을 위한 것이다. 사실은 그럼으로써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신 없이 어떻게 죽을 수 있는 지 말이다.


 예전에 한 드라마가 암 세포도 생명이라고 제거 수술을 거부한다고 해서 많은 이들의 조롱을 받은 적이 있다. 재밌게도 히친스가 마치 거기에 대해 답변한 것과도 내용이 있었다. 그는 암세포도 생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무생물적인 현상에 생물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한심한 오류(P. 31)'라고 답한다. 


 내가 식도에 생긴 종양을 '감정도 없고 맹목적인 외계인'으로 묘사한 것은 나조차도 그것에게 모종의 생명체 같은 성질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인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이 실수였음은 알고 있다. 무생물적인 현상에 생물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한심한 오류의 한 사례인 것이다. 암 덩어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유기체가 필요하지만 암덩어리는 결코 살아있는 유기체가 될 수 없다. 그것의 악의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것의 '최선'이 곧 숙주와 함께 죽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숙주는 암 때문에 죽어버리거나, 아니면 암을 박멸하고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내는 수 밖에 없다.(P.32)


 암만 특별하게 투쟁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과 이렇게 종양에 생명체 같은 성질을 부여하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에게 도래한 상황이나 고통에 뭔가 의미를 부여하고자 함인 것이다. 그는 어떻게든 이 상황이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무의미하지 않으며 어떻게든 의미가 있을 것을 원한다. 그래야 그것을 당하고 있는 그 존재도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이대로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를 투쟁으로 영웅적으로 만들고 생명체로 만들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 맞다. 이 모든, 사실은 무익한 노력의 본질엔 바로 '자기 연민'이 있다. 이대로 허무하게 없어질 자신이 불쌍해죽겠다는 고백이 있는 것이다. 히친스가 이런 말을 하는 건, 그것이 신에 대한 태도에도 그대로 통하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신에 의지하는 것. 그것 역시도 정말로 신을 믿거나 의지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연민 때문임을 말이다.


 그러니 히친스에게 신 없이 죽을 수 있는 것엔 아무런 문제도, 어려움도 없다. 자기 연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되는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에 걸친 현재 자신의 육체가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한 신랄한 묘사도 그리고 어떤 위안과 유대감을 가지려는 병원이나 지인들의 친절에 까칠하게 구는 것도 알고보면 그 때문이다. 언제나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봐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죽음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경험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생각도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서도 이 책이 하나의 대답이라고 했지만 히친스가 자신의 삶을 정답으로 여기는 것도 아니다. 무신론자로 산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삶에 뚜렷한 정답이 없다는 것과 같다. 종교가 특히 그렇지만 정답이란 많은 부분 도그마가 되어 그 진실 여부에 대한 제대로 된 검증없이 사람의 삶을 구속한다. 무신론자는 그렇게 구속 받는 것을, 나아가 그런 구속을 줄 수 있는 것을 일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는 전도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삶을 살 뿐이다. 그 삶의 여정을 보고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든 오로지 그들의 몫인 것이다.


  히친스는 이 책의 제목을 'MORTALITY'라고 했다. 이것은 '지금은 내 이야기이지만 언젠가는 바로 너의 이야기이다.'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함인 것 같다. 필연코 다가올 수 밖에 없는 죽음 앞에서 히친스가 '나는 이렇게 살다 가는데 너는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를 묻는 것 같은 뉘앙스를 이 제목은 풍기고 있다. 그렇게 이 책 자체는 독자에게 하나의 질문이며 이제 독자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죽음에 대한 태도의 역사적 변화를 밝혀 유명해진 필립 아리에스라는 역사가는 근대 이후로 죽음이 점점 개인화되고 부정적인 것으로 변모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건 공동묘지가 점점 공동체 사회로 부터 멀어지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고도 한다. 그렇게 현재는 체계적으로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고 그럼으로써 삶에서 배제해 왔다. 어떤 학자들은 그러한 삶에서의 죽음 추방이 지금처럼 삶을 욕망 추구의 극단적 현장으로 만들어버렸다고도 한다. '언제나 죽음을 염두에 두라'는 '메멘토 모리'는 중세인들 모두가 뇌리에 새겨둔 격언이었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죽음과의 대면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현명하게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에게도 바로 그런 대면이 필요한 것 같다. 모의 장례식 체험처럼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당신을 고해성사를 받듯 죽음과의 대면으로 데려간다. 무엇을 얻게 될 지는 모르겠으나 그냥 이끄는 대로 한 번 걸음을 내맡겨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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