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신광은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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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어떻게 이 리뷰를 읽게 되었을까 생각해 봤다. 물론 어릴 때 보았던 로봇 애니메이션을 얼른 연상시키는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라는 제목이 호기심에 불을 당겼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호기심. 어떤 책일까 궁금했겠지만 리뷰까지 읽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뷰를 읽는다는 건 어디까지나 책에 대한 정보를 더 원해서이고 그건 이 책을 한 번 읽어볼까 마음이 생겼기 때문일 테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왜 이 책을 읽어볼 생각을 했을까? 그건 아마도 부제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국 교회가 만들어낸 거대한 괴물'이 바로 '아르뱅주의'라고 하고 있으니. 이 부제에 눈길이 머물렀다면 최소한 당신 스스로도 지금의 한국 교회가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 쪽일 것이다. 실제로 지금의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구태여 그 증거를 여기서 밝힐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된다.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봐도 비리와 범죄로 얼룩진 한국 교회의 모습은 허다하게 나올테니까. 지금 한국 교회는 세 명의 노예다. 권력의 노예고 자본의 노예이며 욕망의 노예이다. 지도자나 성도들 할 것없이 하는 행태를 볼라치면 그들이 말하는 사랑과 그들이 두려워하는 지옥은 오로지 그들의 입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어둠이 짙어지면 작은 반딧불도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법이듯, 이렇듯 문제가 심각해지면 고조된 위기감으로 스스로 자정해보려는 목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구약시대 황무지를 떠돌며 당대의 이스라엘을 정죄하고 종말을 선포했던 선지자들이 그러했듯이.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도 그런 목소리 중의 하나라고 보면 된다. 일단 '아르뱅주의'라는 뜻모를 말부터 살펴보자. 분명 처음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말은 저자가 만든 말이니까 말이다. 아르뱅주의는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합친 말이다. 저자 신광은은 이 두가지를 한국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으로 보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칼뱅의 사상은 스코틀랜드인 그의 제자 존 녹스에 의해 장로교가 되었고 그 장로교는 지금 한국 개신교에서 가장 세력이 큰 교파이니까 말이다. 그럼 아르미니우스는? 나도 아르미니우스는 잘 몰랐는데 뿌리는 칼뱅 신학에 있으나 몇 가지 점에 반발해 나온 사상이라고 한다.  저자가 특별히 이 두 가지를 들고 나온 것은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잘못된 구원론에 있으며 그 문제가 되는 구원론의 중심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주의이기 때문이다.


 이 예민한 구원론을 건드리려고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오늘날 유통되고 있는 통속적 구원론은 종교개혁자들의 본래의 가르침에서 떠나버렸다. 현대 기독교 대중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희한한 구원론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거짓 위안을 누리고 있다. 둘째, 500년전 종교 개혁가들이 가지고 있었던 한계들이 있다. 그들은 시대의 아들로서 당시의 역사적 과제와 맞서 위대한 싸움을 했고 그 결과 우리는 종교개혁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그들의 한계를 발견하고, 21세기라는 현 상황과 그들의 신학 사이의 부조화되는 면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우리가 종교 개혁가들의 후예라면 미진한 개혁을 온전히 하는 데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다.(p. 104~ 105)


 이러한 동기와 문제의식으로 그는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주의에 천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칼뱅 교리를 다루고 있는 2부와 아르미니우스 교리를 다루고 있는 3부가 이 책의 등뼈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대략적으로 소개해 본다면 이렇다.


 사실 막스 베버도 인정했듯이 칼뱅은 현대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낳게 한 장본인으로 그 영향력은 비단 신학에만 그치지 않지만 지금의 주제와 관련해서 말해본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예정론'이라 할 수 있다. 이 '예정론'을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구원 받을 수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미리 결정해 놓은 것으로 오해하곤 하는데 사실 칼뱅의 예정론은 선행 결정된 구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칼뱅이 예정론을 통해 말하고 싶어했던 건 단 하나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전적인 무력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즉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혜만이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 바로 예정론의 핵심이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인간의 전적인 무력함. 칼뱅의 신학은 바로 이것을 반석으로 세워진 사상이었다. 신광은은 칼뱅 교리의 핵심 5가지를 들어 TULIP, 즉 튤립 교리라 말하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아르미니우스와의 차이점에 관해서라면 그렇게까지 나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저자 스스로 아르미니우스의 주요 문제를 '자유의지 없으면 책임 없다'에서 찾고 있으니.


 그러니까 핵심은 간결하다. 때로는 이렇게 포커스를 좁히는 것이 이해가 보다 더 선명해질 것이다. 지금 '자유의지'가 나왔다. 아르미니우스는 칼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논쟁을 통해 갈라져 나온 사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아르미니우스가 칼뱅에 대해 공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그게 자유의지였다. 왜냐하면 칼뱅은 오로지 하나님의 절대 주권만 인정하므로 인간의 자유의지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로지 선이나 악중 하나를 택할 수 있을 뿐 칼뱅에 따르면 다른 자유는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신이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다를 바 없으니 어떻게 그 행위의 책임을 당사자에게 지울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뱅은 윤리적, 사회적, 종교적 책임을 강조했다. 이건 모순이다. 이건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래도 말해본다면 때문에 칼뱅은 좀 무리를 했다. 인간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은 오직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뿐, 의지까지 하나님이 가로막은 것은 아니라는 둥, 하나님이 인간 의지에 반하여 악을 선택하도록 외압을 가하지는 않는다라는 둥 하고 말이다. 예외가 늘어나고 변명이 붙는다. 이렇게 되면 이론은 설득력을 잃는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로 그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모순을 바로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단순히 해결할 수 있는 '스켈레톤 키'가 있다.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 바로 아르미니우스의 핵심이다. 그들의 모든 주장은 바로 이 전제로부터 출발했다. 책에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핵심을 칼뱅과 똑같이 다섯 개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칼뱅주의 


 자연적 무능력                                                                   전적 타락  

 조건적 선택                                                                      무조건적 선택  

 보편 속죄                                                                         제한 속죄 

 저항할 수 있는 은혜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조건적 견인                                                                      성도의 견인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얼른 무슨 의미인지 납득이 안된다면 괜히 말만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은 저 말의 뜻에 대하여 저자가 설명한 것을 읽어봐도 얼른 이해 안 가기도 한다.(내가 신학적 용어에 과문한 탓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자연적 무능력의 경우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나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로 회복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무능력이라고 할 수 없지 않나? '자연적 무능력'을 따로 항목으로 하여 설명하는 곳에서도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믿음은 인간 자신의 행위'라고 말하여 믿음을 인간의 능력으로 보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나온 용어인지 알송달송하다.


 그 외에는 이해하기에 별로 어려울 게 없는 듯 하다.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고 다른 하나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만 염두에 두고 보면 모두 그로부터 나오는 뻔한 결론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으니.

 인간이 자유의지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이상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축소될 것이기에 무조건적 선택이 아니라 조건적 선택이 될 수 밖에 없고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이상 속죄의 가능성 역시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반항의 자유가 인정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전적인 끌어당김만 가능한 칼뱅과는 달리 자유의지가 있는 이상 인간 스스로 거룩하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니 '성화'가 강조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자, 이렇게 2부와 3부에 걸쳐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설명한 다음 본격적인 저자의 할말은 비로소 4부에서 시작되는데 여기서 그는 한국 교회를 망친 주범인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를 해부한다. 그에 따르면 '아르뱅주의' 역시 그 핵심을 다섯가지로 말할 수 있다고 한다.

 

 1) 타락에 대해 : 전적인 - 전적이지 않은 전적 타락

 2) 선택에 대해 : 조건적 - 무조건적 선택

 3) 속죄에 대해 : 보편 속죄

 4) 은혜에 대해 : 저항할 수 있는 은혜

 5) 견인에 대해 : 성도의 견인(완전한 견인)


 이상인데 1)과 2)는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혼합했고, 3)과 4)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이며 5)는 칼뱅의 것이다. 한국 교회의 구원론은 이렇게 혼합되어 있는데 저자에 따르면 여기엔 어떤 원칙도 없다고 한다. 그저 마음에 드는 것을 가져와 썼을 뿐. 그래서 그는 싸구려 구원론이라 부른다. 저자가 아르뱅주의를 '싸구려'라고 부르는 것은 그 무원칙성 때문만은 아니다. 보다 더 커다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아르뱅주의가 교인 스스로 윤리적으로 살려는(그러니까 원래 하나님과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려는) 노력을 방기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일례로 교회 내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문제들에 교인들이 직면하게 되는 경우, 즉 '교인의 위선적인 삶에 실망할 때나, 목회자들이 전혀 본이 되지 않음을 발견할 때 혹은 교회가 윤리적으로 파탄 났을 때 아르뱅주의자들은 신자의 전적인 타락설로 이를 변명한다. "인간은 철저하게 타락한 죄인이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악한 걸 어쩌겠어!"(P. 227) 등으로. 그렇게 스스로 잘못된 점을 고치려는 노력을 가로막는다. 또한 무조건적 선택은 죄를 저지른 이들을 쉽게 용서하게 만들기도 한다. 저자는 이러한 아르뱅주의의 특성이 고문기술자로 유명한 이근안을 목사로 되게 만든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문제를 일으킨 교회의 지도자가 계속 버젓이 그 교회의 지도자로 군림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고 말이다. 회개하는 척만 해도 모든 게 다 손쉽게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쉬운 용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마저도 쉽게 만든다. 이게 바로 보편 속죄가 가진 달콤한 독약이다. 그저 '믿음'의 고백만으로 구원 받게 하여 교인 스스로 구원을 위한 노력에 힘쓰지 못하게 만들고 더구나 '예수천국불신지옥'이라는 단순화마저 낳아버렸던 것이다.


 아마도 이쯤되면 저자가 왜 아르뱅주의를 이토록 문제삼는지 그 진짜 이유가 조금쯤은 내다보일 것 같다. 바로 교회와 성도 모두를 어항 속의 물고기로 만들기 때문임이 말이다. 현실에 어떤 문제가 있고 자신들이 아무리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해도 자신들은 이미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어항과도 같은 그 갇힌 세계 속에서 빠져나오려는 아무런 노력 없이 그저 평안히 유영하기만 하는 영혼이 죽어버린 좀비로.


 그렇게 스스로 정화하려는 노력을,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현실 참여의 노력을 뱀파이어처럼 현재의 아르뱅주의가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 아르뱅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구원론이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5부와 6부는 그것을 위한 일종의 정지(整地)작업이다.


 그는 그것을 위해 사실 좀 멀리까지 나아가는데, 무려 지금 신학의 주춧돌이 되었을 그리스 철학까지 공격한다. 특히 실체를 상정하는 존재론과 모든 문장을 명제화시키는 논리론을 공격한다. 그리스 철학은 지금의 신학을 있게 한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기초가 되었는데 그 그리스 철학을 공격한다 함은 지금까지 이어온 신학 전통을 깡그리 비판하는 것이어서 얼른 보기에도 무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렇게 공격을 감행하는 까닭은 그가 세우려는 새로운 구원관과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생겨나게 된 근본 원인을 생각하다보니 그런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 철학이 주로 했던 존재와 명제에 대한 집착 탓이라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유의 전통이 성경에 있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실체를 상정하게 함으로써 그 존재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사유하게 만들고 또 그 모든 문장들을 명제화시켜 그 참과 거짓을 따져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성경에 대한 지나친 인간의 개입을 염려하고 있다. 되도록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을 것을 바라고 있다. 이는 성경의 원저자인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과도 같아서 여기서 저자가 은근히 다시 칼뱅에게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비록 그의 문제 의식에는 상당히 동의하지만 사실 이 부분에서는 개인적으로 선뜻 동의하지는 못한다.


 지은이와 달리 나는 '철학자들의 신'이 절대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에게 전적으로 타자일 수 밖에 없는 무한성을 생각하는 건 피할 수 없는 본능이라고 생각된다. '헤아림'은 우리에게 떨어질 수 없는 그림자와도 같다. '말씀'이 우리 눈 앞에 놓여있는 한 그 말의 주체에 대해 사유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 말이 옳고 그름을 검증해서 생기는 문제들도 있겠지만 무턱대고 믿어서 생겨나는 문제들도 그에 못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니, 기독교가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진정 인격신이고 그가 우리들의 사랑을 받길 원한다면 그 존재에 대한 사유와 말이 가진 진리치에 대한 사유는 오히려 필수라고 생각된다. 사랑은 이해의 차원에서 생겨나는 감정이다. 우리는 납득할 수 있을 때 사랑할 수 있다. 아무런 사유없는 전적인 나의 내맡김을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지 않고 숭배라 부르는 건 그 때문이다.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숭배했던 게 그 무사유 때문이지 않았던가. 지은이도 이 책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주장하는 자유의지에 대해 반박할 때 '집단악'을 이야기하면서 아이히만이 자행한 유태인 학살을 예로 들었는데 한나 아렌트 말대로 그 역시도 무사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대로 교회와 신도 모두가 스스로 정화되고 성화되는 노력을 하는데 있어 어떻게 존재와 말에 대한 사유 없이 그게 가능할까? 인간은 입력된 프로그램대로 순순히 따르는 기계가 아니다. 특히 윤리적 삶과 관계된 종교라면 인간 스스로 자발적 이해를 통해 그것을 내면화시켰을 때 더욱 지키려 애를 쓸 것이다. 타인이 지켜보든 말든 상관없이. 


 앞서 말했다시피 아르뱅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써의 새로운 구원관에 관해서라면 이 책에서는 정지 작업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구원관의 정확한 모습보다는 지금 우리가 극복해야할 낡은 구원관들을 말하는 것으로 이 책은 끝이 난다. 그 구원관들은 영지주의가 정착시킨 육체의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천상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구원관이며 지옥을 피하고 천국에 가고픈 이원론적 구원관이다. 이 모두는 죽음 이후의 구원관을 말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현실에서의 노력을 포기하게 만듦으로 그는 바로 이 삶에서 그런 노력을 할 수 있게끔 삶적인 차원에서의 구원관을 새로이 가져온다. 그게 바로 '하나님 나라'다. 하지만 여기서의 '나라'는 영토,즉 공간의 개념이 아니다. 그건 낡은 구원관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개념이었다. 낡은 구원관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을 상정했다. 하지만 저자는 '바로 이 삶에서의 노력'을 강조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됨'을 강조한다. 즉 '나라'를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의 개념으로 바꾸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에 편입되는 것이며 그 진정한 뜻은 이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구원이란 내가 어디를 거거나 내 존재의 바뀜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이 삶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있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 내세의 지복을 위해 현실의 삶을 내버려둔다면 그건 구원이 아니며 범죄를 저지르는 순간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추방되는 것이다. 그가 세우려는 구원관은 바로 이런 것이며 여기서 방점은 어디까지나 '실제 삶에서 노력하게 만드는' 곳에다 찍혀야 한다. 이런 구원관에는 나도 동의한다. 진실로 나역시 현실적인 삶에서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는 이런 책이다. 감사의 글과 각주를 빼면 모두 490페이지로 다소 두터운 분량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말하는 것에 비해 분량이 좀 많다고 생각된다. 이유를 짐작하자면 저자가 너무 친절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생략하고 건너뛰어도 될 설명들이 많았다. 어쩌면 이런 방면에 전혀 경험이 없는 초심자를 위한 배려일 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용어들을 좀 알기 쉽게 만들었으면 좋겠다. 신학에서는 굳어진 용어들이라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일반인의 눈에 얼른 납득가지 않는 용어들이 다소 있었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복음주의'에 대한 부분이었다. 사실 한국 교회를 가장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복음주의'일 것이다. '복음주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산물이다. '복음주의'는 주로 전도 집회를 통해 퍼졌는데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주장하는 '보편 속죄'와 믿기로 결단하는 '자유의지'를 믿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책 제목이 칼뱅이 앞에 나오는 '칼배아르주의'가 되지 않고 '아르뱅주의'가 된 것도(뭐, 확실히 '칼배아르주의'가 어감상으로 영 아니긴 하지만) 이와 관계가 있을 듯 하다. 한국교회가 이처럼 복음주의에 빠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70년대에 우리나라에 왔던 빌리 그레이엄의 전도 집회 때문이라고 한다. 그 때 빌리 그레이엄은 하나님과 개인이 일대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고 그 전까지는 들어보지 못했던 한 사람에게 집중하는 하나님에게 감명받아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다른 교회들에게 복음주의가 바로 성장의 열쇠라는 걸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때부터 '제자 훈련'이나 '경배와 찬양'등 전도에 주력하는 교회 프로그램이 자리잡으면서 교인 모두가 전도에 열을 올리는 '총동원체제'를 낳아 결국 교회가 대형화되는 추세로 이어졌다. 그렇게 밖으로만 밖으로만 열을 올릴 뿐 정작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할 현실 속 자신의 삶을 신경쓰지 않아 오늘의 한국 교회는 타인들에게 괴물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본다면 진짜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은데 과연 이렇게 우연히 자리잡게 된 '복음주의'를 어떻게 극복할지 책을 덮으며 문득 떠오르게 되는 의문이다. 여기엔 이 책보다 더 정교하고 설득력 있는 논의들이 필요할 것 같은데, 여기서는 그저 스케치만 이루어진 새로운 구원관이 언젠가 제대로 된 모습으로 다시 돌아오는 날 그 역시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며 이만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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