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4
윌리엄 골딩 지음, 안지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파리대왕'에 이어 두번째로 윌리엄 골딩의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피라미드'는 '파리대왕'과 상반된 이야기를 하고 있어 자못 흥미로웠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으로 참전했던 윌리엄 골딩은 전쟁동안 겪었던 뼈아픈 경험을 한 권의 소설로 승화시켰다. '파리대왕'은 인간의 영혼은 마치 백지와도 같이 선과 악, 질서와 야만 환경에 따라 어디로든 쓰여질 수 있으며 그런 인간들을 적절히 통제해 줄 문명이 그 힘을 잃어버렸을 경우 인간들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스스로 혼돈을 초래할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렇게 '파리대왕'은 문명이 가진 긍정적인 의미를 어느 정도 보여주었는데 하지만 이번에 읽은 '피라미드'는 달랐다. 그 문명이 자기만의 궤도에만 과도하게 집착하여 원래 문명이 존중해야 할 인간을 더이상 존중하지 않을 경우 도리어 인간들에게 얼마나 감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이 그렇게 된 사회를 단적으로 윌리엄 골딩은 '피라미드'라 부른다. 이 소설은 '스틸본'이라는 가상의 마을을 배경으로 하지만 사실은 현대 사회 어디라도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적 질서를 집약적으로 드러낸 공간이기도 하다.

 

 나는 그녀의 고개 뒤로 강을 쳐다보았지만 대신 챈들러스 클로스의 그림이 즉각 떠올랐다. 배비컴 중사의 집은 윌멋 대위 집 입구 건너편에 있었다. 두 집이 나머지 집들보다 뚜렷하게 우월했다. 그 너머로는 집들이 점점 더 작아지고 초라해지고 더러워지고 퇴락해서 폐허가 된 공장까지 이르렀다. 남자 아이들은 '가난한 소년'의 운동복을 입었다 아버지의 바지를 잘라 입었는데, 버려진 셔츠가 밑으로 튀어나왔다. 대부분 맨발이었다. 나는 거기가 신문에서 빈민가라는 부르는 곳임을 갑자기 깨달았다.( P. 67). 


스틸본의 모습을 표지로 사용한 한 '피라미드' 표지 중에서...

 이런 공간 속에서 주인공 올리버는 세 명의 인물을 통해 '피라미드'적 사회의 진실을 깨달아 나간다. 그 '스틸본'은 '파리대왕'에 나오는 문명화되지 못한 무인도와는 정반대로 한껏 문명화된 공간이지만 그 속에서 만나고 느끼게 되는 위험과 숨막힘은 결코 거기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면에서 '피라미드'라는 제목은 중의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처럼 층층이 이루어진 계급 사회를 뜻하기도 하지만 '피라미드'의 단면인 '트라이앵글'처럼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세 명의 인물을 통해 전개되어 나가는 이야기를 뜻하기도 한다. 그렇게 이 '피라미드'란 소설은 사실 세 개의 이야기가 주인공을 중심으로 통합된 이야기이며 그 각각은 주인공이 '피라미드'적 사회의 진실에 대해 눈을 뜨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피라미드를 형상화한 표지...

 단순하게 말하면 올리버의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피라미드'에서 그를 진실로 인도하는 세 꼭지점의 인물들은 각각 이비, 애벌린, 바운스로 그들은 모두 올리버에게 일종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비는 아직 '피라미드'적 사회의 허상을 깨닫지 못한 올리버가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상위 계급에 대한 선망의 대리 충족 역할을 한다. 즉 올리버의 이비에 대한 욕망은 정말 이비를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보다 상위 계급으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망의 비뚤어진 투영인 것이다. 올리버가 이비를 원한 것이 원래 동경했던 상위 계급의 화신과도 같았던 이모젠의 약혼 소식을 듣고 이루어졌다는 점과 무엇보다 이비를 원하게 되었던 계기가 자기보다 상위 계급인 보비와 함께 있는 것은 본 뒤였다는 게 그것을 증명한다. 즉 올리버에게 이비의 육체란 단순히 여자의 육체가 아닌 자기 스스로를 상위 계급으로 여기게끔 만들어 주는 일종의 전리품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이 사실은 이비가 자신과의 정사로 임신하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젖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 임신 가능성을 통해 올리버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바로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계급에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비는 결국 올리버보다 더 상위 계급의 누군가와 관계된 문제로 인해 마을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비의 사라짐은 올리버의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비의 사라짐을 통해 '피라미드'적 사회가 약자에게 얼마나 가혹한지를 그는 새삼 깨닫게 된다.


 

 그 두려움이 있어서인지 다음의 이야기는 보다 더 상위 계급에 서고자 옥스포드 대학에 들어간 올리버를 보여준다. 이비처럼 사라지지 않기 위해 그는 사회가 바라는 단계를 착실히 밟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그가 휴가를 맞아 다시 '스틸본'으로 돌아오고 엄마의 강권으로(그는 원래 바이올린 연주를 했는데 그 연주를 맡은 사람이 갑자기 연극에 참여할 수 없게 되어 올리버의 엄마가 그에게 거의 억지로 떠맡긴 것이다.) 연극을 하게 된다. 애벌린은 바로 거기서 만나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연극 연출자다. 이 부분에서 연극이 나오는 이유는 이비를 그렇게 사라지게 만들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해왔고, 그 때문에 좀 더 사다리의 윗 쪽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해왔던 올리버에게 사실은 그 사회가 보는 것만큼 강하지 않으며 오히려 연극과 마찬가지로 진실한 의미라고는 모조리 텅 비어버린 환영에 불과함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이 부분의 연출이 참으로 절묘한데, 골딩은 이 연극이 사실은 얼마나 계급적인 것인가를 먼저 보여준다. 시장의 아내가 주인공이었을 때와 거의 내쫓겼다시피 했을 때의 시 당국으로부터 배우들이 받는 대접의 차이를 통해 이런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실력이 아니라 바로 계급 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소음이나 다를 바 없는 노래 실력을 지닌 시장 아내가 늘 프리마돈나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골딩이 이런 에피소드를 깔아 놓는 것은 무엇보다 현재 올리버가 기울이는 노력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를 보이기 위함이다. 결국 사회는 그의 예상 대로 되지 않을 것이며 그가 아무리 노력한들 이비의 운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는 한편, 그토록 올리버가 매달리려고 하는 이 사회가 과연 실제로 가치있는 것인가를 연극 연습과 공연을 통해 보여준다. 거기서 올리버는 분명히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선망해왔던 이모젠의 모습이 사실은 다 연기였음을, 그리고 그 이모젠이 대표하고 있었던 상위 계급 역시도 상연되는 불협화음으로 가득한 연극만큼이나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이는 애벌린이다. 그런데 그 애벌린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질이 낮은 인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육체는 남자지만 내면은 여성인 인물인 것이다. 애벌린은 그러한 자신의 진실을 용기있게 올리버에게 간접적으로 전하지만 올리버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소리로 비웃어 애벌린을 수치심에 젖게 한다. 비록 이 '피라미드'적 사회가 허상이라는 것에는 눈을 떴으나 아직 완전히 헤어나오지는 못한 올리버는 인간이 얼마든지 다양한 면모를 지닐 수 있다는 것과 그걸 배려하거나 포용해야 한다는 것까지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올리버를 거기까지 이르도록 해 주는 인물이 바로 세번째로 나오는 인물인 바운스다. 올리버가 그것을 보지 못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동안 사회가 만든 가치관에 깊숙이 길들여져 있었던 탓이었다. 때문에 그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로워져 온전히 자기만의 시선으로 보기 위해서는 그 과거로 다시금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바운스는 바로 그것을 위해 나오는 인물이며, 그렇게 올리버 과거의 인물이다. 바로 그 과거의 시간 속에서 올리버는 상위 계급으로 가기 위해 포기해 버렸던 원래 되고 싶었던 음악가가 되고 싶어하는 자신과 다시 만난다. 그 시간을 헤아리면서 올리버는 무분별하게 도취되어 있었던 상위 계급을 향한 선망 속에서 잃어버렸던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바운스는 바로 그러한 것들의 상징이다. '스틸본'에서 죽은 지 오래된 오필리어처럼 살고 있었던 바운스는 사회에 길들어지느라 자신이 진정 원했던 것을 모조리 흘려보내야 했던 주인공의 모습과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바운스도 이비나 애벌린처럼 '스틸본'에 의해 사라진다. 올리버는 그 사라짐을 마치 몸을 불로 지진 것처럼 기억에 새긴다.

 

 또한 나는 그 장면이 불로 지진 것처럼 내 몸에 흔적을 남겼다는 것 그리고 내가 사는 곳에 지울 수 없도록 각인되었다는 걸 당시에도 알았다. (...) 아무도 바운스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틸본이 공동으로 등을 돌린 몇몇 사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실제로 내가 대놓고 일부러 묻지 않았더라면 그 많은 세월 그녀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P. 277)

 

 그 사라짐이 그토록 올리버에게 깊이 새겨진 것은 바로 그것이 자신의 사라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스틸본에 의해 추방되었던 바운스는 스틸본에 의해 자기 꿈을 억지로 수정해야 했던 올리버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 바운스의 사라짐은 진정한 자기 자신의 사라짐과도 똑같았다. 그 바운스를 회상하면서 올리버는 자기가 잃어버린 것, 그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지금 다다른 곳이 어디인가를 똑똑히 깨닫는다. 그건 다시 만나게 된 바운스의 작별인사와 곧이어 이어지는 무덤의 장면으로 완성된다.

 

 "잘 가라. 이제 다시 만날 일은 없는 것 같다."(P. 284)

 

이렇게 '피라미드'는 올리버처럼 사회에서 주입된 관념으로 보다 계급의 상위로 올라가려는 무분별한 욕망 속에서 정작 우리가 얼마나 큰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는지를 아프게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올리버는 너무나 뒤늦게 그것을 깨닫게 되는 바람에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피라미드'의 사회는 한 번 깊숙이 편입되면 놓여나는 것을 잘 허락하지 않는다는 암시임과 동시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빠져나오는 것도 역시나 커다란 용기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의 암시이기도 하다. 골딩이 마지막에 올리버에게 가족을 허락하고 유독 그의 두 아이를 강조하는 것과 바운스가 집에 불이 나면 아이 보다는 차라리 앵무새를 구하겠다는 말이 그것을 드러내는 듯 하다. '파리대왕'이 인간이 문명의 통제로 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때의 근심이 낳은 산물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피라미드'는 우리에게 너무 과도하게 이루어지는 문명화에 대한 근심이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골딩의 근심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걸까 하고 묻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올리버의 비극적이라고 해도 좋을 삶을 이처럼 세 가지의 이야기로 보여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일종의 타산지석처럼 너무 뒤늦기 전에 지금 찬찬히 자신의 삶을 잘 들여보라는 뜻으로.

 

 그렇게 '피라미드'는 나 역시 이 피라미드의 보다 위 쪽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지금 너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나 있지는 않는지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정말로 너무 뒤늦은 후회를 하기 전에 소설을 통해 그런 사유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3-12-31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2013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목을 보니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책속에 나온 사람들은 다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아니, 바뀌는 사람도 있지만 한번 정해지면 그 삶만을 되풀이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바뀔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지만 저는 예전과 비슷하게 살아가고 있군요^^

한 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이대로 살아가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쉽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조금은 달라진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다시 생각하니 우리 삶도 한번뿐이군요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