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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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동네에서 나온 '데미안' 표지엔 양팔을 쫙 벌리고 서 있는 사람의 뒷 모습이 약간 흐릿한 실루엣으로 나와있다. 이걸 보고 있으면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 이 사람은 날아오르려 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상반신 밖에 보이지 않으므로 더욱 비상으로도 보이고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누가 이 사진을 표지 그림으로 선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데미안을 읽은 지금 이 표지 그림은 그야말로 적절해 보인다. 정말 이 사진은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통해 말하려는 것을 응축해서 보여주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삶은 저 사진에서 보듯 아슬아슬한 줄타기와도 같다. 그렇게 늘 불안하다. 경쟁에서 낙오될까 불안하고 인생의 패배자로 전락하게 될까 불안하다. 하이데거는 실존으로서의 우리가 느끼는 근본적 감정이 불안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근데 이건 진화생물학자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들은 우리의 이성이 아무리 발달했어도 마음은 여전히 유목민 때의 그것과 같아서 그 때의 유목민이 자연 앞에서 불안을 느꼈듯 똑같이 삶에서 불안을 느낀다고 한다. 이 이론에 기반을 둔, 그리고 지금은 주류 경제학으로 자리잡은  행동경제학은 사람들의 경제적 선택이 언제나 이득을 더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해나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 이루어진다고 단언한다. 즉 그들은 사람의 행동이란 무엇보다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삶이란 언제 떨어질 지 모르는 불안 가운데 간신히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에 내딛는 걸음이 어쩌면 나락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이런 상황을 뚝심있게 견뎌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날아오르는듯도 보이는 표지의 사진처럼 말이다. 우리가 은행의 예금 잔고를 높이려 하고 집을 장만하려 하며 되도록이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좀 더 위의 계층으로 올라가려 하는 것도 불안으로 부터 훌쩍 자유로울 수 있도록 비상하고 싶은 욕구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비상은 오로지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행위이므로 삶에 있어 느껴지는 불안은 그저 제거되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이게 바로 '데미안' 초반의 싱클레어의 모습이었다. 소설의 처음 싱클레어는 두 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불안으로 가득한 집 밖의 세계고 다른 하나는 그 불안으로 부터 달아나 언제든 피신할 수 있는 안정적인 아버지의 집이다. 싱클레어는 처음에 이 두 세계가 비록 맞닿아 있기는 하지만 분명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깥에서 어떤 어려움을 만나게되든 얼마든지 아버지의 집으로 피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러한 싱클레어의 믿음은 그에게 공갈을 일삼는 프란츠 크라머의 존재로 인해 붕괴된다. 그의 존재는 아버지의 집에서 조차 싱클레어를 불안에 떨게하는 것이다. 그래서 싱클레어는 '이것은 아버지의 거룩함에 드러난 최초의 균열이었다'(p.25)고 고백한다. 프란츠 크라머의 존재는 더 이상 두 세계가 구분되지 않음을 싱클레어에게 보여주었다. 그건 도피처의 상실이자 낙원의 붕괴였다. 헤르만 헤세는 프란츠 크라머가 바로 그것을 가져다 주는 존재라는 걸 독자들에게 드러내기 위해 프란츠 크라머가 싱클레어의 집 안으로 들어왔을때 비로소 싱클레어를 협박하게 만든다. 그 어디든 불안과 두려움의 손길을 피하기는 어렵다는 듯이.

 

  초반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데미안'은 우리의 불안을 다룬다. 보다 정확히는 이 불안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불안을 오로지 피하고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초반의 싱클레어와도 같이.  하지만 프란츠 크라머는 더 이상 피할 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려준다. '데미안' 소설 내내 프란츠 크라머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날 때마다 프란츠 크라머를 서로 언급하지 않음을 굳이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데미안은 언제든 프란츠 크라머가 찾아 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렇게도 생각하게 된다. '데미안'은 그 프란츠 크라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소설이라고.

 

  거기에 대한 헤세의 대답은 '다르게 보기'이다. 쉽게 말하면 현실에서의 우리가 그렇게 여겼듯 불안을 오로지 피해야 할 것, 제거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긍정의 대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선뜻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불안을 그림자처럼 달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그랬다면 지금처럼 보험 산업이 부흥할 리도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대해 헤르만 헤세는 이렇게 말한다. 그건 어쩌면 초반의 싱클레어처럼 우리 역시도 세계를 뚜렷하게 구분하여 각자 피할 영역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동물원의 우리 속에 있던 동물이 막상 야생의 초원으로 나아가면 더욱 불안해 하듯이스스로 여기만은 내가 안심하고 피할 수 있다고 여기는 영역이 있기에 불안을 더욱 크게 느끼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모든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프란츠 크라머라는 카드를 헤르만 헤세는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마치 '너희들이 피할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하듯이. 불안은 쉽게 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헤르만 헤세가 무엇보다 보여주는 건 '경계의 허뭄'이다. 그건 프란츠 크라머만이 아니다. 싱클레어를 성장시키는 인도자의 역할을 맡은 데미안 역시 경계를 허무는 존재다. 그는 소년이지만 소년이 아니다.

 

  이 특이한 학생은 실제보다 훨씬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 애는 누구에게도 소년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우리 어린 사내아이들 사이에서 돌아다닐 때 그는 어른처럼, 아니 신사처럼 낯설고도 성숙해 보였다.(p. 34)

 

  라고 싱클레어는 고백한다. 데미안은 그렇게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그런 데미안에 싱클레어에게 들려주는 가장 처음의 이야기는 '카인에게 찍힌 낙인'에 관한 것이다. 거기서 데미안은 성경과는 전혀 다르게 카인의 낙인을 설명한다. 싱클레어는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 앞에서 데미안은 카인의 낙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카인이 사람들이 두려워서 보호를 위한 낙인을 찍은 것이 아니라 카인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거꾸로 낙인을 만든 것이라고.

 

  이렇게 데미안은 불안을 느끼게 되는 주체마저 바꿔버린다. 즉 불안은 싱클레어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싱클레어를 바라보는 세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이를 줄타기에 비유해보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 줄타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정작 줄을 타고 있는 사람의 표정엔 그다지 불안이 드리워지지 않는다. 그는 그저 묵묵히 줄을 타고 갈 뿐이다. 오히려 불안은 그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서 나온다. 언제 떨어질지 몰라 조마조마해 하는 것은 관객들인 것이다. 데미안의 말은 이와 같다. 불안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를 구경꾼의 자리에 놓는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고보면 우리 스스로 불안을 느끼게 되는 대부분의 것들은 나 자신이 불안이라고 여겨서가 아니라 타인이 그걸 불안이라고 하니까 여기게 되는 것들이다. 불안을 느끼는 건 어디까지나 주관적 감정이지만 그 정도에 있어서는 언제나 우리는 은연중에 타인의 잣대를 갖다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 자신의 모습마저 타인이란 구경꾼의 시선으로 보면서 나의 불안이 아닌 그들의 불안을 나의 불안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욱 '나'라는 고유의 주체로 돌아감이 필요한 것이다. 싱클레어는 나중에 가서 그것을 '귀향'이라 부른다.  아니나 다를까 데미안 역시 싱클레어에게 줄곧 '너 자신'이 되라고 말한다. 그런데 불안을 느끼는 구경꾼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스스로를 바깥으로 건너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므로 경계가 존재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온전한 주체가 됨은 더이상 구경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므로 경계 자체의 소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하나로 수렴된다. 경계의 허뭄과 불안의 긍정이 바로 자기 고유의 주체로 가는 과정인 것이다. 

 

 싱클레어는 이제 데미안을 쫓아 그런 존재가 되려한다. 그는 아프락사스의 신도가 되려 한다. 그 아프락사스는 어떤 존재인가? 거기에 대해 싱클레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데미안은 당시 우리가 숭배하는 하나님이란 멋대로 나누어놓은 세계의 절반만을 나타낸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 전체를 숭배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려면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이기도 한 신을 갖든가, 아니면 신에 대한 예배와 악마에 대한 예배도 나란히 드려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아프락사스는 바로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인 신이었다.(p. 112)

 

 말하자면 그는 어떤 구분도, 경계도 가지지 않는 존재다. 그래서 구경꾼이 될 수 없는 존재다. 즉 아프락사스가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자기 고유의 주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것을 긍정한다. 

 

  나는 나 자신이 이 예감의 꿈 속에서 아프락사스라는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희열과 공포, 남자와 여자가 뒤섞인, 가장 거룩한 것과 추한 것이 서로 뒤엉킨, 깊은 죄가 가장 사랑스러운 무죄를 번개처럼 관통하는 - 내 사랑의 꿈의 모습은 그랬고 아프락사스 또한 그랬다.(p. 114)

 

  아프락사스에게 삶에 고통을 가져오는 모든 것들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그건 그저 받아들여야 할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억지로 제거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충실히 삶을 살고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연단인 것이다. 여기에 대해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이 그토록 오래 두고두고 없다고 거짓말하고 마비시켜온 이 영혼의 진짜 곤궁이 드러나는 날이면 온갖 길과 우회로도 아무 소용이 없지. 그럼 우리의 날이 오는 거지. 사람들에겐 우리가 필요할 거야. 안내자나 입법자로서가 아니라 함께 가다가 운명이 부르는 곳에서 멈춰 설 각오가 된 사람으로서 말이지. 봐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이상이 위협을 받으면 믿을 수 없는 일도 해낼 각오가 되어 있어. 하지만 새로운 이상이, 새롭고도 어쩌면 위험한, 엄청난 성장의 움직임이 문을 두드리면 거기엔 아무도 없지. 우리는 그럴 때 거기 있다가 함께 가는 극소수의 사람이 될 거야(p. 176)

 

  궁극적으로 그들은 싱클레어의 표현 그대로 하나의 섬이 되려 한다.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어떤 경계를 통해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는 방법이 다름으로써만 나뉘어 있었다. 우리의 과제는 세상에 하나의 섬을 보여주는 것. 어쩌면 하나의 모범으로, 적어도 다른 가능성을 알리는 존재로 사는 것이었다.(p. 174)

 

 명확한 질서가 구현된 아버지의 세계와는 달리 그 어떤 경계도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이 허용되는 에바 부인의 세계처럼 그자체로 얼마든지 다르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존재가 되려 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출구 없는 삶의 대안이 될 수 있고 희망의 빛이 될 수 있도록. 헤세가 이렇게 보다 넓은 차원을 보여주는 것은 자기 고유의 주체화가 된다는 것에 따를 수 있는 '이기적'이라는 오해를 풀기 위함이다. 자기 고유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 결코 자신만 아는 이기적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더욱 이타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렇게 헤르만 헤세는 온전히 고유한 자기 주체로 되는 것이 바로 궁극적으로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는 길이라 여긴다. 그가 이렇게 '불안'을 작품의 주된 소재로 가져온 데는 사회적 이유도 있다. 사실 '데미안'은 소설에도 나오듯이 제1차 세계 대전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 때 일어났던 거대한 전쟁은 당시까지 한결같이 이어져 오던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를 여지없이 허물어 버렸다.  사람들은 초반의 싱클레어가 아버지의 집을 믿었듯이 계몽의 빛이 가져다 준 합리적 이성이 언제까지나 인류 공영을 가져오리라 믿었지만 결국 배신당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전쟁 자체가 프란츠 크라머였던 것이다. 그를 앞에 두고 두려워했던 싱클레어처럼 사람들 역시도 불안해했다. 이제 믿을 것은 과연 무엇인가 스스로 되물었다. 헤세는 거기에 대답을 주려했다. 비록 우리가 한 번의 실패를 했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삶이 끝장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긍정하느냐에 따라 그것은 우리의 커다란 교훈이 되어 더욱 성장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될 수 있음을 말해주려 한 것이다. 그래서 '데미안'은 그렇게 쓰여졌던 것이다.

 

 결국 '데미안'은 헤세 자신이 보내는 희망의 빛이었던 셈이다. 막다른 곳에 다다라 절망의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겐 더욱 눈부실 그런 희망의 빛이었다. 듣기에 '데미안'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의 배낭에 가장 많이 들어 있었던 책이라고 한다. 정말로 아슬아슬한 줄타기와도 같이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는 불안의 삶을 보내고 있던 그들이 무엇보다 가까이 했던 것이 '데미안'이라는 사실은 '데미안'이 바로 이러한 희망의 빛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러한 데미안은 결국 희망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기 내부에 있다고 말한다. 그 내면의 거울에.

 

 그 후로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아팠다. 하지만 내가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 나 자신 안으로 완전히 내려가면 그곳 어두운 거울에서 운명의 모습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럼 나는 검은 거울 위로 그냥 몸을 숙여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다.(p . 199)

 

  '데미안'을 통해 당신 역시도 내면에 깃든 그 거울을 보게되면 좋겠다.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온전한 당신의 모습이 담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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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 2013-02-21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이거 반양장본 리뷰에 남겨야 하는데 그만 양장본 리뷰에 남겨버리는 실수를 해버렸네요.ㅠ ㅠ
수정을 하려니 새로 글을 써야 해서 그냥 둡니다. ㅠ ㅠ

이진 2013-02-21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일단 반갑다는 인사 먼저!
<데미안>은 읽을 예정이니 리뷰는 안 읽을 거예요! 나중에 찾아와서 읽고 감상을 남길테니 긴장하셔요. 농담. 헤헤. 그러고보니 <여울물소리>를 읽고 리뷰를 쓰겠노라 이야기한 거 같은데 요샌 시 읽으나 바쁘네요. 말은 이렇게 해도 지금 한 시집을 이틀 째 붙들고 있습니다. 자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네요. 얼른 학교에 나가야 조금이나마 책장을 넘길 텐데요.

헤르메스 2013-02-22 23:13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저 역시 정말 반갑네요. 요즘 뜸한걸 보면 정말 많이 바쁜가 봐요. 오! 데미안을 읽을 작정이로군요^ ^ 저 때도 사춘기의 몽정과도 같이 십대의 통과의례처럼 읽히던 작품이었는데 소이진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궁금하네요. 다시 읽어보는 헤세는 정말 문장이 좋더군요. 번역이 좋아서 그랬는지 '그렇지 헤세가 시인이었지'하는 생각을 문장들을 읽으며 얼마나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 읽고 있는 소이진님께 더 좋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 그러고보니 봄방학 아니에요? 그런데 와 정말 바쁘게 사네요. 학교 나가는 게 오히려 여유가 생긴다니... 도대체 어느정도로 열심히 문학에 정진중인 겁니까? 아무튼 여울물 소리 올라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이진 2013-02-22 23:18   좋아요 0 | URL
쑥스럽군요. 헤르메스님 성실하시고 바쁘신 나날들에 어디 견줄 수야 있겠습니까. 저는 오로지 잠에 정진하고 있는 걸요. 여울물 소리 대신 한강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러고보니 우리 한강 읽기로 안 했나요~? ㅎㅎ

희선 2013-02-2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아가는 일은 불안 덩어리를 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도 해요
일어나지도 않은 걱정부터 시작해서, 실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
그런 것이 프란츠 크라머군요
그런데 프란츠 크라머 같은 사람은 정말 있기도 해요(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지만, 오래전에 한번 읽기는 했는데 생각은 안 납니다)

희망의 빛을 주기 위한 소설이군요 그런 것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게 부럽군요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경계를 허무는 것과는 같은 거군요
저도 구경꾼이 아닐 수 있다면...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