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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너 매드 픽션 클럽
헤르만 코흐 지음, 강명순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제목과 표지에 나오는 가재 다리 때문에 얼른 보기엔 요리가 주가 되는 소설 같지만 사실 이 소설은 정찬의 음미 보다는 내면의 여정에 가까운 작품이다. 물론 소설 자체가 주인공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그렇게 독자는 그 화자의 눈으로 사물과 사람을 보고 그의 기억을 통해 사건을 회상하며 그의 판단을 매개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해석한다.

 

 이를테면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그 존 말코비치 안으로 들어간 존 쿠색과도 같다. 아니, 작가 헤르만 코흐는 정확히 당신이 바로 그 존 쿠색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지금 소설에서 독자가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가진 내면의 풍경을 마음껏 음미하길 원한다. 이것이 바로 '디너'란 제목이 붙은 진짜 이유이다. 즉 소설의 주된 배경이 되는 등장인물들이 모여 식사하는 '디너'가 아니라 소설이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주인공의 내면을 마치 풀 코스의 정찬처럼 맛볼 수 있기에 '디너'인 것이다.

 

 식사란 독서와 같다.

 포크와 나이프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요리란 이를테면 책과 같은 텍스트이다. 식당에서 주인공과 같이 식사를 하는 주인공의 형이자 네델란드의 유력한 차기 수상 후보 세르게는 그 자리에서 자주 요리나 와인에 대한 얘기를 즐겨 하는데 바로 이 장면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요리라는 것도 하나의 텍스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의 전반부는 많은 텍스트들로 채워진다. 바로 뒤이어 세르게는 우디 알렌의 영화를 얘기하고 주인공은 이미 본 그 영화에 대해 형이 가진 속물적 취향과 자신의 고상한 취향이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반박할 거리를 찾는다. 즉 형이 가진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 그것을 음미하고 그에 따라 반격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행위는 그가 프랑스의 별장에서 세르게 부부와 같이 보내면서 그들 부부가 가진 프랑스의 무분별한 추종을 그가 직접 본 것들을 텍스트화 시켜 그것들을 토대 삼아 해석할 때 절정에 이른다. 그렇게 코흐는 본격적인 이야기가 주어지기 전에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이 텍스트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요리도 텍스트가 되고 한 개인의 내면 또한 텍스트가 된다.

 

 

  이 소설에선 이것이 중요하다.

  그러니까 헤르만 코흐는 '디너'라는 소설이 가진 이야기를 음미시키기 위해 우리를 초대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가 정말 주의깊게 조리하고 제대로 맛보게 하려는 것은 주인공 '파울'의 내면 자체이다. 그래서 그는 마치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과도 같이 주인공의 내면을 어느 것 하나 빼거나 덜어내지 않고 충실히 복원하는 것이다. 그가 어떤 반응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세세하게 보여준다. 말 그대로 제대로 음미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음미란 따지고 보면 '객관화'의 과정이다. '맛'이 감각이라면 그 맛을 분석하고 나름 정리하는 것이 바로 음미의 과정이다.

 

 즉 코흐가 이 소설에서 우리들에게 진짜로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주인공 파울의 내면을 객관화하고 '맛이 어떻다.'라고 말하듯 스스로 평가내리기를 원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정답을 주지 않는다. 현명한 요리사가 먹는 이가 어떤 맛을 느꼈든 상관하지 않듯이 그 역시 우리들이 거기서 어떤 정답을 구했든 괘념치 않는다. 중요한 것은 체험하는 것이다. 사유를 촉발시킬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쟁반 위에 놓여진 요리가 그러하듯이. 코흐는 그렇게 스스로 설정한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건 몰라도 주인공 파울의 내면만은 정말 마치 정말 먹는 듯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자, 그럼 하나의 질문이 남았다.

 왜, 코흐는 굳이 이러한 방식을 택하는 것인가?

 아니, 왜 이런 소설을 쓴 것인가? 라고 물어야 하나...

 

 아무튼, 이 '디너'란 소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 질문을 해야한다.

 왜냐하면 코흐의 이 소설은 그저 픽션이 아니라 소설이 쓰여진 당시의 네델란드의 사회적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의 도표를 가져와 본다.

 

 

  이 그래프는 2003년 현재 네델란드 청소년들의 폭력 범죄 증가율을 나타낸 것이다. 소설 '디너'에서 주인공 형제가 만나게 된 진짜 이유도 이와 같은 자기 자녀들의 폭력 범죄 때문이었다. 주인공들의 자녀들은 파티에서 술을 마시고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으러 갔다가 실내에 가로누운 노숙자에게 한 마디 욕을 듣게되자 구타를 하고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런데 이들이 구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장면이 그 곳에 있던 CCTV에 찍혀 전국적으로 방송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촬영 각도상 부모들을 제외하고는 누구인지 알기란 불가능 했는데 바로 그 때문에 사후대책을 의논하고자 소원하던 형제가 다시 만나 '디너'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프에서 보듯이 청소년들의 이러한 이유없는 범죄는 그저 픽션만은 아니었다. 90년대 초 부터 꾸준히 증가한 청소년 폭력 범죄에 있어 흔히 벌어지고 있던 범죄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이 소설의 범죄는 현실 사회의 반영인데 '디너'란 소설은 2009년에 발간되었다. 왜 굳이 코흐는 이 시점에 이 이야기를 해야만 했던 것일까? 여기에 주목할만한 네델란드 발 보도가 하나 눈에 띈다. 2009년 한 범죄연구율 학자가 여기에 대해 의미심장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지금까지 네델란드에서 일어난 청소년 범죄를 분석해보니 그 중 3분의 2가 바로 이민자 가정 출신의 청소년들이 저지른 범죄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유럽 전역을 휩쓸고 있던 외국인 혐오증에 기름을 부운 격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연구결과는 그동안 사람들이 생각만 해왔던 것을 사실로 확인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네델란드 국민들은 이민자 자녀들을 의혹의 눈으로 보아왔고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결국 코흐로 하여금 이 '디너'란 소설을 쓰게 만든 것이다.

 

  아마도 읽어보면 바로 알아차리겠지만 이 소설은 기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비유하자면 뫼비우스의 띠와도 같다. 분명 위쪽을 걸어갔는데도 결국 다다르는 곳은 아래쪽인 것이다. 그렇게 표면과 이면이 전복적으로 뒤바뀌는 소설이다. 물론 이 소설이 충실히 담아내는 것은 주인공의 내면이므로 여기서 전복적이란 우리가 바라보는 주인공에 대한 시각이 그렇게 바뀐다는 의미가 되겠다. 다시 말해 초반에 그리도 합리적이고 주체적으로 보이던 주인공이 나중에 가면 그야말로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비합리주의자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코흐의 능수능란함이 작열하는 땡볕처럼 눈부시게 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우리로 하여금 표면 아래에 놓여있는 이면의 진실을 목도하게 한다.

 

 그런데 그 진실이란 그저 주인공 개인만의 진실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보편적이다. 그러니까 그 주인공의 내면을 근본부터 구축하고 있는 서양 정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냉혹한 진실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예사롭지 않게 들리는 것은 바로 '디너' 맨 앞 부분에 인용한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에 나오는 대사들이다. 코흐는 하필이면 자기는 팁 같은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팁을 주지 않겠다는 대사를 인용한다. 왜 하필이면 이 대사일까? '팁'이라는 것은 서양에 있어서 하나의 규범으로 자리잡은 것이 아닌가? 일종의 교양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그런 규범말이다. 사실 아무도 여기에 대해서 반박을 하려는 이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만큼 '팁'이라는 것은 서양 문명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바로 이 때문에, 그러니까 '팁'이라는 것이 교양을 갖춘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으례히 행해야 할 보편적 규범이기 때문에 코흐는 일부러 인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 '아마도' 이지만 분명 코흐는 이 말을 인용할 때 어떤 학자의 이론을 떠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때문에 일부러 '디너', 즉 '정찬'이라는 '팁'처럼 '예법'이란 이름으로 규격화된 규범의 지배를 받는 형식을 구태여 가져왔을 것이다. 코흐는 초반에 지배인과 웨이터들의 규격화된 서비스 모습들을 세밀히 묘사하는데 이 또한 '디너'를 이루고 있는 형식화된 예절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디너'는 그야말로 대표적인 문명의 소산임을 알리는 것이다.

 

 코흐는 그렇게 문명, 또 문명을 가져온다. 그럴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학자는 노베르트 엘리아스이다. 엘리아스는 서양 문명이 인위적인 발명품임을 증명하여 유명해진 역사학자다. 그의 대표작은 바로 '문명화과정'이다. 제목 그대로 지금 우리들에게 자리잡은 지배적 서양 문명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밝히는 책인데 그는 문명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유에 대해 단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차별'을 위해서라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양 레스토랑에서 지켜야 할 그 많은 식사 규범들, 그렇게 '디너'를 형성하고 있는 형식화된 예절들은 모두 왕이 귀족을, 귀족이 평민을 차별화하고자 만들어낸 전략적 결실에 다름아닌 것이다. 우리들은 서양의 식사 예법이 너무도 복잡한 것에 혀를 내두른다. 그리고 어이없어 한다. 그저 입에 넣으면 되는 것을 뭐 그리 복잡하게 절차를 따지냐고! 그런데 그래야 했었다. 규칙이 복잡해져야 했었다. 그래야 먹고 사는데 바쁘고 지친 평민들이 쉽게 따라하지 못할 테니까. 이렇게 흔히 '에티켓'이라 말하는 그 복잡한 예절 규칙들은 모두 구별짓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감히 귀족이 왕고 맞먹으려고!', '감히 평민주제에 귀족과 맞먹으려고!' 이런 생각 끝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엘리아스는 분명히 보여주었다. 문명이란 타자를 배제하는데서 탄생했다고.  그 배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문명은 일부러 필요하지도 않은 그 많은 규칙들을 만들고 그것에 인위적 진리를 부여하여 단지 지키고 못 지키느냐만 가지고 단죄하더라도 아무런 양심상 가책을 받지 않게 하였다고. 그래서 문명이 발달할 수록 인간의 감각 중 시각이 특권화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타인이 그것을 지키는가 못 지키는가를 감시해야 하기 때문에. 또한 보이는 외양만이 전부이고 그 안데 깃든 보이지 않는 내면은 가치없어 진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인종주의는 날로 극심해지고 가진 자의 가난한 자에 대한 차별은 더욱 깊어졌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므로 또한 보이는 것의 진실은 오로지 보는 자만이 판단하는 것이므로 배제된 자, 차별받는 자들의 저항과 호소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코흐는 놀랍게도 주인공 내면에 이 서양 문명이 가진 특성들을 그대로 버무려 넣는다. 마치 서양 문명이 그대로 인격화한 것 처럼 여겨질 정도이다. 앞에서 말한 세르게를 더없이 경멸하게 되었던 프랑스 체류 경험도 사실 알고 보면 오로지 그의 시각에 기초한 판단뿐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그 시각이야말로 사실을 전혀 보증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개인 편견의 산물임을 깨닫게 된다. 이건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코흐는 이런 식으로 서양 문명이 가진 근본적 문제를 주인공의 내면을 통하여 드러낸다. 그래서 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코흐가 초대한 이 '디너'에 참여하여 음미하게 되는 것은 지금의 '서양 문명' 자체라고 할 수있다.

 

 물론 그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뿌리 깊이 주관화 시켜버린 '서양 문명'을 다시금 객관적으로 바라볼 것을 요청하는 것은 2009년 범죄율 조사 보도에서 단적으로 나타나는 외국인 혐오증을 온전히 합리적으로 다시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다. 덮어놓고 범죄의 3분의 2가 이민자 가정 출신 청소년이 저질렀다고 말하는 그 이면에 바로 오로지 차별과 배제 위에 형성되었던 그 서양 문명이 가진 '나 밖에 없다' '나만 괜찮으면 만사 OK!'라는 오만과 이기심은 없는지 스스로 돌이켜 헤아려보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소설에서 바로 입증되는 사실이기도 하다. 거기서 이민자를 대표하는 존재는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배제되어 버린다.

 

  소설 자체로도 '디너'는 정말 재미있고 사실 주인공의 개인적 의견도 흥미로운 것이 많다. 이야기를 자유자대로 능수능란하게 이끌어가는 코흐의 눈부신 필력 덕분에 조금의 지루함도 없이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디너'는 보여지는 것들 너머 더 많고 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책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현상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 그 사유의 촉발을 위해 나타난 작품이다. 보다 정확히는 근자에 범람하고 있는 외국인 혐오증이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그것을 서양 문명이라는 가장 근본으로 부터 따져보려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걸 전혀 어렵지 않게 자연스럽게 음미하도록 만든다는 것이 더욱 놀랍게 한다.

 

 아베 야로의 만화 '심야 식당'에서 느낀 것이지만 정말 좋은 요리사란 단순한 재료를 가지고도 마음을 울릴만한 깊은 맛을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이다. '디너'를 읽고난 지금 헤르만 코흐야 말로 그런 요리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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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21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어요.
마치 이 리뷰는 전문 평론가 내지는 전문 작가가 쓴 글과 비슷한 수준이 아닙니까!
역시, 아무리 늦어도 마감 일은 칼같이 지키시는 군요.
성실함에 심심한 박수 쳐드립니다~ 짝짝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