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과 망각의 책 밀란 쿤데라 전집 5
밀란 쿤데라 지음, 백선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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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전체는 변주 형식의 소설이다. 서로 다른 부분들이 나로서는 이해하려면 막막함에 빠져들게 되는 한 테마의 내부로, 한 생각의 내부로, 하나뿐인 독특한 상황의 내부로 인도하는 여행의 서로 다른 단계처럼 이어진다. 이것은 타미나의 소설이다. 타미나가 무대를 떠나는 순간에는 타미나를 위한 소설이 된다. 타미나는 주인공이자 주된 청중이다. 다른 이야기들은 그녀 이야기에 대한 변주들이며 거울 속 처럼 그녀 삶 속에서 서로 만난다. 이것은 웃음과 망각에 관한, 망각과 프라하에 관한, 프라하와 천사들에 관한 책이다.(P.310)  

 

 이렇게 밀란 쿤데라는 작품에서 직접 이 소설 '웃음과 망각의 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형식에 있어서는 변주로 하되 주된 주제는 타미나와 관련있다고 말한다. 쿤데라는 변주를 그 형식으로 가져온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변주라는 형식은 집중이 그대로 발휘된 형식이다. 이 형식은 작곡가에게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만 말하게 하고 사물의 핵심에 곧장 다가가게 한다.(P. 308)

 

 

 쿤데라가 변주를 소설의 주 형식으로 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본질적인 것을 말하게 하고 핵심으로 곧장 다가서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소설에서 그것이 필요한 것일까? 그것에 대해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 한 소설가의 입을 빌려 이렇게 대답한다.

 

 소설이란 인간의 착각의 결실입니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압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 뿐입니다. 각자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쓰는 거죠. 나머지는 권력의 남용일 뿐이죠. 나머지는 전부 거짓이에요.(P. 172)

 

 즉 쿤데라는 이 소설을 가지고 바로 자신에 대한 보고서를 쓰고 있는 것이며, 그 보고서는 지금 자신이 사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보고서이기 때문에 그 본질만 말하고 핵심에 곧장 다다르게 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럼, 쿤데라는 무엇을 사유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변주에 대해서 쓴 또 다른 부분에서 드러난다.

 

 변주 또한 여행이다. 그런데 이 여행은 외부세계의 무한을 가로지르지는 않는다. 인간은 거대한 무한의 심연과 작은 무한의 심연 사이에서 산다고 말한 파스칼의 생각을 당신들은 알 것이다. 변주의 여행은 이 다른 무한 속으로, 다시 말해 모든 것 속에 감춰진 내면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 속으로 나아간다.(P.307)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쿤데라는 변주라는 것을 또 다른 무한성으로의 여행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왜 다른 무한성으로 여행해야 할까? 거기에 대해서는 하이데거가 '동일성과 차이'에서 말한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는 고대 그리스 이래로 서양의 형이상학은 하나의 근원, 즉 아르케를 추구해왔는데 무엇보다도 그것은 오로지 하나이며 그렇게 절대인 그것은 결코 자기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한다. 바로 그 '절대적 일자(一者)'의 사상이 로마 시대 기독교와 결합하여 차이는 무조건 배척부터 하고보는  '독단의 일자'가 되었고 그로인해 서양은 결국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같은 비극을 껴안게 되고 말았다고 한다. 쿤데라가 바라보는 것도 이와 같다. 무엇보다 그는 독재의 극한이라 할 수 있는 스탈린이 보낸 탱크들에 의해 뭔가 다른 것이 되고자 했던 '프라하의 봄'이 무참히 짓밟히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독재의 폭압에 의해서 많은 이들이 다른 것을 말한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야 했고, 더 많은 이들이 다른 것을 생각한다는 이유로 삶의 터전과 고향에서 쫓겨나야 했다. 운이 좋아 그것을 들키지 않은 자들도 비극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증가된 비밀경찰들과 그 끄나풀 그리고 더욱 더 치밀해지는 그들의  감시 업무 아래서 그들은 그야말로 고공 100미터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듯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으니까 말이다. 자신 역시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 마음은 손에 잡힌 듯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때의 기분을 소설에서 이렇게 술회한다.

 

 그 때 나는 원이 지닌 마법적 의미를 깨달았다. 열에서 이탈했을 때는 아직 돌아갈 수 있다. 열은 열린 조직이다. 하지만 원은 닫혀서, 떠나면 돌아갈 수가 없다. 행성들이 원을 그리며 움직이고, 떨어져 나온 돌이 원심력에 실려 가차없이 멀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행성에서 떨어져 나온 운석처럼 나는 원에서 떨어져 나왔고 오늘날까지도 계속 추락하고 있다.(P. 130)

 

 때문에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은 모조리 배척하는 그 '독단적 일자'가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 그는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 하나됨, 소설에서 '목가', '원무' 등으로 암시되는 그 하나됨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하나의 대안으로써 다른 무한성으로 떠날 수 있게 만드는 그 '변주'를 가져오는 것이다.

 

  단적으로 그 변주란 소설에 나오는 말로 하자면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다. 이를테면 타미나 이야기에서 나오듯 한 발로 이 칸 저 칸을 넘나드는 일이다. 쿤데라는 바로 그렇게 경계를 넘나드는 것, 그 어디에도 정주하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독단적인 일자'가 가져올 비극을 줄이는 길이라 믿는다. 소설에서는 3부 '천사들' 이후로 경계를 넘나드는 것을 꾸준히 형상화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소설에서 그토록 '정사(情事)'가 자주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쿤데라에게서 '성적 행위'가 나오는 이유는 마지막 7부 경계선의 얀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데 바로 그가 가장 매료되었다는 고대 소설인 '다프니스와 클로에'가 그것이다. 무엇보다 얀이 매료된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남아 있다. 그 이상 무얼 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포옹 자체가 사랑의 쾌락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흥분했고 심장이 세차게 뛰었지만 정사를 나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P. 370)

 

  이 문장만으로는 그 이유를 얼른 납득하기가 힘들다. 아마도 쿤데라 역시도 그것을 우려했었는지 소설의 마지막에 얀이 매료당했던 진짜 이유를 다음과 같이 풀어놓았다. 

 

 에드위즈와 그는 결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언제나 뜻을 같이했다. 각자가 상대 말을 자기 식으로 해석해서 그들 사이에는 놀라운 조화가 유지되었다. 몰이해 위에 세워진 경이로운 연대였다. 그들은 그것을 잘 알았고, 그에 거의 흡족해했다. (P. 421)

 

 즉, 바로 이것이 쿤데라가 대지를 지배하는 하나의 목가, 모두가 같은 춤을 추도록 만드는 원무가 가져오는 비극을 없애기 위해서 지향하는 바였다. 굳이 하나의 공간에 머무르려 하지 않으며 비록 상대방이 경계 저 편에 있더라도 아무 이유없이 받아들여 주는 것. 그냥 그렇게 타자 그 자체로서 연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쿤데라가 이 '웃음과 망각의 책'이 지닌 모든 여정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상대방을 순수히 받아들이는 가장 대표적인 행위라 할 만한 '정사'를 쿤데라는 소설 내내 그토록 자주 가져 온

것이다.

 

  이렇게 '웃음과 망각의 책'은 그 자신 역시 희생자였던 무참하게 짓밟힌 프라하의 봄을 통해 체험했던 비극을 어떻게 하면 끊어낼 수 있을까에 대해 천착한 일종의 사유의 여정이었던 셈이다. 한 마디로 쿤데라 자신의 사유의 보고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아예 실명으로까지 등장하여 개인 사유의 보고서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가 이렇게 보고서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독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기 보다는 먼저 독자를 자신의 사유 속으로 참여시키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이 소설이 다른 소설들과는 다르게 다소 특이한 형태를 띠는 것은 아닌가 싶다. 앞서도 쿤데라가 변주의 형식을 취한다고 고백했음을 말했지만 정말 이 소설은 정형화된 소설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작가가 마치 예화를 말하듯 상상된 이야기임을 분명히 드러내는가 하면 곳곳에서 에세이 같은 분석이나 사유의 글들이 출몰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보다 본질적으로는 쿤데라가 그것에 관해 이루어갔던 모든 사유의 결들을 마치 곤충도감을 만들듯 독자가 얼마든지 관찰가능하도록 펼쳐놓은 것과 같다. 그래서 독자 역시도 얼마든지 자신만의 사유로 된 책을 쓸 수 있도록 말이다.

 

 인간은 책을 쓸 때 세계로 바뀐다. 그리고 한 세계의 속성은 그것이 유일하다는 데 있다.(P. 205)

 

 이러한 면모는 제목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웃음'은 경계를 넘어선 개인의 고유성을, '망각'은 그 고유성을 소멸하여 하나의 전체성으로 포섭하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게 제목은 이 책이 그 둘이 서로 변증법적 관계를 이루며 지속해 나가는 사유의 과정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표지에 나온 그림에서도 증명된다. 표지에 나온 저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것으로 제목이 바로 '헤겔의 휴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이 리뷰도 어쩌면 쿤데라가 펼쳐보인 그 여정에 참여한 끝에 나온 나만의 표지 그림과 같은 '변증법적 완성형'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마치 잠언과도 같은 놀랍고 재기발랄한 말들의 향연에서 당신이 결국 집필할 책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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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5-20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보는 헤르메스님 리뷰!
이번 책과 리뷰는 저에겐 한없이 어려워만 보이는군요.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 이름부터 소용돌이에 빠진 듯 쑥쑥.
요새 알라딘이 침체기에 접어든 거 같아요. 분위기도 싸하고 밝지 않고, 많이 보이던 분들이 코빼기도 비치질 않으니 알라딘에 와도 심심하기만 하네요. 그 와중에 헤르메스님께서 글 한편 남겨주셔서 좋군요. 하아. 내일은 또 열심히 학교가고, 일해야 겠죠? 헤르메스님도, 나도 파이팅!

ICE-9 2012-05-23 01:12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쿤데라는 저 역시도 어려워요. 아마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가장 어려운 작가중의 하나가 아닐까도 싶네요. 그래서 리뷰도 어쩔 수 없이 어렵게 되고 마네요. 제가 제대로 소화시키고 있지 못한 결과로^ ^;
소이진님을 위해서라도 꼬박꼬박 글을 남겨야 하는데 요즘은 통 그런 시간이 안 나더라구요. 그래도 제게 파이팅 해주셔서 고마워요. 요즘 정말 무덥던데 이럴수록 건강 잘 챙기고 학교 생활 제대로 잘 해내시길 빌어요. 아무튼 글을 자주 자주 되는 대로 올리겠습니다.(근데 요즘 정말 글 안 써지네요... 슬럼프인가? ㅠ ㅠ)

프레이야 2012-05-2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저는 이 책을 구판으로 읽었는데요 정말 좋아요.
밑줄긋기도 많이. 저 표지 그림의 정체를 알게 됐네요. 헤겔의 휴식! 이군요.^^
변증법적 완성형,이란 말이 쏙 들어옵니다.

ICE-9 2012-05-23 01:16   좋아요 0 | URL
와! 프레이야님 반갑습니다.
프레이야님이 영화에 대한 글을 많이 읽었는데
그래서 뵙는 건 처음인데도 오래 알던 분 같아요^ ^
쿤데라가 새삼 정말 글을 깊이있게 잘 쓴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느꼈습니다.
저도 밑줄 긋고 따로 적어 둔 말이 참 많아요. 이런 혜안이 질투날 정도로 부럽더군요^ ^ 이번에 나온 쿤데라 전집엔 모두 마그리트의 그림이 사용되었던데 누가 이 책의 표지로 헤겔의 휴식을 선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이 표지만큼은 제대로가 아닌가 싶어요. 아무튼 프레이야님 방문도 댓글도 모두 감사드립니다.^ ^

마녀고양이 2012-05-21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제가 기억이란 변주와 같다는 요지의 페이퍼를 쓴적이 있었어요...

헤르메스님의 페이퍼는, 제가 인간 관계에서 느끼는, 또는 기억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제 정체감에 대해서 느끼는 부분을 명확하게 말씀해주시네요. 변주, 다들 사실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다들 fact에 대한 변주를 보여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측면으로 아까 '정사'에 관해 인용하신 부분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게 한계이지만, 한계를 알아야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수용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생각도 같이 합니다.

즐거운 한주되셔요.

ICE-9 2012-05-23 01:30   좋아요 0 | URL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을 읽어서 더욱 마녀고양이님의 생각에 동의를 하게 됩니다. 지금은 쿤데라의 '불멸'을 읽고 있는데 저 '정사'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더군요. 이를테면 쿤데라의 '불멸'은 사실 어떻게 하면 '불멸'하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사유의 여정입니다. 불멸은 기억을 통해 이어지는데 쿤데라는 그 기억이 오히려 존재에 대한 피상적 인식만으로 채워지므로(설사 그것이 괴테나 헤밍웨이의 작품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존재의 순수성을 파괴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을 이어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아직 끝을 못 보았기에 결론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만 작품에서 이렇게 기억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것도 그 기억이 우리에게 남겨져 타자를 만날 때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은 아닌가 싶더군요. 그래서 영원이야말로 오히려 우리 존재들에겐 형벌이 아닌가 이렇게 묻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져요. 이렇게 보면 불멸 보다는 찰라적인 것을, 항구적인 것 보다는 변주적인 것을 그렇게 쿤데라는 꾸준히 자신의 주제를 심화시켜나가고 있는 것으로도 보여지는군요. 제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라 어쩔 수 없이 수다스러워지는 것을 용서해 주세요. 아무튼 말씀하신대로 한계 자체의 긍정이 무엇보다 출발점인 것 같습니다.('불멸'은 그것을 시작점으로 하고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살펴보는 작품 같기도 합니다.) 마고님 댓글에 저도 이렇게 자꾸 생각을 발전시키게 되네요. 늘 좋은 말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