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로의 밤 매그레 시리즈 6
조르주 심농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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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권이나 되는 매그레 시리즈를 차례로 보았더니 저절로 문리라도 트인 것일까? 

  문득 뭔가 규칙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뭐, 말하고 보면 사실 별거 아닌데 그러니까 다음의 작품은 바로 이전 작품의 일종의 변주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치 얼 스탠리 가드너의 페리 메이슨 시리즈와도 비슷하다. 물론 페리 메이슨 시리즈 역시도 변주란 뜻은 아니고 그 시리즈는 언제나 한 작품의 결말에 다음 작품의 시작을 삽입하는데 그렇게 두 작품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심농의 매그레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연속적인 두 작품은 그냥 연속으로 그치지 않고 변주를 하면서 서로를 보완한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이를테면 매그레의 연속된 두 작품은 에셔의 이 그림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에서 이루어졌던 범죄는 다시 바로 그 뒤의 작품 '갈레씨 홀로 죽다'에서 주요한 테마로 등장하고(스포일러상 이렇게만 언급한다.) 세번째 '생폴리앵에 지다'에서 피해자로 다루어졌던 삶은 그 다음 작품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에서는 가해자의 삶으로 다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다섯번째 작품 '누런 개'에서 변하지 않는 사랑의 형태는 다음 작품 '교차로의 밤'에서는 더이상 믿지 못할 무언가로 그려진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이렇게 심농의 매그레는 연속된 두 작품의 변주를 보여주는데 어쩐지 그 모습이 마치 사건의 양 면을 모두 아울러 고찰해 보려는 태도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혹시 심농이 나름 훗설이라도 읽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심농이 보여주는 그 모습이 훗설이 말했던 현상학적 환원 태도와도 닮아보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정해진 신체가 있는 이상 인간은 언제나 대상의 한 쪽 면 밖에는 볼 수가 없다. 그것은 궁극적 한계다. 그 사물의 뒤쪽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신체에 갇혀있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지구에서 영원히 달의 뒤쪽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한계지어진 객관 세계를 마치 진정한 객관 세계로 알고 살아간다. 사실은 신체적 제약으로 단편 밖에는 알 수 없는 세계를 전부 아는 것 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훗설은 그러한 착각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그 착각을 버리기 위해서 요구되어지는 것이 지금까지 인식한 모든 것의 백지화(에포크). 즉 현상학적 환원이다. 이는 바로 내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여기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뒤로 가서도 보아야 한다는,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앎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가변적인 앎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게 인간이 알 수 있는 진리란 늘 궁극적인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겸손이 바로 현상학적 환원의 태도이다. 심농의 매그레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다음의 변주에서 이전에 해왔던 것은 전혀 고려에 넣지 않으면서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아무튼 당신이 '누런 개'를 읽고 바로 이 작품 '교차로의 밤'을 읽는다면 이러한 심농의 면모가 더욱 더 잘 드러나 있음을 눈치챌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교차로'라는 제목 자체에서 드러나지만 내내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물이 보이는 그대로만은 아님'에서도 잘 드러난다. 무엇보다 소설에 나타난 버나드 쇼의 '피그마리온'과 완전히 반전된 형태는 이러한 심농의 현상학적 환원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또 하나 언급할 것은 이 소설에 유독 전면으로 나오고 있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심농이다. 

  이 소설은 사건이 복잡하고 용의자도 많은데다 사건 전개가 쉴 사이 없고 유달리 액션도 많이 나오기 때문에(사실 '누런개'도 비슷하니 시즌2의 전형적 특성이라 보아도 무방하겠다.) 저번과 같은 차분한 전개 속에 드리워졌던 감상적 필치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묘사에 정확히 사건의 핵심만 짚어 풀어내는 저널리스트적 묘사가 한껏 드러나있다. 아마도 매그레 시리즈 중에서 지금까지 이만큼 심농의 저널리스트로적 면모가 드러났던 작품은 없었던 것 같다. 

 

  '교차로의 밤'은 이전 작 '누런 개'와 비교하자면 보다 공간적으로 확장되고 묘사되는 계층은 더욱 더 다양해졌다고 할 수 있다

  '누런 개'가 이른바 프랑스의 엘리트 집단을 다루고 있다면 여기서는 전 프랑스의 계급을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심농은 1930년대 초반의 점증하는 계급적 갈등 앞에 서 있는 당시 프랑스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을 다 읽고 분위기를 짐작해보면 소설 속 상황이 마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날 당시의 프랑스와 어쩐지 비슷하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 그만큼 심농 역시도 당시 프랑스 사회를 덮쳐오던 어떤 파국의 전조를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생각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앞서 말했던 피그마리온의 반전된 형태는 그가 단정적으로 "계몽주의는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더욱 그렇다. 

  "자아, 이제 서로가 꿈꾸고 있던 화해의 환상은 모조리 깨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어떡할 것인가? 폐허의 잔재를 보면서 씁쓸히 연민을 곱씹을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하면서 깨어진 환상에 마냥 억지로 매달릴 것인가?" 마치 심농은 '교차로의 밤'을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는 듯 한데, 정작 심농 자신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선택해 보여주지 않는다. 매그레는 여전히 교차로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사방으로 열려진 그 어느 길이든 그는 갈수가 있지만 방향을 정할 수 없는 난처함이 마치 그 발을 대지에다 그대로 못박아 버린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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