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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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사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도진기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합리적 의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고진 변호사와 진구 시리즈는 아니다. 스탠드 얼론으로 이번엔 형사 사건 1심을 주관하는 부장판사가 주인공이다. 이름은 현민우. 별로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 생활을 선사했던 아내는 몇 년전 병사하고 지금은 아들 하나와 외로이 살고 있다. 이야기는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직장에서의 아침을 보내던 현민우가 책상 위 신문에서 한 뺑소니 사건을 읽으면서 시작된다. 그는 그 뺑소니 사건에서 희생된 여자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얼마 전 맡은 형사 재판에서 열 살 어린 남자 친구를 죽였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섰던 피고인이었으니까. '젤리 살인사건'이란 이름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사건은 판결이 쉽지 않았다. 피해자는 먹은 젤리로 목이 막혀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숨졌는데, 시신이 이미 화장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엔 단순 사고였던 이 사건은 나중에 살인으로 의심 받게 되었는데, 그건 그와 단 둘이 모텔에 들어갔고 그 모텔에서 남자 친구가 젤리에 목이 막혀 의식을 잃었을 때 현장에 있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그녀가 남자 친구 앞으로 거액의 생명 보험을 이미 들여놓았고 보험료도 그녀가 납부했으며 생명 보험금 수익자 또한 가족이 아니라 그녀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남자 친구가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다른 남자들을 사귀고 그들과 함께 보험금을 흥청망청 써버렸던 것이다. 정황상, 보험금을 노린 살인 사건이란 심증을 굳힌 검찰은 그녀를 살인죄로 법정에 세웠던 것이다. '젤리가 목에 걸려 죽은 게 아니라 그녀가 남자 친구의 숨을 틀어막아 죽였다(p.22~ 23)'고.



 재판은 쉽지 않았다. 확실한 물리학적 증거인 시신이 이미 화장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대부분 목격자들의 기억과 정황으로 사건을 판단해야 했다. 현민우는 재판을 하는 동안 피고인 김유선이 살해했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판결을 선고하려면 좌우에 있는 배석판사도 여기에 동의해야 한다. 적어도 둘이 합의해야 판결을 선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젊을 때의 자신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는 민지욱 판사가 무죄 의견을 내놓는다. 이제 막 판사가 되었으면서도 모두가 다 어려워하는 법원장이 자기가 주관하는 법정에 들어왔을 때, 재판에 방해된다고 바로 내쫓아 버린 패기까지 있어서 내심 뿌듯하게 여기던 그였는데 자신과 완전히 상반되는 판결을 내놓은 것이다. 나머지 한 사람, 정남희 판사는 심증으로는 살인자라고 생각하지만 뚜렷한 물증이 없어놔서 합리적 의심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 이럴 땐 피고인에게 이익이 되도록 무죄를 선고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믿었던 정남희 판사마저 그런 의견을 내놓자 김유선을 살인자라고 확신하고 있는 현민우는 커다란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절차대로 따라 김유선을 무죄로 풀어 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판단을 밀고 갈 것인가?


 목이 꽉 막혔다. 판사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다. 사람들이 합리로만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특정 상황에서 판사가 기대한 대로 행동하지 않았으면 진실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세상 일이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만 착착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판사들은 종종 잊는다. 실수를 하고 바보짓도 하는 게 인간이다. 모두가 기계처럼 움직이고 계산한다면 애당초 이 사건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p. 125)


 아마도 소설 속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시감이 들었을 것이다. 유명했던 어떤 사건과 많이 닮았는데 하며...

 맞다. 이 사건이 실제 있었던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바로 2010년에 일어났던, 일명 '산낙지 사망 사건'이다. 피해자와 범인의 성별이 바뀌고 산낙지가 젤리로 바뀌었을 뿐, 소설 속 사건은 실제 사건과 상당히 유사하다. 1심과 2심의 판결 역시 다르지 않는데, 이건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히지 않겠다. 대법원에서도 판결이 내려졌다. 바로 여기, 2심과 3심의 결론을 가져온 것이 '합리적 의심'이었다. 여기에도 뭔가 덧붙이고 싶지만 역시 스포일러가 될까 봐 그만둔다. 보다 자세한 것은 책에서 직접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합리적 의심'은 모두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합리', 2부는 '의심'이란 제목을 가지고 있다. 1부의 이야기는 주인공 현민우가 1심 판결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고 2부의 이야기는 2심의 결과와 제도로써는 세우지 못했던 정의를 현민우 스스로 바로 잡기 위해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여기서 도진기 작가가 미스터리 소설을 주로 쓴다는 점을 감안하여 일단 밝혀야 할 게 있다. 이 소설이 진실이 모호한 살인 사건을 전면적으로 다루긴 하지만 온전히 미스터리 소설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이 소설에 두 발이 있다면 서로 다른 쪽에 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살인 사건이 주가 되는 미스터리요 다른 하나는 주로 현민우의 고백으로 채워지는 현재 사법부란 존재의 실상이다. 특히 후자에 관해선 판사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바라는 것만큼 따라주지 못하는 사법 현실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그 간극을 보다 메울 수 있는 길에 대한 모색이 담겨 있는 것이다.


 1부와 2부의 제목은 아무래도 그 간극을 염두에 둬야 왜 하필 '합리'와 '의심'이라고 붙였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소설 속 민지욱 판사가 오로지 합리를 기준으로 사건을 판단했다가 인간이 가진 이면을 전혀 보지 못한 것에서 잘 드러나듯이, 여기서 '합리'란 세상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사법부의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 법리를 논리적으로 연결하는 것에만 매몰되어 거기까지 이르게 된 사람들의 사정이라든지,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라든지, 그런 것을 전혀 헤아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때로 국민 감정과 완전히 반대되는 판결이 내려질 때가 있지 않은가? 그런 판결을 이 소설의 '합리' 범주에 넣어도 좋을 듯하다. 그럴 때 우리는 뭐라고 판결을 비판하는가? 민심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판결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반대에 '의심'이 있다. 의심은 보이는 법리나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거기 깃든 깊은 내막이나 마음 혹은 현실적 상황 같은 것을 더 들여다 보는 태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세상 사람들이 사법부를 바라볼 때 느끼는 간극을 좀 더 줄이고자 하는 몸짓인 것이다. 작가는 그런 마음을 담아 '합리'와 '의심'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사법부의 현실과 한계를 솔직히 드러내며 보다 바람직한 길은 어느 것인지 은연 중에 나타내려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작금에 많은 국민들이 쏟아내는 사법부에 대한 비판에 성실히 답하려는 태도이기도 하다. 다음과 같은 소설의 말을 증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법원도 나름의 노력은 합니다. 근데 그게 갇힌 방 안에서 거울 보는 식이라 한계가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선뜻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판사들이 세상과 섞여서 인생 경험도 많이 하고 어떨 땐 피해도 당해보고, 뭐 그런 것들이 필요하죠. 근데, 또 판사가 너무 사람과 섞이면 불필요한 오해를 낳고 그 이유만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물의를 일으킨 사람과 점심식사 한 번 했다는 이유로 법복을 벗기도 해요. 그래서 더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급니다.(...) 법원이란 곳은 변화를 주도하는 기관이 아니에요. 모든 것이 변할 때 가장 나중까지 남아 있다가 뒤처리를 하고서야 자신도 모습을 바꾸죠. 당시만 해도 남성 중심, 가부장적인 의식이 강했으니까... 요즘에는 시대의 흐름이 바뀌었죠. 성범죄 양형이 대폭 올라간 건 결국 시대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판사는 그걸 따라가는 존재에 불과해요.(p. 217 ~ 219)


 작가는 후기에서 법률가로서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꼭 쓰고 싶었다고 한다. 법학전서에 나오는 착한 말씀들 말고 이십 년을 법정에서 구르면서 흘러나온 육성을 들려드리기(p. 305)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 마음은 소설에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그러니 오늘의 사법부가 왜 이 모양인지 너무나 궁금하여 그 내부를 꼭 한 번 들여다보고 싶었다면 '합리적 의심'은 그 목적에 충분히 부합해 줄 것이라 본다. 뭐, 그런 거 따지지 않고 이야기 자체로만 읽어도 괜찮다. 결말에 다소 호불호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역시 판사 출신 작가라 그런지 법정 드라마가 아주 현실감 넘치는 데다 재미까지 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영화 '증인'을 비롯하여 이제 우리나라에도 법정물이 제법 자리를 잡은 것 같은데, 만일 거기에 취향이 있으시다면 '합리적 의심'은 단연 좋은 선택이라는 걸 아울러 말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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