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매혹된 사상들 - 인류를 사로잡은 32가지 이즘, 개정증보판
안광복 지음 / 사계절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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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컵 같은 국제 경기에서 한국 팀이 일본 팀에게 지면 괜히 열이 받는다.

 작년 평창 동계 올림픽에선 우리나라에 귀화한 외국인 선수가 메달을 따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걸 보면서 한국인이 메달 땄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머리와 가슴에 분명 태극 마크가 있었지만 그냥 외국인이 딴 것만 같았다. 이러는 내가 잘못인 걸 안다. 경기의 승패나 메달을 따고 안 따고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그런 감정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그럴 때마다 새삼 놀라게 된다. 민족주의가 이토록 내게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구나 하고.


 사람의 의식은 절로 형성되지 않는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는 사회화를 거친다. 가정에서 또 학교에서 나를 둘러싼 세계와 그 세계 속의 나의 위치와 처신을 어떻게 헤아리고 실천해야 하는지 교육이란 이름으로 주입받는 것이다. 그 대부분을 이루는 것이 바로 사상이다. 사상은 단순한 말의 집합체나 관념의 더미가 아니다. 우리 현실의 대부분을 구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 또한 형성하고 있다. 그건 내가 자본주의나 민주주의가 아닌 세상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상은 내 생각과 판단 그리고 행동 모두에게 암묵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상을 안다는 건, 나아가 그 궤적을 살펴본다는 건, 그저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다. 그건 곧 나를 이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의식이 그런 사상들의 영토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고 살아간다.


 너무 익숙하면 그렇게 된다.

 공기나 물이 왜 존재하고 있는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되는 걸 피에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라고 불렀다.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까지 자리 잡아 마치 내 신체처럼 뗄레야 뗄 수 없게 되었다고 말이다. 나의 몸이란 곧 그런 사상들의 아비투스다. 그래서 일본 팀에게 한국 팀이 졌을 때처럼 거의 반사신경처럼 감정적 반응이 자동으로 나오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마주하면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나를 이루고 있는 사상들이 다 바람직한 것일까?'


 미국의 SF 작가 시어도어 스터전은 '과학 소설의 90% 쓰레기다. 그러나 모든 것의 90%도 쓰레기다.'라고 말한 바 있다.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모든 사상이 다 좋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받아들여도 좋을 것 같다. 그러니 우리 몸에 아비투스로 자리잡은 사상들 또한 분명 알곡과 쭉정이가 있을 것이다. 사상들을 훑어 본다는 건, 단순히 나를 둘러싼 세계의 기축을 잘 헤아리는 일로 그치지 않는다. 그건 동시에 내 내면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는 일이자 어느 것이 좋고 안 좋은지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감별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처럼 사상을 살펴보는 일은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동안 잘 몰랐던 그러나 확실히 내 생각과 판단, 행동 모두를 어느 정도 제약하면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내 진짜 초상에 확대경을 바짝 들이미는 일이니까 말이다.


 '대한민국 1세대 철학 교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안광복의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은 그러한 좋은 확대경이 되어주는 책이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깊은 영향을 미쳤던 사상을 모두 32가지로 정리해 담고 있다.

 '32가지'라는 말에 나도 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읽기 전에 머리로 내가 아는 사상들을 이리 저리 떠올려 보았는데 맴도는 게 몇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처음을 여는 '공화주의'부터 마지막 '관료주의'까지, 당신이 한 번이라도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 '주의'는 거의 다 나온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어떤 사상이 궁금하든, 여기서 해소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다. 책의 형식에 대해서도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사전처럼 죽 나열하지 않고 모두 다섯 개의 범주( '정치', '철학과 예술', '국가',' 경제' 그리고 '사회')로 구분해 그 범주 별로 사상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래서 보다 체계적으로 사상들을 헤아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사상은 아무래도 작가의 말마따나 속도보다 방향을 중시하는데, 대부분 무언가에 주안점을 두고 그 방향을 설정하기 마련이다. 책에서 구분한 범주는 바로 그런 주안점이 어디있는지 알게 한다. 거기에 맞춰 사상을 헤아리면 그 전모가 좀 더 쉽게 습득될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사상은 기존 사상에 대한 반발이나 저항에서 태어난 경우가 많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그러하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그러하듯 말이다. 범주 별로 헤아리면 사상들의 이러한 관계가 드러나 좀 더 유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분명 제대로 음미해 볼 기회가 없었기에 막연한 가운데 서로 따로 놀기만 했던 사상들이 이 책으로 이리저리 제 짝과 친구들을 찾아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선뜻 이 책을 들추지 못하게 만드는 염려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무래도 사상을 다루는 책이니까 어려우면 어쩌지 하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너무 괘념치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일단 설명이 정말 쉽고 다양한 인용과 현실 사례들을 들어 이런 책을 처음 접하는 이라 할지라도 부담없이 소화하도록 만드니까 말이다. 쉽다고 해서 설렁설렁 말하는구나 하고 넘겨짚으면 안된다. 이 책의 가장 커다란 미덕은 평이하게 한 사상에 대해 숙지해야 할 것을 정확하게 짚어준다는 것이다. 그 명암까지 말이다. 어떤 사상이든 완벽하지 않다. 영화 '1987'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주의로 변질되어 독재의 기초를 놓았고 죄 없는 이들을 함부로 잡아다 고문까지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고 커다란 고통에 빠뜨렸다. 자본주의는 또 어떤가? 모든 관계를 상품으로 만들고 오로지 자본만 중시하는 바람에 배금주의를 낳았고 아동을 중노동으로 혹사시키는 비윤리적인 처사 또한 비일비재하게 만들었다.


 사상은 비유하자면, '마징가 Z'와 다를 바 없다.

 나가이 고가 그린 원작만화에서 주인공은 자기 할아버지에게 마징가 Z를 물려받는데 할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면서 넘겨준다.


 "신이 되어 인류를 구원할 수도, 악마가 돼서 세계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



  사상도 다르지 않다. 잘 쓰면 사람을 지키지만 못되게 쓰면 남을 해치는 칼인 것이다. 사상이 가지고 있는 그런 어둠을 잘 인지해야만 사람을 이롭게 하는 진정한 사상이 될 수 있다. 덧붙여 그것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나 역시 보다 더 제대로 된 삶을 살 것이다. 이는 자유민주주의가 가진 어둠을 헤아리지 못하여 지금도 맹목적인 신념에 차서 국정농단으로 국민에 의해 쫓겨난 이를 위하여 태극기를 열심히 휘두르고 있는 노인분들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이면을 짚어줄 뿐만 아니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의문과 거기와 연관지어 살펴볼만한 책까지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사상을 안다는 게 사유의 종착지가 아니라 사유의 출발이라는 것을 잘 알려준다고 하겠다.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 그대로다.


 책에 소개된 32가지 사상을 하나하나 짚어 나가며 독자들이 매의 눈으로 우리 시대를 진단하고 미래의 지도를 스스로 그려 나가시길, 나아가 자신만의 '사상'을 만들어 나가시길 간절히 바라 본다.(p. 8)


 이는 곧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모색이자 더 새롭고 나은 나의 모색이기도 하다. 결국 이 책을 읽는 일은 나무를 심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나무를 아무 땅에나 그냥 심지 않는다. 지금 심고자 하는 땅의 토질이 어떤지 구석구석, 면밀하게 살핀다. 나무를 울창한 숲이 되도록 자라나게 하려면 부지런히 더 좋은 토질을 가진 땅을 찾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나무란 바로 '더 나은 미래'다. 토질을 살피는 건, 나라는 지층을 이루고 있는 게 뭔지 아는 일이다. 그 앎을 바탕으로 더 좋은 미래가 자랄 수 있는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그것도 어느 한 사상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 많은 사상을 접하고 능동적인 사유를 통해 거기서 찾아낸 좋은 것을 포용해 나가면서.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은 바로 그런 일을 도와줄 것이다.


 안주라는 말을 했고, 제목에 '매혹'이란 말이 나와서 그런지 문득 세이렌의 유혹을 받는 오디세우스가 떠오른다.



  세이렌의 노랫소리는 너무나 매혹적이다. 누구든 듣기만 하면 그 노래에 취해 제정신을 놓아버린다. 그리고 그 노래에 이끌려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오디세우스가 돛대에 자기 몸을 묶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매혹과 관련지어 말한다면, 매혹에 안주한다는 건 곧 죽음이란 걸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사상 또한 그렇다. 어떤 사상이든 매혹 속에 안주하면 독선과 독재가 되었고 끝내 자신과 다른 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불행을 안겼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파시즘이 되어버린 독일의 나치와 소련의 스탈린 체제만 봐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안주해선 안된다. 매혹이 멸망으로 이끄는 현혹이 아니라 보다 더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는 문이 되기 위해선 나를 매혹시킨 것이 무엇인지 늘 살피고 거기서 어떻게 하면 나쁜 것을 피하고 좋은 것을 살려낼 것인지 항상 생각해야 한다. 사상이 진정한 자양이 되는 것은 언제나 부단한 성찰에 있는 것이다. 중세의 어둠을 계몽주의가, 또 그 계몽주의의 어둠을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찾아낸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 역시 안주하길 거부하여 키르케의 돼지가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오디세우스처럼 길을 떠나야 한다. 과거의 나라는 울타리 밖으로 박차고 나와 보다 더 새로운 나라는 '이타카'를 향하여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어디서 어떻게 출발해야 할 것인지 알려주는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은 그 쉼 없는 걸음 속에서도 좋은 동반자가 되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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