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무엇인가 - 칸트 3대 비판서 특강
백종현 지음 / 아카넷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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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는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낯익은 이름일 수밖에 없다.

  어떤 철학책이든  번은  언급되기 마련이니까마치 밥상에  올라오는 김치와 같다고나 할까 접하다 보니 자연스레 궁금하게 되었다도대체 어떤 철학을 펼쳤기에 이토록 빠짐없이 인용이 되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그러나 그런 의문을 속시원하게 해결하긴 어려웠다칸트의 사상은 너무나 방대했고 그걸 체계적으로 쉽게 헤아리게 도와주는 길잡이를 만나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내자의 도움따위 필요 없이  몸소 알아보리라!’ 하며 직접 칸트의 책을 읽는 호기도 부려보았지만 낯선 단어들의 난무와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 개념들의 연속 공격 속에서 패배를 시인하고 서둘러 퇴각해야 했다그러나 칸트는   번의 싸움으로 쉬이 접어버릴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아니 보고 아니 듣는다면 그럴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칸트란 정녕 라면의 스프와 같은 존재철학의 맛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관통해야만 했기에 나는 반복해서 칸트의 철학과 난전(亂戰) 벌이지 않을  없었다물론  때마다 나는 번번이 자신의 무력함을 씁쓸하게 곱씹는 패장(敗將) 기분을 느껴야 했다그러다 깨달았다유비가 삼고초려까지  가면서 제갈공명을 자신의 사람으로 삼으려했던  바로 이래서였구나 하고그러나 더이상 유비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졌다 또한 제갈공명 같은 책을 드디어 만나게  것이다그것이 바로 백종현 교수의 ‘인간이란 무엇인가 책이다부제는 칸트 3 비판서 특강.

 

 하지만 처음  책을 보았을 조금 걱정이  것도 사실이었다책의 분량이 작았던 것이다모두 267페이지 정도론 3 비판서는 커녕 과연 ‘순수이성비판조차 제대로 설명할  있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하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칸트 전문가이자 칸트 공부만 50년을 했는는 학자의 책이니만큼 속는 셈치고 일단 읽었다이런! 부제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그야말로 3 비판서의 핵심이 고루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마치 필요 없는  모조리  가지치고  정수만 모아놓은 느낌이었다. 3 비판서를 쉽고 체계적으로 헤아리게 돕는 길잡이 역할부터 그가 당대의 사람들에게  중점적으로 들려주려 했고 그것을 통해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칸트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짚어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이보다 훨씬  두터운 책으로도 가늠할  없었던 칸트와 그의 철학을  얇은 책으로 이토록 선명하게 응시하게 되다니! 가히 명필은 붓을 탓하지 않고 내공 깊은 고수는 분량에 좌우되지 않는가 보다.



 

  책은 크게 서론 격이 되는칸트 철학으로 들어가기 3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판단력 비판  강씩 할애하여 설명한 3강으로 이뤄져 있다서론에선 연암 박지원과 같은 시대 사람이었던 칸트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가 활동한 시대는  어땠는지와 함께 오랫동안 칸트 철학을 연구하고 번역해왔던 그의 술회가 짙게 투영된 한국어로 칸트를 읽고 공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밝히고 있다그렇게 하여 칸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힘을 기울여 풀어가야  철학의 화두로 삼았으며그런 그의 작업이 비록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고  타국에 살고 있지만 지금의 우리와 결코 별개의 것이   없음을 헤아릴  있도록 말이다.

 

 칸트가 인간을 화두로 삼은 것은 그의 시대를 거센 물줄기로 휩쓸었던 계몽주의 그에겐 다름아닌 ‘사람이 자기 탓인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남(p. 73)’이었기 때문이다여기서 미성숙이란 타자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을 이르는 말로 칸트는 사람들이 그렇게 미성숙하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의 지성을 스스로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부족으로 보았다사실 그럴만 했다르네상스를 시작으로 종교혁명을 통해 계몽의 여명이 차츰 시대를 밝히고 있었지만   동안 지배했던 기독교 때문에 당대 사람들은 신의 권위에 짓눌려 자신의 이성을 자발적으로 사용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으니까 말이다그들에겐 자신의 이성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히 드러내 사용할  있는 자유가 필요했고 칸트는 성숙을 향한 그들의 결단과 용기를 위해 그런 자유를 주려했다그러기 위해 그는 인간을 다시금 정의할 필요가 있었다왜냐하면   때까지 사람들은 자신을 오직 신의 눈을 통해서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행동할  있으며 어디에서 흡족함을 느끼는지를 하나같이 신에 맞추어 생각했다칸트는 그런 사슬을 끊고자 했다인간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신이 세워놓았던 가림막을 치워 인간의 온전한 초상을 보도록 말이다그래서 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질문으로 돌아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었을그래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다시금 제기한 것이다이제는 신이란 타자의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이성으로 그것을 음미하도록.

 

 1) 나는 무엇을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행해도 좋은가?

 3) 나는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가?

 

   개의 질문은 그대로 3 비판서와 대응한다. ‘나는 무엇을   있는가?’ 대답이 ‘순수이성비판이며 ‘나는 무엇을 행해도 좋은가?’ 대답은 ‘실천이성비판이고 마지막으로  ‘나는 무엇에서 흡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가?’ 대답이 판단력비판 것이다여기서 비판이란 다름아닌 ‘무엇을   있고     없는지 분간함(p.83)’ 의미한다   없는 한계 범위를 밝히는 것이 ‘비판 것이다그러므로 ‘나는 무엇을   있는가?’ 대한 비판은  ‘나는 어디까지   있는가?’이기도 하다그런 인간의 이성이   있는 범위바로 그것을 밝히는 것이 ‘순수이성비판 하고자 하는 바다거기서 칸트는 인간의 지식이 무엇보다 감성 세계의 대상에 관해서만 가능하다(p.85) 여긴다오직 우리가 감각으로 확인할  있는 것만이 지식의 대상이라는 것이다그러므로 칸트에겐 자연과학적 지식만이 지식이다실제 감각으로 확인할  없는 철학적 사변이나 종교적 담론 같은 것은 지식이 아닌 것이다그런 지식에 대해 칸트는 지식인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지식이 아닌 것이 지식이라고 주장하며 권위를 내세워 사람들의 이성을 호도하면 안된다고 말이.


 그렇다고 칸트가 철학적 사변이나 종교 담론을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그런  또한 자연과학적 지식 이상으로 우리 삶을 유용하게 만드는  인정한다다만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이념 문제인 것이다신을 예로들어 말하자면 감각할  없는 신을 섣불리 지식의 범위에 넣어 실재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다만 우리의 삶을 보다 바람직하게 만들 이념의 하나로  존재를 요청할  있을 뿐인 것이다이렇게 오직 감각할  있는 것만을 실재로 인정하기에 실재라는 개념이   분명해지고 이전까지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새로운 차원이 열리게 된다.


 왜냐하면 감각할  있으려면 그것이 언제나 특정한 시공간 위에 놓여져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려면 시공간 위에 있어야 한다는 일차적인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그럴  없는 것은 존재하는  아니다신도천사도 마찬가지다이렇게 우리의 존재 인식은 시공간이라는 특정한 형식을 통해 이뤄진다칸트는 이를 두고 ‘초월적 감성 형식이라 부른다칸트에게 ‘초월적이란 말은 백종현 교수에 따르면 모든 경험에 앞서는그러면서 경험 인식을 가능하게(같은 저자의 ‘칸트와 헤겔의 철학’ p.123)하는  뜻한다다시 말해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어떤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감성 형식을 통해 보고 있다는 말이다 형식은 우리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이런 면에서 보자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만든 형식에 따라 규정하는 대로 보고 있다고 말할  있다사실 칸트는 우리가 정말 그러고 있다고 말한다어떤 대상을 지각할  지각  자체만 하는  아니라 지각을 어떤 특정한 것에다 연결 혹은 종합하는 ‘통각 하며  통각은 범주라는 일정한 도식을 매개로 이뤄진다고 말이다그게 바로 관계양태로 대표되는 초월적 지성 형식이다우리는   형식을 사용해 바깥의 실재를 지각하며 오직 그것만이 실재가 된다 형식은 모두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사실은 우리의 주관이 객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칸트는 실재의 구성을 우리 주관 영역으로 끌어들였다이것은 보다  알기 위해 오직 바깥 대상에다 우리의 주관을 끼워 맞춰야 했던 당시 사람들에겐 생각도 못한 것이었다칸트에 따르면 자연 세계를 형성한 것은 신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이었다그런 식으로 칸트는 신에게 얽매여 있던 사슬을 끊어냈다우리가   있는 것은 지식으로 삼을  있는 것은 오직 자연 과학적 세계밖에 없으며 그것을 근본적으로 형성하는 것도 바로 우리라는 것을 알리면서 말이다.

 

 그럼 이제 다음의 문제, ‘나는 무엇을   있는가 의지의 문제에 답할 차례다.

 칸트에 따르면 의지는 오직 ‘‘선의지밖에 없다(p.155)’ 한다왜냐하면 의지 ‘좋은 것을 하려함으로 나쁘게 되는 것은  의지가 약해진 것이지 나쁜 의지란  있어서 그런  아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런 의지는 또한 자유의지이기도 하다좋은 것을 구속 받지 않고   있어야 의지가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있는 까닭이다그런데 선의지란 단순히 좋은 것을 하려는 의지를 뜻하지 않는다도덕적으로 올바른 의지를 뜻한다

 

 어떤 행위를 ‘옳다라고 하는 오로지  이유 때문에 행하려는 의지가  선의지다.(p. 160)

 

 칸트는 진정한 자유의지는 오직 선의지를 발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여기서 도덕적이란저마다 가진 상호 인격을 존중해주는  뜻한다백종현 교수는 그걸 칸트가 ‘영원한 평화에서 어떤 경우도 섬멸전이나 징벌전은 있을  없다고 말한 것을 가지고 풀어간다그렇게  뜻대로 하지 않고 상대가 가진 고유의 영역을 지켜줄  있을 비로소 도덕적이라   있다그리고 그렇게 하려는 의지가 바로 ‘선의지.


 그런데 이런 선의지는 일상  우리가 그렇듯행하기가  어렵다사람에겐 누구나 자기 본위의 욕구가 있으니까 말이다이런 자신의 경향을 극복하고 선의지를 발휘하기 위해선 아무래도 의무로 강제되지 않으면 안된다하여칸트는 도덕적이 되는 것을 정언명령으로  것이다정언명령그것은 아무런 핑계를   없는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는 명령이다그리하여 ‘너의 의지와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법칙 수립의 원리로서 타당할  있도록그렇게 행위하라(p. 168)’ 도덕법칙  최상위 법칙인 정언명령이 만들어진다여기서 기존의 상식적인 견지에서 보자면 무척이나 새로운 자유 개념 도래한다당시 사람들에겐 자유란  뜻대로 마음대로   있는  자유인데칸트에겐 거꾸로  뜻이 아니라 의무로 부과되는 당위를 따를 때가 진정한 자유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일단 동물이다그런 이상 자연스럽게 식욕성욕과 같은 동물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백종현 교수에 따르면 라이프니츠는 ‘단자론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람은 4분의 3 동물적이다.(p. 183)

 

 

 나도  동감한다그런 욕구는 오로지 나만의 충족을 추구하므로 대부분 도덕적 관계를 쉽게 해칠  있는 것들이다그런 욕구를 따른다는 것은  자유를 누림이 아니라 사실 내게 있는 동물적 욕구에 노예처럼 순종하는 것이다그러므로 그것에 저항하여  모든 동물적 욕구에 위배되는 의무로 부과된 정언명령을 따를 때야말로 진짜 자유라는 칸트에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이는 또한 자신을 그저 욕망 충족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그치는 것이기도 하니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길이다.


 앞서 칸트에게 계몽주의란 자신의 이성을  어떤 것에 주눅들지 않고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이라 말한  있다얼마든지 결단하고 용기를   있는 이러한 자유가 칸트가 원한 것이었다면 ‘실천이성비판 통해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는 더욱 분명해지는  같다그건 바로 서로의 자유하고 대등하게 공존하는 세상말이다아무도 자신의 동물적 자유를 위해 타인을 수단 삼지 않으며 그가 타고난 존엄 그대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해주는 그곳이 바로 칸트가 꿈꾸는 세상이다그러기 위해서 칸트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자유를  것을 주문한다실천 이성은 그런 자유에 헌신할  진정한 빛을 발한다는 것도.

 

 

 

 그러나 우리도 얼른 예감하듯이 이런 의무에 따른 삶이 결코 행복할리 없다.

 칸트는 자연 세게와 도덕 세계를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세계로 분리시켰다그러면서 자연 세계 또한 알고보면 우리 인간이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것임을 밝혀  지식이 아닌 이념의 도덕 세계 또한 우리가 마음먹고 노력만 한다면 얼마든지 형성 가능하다는  믿게 했다그러나 종교 상의 성인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우리들은 행복을 자연 세계에서 구한다대다수가 생각하는 행복의 형태란 감각적인 것일테니까 말이다영화 ‘매트릭스에서 사이퍼도 가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맛있는 고기를 실컷 뜯어먹기 위하여 기꺼이 인간을 배신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선의지를 발휘해 정언명령을 따르더라도 언제든 사이퍼처럼 유혹에 빠질  있다칸트가 바라는 세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선 이러한 배리(背理)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그저 거의 무한에 가까운 시간이 걸릴 것이라든가그래서 신을 보상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대답해선 안되었다성실한 칸트는 거기에 대해 답할 의무가 있었다. 정언명령을 강조했던 그이기에 당연히 따라야  의무였다.


 그리하여 그는 판단력 비판 썼다.

 그에게 이것은 무엇보다 서로 대척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을 조화시키는 작업이었다앞서도 말했듯, ‘판단력 비판 감정에 대해 말한다이것을 낳았던 물음인 흡족함이야 말로 감정의 문제다보다 일반화 하면 쾌와 불쾌에 대한 문제라 말할  있다이런 반응 혹은 인식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듯이 오직 하나의 직접적인 반응만이 전부인가거기에 대해 칸트는 비판의 메스를 가한다그리고 흡족함과 아름다움 같은 인식엔  하나의 차원이 있다는  알게 된다바로 합목적성말이다. ‘합목적성이란 목적에 합치한다는 뜻으로 쉽게 표현하자면 ‘~답다  것이다그러므로 ‘아름답다  자체에 이미 합목적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있다어떤 것에 대해 쾌나 불쾌를 느낄  우리는 단순히 그것만 보지 않고 마음에 있는 어떤 범주에 맞춰 쾌나 불쾌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면   같다이런 범주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시공간이란 감성적 형식과 양과 질같은 지성적 형식이 만나 지식을 형성했던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칸트는 미적 쾌감 역시 상상력(인식의 시공간처럼 대상의 미를 특정 순간에 합목적적으로 포착하게 만드는 감성적 형식이라   있다.) 지성의 형식이 합일하는 데서 생긴다(p.225)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이처럼 감정의 영역인 미적 쾌감 역시 지식 영역과 똑같은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 칸트에겐 활로가 되었다대치될 것으로 보였던 지성과 감성이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까 말이다그렇게 ‘판단력비판’ 작업을 통해 칸트는 지성이 감성의 영역으로 또한 감성이 지성의 영역으로 나아갈  있다는  밝힌 것이다그렇다면 이론 이성과 실천 이성 또한 못할 것이 없다합치될  있는 것이다다름아닌 판단력을 통해서 말이다백종현 교수는 다음과 같이 ‘판단력 의의를 밝힌다.

 

 판단력에 의해서 지성의 법칙 수립과 이성의 법칙 수립이 연결된다다시 말하면지성에 의해서 자연법칙이 수립되고 이성에 의해서 자유법칙이 수립되는데이렇게 수립된 자연세계에 관한 것과 실천세계에 관한  법칙이 판단력 의해서 통일된다이로써 자연과 자유가 통일이 된다그런데 판단력은 무엇을 가지고   세계를 통일할  있는가그것은 다름 아니라앞에서 말했던  ‘실천이성비판 변증학에서 등장했던 ‘최고선 이념에 의거해서다.(p.234 ~ 235)

 

 그렇다면 어떻게 합치되어야  것인가여기에 의무론적 윤리에 걸었던 칸트의 이상 또한  수명이 결정될 것이다칸트에게 있어 합치란 어디까지나 서로 고유의 영역을 존중한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그렇다면 자연세계가 실천세계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다반대의 경우엔 실천세계 자체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이로써 의무론적 윤리를 따라야 한다는 칸트의 생각은 구제되었다물론 여전히 현실화가 요원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게 옳은 길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칸트의 대답 또한 완성되었다백종현 교수는 그것에 관해 이렇게 쓴다.

 

 이렇게 해서 칸트는 이성 비판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철학적으로 답한다요컨대인간은 세계 인식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규정하는 초월적 주관이자행위에서 선의 이념을 현실화해야 하는 도덕적 주체이고세계의 전체적인 합리성과 합목적성을 요청하고 희망하고 믿는 반성적 존재자이다 칸트의 이성 비판은 이로써 우리가 과학적 엄밀성을 가지고 발언할  있는 것은 인식의 세계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뿐이지만인간에게 가치 있는 일은 논리적 사고 활동뿐만 아니라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도덕적 완전성그리고 인간의 이상이 마침낸 실현된다는 희망 내지 확신을 가지고 역행(力行)하는 일임을 일깨워준다.(p. 237 ~ 238)


 이 말은 책의 거의 마지막에서 만나게 되는데, 교수의 논지를 죽 따라가다 이 말을 만나고나면 왠지 뭉클해지는 걸 어찌할 수 없다. 한 인간이 평생 걸어서 비로소 도착한 종착지의 모습을 그대로 문자로 형상화해 놓은 것 같아서일까? 여하튼 결코 자신이 사는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난 적이 없고(그는 오직 책으로만 여행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알프스 지형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한다.) 교우 관계도 그리 넓지 못하여 업무적인 관계를 떠나 만난 유명한 사람이라곤 모제스 멘델스존과 피히테, 헤르더 정도가 전부인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누구보다 깊고도 확장된 안목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상식과 권위에 결코 타협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신선한 시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끝내 이렇게 찾아내고야 말았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칸트는 누구보다 자신이 정의한 계몽주의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 어떤 타자에도 기대지 않고, 주눅들지도 않고 결단과 용기로써 이만한 철학 체계를 만들어내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칸트의 태도는 특히나 지금의 우리나라처럼 이념과 성별, 세대 그리고 이주민에 대한 혐오와 적대를 양산하는 가짜 뉴스와 근거 없는 풍문과 선동에 휩쓸리는 사람들이 나날이 많아지는 상황에 더욱 귀감이 될 것 같다. 어느 때인가부터 우리는 어떤 사안과 부딪힐 때마다 자신의 이성을 엄중히 사용하여 사태를 온전히 헤아리기 보다는 점점 더 타인의 말에 기생하여 내 판단과 행동을 결정해버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먹고 살기 바쁘고 머리 쓰기 귀찮다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이러한 포퓰리즘 심화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오죽하면 얼마전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재의 시대를 두고 '레트로토피아'라고 불렀을까. 모두들 칸트가 유념하고 직접 실천했던 계몽의 빛을 스스로 꺼버리곤 고유하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기 보다는 그저 언제든 대체가능한 무리 속의 하나로 남게 되는 중세의 어둠 속으로 회귀하여 왜 증오하는 지도 모른채, 누군가 달을 가리키면 그 쪽 방향으로 컹컹 짖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결코 칸트만이 되새겨야 할 질문이 아니며 그걸 중심축으로 하여 전개한 사유의 여정 역시 그저 과거의 유물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오늘의 우리가 자신의 화두로 삼아 깊이 숙고해야할 의문이며 나만의 사유 여정을 위해 곁에 두고 자주 들춰봐야 하는 길잡이인 것이다. 백종현 교수에 따르면, 칸트는 자기가 하는 철학의 소임을 중세 때 흔히 썼던 '철학은 신학의 시녀다'라는 말에 빗대어 이렇게 여겼다고 한다.


 시녀에는 두 부류가 있다. 왕비가 치맛단을 길게 늘어뜨려 끌고 갈 때 뒤에서 끌리지 않게 치맛단을 들고 가는 시녀가 있고, 왕비가 발을 헛디디지 않게, 또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앞장서서 등불을 들고가는 시녀가 있듯이, 철학은 신학뿐만 아니라 여타의 학문들이 헛길에 들지 않도록 앞장서 등불을 들고 가는 시녀이다.(p. 79)


  그렇다면 칸트의 철학이야말로 지금의 우리들에게 등불을 든 시녀로 보인다. 날로 치열해지는 경쟁과 팽배해지는 물질 만능주의 속에서 배려 보단 배척이, 존중 보단 갑질이 횡행하는 가운데 언제 어느 때 한낱 수단으로 전락하거나 나 또한 타인을 수단으로만 여기는 괴물이 될 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인간다움을 지켜나갈 길로 인도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리 쉽게 친해질만한 안내자는 아니다. 하지만 전혀 낯선 상대도 고향이나 가족, 하는 일이나 취미를 묻다 보니 차츰 파악이 되어 그걸 발판삼아 수월하게 친해졌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게 사람이 처음 만나 친하게 만드는 일을 이 책,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하고 있다고 보면 될 듯하다. 분명 읽다보면 나처럼 오리무중이기만 하던 그의 얼굴이 하나하나 그 윤곽을 잡아나가는 걸 경험할 것이다. 이렇게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긴 글을 쓴 것처럼 말이다. 그런 길잡이를 만나지 못하여 칸트와 벗하는 일을 미뤄두고 있었다면 얼른 이 책의 초대를 받아들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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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1-31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읽었더니 도리어 이 책까지 읽어야 하나 생각하게 되네요..... 대단하세요. 언제나 그러셨듯이요.

헤르메스 2019-01-31 22:48   좋아요 1 | URL
앗! syo님 이렇게나 반갑고도 기쁜 댓글을 남겨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언제 한 번 칸트를 제대로 헤아려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늘 손가락만 빨고 있었는데 이 책을 만나 이제 겨우 그 손가락을 입에서 뺄 수 있게 된 듯 합니다. 혹시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하셨으면 이 책을 먼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2019-02-02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3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