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 2018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한강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최근에 이사를 했다. 마침 부동산 광풍이 몰아치는 시점과 맞물리는 바람에 서울에서 안정적으로 머물 곳 하나 마련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절감하는 기회가 되었다. 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인 '작별'을 읽으면서 심히 공감하게 된 건 그런 내 사정이 단단히 한 몫했다. 여기엔 본상을 수상한 '작별'에 수상작 후보로 선정되었던 다른 여섯 편의 단편까지 더하여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었는데, 물론 모두 각각 다른 시간에 다른 지면으로 발표되었을테지만 어쩐지 내게는 마치 모든 작가가 미리 합의라도 하고 쓴 것 마냥 동일한 주제를 다양하게 변주하여 들려주고 있는 듯했다. 다들 한 목소리로 최근에 내가 뼈져리게 경험한, 정처할 곳을 찾지못한 이들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사로 인해 너무 힘겨운 경험을 한 탓에 그렇게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정이야 어쨌든 '작별'에 실린 모든 단편들은 어디에서도 쉽사리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로 나로 하여금 인간이 가진 정주(定住)의 욕망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건 유랑(流浪)이 천명(天命)이었던 원시 시대 때부터 인류 폐부 깊숙이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가 유토피아를 하필이면 시간이 아니라 공간을 가지고 상상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진 않으리라. 유토피아가 영구적으로 머무르고 싶은 곳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듯이, 내 한 몸 오래도록 편안히 뉘일 곳을 가지는 건은 고래(古來)로부터 많은 이들이 품어온 소망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이 욕망은 오늘에 이르러 더욱 커지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보다 오래 머무르고 싶어한다. 비단 그건 집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직업도 그렇고 가족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란 그걸 잘 허락하지 않는 게 추세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대를 '액체 근대'라고 불렀듯, 세상은 점점 더 빠르게 변하고 우리가 안심하고 엉덩이를 단단히 붙이고 있을만한 견고한 것들은 점점 더 많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계약 해지를 당할 수 있는 비정규직의 수가 전체 노동자 수의 절반을 넘었고 장사 좀 될라치면 건물주에게서 젠트리피케이션을 당한다. 집도 마찬가지다. 세들어 이제 좀 살만하다 싶으면 어느새 올라버린 집값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일찍 부화한 뻐꾸기 새끼가 발로 밀어버린 새알처럼 우리는 느닷없이 자신의 둥지에서 밀려나는 것이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고 그렇다고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건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 영화 속에 자주 나왔던 장면과 흡사하다. 발판 위를 열심히 달리고 있었는데 문득 내려다 보니 어느새 발판은 사라져 있고 남은 건 다만 추락밖에 없었던 장면.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그와 다를까?


 그렇기에, '작별' 소설집의 단편들이 '별안간 찾아온 변화'를 계속 누비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작별(한강)'의 주인공은 갑자기 눈사람이 된다. '손(강화길)'의 주인공 역시 불현듯 들려온 '퍽'이란 소리에 일상이 흔들린다. 그녀의 아이 역시 갑자기 사라진다. '희박한 마음(권여선)'에서 곤경을 불러오는 계량기의 소음은 언제 터져나올지 예측할 수가 없다. 주인공이 당하는 난처한 상황 또한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시간이 갑작스레 닥쳐온다. '동네 사람(김혜진)'에서 주인공 일행이 당했던 사고와 곤경 또한 아무런 예고 없이 한순간에 일어났으며 '소돔의 하룻밤(이승우)' 역시 어느 날 문득 롯의 집으로 찾아온 두 명의 나그네로 인해 사유의 다양한 결이 초래된다. '언니(정이현)'에서 인희 언니가 겪었던 부당한 일도 예상할 수 없었던 순간의 타격이었으며 'Light from Anywhere(정지돈)'에서 양코와 태순마저 우연히 인간환경계획연구소와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그 인연은 그들 모두에게 걸었던 기대와 바랐던 미래에 대한 배반을 선사한다.


 모든 소설의 파국 혹은 변화가 이처럼 순간으로 이뤄지는 건, 출근하다가 문자로 해고 통보를 받는 게 어느덧 일상이 되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언감생심인 시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만 '작별'에 나오는 현수 씨처럼 하루 하루를 그저 버텨내는 것 뿐이다.


 버티는 요령이 있어요,라고 언젠가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사정이 좋지 않을 때엔 하루에 한 끼씩 맨밥만 먹는다고, 누구도 만나지 않으며 가족에게도 전화하지 않는다고, 낮 시간은 줄곧 방에서 보내며 짧은 산책은 이른 새벽에만 한다고 했다.(p. 49)


 피부가 모조리 노출되어 바깥 자극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동물이 그것을 막아줄 껍질을 바라듯, 이토록 내일을 쉽사리 기약할 수 없는, 영화 '아저씨'에서 주인공 원빈이 내뱉었던 대사처럼 오늘만 보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이기에 더욱 정주에 집착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우리만이 아니다. 세상 또한 그러하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라. 다시금 여기저기서 편가르기가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남북 정상 회담으로 이제 이념의 힘이 더이상 예전 같지 않은 모양인지 지금은 성별, 세대 그리고 이주자를 기준으로 '여기 여기 붙어라!'가 횡행하며 무리가 지어지면 마치 어린 아이들의 놀이처럼 상대방을 혐오하고 적대를 공공연하게 쏟아내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다. 세계적으로 인종과 종교 그리고 이주자에 대한 차별이 극심해지고 있다.


 정지돈의  'Light from Anywhere' 결말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흐르고 있다. 최근 방영되는 드라마 'SKY캐슬'에서 종종 언급하듯이, 돈과 권력이 바탕이 된 새로운 중세적인 신분제와 종교 근본주의 그리고 인종적 우월성이 다시금 거세게 부활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 모든 건 사실 근대의 계몽주의 이후 인류가 이성에 힘입어 철폐하거나 와해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을 향한 복고주의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어떻게든 빌미를 만들어 무리를 이루려 하는 이런 거대한 흐름 앞에서 그들과 다른 타자가 된다는 건 이제 더욱 위험하고 공포스런 일이 되고 말았다. 사실 '작별' 단편집에 실린 모든 소설들은 그런 상황을 그린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주인공들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한다. 하나같이 다들 무리에 섞이지 못하는 외톨이이기 때문이다. 내가 공감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자리가 없는 존재들. 직장에서 이렇다할 인간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작별'의 주인공은 물론, 시골로 내려와 안면 없던 마을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하는 '손'의 주인공이나, 레즈비언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희박한 마음'의 할머니 데런, 최근 이사를 와 동네 사람들과 새롭게 교제를 시작해야 하는 '동네 사람'의 주인공들'소돔의 하룻밤'에서 소돔에 사는 롯, '언니'에서 주인공이 다니는 대학 중문과에서 유일하게 전문대에서 편입한 인희 언니'Light from Anywhere'에서 변화의 바람을 찾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 온 양코 모두 그렇다. '손'에 나온 말로 표현하자면 '튀기'인 것이다.


 그런 이들의 존재감은 점점 증식되는 무리 앞에서 아무래도 권여선의 단편 제목 처럼 희박해질 수밖에 없다. '작별'에서 눈사람이 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단적으로 그걸 나타내고 있다. 눈 내리는 밤의 눈사람은 아무래도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존재다. 거기다 눈사람이 된 주인공의 육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이 부서져 간다. 한강은 재밌게도 눈사람이 된 그녀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을 다름아닌 모든 인간적인 감정으로 설정해 놓았다. 그러니까 사랑, 자상함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따스한 감정들 말이다. 주인공은 그런 감정을 느낄 때마다 차츰 부서져간다. 이는 무리 속에서 홀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타자는 오직 모든 인간적인 감정을 지우고 사물이 될 때에만 지속이 가능하다는 무시무시한 비유에 다름아니다. 이건 다만 문학적 연출은 아니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 자기보다 약한 이를 한낱 사물로 대하는 건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작별'의 현수가 당했던, 없는 사람 취급 하는 것도 그렇지만 요즘 여기저기서 흔하게 들려오는 이런저런 갑질 사태야말로 대표적인 '타인의 사물화'가 아니던가. 강화길의 '손' 마지막에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손'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주인공은 자신에게 감도는 이물의 내음을 없애려면 몽글몽글한 콩이 되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콩이란 어떤 존재인가? 제삿상에 바치기 위해 걸죽하게 하나가 되도록 끓이고 빻아야 하는 존재다. 이는 곧 독립적인 개체성을 포기하고 그렇고 그런 사물 중 하나가 되는 걸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손'이란 존재는 무리 중 하나가 되라는 강요에 대한 저항이며 그 무리를 파괴하고 고유한 개체성을 건져내는 존재의 상징인 셈이다.


 "그런데 어머니 손이 뭔가요?"

 그녀가 대답했다. "악귀다, 악귀. 마을에 들어와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방해하는 년. 그 년이 없는 날 귀한 해콩을 삶는 거다."(p. 62)


 '희박한 마음'의 데런 역시 그런 사물화를 당했다. 이 단편에서 데런은 오락가락하는 기억력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실 그건 한 사건의 충격이 가져온 여파다. 먼 과거의 대학생 시절, 디엔과 함께 학생 식당 뒤편에서 담패를 피다 한 복학생이 여자가 담배를 핀다고 역정을 내면서 빨리 끄지 않은 디엔의 뺨을 후려쳤던 것이다. 그 느닷없고 어이없는 공격에 그러나 데런은 디엔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다. 복학생의 손찌검은 데런과 디엔의 인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고 그대로 그건 사물화였다. 그런데 이런 남성에 의한 갑작스런 사물화 공격은 할머니가 된 지금 또 찾아온다.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조금도 변한 게 없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고칠 수 없는 계량기 소음으로 더욱 웅변된다. 이런 항구적인 흐름 속에서 데런은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사물이 된 것이다. 데런과 디엔이 서로의 꿈 속에서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존재로 나왔다는 게 이걸 증거한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인 데런이 그 꿈에서 한 선배로부터 디엔이 죽었다는 걸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는 것도 그와 관련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선배의 요구는 사실 데런과 디엔이 사물이라는 걸 고백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사물화'는 '작별'의 눈사람이 그러하듯이 아무 저항 말고 가만히 그대로 있으라는 압박에 다름아니다. 김혜진의 '동네 사람'에서 주인공들이 갓 이사 온 동네에서 한 할머니를 차로 부딪힌 것으로 인해 동네 사람들에게서 받는 압박이 딱 이렇다. 여기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하나는 '나'고 다른 하나는 '너'다. '나'는 '아무도 모르고 누구도 모르는 인파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으로 남들과 되도록 갈등을 피하고 두리뭉실하게 섞이는 걸 선호한다. 기꺼이 사물이 되려는 사람인 것이다. 반면 '너'는 독자적인 자신의 목소리를 어디서나 내며 섞이기 보다는 끝까지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한다.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 사건을 이용하여 주인공들에게 야박하게 구는 건 '너' 때문이다. 평소 자신의 개성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다녔던 것에 대해 이런 식으로 처벌하는 것이다. 왜 너는 사물로 있지 않느냐는 집단적 타박인 셈이다. 이는 이승우의 '소돔의 하룻밤'에서 롯의 집으로 찾아온 두 나그네에 대해 소돔 사람들이 몰려와 요구했던 것에 그대로 이어진다. 물론 정이현의 '언니'의 인희 언니 역시 동일한 사물화를 당한다. 편입생이라 학교에서 존재 가치가 가장 엷은 그녀를 지도 교수가 그저 번역 기계로만 취급하는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사물화는 강자인 무리에게 있어서는 자기 존재 지속의 폭력이요 약자인 타자에게 있어서는 생존 방법이다. 물론 그 생존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아닌 그저 사는 것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당연히 이런 사물화를 방치할 수 없다. '작별'이 잘 보여준 것처럼 사물이 된다는 건 죽음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역사적으로도 타인을 사물로만 대했던 체제가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초래하는지 잘 보여주기도 했지 않은가? 개체를 그저 집단 속 도구적 사물로만 보는 파시즘의 대표적 존재인 나치가 벌였던 유태인 학살을 생각하면 말이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복고주의도 따지고 보면 파시즘의 그늘이 짙게 투영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그런 비극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라도 이런 사물화에 저항하여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거센 움직임이 너무 늦기전에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증명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언니' 후반에 나오는 인희 언니의 투쟁이다. 그는 교수의 악행에 맞서 1인 침묵 시위를 벌이는데, 아무 말 않고 한 곳에 가만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작별'에서 주인공이 된 눈사람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이렇게 겉모습이 비슷하다 보니 사물이 되었던 '작별'의 그녀와 인간을 증명하는 '언니'의 인희 언니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대조되어 나타난다. 인희 언니는 사물화의 강한 압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던 것이다. 많은 눈치와 반대를 받고 그리 많은 호응을 얻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인희 언니는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하여 자신도 인간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벙커였다. 벙커는 세상의 모든 위험에게서 지켜줄 수 있는 곳으로 가장 확고한 정주의 상징적 공간이다. 그런데 그런 벙커는 다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기생하지 않으려는 태도, 귀찮고 힘들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돌파해 나가려는 노력을 통해 비로소 형성된다는 걸, '언니'는 선명하게 그려낸다. 다름아닌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의 능동적인 증명이 한없이 가변적인 현실 속에서 홀로라 더욱 불안한 우리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벙커인 것이다. 정주의 욕망은 발견이 아니라 형성을 통해 성취된다. 또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애오라지 자신에게만 기대어 삶을 경작해 나아갈 때, 정지돈의  'Light from Anywhere' 마지막에서 푸념처럼 나왔던 미래 또한 단순한 과거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의 모습으로 찾아온다.


 이렇듯, '작별'이란 단편집은 서로 다른 작가가 서로 다른 소재를 사용하여 서로 다른 시간에 발표했어도 비슷한 주제라는 하나의 선율로 노래하는 합창이었고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얘기에 무리한 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유를 차곡차곡 진전시키는 것이 가능한, 서툴게나마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연쇄된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이런 내 말이 믿기지 않더라도 부디 '작별' 한 편만 읽지 말고 여기에 실린 모든 작품을 차례 대로 다 만나보길 원한다. 오늘의 사회란 누구나 손쉽게 눈사람과 같은 타자가 될 수 있다. 단편의 주인공들은 결코 나와 그리 먼 존재가 아니며 그렇기에 일상의 현실성을 잘 살린 강화길과 김혜진의 단편은 아주 섬뜩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나와 그리 다를 바 없는 당신 또한 알게 모르게 사물화의 압박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런 강요 속에서 자신의 인간다움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여 갈등도 많이 겪었을 것이다. 생계가 걸리고, 가족이 걸리고, 미래가 걸린 문제라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했지만 여전히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았을 것이다. 나는 감히 문학이 해답을 줄 것이라고 말하진 않으련다. 그러나 자신의 해답을 찾기 위해 이런 저런 화두를 던져주는 역할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는 건 고민도 마찬가지다. 어려운 고민일수록 순식간에 해답으로 데려가는 엘리베이터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있는 건 다만 천천히 하나하나 올라가야 하는 계단 뿐. 그렇게 자신의 기존 생각에 도전해 오는 화두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곰곰이 따져 보면서 사유와 경험의 진폭을 차츰 확장시켜 나갈 때 어느 순간 해답이 도래하리라 생각한다. 단편집 '작별'은 그런 계단이 되어 줄 것이다. 당신을 인간으로 만들고 진정한 미래를 가져다 주는. 이것이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쓴 글에 동의한다면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는 것도 믿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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