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 모노클 시리즈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민경욱 옮김 / 노블마인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예전에 보았던, 왕가위 감독의 영화인 '타락천사'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극중에서 청부살인업자로 나오는 여명이 아주 늦은 밤의 버스 안에서 어떤 남자를 우연히 만난다. 남자는 오랜만에 만난다면서 반갑게 인사하는데, 여명은 할 수 없이 인사에 응하면서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남자가 요즘 무슨 일하냐고 묻자, 곤혹스러움은 더욱 짙어진다. 그러는 가운데 여명의 독백이 이렇게 지나간다.

 '청부살인업자에게도 고교 동창은 있다.'


 청부살인이라는, 사회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예외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우리와 그리 다를 바 없는 한낱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니면 현재엔 비록 청부살인업자라는 괴물이 되었을 지 몰라도 과거의 한 때는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어쨌든 청부살인업자, 그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대중 문화 속에 등장하는 청부살인업자는, 특히 주인공인 경우엔 대부분 같은 인간이라는 뜻에서 인간다움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그 인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주인공의 청부살인은 주로 범죄자 같은 악인을 표적으로 삼는다. 살인의 정당성을 주어서 주인공이 저지르는 살인이 가지는 부정성(否定性)을 희석시키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공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주인공에 대한 공감이라는 연료가 없으면 멀리 갈 수 없는 자동차와 같은 존재니까 말이다.


 청부살인업자가 나오는 영화 중에 가장 유명한 오우삼 감독의 '첩혈쌍웅'에 나왔던 주윤발 캐릭터를 생각해 보라. 언제나 마피아의 보스만 표적으로 삼고 거기에 휘말려 한 여가수가 불행하게 시력을 잃게되자 죄책감을 느끼고는 곁에서 끝까지 돌보는 것까지 하지 않던가? 보통은 이렇게 묘사한다. '청부살인업자'란 캐릭터는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살인자'란 단편에서 처음 등장시킨 뒤로, 하드보일드 장르에 단골로 등장했다. 그러나 주인공인 경우엔 그런 비정(非情)함이 잘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괴물을 더욱 괴물로 만들 뿐이니까 말이다.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 '사무라이'에 나왔던, 알랭 드롱이 분했던 킬러가 대표적이다.('사무라이'는 '첩혈쌍웅'의 원본과 같은 영화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 내내 대사 한 마디 없다. 언제나 굳은 침묵으로 무표정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살인을 거리낌 없이 저질러 사회의 예외적 존재가 되는 그는 그 외양으로 인해 더욱 그렇게 된다. 침묵과 무표정은 그를 불가해한 존재로 만든다. 그는 인간일까, 괴물일까? 우리는 궁금하다. 거기에 멜빌은 살인하는 그를 목격했지만 고발하지 않는 여인과의 관계를 통해 알랭 드롱이 인간이라는 것을 슬쩍 드러낸다. 비록 지금은 괴물이지만 마음 한 편엔 인간다움이 있어, 언젠가 인간이 되려 하는 괴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그의 죽음이 씁쓸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고독'이라고 제목을 붙였을만큼. 이처럼 비록 일말이나마 인간다움을 품고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독자는 그를 끝까지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온통 검게 칠해진 페이지만 있는 책을 읽으려는 사람이 없듯이.



 이시모치 아사미의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는 제목에 나와 있듯 청부살인업자가 주인공이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청부살인을 한다. 한 번 의뢰를 받아 청부살인을 하면 650만엔이 그의 수중에 떨어진다. 그가 직접 의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의뢰를 받는 이는 따로 있다. 그 일은 현재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는 이가 맡고 있는데, 그와 주인공이 직접 연결되지는 않는다. 중간에서 둘을 이어주는 다리 같은 존재가 또 하나 있다. 그는 현재 지방 공무원이다. 의뢰를 맡는 사람은 그 중간에 있는 전달자만 만나고, 주인공 역시 그 전달자만 만난다. 이렇게 하면 의뢰를 받는 자와 청부살인을 하는 자 중 누가 체포되더라도 나머지 한 사람은 보호받을 수 있다. 물론 중간 전달자가 체포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하지만 그는 의뢰도, 청부살인도 하지 않고 단순히 의뢰 받은 것과 청부살인업자가 살인을 맡을 것인지 말 것인지만 전할 뿐이니 법망에 걸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무튼 주인공이 한 축을 맡고 있는 청부살인은 이런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는 단편집이다. 주인공이 의뢰를 받아 청부살인을 하는 게 주된 줄거리인 단편이 모두 일곱 개 실려 있다. 맞다. 당신은 이 책에서 일곱 번의 청부살인을 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주인공에게 살해당하는 사람들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마피아의 보스이거나 범죄자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다. 우리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그런 사람들을 주인공은 냉정하게 살해한다. 오로지 돈을 위해서. 그리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살해당하는 것을 보는 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그렇다고 청부살인업자가 어떤 인간다움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어서 한층 더 불편하다.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는 독특한 컨셉의 소설을 가지고 있다. 청부살인업자에 대한 것은 아니다. 그가 탐정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게 그렇다. 이 소설은 '미스터리'가 주를 이룬다. 주인공은 청부살인을 하기 위해 목표 대상을 스토킹 하는데(이런 식으로 보다 잘 죽이기 위한 정보를 모으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그의 이해는 어디까지나 원활한 살인에 맞춰져 있다.) , 그 때마다 목표물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수수께끼 행동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이를테면 첫 단편에서 타겟인 여성이 밤마다 몰래 나와 검은 물을 버리는 것과 같은. 


 그는 타겟들이 그러는 이유를 죽여 놓고 난 뒤 추리 한다. 이처럼 소설은 주인공이 의뢰를 받고, 타겟을 따라다니다 수상한 행동을 목격한 뒤 처리하고 그 행동의 이유에 대해 추리한 것을 중간 전달자에게 말해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미스터리가 소소한 것이기에 흔히 말하는 일상 미스터리 계에 넣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렇게 보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청부살인업자가 탐정인 일상 미스터리 계 소설이라고 말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 두 가지가 조합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시도는 매우 신선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그리 성공적이진 않다. 오로지 돈을 위해 별로 죄도 없는 사람을 살해하고, 살인에 비하자면 하찮은 것에 불과한 수수께끼를 목숨보다 더 비중을 두고 생각한다라? 잘 납득되지 않는 설정이다. 더구나 주인공은 타겟에게 절대 감정이입 하지 않으려고 의뢰인의 신원도, 그 동기도 묻지 않는다. 그런데 사소한 행동에는 왜 의문을 품는 것일까? 그것을 헤아리려면 상대의 입장에 서야 하니, 그 또한 감정이입의 요소가 아니던가? 그러므로 모순으로 보인다. 그저 미스터리를 가져오기 위해 설정된 호기심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무리한 설정이라고 해야 하겠다. 그리고 이런 걸 설정했다는 자체에서 난 작가의 윤리 의식 역시 조금 꼬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작가의 모습은 내게 마치 잠자리 날개를 뜯으면서 왜 잠자리에겐 날개가 네 개밖에 없고 이렇게 쉽게 뜯겨나갈까 궁금해하는 아이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주인공에게 애인이 있는데, 그 애인이 주인공이 청부살인업자라는 걸 알면서도 사귀고 있다는 점이다. 뭐, 이 넓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소설에 대놓고 나오니 상식적인 견지에서 얼른 납득이 안 된다.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는 평범한 제목처럼 소설의 주역들은 대부분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떤 특별한 계기나 뚜렷한 동기 없이 어쩌다 청부살인업계로 흘러든 사람들이다.(주인공이 과거를 술회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이런 회사에서 일하고 있더라 하는 느낌이다. 소설은 지속적으로 살인청부업계가 그리 먼 세상이 아님을 강조한다. 치과의사, 공무원, 중소기업 경영 컨설턴트, 만화가가 이들의 직업인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언제든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렇게 소설은 평범함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살인청부도 그런 평범한 세계 속에 속한다고 알린다. 주인공의 애인이 그러하듯, 우리와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이들이 살인청부를 쉽게 용납하는 것처럼.


 과연 여기에 문제는 없는 것인가? 소설을 읽으며 나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돈 때문에 이토록 쉽게 사라지는데도 모두들 그걸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이란 과연 어떤 곳인가? 타인의 삶을 하찮게 바라보는 곳.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허다한 갑질 사태를 볼 때 드는 마음 그대로 바로 그런 곳이 지옥은 아닐까? 타인에 대하여 정작 궁금해하고 헤아려야 할 대상은 삶이라는 것이건만, 본질이 되는 삶은 홀연히 사라지고 삶에 견주자면 한없이 사소할 행동의 의미에만 천착하는 건 그저 내게 흥미 있는 것만 취하려는, 그렇게 타인을 피상적으로 소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소설은 바로 여기서 재미를 주려고 하는데, 이것은 그대로 남의 삶을 하찮게 만드는 것에서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니 이런 태도가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소설에도 어느 정도 윤리적 틀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윤리적 틀의 주된 축은 타자의 삶에 대한 존중이다. 다른 소설이나 영화에서 등장한 청부살인업자 주인공들이 가졌던 인간다움도 근본엔 그것이 있었다. 타자의 삶이란 결코 나만을 위한 소비의 대상이 아니다. 하물며 장르 소설이라 하여도 그러하다. 이 소설은 2017년에 나왔다. 이런 소설의 등장이 당시 일본 사회의 기저에 흐르는 공기와 어쩌면 관련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최근에 나오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이런 것을 느꼈기에 나중에 한 번 제대로 알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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